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實錄) 정도전 관련 기록
■ 태조를 참소하는 말이 돌자 정도전 등과 거취를 논의하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20번째기사
태조가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조인옥(趙仁沃)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卿) 등과 함께 왕실(王室)에 있는 힘껏 협력하였는데도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내가 마땅히 동쪽으로 돌아가서 이를 피하겠다."하면서,
먼저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행장을 재촉하여 장차 떠나려 하니, 도전(道傳) 등이 말하기를,
"공(公)의 한 몸은 종사(宗社)와 백성이 매여 있으니, 어찌 그 거취(去就)를
경솔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실(王室)에 남아 도와서 현인(賢人)을 등용시키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물리쳐서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렇게 하면 참소하는 말이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지금 만약 한 모퉁이에 물러가 있게 된다면, 참소하는 말이 더욱 불처럼 일어나서
재화(災禍)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옛날에 장자방(張子房)134) 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겠다고 하니,
고조(高祖)가 이를 죄주지 않았는데, 나의 마음은 다른 뜻이 없으니,
왕이 어찌 나에게 죄주겠는가?"하였다. 서로 더불어 의논했으나 결정이 나지 않으니,
가신(家臣) 김지경(金之景)이 강비(康妃)에게 사뢰기를,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등이 공(公)을 권고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일이 장차 그릇될 것입니다. 이 두서너 사람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니,
강비가 그 말을 믿고 우리 전하(殿下)에게 알리기를,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믿을 수가 없소."하니,
대답하기를, "공(公)이 참소하는 말에 시달려 물러가실 뜻이 있는데, 도전과 남은 등은
이해(利害) 문제를 힘써 진술하여 그 가시는 것을 중지시킨 사람입니다."하므로,
이에 지경(之景)을 책망하였다. "그 두서너 사람은 공(公)과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한 사람이니 너는 다시 말하지 마라."
[註 134] 장자방(張子房) : 장양(張良).
■ 태조의 즉위 교서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8일 정미 3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군민(軍民)들에게 교지를 내리었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16일 을미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말을 합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기를, ‘왕씨(王氏)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신우(辛禑)가 사이를 틈타서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昌)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國運)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다행히 장수(將帥)의 힘에 힘입어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으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나, 곧 혼미(昏迷)하고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므로, 여러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반(離叛)하여
능히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폐하는 바이므로 누가 능히 이를
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직(社稷)은 반드시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고,
왕위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가 없는데, 공로와 덕망으로써 중외(中外)가 진심으로
붙좇으니, 마땅히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한다.
이에 건국(建國)의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야 될 것이니,
모든 백성에게 편리한 사건을 조목별로 후면(後面)에 열거(列擧)한다.
아아,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하여 사정에 따라 조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래도 보좌하는 힘을 힘입어 새로운 정치를 이루려고 하니,
그대들 여러 사람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게 하라.
1. 천자는 칠묘(七廟)031) 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032) 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033) 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1.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王瑀)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妻子)와 동복(僮僕)들은
그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고,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 힘써
구휼(救恤)하여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할 것이다.
1.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034) 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중앙에는 성균 정록소(成均正錄所)035) 와
지방에는 각도의 안렴사(按廉使)가 그 학교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덕행을 닦은 사람을 뽑아, 연령·본관(本貫)·삼대(三代)와 경서(經書)에 통하는 바를
잘 갖추어 기록하여 성균관장이소(成均館長貳所)에 올려, 경에서 통하는 바를
시강(試講)하되 사서(四書)로부터 오경(五經)과 《통감(通鑑)》 이상을 통달한 사람을,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알아낸 사리(事理)의 정밀하고 소략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제일장(第一場)으로 하고,
입격(入格)한 사람은 예조(禮曹)로 보내면,
예조에서 표문(表文)·장주(章奏)·고부(古賦)를 시험하여 중장(中場)으로 하고,
책문(策問)036) 을 시험하여 종장(終場)으로 할 것이며,
삼장(三場)을 통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상고하여 이조(吏曹)로 보내면,
이조에서 재주를 헤아려 탁용(擢用)하게 하고, 감시(監試)는 폐지할 것이다.
그 강무(講武)하는 법은 주장(主掌)한 훈련관(訓鍊觀)에서 때때로
《무경칠서(武經七書)》037) 와 사어(射御)의 기술을 강습시켜,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기술의 정하고 거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출신패(出身牌)를 주고,
명단을 병조(兵曹)로 보내어 탁용(擢用)에 대비하게 할 것이다.
1. 관혼 상제(冠婚喪祭)는 나라의 큰 법이니,
예조에 부탁하여 경전(經典)을 세밀히 구명하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일정한 법령으로 정하여 인륜(人倫)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것이다.
1. 수령(守令)은 백성에게 가까운 직책이니 중시(重視)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간(臺諫)·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공평하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얻어
이 임무를 맡겨서 만 30개월이 되어, 치적(治績)이 현저하게 나타난 사람은
발탁 등용시키고, 천거된 사람이 적임자(適任者)가 아니면
천거한 사람[擧主]에게 죄가 미치게 할 것이다.
1. 충신(忠臣)·효자(孝子)·의부(義夫)·절부(節婦)는 풍
속에 관계되니 권장(勸奬)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순방(詢訪)하여 위에 아뢰게 하여 우대해서 발탁 등용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이다.
1. 환과 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1. 외방(外方)의 이속(吏屬)이 서울에 올라와서 부역에 종사함이
기인(其人)038) 과 막사(幕士)와 같이 하여, 선군(選軍)039) 을 설치함으로부터는
스스로 그 임무가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되매 폐단이 생겨서 노역을
노예(奴隷)와 같이 하니, 원망이 실로 많다. 지금부터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전곡(錢穀)의 경비(經費)는 나라의 떳떳한 법이니,
의성창(義成倉)·덕천창(德泉倉) 등의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는 삼사(三司)040) 의
회계(會計) 출납(出納)하는 수효에 의뢰하고, 헌사(憲司)의 감찰(監察)은
풍저창(豐儲倉)과 광흥창(廣興倉)의 예(例)에 의거하여 할 것이다.
1. 역(驛)과 관(館)을 설치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에 사명(使命)이 번거롭게 많아서 피폐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지금부터는 차견(差遣)하는 공적인 사행(使行)에게 〈관(官)에서〉 급료(給料)를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적인 용무로 왕래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공급(供給)을 정지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주객(主客)을 모두 논죄(論罪)하게 할 것이다.
1. 배를 탄 군사[騎船軍]는 위험한 곳에 몸을 맡기고 힘을 다하여 적을 방어하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처지이다. 그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부역을
감면해 주게 하고 조호(助戶)041) 를 더 정하여 윤번으로 배를 갈아타게 하고,
그 생선과 소금에서 나는 이익은 그들이 스스로 취(取)하도록 허용하고
관부(官府)에서 전매(專賣)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호포(戶布)를 설치한 것은 다만 잡공(雜貢)을 감면하기 위함인데,
고려의 말기에는 이미 호포(戶布)를 바치게 하고 또한 잡공(雜貢)도 징수하여
백성의 고통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는 호포를 일체 모두 감면하고,
그 각도에서 구은 소금은 안렴사(按廉使)에게 부탁하여 염장관(鹽場官)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과 무역하여 국가의 비용에 충당하게 할 것이다.
1. 국둔전(國屯田)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음죽(陰竹)의 둔전(屯田)을 제외하고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고려의 말기에는 형률(刑律)이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형조(刑曹)·순군부(巡軍府)·가구소(街衢所)042) 가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형벌이 적당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는 형조는 형법(刑法)·청송(聽訟)·국힐(鞫詰)을 관장하고,
순군(巡軍)은 순작(巡綽)·포도(捕盜)·금란(禁亂)을 관장할 것이며,
그 형조에서 판결한 것은 비록 태죄(笞罪)를 범했더라도
반드시 사첩(謝貼)043) 을 취(取)하고 관직을 파면시켜 누(累)가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선왕(先王)의 법을 만든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무릇 공사(公私)의 범죄를,
반드시 《대명률(大明律)》044) 의 선칙(宣勅)을 추탈(追奪)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사첩(謝貼)을 회수하게 하고, 자산(資産)을 관청에 몰수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가산(家産)을 몰수하게 할 것이며, 그 부과(附過)045) 해서 환직(還職)하는 것과
수속(收贖)해서 해임(解任)하는 것 등의 일은 일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 것이며, 가구소(街衢所)는 폐지할 것이다.
1. 전법(田法)은 한결같이 고려의 제도에 의거할 것이며,
만약 증감(增減)할 것이 있으면 주장관(主掌官)이 재량하여 위에 아뢰어 시행할 것이다.
1. 경상도(慶尙道)의 배에 싣는 공물(貢物)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감면할 것이다.
1. 유사(有司)가 상언(上言)하기를, ‘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설장수(偰長壽) 등
56인이 고려의 말기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맨처음 화단(禍端)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엾이 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그 우현보·이색·설장수 등은 그 직첩(職貼)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같은 계급에 끼이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禹洪壽)·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조호(趙瑚)·김진양(金震陽)·
이확(李擴)·이종학(李種學)·우홍득(禹洪得)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1백 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崔乙義)·박흥택(朴興澤)·김이(金履)·이내(李來)·김묘(金畝)·이종선(李種善)·
우홍강(禹洪康)·서견(徐甄)·우홍명(禹洪命)·김첨(金瞻)·허응(許膺)·유향(柳珦)·
이작(李作)·이신(李申)·안노생(安魯生)·권홍(權弘)·최함(崔咸)·이감(李敢)·
최관(崔關)·이사영(李士潁)·유기(柳沂)·이첨(李詹)·우홍부(禹洪富)·강여(康餘)·
김윤수(金允壽)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김남득(金南得)·강시(姜蓍)·이을진(李乙珍)·유정현(柳廷顯)·정우(鄭寓)·정과(鄭過)·
정도(鄭蹈)·강인보(姜仁甫)·안준(安俊)·이당(李堂)·이실(李室)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
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전오륜(全五倫)·정희(鄭熙) 등은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릇 범죄한 사람은 일죄(一罪)로서 보통의 사유(赦宥)에 용서되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홍무(洪武) 25년(1392) 7월 28일 이른 새벽 이전으로
부터 이미 발각된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교서(敎書)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우현보(禹玄寶)와 오래 된 원한이 있었으므로,
무릇 우씨(禹氏)의 한집안을 모함하는 것은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실정(實情)에는 맞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10여 인으로써 원례(援例)로 삼아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여, 조목마다 자질구레하게 획책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안경공(安景恭)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고는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어찌 극형(極刑)에 이르겠는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라."하였다.
도전 등이 감등(減等)하여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한산군(韓山君)046) 과 우현보와 설장수는 비록 감등하더라도
또한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결코 다시 말하지 말라."
도전 등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곤장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겨, 이를 강제로 말리지 아니하였다.
[註 031] 칠묘(七廟) : 주대(周代)의 천자(天子)의 종묘(宗廟).
곧 태조(太祖)의 종묘와 삼소(三昭)·삼목(三穆)의 총칭.
[註 032] 오묘(五廟) : 제후(諸侯)의 종묘(宗廟). 곧 태조(太祖)의 종묘와
이소(二昭)·이목(二穆)의 총칭.
[註 033] 소목(昭穆) :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천자(天子)는 태조(太祖)를 중앙에 모시고, 2세·4세·6세는 소(昭)라 하여 왼편에,
3세·5세·7세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3소·3목의 칠묘(七廟)가 되고,
제후(諸侯)는 2소·2목의 오묘(五廟)가 되며, 대부(大夫)는 1소·1목의 삼묘(三廟)가 됨.
[註 034] 좌주(座主) : 고려 때 감시(監試)의 급제자가 시관(試官)을 일컫는 경칭(敬稱).
[註 035] 성균 정록소(成均正錄所) : 성균관(成均館)의 직원(直員)이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던 곳.
[註 036] 책문(策問) : 시무(時務)의 문제(問題).
[註 037] 《무경칠서(武經七書)》 : 일곱 가지의 병서(兵書). 곧 《손자(孫子)》·오자(吳子)》·《사마법(司馬法)》·《위료자(尉繚子)》·《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육도(六韜)》·《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임.
[註 038] 기인(其人) : 고려 초기에 향리(鄕吏)의 자제(子弟)를 뽑아 서울에 데려와서
볼모로 삼는 한편, 그 출신 지방의 사정에 관한 고문을 삼았음.
[註 039] 선군(選軍) : 고려 때 군사를 뽑는 일을 맡아 보던 관아.
[註 040] 삼사(三司) : 고려 때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의 사무를 맡아 보던 관아.
[註 041] 조호(助戶) : 봉족(奉足).
[註 042] 가구소(街衢所) : 순검군(巡檢軍)에게 체포된 범금자(犯禁者)를
구치(拘置) 치죄(治罪)하는 일종의 구류소(拘留所)와 같은 것임.
[註 043] 사첩(謝貼) : 직첩(職牒).
[註 044] 《대명률(大明律)》 : 중국 명대(明代)의 기본적인 형법전(刑法典).
[註 045] 부과(附過) : 공무상 과실이 있을 때에 곧 처벌하지 않고
관원 명부에 적어 두는 것.
[註 046] 한산군(韓山君) : 이색.
■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1번째기사
정몽주(鄭夢周)가 성헌(省憲)140) 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몽주(夢周)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上王)141) 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道傳) 등을 국문(鞫問)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142) 를 마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邸宅)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극언(極言)하기를, "백성의 이해(利害)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혈통(血統)이 있겠습니까?"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私第)로 돌아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의논하여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豆蘭)은 말하기를,
"우리 공(公)143) 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하고는,
휘하 인사(人士)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 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영규(英珪)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영규·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하였다.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待備)해야 되겠다."하면서,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태조는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불러 말하기를,
"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하여 처형(處刑)되었으니, 마땅히 조준·남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변명하게 할 것이다. 경(卿)이 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라."하니,
희석(希碩)이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여 말이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가 곁에 있다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므로,
희석이 대궐에 나아가서 상세히 고하니, 공양왕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탄핵을 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장차 대간(臺諫)을 밖으로 내어보낼 것이니, 경(卿)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하였다.
이 때 태조는 노기(怒氣)로 인하여 병이 대단하여,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하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하고는,
비밀히 이자분(李子芬)을 보내어 조준·남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할 의사로써
개유(開諭)하고, 또 상왕(上王)과 이화·이제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상왕을 보내어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무리를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신(臣) 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하니,
공양왕이 마지못하여 대간(臺諫)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외방(外方)에 귀양보내야 될 것이나, 국문(鞫問)할 필요가 없다."하더니,
조금 후에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문하 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
동순군 제조(同巡軍提調) 김사형(金士衡)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가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
조호(趙瑚)를 보내어 신(臣) 등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이성계(李成桂)가 공(功)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보좌역(補佐役)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하였다.
이에 이숭인·이종학·조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
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
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이신(李申)과 이숭인·이종학을 먼저 먼 지방에 귀양보냈다.
형률(刑律)을 다스리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진양 등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진양 등은 몽주의 사주(使嗾)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호되게 곤장을 쳐야 될 것입니다."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이들을 용서했는데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겠습니까?"하였다.
진양 등이 이로 말미암아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註 140] 성헌(省憲) : 대간(臺諫).
[註 141] 상왕(上王) : 정종(定宗).
[註 142] 대사(大事) : 상사(喪事).
[註 143] 공(公) : 태조.
■ 도당에서 이색 등을 도서 지방으로 귀양보내도록 청했으나 내륙으로 유배토록 하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30일 기유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일의 교서(敎書)에 기재된
먼 지방으로 귀양보낼 사람은 무릉(武陵)·추자도(楸子島)와
제주(濟州) 등지로 나누어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교서(敎書)에 이미 ‘내가 오히려 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했는데,
지금 또 여러 섬으로 나누어 귀양보낸다면 이는 신(信)을 잃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이 없는 땅에 귀양보낸다면 의복과 음식을 어찌 얻겠는가?
반드시 모두 기한(飢寒)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이 무리들이 비록 기내(畿內)에 있더라도, 다시 어찌 모의(謀議)하겠는가?"
