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태조실록 1권, 총서 110번째기사 / 태조의 공적을 치하하는 교서
- 4월,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교서(敎書)를 공신(功臣)에게 내려 그 공로를 칭찬하고 내구마(內廐馬) 1필, 백금(白金) 50냥, 비단과 명주 각 5단(端), 금대(金帶) 한 개를 내리고 이내 내전(內殿)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태조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중사(中使) 궁중에서 왕명을 전하는 내시( 內侍). "아아! 비상(非常)한...
- 3. 태조실록 1권, 총서 120번째기사 / 태조를 참소하는 말이 돌자 정도전 등과 거취를 논의하다
- 태조가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조인옥(趙仁沃)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卿) 등과 함께 왕실(王室)에 있는 힘껏 협력하였는데도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내가 마땅히 동쪽으로 돌아가서 이를 피하겠다." 하면서, 먼저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행장을 재촉하여 장차 떠나려 하니, 도전(道傳) 등이 말하기를, "공(公) 의 한 몸은 ...
- 4. 태조실록 1권, 총서 129번째기사 / 세자가 명에서 돌아오다. 정몽주가 태조를 견제하기 위해 태조의 측근을 탄핵하다
- 司左使) 조준(趙浚)·전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전 판서(判書) 윤소종(尹紹宗)·전 판사(判事) 남재(南在)·청주 목사(淸州牧使) 조박(趙璞)을 탄핵하니, 공양왕이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렸다. 몽주(夢周)가 중간에서 이를 선동(煽動)하여 조준 등 6인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그 무리 김귀련(金龜聯)·이반(李蟠) ...
- 5. 태조실록 1권, 총서 131번째기사 /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 성헌(省憲)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성헌(省憲) 대간(臺諫).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 6. 태조실록 1권, 총서 133번째기사 / 공양왕이 태조의 집에 가서 위문하다. 조인옥 등 52명이 태조를 추대하기로 결정하다
- 붙좇은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趙璞) 등 52인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기를 모 의했지만, 그러나, 태조의 진노(震怒)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들어가서 강비(康妃)에게 고하여 태조에게 전달되도록 하였으나, 강비도 또한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남은 등에게 일렀다. "마땅히 즉시 의식(儀式)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심을 권고해야 될 것이다."
- 7.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 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
- 8.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8일 정유 2번째기사 / 대소 신료가 태조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명의 예부에 사신을 보내자고 청하다
- 하여, 이에 훈신(勳臣) 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는 요(瑤)에게 참소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논핵(論劾)하여 해칠 것을 꾀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여 몽주(夢周)를 함께 목 베었습니다.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하는 요(瑤)가 그래도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또 살육(殺戮)할 것을 꾀...
- 9.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0일 기해 1번째기사 / 정당 문학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사의 기무와 상서사의 임무를 관여케 하다
- 전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을 명하여 도평의사사 기무(機務)에 참의(參議)하게 하고 상서사 사(尙瑞司事)를 참장(參掌)하게 하였다.
- 10.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6일 을사 1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문하 찬성사 김주가 시세에 따라 행동한다고 탄핵하자 파직시키다
- 의논이 다르며, 또 봉화군(奉化君) 정도전(鄭道傳)이 바른말[直言]로 소(疏)를 올린 일로써 흔단(釁端)을 만들고 사건을 일으킨다고 하여, 두세 번이나 죄주기를 청하니, 그가 시세(時勢)에 휩쓸려 시비(是非)를 전도(顚倒)시킴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청하옵건대, 그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외방(外方)으로 귀양보내소서." 임금이 다만 관직만 파면하게 하였다.
- 11.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8일 정미 3번째기사 / 태조의 즉위 교서
- 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교서(敎書)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우현보(禹玄寶)와 오래 된 원한이 있었으므로, 무릇 우씨(禹氏)의 한집안을 모함하는 것은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실정(實情)에는 맞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10여 인으로써 원례(援例)로 삼아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여, 조목마다 자질구레하게 획책하여 임금에게 바쳤...
- 12.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8일 정미 5번째기사 / 홍영통·안종원·배극렴·조준·이화·윤호·정도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判八衛事) 상락군(上洛君)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 봉화군(奉化君)으로, 정희계(鄭 熙啓)를 좌명 공신(佐命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팔위 상장군(八衛上將軍) 계림군(雞林君)으로, 이지란(李之蘭)을 보조 공신(補祚功臣) 참찬문하부사 의흥친군위 절...
- 13.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30일 기유 1번째기사 / 도당에서 이색 등을 도서 지방으로 귀양보내도록 청했으나 내륙으로 유배토록 하다
- (田易)가 가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처음 내리매, 정도전(鄭道傳)이 이색(李穡)을 자연도(紫燕島)로 귀양보내고자 하여 경기 계정사(京畿計程使) 허주(許周)로 하여금 잡아 보내게 하였다.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어렵게 여겨, 그 구처(區處)할 것을 물으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 조금 뒤...
- 14.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0일 기사 1번째기사 / 서자 이방석을 왕세자로 정하다
- 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李芳蕃)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 15.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0일 기사 2번째기사 / 개국 공신의 위차를 정하다
- 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사길(張思吉)·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인옥(趙仁沃)...
- 16.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3일 임신 2번째기사 / 이숭인·이종학·우홍수의 졸기
- 게 하고, 인쇄하여 세상에 반행(頒行)시켰다. 처음에 정도전과 친구로 삼아 종유(從遊)한 지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정도전이 후일에 조준에게 친밀히 하게 되 어, 조준이 숭인을 미워함을 알고서는 도리어 〈숭인을〉 몰래 험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종학(種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영특하고 호걸스러워서, ...
- 17.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16일 갑오 2번째기사 / 공신 도감에서 개국 공신의 포상 규정을 상언하니 윤허하다
- 20결, 노비 30구를 내려 주고,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에게는 전지 2백 결, 노비 25구를 내려 주고, 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정탁(鄭擢)에게는 전지 1백 70결, 노비 20구를 내려 주고, 정총(鄭摠)·오몽을(吳蒙乙)·김인찬(金仁贊)에게는 전지 1백 50결, 노비 15구를...
- 18.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6일 갑진 2번째기사 / 배극렴 등이 여러 왕자들에게 규정된 과전 외의 전지를 더 주도록 청하다
- 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아뢰었다. "왕자 제군(王子諸君)들은 의복·거마(車馬)·추종(騶從)을 갖추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며, 용도(用度)를 넉넉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비옵건대, 본과(本科) 외에 전지(田地)를 더 내 려 주소서." 추종(騶從) 수행하는 종. 임금이 조용히 잠저(潛邸...
- 19.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3일 신유 1번째기사 / 조준·정도전 등에게 《고려사》를 수찬케 하다
-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정총(鄭摠)·박의중(朴宜中)·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소종(尹紹宗)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 20.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25일 계유 2번째기사 / 정도전이 명나라에 가지고 간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표문
-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을 보내어 중국 남경[京師]에 가서 사은(謝恩)하고 말 60필을 바치게 하였다. 그 표문(表文)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조반(趙胖)이 남경에서 돌아와 예부(禮部)의 차자(箚子)를 가지고 와서 삼가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았는데, 고유(誥諭)하심이 간절하고 지극하셨습니다. 신은 온 나라 신민과 더불어 감격함을 이길 수 없...
- 21.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 조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 仲和)를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로 삼고, 정도전(鄭道傳)과 최영지(崔永沚)를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삼고, 우인열(禹仁烈)과 유만수(柳蔓殊)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고, 정희계(鄭熙啓)를 판팔위사(判八衛事)로 삼고, 조임(趙琳)을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다만 문하부(門下府)·삼사(三司)·중추원(中樞院) 정원(正員...
- 22.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 좌시중 조준이 전문을 올려 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다
- 의 뜻을 맞추어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신과 정도전·남은을 전하의 심복(心腹)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틈을 타 계책을 부려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어 먼저 내쫓고, 다음에 전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병을 무릅쓰고 수레를 타고 길을 갑절이나 빨리 하여 돌아왔습니다. 4월 4일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여서 정몽주가 참형을 당하였...
- 23.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3월 20일 을축 1번째기사 / 사은사 정도전 등이 경사에서 돌아오다
- 사은사(謝恩使) 정도전(鄭道傳)과 하정사(賀正使) 노숭(盧嵩)·조인옥(趙仁沃)이 중국 서울에서 돌아왔다.
- 24.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3월 20일 을축 2번째기사 / 중국에 명성이 알려진 최영지 대신 이염을 경사로 보내다
- 영지(崔永沚)가 중국에 가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니, 정도전이 영지(永沚)를 만나서 말하기를, "내가 임금님을 뵙게 되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돌아오게 할 것이니, 마땅히 잠깐 머물고 있으시오." 하였다. 도전이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영지는 오랫동안 서북면(西北面)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중국에 명성이 알려졌사오니, 마땅히 경솔히 보낼 수는 없습니다....
- 25.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7월 5일 무신 3번째기사 / 문하 시랑찬성사 정도전을 동북면 도안무사로 삼다
-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東北面)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았다.
- 26.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7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 정도전이 몽금척·수보록·납씨곡·궁수분곡·정동방곡 등의 악장을 지어 바치다
- 비의(非衣) 배극렴(裵克廉). 삼전 삼읍(三奠三邑) 정도전(鄭道傳). 1. 전하께서 처음 왕위에 오르시매, 상법(常法)을 만들고 기강(紀綱)을 베풀어 백성들과 더불어 혁신(革新)하게 되니 칭송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 큰 것을 들어 말한다면, 언로(言路)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예악(禮樂)을 정하였습니다. 궁궐은 엄하여 아홉 겹이...
- 27.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8월 2일 을해 2번째기사 / 정도전 대신 이지란을 동북면 도안무사로 삼다
- 이지란(李之蘭)으로 정도전을 대신하여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로 삼았다.
- 28.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8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 정도전이 사시수수도를 바치다
- 찬성사(贊成事) 정도전(鄭道傳)이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를 만들어 바치었다.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춘하 추동(春夏秋冬) 사시의 사냥하는 것을 그린 그림.
- 29.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3일 을묘 1번째기사 / 안렴사를 폐지하고 관찰출척사를 회복시키다. 한상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권중화(權仲和)를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정도전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유만수(柳蔓殊)와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남은(南誾)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남재(南在)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이직(李稷)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이근(李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한상경(韓尙敬)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 30.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7일 기미 2번째기사 / 병조 전서 윤소종의 졸기
-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소종이 정도전 등과 더불어 힘써 청하여 이것을 개혁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좌상시 경연 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으로 임명되었다. 공양왕이 중[僧] 찬영(粲英)을 맞아 와서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므로, 소(疏)를 올려 이를 말렸더니, 공 양왕이 불평(不平)을 품고서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조금 뒤에 금주(錦州)로 귀양...
- 31.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0월 27일 기해 3번째기사 / 관습 도감 판사 정도전이 전악서의 무공방을 거느리고 몽금척 등의 새 악곡을 연주하다
- 도평의사사에서 임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관습 도감(慣習都監) 판사(判事) 정도전(鄭道傳)·왕강(王康)과 부판사(副判事) 정사척(鄭士倜)이 전악서(典樂署)의 무공방(武工房)을 거느리고 문덕(文德)·무공(武功)·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 등 새 음악을 올렸다.
- 32.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1월 9일 경술 1번째기사 / 무략이 있는 사람을 뽑아 《진도》를 가르치다
- 판삼사사 정도전이 임금에게 말씀을 올려, 여러 절제사들의 거느린 군사 중에서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뽑아 《진도(陣圖)》를 가르치게 하였다.
- 33.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1월 12일 계축 2번째기사 / 정도전이 군사를 집합시켜 《진도》 대로 훈련시키다
- 정도전이 군사를 구정(毬庭)에 모아 진도(陣圖)를 설치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고각(鼓角)·기휘(旗麾)·좌작 진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익히게 하였다.
- 34.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2월 11일 임오 1번째기사 / 하윤의 상언대로 계룡산의 신도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다시 물색케 하다
- 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南在) 등으로 하여금 하윤과 더불어 참고하게 하고, 또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봉상시(奉常寺)의 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山水)가 오고 간 것으로써 상고해 보니 길흉(吉凶)이 모두 맞았으므로, 이에...
- 35.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1월 27일 정묘 1번째기사 /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과 장수들이 쇠 갑옷을 입고 둑에 제사지내다
-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둑(纛)에 제사지내게 하니, 도전(道傳)과 제사에 참여한 장사(將士)들이 모두 철갑(鐵甲) 차림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난 뒤에 천호(千戶) 유서봉(兪瑞鳳)이 갑자기 죽었다. 태뢰(太牢)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는 일.
- 36.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14일 갑신 3번째기사 / 하윤 등 11인에게 역대 현인들의 비결을 상고하여 요점을 뽑아 바치라고 명하다
- 중(檢校門下侍中) 이무방(李茂方)·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대학사(大學士) 민제(閔霽)·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은(南誾)·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검교 대학사(檢校大學士) 권근(權近)·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이직(李稷)·대사헌 이근 (李懃) 등 10인에게 명하여, 좌도 도관찰사(左道...
- 37.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 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
-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 령(各領)이 있으니...
- 38.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3일 임인 1번째기사 / 좌시중 조준을 5도 도총제사로, 판삼사사 정도전을 3도 도총제사로 삼다
- 임금이 수창궁에 계시었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을 교주(交州)·강릉(江陵)·서해(西海)·경기좌·우(京畿左右) 5도(道)의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을 경상·전라·양광 3도의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았다.
- 39.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11일 경술 1번째기사 / 수미포에서 《오군진도》대로 군사 훈련을 하다. 정도전과 사냥한 동물의 제향을 논의하다
- 이 임진(臨津)의 수미포(壽美浦)에 거둥하여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오군진도(五軍陣圖) 를 연습하게 하고는, 또 말하였다. 오군진도(五軍陣圖) 전(前)·후(後)·좌(左)·우(右)·중(中)의 오군(五軍)의 진도(陣圖). "내일에 내가 장차 친히 관람할 것이다." 첨절제사(僉節制使) 진충귀(陳忠貴)와 대장군 이귀령(李貴齡)을 중군 사마(中軍司馬)로 삼고, 여러 절제사(節制使)...
- 40.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2일 신묘 2번째기사 / 정도전이 임금에게 매일 장상들을 불러 군국의 일을 의논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
-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상언(上言)하였다. "옛날 성주(成周) 시대에는 인심이 충후(忠厚)하였지마는, 그러나 무왕이 병환이 났는데, 주공(周公)이 말하기를, ‘삼가 점치지 말라.’ 하고는, 자신이 무왕을 대신하여 죽고자 하였으니, 대개 새로 건국된 나라에 인심(人心)이 요동할까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나와 정사(政事)를 청단(聽斷) 하지 ...
- 41.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5월 30일 무진 1번째기사 /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바치다
- 판삼사사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을 지어서 바치니, 임금이 이를 관람하고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구마(廐馬)와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백은(白銀)을 내려 주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조선(朝鮮)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規範體系書). 내용은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안국본(安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 등으로 나누어...
