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정도전 관련 기록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해제(解題)
홍이섭
김종서(金宗瑞) 등이 문종(文宗) 2년 임신(壬申) 2월 갑신(甲申)에 신찬(新撰)
《고려사절요》의 진전(進箋)에서 기전체(紀傳體)의 《고려사(高麗史)》와
편년체(偏年體)의 《고려사절요》의 서로의 장단점을 말하며,
되도록 《고려사》의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음을 말하고 있다.(문종실록 제 12권 참작)
즉 선행적(先行的) 왕조사(王朝史)로의 고려(高麗) 일대(一代)의 사(史)를
쇠망사관(衰亡史觀)에서 보려던 조선 초의 편견을 벗어나 제도와 치민(治民)을 바로잡는
발전사관(發展史觀)에서 정비 이해하려는 데 힘쓰고 있었음을 보겠다.
《고려사》139권에 비하여 《절요(節要)》 35권은
기록된 양으로 보아 간략한 편이라 하겠으나, 《절요》에만 담긴 자료가 많은데서
서로 서술 체제만이 다를 뿐 아니라 고려시대를 이해하려는 데 차이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의 왕권을 배제하고 들어 선 신왕조(新王朝) 이씨 조정에서는
상호의 사적(史的) 계수관계(繼受關係)를 합리화하는 데서 먼저 고려의 사(史)를 편찬
정리함이 곧 위정(爲政)의 중한 일이어서 조선태조(朝鮮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개국(開國 임신 1392년) 10월 13일(신유)에 《고려사》의 편찬을 명하였고,
태조(太祖) 4년에는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사》27권을 찬진(撰進)하였으나,
정도전의 곡필(曲筆)로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이 각기 《고려사》의 개수(改修)를 명하여
유관(柳觀)ㆍ윤회(尹淮)등이 수교(讎校)를 마치기는 세종(世宗) 6년 8월 11일(계축)이었다.
이에는 중간에 세종대왕(世宗大王) 자신이 몸소 《고려사》개수(改修)에 있어서는
고려실록(高麗實錄)에 따라 직필(直筆)하게 한 데 따랐다.
이에 권제(權踶)ㆍ안지(安止)에 의한 《개수 고려사(改修高麗史)가 세종 28년에
주인(鑄印)되었으나, 수사(修史)에 불공(不公) 함이 있다 하여 반포를 정지하고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았던 권제ㆍ안지ㆍ남수문(南秀文)의 고신(告身)을 추탈(追奪)ㆍ
삭탈(削奪)까지 하고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에게 개찬(改撰)을 명하게 되었다.
사관(史官)들과 세종 31년(1449) 2월에 김종서는 지춘추관사(知春秋官事)로
《고려사》의 체재를 의논하였다. 이에 어효첨(魚孝瞻)ㆍ김계희(金係熙) 등은
이미 편찬된 편년체(編年體)의 《고려사》를 교정하자 하고, 신석조(辛碩祖)ㆍ최항(崔恒)ㆍ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양성지(梁誠之)ㆍ유성원(柳誠源) 등은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로 개찬(改撰)한 뒤, 보완된 편년사(編年史)를 따로 편하고자 하여
기전체(紀傳體) 《고려사》가 문종(文宗) 원년 (1451) 8월 25일(경인)에 완성되었고,
5개월 뒤인 문종(文宗) 2년 2월 20일(갑신) 《고려사절요》가 제진(制進)되었음을 볼 때,
두 책의 관계가 깊은 것을 짐작하게 하지만, 비교ㆍ문헌학적인 인식ㆍ검토가 없이
상호 보완의 자료로만 보는 데에 《고려사》연구에 아직 미흡함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때에 《절요(節要)》의 국역(國譯) 교주(校主)에 원문을 부간(附刊)함은
우선 난해(難解)의 고전(古典)을 민족 대중(民族大衆)에게 개방(開放)함과 동시에
용이하게 해독하는 데서 불가분의 맥락(脈絡)을 지니고 있는 《고려사》와의 대비에서
한국사 이해에 있어 중추를 이루는 고려시대 인식에 새로운 빛이 될 것으로 본다.
이번 국역에는 1959년 고전간행회편(古典刊行會編) 동국문화사간(東國文化社刊)의
영인본(影印本)을 사용하였다. 《고려사절요》는 원래 54질이 집현전(集賢殿)에
수장(收藏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권 제7단종 원년 계유 7월 정축)되었으나,
1932년 전조선 총독부(前朝鮮總督府)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규장각수장(奎章閣收藏 지금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본을
영인(影印 조선사료총간 제1(朝鮮史料叢刊第一))하였는데 권(卷) 5, 6, 18이 빠졌으므로,
일본 명고옥(名古屋)에 있는 봉좌문고(蓬佐文庫)에 완본(完本)이 있음이 알려져
1938년 조선사료총간 제18(朝鮮史料叢刊第十八)《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보간(補刊)에서
앞서 빠진 3권과 진전(進箋)ㆍ범례(凡例)ㆍ수사관(修史官)ㆍ목록(目錄)을
영인 보완(影印補完)하게 되었다.
(일본 봉좌문고 수장(日本蓬佐文庫收藏) 《고려사절요》는 1960년 일본 동경에 있는
학습원(學習院) 동양문화연구소(東洋文化硏究所)에서 영인 간행(影印刊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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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 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辛禑一) 을묘 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년 | 낙민 | 16.10.10 |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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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해제(解題) | 낙민 | 16.09.09 | 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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