마침내 여러 주(州)에 나누어 귀양보내니,
이에 우현보(禹玄寶)는 해양(海陽)으로 귀양가고,
이색(李穡)은 장흥부(長興府)로 귀양가고, 설장수(偰長壽)는 장기(長鬐)로 귀양가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연변(沿邊)의 주군(州郡)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사자(使者)를 각도에 보내어 우홍수(禹洪壽) 이하의 사람에게 곤장[杖]을 집행하되
차등이 있게 하니, 양광도(楊廣道)에는 상장군(上將軍) 김로(金輅)가 가고,
경상도에는 상장군 손흥종(孫興宗)이 가고,
전라도에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황거정(黃居正)이 가고,
서해도(西海道)의 서북면(西北面)에는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장담(張湛)이 가고,
교주(交州)·강릉도(江陵道)에는 예빈 경(禮賓卿) 전이(田易)가 가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처음 내리매, 정도전(鄭道傳)이
이색(李穡)을 자연도(紫燕島)로 귀양보내고자 하여
경기 계정사(京畿計程使) 허주(許周)로 하여금 잡아 보내게 하였다.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어렵게 여겨,
그 구처(區處)할 것을 물으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
조금 뒤에 이색을 장흥(長興)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나오게 되니,
도전의 계획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 이숭인·이종학·우홍수의 졸기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3일 임신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김로(金輅) 등은 조정에 돌아왔으나,
경상도에 귀양간 이종학(李種學)·최을의(崔乙義)와
전라도에 귀양간 우홍수(禹洪壽)·이숭인(李崇仁)·김진양(金震陽)·우홍명(禹洪命)과
양광도(楊廣道)에 귀양간 이확(李擴)과 강원도에 귀양간 우홍득(禹洪得) 등 8인은 죽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장(杖) 1백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숭인(崇仁)은 성주(星州) 사람으로서, 자(字)는 자안(子安)이며,
호(號)는 도은(陶隱)이니, 성산군(星山君) 이원구(李元具)의 아들이다.
고려 지정(至正) 경자년(1360)에 나이 14세로서 성균시(成均試)081) 에 합격하고,
임인년(1362)에 예위시(禮闈試)082) 병과(丙科) 제2인에 합격하여
예문 수찬(藝文修撰)에 임명하였으며, 여러 번 옮겨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해년(1371)에 조정(朝廷)083) 에서 공사(貢士)084) 를 보내도록 명하니,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과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향시(鄕試)를 주관하면서
숭인을 뽑아 제1로 삼았는데, 공민왕이 이를 아끼어 〈중국에〉 보내지 아니하였다.
조금 후에 성균 직강(成均直講)과 예문 응교(藝文應敎)에 제수(除授)되어
전리 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다. 이때 김승득(金承得)이 박상충(朴尙衷) 등을
지윤(池奫)에게 무함(誣陷)하여 모두 외방(外方)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숭인도 또한 대구현(大丘縣)으로 폄출되었다.
무오년에 성균 사성(成均司成)으로 소환(召還)되었다.
신유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임술년에 기복(起復)되어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으로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했는데,
아버지가 생존해 있고, 또 기년(期年)이 지났으므로, 시관(試官)을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일로써 그의 결점을 지적하였다.
벼슬을 옮겨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이르고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병인년에 하정사(賀正使)로 중국의 서울에 가고,
무진년 봄에 최영(崔瑩)의 문객(門客) 정승가(鄭承可)의 참소를 입어
통주(通州)로 폄출(貶黜)되었다가, 여름에 최영이 실패하자 소환되어
다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좌시중(左侍中) 이색(李穡)이
중국의 서울에 조회하매 숭인을 부행(副行)으로 삼았다.
기사년 가을에 어느 사람이 일본(日本)에 와서 스스로 영흥군(永興君)이라 일컬으니,
숭인이 영흥군의 인친(姻親)으로서 일찍부터 그 사람됨을 상세히 잘 알고 있으므로,
그 거짓임을 분변하다가 성주(星州)로 폄출(貶黜)을 당하였다.
경오년 여름에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獄事)로써 체포되어
청주(淸州)에 갇히었다가, 수재(水災)로 인하여 사면되어 충주(忠州)에 돌아왔다.
임신년 봄에 다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가
여름에 순천(順天)으로 폄출(貶黜)되었다. 이때에 황거정(黃居正)이 나주(羅州)에 와서
그의 등골을 매질하여 드디어 남평(南平)에서 죽으니, 나이 46세였다.
아들이 넷이니 이차점(李次點)·이차약(李次若)·이차건(李次騫)·이차삼(李次參)이다.
숭인은 총명(聰明)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으면 문득 외게 되고,
나이 20세가 되지않았는데도, 시문(詩文)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추허(推許)하는 바가되었다.
여러 서적을 널리 다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히 연구했으며,
직강(直講)에서 판서(判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교(製敎)085) 를 겸무(兼務)하여,
이색(李穡)이 병들고 난 뒤에는 중국과의 외교(外交)에 관계되는 문자(文字)는
모두 그 손에서 만들어졌으니, 고황제(高皇帝)086) 가 이를 칭찬하기를,
"표사(表辭)가 자세하고 적절(適切)하다."하였으며,
이색도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의 문장은 선배(先輩)들도 자안(子安)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하였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그의 유고(遺藁)에 서문을 짓게 하고, 인쇄하여 세상에 반행(頒行)시켰다.
처음에 정도전과 친구로 삼아 종유(從遊)한 지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정도전이 후일에 조준에게 친밀히 하게 되어, 조준이 숭인을 미워함을 알고서는
도리어 〈숭인을〉 몰래 험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종학(種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영특하고 호걸스러워서, 공민왕 갑인년(1374)에
나이 14세로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위조(僞朝)087) 병진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마침내 장흥고 사(長興庫使)에 임명되고,
관직을 오랫동안 지내어 밀직사 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에 승진되고,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색이 나라의 정무(政務)를 맡고 있었으며, 종학이 해마다 시험을 관장하게 되니,
사람들이 자못 이를 비난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색이 탄핵을 당하고,
종학도 또한 폄출(貶黜)되었다.
경오년에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매,
부자(父子)가 함께 청주(淸州)에 체포되어 있던 중,
수재(水災)로 인하여 함께 사면(赦免)을 입었다.
임신년에 또 함창(咸昌)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손흥종(孫興宗)이 계림(鷄林)에 와서 등골에 곤장을 치려고 하니,
문생(門生) 김여지(金汝知)가 그때 판관(判官)이 되어,
몰래 형리(刑吏)에게 법 밖의 형벌은 시행하지 못하게 하니, 이로 인하여 겨우 살게 되어,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겨 안치(安置)되었는데, 손흥종이 사람을 보내어 뒤쫓아
무촌역(茂村驛)에 이르러 밤을 이용하여 목을 졸라 죽이니, 나이 32세였다.
아들이 여섯이니, 이숙야(李叔野)·이숙휴(李叔畦)·이숙당(李叔當)·
이숙묘(李叔畝)·이숙복(李叔福)·이숙치(李叔畤)이다.
홍수(洪壽)는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의 맏아들이다.
위조(僞朝) 정사년(1377)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낭장(郞將)에 임명되고,
성균 박사(成均博士)를 겸하였으며,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러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었다.
기사년에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에 임명되었으나,
임신년 여름에 순천(順天)으로 폄출(貶黜)되었다가,
또한 황거정이 등골에 곤장을 쳐서 죽었다. 나이 39세였다.
아들은 넷이니, 우성범(禹成範)·우승범(禹承範)·우흥범(禹興範)·우희범(禹希範)이다.
처음에 현보(玄寶)의 족인(族人)인 김진(金戩)이란 사람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奴]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김진의 족인(族人)들은 모두 수이(樹伊)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오직 김진만은 자기의 딸이라고 하여 비밀히 사랑하고 보호하였다.
김진이 후일에 속인(俗人)이 되자, 수이를 내쫓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를 삼고,
그 딸을 사인(士人)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는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모두 주었다.
우연이 딸 하나를 낳아서 공생(貢生)088)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보냈는데,
운경(云敬)이 벼슬을 오래 살아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운경이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이 곧 정도전(鄭道傳)이다.
그가 처음 벼슬하매 현보(玄寶)의 자제(子弟)들이 모두 그를 경멸(輕蔑)하므로,
매양 관직을 옮기고 임명할 때마다 대성(臺省)에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으니,
도전은 현보의 자제들이시켜서 그렇게했을 것이라고 여겨, 일찍부터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홍수(洪壽)의 아들 성범(成範)으로 부마(駙馬)를 삼으니,
도전은 성범 등이 형세를 이용하여 그 근원을 발각시킬까 두려워하여,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시킬 만한 일은 계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개국(開國)한 즈음에 성범을 무함하여 죽이고는,
마침내 현보의 부자(父子)를 무함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또 조준이 이색·이숭인과 틈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내 이색과 종학(種學)·숭인 등을 무함하여 원례(援例)로 삼고자 하였다.
후에 즉위(卽位)의 교서(敎書)를 지으면서 백성에게편리한 사목(事目)을 조례(條例)하고는,
계속하여 현보 등 10여 인의 죄를 논하여 극형(極刑)에 처하게 하였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안경공(安景恭)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고는 매우 놀라면서,
"이미 관대한 은혜를 베푼다고 말했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라."하였다.
도전 등이 형벌을 감등(減等)하여 죄를 집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현보·이색·설장수(偰長壽)는 비록 감등시키더라도 역시 옳지 못하다."하였다.
이에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되 차등이 있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장형을 집행당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마지못하여 이를 따랐다.
도전(道傳)이 남은(南誾) 등과 몰래 황거정 등에게 이르기를,
"곤장 1백 대를 맞은 사람은 마땅히 살지 못할 것이다."하니,
황거정 등이 우홍수 형제 3인과 이숭인 등 5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여서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황거정 등이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들어 죽었다고 아뢰었다.
도전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서 사감(私憾)을 갚았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뒤에 그들이 죽은 것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우리 전하(殿下) 신묘년(1411) 가을에 황거정과 손흥종 등이 임금을 속이고
제 마음대로 죽인 죄를 소급해 다스려서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었다.
[註 081] 성균시(成均試) : 고려 때 국자감(國子監)에서 진사(進士)를 뽑는 시험.
[註 082] 예위시(禮闈試) : 회시(會試)를 이름이니, 문무과(文武科) 과거(科擧)
초시(初試)의 급제자가 서울에 모여 다시 보는 복시(覆試).
[註 083] 조정(朝廷) : 중국.
[註 084] 공사(貢士) : 지방에서 천거한 선비.
[註 085] 제교(製敎) :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의 제술(製述).
[註 086] 고황제(高皇帝) : 명 태조(明太祖).
[註 087] 위조(僞朝) : 우왕(禑王).
[註 088] 공생(貢生) : 지방에서 천거한 학자.
■ 정도전이 몽금척·수보록·납씨곡·궁수분곡·정동방곡 등의 악장을 지어 바치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7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문하 시랑찬성사 정도전이 전문(箋文)을 올리었다.
"신(臣)이 보건대, 역대(歷代) 이래로 천명(天命)을 받은 인군은
무릇 공덕(功德)이 있으면 반드시 악장(樂章)에 나타내어 당시(當時)를 빛나게 하고,
장래(將來)에 전하여 보이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한 시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시대의 제작(制作)이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뛰어난 무용(武勇)은 그 계략을 도우셨고,
용기(勇氣)와 지혜는 하늘에서 주신 것이므로, 깊고 후한 인덕(仁德)이 민심(民心)에
결합(結合)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면, 천명(天命)을 받은 것은 반드시
인민들의 기대에서 나왔을 것이니 아침이 되기 전에 대의(大義)를 바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상서로운 봉(鳳)이 뭇 새들보다, 신령스런 지초(芝草)가 보통 풀보다
그 남[生]이 반드시 다르게 되니, 성인(聖人)이 일어날 적에 영이(靈異)한 상서(祥瑞)가
먼저 감응(感應)하게 되는 것은 또한 이치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에 ‘짐(朕)의 꿈이 짐(朕)의 점[卜]과 합하여
좋은 상서(祥瑞)에 합치되었다.’고 한 말과,
광무제(光武帝)의 적복부(赤伏符)049) 와 같은 종류가 전책(典冊)에 기재된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국가를
정제(整齊)하십시오.’라 한 것과, 또 어떤 사람이 이상한 글을 얻어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숨기고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이
그 후 10여 년 만에 그 말이 과연 맞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하늘이 오늘날의 일을 미리 알려 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여러 사람의 말을 용납해 받아들여서,
무릇 여항(閭巷) 사이의 미세(微細)한 백성들로서 그 안정된 처소를 얻지 못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이를 알게 되고, 이를 알게 되면 반드시 후하게 구휼(救恤)하여,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니, 언로(言路)를 열어 놓음이 넓었으며,
공신(功臣)을 대우하되 지성으로써 하여, 신서(信書)를 내려 주시고
금석(金石)에 새겼으니, 공신을 보전하심도 지극하였습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정치가 퇴폐(頹廢)하고 법도가 무너져서,
토지 제도[經界]가 바르지 못하여 백성이 그 해를 받게 되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않아서 관원이 그 직책을 잃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일체 모두 바로잡아 정하였으므로, 천도(天道)로써는 저와 같았고
인도(人道)로써는 이와 같았으니, 공을 비교하고 덕을 헤아려 보매
더불어 비할 데가 없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성시(聲詩)로써 전파하고
현가(絃歌)에 올려서 한없는 세상에 전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해야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민(不敏)하나 성대(盛代)를 만나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말석(末席)에
참여하고, 다행히 문필(文筆)로써 태사(太史)의 직책을 겸무하게 되었으니,
감격하여 뛰고 싶은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삼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와
정치를 보살핀 아름다운 점을 기록하여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이를 써서 전문(箋文)에 따라 바치옵니다.
1. 몽금척(夢金尺).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받들고 하늘에서 왔는데, ‘경 시중(慶侍中)050) 은 깨끗한 덕행은 있으나
또한 늙었으며, 최 삼사(崔三司)051) 는 강직한 명성은 있으나 고지식하다.’ 하고는,
‘전하(殿下)는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덕망도 있고 식견도 있으니,
백성의 희망이 붙게 되었다.’ 하면서, 이에 금자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살피심이 심히 밝으셔서, 길몽(吉夢)이 금자에 맞으셨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늙었고 강직한 사람은 고지식하니,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이것이 적합하였습니다. 상제(上帝)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서
국가를 정제(整齊)하게 했으니, 꼭 맞은 그 증험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입니다.
아들에게 전하여 손자에게 미치니, 천억년(千億年)까지 길이 미치겠습니다.
1. 수보록(受寶籙).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 석벽(石壁)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뒤에 임신년052) 에
이르러, 그말이 그제야 맞게 되었으므로, 수보록(受寶籙)을 지었습니다.
저 높은 산에는 돌이 산과 가지런했는데, 여기서 이를 얻었으니 실로 이상한 글이었습니다.
용감한 목자(木子)053) 가 기회를 타서 일어났는데, 누가 그를 보좌하겠는가?
주초(走肖)054) 가 그 덕망 있는 사람이며, 비의(非衣)055) 군자(君子)는
금성(金城)에서 왔으며, 삼전 삼읍(三奠三邑)056) 이 도와서 이루었으며,
신도(神都)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王位)를 8백 년이나 전한다.’는 것을
우리 임금께서 받았으니, 보록(寶籙)이라 하였습니다.
1. 전하께서 처음 왕위에 오르시매, 상법(常法)을 만들고 기강(紀綱)을 베풀어
백성들과 더불어 혁신(革新)하게 되니 칭송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 큰 것을 들어 말한다면, 언로(言路)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예악(禮樂)을 정하였습니다. 궁궐은 엄하여 아홉 겹이나 깊었으며,
만기(萬機)057) 는 하루 동안에도 매우 번잡하온데, 군왕께서는 민정(民情)을
통하게끔 하여,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 사방의 시청(視聽)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언로(言路)를 열어 놓은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순제(舜帝)와 같습니다.
성인(聖人)이 천명을받아 왕위에오르니, 많은 선비가 다투어일어나서 구름처럼 따랐습니다.
계책을 부리고 힘을 써서 그 공을 함께 이루었으니, 산하(山河)로써 맹세하여
시종(始終)을 보전했습니다. 공신(功臣)을 보전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무궁한 세대(世代)에까지 전하겠습니다. 토지제도가 무너졌는데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으니, 강한 사람은 합치고 약한 사람은 줄어들어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바로잡은 지 겨우 1주년에
국가의 창고는 꽉차고 백성은 휴식하게 되었습니다.