- 42.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6월 24일 임진 3번째기사 / 정도전이 부병 시위 제도에 관한 저술을 하다
-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이 역대 부병(府兵)의 시위하는 제도를 엮었는데, 부병들의 시위하는 폐단과 지금 시행하는 부병들의 연혁(沿革) 및 해야 할 일들을 논하고, 도(圖)를 만들어서 올리었다.
- 43.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7월 12일 기유 1번째기사 / 음양 산정 도감을 설치하다
- 권중화(權仲和)와 판삼사사 정도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삼사 우복야 남은(南誾)·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하륜(河崙)·중추원 학사 이직(李稷)·대사헌 이근(李懃)·평원군(平原君) 이서(李舒)로 하여금 서운 관원과 함께 지리와 도참(圖讖)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서 참고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 44.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12일 기묘 2번째기사 / 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판삼사사 정도전이 국가 치란은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다
-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말하였다. "1.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1.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 45.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9월 9일 병오 2번째기사 /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종묘·사직·궁궐·시장 등의 터를 정하게 하다
-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 정도전·청성백 심덕부·참찬 문하부사 김주·좌복야 남은·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전조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 46.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9월 23일 경신 1번째기사 / 한양에서 정도전 등은 돌아오고, 심덕부와 김주는 남아 관리하다
- 판삼사사 정도전 등은 한양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참찬문하부사 김주(金湊)는 남아서 〈궁궐과 기타 도시의〉 경영을 관리하였다.
- 47.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0월 10일 병자 1번째기사 / 시중을 정승으로 고치다. 성격이 강직한 대사헌 이서를 파직시키다
- 시중(侍中)을 정승(政丞)으로 고치었다. 대사헌 이서를 파직하여 안평군(安平君)으로 봉하고, 전 화령 윤(和寧尹) 박경(朴經)으로 대체하였다. 이서는 의기와 지조가 있어 언제든지 바른말을 하였다.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임금과 면대하여 거의 아첨하는 일이 없었다. 파직하려고 할 때, 정도전이 애써서 구해내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다.
- 48.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1월 4일 경자 2번째기사 / 병권과 정권 장악한 조준·정도전을 비판한 변중량 등을 국문하다
- 권은 재상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준·정도전·남은 등이 병권 을 장악하고 또 정권을 장악하니 실로 좋지 못하다." 〈그후〉 중량이 또 이 말을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에게 말했다. 화가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이 중량을 불러서 물은즉, 중량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였다. "박포(朴苞)도 또한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하여 여러 번 별의 변고가 일어...
- 49.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2월 3일 무진 1번째기사 / 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황천 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고한 고유문
- 임금이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 나이다...
- 50.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1월 25일 경신 1번째기사 /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를 편찬하여 바치다. 그들에게 내린 교서
-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과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태조(太朝)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치니, 임금이 친히 보고 정도전에게 교서(敎書)를 내리었다. "듣건대, 임금이란 것은 〈하늘의〉 덕(德)을 대신하여 나라를 가지고, 반드시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역사를 써서 책을 만드는 것...
- 51.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3월 4일 정유 1번째기사 / 과주에 거둥하여 수릉 자리를 물색하니, 정도전이 눈물로 간언하다
-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리었다. 정도전이 〈임금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자리를 물색하 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말하였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
- 52.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3월 9일 임인 1번째기사 / 간관 이고 등이 농사철이라 하여 군사 점고를 정지할 것을 아뢰다
- 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을 불러서 말하였다. "이제 간관(諫官)이 상서하여, 농사철을 당하여 군사의 점고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간관의 말은 비록 귀에 거슬려도 받아들이는 것인데, 하물며 백성들에 관한 일이겠느냐? 나도 자못 옳게 여기나, 다만 지금 좌우 정승이 모두 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보지 못하니, 경이 그...
- 53.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3월 13일 병오 2번째기사 / 세자 이사 정도전이 《맹자》를 강의하다
- 세자 이사(世子貳師) 정도전(鄭道傳)이 《맹자(孟子)》를 강(講)하였는데, "달아 본 뒤에야 가볍고 무거운 것을 안다."는 대목에 이르러 말하였다. "마음이 저울 같습니다. 저울눈[衡量]이 작으면 냥(兩)이 되고, 저울눈이 크면 근(斤)이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것을 한꺼번에 달면 근량이 섞입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것을 각각 달아 본 뒤에야 물건의 경 중과 근량을 ...
- 54.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3월 20일 계축 2번째기사 / 새 궁궐의 양청에서 주연을 베풀다
- 양청(涼廳)에 주연(酒宴)을 베풀었는데, 남양백(南陽伯) 홍영통(洪永通)과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잠저(潛邸) 때의 친구들로서 참예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시(詩)를 지어 올리었다. "금원(禁院)에 봄빛은 깊고 꽃은 한창인데 옛친구 불러서 술잔을 드니 하늘마저 때에 맞는 비를 내리어 이 몸 또한 우로 (雨露)의 은택을 깨달았도다."
- 55.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4월 24일 정해 1번째기사 / 천변으로 인하여 재상들에게 구언하는 교서
-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교서를 짓게 하였으니, 그 교서는 이러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양기(陽氣)가 한창인 이달에 이러한 비바람의 재변이 있어 변고가 보통이 아니니, 내가 심히 두려워하노라. 사람의 하는 일이 옳고 그름에 따라 하늘이 재앙을 내리기도 하고 상서를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옛날 슬기로운 임금들은 천재를 만날 때마다 반...
- 56.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6월 6일 무진 4번째기사 / 판삼사사 정도전이 《경제문감》을 저술해 올리다
-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여 올리었다.
- 57.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7월 11일 임인 3번째기사 / 판삼사사 정도전 등에게 광주에 가서 수릉을 살피게 하다
- 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과 좌사 남재(南在)와 참지문하 남은(南誾)과 중추원 사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에 가서 수릉(壽陵)을 살피게 하였다.
- 58.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7월 17일 무신 2번째기사 / 좌우 정승 조준과 김사형,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다
-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문충보(文忠甫)가 바친 말 1필씩을 각각 하사하였다.
- 59.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9월 22일 계축 1번째기사 /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침실 벽에 쓸 경계가 될 말을 모아 올리게 하다
-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새 대궐의 침실(寢室) 사면의 벽 위에 본받을 만하고 경계될 만한 훈계를 쓰고자 하니, 경서와 사서에 있는 좋은 말들을 모아서 올리라고 하였다.
- 60.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윤9월 13일 갑술 1번째기사 / 도성 조축 도감을 설치하고 그 직제를 정하다.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다
- 처음으로 도성 조축 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어 판사·부판사·사(使)·부사(副使)·판관·녹사 들을 임명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 61.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5일 을미 1번째기사 / 제례를 마친 후 중외의 조하를 받고 국정 쇄신의 내용을 담은 교서를 내리다
- 일을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하여 우리 조종께서도 즐기실 것이니, 내 심히 기뻐하는 바이다." 하고, 좌정승 조준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말을 하사하면서, "경 등은 비록 제향에는 참예하지 않았으나, 종묘의 예식은 모두 경 등이 정한 것이었다." 하고, 정도전에게 금으로 장식한 각대(角帶) 하나를 더 주면서, "이제 아악(雅樂)을 들어보니 경의 공이 적지 않았다." 하였다.
- 62.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
-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 殿)이라...
- 63.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14일 갑진 1번째기사 /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 때문에 대신들에게 요여를 내려 주다
-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판문하부사 권중화·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대[竹]로 만든 요여(腰輿) 하나씩을 내려 주고, 기로 제신(耆老諸臣)에게도 내려 주었는데, 대체로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 64.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30일 경신 1번째기사 / 밤에 정도전 등 훈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다
- 밤에 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 등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혔다. 주연(酒宴)이 한창 벌어질 무렵에 임금이 정도전에게 하는 말이,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경 등의 힘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대에까지 이르기를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떻게 해야 나라가 ...
- 65.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2월 20일 기유 1번째기사 / 좌우 정승 조준·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칼 한자루씩을 주다
-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판삼사사 정도전에게 각각 칼 한 자루씩을 주었다.
- 66.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2월 25일 갑인 1번째기사 / 한산백 이색에게 잔치를 베풀며 문덕곡과 무공곡을 듣다
- 임금이 한산백 이색에게 잔치를 베푸니 판삼사사 정도전도 참예하였다. 임금이 문덕(文德)·무공(武功)의 두 곡조를 듣고서 말하기를, "노래로 공덕을 칭송한 것이 실로 본정에 지나친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내 심히 부끄럽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서 이런 마음이 계시기에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 67.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1월 1일 경신 1번째기사 / 군신을 거느리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신년 하례후 군신의 조회를 받고 잔치하다
-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즐거워함이 한창일 때에, 광양 부원군(光陽府院君) 이무방(李茂方)이 일어나 춤을 추고,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은 잔을 받들고, "정월 원조는 한 해의 으뜸이며, 시조(始祖)는 일국의 으뜸이니, 으뜸이란 것은 온갖 좋은 것 중에 서도 제일이 되는 것이오라, 나라의 시조는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 진언(進言)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 68.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3월 16일 계유 2번째기사 / 조준과 정도전을 과거 고시관으로 삼다. 정도전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좌정승 조준(趙浚)과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으로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을 삼고, 도승지 민여익(閔汝翼)과 대사성 함부림(咸傅霖)으로 성균 시원(成均試員)을 삼았다. 정도전이 고시관을 사면시키기를 청하였다. 윤허하지 않으니, 굳이 사양하므로 또 윤허하지 아니하니, 민여익도 또한 시원(試員)을 사양하려 하매 윤허하지 않았다.
- 69.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5월 1일 정사 1번째기사 / 고시관이 조유인 등 33인을 뽑아 올렸는데 김익정을 장원으로 삼다
-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서 고시관 조준과 정도전이 뽑은 조유인(曹由仁) 등 33인을 시험보이고, 김익정(金益精)을 제1등으로 삼았다.
- 70.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1일 정유 1번째기사 / 중국 사신 우우 등이 오다. 표문 지은 정도전 등을 보내라는 예부의 자문
- 文)을 지은 자만 보내 오고, 그 표문(表文)을 지은 정도전·정탁은 여태껏 보내 오지 않아서, 지금 다시 상보사승(尙寶司丞) 우우(牛牛)와 내사(內使) 양 첩목아(楊帖木兒)·송패라(宋孛羅)·왕예(王禮) 등 일동과 원래 보냈던 통사(通事) 양첨식(楊添植)의 종인(從人) 김장(金長)으 로 본국에 가서 표문을 지은 정도전 등과 원래에 데리고 오라던 본국 사신 유구(柳玽) 등의 ...
- 71.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7월 19일 갑술 1번째기사 / 표문과 전문 지은 권근·정탁 등을 남경으로 보내며 시말을 주달한 글
-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장계 (狀啓)에 의거하여 정도전의 장고(狀告)에 의하면, 나이는 55세이고 판삼사사(判三司事)의 직(職)에 있사온데, 현재 복창(腹脹)과 각기병증(脚氣病證)이 있다 합니다. 도전은 대사성 정탁이 지은 바 홍무 29년의 하정표(賀正表)를 기초한 것을 고치거나 교정한 일이 없사온데, 이제 거기에 관련되었다 하여 자세하게 살펴 주기를 빌므로,...
- 72.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7월 27일 임오 1번째기사 / 정도전을 봉화백에 봉하고, 설장수를 판삼사사로 삼다
- 정도전(鄭道傳)으로 봉화백(奉化伯)을 봉하고, 설장수(偰長壽)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임명하였다.
- 73.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11월 4일 무오 1번째기사 / 계품사 하윤과 표문을 지은 정탁이 가지고 온 예부의 자문
- 경사(京師 )에 머물러 두고 그 표문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찾아내어 경사로 보내라 했더니, 지금 사신이 돌아왔는데, 조선 국왕이 「정도전은 병이 침중(沈重)해서 조리를 하지 못하고 올 수 없다.」 하고, 단지 표문을 함께 지은 정탁 등 3명만이 경사에 왔기에, 그 연유를 신문하였는데, 각 관원이 수재(秀才)가 표문을 지은 것이 확실하다 하고, 앞서 보낸 글도 그들 이...
- 74.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2월 8일 신묘 1번째기사 / 의안백 화와 좌정승 조준 등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다
-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좌정승 조준(趙浚)·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니, 사은사(謝恩使) 권중화(權仲和) 이하 여러 사신(使臣)과 구육(㡱六)도 이에 참예하였다. 김사형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하였다.
- 75.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2월 22일 을사 1번째기사 / 잡과 시험을 쳐서 명의 8인과 명률 7인을 뽑다
- 고시관(考試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잡과(雜科) 명의(明醫) 8인과 명률(明律) 7인을 시험하여 취하였다.
- 76.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 15일 무진 1번째기사 / 상서사 판사 조준 정도전 등이 내관(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세우기를 청하다
-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이 내관(內官)의 호(號)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현의(賢儀) 2인에 하나는 정1품에 견주고, 하나는 종1품에 견주며, 숙의(淑儀) 2인에 하나는 정2품에 견주고, 하나는 종2품에 견주며, 찬덕(贊德) 3인에 하나는 정3품에 견주고, 둘은 종3품에 견주며, 순성(順成) 3인에 하나는 정4품에 견주고, 둘 은 종4품에 견주며, 상궁(...
- 77.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 26일 기묘 2번째기사 / 좌정승 조준과 정도전·남은 등에게 초립과 옥영자 등을 내려 주다
- 좌정승 조준(趙浚)에게 초립(草笠)과 옥영자(玉纓子)를 내려 주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에게 초립을 내려 주었다.
- 78.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4월 17일 기해 1번째기사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 仁度)· 김약항(金若恒)이 만일 조선에 있다면 반드시 정도전의 우익(羽翼)이 되었을 것이니, 곧 이들로 인하여 이미 화를 불러 그 몸에 미쳤을 것이다. 왕은 살피지어다. 만일 정하게 살피지 않으면 나라의 화가 또 장차 발하여 남에게 손을 빌릴 것이다. 너희 예부는 조선 국왕에게 이문하여 깊이 생각하고 익히 상량하여 삼한을 보전하게 하라’ 하였다." 【휘(諱).】 설 ...
- 79.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4월 20일 임인 1번째기사 / 정도전이 무고하여 양천식·설장수·권근을 탄핵하였으나 임금이 불문에 붙이다
- 탄핵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우우(牛牛) 등을 보내어 정도전(鄭道傳)을 부르니, 도전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근(近)이 임금께 아뢰었다. "표(表)를 짓는 일은 신도 참예하였으니, 원컨대 사신을 따라 경사에 가서 변명을 하겠 습니다." 임금께서 근을 부르는 명령이 없으므로 허락하지 않으니, 근이 두 번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경은 노모(老母)가 있고 또 황제의...
- 80.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4월 21일 계묘 1번째기사 / 정도전에게 명하여 궁궐 감역 제조에게 잔치하다
- 영삼사사(領三司事) 이화(李和)와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궁궐의 감역제조(監役提調)에게 잔치하였다.
