성곽(城郭)
성곽은 밖을 막고 안을 호위하기 위한 것이니, 국가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곽에는 제도가 있고 역사(役事)에는 시기가 있으므로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큰 도성은 국도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고, 읍(邑)에는 백치(百雉 1치(雉)는 길이가 3장(丈), 높이가 1장)의 성을 쌓지 않는 것이 성곽의 제도이다. 무릇 토목 공사를 함에 있어서는 용성(龍星)이 나타나면 일을 경계하고, 화성(火星)이 나타나면 공사를 일으키고, 수성(水星)이 저녁 때 나타나면 공사에 착수하고, 동지에는 공사를 끝낸다. 이것이 역사에 시기가 있음이다. 성이란 제도를 초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역사란 시기를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재용(財用)을 잘 분배하고, 널빤지와 기둥을 다듬고, 삼태기와 공이를 헤아리고, 흙의 양을 헤아리고, 멀고 가까움을 따지고, 기지(基址)를 측정하고, 성의 두께를 헤아리고, 성 아래에 팔 웅덩이를 따져 보고, 식량을 준비하고, 유사(有司)를 배정하고, 공사의 양을 헤아려 기간을 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공사의 계획에 잘못된 점이 없는 다음에 공사를 하는 것이 옳다. 만약 시기와 제도를 어기고 망령되이 큰 공사를 일으킨다면 이 백성을 애육(愛育)하는 의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은공(隱公)이 중구(中丘)에다 성을 쌓고 낭(郞)에다 성을 쌓되 모두 여름철을 이용하였더니, 《춘추》에서는 그 일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농사를 방해하고 제 시기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공(莊公)은 겨울에 미(郿)에다가 성을 쌓았으니, 비록 제 시기에 맞추어 한 일이었으나 《춘추》에서는 그 일을 기록하고 또 보리와 벼가 크게 흉년들었음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장공이 그 해의 풍흉을 돌보지 않고 경솔하게 민력을 불필요한 일에 이용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전하는 개국 초에 송경(松京 개성(開城))의 옛 도읍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옛 성이 허물어지고 또 그 기지가 넓고도 멀어서 방수(防守)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염려하여 옛기지를 3분의 1로 줄여서 성을 쌓았던 것이다.
신이 일찍이 《맹자》를 읽어 보건대, 공손추하(公孫丑下)에,
“지형의 유리함이 인심의 화목한 것보다 못하다.”
하였고, 《당사(唐史)》에는 또,
“이적(李勣)은 은연히 장성(長城)과 같았다.”
고 하였은즉, 예부터 국가의 안녕은 한갓 성지(城池)의 험고(險固)만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하는 현명한 인재를 임용하고, 생민을 애육하여 인심으로써 성을 삼으니, 정치의 근본을 안다고 하겠다.
城郭
城郭。所以捍外而衛內者也。有國家者所不得已。然城有制役有時。不可不謹也。大都不過三國之一。邑無百雉之城。制也。凡土工。龍見而戒事。火見而致用。水昏正而栽。日至而畢。時也。城不踰制。役不違時。又當分財用。平板榦。稱畚築。程土物。議遠邇。略基址。揣厚薄。任溝洫。具餱糧。度有司。量功命日。不愆于素。然後爲之可也。苟失其時制。妄興大作。其如愛養斯民之義何哉。隱公城中丘。城郞。而皆以夏。春秋書之。以其妨農務而非時也。莊公冬築郿。雖得其時。春秋書之。又書大無麥禾。所以著莊公不視歲之豐凶。而輕用民力於其所不必爲也。惟我殿下開國之初。因松京故都。慮其舊城頹圮。且其基闊遠。難於防守。約舊基三分之一而築之。臣嘗讀孟子曰。地利不如人和。唐史又謂李勣隱然若長城。則自古國家之安。非徒恃於城池之險固也。殿下任用賢材。愛養生民。以人心爲城。亦可謂知所本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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