토지 제도를 바룬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임금께서 즐거워하여 천 년까지 누리겠습니다.
정치하는 요령은 예악(禮樂)에 있으니 가까이는 규문(閨門)에서부터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정하여 법칙을 전하였으니, 질서 정연하게 차례대로 되고
화락(和樂)으로써 기쁘게 되었습니다. 예악(禮樂)을 정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천지(天地)에 필적(匹敵)하겠습니다."
임금이 정도전(鄭道傳)에게 채색 비단을 내려 주고는,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이를 익히게 하였다.
도전이 또 그 무공(武功)을 서술하여 악사(樂詞)를 지어 바치었다.
"1. 납씨곡(納氏曲). 납씨(納氏)058) 가 세력이 강함을 믿고
동북방(東北方)에 쳐들어왔습니다. 방종하고 오만하여 힘으로써 자랑하니,
그 기세의 강함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북을 치매 용기가 배나 나는데,
앞장서서 적의 심장부에 부딛쳤습니다. 한 번 쏘아서 편비(褊裨)를 죽였으며,
두 번 쏘아서 괴수에게 미쳤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미처 구원하지 못하는데
적군을 추격하여 성화(星火)처럼 달려갔습니다. 바람소리는 진실로 두렵지만,
학(鶴)의 울음도 또한 의심할 만했습니다. 피로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니
동북방이 영구히 걱정이 없었습니다. 공을 이룸이 이번 거사(擧事)에 있었으니
이를 천만년(千萬年)에 전하겠습니다. 【위는 납씨(納氏)를 쫓은 공을 말한 것임.】
1. 궁수분곡(窮獸奔曲). 곤궁한 짐승이 위험한 곳으로 달아나는데, 우리 군사가
이를 덮치니, 좌우에서 활짝 갈라졌습니다. 혹은 죽이고 혹은 잡았으며, 혹은 달아나고
혹은 숨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부스러져 가루가 되고, 산 사람은 넋을 빼앗겼습니다.
하루 아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난을 평정하여 청명(淸明)하여졌습니다.
개가(凱歌)를 부르면서 돌아왔으니, 동방의 백성이 편안하여졌습니다.
【위는 왜구(倭寇)를 물리친 공을 말한 것임.】
1. 정동방곡(靖東方曲). 아아! 동방은 바다 모퉁이에 막혔는데, 저 교동(狡童)059) 이
임금의 자리를 도적질했습니다. 미친 계획을 자행(恣行)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니
화(禍)가 극도에 달했는데, 평정할 사람은 누구인가? 하늘이 덕망 있는 사람을 도와
의기(義旗)를 돌이켜서, 죄 있는 자는 내쫓고 반역한 자는 죽였습니다.
황제가 이에 기뻐하여 은혜를 미치게 하여, 군사가 나라로써 우리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백성과 사직(社稷)이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천만세(千萬世)까지 기한없이 전하겠습니다.
【위는 그 군사를 돌이킨 공을 말한 것임.】 "
[註 049] 적복부(赤伏符)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제위(帝位)에 오를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다는 적색(赤色)의 부절(符節).
[註 050] 경 시중(慶侍中) : 경복흥(慶復興).
[註 051] 최 삼사(崔三司) : 최영(崔瑩).
[註 052] 임신년 : 태조 즉위년.
[註 053] 목자(木子) : 이성계(李成桂).
[註 054] 주초(走肖) : 조준(趙浚).
[註 055] 비의(非衣) : 배극렴(裵克廉).
[註 056] 삼전 삼읍(三奠三邑) : 정도전(鄭道傳).
[註 057] 만기(萬機) : 임금이 보살피는 정무(政務).
[註 058] 납씨(納氏) : 나하추(納哈出).
[註 059] 교동(狡童) : 교활한 아이. 곧 신우(辛禑)를 지칭한 말임.
■ 정도전이 사시수수도를 바치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8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찬성사(贊成事) 정도전(鄭道傳)이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063) 를 만들어 바치었다.
[註 063]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 춘하 추동(春夏秋冬) 사시의 사냥하는 것을 그린 그림.
■ 관습 도감 판사 정도전이 전악서의 무공방을 거느리고 몽금척 등의 새 악곡을 연주하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0월 27일 기해 3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도평의사사에서 임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관습 도감(慣習都監) 판사(判事) 정도전(鄭道傳)·
왕강(王康)과 부판사(副判事) 정사척(鄭士倜)이 전악서(典樂署)의 무공방(武工房)을
거느리고 문덕(文德)·무공(武功)·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 등 새 음악을 올렸다.
■ 하윤의 상언대로 계룡산의 신도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다시 물색케 하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2월 11일 임오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대장군(大將軍)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였다.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윤(河崙)이 상언(上言)하였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 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명하여 글을 바치게 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南在) 등으로 하여금
하윤과 더불어 참고하게 하고, 또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봉상시(奉常寺)의 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山水)가 오고 간 것으로써 상고해 보니 길흉(吉凶)이 모두 맞았으므로,
이에 효생(孝生)에게 명하여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호씨(胡氏)091) 의 글이 이로부터
비로소 반행(頒行)하게 되었다. 임금이 명하여 고려 왕조의 서운관(書雲觀)에 저장된
비록 문서(秘錄文書)를 모두 하윤에게 주어서 고열(考閱)하게 하고는
천도(遷都)할 땅을 다시 보아서 아뢰게 하였다.
[註 091] 호씨(胡氏) : 호순신(胡舜臣).
■ 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매양 중조(中朝)028) 의 환시(宦侍)·
부녀(婦女)·봉사자(奉使者)의 청으로 인하여 관작이 제 분수에 넘쳐져서,
모두 청탁하는 사람을 시위(侍衛)하는 관직으로 임명하매, 세력을 믿고 교만하여
숙위(宿衛)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부위(府衛)가 비로소 무너졌으므로,
처음으로 홀지(忽只)·충용(忠勇) 등 애마(愛馬)029) 를 설치하여
우선 숙위(宿衛)에 대비(對備)하게 하였습니다. 위조(僞朝)030) 에 이르러 법제(法制)가
크게 무너져서, 무릇 부위(府衛)의 직책을 받은 사람은 한갓 국록(國祿)만 먹고
그 사무는 일삼지 아니하여 마침내 나라를 잃게 되었으니, 이것은 전하(殿下)께서 친히
보신 바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하늘의 큰 명령을 받고 성대하게 큰 일을 하시니,
마땅히 구폐(舊弊)를 고쳐서 나라의 형세를 무겁게 하고 천재(天災)를 그치게 하여,
혁신(革新)하는 정치를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들은 데에 익숙해져서
오랫동안 쌓인 폐해를 고치기기 어려우나,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으면 반드시
복색(服色)을 변경하고 휘호(徽號)를 고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시청(視聽)을
한결같이 하여 폐단을 고쳐서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송(宋)나라 태종(太宗)은 아름다운 명칭으로써 금군(禁軍)의 그전 칭호를 고쳐
사기(士氣)를 진작(振作)시켜 새롭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동반(東班)의 관명(官名)과 직호(職號)는 일체 모두 개정하여 명칭에 따라
실상을 책임지우니, 백관(百官)이 일에 나아가고 공(功)을 힘쓰게 되는데,
유독 부위(府衛)의 칭호만은 그전대로 그냥 있으며, 폐단도 또한 전과 같습니다.
신 등은 직책이 삼군(三軍)을 관장(管掌)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와
삼가 부위(府衛)의 당연히 행해야 될 사건(事件)을 조목별로 아래에 갖추어 올립니다.
1. 의흥 친군 좌위(義興親軍左衛)는 의흥 시위사(義興侍衛司)로 고치고,
우위(右衛)는 충좌 시위사(忠佐侍衛司)로 고치고,
응양위(鷹揚衛)는 웅무 시위사(雄武侍衛司)로 고치고,
금오위(金吾衛)는 신무 시위사(神武侍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각기 중(中)·좌(左)·우(右)·전(前)·후(後)의 5영(領)을 두어
중군(中軍)에 속하게 하고,
좌·우위(左右衛)는 용양 순위사(龍驤巡衛司)로 고치고,
신호위(神虎衛)는 용기 순위사(龍騎巡衛司)로 고치고,
흥위위(興威衛)는 용무 순위사(龍武巡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또한 각기 5영(領)을 두어 좌군(左軍)에 속하게 하고,
비순위(備巡衛)는 호분 순위사(虎賁巡衛司)로 고치고,
천우위(千牛衛)는 호익 순위사(虎翼巡衛司)로 고치고,
감문위(監門衛)는 호용 순위사(虎勇巡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또한 각기 5영(領)을 두어 우군(右軍)에 속하게 하고,
우시위(右侍衛)·순위(巡衛) 등 10사(司)는
매 1사(司)마다 인신(印信) 1과(顆)를 주조(鑄造)하여 주고,
도위(都尉)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할 것이며,
1. 상장군(上將軍)은 도위사(都尉使)로 고치고,
대장군(大將軍)은 도위첨사(都尉僉事)로 고치고, 제위(諸衛)의 장군(將軍)은
중군 사마(中軍司馬)·좌군 사마(左軍司馬)·우군 사마(右軍司馬)로 고치고,
장군(將軍)은 사마(司馬)로 고치고,
중랑장(中郞將)은 사직(司直)으로 고치고,
낭장(郞將)은 부사직(副司直)으로 고치고,
별장(別將)은 사정(司正)으로 고치고,
산원(散員)은 부사정(副司正)으로 고치고,
위(尉)는 대장(隊長)으로 고치고,
정(正)은 대부(隊副)로 고치고,
도부외(都府外)는 중군(中軍)으로 고쳐서
사직 1명, 부사직 1명, 사정 2명, 부사정 3명, 대장 20명, 대부 20명으로 하고,
좌군(左軍)은 사직1명, 부사직1명, 사정 2명, 부사정 3명, 대장 20명, 대부 20명으로 하고,
우군(右軍)은 위와 같으며, 매 1사(司)마다 도위사 1명, 도위첨사 2명으로 하고,
매 1영(領)마다 사마 1명, 사직 3명, 부사직 5명, 사정 5명,
부사정 7명, 대장 20명, 대부 40명으로 하고,
매 1도(道)마다 절제사(節制使)는 종실(宗室)이 맡고,
부절제사(副節制使)는 중추부(中樞府)에서 맡고,
병마 검할사(兵馬鈐轄使)는 가선(嘉善)이 맡는데,
주군(州郡)의 군사 1백 명을 관장(管掌)하고,
병마 단련사(兵馬團練使)는 정3품·종3품이 맡는데,
주군(州郡)의 군사 1백 명을 관장하고,
단련 판관(團練判官)에 이르기까지 군사를 관장함이 차등이 있게 하고,
중군(中軍)은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와 동북면(東北面)이 속하고,
좌군(左軍)은 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경상도·전라도가 속하고,
우군(右軍)은 양광도(楊廣道)·서해도(西海道)·서북면(西北面)이 속하게 할 것이며,
1. 시위군(侍衛軍)을 시위(侍衛)·순위(巡衛) 등 여러 사(司)에 나누어 속하게 한 것은
대개 한(漢)나라 남북군(南北軍)의 유제(遺制)를 본받은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남군(南軍)은 궁문(宮門)의 시위(侍衛)를 맡고,
북군(北軍)은 경성(京城)의 순검(巡檢)을 맡았으니,
이것이 내외(內外)가 서로 제어하여 장구히 치안(治安)되어,
화란(禍亂)이 발생하지 아니한 것으로, 이미 그렇게 된 명백한 증거입니다.
지금 의흥(義興)·충좌(忠佐)·웅무(雄武)·신무(神武)를 시위사(侍衛司)로 삼아
중군(中軍)에 속하게 하고, 인일(寅日)·신일(申日)·사일(巳日)·해일(亥日)로써
상장군(上將軍)·대장군이 각기 그 영(領)의 장군(將軍) 이하의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대궐 문에 윤번(輪番)으로 시위하게 하여, 한(漢)나라 남군(南軍)의 제도를 본받고,
용양(龍驤)·용기(龍騎)·용무(龍武)와 호분(虎賁)·호용(虎勇)·호익(虎翼)을
순위사(巡衛司)로 삼아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에 속하게 하고,
상장군·대장군이 그 영(領)의 장군 이하의 군관을 거느리고 진량(津梁)을 지키고,
교대로 사문(四門)을 돌아다니면서 파수(把守)해 막고,
윤번으로 상직(上直)하여 돌아다니면서 경계하게 해서
한(漢)나라 북군(北軍)의 제도를 본받고,
그 당번(當番) 된 각사(各司) 상장군 이하의 군관(軍官)을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때때로 명령을 내려 알려 주어서 어기지 못하게 하고,
무릇 입직(入直)하면 아무런 이유 없이 나가고 들어감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처벌할 것이며,
1. 사순(司楯)·사의(司衣)·사막(司幕)·사이(司彝)·사옹(司饔)의
상건(上件) 애마(愛馬)는 곧 고려 왕조의 말기에 첨설(添設)한 것이니,
마땅히 개혁해 버려야 될 것이지만, 각기 차비(差備)031) 가 있으니
창졸히 혁파(革罷)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목(都目)이 우두머리가 된 자는 여러 영(領)의 직책을 받았으나,
본번(本番)의 사무가 한가함이 없는 이유로써 영(領)을 따를 수 없어서,
이로 인하여 시위(侍衛)가 허술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각영(各領)에서 녹관(祿官)의 수효를 삭제(削除)하고
사순(司楯)의 제1번에 사직(司直) 1명, 부사직(副司直) 1명, 사정(司正) 2명,
부사정(副司正) 2명, 급사(給事) 3명, 부급사(副給事) 3명을 두고,
그 나머지 3번과 각 애마(愛馬)도
모두 이 예(例)를 써서 도목(都目)을 두원(頭員)으로 삼아,
장차 차례대로 옮겨서 거관(去官)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사무가 있는 사람은 그 녹(祿)을 먹게 되고,
그 녹(祿)을 먹는 사람은 그 사무에 종사하게 되어, 명칭과 실상이 서로 맞아서,
서로 침해하고 문란하지 아니하여 거의 올바르게 될 것이며,
1.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젖내나는 자제(子弟)와 내료(內僚)·공상(工商)·
잡례(雜隷)들이 위영(衛領)의 직책에 충당되었으므로,
외람되고 용잡(冗雜)되어 그 임무를 감내하지 못하여, 혹은 권세에 의탁하여
그 사무를 보지 않고서, 늠록(廩祿)만 한갓 허비할 뿐이고 시위(侍衛)는 허술하게
되었는데, 지금 그 폐단을 계승하고 일찍이 이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처음 교화를 시행하여 자손에게 계획을 전하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본부(本府)032) 와 병조(兵曹)의 제위영(諸衛領)의 현임자(現任者)로 하여금
신체를 살펴보고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그 건장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 직책을 다시 주고,
어리고 약한 사람과 늙고 병든 사람과 재주가 없는 사람과 잡류(雜類)에 속한 사람과
어떤 일을 핑계하고 출근(出勤)하지 아니한 사람은 일제 모두 삭제(削除)하고,
다시 친군위(親軍衛)에 소속된 원종 시위(原從侍衛)의 원인(員人)과
훈련관(訓鍊觀)에서 병법(兵法)을 익힌 원인(員人)과
태을수(太乙數)의 산법(算法)을 익힌 원인(員人)은 각기 소속 관원들로 하여금
보증 천거[保擧]하게 하여, 앞에서와 같이 신체를 살펴보고 재주를 시험하여
아뢰어 차비(差備)하게 할 것이며,
1. 무릇 위영(衛領)의 직책에 충원(充員)된 사람과
위영에 분속(分屬)된 각 성중 애마(成衆愛馬)를 모두 명부에 이름을 기재하게 하고,
또 시위(侍衛)하고 순작(巡綽)할 번(番)을 당하면
아무 사(司)의 몇 원인(員人)과 아무 애마(愛馬)의 몇 원인(員人)을 명부에 명백히 써서,
명부에 있는데도 숙위(宿衛)하지 아니한 사람과
명부에 없는데도 들어온 사람을 때때로 죄를 다스리게 하고,
당번으로 숙위하고 순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병진(兵陣)의 법을 예습(預習)시켜서,
잘한 사람은 상을 주고, 잘하지 못한 사람은 처벌하게 할 것이며,
1. 군사(軍事)는 엄격함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그 판지(判旨)를 따르지 아니하여 무릇 부위(府衛)의 법에 범한 자가 있는 사람은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로 하여금 상세히 심문하게 하여,
중한 사람은 계문(啓聞)하여 법사(法司)에 내려서 과단(科斷)하고,
그 간사하고 완악하여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성법(成法)을 무너뜨려
여러 사람의 시청(視聽)을 미혹시켜 어지럽게 하는 사람은
변방에 안치하여 군역(軍役)에 충당하게 할 것이며,
1. 군사를 거느린 사람은 직위가 낮으면 윗사람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어,
사역(使役)하기가 쉬우며, 그 본분을 편안하게 지키는데,
지금 조정에서 비록 도독(都督)·지휘(指揮)·천호(千戶)가 있지마는,
군사를 맡은 사람은 백호(百戶)이고, 고려 왕조에서 비록
중추부(中樞府)·병조(兵曹)·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있었지마는,
군사를 맡은 사람은 장군(將軍)이었으니,
이것은 장구히 치안(治安)을 유지하는 계책이었습니다.