- 81.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6월 14일 갑오 1번째기사 / 정도전 남은 등이 군사 일으킬 계획을 했으나 조준이 반대하여 틈이 생기다
-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만들어 바치니, 임금이 좋게 여기어 명하여 훈도관(訓導官)을 두어 가르치고, 각 절제사(節制使)·군관(軍官), 서반 각품 성중 애마(成衆愛馬)로 하여금 《진도(陣圖)》를 강습하고, 또 잘 아는 사람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가서 가르치게 하였다. 당시 정도전(鄭道 傳...
- 82.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7월 2일 신해 1번째기사 / 봉화백 정도전과 의성군 남은에게 안마를 내려 주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에게 안마(鞍馬)를 내려 주었다.
- 83.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9월 7일 병진 1번째기사 / 명나라 사신에게 정도전을 데려 가라고 비밀히 권한 양첨식을 헌사에서 논죄하다
-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히 말하되, 사신에게 정도전(鄭道傳)을 데리고 돌아가라고 권하고, 또 조순(曹恂)에게 필백(匹帛)과 노비(奴婢)로 뇌물하여 그 죄를 면하려고 꾀하였으나, 죽기로 고집하고 승복하지 않아서 옥사(獄辭)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원컨대 가산을 적몰(籍沒)하고 해상(海上)으로 옮기게 하여 종신토록 조반(朝班)에 참예할 수 없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84.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0월 6일 갑신 1번째기사 / 가례 도감을 설치하고 이화·조준·김사형·정도전 등으로 제조로 삼다
- 가례 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여 영삼사사(領三司事) 이화(李和)·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으로 제조(提調)를 삼았다.
- 85.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0월 16일 갑오 3번째기사 / 새로 유비고를 설치하고 봉화백 정도전을 제조관으로 삼다
- 새로 유비고(有備庫)를 설치하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으로 제조관(提調官)을 삼았다.
- 86.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1월 30일 무인 2번째기사 / 정총·김약항·노인도가 명나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정윤보가 전하다. 정총·김약항의 졸기
- 아니라고 노하여 모두 돌려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어 정도전(鄭道傳)을 잡아가려 하였다. 도전(道傳)이 병이 들매, 권근(權近)이 청하기를, "표문을 지은 일에는 실상 신도 참예하였사온데, 신은 지금 잡혀 가는 것이 아니므로 용서받을 수 있고, 잡혀 가지 않는 자들도 또한 의심을 면할 수 있겠지만, 신이 만일 후일에 잡혀 가게 되면 신의 죄는 도리어 중하여질 것입니다."...
- 87.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3일 신사 3번째기사 / 봉화백 정도전이 전에 천거한 효자 순손 등을 서용하기를 청하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임금께 상언(上言)하였다. "여러 번 교지(敎旨)를 내려 각각 효자(孝子)·순손(順孫)과 공정 청렴한 선비를 천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곧 서용하지 않으시니 뒤에 오는 사람을 권하기 어렵습니다. 원하옵건대, 경외(京外)에 서용하옵소서"
- 88.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19일 정유 1번째기사 / 정도전이 의원 오경우·김지연 등을 용서하길 청하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청하였다. "서울 안에 의원이 많지 않으오니, 오경우(吳慶祐)·김지연(金之衍) 등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 89.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22일 경자 1번째기사 / 봉화백 정도전을 동북면 도선무찰리사로 삼는 교서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으로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를 삼고,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조종(祖宗)께서 쌓으신 덕을 이어받아 동방(東方)을 차지한 지가 6년이 되었다.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하려는 정성이 실로 마음에 간절하므로, 이에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사대(四代)를 왕으로 추숭하고 첫머리로 침묘(寢廟 )를...
- 90.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24일 임인 1번째기사 / 이지란을 도병마사로 삼아 동북면 도선무찰리사 정도전의 부행으로 삼다
-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으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아서 부행(副行)을 삼았다.
- 91.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24일 임인 2번째기사 / 권근이 원종 공신에 참여되기를 빈 상서문. 설장수와 함께 공신에 추록되다
- 하정(賀正) 표문은 신이 홀로 닦아 고쳤고, 정도전(鄭道傳)은 일찍 이 함께 닦지 않은 것으로 변명하였기 때문에, 신이 싸 가지고 온 선유(宣諭)와 자문(咨文)에 모두 다시는 정도전이 경사(京師)에 온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바다 밖의 작은 선비로 한림원(翰林院)의 반열을 따라 날마다 문연각(文淵閣) 위에 다달아 이미 응제(應制)하는 시(詩)를 지었고, 또 어제(...
- 92.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1월 7일 을묘 4번째기사 / 동북면 도선무찰리사 정도전에게 궁온을 내려 주다
-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화상(李和尙)을 보내어 동북면 도선무찰리사(都宣撫察理使) 정도전(鄭道傳)에게 궁온(宮醞)을 내려 주었다.
- 93.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2월 3일 경진 2번째기사 /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이 주·부·군·현의 명칭을 정하여 아뢰다
-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이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명칭을 나누어 정하고, 종사(從事) 최긍(崔兢)을 보내어 아뢰었는데, 안변(安邊) 이북 청주(靑州) 이남은 영흥도(永興道)라 칭하고, 단주(端州) 이북 공주(孔州) 이남은 길주도(吉州道)라 칭하여 동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또 단주(端州 ) 이북의 주·부·...
- 94.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2월 4일 신사 2번째기사 / 임금이 봉화백 정도전에게 글을 보내며 송헌 거사로 자신의 호를 정하다
- 임금이 송헌 거사(松軒居士)로 호(號)를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전조(前朝)의 충숙왕(忠肅王)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 나도 또한 봉화백(奉化伯)에게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글을 보내려고 하는데, 무엇으로 호(號)를 할까?" 하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 상감의 잠룡(潛龍)...
- 95.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2월 5일 임오 3번째기사 /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에게 보내는 서신. 옷과 술을 내려 주다
- 아 글[書]을 가지고 가서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에게 옷과 술을 내려 주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서로 작별한 지가 여러 날이 되니 생각하는 바가 매우 깊다. 신중추(辛中樞)를 보내어 가서 행역(行役)을 묻고자 하였더니, 최긍(崔兢)이 마침 와서 동 지(動止)를 갖추 알게 되니 조금 위로되고 풀린다. 이에 저고리[檽衣] 한 벌로써 바람...
- 96.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2월 16일 계사 2번째기사 / 동북면 도선무사 정도전이 경원부에 성을 쌓다
- 동북면 도선무사(都宣撫使) 정도전(鄭道傳)이 경원부(慶源府)에 성을 쌓았다.
- 97.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2월 29일 병오 4번째기사 / 임금이 글과 옷과 술을 내려 준 데 대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이 감사하는 글
-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이 전문(箋文)을 받들어 사은(謝恩)하였다. "글은 일찰(一札)을 전하였으니 성훈(聖訓)의 정녕(丁寧)함을 받자왔고, 옷은 구천(九天)에서 내리었으니 신의 몸의 장단(長短)에 맞았나이다. 또 선온(宣醞)을 붕준(朋樽)으로 내리셨으니, 감사한 것은 부끄러움과 겹치옵고 눈물은 말을 따라 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신 은 ...
- 98.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3월 20일 정묘 2번째기사 / 정도전과 이지란이 복명하니 치하하다. 남은이 절제사를 혁파할 것을 진언하다
-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과 도병마사(都兵馬使) 이지란(李之蘭) 등이 복명(復命)하니 각각 안마(鞍馬)를 주고, 인하여 잔치를 내려주고 임금이 도전에게 일렀다. "경의 공(功)이 윤관(尹瓘)보다 낫다. 윤관은 다만 구성(九城)을 쌓고 비(碑)를 세운 것뿐인데, 경은 주군(州郡)과 참로(站路)를 구획(區劃)하고 관리의 명분(名分)까지 제 도를 정하지 않...
- 99.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4월 20일 병신 1번째기사 / 정도전과 권근을 성균관 제조로 삼아 3관 유생 등을 모아 경사를 강습케 하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으로 성균관(成均館) 제조(提調)를 삼아, 현임(現任)·한량(閑良) 4품(品) 이하의 유사(儒士)와 삼관(三館)의 유생(儒生)을 모아 경사(經史)를 강습(講習)하게 하였다.
- 100.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4월 26일 임인 2번째기사 / 좌·우 정승 조준과 김사형에게 신도 팔경 병풍 한 면씩을 주다. 정도전의 팔경시
- 병풍(屛風) 한 면(面)씩을 주었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바쳤는데, 첫째는 기전(畿甸)의 산하(山河)였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기전(畿甸) 천리, 표리(表裏)의 산하가 1백 둘이로다. 덕교(德敎)의 형세를 얻어 겸하였으니, 역년(歷年 )이 천년[千紀]은 점칠 수 있도다." 둘째는 도성(都城)과 궁원(宮苑)이었다. "성(城)은 철옹성(鐵甕城) 천 길[...
- 101.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윤5월 18일 계사 1번째기사 / 정도전 이지란 설장수 성석린 등을 불러 위로하고 잔치하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참찬 문하(參贊門下) 이지란·월성군(月城君) 설장수(偰長壽)·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을 불러서 명령을 받들어 사신으로 갔던 일을 위로했는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심덕부(沈德符)·영삼사(領三司) 권중화(權仲和)·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잔치 에 배석(陪席)하여 한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 102.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윤5월 26일 신축 1번째기사 / 새벽에 아조를 보며 면전에서 중요한 정책을 직접 아뢰게 하다
- 관원이 모두 황공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임금이 정도전에게 물었다. "내가 말한 것이 어떠한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임금이 또 그를 힐책(詰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내가 조회를 보지 않는다고 책망하더니, 오늘은 어찌 한 사람도 면전(面前)에서 아뢰는 이가 없는가?" 도전이 아뢰었다. "신(臣)은 속된 말로 써 이를 비유한다면, 벗들...
- 103.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윤5월 26일 신축 2번째기사 / 아조 후 해가 돋기 전에 대신들을 불러 잔치하다
- 다른 사무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헌사(憲司)에 고하고서 그제야 그 임무를 보게 하였다. 해가 돋기 전에 임금이 궐내(闕內)에 다시 들어와 내루(內樓)에 앉아 좌정승·우정승과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어 모두 취하였다. 임금도 또한 술이 취하여 이내 건국(建國)한 일과 최운해(崔雲海)의 사유(赦宥) 입은 그릇된 일을 논하였다.
- 104.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윤5월 29일 갑진 1번째기사 / 정도전이 표전 문제로 인한 황제의 입조 명령을 저어하여 《진도》를 연습케 하다. 당시 시대적 상황
- 표사(表辭)로써 기모(欺侮)했다고 하여 공사(供辭)가 정도전에게 관련되어 칙지(勅旨)로써 입조(入朝)하게 하니, 도전이 병이 났다고 일컫고 가지 않았는데, 장차 죄를 묻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계책을 올리었다. "군사들은 병법(兵法)을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침내 《진도(陣圖)》를 찬술( 撰述)하여 올리고, 여러 도(道)의 절제사(節...
- 105.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6월 1일 을사 1번째기사 / 아조에 백관들이 정열했는데 조회를 보지 않고 대신들을 서루에서 불러 보다
- 자리에 나아와서 반열(班列)을 정제했는데, 임금이 조회를 보지 아니하고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을 서루(西樓)로 불렀다. 조준 등이 옹주(翁主)·택주(宅主)의 여관(女官) 녹봉(祿俸)을 그전대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이를 중지시켰으니 고칠 수 없다." 조준 등이 다시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106.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6월 5일 기유 1번째기사 / 김승·정진·김희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승(金陞)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정진(鄭津)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삼았다. 정진은 정도전의 아들이다. 김희선(金希善)을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삼았다.
- 107.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7월 8일 신사 2번째기사 / 조준·김사형·정도전이 신귀생의 난동을 막은 내시 조순을 남은의 집에서 접대하다
- 조준·우정승 김사형·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이 환자(宦者) 조순(曹恂)을 남은(南誾)의 집에서 접대하고 모두 말 1필을 증여(贈與)하였다. 조순은 부름을 받은 후로부터 더욱 임금의 사랑함을 얻게 되었다. 임금이 신귀생(申貴生)을 위하여 연회를 개최한 날에 귀생이 술이 취하여 칼을 빼고자 하는데, 조순이 즉시 이를 말렸으니 조준 등이 이 일로써 조순을 접 대한 것이었다.
- 108.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7월 11일 갑신 1번째기사 / 조준을 비방한 김부를 목베다. 요동 공략 문제로 조준 김사형과 남은 정도전 일파 간에 알력이 있다
- , 마땅히 관직을 상으로 줄 것이다." 처음에 남은이 정도전과 더불어 친근하여 몰래 요동(遼東)을 공격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남은이 임금에게 비밀히 말하였다. "조준과 김사형이 매양 이의(異議)가 있습니다." 때마침 전시(田時)가 능실(陵室)의 일로써 체포되 어 있는데, 유원정(柳爰廷)·조화(趙和)·신효창(申孝昌)에게 말이 미치게 되었다. 유원정은 조준과 서...
- 109.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9일 임자 1번째기사 / 대사헌 성석용이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건의하다. 정도전 등이 요동 공략에 대해 조준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하다
- 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 (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
- 110.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의 건국(建國)한 공로는 여러 왕자들이 견줄 만한 이가 없음으로써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戶)를 내려 주고, 그...
- 111.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2번째기사 / 정도전·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의 졸기
-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봉화(奉化)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경자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 )을 짓고 상제(喪...
- 112.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3번째기사 / 남재가 화를 면하다. 난을 평정하고 내린 교지
- 상보시 승(尙寶寺丞) 우우(牛牛) 등 관원을 보내어 정도전을 독촉하여 오도록 유시(諭示)했는데, 이때 도전이 바야흐로 고창증(鼓脹症)을 앓아서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또 홍무(洪武) 30년 4월 17일에 예부(禮部)의 자문( 咨文)에 삼가 받든 황제의 칙지(勅旨)에 의하면, 그 내용에 ‘지금 조선 국왕이 임용(任用) 한 문인(文人) 정도전이란 사람은 왕의 보좌에 있어서 ...
- 113.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4번째기사 / 상산군 강계권과 정도전의 아들 정진 및 그 일당을 순군옥에 가두다
- 상산군(象山君) 강계권(康繼權)·순녕군(順寧君) 지(枝)·보성군(寶城君) 오몽을(吳蒙乙)·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신의(鄭臣義)·대장군 강택(康澤)·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과 그 당여(黨與)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 114.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9월 12일 갑신 5번째기사 / 태묘에 고유하고, 정전에 앉아 즉위 교서를 반포하다
- 만세(萬世)에 모범을 보였는데, 불행히도 간신(奸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워 후사(後嗣)로 삼고서 장유(長幼)의 차례를 빼앗고 적서(嫡庶)의 구분을 문란시키고자, 우리 형제를 이간시켜 서로 선동하여 변고를 발생시켜서 화(禍)가 불측할 지경에 있었는...
- 115.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9월 17일 기축 2번째기사 / 정사 공신의 등급을 정하여 내린 교지
- 세(萬世)에 전해야 될 것임에도, 불행히 간신(奸臣) 정도전과 남은 등 이 상왕(上王)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는 시기를 당하여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난을 일으켜 우리 여러 형제를 해치려 하고, 우리의 이미 이루어진 왕업(王業)을 전복(顚覆)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는데,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
- 116.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9월 18일 경인 3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가산 적몰을 청했으나 과전만 회수하게 하다
- 사헌부에서 정도전·남은·심효생·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기를 청하니, 우리 전하(殿下)께서 임금에게 말하여 다만 과전(科田)만 회수하게 하였다.
- 117.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9월 29일 신축 2번째기사 / 환자 조순을 참수하고 그의 가산을 적몰하다
- 부족할 것입니다. 또 정도전과 남은 등에게 아부하여 나쁜 짓을 같이하고 서로 도와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으며, 전하(殿下)께서 왕위에 오른 시기에 와서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말까지 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된다 하옵니다. 청하옵건대, 형벌을 밝게 바루고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장래의 사람을 징계하소서." 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를 윤허한 것이었다.
- 118.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1일 계묘 1번째기사 / 정사 공신의 책록과 등급별 포상 내역
- 祚)를 만세(萬世)에 전해야 될 것인데, 간신(奸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상왕(上王)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는 시기에,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종친(宗親)을 해치려고 도모하 고, 이미 이루어진 왕업(王業)을 전복(顚覆)하고자 하여 이 화(禍)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습니다. 이에 의안공(義安公) 화(和)·익안공(益安公) 이방의...
- 119.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9일 신해 1번째기사 / 정사 공신 29인을 거느리고 맹약한 문서
- 임금이 정사 공신(定社功臣) 29인을 거느리고 함께 맹약(盟約)하였는데, 그 맹약을 기록한 문서에는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臣) 경(曔)은 삼가 종친(宗親)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익안공(益安公) 방의(芳毅)·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우리 전하(殿下) 이방원(李芳遠)과 보신(輔臣)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을 거느리고 감히 황천...
- 120.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10일 임자 1번째기사 / 정도전·남은의 일파인 오몽을을 목베고 정진을 수군에 충군하다
- 肅) 등이 말씀을 올리기를, "오몽을·정진 등은 남은·정도전과 함께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우고자 하여 종친(宗親)을 해치려고 하다가, 실정이 나타나고 일이 명백하게 되어,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이미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했는데도, 오몽 을과 정진은 머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죄는 같은데도 처벌은 다르옵니다. 청하옵건대, 형법에 ...
- 121.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29일 신미 1번째기사 / 무관의 반열 차례를 정하다
- 육조(六曹) 의랑(議郞)의 위에 있었는데, 지난번에 정도전이 관제(官制)를 고치면서 도리어 내사 사인(內史舍人) 의 아래에 있게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옛날의 제도를 따라야 할 것이며, 내사 사인(內史舍人) 종4품 벼슬. 1. 옛날에는 문관과 무관이 서로 자리를 교차(交差)하게 하였으니, 저것과 이것의 혐의를 막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상장군과 대장군이 혹...
- 122.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 3월 13일 갑신 12번째기사 / 태상왕이 관음굴에 거둥하여 평주와 온천에 가려다가 되돌아오다. 중 신강을 만나 이방번·이방석의 죽음을 한탄하다
- 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지난번에 간신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마음대로 나라 권세를 잡고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적서(嫡庶)의 분수를 어지럽혔으므로, 화가 거의 불측한 지경에 이르렀었습니다. 다행히 태상왕께서 막지 못할 천명과 어기지 못할 인심 을 아시고, 전하에게 선위(禪位)하시어서, 적서의 분수가 바루어지고, 장유(長幼)가 그 ...
- 123. 정종실록 2권, 정종 1년 8월 3일 경자 3번째기사 / 좌정승 조준이 전을 올려 사직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않다
-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신 은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과 더불어 동공일체(同功一體)여서, 처음에는 털끝만한 간격도 없었습니다. 정도전이 천자에게 죄를 얻으면서부터 남은과 결탁하여 요동(遼東)을 치자고 꾀해서 한 몸의 화를 면하려 하였습니다. 신이 이때 와병(臥病)중에 있었는데, 태상께서 두 사람을 보내어 신에게 물으셨습니다. 신이 병을 무...
- 124.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2월 1일 병신 1번째기사 / 하윤 등이 정안공을 세자로 세우기를 청하니, 세자로 삼는다는 전지를 내리다
- 없었다면, 큰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鄭道傳)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 어제 일로 보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정안공을 세워 세자(世子)를 삼 으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의 말이 심히 옳다." 하고, 드디어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도당(都堂...
- 125.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2월 4일 기해 5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판문하부사 조준을 탄핵하다
- 두지 않고, 임금의 뜻에 아첨하고 곡종(曲從)하여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과 더불어 서얼을 세워서 형세가 장차 나라를 뒤집을 뻔하였습니다. 또 정사(定社)하던 날을 당하여 지금의 세자께서 대장군(大將軍) 민무질(閔無疾)로 하여금 집에 가서 불러오게 하였으나, 배회하며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길흉(吉凶)을 점치면서 변을 방관하였습니다. 민무질 등이 그...
- 126. 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6월 20일 계축 2번째기사 / 방간의 휘하였던 진무소 갑사 3백 인을 혁파하고, 군기와 갑옷을 모두 삼군부로 보내다
-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까지 하였습니다. 이제(李濟)·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같은 자가 몰 래 간사한 소인과 결탁하여, 거의 사직을 전복시킬 뻔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의(義)를 토평(討平)하시던 날에, 궁중의 갑사(甲士)가 창을 꺼꾸로 하여 응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병력으로 능히 유지되는 바가 아닌 것을 전하가 친히 보신 것입...
- 127. 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6월 20일 계축 5번째기사 / 세자가 대학연의를 읽다가 좌보덕 서유와 더불어 사병 혁파와 관련한 문제를 논하다
- 化家爲國)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인년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의 난에 이르러서도 우리 형제가 만일 군사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사기(事機)에 응하여 변을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박포(朴苞)가 회안군(懷安君)을 꾄 것도 또한 병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일에 공신 3, 4인이 병권을 내놓게 된 것을 불평 불만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대간(臺諫)이 죄주기를 ...
- 128.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7월 2일 을축 8번째기사 / 태상왕이 세자에게 나쁘다고 말하여 이무와 조영무를 강릉부와 곡산부에 각각 귀양보내다
- 신(原從功臣)에 참예하였다. 이무는 본래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과 좋아하며 항상 서로 모의를 하여 너희들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무인년 변(變)에도 왕래하면서 반간(反間) 노릇을 행하며 중립을 지키면서 변을 관망하여 이기는 자를 따르려 하였다. 마침 너희들이 이겼기 때문에 와서 붙은 것이니, 이는 변(變)을 관망하는 불충한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모...
- 129.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7월 2일 을축 11번째기사 / 사헌부와 형조에서 이무, 조영무 등을 불러들이자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 (賞)이 후세에 미친 것입니다. 지난날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이 심복(心腹) 대신으로서, 태상왕이 세자를 세우자고 의논하던 날을 당하여 대의(大義)로 사뢰어서 적서(嫡庶)의 분수를 능히 바로잡지 못하고, 아첨하여 왕지(王旨)를 순순히 따라 어린 얼자(孽子)을 부축하여 세우고 칭송하기를, ‘어질고 덕이 있다.’ 하여, 여우처럼 호리고 권세를 희롱하여 몰래...
- 130. 정종실록 6권, 정종 2년 10월 11일 임인 2번째기사 / 태상왕의 탄일이므로 경내의 이죄 이하와 남은·정도전의 당여를 용서하다
- 경내의 이죄(二罪) 이하와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의 당여(黨與)를 용서하였으니, 태상왕의 탄일(誕日)인 때문이었다.
- 131.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1월 17일 경자 1번째기사 / 하윤·김사형·이무 등으로 가례색 제조를 삼다. 하윤과 민제의 갈등
- 閔無疾) 등과 말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하윤을 정도전(鄭道傳)에게 비유한다. 사람들이 하윤을 꺼려함이 이와 같은즉, 머지 않아 환난(患難)을 당할 것이다." 하였다. 조호가 이 말을 듣고 하윤에게 말하니, 하윤이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直道]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이 죽음을 면한 사람...
- 132.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6월 5일 신해 4번째기사 / 평양 부원군 조준이 병중에 있어 육선을 내려 주다
- 功)은 오로지 조준(趙浚)과 남은 (南誾)에게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언사(言辭)를 잘하여 공신(功臣)의 열(列)에 있었는데, 그가 공신(功臣)이 된 것은 또한 당연하나, 공(功)으로 논하면 마땅히 5, 6등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간 사람들을 오늘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남은이 만일 살아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부왕(父王) 때에 양정(兩鄭)이라고 일렀으니, ...
- 133.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2월 18일 기축 2번째기사 / 제릉의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의 내용
-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상왕께서 편치 못하시매,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라의 권세를 제멋대로 할 것을 생각하고, 여러 적자(嫡子)를 없애고 장차 어린 얼자(孽子)를 세우려고 음모하여 여러 무리들과 붕당(朋黨)을 만들어서, 화란(禍亂)의 발생이 눈 앞에 다가왔다. 전하께서 그 기미를 밝게 살피어 발(發)하기 전에 앞질러 베어 멸(滅)하고, 태상왕께 아뢰어 청하여서...
- 134.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3월 6일 신축 1번째기사 / 사간원에서 대사헌 함부림의 과거 행적을 탄핵하다
- 임금이 윤허하 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국사(國事)를 담당하였을 때에 어느 재상(宰相)이 붙좇지 아니하였는가? 하물며 그 당시에 부림이 죄가 있었으면 내가 마땅히 죄를 주었을 것이다. 부림이 동북면(東北面)에 있을 때에 휴가(休暇)를 청하고 강릉(江陵)에 성묘(省墓)하러 갔었는데, 대사헌(大司憲)을 제수한 명령이 그때 마침 있었으...
- 135.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 신묘 1번째기사 /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 때를 타서 대간(臺諫)을 시켜 준(浚)과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 등을 탄핵하여, 붕당(朋黨)을 만들어서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지적하여 모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가, 이내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4월에 우리 주상(主上)께서 조영규(趙英珪)로 하여금 정몽주를 쳐 죽이게 하여, ...
- 136. 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2월 10일 신미 2번째기사 / 영성군 오사충의 졸기
- 애을 받았는데, 지춘주사(知春州事) 신방우(辛邦祐)는 정도전이 천거한 바여서, 세력을 믿고 마음대로 직임(職任)을 떠나므로, 오사충이 이를 안핵(按劾)하니, 정도전이 오사충에게 핵문하지 말기를 부탁하였으나, 오사충은 사양하기를, "공이 바야흐로 묘당(廟堂)에 앉아서 호령(號令)을 시행하는데,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사사 글장으로서 국법을 폐하게 하시오? 만약 도당...
- 137.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8월 21일 정미 2번째기사 / 백관의 전위 불가 주장에 옥새를 잠시 대궐로 옮겼다가 다시 세자궁으로 보내다
- "예전에 표(表)·전(箋)이 잘못되어, 황제(皇帝)가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그 연고를 문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마음대로 스스로 왕위를 내놓으시면, 황제께서 반드시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불러 그 연고를 물을 것입니다. 이 때를 당하여 누가 명나라 서울[京師]에 가서 전대(專對)할 수 있겠습니 까?" 전대(專對) 본국에 조회 없이 사신이 전적으로 답...
- 138.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8월 24일 경술 3번째기사 / 길창군 권근이 전위의 불가함을 상서하다
- 전해 주실 때에는, 태상왕께서 병이 심하시었고, 또 정도전(鄭道傳)이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함이 있었으며, 또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고, 어린 서얼(庶孽)을 세우려고 탐내어 총적(冢嫡)을 죽이려고 도모해서, 화변(禍變)이 급(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고제(高帝)가 돌아 가고 건문제(建文帝)께서 새로 등극(登極)하여, 여러가지 일에 겨를이 없었던 까닭...
- 139.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1월 9일 계축 2번째기사 / 권근이 대간의 직책에 대한 사목을 상언
- 니다. 일찍이 국초(國初)에 신(臣)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수(編修)할 때에 대간의 직임에 대한 역대(歷代) 연혁(沿革)과 선유(先儒)의 격언(格言)을 갖추 싣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신이 그 당시에 함께 교정(校正)을 가(加)했사온데, 직임의 중함을 말한 것은 더 이상 심오(深奧)한 뜻이 없습니다. 지금 주상의 명령을 받고 다시...
- 140.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2월 14일 정해 1번째기사 / 길창군 권근의 졸기
- (禮)로 접대하기를 강요하니, 권근이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상서(上書)하여 원나라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 고 곧아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국정을 담당한 자들이 이들을 모두 무고하여 죄를 뒤집어 씌워 내쫓았으나, 권근은 나이가 어려서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면할 수 있었다. 임술년에 좌사...
- 141.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3월 21일 갑자 1번째기사 / 유용생 등을 호조 판서로 하는 등 인사이동·대호군에 임명된 전보에게 진법 훈련을 지시하다
- 삼았다. 임금이 전보(田甫)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정도전(鄭道傳)이 진법을 연습할 때에 네가 사마(司馬)가 되었다고 하니, 지금도 진법 을 잊지 아니하였겠지?" 하니, 전보가 대답하기를, "신이 스스로 능한 것이 아니고, 신은 다만 진법(陣法)에 의하여 행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삼군 갑사(三軍甲士)와 응양위(鷹揚衛)·별시위...
- 142.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윤4월 13일 을묘 6번째기사 / 건원릉에 비석을 세우다. 비문은 권근의 찬
- 다. 장복(章服) 관복(官服)의 제도.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의 글 때문에 중국 조정의 견책(譴責)을 받게 되자, 명(命)을 거역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太祖)가 편찮은 틈을 타서 어린 얼자(孽子)를 끼고 자기의 뜻을 펴 보려고 하였는데, 우리 전하가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이들을 섬멸하여 없애고, 적장(嫡長)이라 하여 상왕...
- 143.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8월 19일 무오 2번째기사 /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으로 삼다
- 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삼았다. 도복(道復)은 정도전(鄭道傳)의 아우인데, 바야흐로 정도전이 나라 일을 맡아 그 세력이 조야(朝野)를 누를 때에 〈그 아우〉 도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니, 도복이 사양하기를, "세력과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寒微)한 가문(家門)인데 영화(榮華)가 이미 지극합 니다. 다시 무엇을 ...
- 144.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0월 1일 기해 3번째기사 / 대신 및 3공신 등을 불러 이무의 과거 행적을 말하고 죄를 의논하다
- 었다. 하루는 내게 고하기를,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주 상(主上)의 병환이 위독한 것을 엿보아 정적(正嫡)에게 불리(不利)하게 하기를 꾀하니, 공(公)은 미리 도모(圖謀)하라.’ 하였다. 5, 6일 뒤에 다시 와서 내게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 정도전 등이 거사(擧事)하려고 하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그들이 모인 곳에 가서...