본조(本朝)의 부병(府兵)의 제도도 이미 이 뜻이 있었으니,
장군으로 하여금 오원 십장(五員十將)033) 과 육십 위정(六十尉正)034) 을 맡게 하고,
대장군 이상은 참예하지 못하게 하고,
각도 주군(州郡)의 군사도 또한 병마사(兵馬使) 이하에게 명하여 이를 맡게 하고,
절제사(節制使)는 때때로 병마사의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만 규찰(糾察)하게 한다면
체통(體統)이 서로 유지(維持)되므로,
군사가 비록 모이더라도 반란을 그치게 하지 못할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註 028] 중조(中朝) : 원나라.
[註 029] 애마(愛馬) : 성중관(成衆官).
[註 030] 위조(僞朝) : 신우(辛禑).
[註 031] 차비(差備) : 특별한 사무를 맡은 것을 이름.
[註 032] 본부(本府) :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
[註 033] 오원 십장(五員十將) : 십위(十衛) 각영(各領)의 산원(散員) 5명을 오원(五員),
낭장(郞將) 5명과 별장(別將) 5명을 십장(十將)이라 함.
[註 034] 육십 위정(六十尉正) : 십위(十衛) 각영(各領)의 위(尉) 20명과
정(正) 40명을 합쳐 육십(六十)이라고 지칭함.
■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바치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5월 30일 무진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판삼사사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055) 을 지어서 바치니,
임금이 이를 관람하고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구마(廐馬)와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백은(白銀)을 내려 주었다.
[註 055]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조선(朝鮮)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規範體系書). 내용은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안국본(安國本)·
세계(世系)·교서(敎書) 등으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했고,
뒤이어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서 육전(六典)의 관할 사무를 규정하였음.
■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그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고,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궁전의 이름을 혹 그대로 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상을 일으키게 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여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경영하시더니, 다음 해 을미일에는
친히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쓰시고 선대의 왕과 왕후를
신묘(新廟)에서 제향을 올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새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대개 신(神)의 혜택을 넓히시고 뒷사람에게 복록을 주심이옵니다.
술이 세 순배 되어서,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하셨으므로,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말씀드립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하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노리갯감으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편안히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오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부(武夫)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거의 전하께서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의 건국(建國)한 공로는 여러 왕자들이
견줄 만한 이가 없음으로써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戶)를 내려 주고,
그 후에 여러 왕자들과 공신(功臣)으로써 각도(各道)의 절제사(節制使)로 삼아
시위(侍衛)하는 병마(兵馬)를 나누어 맡게 하니,
정안군은 전라도를 맡게 되고,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을 맡게 되었다.
이에 정안군이 가별치(加別赤)를 방번에게 사양하니,
방번은 이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이를 알고 또한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어린 서자(庶子)를 꼭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하였다.
심효생은 외롭고 한미(寒微)하면 제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여,
그 딸을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찬하여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빈(嬪)으로 만들게 하고,
세자의 동모형(同母兄)인 방번(芳蕃)과 자부(姉夫)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과 같이
모의(謀議)하여 자기편 당(黨)을 많이 만들고는, 장차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고자
몰래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을 사주(使嗾)하여 비밀히 중국의
여러 황자(皇子)들을 왕으로 봉한 예(例)에 의거하여
여러 왕자를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정안군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
도전 등이 또 산기 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을 사주(使嗾)하여
소(疎)를 올려 여러 왕자의 병권(兵權)을 빼앗기를 청함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점(占)치는 사람 안식(安植)이 말하였다.
"세자의 이모형(異母兄) 중에서 천명(天命)을 받을 사람이 하나뿐이 아니다."
도전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곧 마땅히 제거할 것인데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가 그 계획을 알고 비밀히 정안군에게 알렸다.
이때에 이르러 환자(宦者) 조순(曹恂)이 교지(敎旨)를 전하였다.
"내가 병이 심하니 사람을 접견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세자 외에는 들어와서 보지 못하게 하라."
김사행과 조순은 모두 그들의 당여(黨與)이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과 판중추(判中樞) 이근(李懃)·전 참찬(參贊) 이무(李茂)·
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병을 성문(省問)한다고 핑계하고는, 밤낮으로 송현(松峴)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서로 비밀히 모의하여,
이방석·이제와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박위(朴葳)·
좌부승지(左副承旨) 노석주(盧石柱)·우부승지(右副承旨)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 있으면서 임금의 병이 위독(危篤)하다고 일컬어
여러 왕자들을 급히 불러 들이고는,
왕자들이 이르면 내노(內奴)와 갑사(甲士)로써 공격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은 밖에서 응하기로 하고서 기사일에 일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이보다 먼저 정안군은 비밀히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李叔蕃)에게 일렀었다.
"간악한 무리들은 평상시에는 진실로 의심이 없지마는,
임금이 병환이 나심을 기다려 반드시 변고를 낼 것이니,
내가 만약 그대를 부르거든 마땅히 빨리 와야만 될 것이다."
이때에 와서 민무구(閔無咎)가 정안군의 명령으로써 이숙번을 불러서 이르게 되었다.
이때 임금의 병이 매우 급하니 정안군과 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청원군(淸原君) 심종(沈淙)·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와 이제(李濟) 등이
모두 근정문(勤政門) 밖의 서쪽 행랑(行廊)에서 모여 숙직(宿直)하였는데,
이날 신시(申時)에 이르러 민무질(閔無疾)이 정안군의 사저(私邸)에 나아가서 들어가
정안군의 부인(夫人)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니,
부인이 급히 종 소근(小斤)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빨리 대궐에 나아가서 공(公)을 오시라고 청하라." 소근이 대답하였다.
"여러 군(君)들이 모두 한 청(廳)에 모여 있는데, 제가 장차 무슨 말로써 아뢰겠습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네가 내 가슴과 배가 창졸히 아픔으로써 달려와 아뢴다고 하면 (公)께서 마땅히 빨리 오실 것이다."
소근이 말을 이끌고 서쪽 행랑에 나아가서 자세히 사실대로 알리니,
의안군(義安君)이 청심환(淸心丸)과 소합환(蘇合丸) 등의 약을 주면서 말하였다.
"마땅히 빨리 가서 병을 치료하십시오."
정안군이 사저(私邸)로 즉시 돌아오니, 조금 후에 민무질(閔無疾)이 다시 와서
정안군 및 부인과 함께 세 사람이 서서 비밀히 한참 동안을 이야기하다가,
부인이 정안군의 옷을 잡고서 대궐에 나아가지 말기를 청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궐에 나아가지 않겠소!
더구나 여러 형들이 모두 대궐안에 있으니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소.
만약 변고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나와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될 것이오."
이에 옷소매를 떨치며 나가니, 부인이 지게문 밖에까지 뒤따라 오면서 말하였다.
"조심하고 조심하세요."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이때 여러 왕자들이 거느린 시위패(侍衛牌)를 폐하게 한 것이
이미 10여 일이 되었는데, 다만 방번(芳蕃)만은 군사를 거느림이 그전과 같았다.
정안군이 처음에 군사를 폐하고 영중(營中)의 군기(軍器)를 모두 불에 태워버렸는데,
이때에 와서 부인이 몰래 병장기(兵仗器)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對應)할
계책을 하였던 것이다. 이무(李茂)는 본디부터 중립(中立)하려는 계획이 있어
비밀히 남은 등의 모의(謀議)를 일찍이 정안군에게 알리더니,
이때에 와서 민무질을 따라와서 정안군을 뵈옵고 조금 후에 먼저 갔다.
이무는 무질의 가까운 인척(姻戚)이었고, 죽성군(竹城君) 박포(朴苞)도
또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저쪽의 동정(動靜)을 몰래 정탐하였다.
이에 정안군은 민무구에게 명령하여 이숙번으로 하여금 병갑(兵甲)을 준비하여
본저(本邸)의 문 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유숙하면서 변고를 기다리게 하고는,
그제야 대궐에 나아가서 서쪽 행랑(行廊)에 들어가서 직숙(直宿)하였다.
여러 군(君)들은 모두 말을 남겨 두지 않았으나,
홀로 정안군만은 소근을 시켜 서쪽 행랑 뒤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다.
방번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정안군이 그를 부르니,
방번이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지 않고 들어갔다.
밤 초경(初更)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하였다.
"임금께서 병이 위급하여 병을 피하고자 하니,
여러 왕자들은 빨리 안으로 들어오되 종자(從者)는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오."
화(和)·종(淙)·제(濟)가 먼저 나가서 뜰에 서고,
정안군은 익안군(益安君)·회안군(懷安君)·상당군(上黨君) 등
여러 군(君)들과 더불어 지게문 밖에 잠시 서서 있다가, 비밀히 말하기를,
"옛 제도에 궁중(宮中)의 여러 문에서는 밤에는 반드시 등불을 밝혔는데,
지금 보니 궁문에 등불이 없다."하면서, 더욱 의심하였다.
화(和)와 제(濟)·종(淙)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으나,
정안군은 배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서쪽 행랑 문밖으로 나와서 뒷간에 들어가 앉아서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는데, 익안군과 회안군 등이 달려나오면서
정안군을 두 번이나 부르니, 정안군이 말하기를,
"여러 형님들이 어찌 큰소리로 부르는가?"하고,
이에 또 서서 양쪽 소매로써 치면서 말하였다.
"형세가 하는 수가 없이 되었다."
이에 즉시 말을 달려 궁성(宮城)의 서문으로 나가니
익안군·회안군·상당군이 모두 달아나는데, 다만 상당군만은 능히 정안군의 말을 따라오고
익안군과 회안군은 혹은 넘어지기도 하였다.
정안군이 마천목(馬天牧)을 시켜 방번을 불러 말하였다.
"나와서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 종말에는 저들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
방번이 안 행랑 방에 누웠다가, 마천목을 보고 일어나 앉아서 이 말을 다 듣고는
도로 들어가 누웠다. 방번의 겸종(傔從)은 모두 불량(不良)한 무리들로서
다만 활 쏘고 말 타기만 힘쓸 뿐이며, 또한 망령되이 세자(世子)의 자리를 옮기려고
꾀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느날 방번에게 일렀다.
"우리들이 이미 중궁(中宮)에 연줄이 있어 공(公)으로 하여금
이방석(李芳碩)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교명(敎命)이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니,
청하건대 나가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방번이 이 말을 믿고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다.
정안군은 그들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 줄을 알고 있었던 까닭으로
방번을 나오라고 불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정안군이 본저 동구(本邸洞口)의 군영(軍營) 앞길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을 부르니,
이숙번이 장사(壯士)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으며,
익안군·상당군·회안군 부자(父子)도 또한 말을 타고 있었다.
또 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신극례(辛克禮)·서익(徐益)·문빈(文彬)·
심귀령(沈龜齡)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정안군에게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인데,
이때에 이르러 민무구·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여러 군(君)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 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되, 홀로 소근만이 칼을 쥐었다.
정안군이 달려서 둑소(纛所)087) 의 북쪽 길에 이르러 이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어찌하면 되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호(軍號) 【방언(方言)에 말마기[言的]라 한다.】 를 내리기를 청합니다."
정안군이 산성(山城)이란 두 글자로써 명하고
삼군부(三軍府)의 문앞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기다리었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神)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정안군이 또 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간당(姦黨)이 모인 장소에 이르러 군사로써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문득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밤이 이경(二更)인데, 송현(松峴)을 지나다가 숙번이 말을 달려 고하였다.
"이것이 소동(小洞)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
정안군이 말을 멈추고 먼저 보졸(步卒)과 소근(小斤) 등 10인으로 하여금
그 집을 포위하게 하니, 안장 갖춘 말 두서너 필이 그 문 밖에 있고,
노복(奴僕)은 모두 잠들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근 등이 지게문을 엿보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화살 세 개가 잇달아 지붕 기와에 떨어져서 소리가 났다.
소근 등이 도로 동구(洞口)로 나와서 화살이 어디서 왔는가를 물으니, 숙번이 말하였다.
"내가 쏜 화살이다."
소근 등으로 하여금 도로 들어가 그 집을 포위하고 그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하니,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이근(李懃)·장지화 등은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 전 판사(判事) 민부(閔富)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정안군은 그 사람이 도전인 줄을 알고 이에 소근 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도전이 침실(寢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만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 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예전이란 것은 임신년088) 을 가리킨 것이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不足)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처음에 정안군의 부인이 자기 스스로 정안군이 서서 있는 곳까지 이르러
그와 화패(禍敗)를 같이하고자 하여 걸어서 나오니,
정안군의 휘하사(麾下士) 최광대(崔廣大) 등이 극력으로 간(諫)하여 이를 말리었으나,
종 김부개(金夫介)가 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부인이 그제야 돌아왔다.
도전이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급함을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처음에 담(湛)이 아버지에게 고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정안군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전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고려(高麗)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이무(李茂)가 문밖으로 나오다가 빗나가는 화살을 맞고서 말하였다.
"나는 이무이다."
보졸(步卒)이 이무를 죽이려고 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죽이지 말라."
이에 말을 그에게 주었다. 남은은 반인(伴人) 하경(河景)·최운(崔沄) 등을 거느리고
도망해 숨고, 이직(李稷)은 지붕에 올라가서 거짓으로 노복(奴僕)이 되어
불을 끄는 시늉을 하여 이내 도망해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대궐 안에 있던 사람이 송현(松峴)에 불꽃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임금에게 고하니, 궁중(宮中)의 호위하는 군사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고함을 쳤다. 이천우(李天祐)는 자기 집에서 반인(伴人) 2명을 거느리고 대궐로 가는데,
마천목(馬天牧)이 이를 바라보고 안국방(安國坊) 동구(洞口)에까지 뒤쫓아 가서 말하였다.
"천우 영공(天祐令公)이 아닙니까?"
천우가 대답하지 않으므로, 천목(天牧)이 말하였다.
"영공(令公)께서 대답하지 않고 가신다면 화살이 두렵습니다."
천우가 말하였다. "그대가 마 사직(馬司直)이 아닌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가?"
천목이 대답하였다."정안군께서 여러 왕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천우가 달려서 정안군에게 나아가서는 또 말하였다.
"이번에 이 일을 일으키면서 어찌 일찍이 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정안군이 박포(朴苞)와 민무질을 보내어 좌정승 조준을 불러 오게 하니,
조준이 망설이면서 점(占)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취(去就)를 점치게 하고는,
즉시 나오지 않으므로, 또 숙번으로 하여금 그를 재촉하고서,
정안군이 중로(中路)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조준이 이미 우정승 김사형과 더불어 오는데 갑옷을 입은 반인(伴人)들이 많이 따라왔다.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의 다리에 이르니,
보졸(步卒)이 무기(武器)로써 파수(把守)해 막으며 말하였다.
"다만 두 정승만 들어가십시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지나가매, 정안군이 말하였다.
"경 등은 어찌 이씨(李氏)의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는가?"
조준과 김사형 등이 몹씨 두려워하면서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에 정안군이 말하였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꼭 세우려고 하여 나의 동모 형제
(同母兄弟)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이로써 약자(弱者)가 선수(先手)를 쓴 것이다."
조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였다.
"저들의 하는 짓을 우리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이같은 큰일은 마땅히 국가에 알려야만 될 것이나, 오늘날의 일은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였으니, 공(公) 등은 마땅히 빨리
합좌(合坐)089) 해야 될 것이오."
노석주(盧石柱)와 변중량(卞仲良)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와 우승지 김육(金陸)을 그들의 집에 가서
불러 오게 하니, 문화(文和)가 달려와 나아가서 물었다.
"임금의 옥체(玉體)가 어떠하신가?"
석주(石柱)가 말하였다. "임금의 병환이 위독하므로
오늘 밤 자시(子時)에 병을 피하여 서쪽 작은 양정(涼亭)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한다."
이에 여러 승지들이 모두 근정문(勤政門)으로 나아갔다.
도진무(都鎭撫) 박위(朴葳)가 근정문에 서서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군사가 왔는가? 안 왔는가?"
문화가 물었다. "이때에 임금이 거처를 피하여 옮기는가? 어찌 피리를 부는가?"
박위가 말하였다. "어찌 임금이 거처를 피하여 옮긴다고 하겠는가?
봉화백(奉化伯)과 의성군(宜城君)의 모인 곳에 많은 군마(軍馬)가
포위하고 불을 지른 까닭으로 피리를 분 것뿐이다."
이보다 먼저 정안군이 숙번에게 이르기를,
"세력으로는 대적할 수 없으니, 정도전과 남은 등을 목 벤 후에
우리 형제 4, 5인이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말을 멈추고 나라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아서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한결같이 쭉 따른다면 우리들은 살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정안군이 돌아와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이르러 말을 멈추니,
밤이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는데,
평소에 주의(注意)하던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와서 모였다.
찬성(贊成) 유만수(柳曼殊)가 아들 유원지(柳原之)를 거느리고
말 앞에 와서 배알(拜謁)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무슨 이유로 왔는가?"
만수(曼殊)가 말하였다. "듣건대, 임금께서 장차 신(臣)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려 하신다더니 지금 옮겨 거처하지 않으셨으며,
또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와서 시위(侍衛)하고자 한 것입니다."
정안군은 말했다. "갑옷을 입고 왔는가?"
만수가 말하였다. "입지 않았습니다."
즉시 그에게 갑옷을 주고 말 뒤에 서게 하니, 천우가 아뢰었다.
"만수는 곧 정도전과 남은의 무리이니 죽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옳지 않다."
이에 회안군과 천우 등이 강요하여 말하였다.
"이같이 창졸한 즈음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저지(沮止)시킬 수 없습니다."
정안군이 숙번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형세가 그만두기가 어렵겠다."하면서,
그 죄를 헤아리게 하니, 만수가 즉시 말에서 내려
정안군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서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자백(自白)하겠습니다."
정안군이 종자(從者)를 시켜 말고삐를 놓게 하였으나,
만수는 오히려 단단히 잡고 놓지 않으므로, 소근(小斤)이 작은 칼로써 턱 밑을 찌르니,
만수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지는지라, 이에 목을 베었다.
정안군이 원지(原之)에게 이르렀다. "너는 죄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회안군이 뒤따라 가서 예빈시(禮賓寺) 문 앞에서 목을 베었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들어가 앉았는데,
정안군은 생각하기를, 방석 등이 만약 시위(侍衛)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궁문(宮門) 밖에 나와서 교전(交戰)한다면, 우리 군사가 적으므로 형세가
장차 물러갈 것인데, 만약 조금 물러가게 된다면 합좌(合坐)한 여러 정승(政丞)들이
마땅히 저편 군사의 뒤에 있게 될 것이므로,
혹시 저편을 따를까 여겨, 사람을 시켜 도당(都堂)에 말하였다.
"우리 형제가 노상(路上)에 있는데, 여러 정승들이 도당(都堂)에 들어가 앉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마땅히 즉시 운종가(雲從街) 위에 옮겨야 될 것이다."
마침내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백관(百官)들을 재촉해 모이게 하였다.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조온(趙溫)도 또한 대궐 안에 숙직(宿直)하고 있었는데,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 조온과 박위(朴葳)를 부르니, 조온은 명령을 듣고 즉시
휘하(麾下)의 갑사(甲士)·패두(牌頭) 등을 거느리고 나와서 말 앞에서 배알(拜謁)하고,
박위는 한참 동안 응하지 않다가 마지 못하여 칼을 차고 나오니
정안군이 온화한 말로써 대접하였다. 박위는 군대의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 이에 고하였다.
"모든 처분(處分)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뜻은 날이 밝으면 군사의 약한 형세가 나타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이 붙좇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정안군이 그를 도당(都堂)으로 가게 했는데, 회안군이 정안군에게 청하여 사람을 시켜
목 베게 하였다. 정안군이 조온에게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갑사(甲士)를 다 나오게 하니,
조온이 즉시 패두(牌頭) 등을 보내어 대궐에 들어가서 숙위하는 갑사를 다 나오게 하였다.
이에 근정전 이남의 갑사는 다 나와서 갑옷을 벗고 무기(武器)를 버리니,
명하여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처음에 이무(李茂)가 군대의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는 거짓으로 정신이 흐리멍덩하다고 일컬으면서
사람을 시켜 부축하고서 정안군에게 아뢰었다. "화살 맞은 곳이 매우 아프니
도당(都堂)의 아방(兒房)090) 에 나아가서 휴식하기를 청합니다."
정안군은 말하였다. "좋다."
조금 후에 이무는 박위가 참형(斬刑)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도로 나왔다.
이튿날 닭이 울 적에 임금이 노석주를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고,
이른 새벽에 또 이문화를 부르니, 문화가 서쪽 양정(涼亭)으로 나아갔는데,
세자와 방번·제(濟)·화(和)·양우(良祐)·종(淙)과 추상(樞相)091) 인 장사길(張思吉)·
장담(張湛)·정신의(鄭臣義) 등이 모두 벌써 대궐에 들어와 있었다.
여러 군(君)과 추상(樞相), 대소내관(大小內官)들과 아래로 내노(內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갑옷을 입고 칼을 가졌는데, 다만 조순(曹恂)과 김육(金陸)·노석주·변중량만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석주가 문화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교서(敎書)를 지으라."하니, 문화가 사양하기를 청하므로, 석주가 말하였다.
"한산군(韓山君)092) 이 지은 주삼원수교서(誅三元帥敎書)093) 의 뜻을
모방하여 지으면 된다."
문화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를 아는가?"
석주가 말하였다. "적을 부순 공로는 한 때에 혹 있을 수 있지마는,
임금을 무시한 마음은 만세(萬世)에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문사(文詞)이다."
문화가 말하였다. "지금의 죄인의 괴수(魁首)는 누구인가?"
석주가 말하기를, "죄인의 괴수는 다시 임금에게 품신(稟申)하겠으니
먼저 글의 초안(草案)부터 잡으라."하면서, 독촉하기를 급하게 하였다.
문화가 붓을 잡고 쓰면서 말하였다. "그대도 글을 지을 줄 아니,
친히 품신(稟申)하려는 뜻으로써 지으면 내가 마땅히 이를 쓰겠다."
이에 석주가 글을 지었다.
"아무아무[某某]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도모하여
개국 원훈(開國元勳)을 해치고자 했는데, 아무아무 등이 그 계획을 누설시켜서
잡히어 모두 죽음을 당했지만, 그 협박에 따라 반역한 무리들은
모두 용서하고 문죄(問罪)하지 않는다."
초안이 작성되자 석주가 초안을 가지고 들어가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잠정적으로 두 정승이 오기를 기다려 의논하여 이를 반포(頒布)하라."
조금 후에 도당(都堂)에서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도당(徒黨)을 결합(結合)하고 비밀히 모의하여
우리의 종친 원훈(宗親元勳)을 해치고 우리 국가를 어지럽게 하고자 했으므로,
신 등은 일이 급박하여 미처 아뢰지 못하였으나 이미 주륙(誅戮) 제거되었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놀라지 마옵소서."
이제(李濟)가 그때 임금의 곁에 있다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여러 왕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함께 남은 등을 목 베었으니, 화(禍)가 장차
신에게 미칠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시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공격하겠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화(禍)가 어찌 너에게 미치겠는가?"
화(和)도 또한 말리며 말하였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이에 이제가 칼을 빼어 노려보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화(和)는 편안히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이때 영안군(永安君)이 임금을 위하여 병을 빌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齋戒)를 드리고 있었는데,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는
몰래 종 하나를 거느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나와 걸어서 풍양(豐壤)에 이르러
김인귀(金仁貴)의 집에 숨어 있었다.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아서 맞이하여
궁성(宮城) 남문 밖에 이르니, 해가 장차 기울어질 때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임금에게 청하여 정안군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정안군이 굳이 사양하면서 영안군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영안군이 말하였다.
"당초부터 의리를 수립(樹立)하여 나라를 세워서 오늘날의 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이것이 정안군의 공로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이에 정안군이 사양하기를 더욱 굳게 하면서 말하였다.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嫡長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안군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처리함이 있겠다."
이에 정안군이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소(疏)를 올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자로 세우면서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殿下)께서 장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웠으며,
도전 등이 세자(世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들을 해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신령에 힘입게 되어
난신(亂臣)이 형벌에 복종하고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嫡長子)인 영안군(永安君)을 세워 세자로 삼게 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매, 문화가 이를 읽기를 마치었는데, 세자도 또한 임금의 곁에 있었다.
임금이 한참 만에 말하였다. "모두 내 아들이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방석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에게는 편리하게 되었다."하고는, 즉시 윤허를 내리었다.
대궐 안에 있던 정승들이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세자를 바꾸는 일입니다."
석주(石柱)가 교초(敎草)를 봉하여 문화로 하여금 서명(署名)하게 하니,
문화가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화(和)에게 청하였으나 또한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자리에 있던 여러 정승들에게 청하여도 모두 받지 아니하였다.
이에 문화가 말하였다. "그대가 지은 글을 어찌 자기가 서명(署名)하지 않는가?"
석주는, "좋다."하면서, 이에 서명하고 이를 소매 속에 넣었다.
조금 후에 석주가 대궐에 들어가 명령을 받아 나오면서 말하였다.
"교서(敎書)를 고쳐 써서 빨리 내리라."
문화가 말하였다. "어떻게 이를 고치겠는가?"
석주가 말하였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도모하여 왕자와 종실(宗室)들을 해치려고 꾀하다가,
지금 이미 그 계획이 누설되어, 공이 죄를 가리울 수가 없으므로,
이미 모두 살육(殺戮)되었으니, 그 협박에 따라 행동한 당여(黨與)는
죄를 다스리지 말 것입니다."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이를 써서 올리니, 임금이 시녀(侍女)로 하여금 부축해
일어나서 압서(押署)하기를 마치자, 돌아와 누웠는데, 병이 심하여 토하고자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며 말하였다.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정안군이 군기 직장(軍器直長) 김겸(金謙)을 시켜 무기고(武器庫)를 열고
갑옷과 창을 내어 화통군(火㷁軍) 1백여 명에게 주니, 군대의 형세가 조금 떨치었다.
갑사(甲士) 신용봉(申龍鳳)이 대궐에 들어가서 정안군의 말을 전하였다.
"흥안군(興安君)과 무안군(撫安君)은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는데,
의안군(義安君) 이하의 왕자는 어찌 나오지 않는가?"
여러 왕자들이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지 아니하므로, 다시 독촉하니,
화(和) 이하의 왕자들이 모두 나오다가,
종(淙)은 궁성(宮城)의 수문(水門)을 거쳐 도망해 나가고,
정신의(鄭臣義)만이 오래 머무르므로 이를 재촉하니,
그제야 나왔다. 도당(都堂)에서 방석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주안(奏案)을 윤가(允可)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방석이 울면서 하직하니, 현빈(賢嬪)이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하므로,
방석이 옷을 떨치고서 나왔다. 처음에 방석을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기로 의논했는데,
방석이 궁성(宮城)의 서문을 나가니, 이거이(李居易)·이백경(李伯卿)·조박(趙璞) 등이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도중(道中)에서 죽이게 하였다.
도당(都堂)에서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방번에게 일렀다.
"세자는 끝났지마는 너는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방번이 장차 궁성(宮城)의 남문을 나가려 하는데,
정안군이 말에서 내려 문안에 들어와 손을 이끌면서 말하였다.
"남은 등이 이미 우리 무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도 또한 마침내 면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장차 통진(通津)에 안치(安置)하려고 하여 양화도(楊花渡)를 건너
도승관(渡丞館)에서 유숙하고 있는데, 방간(芳幹)이 이백경(李伯卿) 등과 더불어
또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방번을 죽이게 하였다.
정안군이 방석과 방번이 죽었단 말을 듣고 비밀히 이숙번에게 일렀다.
"유만수(柳曼殊)도 내가 오히려 그 생명을 보전하고자 했는데, 하물며 형제겠는가?
이거이(李居易) 부자(父子)가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都堂)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同氣)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군사들이 변중량·노석주와 남지(南贄) 등을 잡아 가지고 나오니,
변중량이 정안군을 우러러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공(公)에게 뜻을 기울이고 있은 지가 지금 벌써 두서너 해 되었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저 입도 또한 고기덩이다."
또 남지는 남은의 아우로서 이때 우상 절도사(右廂節度使)가 되었는데,
모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뒤에 길에서 목을 베었다. 이제(李濟)가 나오니,
정안군이 이제에게 일렀다. "본가(本家)로 돌아가라."
임금께서 마침내 영안군(永安君)을 책명(策命)하여 세자로 삼고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우되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이며,
종자(宗子)는 성(城)과 같으니 과인(寡人)의 기대(期待)이다.
다만 그대의 아버지인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長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워 이에 방석(芳碩)으로써 세자로 삼았으니,
이 일은 다만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남은 등도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에 만약 초(楚)나라에서 작은 아들을 사랑했던 경계로써094) 상도(常道)에 의거하여
조정에서 간(諫)했더라면, 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 같은 무리는 다만 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세자로
세우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였다. 요전에 정도전·남은·심효생·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근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
죄인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왕실(王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방석(芳碩)은 화(禍)의 근본이니 국도(國都)에 남겨 둘 수가 없으므로
동쪽 변방으로 내쫓게 하였다. 내가 이미 전일의 과실을 뉘우치고,
또 백관(百官)들의 청으로 인하여 이에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으니,
그 덕을 능히 밝혀서 너를 낳은 분에게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고,
그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사직(社稷)을 진무(鎭撫)하라."
이에 문화와 김육(金陸)에게 명하여 나가서 세자를 알현(謁見)하게 하니,
세자가 문화를 불러 말하였다.
"대궐 안에 시위(侍衛)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빨리 대궐 안으로 도로 들어 가라."
문화가 즉시 도로 들어가니, 조순(曺恂)이 세자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시녀(侍女)와 내노(內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라."
문화가 또 나오니, 세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 나오는가?"
문화가 그 사유를 상세히 아뢰므로, 세자가 말하였다.
"그대를 이르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빨리 도로 들어가 시위(侍衛)하라."
또 상장군 이부(李敷)로 하여금 대궐 안에 들어가 시위(侍衛)하게 하니,
임금이 조순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갓과 안장 갖춘 말을 내려 주었다.
세자가 대궐 안으로 들어 갔다. 이제(李濟)가 사제(私第)에 돌아가니,
옹주(翁主)가 이제에게 일렀다.
"내가 공(公)과 함께 정안군의 사저(私邸)에 간다면 반드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듣지 않더니, 저녁때에 군사들이 뒤따라 와서 그를 죽이었다.
정안군이 이 소식을 듣고 그제야 놀라서, 즉시 진무(鎭撫) 전흥(田興)을 불러서 말하였다.
"흥안군(興安君)이 죽었으니 노비가 반드시 장차 도망해 흩어질 것이다.
그대가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흥안군 집에 이르러 시체를 거두게 하고,
노비들에게 신칙하기를, ‘만약 도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일에 반드시 중한 죄를 줄 것이다.’ 하라."
전흥이 그 집에 이르러 시비(侍婢)를 시켜 들어가 고하기를,
"놀라지 마시오! 나는 정안군의 진무(鎭撫)입니다."