- 145.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2월 19일 병진 2번째기사 / 정도전·이근 등의 녹권을 추탈하고 가산을 적몰시키고, 조박의 자손을 금고하다.
- )하고, 그 자손(子孫)을 금고(禁錮)하게 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이근(李懃)·장지화(張至和)·심효생(沈孝生)·오몽을(吳蒙乙)의 녹권(祿券)을 추탈하고, 그 토전(土田)과 장획(臧獲)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한 대략에 이르기를, 장획(臧獲) 노비(奴婢). "신하의 죄는 두 가지 마음을 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두 가지 마음...
- 146.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1월 11일 무인 6번째기사 / 정도전 등의 공신전으로 관청에 몰수된 토지는 전조를 징수치 말도록 명하다
- 정도전(鄭道傳) 등 5인의 속공(屬公)한 전지(田地)의 전조(田租)를 거두지 말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정도전 등 5인의 공신전(功臣田)의 조(租)를 속공(屬公)하기 전에 그 자손(子孫)이 이미 수조(收租)하였는데, 만일 이를 징수한다면 관(官)에 바치지 못하여 간고(艱苦)가 막심할 것이오니, 그 반만 징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 기를, "전지(...
- 147. 태종실록 20권, 태종 10년 10월 19일 임자 1번째기사 / 좌우를 물리치고 내사와 전위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 데, 어린 서자(庶子)를 세우고자 하매,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이 그 계획을 도와 이루어서, 우리 선비(先妃)의 아들을 해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주륙(誅戮)을 당하였고, 또 기묘년에 동모형(同母兄) 회안군(懷安君) 이 난을 꾸미매, 나라 사람들이 나를 세워 임금을 삼은 지가 이미 10여 년이 되었소. 지금 내가 병이 있어 세자(世子)로 하여금 습위(襲位)하...
- 148.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6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 / 호조참의 이종선을 귀양보내다. 중국에서 보내온 이색의 비문을 둘러싼 논의의 전말
- 가리켜 말한 용사자(用事者)란 대개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태조께서 나라를 얻으신 것은 본래부터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 용사(用事)하던 조준 같은 무리들이 태조의 뜻을 받들지 않고 마음대로 주륙(誅戮)을 행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그 사실을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한 것뿐이지, 어찌 감히 주상께 누(累...
- 149.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1일 경신 2번째기사 / 공신·대간이 하윤·권근의 대불경지죄를 청하다
- 조를 비방했겠는가? 이색(李穡)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과 본래 틈이 있었고, 하윤과 권근은 모두 이색의 문인(門人)이기 때문에 보복하려고 생각한 것뿐이나, 실상은 본심에서 발한 것이 아니며, 또 사직(社稷)에 관계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복하는 것은 대신(大臣)의 도는 아니다. 권근은 이미 죽었으니 추후하여 죄줄 수 없고, 하윤은 이미 집에서 침체(沈滯)하여...
- 150.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1일 경신 3번째기사 / 다시 대간에서 하윤과 권근의 죄를 청하다
- 이르기를, ‘그때에 이색을 꺼리어 모함한 자는 조준과 정도전인데, 이것은 감히 가리켜서 말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윤·권근 등이 국초에는 이색과 당이 되어 모두 찬축(竄逐)을 당하였다가 다시 상 은(上恩)을 입어서 공신의 열(列)에 참여하였으니, 마땅히 밤낮으로 삼가고 조심하여 예전 원망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도리어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허위로 문...
- 151.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2일 신유 1번째기사 / 공신 남재·조온 등이 하윤 등의 죄를 청하다
- 상언(上言)하였다. "하윤 등의 말한 것이 비록 조준·정도전의 무리를 가리켰다고 하나, 정도전을 임용한 이는 누구입니까? 조준 등이 공양군(恭讓君)의 조정에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니, 용사자라고 가리켜 말한 것이 어찌 조준이겠습니까? 또 용사자(用事者)라고 칭하는 것은 쇠한 세상의 일입니다. 어찌 우리 국초(國初) 때의 사람을 용사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임...
- 152.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2일 신유 6번째기사 / 대간에서 하윤·권근의 죄를 청하다
- 건대, 지금 하윤의 말에 , ‘그때 재상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용사하여 이색(李穡)을 꺼리어 죄로 무함하였다.’ 하였는데, 조준 등은 태조의 개국 원훈(元勳)이니, 이색과 무슨 사원(私怨)이 있어서 무함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태조는 행의(行義)의 바른 것과 호생(好生)의 어지심으로 황천 상제(上帝)가 가만히 돕고, 일국의 신민이 함께 본 바이니, 감히 ...
- 153.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27일 병술 3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이숭인·이종학을 죽인 황거정·손흥종에게 죄주기를 청하다
- 하기를, ‘손흥종이 자복하기를, 「그때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이 만일 곤장 1백 대를 때린 뒤에 죽지 않거든 교살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교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에게 이숭인(李崇仁)이 죽은 연유로 핵문하니, 대답하기를, ‘장(杖) 이외의 다른 형벌은 없었고, 다만 이 앞서 병이 생겼기...
- 154.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2일 신묘 2번째기사 / 손흥종·황거정을 신은 현령·형방 아전·집장자와 대질시켜 변론케 하다
- 교살(絞殺)한 것은 태조(太祖)의 명령이 아니라, 곧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의 뜻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고, 황거정(黃居正)을 형방(刑房) 아전 및 집장자(執杖者)와 대질 변론하게 하니, 불복하기를, ‘이숭인(李崇仁)을 때릴 때에 곤장을 고른 것은 내가 명한 것이고, 그 허리를 때린 것은 나는 모른다. 그때에 함께 앉았던 안렴사(按廉使) 이원(李原)이 증거가 ...
- 155.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2일 신묘 3번째기사 / 정도전의 전민을 적몰하고 자손을 금고하도록 명하다
- ,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힘써 아뢴 일이 있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개국할 때에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고, 그 뒤에 적서(嫡庶)를 분변할 때에 도 한 마디 언급하지 않았고, 고 황제(高皇帝)에게 득죄(得罪)함에 이르러서는 굳이 피하고 가지 않고 사(私)를 끼고 임금을 속이었고, 흉포(凶暴)한 짓을 자행하여 그 몸의 허물을 없애고, 이숭인(李崇仁) 등을 함부로 ...
- 156.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1일 경자 1번째기사 / 정도전·손흥종·황거정은 서인으로 하고 그 자손은 금고하게 하다
- 명하기를, "정도전(鄭道傳)·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은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자손을 금고(禁錮)하고, 남은(南誾)은 논하지 말라." 하였으니, 남은은 개국의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157.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1일 경자 2번째기사 / 황거정·손흥종의 죄목을 논하다
- 司)에서 아뢰었다. "황거정·손흥종 등이 권신(權臣) 정도전·남은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을 잘못 죽였으니, 빌건대, 명률(明律)의 출입인죄조(出入人罪條)에 의하여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에 처하소서." 임금이 대언(代言) 등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의논하고, 드디어 순금사 장무(巡禁司掌務) 전흥(田興)을 불러 명하였다. "손흥종·황거정이 태조 의 명령을 따르지 않...
- 158.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1일 경자 4번째기사 / 개국 공신들이 정도전 남은을 용서할 것을 청하다
- 있는 자가 많은데, 어째서 이렇게 그릇되게 하는가? 정도전·남은이 사사로운 원망을 품고 몰래 사주하여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죽였으니, 인신(人臣)의 도리에 어떻겠는가? 내가 이것을 죄주는 것은 이숭인·이종학을 위하여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 만세의 계책을 위함이다. 또 태조는 강명(剛明)하신 임금인데, 오히려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후세에 만일 용렬한...
- 159.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7일 병오 2번째기사 / 대간에서 손흥정·황거정·남은 등의 죄를 청하다
- )를 행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큰 죄입니다. 정도전(鄭道傳)의 음험한 성품으로 우홍수(禹洪壽) 형제가 자기를 천인이라고 한 말에 한을 품고,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이 재주를 믿고 자기에게 붙좇지 않는 것을 꺼린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전조 말년에 이숭인 등이 마침 당죄(黨罪)로써 나누어 귀양갔는데,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아 즉위하자 호생(好生)...
- 160.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8일 정미 2번째기사 / 대사헌 박은과 좌사간 이명덕이 정도전·손흥종 등의 죄명을 밝힐 것을 청하다
- 좌사간(左司諫) 이명덕(李明德) 등이 교장(交章)하여 정도전·황거정 등의 죄를 청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사람들이 정도전·남은·손흥종·황거정이 임금을 속이고 사(私)를 행한 죄를 알지 못한 지가 이미 20년이 되었습니다. 전하가 성명(聖明)하신 자품(資稟)으로 은미한 것을 나타내고, 그윽한 것을 드러내어 그 죄를 바르게 하고 자 하는데, 순금사가 한결같이 율에...
- 161.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8일 정미 3번째기사 / 대간에서 다시 정도전 등의 일로 상서하다
- 대간(臺諫)에서 또 상서하였다.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은 힘써 사사로운 원망을 갚으려고 감히 임금을 속이는 마음을 자행하여, 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을 비밀히 사주하여 이숭인(李崇仁)의 무리를 임의로 죽이었고, 손흥종 등은 그 수족이 되어 그 욕심을 이루게 하여 주었으니, 그 형적을 보면 실로 무군(無君)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땅히 그 ...
- 162.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8일 정미 4번째기사 / 성석린·조영무·이천우가 대간의 논핵으로 피혐하자 직사에 나올 것을 명하다
- 법으로 한다면 참으로 무군(無君)의 마음이 있지마는 정도전의 마음을 추원(推原)하여 본다면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순금사에서 올린 율(律)에 의하여 말한 것인데, 이제 대간에서 함께 그르다고 합니다. 또 대사헌 박은(朴訔)이 일찍이 병조(兵曹)에서 신 등을 욕하는 말로 무함하였으니, 신 등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묘 당...
- 163.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23일 임자 5번째기사 / 지평 허성이 조영무를 탄핵하자 임금이 노하다
- 종사(宗社)에 관계되고, 또 손흥종·황거정이 속으로 정도전(鄭道傳)의 사주를 듣고 이숭인(李崇仁) 등을 잘못 죽인 죄로 청한 것일 뿐이고, 이색에게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임금이 그렇게 여기어 말하였다. "영무(英茂)가 핵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 가문(家門)에 본래 도리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있는 것이다. 내가 ...
- 164.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9월 8일 병인 2번째기사 / 박경과 정준이 정도전·남은·손흥종·황거정의 죄를 청하다
- 居正)의 죄를 청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정도전 등이 화심(禍心)을 마음에 품고 어진이를 투기하고 능한 이를 미워하여 가만히 황거정·손흥종을 사주하여 이숭인·이종학을 사지(死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예부터 무군(無君)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춘추(春秋)》의 법에서 반드시 죽이는 것입니다. 원컨대, 정도전·남은 등은 저택(潴宅)하고 그 관(棺)은...
- 165.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9월 17일 을해 2번째기사 / 대간에서 정도전·남은·손흥종 등의 극형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 대간(臺諫)에서 교장(交章)하여 정도전·남은·손흥종·황거정 등을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정도전 등의 일은 가증하지마는, 내가 20년 전의 일을 가지고 거론한 것은 후세에 신하 된 자를 감계(鑑戒)하게 하고자 함이다. 적몰(籍沒)하고 금고(禁錮)하는 것만이 좋은 일은 아니다. 후인이 어찌 이것을 경하다고 하여 논핵하겠는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 166.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9월 24일 임오 1번째기사 / 대간의 탄핵을 받은 개국 공신들을 직사에 나오도록 명하다
- 개국 공신(開國功臣) 흥령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을 불러 모두 직사에 나오게 하였다. 안경공 등이 일찍이 정도전·남은의 죄를 감하도록 청하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 167.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0월 15일 계묘 3번째기사 / 대간에서 다시 정도전·남은·손흥종·황거정의 죄를 청하다
- (從犯)을 나누지 않 고 반드시 죽여야 할 자입니다. 정도전은 비록 천주(天誅)에 굴복했다하더라도 말감(末減)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손흥종·황거정은 오히려 머리를 보전하였으니, 어찌 일대(一代)의 신자(臣子)의 마음에 합하겠습니까? 원컨대, 정도전 등은 가산을 적몰하고 자손을 노예(奴隷)로 만들고 황거정·손흥종 등은 전형(典刑)을 올바르게 밝혀서 만새에 명시(明示)하소
- 168.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0월 15일 계묘 4번째기사 / 대간에서 다시 교장하여 정도전 등의 일을 아뢰다
- 공으로 그 죄 를 속(贖)할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정도전과 더불어 하늘의 버림을 받아서 몸은 비록 이미 죽었으나, 말감(末減)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황거정·손흥종은 이미 함께 동모(同謀)하였으니, 어찌 구차히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정도전·남은 등은 자손을 노예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고 황거정·손흥종 등은 전형(典刑)을 올바르...
- 169.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1월 6일 계해 1번째기사 / 대간에서 황거정·손흥종의 죄를 청하다
- 초기에 태조의 호생(好生)의 덕은 생각지 않고 가만히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의 사감(私感)을 낀 사주(使嗾)를 받고, 임의로 이숭인(李崇仁) 등을 죽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마땅히 법에 처치하여 인심을 쾌하게 하여야 하겠는데, 전하가 오히려 너그러운 법전을 따라서 머리를 보전하게 하고, 신 등이 교장(交章)한 지 이미 ...
- 170.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1월 10일 정묘 2번째기사 / 사헌 장령 이방이 대사헌 박경과 남성군 홍서 등을 탄핵하다
- 마땅치 않습니다." 네째는 이러하였다.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은 군부(君父)를 멸시하고 임의로 주륙(誅戮)을 행하였으니, 빌건대, 중한 죄를 가하소서." 임금이 모두 듣지 않고, 이방(李倣)에게 일렀다. "너도 또한 이목(耳目)이 있을 것이다. 대간(臺諫)은 내가 둔 것인데, 네가 모두 탄핵하였으니, 장차 어떤 사람으 로 바꾸...