하고는, 이에 시체를 염습(斂襲)하는 모든 일을 한결같이 정안군의 명령대로 하니,
옹주(翁主)가 감격하여 울었다. 남은은 도망하여 성(城)의 수문(水門)을 나가서
성밖의 포막(圃幕)에 숨으니, 최운(崔沄)·하경(河景) 등이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남은이 순군옥(巡軍獄)에 나아가고자 하니,
최운 등이 이를 말리므로, 남은이 말하였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았던 까닭으로 참형(斬刑)을 당하였지마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이에 스스로 순군문(巡軍門)밖에 이르렀다가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전하095) 께서 왕위에 오르매, 하경과 최운은 섬기는 주인에 충성했다는 이유로써
모두 발탁 임용하게 되었다. 정안군이 여러 왕자들과 함께 감순청(監巡廳)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동안을 모여서 숙직하고, 그 후에는 삼군부(三軍府)에 들어가 숙직하다가,
세자가 내선(內禪)096) 을 받은 후에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註 087] 둑소(纛所) : 원수(元帥)의 대기(大旗)가 있는 곳.
[註 088] 임신년 : 태조 즉위년.
[註 089] 합좌(合坐) : 몇 사람의 당상관(堂上官)이 모여 대사를 의논함.
[註 090] 아방(兒房) : 장신(將臣)이 머물러 자는 곳.
[註 091] 추상(樞相) : 중추원의 상신(相臣).
[註 092] 한산군(韓山君) : 이색(李穡).
[註 093] 주삼원수교서(誅三元帥敎書) : 고려 공민왕 때의 명장(名將)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 등 세 사람의 원수(元帥)를 목 벤 교서(敎書).
[註 094] 초(楚)나라에서 작은 아들을 사랑했던 경계로써 : 춘추 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평왕(平王)이 신하의 참소를 듣고 태자 건(建)을 폐하고
작은 아들 진(珍)을 사랑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던 고사(故事).
[註 095] 전하 : 태종(太宗).
[註 096] 내선(內禪) : 임금이 왕세자에게 양위(讓位)는 하였으나
아직 즉위(卽位)의 예(禮)를 올리지 않은 것을 말함.
■ 정도전 졸기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2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봉화(奉化)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경자년097) 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제향(祭享)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樂器)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훙(薨)하여,
을묘년에 북원(北元)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098) 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明)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元)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罪名)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宰相)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會津)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國政)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算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中興功臣)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誣罔)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賞與)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羅州)로 폄직(貶職)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推戴)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功勳)을 책정(策定)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제작하고, 또 악가(樂歌)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
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曲)이 있었다.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수찬(修撰)하였다.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계(官階)는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宣撫)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該博)하였으며,
항상 후생(後生)을 교훈하고 이단(異端)099) 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文武)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 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는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開國)할 즈음에 왕왕 취중(醉中)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漢)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100) 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註 097] 경자년 : 1360년.
[註 098] 선왕(先王) : 공민왕.
[註 099] 이단(異端) : 불교(佛敎).
[註 100] 장자방(張子房) : 장양(張良).
[註 101] 갑인년 : 1374년.
[註 102] 전하(殿下) : 태종(太宗).
[註 103] 경신년 : 1380년.
[註 104] 당후관(堂後官) : 중추원 정7품 벼슬.
■ 정도전·남은의 일파인 오몽을을 목베고 정진을 수군에 충군하다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10일 임자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오몽을(吳蒙乙)을 목 베고 정진(鄭津)을 수군(水軍)으로 내쫓았다.
간관(諫官) 권숙(權肅) 등이 말씀을 올리기를, "오몽을·정진 등은
남은·정도전과 함께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우고자 하여
종친(宗親)을 해치려고 하다가, 실정이 나타나고 일이 명백하게 되어,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이미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했는데도,
오몽을과 정진은 머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죄는 같은데도 처벌은 다르옵니다.
청하옵건대, 형법에 처하여 난적(亂賊)의 근원을 근절하게 하소서."하였다.
이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 신묘 1번째기사 1405년 명 영락(永樂) 3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이 죽었다.
준(浚)의 자(字)는 명중(明仲)이고, 호(號)는 우재(吁齋)인데, 평양부(平壤府) 사람이다.
증조(曾祖)는 인규(仁規)인데, 고려(高麗)에 공(功)이 있어 벼슬이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다.
아버지는 덕유(德裕)인데, 판도 판서(版圖判書)077) 이다.
준(浚)은 가계(家系)가 귀현(貴顯)하였으나, 조금도 귀공자(貴公子)의 습관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충효(忠孝)로써 자허(自許)하였다. 어머니 오씨(吳氏)가
일찍이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의 가갈(呵喝)078) 을 보고 탄식하기를,
"내 아들이 비록 많으나, 한 사람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하니,
준(浚)이 곧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맹세하고 분발해 배움에 힘썼다.
홍무(洪武) 신해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수덕궁(壽德宮)에 있을 적에,
준(浚)이 책을 끼고 궁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왕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곧 보마배 행수(步馬陪行首)에 보(補)하고 매우 사랑하였다.
갑인년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병진년에 좌·우위 호군(左右衛護軍) 겸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에 임명되었다가,
뽑혀서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가 되었는데,
이민(吏民)들이 두려워하고 사모하여 사납고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다.
순행하다가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귀(詩句)를 남겼는데,
식자(識者)들이 옳게 여기었다.
"동쪽 나라 바다를 깨끗이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여기 사는 백성은 눈을 씻고 그 때를 기다리게나"
여러 번 옮겨서 전법 판서(典法判書)079) 에 이르렀다.
이때에 조정의 정치가 날로 어지럽고, 왜구(倭寇)가 가득하여,
장수(將帥)들이 두려워서 위축(萎縮)되어 있었는데,
임술년 6월에 병마 도통사(兵馬都統使) 최영(崔瑩)이 준(浚)을 들어 써서
경상도 감군(慶尙道監軍)을 시키니, 준(浚)이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을 불러 두류(逗遛)한 죄를 문책하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을 참(斬)하여 장수들에게 조리를 돌렸으므로,
제장(諸將)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받들었다.
계해년에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으며,
무진년 여름에 최영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칠 때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대의(大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쌓인 폐단을 크게 개혁하여 모든 정치를 일신(一新)하려고 하였는데,
준(浚)이 중망(重望)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으시고,
〈준을〉 불러서 더불어 일을 의논하고는 크게 기뻐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발탁(拔擢)하시고,
크고 작은 일 없이 모두 물어서 하니,
준(浚)이 감격하여 분발(奮發)하기를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경기(經紀)080)를 바로잡고, 이(利)를 일으키고 해(害)를 없애어,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탕화(湯火)081) 가운데서 나와 즐겁게 사는 마음을 품게 한 것은 준(浚)의 힘이 퍽 많았다.
위주(僞主) 신우(辛禑)가 강화(江華)로 쫓겨날 적에
태상왕이 왕씨(王氏)를 세우기를 의논하였는데,
수상(首相) 조민수(曹敏修)가 본래부터 이인임(李仁任)의 편당(偏黨)으로서
우(禑)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이에 준(浚)이 맨먼저 민수(敏修)의 간사함을 논하여 쫓고, 이어서 인임(仁任)의 죄를
논하여 그 시호(諡號)와 뇌문(誄文)082) 을 깎아 없애기를 청하고,
또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민생(民生)을 후(厚)하게 하기를 청하니,
세가(世家)와 거실(巨室)에서 원망과 비방이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준(浚)이 고집하고 논쟁하기에 더욱 힘쓰니,
태상왕이 준(浚)과 뜻이 맞아 마침내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시행하였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기사년 겨울에 창(昌)이 친조(親朝)083) 하기를 청하니,
예부(禮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붙여서
이성(異姓)084) 이 왕이 된 것을 책(責)하였는데,
창(昌)의 외조(外祖) 이임(李琳)이 수상(首相)이 되어 비밀에 붙이고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준(浚)이 본래부터 왕씨(王氏)의 뒤가 끊긴 것을 분하게 여기고,
마침내 태상왕의 계책(計策)085) 에 찬성하여
심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 등 일곱 사람과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맞아서 세웠다.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옮기고 책훈(策勳)086)하여 조선군충의군(朝鮮郡忠義君)을 봉하였다.
세상에서 이를 ‘구공신(九功臣)’이라 이른다.
경오년 겨울에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신미년 6월에 중국에 들어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는데, 길[道]이 북평부(北平府)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연저(燕邸)에 있을 때인데, 〈태종 황제가〉 마음을 기울여
〈준을〉 대접하였다. 준(浚)이 물러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王)이 큰 뜻이 있으니 아마 외번(外藩)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하였다.
그때 정몽주가 우상(右相)으로 있었는데,
태상왕의 심복(心腹)과 우익(羽翼)을 없애려고 하여 비밀히 공양왕에게 고하기를,
"정책(定策)087) 할 때에 준(浚)이 이의(異議)가 있었습니다."하니,
공양왕이 이 말을 믿고 준에게 앙심을 품었었다.
임신년 3월에 정몽주가, 태상왕이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할 때를 타서
대간(臺諫)을 시켜 준(浚)과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 등을 탄핵하여,
붕당(朋黨)을 만들어서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지적하여 모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가,
이내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4월에 우리 주상(主上)께서 조영규(趙英珪)로 하여금 정몽주를 쳐 죽이게 하여,
준(浚)이 죽음을 면하고 찬성사(贊成事)에 복직되었다.
7월 신묘에 준(浚)이 여러 장상(將相)들을 거느리고 태상왕을 추대하였다.
태상왕이 즉위(卽位)하던 날 저녁에 준(浚)을 와내(臥內)088) 로 불러들여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대저(代邸)에서 들어와서 밤에 송창(宋昌)으로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남북군(南北軍)을 진무(鎭撫)하게 한 뜻을 경이 아는가?"하고,
인하여 도통사(都統使) 은인(銀印)과 화각(畫角)·동궁(彤弓)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한다."하고,
드디어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을 제수하고,
1등(一等)의 훈작(勳爵)을 봉(封)하여
‘동덕 분의 좌명 개국 공신(同德奮義佐命開國功臣)’의 호(號)를 주고,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와
전지(田地)·노비(奴婢) 등을 하사하였다.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차비(次妃) 강씨(康氏)에게서 출생하였는데,
태상왕이 이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강씨가 개국(開國)에 공(功)이 있다고 칭탁하여 이를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준(浚)과
배극렴(裵克廉)·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불러 의논하니,
극렴이 말하기를, "적장자(嫡長子)로 세우는 것이 고금(古今)을 통한 의(義)입니다."하매,
태상왕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준(浚)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功)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원컨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하였다.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태상왕이 종이와 붓을 가져다 준(浚)에게 주며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하니,
준(浚)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태상왕이 마침내 강씨의 어린 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삼으니,
준(浚) 등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12월에 문하 좌시중(門下佐侍中)이 되었다.
준(浚)이 전(箋)을 올려 식읍(食邑)과 실봉(實封)을 사양하니,
특별히 전교(傳敎)하여 윤허하지 아니하고, 은총(恩寵)과 위임(委任)이 비할 데 없었다.
갑술년에 또 5도 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고 막료(幕僚)를 두었는데,
태상왕이 명하여 도성(都城) 사문(四門)의 열쇠를 주관하게 하고,
그것을 준(浚)의 집에 간직해 두고 〈사문(四門)의〉 열고 닫음을 맡게 하였다.
정축년에 고황제(高皇帝)가 본국(本國)의 표사(表辭)089) 안에
희모(戲侮)090) 하는 〈내용의〉 글자[字樣]가 들어있다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그 글을 지은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잡아서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이 준(浚)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그때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있었는데,
병(病)을 핑계하여 가지 아니하고 음모하기를,
국교(國交)를 끊으면 자기가 화(禍)를 면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건언(建言)하기를,
"장병(將兵)을 훈련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急務)이니
진도 훈도관(陣圖訓導官)을 더 두고,
대소(大小) 중외(中外) 관리로서 무직(武職)을 띤 자와 아래로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습하게 하여 고찰(考察)을 엄중히 할 것입니다."하였다.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이 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준(浚)은 〈병으로〉 휴가〈休暇〉중에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전(道傳)과 은(誾)이 명령을 받고 준(浚)의 집에 이르러 이를 알리고, 또 말하기를,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였다.
준(浚)이 옳지 못하다 하여 말하기를, "이는 특히 그대들의 오산이다.
상감의 뜻은 본래 이와 같지 아니하다.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는 것은 불의(不義)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하고,
드디어 억지로 병(病)을 이기고 들어와서 〈태상왕을〉 뵙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백성들의 기뻐하고 숭앙(崇仰)함이
도리어 잠저(潛邸) 때에 미치지 못하옵고,
요즈음 양도(兩都)091) 의 부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피로함이 지극합니다.
하물며, 지금 천자(天子)가 밝고 착하여 당당(堂堂)한 천조(天朝)를 틈탈 곳이 없거늘,
극도로 지친 백성으로서 불의(不義)의 일을 일으키면
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의심하오리까?"마침내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은(誾)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은 다만 두승(斗升)의 출납(出納)만을 알 뿐이라,
어찌 기모(奇謀)와 양책(良策)을 낼 수 있겠소?"하였다.
태상왕이 준(浚)의 말을 좇으니, 의논이 마침내 그치었다.
도전(道傳)이 또 준(浚)을 대신하여 정승(政丞)이 되려고 하여,
은(誾)과 함께 매양 태상왕에게 준(浚)의 단점(短點)을 말하였으나,
태상왕이 대접하기를 더욱 두터히 하였다.
일찍이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준(浚)의 화상(畫像)을 그려서
하사(下賜)한 것이 두 번이고, 도전(道傳)으로 하여금 그 화상에 찬(讚)을 짓게 하였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준(浚)의 집을 지났는데,
준(浚)이 중당(中堂)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인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드리며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알고 받았다.
무인년 가을에 갑자기 변(變)이 일어나서,
임금이 밤에 박포(朴苞)를 보내어 준(浚)을 부르고, 또 스스로 길에 나와서 맞았다.
준(浚)이 이르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적장자(嫡長子)를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니, 태상왕이 이를 가하다고 하여,
9월에 상왕(上王)이 내선(內禪)을 받았다.
이에 공(功) 1등(等)을 기록하고, 인하여 좌정승(左政丞)을 제수하고
정난 정사 공신(靖難定社功臣)의 이름을 더하고,
다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하사하였다.
기묘년 8월에, 상왕(上王)의 꿈에 준(浚)이 벼슬과 지위가 분수에 넘친 다고
스스로 진술하여 물러가기를 원하였는데, 날이 밝자,
준(浚)이 과연 전(箋)을 올려 사면(辭免)하니,
상왕이 감탄하기를 매우 오랫동안 하다가, 위로하고 타일러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에 다시 사양하니,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집에 가 있게 하였다.
준(浚)이 수상(首相)이 되어 8년 동안 있었는데,
초창기(草創期)에 정사가 번거롭고 사무가 바쁜데,
우상(右相) 김사형(金士衡)은 〈성품이〉 순근(醇謹)092) 자수(自守)093) 하여
일을 모두 준(浚)에게 결단하게 하였다.
준(浚)은 〈성품이〉 강명 정대(剛明正大)하고 과감(果敢)하여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에서 지휘(指揮)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同列)들이 숙연(肅然)하여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체통(體統)이 엄하고 기강(紀綱)이 떨치었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준(浚)이 정승(政丞)을 사면하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을 사절(謝絶)하며,
시사(時事)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정비(靜妃)의 동생 무구(無咎)와 무질(無疾)이 좋은 벼슬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준(浚)이 막고 쓰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경진년 7월에 이를 두 사람이 가만히 대간(臺諫)에게 사주(使嗾)하여
몇 가지 유언(流言)을 가지고 준(浚)을 논(論)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순위부(巡衛府) 옥(獄)에 가두었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일이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줄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마땅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직사(職事)에 이바지해야 될 것인데,
세도가(勢道家)에 분주히 다니면서 그들의 뜻에 맞추어 일을 꾸며 충량(忠良)한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해치니, 이는 실로 전조(前朝) 말기의 폐풍(弊風)이다."하고,
죄를 묻는 위관(委官) 이서(李舒)에게 이르기를,
"재신(宰臣)은 정인 군자(正人君子)이다.
옥사(獄辭)를 꾸며서 사람을 사지(死地)에 넣을 수는 없다."하였다.
그리고, 곧 상왕(上王)에게 아뢰어서 준(浚)을 풀려나오게 하였다.