- 171.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윤12월 25일 신사 1번째기사 / 예조에서 올린 인군과 신하가 잔치하는 예도와 악장의 차례를 의논하다
- )을 멸할 것이다.’하였는데, 사람들이 삼전(三奠)의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정희계(鄭熙啓)라고 하는데, 정희계는 재주와 덕이 없고 개국하는 데도 별로 공이 없으니, 이것이 과연 때에 응하여 나온 사람이겠는가? 둘째는 ‘목자장군검(木 子將軍劍)·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비의군자지(非衣君子智)·부정 삼한격(復正三韓格)이라.’ 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 172.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9월 15일 정유 2번째기사 / 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돈화문 누각의 종명을 짓도록 명하다
- "정도전(鄭道傳)·장지화(張志和)·심효생(沈孝生)·이근(李懃)·신극례(辛克禮) 같은 자는 마땅히 모두 기록하게 하라." 하였다. 정부에서 또, "종정(鍾鼎)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심이니, 충성과 간사함이 서로 섞여서는 특히 불가한데, 그 중에서도 신극례는 녹권(錄券)을 거두지 않았으니, 혹시 아울러 기록함이 옳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173.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5월 10일 임오 1번째기사 / 영춘추관사 하윤을 불러 《고려사》를 다시 찬정하게 하다
- (公論)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태조 때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윤소종(尹紹宗)이 전조 실록(前朝實錄)을 수찬할 때 여러 사관(史官)이 모두 사초(史草)를 고쳐 써서 바쳤으나, 오로지 이행(李行)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금(囚禁)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만약 이 글과 같다면 전조(前朝)의 말년에 임금에게 직언(直言)한 자는 오직...
- 174.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5월 13일 기유 3번째기사 / 의정부에서 염치용 등의 죄를 청하다
- 臣)의 반열에 참여시켰다. 무인년에는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에게 편당(偏黨)하였으나, 때마침 자기 집에서 잤기 때문에 다행히 그 화(禍)를 면했다. 그러나, 그 재주와 덕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지위가 우상(右相)에 이르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에게 액운이 있어서 실언(失言)한 것을, 사간원과 육조에서 상언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내 어쩔 수 없...
- 175.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6월 10일 경오 3번째기사 / 정도전·황거정 자손의 금고를 해제하게 하다
- 명하여 정도전(鄭道傳)과 황거정(黃居正)의 자손의 금고(禁錮)를 해제하게 하였다.
- 176.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6월 26일 병술 5번째기사 /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에게 직첩을 주라고 하다
- 정진(鄭津)에게 직첩(職牒)을 주라고 명하니,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었다.
- 177.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7월 25일 갑인 2번째기사 / 정도전의 손자 정내와 정속·황거정의 아들 황효신 등에게 직첩을 주다
-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의 손자 정내(鄭來)와 정속(鄭束)·황거정(黃居正)의 아들 황효신(黃孝信) 등에게 직첩(職牒)을 주었다.
- 178.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0월 7일 을축 2번째기사 / 하천추사 공부의 졸기
- 잘못이 있는 것에 노하여 글을 지 은 사람인 정도전(鄭道傳)을 불렀으나, 정도전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으니, 황제는 공부가 글씨를 썼다고 하여 불렀다. 공부가 아무렇지 않은 듯 길에 올라서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기를 태연자약하게 하여 사생(死生)을 개의하지 않았다. 마침 사(赦)함을 받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공부가 성품이 너그럽고 솔직하고 우스갯소리[詼...
- 179.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1월 6일 계사 2번째기사 / 진산 부원군 하윤의 졸기
- 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 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
- 180.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6월 1일 을유 3번째기사 / 장례 제도를 의논하면서 서운관 구장의 참서를 불태울 것을 명하다
- 주초(走肖)의 설(說)은 개국 초(開國初)에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은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호사자(好事者)가 만든 것이다.’하였지만, 마침내 이 책을 따르게 되니, 조정의 대신들도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정안군(靖安君)으로 있을 때에는 이것을 믿지 않았는데, 천도(遷都)하는 날에, 진산 부원 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심히 이 책을 믿어 도읍을...
- 181.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6월 6일 경인 1번째기사 / 요언을 만든 강계의 무녀들을 치죄하고, 참서의 허망함을 말하다
- 를 본다는 말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모두 믿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처음은 말하기를, ‘일 없는 한가한 사람이 말을 만들어 이런 책을 내었다.’고 하더니, 끝에 가서는 이를 믿어 드디어 수보록가(受寶籙歌) 에도 올렸고, 하윤(河崙)도 또한 이를 믿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 같은 일은 덕정(德政)을 가영(歌詠)함에 불가하다고 여겨져 일찍이 고치도록 명하였다. 종...
- 182.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6월 26일 경술 3번째기사 / 진헌할 별마 30필을 준비시키다. 나례의 채색에 대해 무익한 비용을 줄이도록 명하다
- 금이 말하였다. "태조(太祖) 때에 고황제(高皇帝)가 정도전(鄭道傳) 등의 표사(表辭)가 공순하지 못한 데 노하여 조칙을 내려 ‘장자(長子)·차자(次子)중 1인을 부경(赴京)하게 하라.’고 하였다. 나는 장 자도 차자도 아니었지만, 태조께서 나를 보내었다. 그 때에는 양마(良馬)가 많지 아니하여 불용마(不用馬) 20필만을 끌고 갔는데, 요동(遼東)들에 이르자 좋은 ...
- 183.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12월 14일 을미 3번째기사 / 장지화의 아들 장옥상을 불러 오라 명하다
- 울면서 아룁니다만 황공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어제 세자의 자세한 말을 듣고 이미 경의 뜻을 알았다. 경이 황공히 여기는 것은 좁은 생각이다. 내가 심효생(沈孝生)·남은(南 誾)·정도전(鄭道傳)의 아들에 있어서도 폐(廢)하지 않고 서용(敍用)하였다. 어찌 홀로 장지화의 아들에게만 혐의가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알지 못한 때문이었다." 곧 불러 오라고 명하였다.
- 184.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2월 13일 무자 3번째기사 / 과거 제도에 대하여 변계량·허조 등과 의논하다
- 를 권장하여야 합니다." 하고, 변계량은 말하기를, "정도전(鄭道傳)이 처음으로 진사과를 폐지하고 생원시에 합하니, 이색(李穡)이 이를 심히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고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초장(初場)에 오경(五經)의 뜻을 시험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되, "초장에 본디 오경의 의의(疑義)를 묻는 것이 있었는데, 혹은 오경을 다 듣기도 하고 혹은...
- 185.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2월 25일 경자 1번째기사 / 경연에 나아가다. 정도전이 첨삭 가한 《고려사》를 개편할 뜻을 말하다
- 사(高麗史)》에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鄭道傳)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사신(史臣)의 본 초고(草稿)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하니, 변계량과 정초가 아뢰기를, "만약 끊어지고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이 직필(直筆)을 증손(增損)한 것...
- 186.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 상왕이 양녕에게 간곡히 심회를 말하고 매사냥이나 하며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다
-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마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
- 187.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8월 6일 무인 8번째기사 / 좌사간 대부 정수홍 등이 권근의 문묘 배향을 건의하다
-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표사(表辭)의 문제로 문신 정도전을 칙령으로 불렀으나, 도전이 병을 핑계하고 가 지 아니하므로, 온 나라가 걱정하였는데, 권근이 몸을 나라에 바칠 것을 결심하고, 대신 갈 것을 자청하여 능히 잘 대답하였고, 충성된 정성과 문장의 솜씨로 고황제를 감동시키어, 노실수재(老實秀才)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그 때 명령에 응대한 시를 보면, ...
- 188.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9월 20일 임술 3번째기사 / 유관·변계량 등에게 《고려사》의 개수를 명하다
- 임금이 예문관 대제학 유관(柳觀), 의정부 참찬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이 찬수(撰修)한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였다.
- 189.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4일 갑신 2번째기사 / 의령 부원군 남재의 졸기
- 로서 공경하였 다. 무인년에 그의 아우 남은(南誾)이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과 더불어 여러 적자를 없애버리기로 모의하였으나, 상왕이 재는 모의에 간여하지 않았다 하고 사저(私邸)에 두었다가, 사건이 평정된 뒤에 죽음을 면하게 하여 귀양보내고 다시 소환하였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하여 우의정에 이르고 부원군에 봉하게 되었는데, 상왕이 기구 대신(耆舊...
- 190.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월 30일 계사 2번째기사 / 유관·변계량이 《고려사》를 교정하여 올리다
- 이전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간혹 사신(史臣)이 본래 초(草)한 것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고, 또 제(制)니, 칙(勅)이니 하는 말과 태자(太子)라고 한 것 등의 유가 참람되고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된다 하여, 유관(柳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하였더니, 이제 와서 편찬이 완성되었으므로 이에 헌상해 올렸다.
- 191.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윤12월 8일 신유 3번째기사 / 공신 도감에서 죄지은 공신의 화상과 공권과 교서를 올리다
- 화상[影子]과 공권(功券)과 교서(敎書)를 올리니,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오몽을(吳蒙乙)·이근(李懃)·장지화(張志和)·손흥종(孫興宗)·이제(李濟)·이거이(李居易)·황거정(黃居正) 등의 화상은 그 자손에게 내어 주고, 장담(張湛)·조박(趙璞)·박포(朴苞)·이무(李茂)·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 疾)·유기(柳沂)·조희민(趙希閔)·윤목(尹...
- 192.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2월 29일 병자 3번째기사 / 지관사 유관·동지 관사 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케 하다
- (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처음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역사를 편수함에 있어,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저술한 《금경록(金鏡錄)》을 근거로 하여 37권을 편찬하였더니, 정도전이 말하기를, 전조(前朝) 고려. "원왕(元王) 이하는 비기어 참람하게 쓴 것이 많다 하여, 즉 종(宗)이라고 일컬은 것을 왕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고 호칭한...
- 193.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8월 11일 계축 3번째기사 / 동지춘추관사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 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의 《실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
- 194.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2월 1일 임인 2번째기사 / 사관이 사망하더라도 그 자손으로부터 즉시 사초를 수납하지 말게 하다
- 필(直筆)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행(李行) 태조 때 정도전이 《고려사》를 편찬할 적에, 태조가 신우(申禑)·신창(申昌) 및 변안렬(邊安烈)을 죽였다고 기 록한 고려 시대의 사초(史草)를 납입(納入)하여, 귀양가게 되었음. 하였다. 계량이 이르기를, "임인년 이상 4년 간의 사초를 수납하는 것은 임금이 묻기에 나도 가하다고 대답하였다. 이미 가하다 하였으니, 다시 ...
- 195. 세종실록 27권, 세종 7년 1월 1일 임신 2번째기사 / 전 참찬 김여지의 졸기
- 林府判官)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에 권신(權臣)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였더니, 도전이 이르기를, "그 때의 성랑(省郞)을 모두 파직해 내보내고 다만 여지만이 직임에 있을 뿐이다." 성랑(省郞) 성의 낭관(郞官). 하니, 여지가 듣고 즉일로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뒤에 사간원 우헌납(右獻 納)과 병조·이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영락 계미년에 사헌부 장...
- 196.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2월 7일 임신 2번째기사 / 《고려사》를 정도전이 편수한 전례에 따라, 참의한 이름을 고치고 휘하게 하다
- "변계량이 연전에 청하기를, ‘《고려사(高麗史)》를 정도전이 편수(編修)한 전례에 따라, 모든 참의(僭儗)한 이름은 모두 고치고 휘(諱)하여 쓰자. ’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도전이 이미 편수한 글에도 기성의 사실은 고치지 않았는데, 고쳐 편수하지 않은 글까지 굳이 추후로 고쳐야 하겠는가. 역사의 기록은 반드 시 바른 대로 써야만 하는 것이니, 어찌 숨겨[諱] 써서...
- 197.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6일 갑오 2번째기사 / 형조 판서 정진의 졸기
- 이 졸(卒)하였다. 정진은 봉화현(奉化縣) 사람이니,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다. 홍무 임술년에 낭장(郞將)에 임명되어 여러번 옮겨 사재 령(司宰令)과 전농 정(典農正)에 이르렀다. 임신년에 태조가 처음 왕위에 오름에, 정진은 공신(功臣)의 적자(嫡子)로서 지방관에 보직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에 임명되니, 연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훈가(勳...
- 198.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4월 23일 을해 5번째기사 / 변계량이 문과의 초장에 강경하는 것의 불가함을 상서하니 제술을 위주로 하게 하다
- 것은 옳다 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문신 정도전이 병자년의 회시(會試)를 맡았을 때에 처음으로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으니, 도전도 오로지 늙은 주파와 같은 자가 아니란 말인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권근과 정도전의 우열(優劣)은 진실로 후학(後學)이 감히 경솔하게 논의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도전이 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 199.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2월 19일 경인 5번째기사 / 예조에서 의례 상정소와 함께 의논한 박연이 상서한 조건에 대해 아뢰다
- 겨울에 친히 대제(大祭)를 거행할 때에, 제조(提調) 정도전(鄭道傳)·민제(閔霽)·권근(權 近)·한상경(韓尙敬) 등이 함께 서명(署名)한 문안(文案) 중에는, 문무(文武)의 두 춤이 각각 네 표로 하고 서로 거리를 4보(步)로 하여 법식(法式)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무(佾舞)를 추는 위치가 악현(樂懸)의 북쪽 언덕 사이에 있게 되면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를 할 ...
- 200.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1월 23일 경신 1번째기사 / 전조의 길재·최영 등에 대해 얘기하다
- 태종께서 보시고 ‘이것은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다.’ 하시므로, 계량이 대답하기를 , ‘어질다[賢]는 것을 〈그러면〉 재(材)로 고치겠습니다.’ 하였다. 근과 계량은 모두 숭인을 색(穡)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이 숭인이 문장에 능한 것을 질투하여 그를 죽게 만든 것이요, 충의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색도 그의 문장을 칭찬하였습니다."
- 201.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3월 12일 병자 4번째기사 / 중부 교수관 정종본의 취사(取士)에 관한 상서
- 행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려 말기에 이숭인 (李崇仁)·정도전(鄭道傳)·최표(崔彪)·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의 무리들은 비록 산직(散職)을 당하여도 교관(敎官)이란 명칭으로 성균관에 임명되어 도학(道學)을 강론하니, 사부(師傅)의 직임이 핍절되지 않았고 수업하는 무리도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비단 고려뿐이 아니라 본조(本朝)에 들어와 신사...
- 202. 세종실록 55권, 세종 14년 3월 4일 계해 3번째기사 / 예조에서 박연의 말을 빌어 묘정의 헌현 설치 장소의 확장을 아뢰니 허락하다
- 해년 겨울에 대제를 친행(親行)할 때에, 제조(提調) 정도전(鄭道傳)·민제(閔霽)·권근·한상경 등이 찬수(撰修)한 《의궤(儀軌)》 속에 문·무 두 가지의 춤을 각각 사표(四表)로 하고 서로의 거리를 4보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일을 악현의 북쪽 섬돌 사이에 두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무 일을 전정의 가운데에 벌...
- 203.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3월 21일 을사 3번째기사 / 경연에 나아가 《고려사》의 체재에 대해 논의하다
- 었을 뿐이고 책은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국초에 와서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하윤(河崙)·윤회(尹淮) 등이 서로 잇달아서 찬수하였으나, 모두 제현(齊賢)의 것을 따라서 너무 소략(疏略)하였으므로 다시 증보(增補)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략한 폐단을 면하지 못하였고 또 역대로 편수한 역사서의 체재가 같지 않으니, 다시 반고·사마천의 체재에 따라...