11월에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그대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임명하고,
갑인년 6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준(浚)이 다시 정승이 되어 일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자기와 뜻이 다른 자에게 방해를 받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아니 되어
다시 파(罷)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죽은 나이[卒年]가 60이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통곡하고, 소선(素膳)094) 을 자시었으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輟朝]하였다.
임금과 세자(世子)가 친림(親臨)하여 조제(弔祭)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그의 죽음을 들은 자는 애석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장사할 때 이르러서는 삼도감(三都監) 녹사(錄事)와
각사(各司) 이전(吏典)의 무리들이 모두 노제(路祭)를 베풀고 곡(哭)하였다.
준(浚)이 만년(晩年)에 비방을 자주 들었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피(避)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과 대우는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여,
임금이 일찍이 공신(功臣)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준(浚)에게 이르자,
임금이 수(壽)를 빌고, 그를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죽은 뒤에 어진 정승[賢相]을 평론(評論)할 적에
풍도(風度)와 기개(氣槪)를 반드시 준(浚)으로 으뜸을 삼고,
항상 ‘조 정승(趙政丞)’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준(浚)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澟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095) 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闈)096) 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097)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탕(豪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문집(文集) 약간 권(卷)이 있다. 일찍이 검상 조례사(檢詳條例司)로 하여금
국조 헌장조례(國朝憲章條例)를 모아서 이를 교정하여 책을 만들게 하고,
이름을 《경제육전(經濟六典)》이라 하여 중외(中外)에 간행(刊行)하였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조대림(趙大臨)이다.
임금의 딸 경정 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어 평녕군(平寧君)에 봉하였다.
[註 077] 판도 판서(版圖判書) : 호조 판서(戶曹判書).
[註 078] 가갈(呵喝) : 귀인의 행차에 행인을 꾸짖어 물리치는 것.
[註 079] 전법 판서(典法判書) : 형조 판서(刑曹判書).
[註 080] 경기(經紀) : 정치의 제도와 기강(紀綱).
[註 081] 탕화(湯火) : 끓는 물과 뜨거운 물.
[註 082] 뇌문(誄文) : 조문(弔文).
[註 083] 친조(親朝) : 임금이 친히 중국에 가서 황제에게 문안함.
[註 084] 이성(異姓) : 신씨(辛氏).
[註 085] 계책(計策) :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자는 계책임.
[註 086] 책훈(策勳) :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그 공을 찬양하여 훈작(勳爵)을 주는 일.
[註 087] 정책(定策) : 창(昌)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려고 하였던 계책을 말함.
[註 088] 와내(臥內) : 침실.
[註 089] 표사(表辭) : 표문(表文).
[註 090] 희모(戲侮) : 희롱하고 업신여김.
[註 091] 양도(兩都) : 개성과 한양.
[註 092] 순근(醇謹) : 성질이 순후(醇厚)하고 근신(謹愼)함이 있는 것을 말함.
[註 093] 자수(自守) : 행실이나 말을 제 스스로 조심하여 지키는 것.
[註 094] 소선(素膳) : 육류(肉類)가 없는 간소한 반찬.
[註 095] 엄체(淹滯) : 현재(賢才)가 있고도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
[註 096] 예위(禮闈) : 예조(禮曹).
[註 097] 포의(布衣) : 여기서는 아직 벼슬하기 전을 말함.
■ 영의정부사로 치사한 권중화의 졸기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1월 23일 정묘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치사(致仕)한 권중화(權仲和)가 죽었다.
중화(仲和)는 안동(安東) 사람인데, 고려(高麗) 정승(政丞) 권한공(權漢功)의 아들이다.
지정(至正)계사년 을과(乙科) 제2인에 올라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근신(謹愼)하고 주밀(周密)하여
친구(親舊)에게 사(私)를 두지 않으니, 공민왕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정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문하(門下)에 명사(名士)가 많았다. 염정(恬靜)219) 자수(自守)220) 하여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태조(太祖)가 즉위한 뒤에 기년(耆年)·숙덕(宿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제수하고
예천백(醴泉伯)을 봉하여, 본관(本官)221) 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고사(故事)에 정통하므로 무릇 상정(詳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물었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아서
의약(醫藥)·지리(地理)·복서(卜筮)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대전(大篆)222) 과 팔분(八分)223) 을 잘 썼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이[蝨]를 잡으며 이야기하였다.
늙어서 다만 말라빠진 말[馬] 한 필이 있었다.
나이 87세에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中官)을 명하여 조제(弔祭)하였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주었다.
중궁(中宮)도 또한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아들이 하나이니 권방위(權邦緯)이다.
■ 길창군 권근의 졸기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2월 14일 정해 1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졸(卒)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권근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세자에게 문병하도록 명하여,
세자가 막 떠나려고 하였는데, 권근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권근의 자(字)는 가원(可遠)인데 뒤에 사숙(思叔)으로 고쳤다.
호(號)는 양촌(陽村)이고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고려 정승 권부(權溥)의 증손이며, 검교 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그칠 적이 없었다.
홍무(洪武) 기유년에 나이 18세로서 병과(丙科)에 뽑혀
춘추 검열(春秋檢閱)에 제배(除拜)되어 왕부 비자치(王府閟者赤)가 되었다.
계축년에 과거(科擧) 향시(鄕試)에 3등[第三名]으로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25세 미만(未滿)인 까닭에 경사(京師)에 가서 응시하지 못하였다.
갑인년에 성균 직강(成均直講)과 예문 응교(藝文應敎)에 제배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갑자기 죽자, 원조(元朝)에서 사신을 보내어 반사(頒赦)하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예(禮)로 접대하기를 강요하니,
권근이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상서(上書)하여
원나라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고 곧아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국정을 담당한 자들이 이들을 모두 무고하여 죄를 뒤집어 씌워 내쫓았으나,
권근은 나이가 어려서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면할 수 있었다.
임술년에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제배되어, 위주(僞主) 우왕(禑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음희(淫戲)로 절도가 없었으므로, 상소하여 극진히 간하니,
우왕이 이에 말을 받아들이고, 간초(諫草)를 써서 병풍에 붙이도록 명하였다.
갑자년 겨울에 대언(代言)에 궐원(闕員)이 생겼는데,
당시 재상이 권근의 이름을 올려 추천하였더니, 우왕(禑王)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간관(諫官)이 되어 나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하였다."하고,
필(筆)을 잡아 그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무진년 봄에 최영(崔瑩)이 국정을 담당하여 중국에 대항할 뜻을 가지고,
무릇 중국 조정에 보내는 글에 사대(事大)의 구례(舊例)를 쓰지 아니하고
초격(草檄)051) 으로 이자(移咨)하려고 하니,
권근이 면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해서 마침내 초격(草檄)을 쓰지 아니하였다.
여름에 태조(太祖)가 의(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매,
좌대언(左代言)에 제배(除拜)되었다가 곧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이은(李垠) 등 33인을 뽑았다.
기사년 봄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승진하였고, 여름에는
문하 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더불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
가을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1통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국구(國舅) 이임(李琳)이 당시에 좌상(左相)이 되어 묘당(廟堂)에 나와 앉아 있었으므로,
그 자문(咨文)을 넘겨 주었다. 우리 태조는 우상(右相)이 되었으나
마침 신병으로 인하여 집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틈을 타서 태조께 진언하기를,
"예부(禮部)의 자문은 이성(異姓)052) 이 왕이 된 것을 문책한 것인데,
권근이 홀로 이임과 더불어 뜯어 보았습니다."고 하였다.
10월에 대간(臺諫)에서 이숭인(李崇仁)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서 재물을 모은 죄를 탄핵하여 폄출(貶黜)되었는데,
권근이 이숭인의 뒤를 이어 경사에 갔던 까닭으로,
이숭인의 무고(誣告)를 당한 사실을 알고 상서(上書)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히니,
대간에서 권근이 죄인의 편을 들고 언관(言官)을 헐뜯는다고 탄핵하여
우봉(牛峯)으로 폄출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卽位)하게 되자
대간에서 탄핵하기를, ‘권근이 사사로이 자문(咨文)을 뜯어서
먼저 이임(李琳)에게 보였으니, 이는 이성(異姓)을 편든 것이라’고 논죄(論罪)하여,
영해(寧海)로 옮겨 유폄(流貶)시켰다. 경오년 봄에 대간에서 다시 논핵(論劾)하여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태조가 구원하여 줌에 힘입어
장(杖)을 맞고 흥해(興海)로 양이(量移)되었다.
그해 여름에 이색(李穡) 이하 여러 폄소(貶所)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淸州)의 옥(獄)으로 잡혀 와 갇혔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에 들어와서 공해(公廨)가 모두 물에 잠겼었다.
여러 문사관(問事官)들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물을 피하였으므로,
갇힌 자들이 모두 달아나 피하였다.
권근만은 홀로 꼿꼿이 앉아서 신색(神色)이 자약(自若)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죄가 있으면 마땅히 천벌(天罰)을 받을 것이고,
만약 죄가 없으면 하늘이 어찌 나를 물에 빠져 죽게 하겠느냐?"하였다.
이때 죽음을 면하여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다가 익주(益州)로 옮겼었는데,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신미년 봄에 자편(自便)을 얻어 충주로 돌아갔다.
《예경(禮經)》을 찬정(撰定)하다가 이룩하지 못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고를 쓸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鷄龍山)에 거둥하여 권근을 특별히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나오게 하여, 정총(鄭摠)과 더불어 능묘(陵墓)의 비문(碑文)을 찬정하도록 명하였다.
갑술년 가을에 중추원 사(中樞院使)에 제배(除拜)되었다.
병자년 여름에 명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표전(表箋)에
희모(戲侮)의 글자가 있다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지은 사람인
정도전(鄭道傳)을 부르니, 정도전이 병이 있다고 칭탁하였다.
내사(來使)가 날마다 독촉하니, 권근이 자청(自請)하기를,
"표(表)를 짓는 일에 신도 참여하여 알고 있으니,
사신을 따라 경사(京師)에 가기를 원합니다."하니,
태조가 부르는 명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권근이 다시 아뢰기를, "전조(前朝) 말엽에 몸이 중한 죄를 입어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는데, 다행히 전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인덕(仁德)에 힘입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제 국초(國初)를 당하여 또 거두어 써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재조(再造)의 은덕(恩德)이 하늘처럼 망극(罔極)하오나, 신이 보답한 공로가 없습니다.
원컨대, 경사(京師)에 가서 하늘 같은 복(福)으로 변명(辨明)을 하여,
성은(聖恩)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까 합니다."하였다.
태조가 남몰래 황금(黃金)을 하사하여 행자(行資)로 쓰도록 하였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니, 사신 발라(孛羅)가 여러 재상(宰相)들에게 중국 조정에
들어가 대답할 말을 물었는데, 권근에게는 묻지 아니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어찌하여 오로지 나에게는 말하지 아니합니까?"하니,
발라(孛羅)가 낯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부르는 명령이 없는데도
자진하여 가니, 나라의 충신(忠臣)입니다.
황제께서 무슨 물을 말이 있겠으며, 그대 역시 무슨 대답할 말이 있겠습니까?"하였다.
9월에 중국 조정에 들어가니, 그 이튿날 예부(禮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표문(表文)을 지은 사람들을 억류(抑留)하기 위해 본국(本國)으로 자문(咨文)을 보내고,
칙명(勅命)으로 권근을 불러서 자문(咨文)의 초(草)를 보여 주었다.
권근이 고두(叩頭)하며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사대(事大)함에 있어
표문(表文)이 아니면 하정(下情)을 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해외(海外)에서 자라서 학식이 통달하지 못하여,
우리 임금의 충성을 능히 주광(黈纊)053) 에 각별히 사뢰지 못하였사오니
진실로 신 등의 죄입니다."하니,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우례(優禮)로 대접하고,
시제(詩題)를 내어 시(詩) 18편(篇)을 짓도록 명하였다. 시 한 편을 지어 올릴 때마다
황제가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주찬(酒饌)을 준비하고
기악(妓樂)을 갖추어 사흘동안 유람(遊覽)하게 하고, 또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황제가 이에 장률시(長律詩) 3편을 친히 지어 하사하고,
문연각(文淵閣)054) 에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여 한림 학사(翰林學士) 유삼오(劉三吾)·
허관(許觀)·경청(景淸)·장신(張信)·대덕이(戴德彝) 등과 더불어 서로 교유하게 하였다.
매양 우리 태조의 회군(回軍)한 의거(義擧)와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칭송하니,
황제가듣고 아름답게여겨 특별히 ‘노실수재(老實秀才)’라고일컫고,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돌아오자, 정도전(鄭道傳)이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정총(鄭摠) 등은 모두
구류(拘留)되었는데 혼자서만 석방되어 돌아왔다는 이유로써 탄핵하여
그 죄를 거듭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천자가 진노(震怒)한 때에 몸을 일으켜
자진하여 가서 좋은 말로 전대(專對)하여 능히 황제의 노여움을 풀게 하였으니,
공이 실로 적지 아니한데, 도리어 죄를 주라고 한단 말인가?"하였고,
권근도 또한 글을 올려 스스로 적은 노고를 서술하였으므로,
이에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고 칭(稱)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외우(外憂)를 당하였다.
기묘년에 기복(起復)시켜 첨서(簽書)에 제배(除拜)하니, 두 번이나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애걸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정당 문학(政黨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천전(遷轉)되어,
상소를 올려 사병(私兵)을 혁파(革罷)하였다. 경진년 11월에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임오년 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등 33인을 뽑았다. 중국의 사신이 반드시 권근의 안부를 먼저 묻고,
서로 대해서는 공경하는 예를 더하였다.
어사(御史) 유사길(兪士吉)과 내사(內史) 온불화(溫不花)가 사명을 받들고 왔을 때도
역시 압록강에서 권근의 안부를 물었다. 도성(都城)에 이르자,
전하가 사신에게 위호하는 잔치를 베풀어, 여러 재상들이 차례로 술잔을 돌리는
예를 행하였는데, 권근이 예를 행하게 되매, 유사길과 온불화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가 말하기를, "천사(天使)께서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시오?"하니, 유사길이,
"어찌 가히 사문(斯文)의 노성 군자(老成君子)를 만홀(漫忽)히 대하겠습니까?"하고,
온불화는, "태조(太祖) 황제께서 공경하는 분입니다."하였다.
온불화는 바로 발라(孛羅)이다. 계미년에 표(表)를 올려,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한 데에 나아가 《예경(禮經)》 절차(節次)를 상고하는 일을
마치겠다고 애걸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예전에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하였으나
벼슬을 사임하지는 아니하였다."하고,
곧 삼관(三館)의 선비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권근의 집에 나아가서
글 쓰는 일을 돕도록 명하였다. 책이 이룩되자, 선사(繕寫)하여 한 본(本)을 바쳤다.
을유년봄에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제배(除拜)되고, 겨울에 내우(內憂)를 당하였다.
병술년 봄에 기복(起復)을 명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제수하니, 두 번이나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애걸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가을에 임금이
세자에게 선위(禪位)하려고 하니, 상서(上書)하여 선위를 정지하도록 청하고,
또 병중에 예궐하여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은 알았으나.
그의 가슴속에서 일을 결단함이 이처럼 정밀하고 정확할 줄은 몰랐다."하였다.
정해년 여름에 임금이 친히 문사(文士)를 시험하였는데,
권근과 좌정승 하윤(河崙)을 독권관(讀券官)으로 명하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무자년 겨울에 병이 위독하였었는데, 임금이 노하여 대간(臺諫)의 관원을 장차
극형(極刑)에 처한다는 말을 듣고 상서(上書)하여 간절히 간하니, 임금이 이에 석방하였다.
병들어 누운 날부터 임금이 약(藥)을 하사하고 문병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58세였다. 임금이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였으며, 사제(賜祭)하고 조뢰(弔誄)하고,
부증(賻贈)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중궁(中宮)도 중사(中使)055) 를 보내어
치전(致奠)하고, 세자가 친히 관구(棺柩)에 나아가 제사지냈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최함(崔咸) 등이 삼관(三館)의 선비들을 거느리고
소뢰(小牢)056)의 제사를 지냈다.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권근이 검열(檢閱)에서부터 재상이 되기까지 항상 문한(文翰)을 맡아서
관각(館閣)의 직임을 두루 역임하고, 일찍이 한번도 외직(外職)에 임명되지 아니하였다.