- 204.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7월 8일 경인 1번째기사 / 춘추관에서 신우·폐왕 우·폐왕 창으로 할 것을 아뢰다
-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사신(史臣)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사(高麗史)》를 엮을 때 위조(僞朝) 신우(辛禑) 부자에 관한 기사에 이르러서는, 이를 모두 배척하여 우(禑) 또는 창(昌)이라 썼습니다. 신 등이 삼가 상고하온즉, 한(漢)나라 여후(呂后)는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 혜제(惠帝)를 삼았는데도 뒤에 《한사(漢史)》에서 제(帝)라 썼고, 《자치통감( 資治通鑑)》과 ...
- 205.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9월 25일 병오 1번째기사 / 찬성 신개가 헌릉의 비문에 무인년 기사의 문구가 사실과 다르다고 상언하다
- 자를 끼고 국권을 전단(專斷)하려고 꾀하여, 밖으로는 정도전(鄭道傳) 등이, ‘숙위(宿衛)한다.’ 이르고서, 궁전 곁에 그 일당을 모아 주야로 모의하였고, 안으로는 이제(李 濟) 등이 주야로 곁에서 모시면서 참언(讒言)과 거짓말을 함부로 행하여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매, 그 소문과 세력이 자못 드러나게 되자, 당시 식자들은 모두 이를 우려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 ...
- 206. 세종실록 115권, 세종 29년 1월 22일 을유 2번째기사 / 손자의 범죄로 죽은 찬성사 유만수의 녹권을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 죄를 면하고자 하니, 임금이 도승지 황수신(黃守身)에게 이르기를, "만수(曼殊)와 같은 시기에 죄를 입은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이 모두 개국 공신으로써 녹권(錄券)이 삭제되고 자손이 그 조 상의 덕을 입지 못했는데, 만수(曼殊)는 원종 공신으로써 홀로 어찌 공신의 반열에 참여하겠는가." 하고는, 그 녹권을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 207.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6월 4일 을축 1번째기사 / 용비어천가,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등을 공사간 연향에 모두 통용케 하다
- 승강(承康)’은 제6변 1편인데, 태종(太宗)이 이미 정도전(鄭道傳)의 반란을 평정하자 나라 사람들이 세자(世子) 되기를 청하니, 태종이 공정왕(恭靖王) 에게 굳이 사양하던 것으로,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 "크시도다, 우리 거룩하신 아버님께서 큰 계획으로 사직(社稷)을 보전하셨네. 위태함을 혁파하여 평안하게 하옵시니, 여론과 인심이 붙따르게 되었네....
- 208. 세종실록 124권, 세종 31년 4월 6일 을묘 1번째기사 / 《고려사》 편수시 우·창 부자의 기술 문제를 춘추관에서 아뢰니 그대로 따르다
- 이 라 일컬어서 명분을 어지럽힐 수 있나이까. 전자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역사를 편수할 때에 우와 창을 이름으로 썼고, 그 뒤에 하윤(河崙)·유관(柳寬)·변계량(卞季良) 등이 다시 다듬고, 윤회(尹淮)가 거듭 편찬할 때에도 또한 모두 그대로 하였사오니,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랬겠나이까. 비옵건대, 지금 《고려사》를 편수함에 있어서 우·창 부자를 모두 《한서》 ...
- 209.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8월 30일 을미 1번째기사 / 도승지 이계전이 《고려사》편수를 마치고 나서 임금의 재가를 청하다
- 이보다 앞서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이 전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여 물품을 하사한 교서(敎書)를 가지고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를 편수하고 상(賞)을 내려 표창하는 것은 전에도 이런 예가 있었고, 또 역대(歷代)를 통하여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고려사》의 편수를 마치어 바쳤으니, 빌건대, 성상(聖上)께서 재결(裁決) 하여...
- 210. 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1월 1일 을미 1번째기사 / 왕씨의 후예를 찾아 그 작위를 높여 제사를 이어가게 할 것을 명하다
- 춘추관(春秋館)에 벼슬할 때 이미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고, 다음으로 《여사장편(麗史長編)》을 편찬하여 거의 이미 완성이 되었었으나 지금은 전임하여 의정(議政)이 되었으니, 춘추관에 벼슬하는 것을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에 의하여 춘추관(春秋館)에 출사(出仕)한 모신(謀臣)은 바로 정도전(鄭道傳)의 무리였다." 하였다.
- 211.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2월 20일 갑신 6번째기사 / 김종서 등이 새로 찬술한 《고려사절요》를 바치다
- 여 《고려사(高麗 史)》를 찬술(撰述)하도록 했는데, 정도전이 관장(管掌)하는 사무가 많아서 이 일은 요속(僚屬)에게 맡겼으나, 이로 말미암아 빠져나간 부분이 매우 많았었다. 태종(太宗)은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대조 교정(校正)하도록 했으며, 세종(世宗)은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쳐 찬술(撰述)하도록 했으니, 정도전의 초고(草藁)에 비하면 조금 상세한 편이었다...
- 212. 단종실록 7권, 단종 1년 7월 26일 신사 2번째기사 / 의정부에서 초헌·아헌의 악장을 예문관으로 하여금 지어올리게 하도록 청하다
- 마땅히 《정동방곡》을 쓸 것이나, 초헌(初獻)·아헌(亞獻)의 악장을, 청컨대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소서." 《정동방곡(靖 東方曲)》 정도전(鄭道傳)이 태조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을 찬양한 노래. 무공곡(武功曲)에 딸려 있음. 갑술년 1454 단종 2년. 부묘(祔廟) 3년 상이 지난 임금이나 왕비의 신주를 종묘(宗廟)에 옮겨 모시는 일. 하니, 그대로 따랐다.
- 213.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5월 10일 갑술 3번째기사 / 온양 군수 김한생이 복명서를 바치므로 서거정에게 그 책에 대해 하문하다
- 신은 듣건대, 태조(太祖) 때에 어느 점장이[卜者]가 정도전(鄭道傳)의 명을 추산하여 말하기를, ‘무인년(戊寅年)에 송 령(松嶺)에서 피가 바람을 날리겠다.’ 하였더니, 그 뒤에 과연 송현(松峴)에서 죽었다 하는데, 그 문귀가 이 책에 있는 까닭에 알았습니다." 무인년(戊寅年) 1398 태조 7년.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적에 세종(世宗)께서 온양(溫陽)에 거둥하시고자...
- 214. 성종실록 104권, 성종 10년 5월 15일 경오 2번째기사 / 장죄 이상의 형벌은 의정부에 보고하지 말고 전대로 시행케 하다
- 까닭입니다. 우리 나라는 건국 초기에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심기이론(心氣理 論)》 3편을 저술하였고, 권근(權近)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는데, 이로부터 이후로는 변계량(卞季良)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모든 유생(儒生)들이 음풍(吟風)·영월(詠月)만을 일삼고, 도학(道學)을 밝히는 자는 대체로 적었습니다마는,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 ...
- 215. 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 2월 23일 갑자 1번째기사 / 역대 제왕의 일에 대해 정도전이 편집한 책을 인출하게 하다
- 우찬성(右贊成) 정문형(鄭文炯)이 그의 조부(祖父) 정도전(鄭道傳)이 찬정(撰定)한 책 1질(帙)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신이 빈객(賓客)으로서 일찍이 시강원(侍講院)에 이르니, 서연관(書筵官)이 신에게 이르기를, ‘역대 제왕(帝王)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 〈그리고〉 향년(享年)의 많고 적은 것을 대략 엮어서 강독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겠는가?’ 하 기에, ...
- 216. 연산군일기 40권, 연산 7년 1월 15일 갑자 2번째기사 / 영중추부사 정문형의 졸기
- 자(字)는 야수(野叟)며, 봉화현(奉化縣) 사람으로, 정도전(鄭道傳)의 증손이다. 정통(正統) 12년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선보(選輔)되고, 사헌부 감찰·예조 좌랑·사간원 사간을 역임했다. 천순(天順) 8년에 공조 참의에 임명되고, 조금 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어 경상도 관찰사로 특별 제수되었다. 성화(成化) 2년에 함길도 절도사로 특...
- 217. 연산군일기 43권, 연산 8년 4월 2일 계묘 1번째기사 / 상참과 조계를 받고, 집의 정인인이 구수영의 일을 논계하다
- .’ 하였습니다. 우리 태조(太祖) 때에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은 왕자군(王子君)들에게 토지를 더 주자고 청했으나, 태조께서는 ‘국민들이 반드시 내가 자식들에게 사정을 둔다고 할 것이다.’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황후의 친족과 친자식에게도 오히려 사정을 둔다는 것을 혐의쩍게 여겨서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마(駙馬)의 아비이겠습니 까. 개정하소서."...
- 218. 중종실록 4권, 중종 2년 10월 15일 을유 1번째기사 / 영사 박건상 등이 진성군에 대해 논하다
- 대해 논하기를, "전하께서는 우애(友愛)의 정이 비록 돈독하시지만, 신 등은 종사를 위해 간곡히 아뢰어 청하는 것입니다. 어찌 우연히 헤아려 말하겠습니까?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이방석(李芳碩)을 추대했다고 말하지만, 이방석은 알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께서 종사를 위해 이방석을 제거하셨습니다." 하고, 또 숙창의 일을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 219. 중종실록 26권, 중종 11년 10월 15일 계해 3번째기사 / 장례원 판결사 김근사 등이 노비를 부리는 일에 대해 아뢰다
- 혹 고쳐서 바치기도 하므로 판결하기가 어려우니, 이후로는 관(官)을 거친 것이나 백문(白文)을 물론하고 봉인(封印)해서 도로 그 임자에게 주어, 술책을 쓸 수 없게 하소서." 《경제육전(經濟六典)》 태조 6년에 정도전(鄭道傳)·하윤(河崙)·조준(趙浚) 등이 육전의 형식을 갖추어 만든 법전. 사중(司中) 장례원. 백문(白文) 관인이 없는 문서. 하니, 정부와 의논하도록 하였다.
- 220. 중종실록 29권, 중종 12년 8월 18일 신유 1번째기사 / 일본 국왕이 청한 조연과 정몽주의 문묘 종사에 관해 논의하다
- "조정(朝廷)이 다 알았다 하더라도 윤소종(尹紹宗)·정도전(鄭道傳)과 같은 무리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정인 군자(正人君子)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사경(司經) 정응(鄭譍)이 아뢰기를, "참으로 위신(僞辛)인 줄 알았다면 어찌 즐겨 스스로 섬겼겠습니까? 신씨인 줄 알면서 섬겼다고 가리켜 말하는 자는 정인군자가 아니라 간...
- 221.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 4월 1일 기사 5번째기사 / 악장 속의 음사나 석교에 관계있는 말을 고치라고 명했는데, 남곤이 고친 것을 아뢰다
- 신도가는 아조( 我朝)가 한양으로 천도(遷都)할 때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인데, 이 곡(曲)은 문사(文詞)를 쓰지 않고 방언(方言)을 많이 써서 지금 쉽게 이해할 수 없으나 토풍(土風)을 보존해야 할 것이요, 또 절주(節奏)로 말하면 옛날에는 느린 것을 숭상하였으나 지금은 촉박함을 숭상하니 고칠 수가 없습니다. 무고정재 정읍사(舞鼓呈才井邑詞)는 오관산(五冠...
- 222. 중종실록 34권, 중종 13년 7월 11일 무신 1번째기사 / 변방에 있는 창기의 혁파 논의와 조광조를 성균관 동지사에 임명하려는 논의
- (經濟六典)》 조선조 태조(太祖) 6년(1397)에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이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이후 반포한 법령을 모아서 육전(六典)으로 나누어 편찬한 조선왕조 최초의 법전이다. 전차(塡差) 비어 있는 벼슬자리를 메우는 것. "무릇 관직(官職)에는 합당한 사람을 써야 한다. 물정(物情)에 합당하면 과연 써야 한다." "만약 이 직임을 무릅쓰...
- 223. 중종실록 34권, 중종 13년 10월 23일 기축 5번째기사 / 야대에 나아가니, 시강관 김구가 기강을 세우는 도리와 정몽주의 포장을 아뢰다
- 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태종께 붙은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들을 다 내쳤습니다. 이때 태조께서 해주에서 사냥하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하였으므로 풍양(豊壤)에 돌아오셨는데, 정몽주가 조준 등을 귀양 보내었다는 말을 태종께서 듣고 태조께 아뢰어 병환을 참고 서울 에 들어오게 하였으니, 형세가 정몽주와 양립(兩立)할 수 없으므로 ...
- 224.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 7월 17일 병인 1번째기사 / 조강에 나아가다. 요동 자문에 주답하는 일로 대신들과 논하다
- 고칠 수 있었다면 그 손상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정도전(鄭道傳)이 찬한 표(表)의 말이 조금 그릇된 점이 있다 하여 표를 찬한 자를 재촉하여 보내도록까지 하였으니, 이제 아뢰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근래 부경(赴京)하는 사람은 대부분 은(銀)을 많이 가지고 가는데 사신이 수색하여 적발하고자 하나 아주 깊숙이 감추기 때문에 적발하기가 어렵...
- 225.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 8월 1일 을축 1번째기사 / 시강관과 특진관 등이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시킬 것을 건의하다
- 보이는 제1차 시험. 《원육전(元六典)》 태조 6년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이 육전(六典)의 형식을 갖추어 만든 법전(法典). 하고, 기사관(記事官) 백인걸(白仁傑)은 아뢰었다. "기묘인(己卯人)이 화를 입은 후로 선비들의 학문이 오랫동안 폐해졌습니다. 기묘인이 사람됨은 좋지 못하더라도 그 학문만은 의리의 학문에 칭탁했는데, 그 후 나이 젊은 무리들은 ...
- 226.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 11월 24일 신유 1번째기사 / 공조 판서 홍섬이 경복궁 중수기의 제술을 사양하니 대제학에게 짓도록 하다
- 고서 전각(殿閣)의 명칭과 창건한 시말을 모두 정도전(鄭道傳)을 시켜 기록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리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개 정도전의 문장이 전아(典雅)하면서도 정밀하고 고와 그 당시에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과 같은 사람이 어찌 공졸(工拙)을 헤아려보지도 않고서 뻔뻔스럽게 흉내를 내겠습니까. ...
- 227. 선조실록 146권, 선조 35년 2월 7일 경오 4번째기사 / 사관이 최영경의 옥사에 대한 공론을 논하다
- 없었습니다 .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고려 말기의 간신 정도전이 일찍이 이 호를 썼었는데 하필 간신의 호를 취하여 자기 호로 삼겠습니까.’ 하였으며, 사간(事干)을 추궁해 물었으나 끝내 증거가 없었다. 또 그가 역적과 초년에 잠시 혹 서로 만나 보았으나 중년 이후에는 절교하고 서로 통문(通問)하지 않은 일을 진술하였다. 그 집의 문서를 수색해 보니 모두 그...
- 228. 선조수정실록 24권, 선조 [수정실록] 23년 6월 1일 신미 1번째기사 / 전 지평 최영경을 하옥하다
- 공초하기를, "삼봉이란 본디 저의 별호가 아닙니다. 정도전(鄭道傳)의 호가 삼봉이니 이것이 어찌 답습할 호이겠습니까. 서울에 있을 때 역적과 지면 관계가 있었지만 어느 해 이후론 서찰도 통하지 않았는데 어찌 상종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국청이 아뢰기를, "영경의 호가 삼봉인지 양남(兩南)의 감사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한 뒤에 심문하는 것이 옳겠습니...
- 229. 광해군일기[중초본] 121권, 광해 9년 11월 23일 갑신 5번째기사 / 폐비 문제를 대신과 논의할 것을 청하는 유학 이숙의 상소
- 하지 않고 다만 조종조의 일만 가지고 진달하겠습니다. 정도전이 어린 왕자를 세워 나라의 운명을 옮기려고 음모하자 태종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사직을 안정시켰는데, 그때 원경 왕후의 오라비 민무회(閔無悔)와 민무휼(閔無恤) 형제가 사실 그 계 획을 도왔습니다. 노산(魯山)이 아직 어릴 때 이용(李瑢)이 은밀히 반역을 꾀하자 세조대왕이 사전에 낌새를 알아차려 그 변란...
- 230. 광해군일기[중초본] 122권, 광해 9년 12월 24일 을묘 6번째기사 / 역모의 주모자로 허균을 탄핵하는 예조 좌랑 기준격의 상소
- 의 벗 심군’이라고 하였습니다.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東人詩文)》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고 우영의 시도 그 안에 뽑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계축년 뒤로 허균은 말하기를 ‘나는 복이 있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심우영에게 준 시를 모두 가지고 와서 나의 문집 속에다...
- 231.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3일 경인 11번째기사 / 기준격의 무함하는 상소에 대해 좌참찬 허균이 변명한 상소문
- 년 겨울에 혼자서 보려고 본조(本朝)의 시를 뽑았는데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 은 모두 국초(國初)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여 써넣다 보니 자연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수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한 나머지 기필코 뽑아내어 앞에다 두려 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 등...
- 232. 광해군일기[정초본] 121권, 광해 9년 11월 23일 갑신 5번째기사 / 폐비 문제를 대신과 논의할 것을 청하는 유학 이숙의 상소
- 하지 않고 다만 조종조의 일만 가지고 진달하겠습니다. 정도전이 어린 왕자를 세워 나라의 운명을 옮기려고 음모하자 태종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사직을 안정시켰는데, 그때 원경 왕후의 오라비 민무회(閔無悔)와 민무휼(閔無恤) 형제가 사실 그 계 획을 도왔습니다. 노산(魯山)이 아직 어릴 때 이용(李瑢)이 은밀히 반역을 꾀하자 세조대왕이 사전에 낌새를 알아차려 그 변란...
- 233. 광해군일기[정초본] 122권, 광해 9년 12월 24일 을묘 6번째기사 / 역모의 주모자를 허균을 탄핵하는 예조 좌랑 기준격의 상소
- 의 벗 심군’이라고 하였습니다.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東人詩文 )》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고 우영의 시도 그 안에 뽑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계축년 뒤로 허균은 말하기를 ‘나는 복이 있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심우영에게 준 시를 모두 가지고 와서 나의 문집 속에다...
- 234. 광해군일기[정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3일 경인 10번째기사 / 기준격의 무함하는 상소에 대해 좌참찬 허균이 변명한 상소문
- 년 겨울에 혼자서 보려고 본조(本朝)의 시를 뽑았는데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모두 국초(國初)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여 써넣다 보니 자연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수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한 나머지 기필코 뽑아내어 앞에다 두려 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 등...
- 235.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1월 4일 무술 1번째기사 / 송시열이 정릉, 동성혼 금지, 보오법, 절 철거 등의 일을 아뢰다
-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태조께서 개국하신 후 간신 정도전(鄭道傳)이 태종을 성조(聖祖) 께 무함하여 끝내 신덕 왕후 소생인 소도공(昭悼公)이 비명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태종이 즉위하신 후 신덕 왕후의 능은 사한리(沙閑里)로 옮겨 묻고 여전히 태묘에 배향되지 않았습니다. 사체가 중대하니 대신과 유신들에게 널리 의논하여 태묘에 배향하고 능도 여러 ...
- 236.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1월 27일 신유 4번째기사 / 신덕 왕후의 종묘 배향을 청한 판중추 송시열의 차자
-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국 초에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위험한 말로 선동하고 사악한 꾀를 비밀리에 행하 여, 태조 대왕으로 하여금 천위(天位)를 헌신짝처럼 버리게 하고 소도(昭悼)를 포함한 이공(二公)을 요절하게 만들었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태종 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
- 237. 현종개수실록 20권, 현종 [개수실록] 10년 1월 4일 무술 2번째기사 / 신덕 왕후의 태묘 배향·목청전의 수리·토지 측량 및 부세의 탕감 등에 관하여 아뢰다
-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가?" "태조께서 개국한 뒤 정도전(鄭道傳) 등이 태종을 무함하고 신덕 왕후의 자식을 세자로 세웠습니다. 일이 실패하여 신덕 왕후의 두 아들은 비명에 죽었고 능침은 성밖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태묘(太廟)에 배식되지 못한 것입니다. 고려 때에는 서울과 지방에 아내를 각각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태조께서 잠저(潛邸...
- 238. 현종개수실록 20권, 현종 [개수실록] 10년 1월 27일 신유 3번째기사 /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신덕 왕후를 종묘에 배향하자고 청하다
-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국 초에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위험한 말로 선동하고 사악한 꾀를 비밀리에 행하여, 태조 대왕으로 하여금 천위(天位)를 헌신짝처럼 버리게 하고 소도(昭悼) 를 포함한 이공(二公)을 요절하게 만들었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태종 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
- 239.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 7월 8일 무자 2번째기사 / 허적에게 최명길과 김육을 추배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묻다
- 한 정 승은 아니었습니다마는, 그 때에 유자(儒者)라고 이름하는 자에게 영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배향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식자(識者)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한탄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추배(追配)에 대하여 그 당부(當否)를 물으니, 허적이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의 추배된 고사(故事)로써 대답하였다. 임금이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라고 명하 였다.
- 240. 숙종실록 12권, 숙종 7년 9월 14일 계해 2번째기사 / 공정 대왕 묘호 추가에 대한 송시열의 대답
- "국가를 처음 세우던 초기에 불행하게도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의 변란(變亂)이 있었고, 인해서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한(漢)나라 고조[上皇]가 그의 고향인 풍패(豐沛)를 그리워했던 그런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잠시동안 북쪽에 있는 고향인 함흥(咸興)에 거둥하였으며, 마침내 보위(寶位)를 공정 대왕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공정 대왕은 스스로 멀리서 아침...
- 241. 숙종실록보궐정오 14권, 숙종 [보궐정오실록] 9년 2월 4일 병자 1번째기사 / 행 사직 박세채가 조정에 나아가 세 가지 조목을 차자로 아뢰다
- 을 내리라고 하는 것은 이르기를, "공양조(恭讓朝)에 정도전(鄭道傳)이 이색(李穡) 등 여러 사람들을 죽이려고 귀양을 많이 보내자 국론이 분열되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임금에게 기록을 살펴서 아울러 내치거나 용서하되, 이 뒤에 다시 전일의 죄를 들추어 내는 자는 무거운 법으로 논죄(論罪)하도록 청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번 일은 고려조[前朝]의 일과는 ...
- 242. 영조실록 18권, 영조 4년 5월 1일 신해 3번째기사 / 선정전에서 여러 훈신들을 인견하다
- 를 잊지 마시기를 청하였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정도전 등이 이성계(李成桂:조선 태조)를 추대하려고 꾀하는 것을 정몽주(鄭夢周)가 알았는데, 마침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게 되었으므로, 우선 우익(羽翼)을 제거한 뒤에 이성계를 도모하려고 간신(諫臣) 등을 시켜 탄핵하여 정도전 등을 유배하였음. 영외(嶺外) 영남. 하였다...
- 243. 영조실록 28권, 영조 6년 12월 11일 을사 1번째기사 / 《동국통감》의 원종기를 강하면서 고려 때의 사정과 지금의 사정을 비교하다
- 痼弊)이므로 내가 일찍이 개탄하고 있는 바이다. 옛날 정도전(鄭道傳)이 중국에 입조(入朝)하지 않으려 하자 권근(權近)이 전대(專對)를 자청하였으니, 신하된 도리에 위란(危亂)도 사피(辭避)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하물며 장향(瘴鄕)과 변읍(邊邑)이 비록 나쁜 곳이라 하더라도 어찌 위난이 있는 고장이겠는가? 마땅히 진신(搢紳)의 자제(子弟...
- 244.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 1월 11일 기사 2번째기사 / 소대에서 《당감》을 강독하다. 왕씨 자손을 추천하여 아뢰도록 명하다
- 王氏)의 자손을 배에다 싣고 바다에 빠뜨린 일은 바로 정도전(鄭道傳) 무리의 계책이며, 성조(聖祖)의 뜻은 아니었 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왕씨 자손을 추천하여 아뢰라는 전교가 있었으나, 전후에 송경 유수(松京留守) 가 한 사람도 추천하지 않았다." 송경 유수(松京留守) 개성 유수(開城留守). 하자, 이종성이 아뢰기를, "왕씨 자손이 반드시 모두 ...
- 245. 영조실록 39권, 영조 10년 9월 18일 경인 5번째기사 / 여러 훈신들을 영화당에서 인견하고 중관을 시켜 선온하다
- 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고 하였 는데, 나도 경(卿) 등에게 또한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거(莒)에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 춘추 시대(春秋時代) 제 양공(齊襄公)이 인도(人道)에 어긋난 행동을 하자, 동생 소백(小白:桓公)이 화를 당할까...
- 246.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9월 10일 임신 3번째기사 / 대왕대비가 정도전에게 공로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하다
- (法宮)의 전각(殿閣)들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학 국사(無學國師)가 그 당시 수고를 한 사실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야승(野乘)에 자주 보이는데, 나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에게는 특별히 훈...
- 247.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9월 19일 신사 1번째기사 / 이조에서 정도전의 봉사손을 정할 것을 아뢰다
-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에 대하여 공신(功臣)의 칭호를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도 내려주라고 하면서 해조에서 그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의 자리에 의망(擬望)하여 들이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본조에서 알아보니 봉사손은 없고 지손(支孫)만 있다고 합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 후손을 결정...
- 248.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10월 12일 계묘 3번째기사 / 봉화백 봉사손을 정하는 것을 빨리 진행하라고 명하다
-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봉화백(奉化伯 : 정도전(鄭道傳))의 봉사손(奉祀孫)을 초사(初仕)에 의망(擬望)하여 들이라고 이미 명령을 내린 바 있건만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궁전에 와서 정전(正殿)이 차례로 중건되었으므로 이런 때의 감회는 더욱 특별한 것이 있다. 봉사손을 세우는 절차를 예조(禮曹)에서 종파(宗派)의 문장(門 長)을 초...
- 249.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11월 16일 을축 1번째기사 / 경복궁에 나가 축하를 받고 사면을 반포하다
- 이 엄하게 하여 반드시 궁부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고 정도전(鄭道傳)은 잠규(箴規)를 세우고 여러 당들의 이름을 붙였다. 아름답도다! 역대 임금이 서로서로 이어받아 나갔다. 훌륭하도다! 크고 큰 위업을 함께 받아왔다. 훌륭하고 큰 위업이 지극하니 여러 대에 걸쳐 거듭 빛냈고, 돌아볼 때 그 빛이 환하였으니 신과 함께 교화시켰다. 이것은 만대의 신령이 도와준 것이고...
- 250.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 7월 2일 정축 1번째기사 / 경복궁으로 이어하다
- 되었다. 국초(國初)에 영건한 공로가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 의성 부원군(宜城府院君) 남은(南誾), 영의정(領議政) 이직(李稷),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에게 있다는 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니, 이제 오랜 나라의 운수가 새로워지는 때를 당해서 성의를 보이는 조처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의 무덤에 다 같이 지방관들을 보내어 치제(致祭)를 하도록 하라."...
- 251. 고종실록 7권, 고종 7년 8월 21일 을묘 2번째기사 / 정응기를 봉화백 정도전의 사손으로 정하다
- 아뢰기를, "지난 을축년(1865)에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의 사손(祀孫)을 세우는 일로 예조로 하여금 해당 파(派)의 문장(門長)을 불러들여 속히 바로잡도록 명을 내리셨는데, 그 당시에 본조에서 올린 초기(草記)로 인하여 시골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와서 모인 다음에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방금 양성(陽城) 유학(幼 學) 정치석(鄭致奭...
- 252. 고종실록 7권, 고종 7년 10월 15일 정미 1번째기사 / 연일현 포항진에 다시 장수를 두고 《예전》 〈오복조〉 중 서모에 대한 상복 제도를 개정하다
- 였다. 또 아뢰기를, "연전(年前)에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의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으시고,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의 자리를 만들어 조용(調用)하 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건원릉 참봉은 지금 선파(璿派)의 자리로 되어 있어 처리할 형편이 못 됩니다. 다시 임기가 끝나가는 다른 능의 참봉 자리를 만들어 조용(調用)하는 것이 어...
- 253. 고종실록 8권, 고종 8년 3월 16일 병오 4번째기사 / 시호를 추증하다
- 이개(李愷)는 정혜공(貞惠公)으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 傳)은 문헌공(文憲公)으로, 증병조 판서 송덕영(宋德榮)은 충장공(忠莊公)으로, 증 이조 판서 임성주(任聖周)는 문경공(文敬公)으로, 증 영의정 박신규(朴信圭)는 청숙공(淸肅公)으로 추증하였다. 증 병조 판서 채이장(蔡以章)은 충정공(忠貞公)으로,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는 효숙공(孝肅公)으로...
- 254.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3월 23일 정미 1번째기사 / 봉화백 정도전의 무덤을 잃어버렸으므로 신주를 놓고 치제하게 하다
-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무진년(1868) 7월 2일에,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손(祀孫)이 고한 바에 의하면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사판(祠版)으로 제사를 받겠다고 하였는데, 아래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사판에다가 치제하라 ." 하였다.
- 255.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2월 15일 무자 1번째기사 / 전 지평 홍찬섭 등이 서자에게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청하다
- 모욕을 당하고서 그 원한을 보복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바로 사비(私婢)였습니다. 정도전이 죄를 지어 죽자 품었던 감정을 풀기 위하여 서자는 좋은 벼슬에 등용할 수 없다는 의논을 제창하였으나 전부 벼슬길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성종(成宗) 때에 와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할 때에도 서자의 자손은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도록...
- 256. 순종실록부록 10권, 순종 부록 12년 3월 4일 양력 4번째기사 / 고종 황제의 행장
- 부(三軍府)에 선온(宣醞)하였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이직(李稷), 심덕부(沈德符)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8월. 건원릉(建元陵), 숭릉(崇陵), 수릉(綏陵) , 경릉(景陵)에 나가 친히 제사를 올렸다. 9월. 대왕대비전의 나이가 주갑(周甲)이 되었으므로 ‘숙렬(肅烈)’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주갑(周甲) 61년. 11월. 다음 해가 익종이 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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