타고난 성질이 정수(精粹)하고 온아(溫雅)하며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평상시에 비록 아무리 다급할 때일지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는 빛이 없었고,
배척을 당하고 폐출(廢黜)되어 사생(死生)이 목전(目前)에 있었던 때에도
태연하게 처신하고, 일찍이 상심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경세(經世)의 문장(文章)과 사대(事大)의 표전(表箋)도 또한 모두 찬술(撰述)하였다.
문집(文集)이 약간 있어 세상에 전한다.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아들과 사위를 불러
모아 놓고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아들과 사위들이 치상(治喪)을 일체 《가례(家禮)》대로 행하고
부도법(浮屠法)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아들이 넷이 있으니, 권천(權踐)·권도(權蹈)·권규(權跬)·권준(權蹲)이다.
[註 051] 초격(草檄) : 격문(檄文)처럼 과격한 언사를 쓴 글.
[註 052] 이성(異姓) : 신씨(辛氏). 곧 창왕(昌王).
[註 053] 주광(黈纊) : 면류관(冕旒冠)의 양쪽 귓가의 좌우에 늘어뜨린 누른 솜으로
만든 솜방울. 이것은 정사를 볼 때 참언(讒言)을 듣지 아니하고,
불급(不急)한 말을 함부로 듣지 않으려는 뜻을 나타낸 것임.
[註 054] 문연각(文淵閣) : 중국 명(明)나라 때 설치한 내각(內閣)의 하나.
음에 남경(南京)에 있을 때 설치하였으나, 태종(太宗) 영락제(永樂帝)가
북경(北京)으로 도(遷都)한 뒤 옮겼음. 전적(典籍)을 갈무리하고,
대학사(大學士)들이 모여 천자(天子)에게 독(講讀)하는 일을 하였음.
뒤에 청(淸)나라 때도 자금성(紫禁城) 내에다 문연각(文淵閣)을 설치하였음.
[註 055] 중사(中使) : 궁중에서 왕명(王命)을 전하는 내시(內侍).
[註 056] 소뢰(小牢) :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양(羊)을 통째로 제물로 바치던 일.
처음에는 양과 돼지를 아울러 바치는 것을 소뢰(小牢)라 하였으나,
뒤에 양(羊)만을 바치게 되었음.
■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으로 삼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8월 19일 무오 2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정도복(鄭道復)으로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삼았다. 도복(道復)은
정도전(鄭道傳)의 아우인데, 바야흐로 정도전이 나라 일을 맡아 그 세력이 조야(朝野)를
누를 때에 〈그 아우〉 도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니, 도복이 사양하기를,
"세력과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寒微)한 가문(家門)인데 영화(榮華)가 이미 지극합니다.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땅히 낚시질하고 밭을 갈며 내 천년(天年)을 마치겠습니다.
청컨대, 형(兄)은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하였다.
뒤에 성주(星州)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이 되었는데,
7년이나 오래 되었으므로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 진산 부원군 하윤의 졸기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1월 6일 계사 2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정평(定平)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히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431) 하고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백 권을 치부(致賻)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인지(鄭麟趾)를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원로(元老) 대신은 인군의 고굉(股肱)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典禮)이다. 생각하면 경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山嶽)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 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雄文)이 되었고, 충신 중후(忠信重厚)한 자질로 미루어
경세(經世)의 큰 모유(謀猷)가 되었다. 일찍 이부(二府)432) 에 오르고
네 번 상상(上相)이 되었다. 잘 도모하고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는 유책(遺策)이 없었고,
사직을 정하고 천명을 도운 것은 공훈(功勳)이 맹부(盟府)에 있다.
한결같은 덕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우리 국가를 보호하고 다스렸는데,
근자에 고사(故事)를 가지고 나이 늙었다 하여 정사에서 물러났다.
그 아량을 아름답게 여기어 억지로 그 청에 따랐다.
거듭 생각건대, 삭북(朔北)은 기업(基業)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아 살피려고 하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의 근로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陵寢)이
중하기 때문에 경(卿)의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슬프다!
사생(死生)의 변(變)은 인도(人道)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大疑)를 결단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하윤(河崙)은 진주(晉州) 사람인데, 순흥 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영주(知榮州)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 치행(治行)을 제일로 올리니,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제수되어
여러 벼슬을 거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침범하니,
하윤이 힘써 불가함을 말하였는데,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에 추방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계유년에 기용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었다.
태조가 계룡산(雞龍山)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이미 역사를 일으키니,
감히 간하는 자가 없는데, 하윤이 힘써 청하여 파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가 우리의 표사(表辭)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히 보낼지 안보낼지를 정신(廷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상왕(上王)이 위(位)를 잇자
하윤에게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고 정사공(定社功)을 녹훈(錄勳)하여 1등으로 삼고,
작(爵)을 진산군(晉山君)이라 주었다.
경진년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가 되고,
9월에 우정승(右政丞)이 되매 작을 승진하여 백(伯)으로 삼았다.
11월에 임금이 즉위하자 좌명공(佐命功)을 녹훈하여 1등으로 삼았다.
신사년 윤3월(閏三月)에 사면하였다가 임오년 10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으로 제수되어
영락 황제(永樂皇帝)의 등극(登極)한 것을 들어가 하례하는데,
하윤이 명(明)나라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爵命)을 고쳐 주소서."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기어
계미년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인장(印章)을 받들고 왔다.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어 특별히 전구(田口)를 주었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사면하기를 빌고, 을유년 정월에 다시 복직하였다가
정해년 7월에 또 가뭄으로 사피하기를 청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이무(李茂)가 득죄하자 온 조정이 모두 베기를 청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영구(營救)433)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하윤이 ‘죽일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하였다.
을미년 여름에 이직(李稷)이 그 향리에 안치(安置)되었는데,
하루는 하윤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에서 인견하였다.
하윤이 말이 없이 웃으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이직의 죄가 외방(外方)에 내칠 죄입니까?"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임진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고 갑오년 4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금년 봄에이르러 나이 70으로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윤이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 나갔다.
하윤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端委]434) 차림으로 묘당(廟堂)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僮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미미(亹亹)하게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불씨(佛氏)와 노자(老子)를 배척하여 미리 유문(遺文)을 만들어 건사(巾笥)435) 에 두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섬실(纖悉)하고 주비(周備)하였다. 또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하윤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그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자호(自號)는 호정(浩亭)이요, 자(字)는 대림(大臨)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아들은 하구(河久)와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하장(河長)·하연(河延)·하영(河永)이었다. 하윤이 죽자 부인 이씨(李氏)가 애통하여
음식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임금이 듣고 약주(藥酒)를 하사하고 전지하기를,
"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 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하였다.
이씨가 사람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나와 상언하기를,
"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체를 서울 집에 들여와 빈소(殯所)하게 하소서."하니,
명하여 예조(禮曹)에 내리어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이어서 전지하기를,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명을 받들고 죽으면 대부(大夫)·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431] 소선(素膳) : 육류(肉類)가 없는 수라.
[註 432] 이부(二府) :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원(中樞院).
[註 433] 영구(營救) :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함.
[註 434] 관복[端委] : 주(周)나라 시대에 관리가 착용하던 현단복(玄端服)과
위모관(委貌冠)을 말하는데, 곧 관리의 관복(冠服)을 뜻함.
[註 435] 건사(巾笥) : 비단을 바른 상자.
■ 형조 판서 정진의 졸기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6일 갑오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형조 판서 정진(鄭津)이 졸(卒)하였다.
정진은 봉화현(奉化縣) 사람이니,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다.
홍무 임술년에 낭장(郞將)에 임명되어 여러번 옮겨 사재 령(司宰令)과
전농 정(典農正)에 이르렀다. 임신년에 태조가 처음 왕위에 오름에,
정진은 공신(功臣)의 적자(嫡子)로서 지방관에 보직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에 임명되니, 연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훈가(勳家)의 아들이니 교만하고 자부심이 많아서 서무(庶務)는 친히 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정진이 임지(任地)에 가서 겸손하여 자기를 억제하고 정사에 부지런하니,
고을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한 해가 지나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가 되고,
승진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다가 형조 전서(刑曹典書)로 옮겨졌다.
이 때 최안종(崔安宗)의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그 시체를 첩의 집 문밖에 두었는데,
첩이 매질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없는 죄를 있다고 자복(自服)하였다.
옥사(獄事)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정진이 관청에 올려 말하기를,
"사람을 죽인 자가 그 흔적을 가리우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인데,
어찌 자기가 남편을 죽여서 그 문밖에 둘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다시 그 아내를 국문하니, 과연 말이 궁하여 자복하였다.
그 당시에 공명(公明)하고 진실하다고 일컬었었다.
경흥부 윤(敬興府尹)에 승진되고, 나가서 원주 목사(原州牧事)가 되었고,
들어와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임명되었다.
정해년에 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가 되고, 병신년에 인녕부 윤(仁寧府尹)이 되고,
충청도 도관찰사(都觀察使)·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평안도 도관찰사(都觀察使)·
공조 판서·개성 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역임하고,
형조 판서로 옮겨져서 이 때에 와서 돌아가니, 나이 67세이다.
부고(訃告)가 들리니,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내렸다.
희절(僖節)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조심하여 두려워함을 희(僖)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억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두 아들이 있으니, 내(來)와 속(束)이다. 상사(喪事)는 일절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라 하고 불사(佛事)는 하지 않았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었다.
■ 영중추부사 정문형의 졸기
연산군일기 40권, 연산 7년 1월 15일 갑자 2번째기사 1501년 명 홍치(弘治) 14년
영중추부사 정문형(鄭文炯)이 죽었다.
정문형의 자(字)는 야수(野叟)며, 봉화현(奉化縣) 사람으로, 정도전(鄭道傳)의 증손이다.
정통(正統)012) 12년013) 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선보(選輔)되고,
사헌부 감찰·예조 좌랑·사간원 사간을 역임했다.
천순(天順) 8년014) 에 공조 참의에 임명되고, 조금 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어
경상도 관찰사로 특별 제수되었다. 성화(成化) 2년015) 에 함길도 절도사로 특별 제수되고,
임진년016) 에 자헌대부로 가자되어 평안도 절도사에 제수되었다가, 본도 관찰사로 옮겼다.
을미년017) 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었고, 의정부 우찬성, 이조판서, 호조판서로 옮겼다.
임자년018) 에 우찬성에 승진되고 병진년019) 우의정에 승진되었으나,
대관의 논박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이때에 졸년(卒年)이 75, 시호는 양경(良敬)이니, 온량해서 풍류를 좋아함[溫良好樂]이
양(良)이요, 일찍 일어나서 일에 공손함[夙興恭事]이 경(敬)이다.
일에 임해서 공손하고 삼가 조정에 선 지가 50년 동안 생재(眚災)020) 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질이 탐욕스럽고 조급하므로 칭찬할만한 일이 없었다.
[註 012] 정통(正統) :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註 013]12년 : 1447 세종 29년.
[註 014] 천순(天順) 8년 : 1464 세조 10년.
[註 015] 성화(成化) 2년 : 1469 세조 12년.
[註 016] 임진년 : 1472 성종 3년.
[註 017] 을미년 : 1475 성종 6년.
[註 018] 임자년 : 1492 성종 23년.
[註 019] 병진년 : 1496 연산군 2년.
[註 020] 생재(眚災) : 생은 과오 재는 불행.
■ 영의정 신숙주의 졸기
성종실록 56권, 성종 6년 6월 21일 무술 1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가 졸(卒)하였으므로,
조회를 정지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신숙주의 자(字)는 범옹(泛翁)이고 고령현(高靈縣) 사람인데,
공조 우참판(工曹右參判) 증 영의정(贈領議政) 신장(申檣)의 아들로서,
영락(永樂)정유년549) 6월 정유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량(氣量)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 번만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 정통(正統)무오년550) 에
세종(世宗)이 비로소 시부 진사(詩賦進士)를 두었는데,
신숙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연이어 장원을 하였고,
또 생원(生員)에 합격하였으며, 기미년551) 에 문과(文科)에 제 3인으로 뽑히어
처음에는 전농 직장(典農直長)에 제수되었다. 이조(吏曹)에서 신숙주를 제집사(祭執事)에
임명하였는데, 관원이 잊어버리고 첩(牒)을 주지 아니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을 궐하게 되었으므로, 헌부(憲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관원이 죄를 얻어
파역(罷役)을 당하게 되었다. 신숙주가 이를 민망히 여기어 곧 스스로
거짓 복죄(服罪)하여 이르기를, ‘관원은 실제로 첩(牒)을 전했지마는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원은 온전할 수 있었으나 신숙주는 파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후덕(厚德)함을 추앙하였다. 신유년552) 가을에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제수되었다. 계해년553) 에 국가(國家)에서 사신을 보내어
일본(日本)과 교빙하게 되자,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신숙주가 마침 병들었다가 처음으로 나았는데 세종(世宗)이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묻기를, ‘들으니 네가 병으로 쇠약하다고 하는데,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
신의 병이 이미 나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차 떠나려고 하자 친척(親戚)과 고구(故舊)들은 사별(死別)하는 것이라고 여겨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으나, 신숙주는 온화하여 조금도 난처한 기색이 없었다.
일본에 도착하여 그 나라 사람들이 붓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시(詩)를 써 달라고
구(求)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나 신숙주는 붓을 잡고 즉석에서 써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돌아올 때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서, 우리 나라가 도주(島主)와 더불어
세견선(歲遣船)의 수(數)를 약정(約定)하려고 하는데 도주가 아랫사람들에
오도(誤導)되어 의위(依違)554) 하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듣고,
신숙주가 도주에게 말하기를, ‘배의 수가 정해지면 권한이 도주에게 돌아갈 것이요,
아랫사람들에게 이익되는 바가 없을 것이며, 수를 정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도주에게 의뢰하겠느냐? 그 이롭고 해로움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뒷날에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도주가 드디어 약속을 정하였다. 우리 나라로 향할 때 구풍(颶風)555) 을 만나서
여럿이 모두 얼굴 빛이 변하였으나, 신숙주는 신색(神色)이 태연자약하여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 이제 내가 이미 일본국(日本國)을 보았고,
또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556) 에 경박(經泊)하여 예악 문물(禮樂文物)의
성(盛)함을 얻어보는 것도 또한 유쾌한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어떤 본국(本國)의 여자가 일찍이 왜적(倭賊)에게 사로잡혔다가 임신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같은 배로 오게 되었다. 배 가운데에서 모두 말하기를,
‘아이 밴 여자는 배가 가는 데에 꺼리는 바인데, 오늘의 폭풍(暴風)은
이 여자의 탓이라.’라고 하면서 바다에 던지고자 하였으나, 신숙주가 홀로 말하기를,
‘남을 죽이고 삶을 구(求)하는 것은 차마 할 바가 아니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바람이 자게 되어서 일행이 모두 무사하였다.
정묘년557) 가을의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에 뛰어넘어
제수되었고, 경태(景泰)경오년558) 에 조사(詔使)559) 예겸(倪謙)·사마순(司馬恂)이
본국(本國)에이르렀는데, 세종이 문장에 능한자를 선발하여 교유(交遊)하도록 명하였더니,
신숙주와 성삼문(成三問)이 예겸 등을 따라 창화(唱和)560) 하였으므로
크게 칭상(稱賞)을 받았고 예겸이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를 짓자
신숙주가 바로 그 자리에서 보운(步韻)561) 으로 이에 화답하였다.
예겸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갈 때 시(詩)에 붙여 이르기를, ‘사부(詞賦)는 일찍이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의 문단(文壇)에 올라 명성이 전해져
조단(朝端)562) 에 가득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에게 탄복한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임신년563) 에 세조(世祖)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중국 서울에 갈 때에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갔다. 계유년564) 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고, 세조의 정난(靖難)에 책훈(策勳)565) 되어
수충 협책 정난 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갑술년566) 에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을해년567) 에 세조가 즉위(卽位)하자
동덕 좌익 공신(同德佐翼功臣)의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자헌 대부(資憲大夫)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졌다.
주문사(奏聞使)가 되어서는 고명(誥命)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서 돌아왔으므로
토지와 노비[臧獲]·안마(鞍馬)·의복(衣服)을 하사받았다.
병자년568) 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使)에 올라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으며,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전임(轉任)되어 판병조사를 겸했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문형(文衡)569) 을 맡았다.
천순(天順)무인년570) 에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에 나아가고,
기묘년571) 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보다 앞서 북로(北虜)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므로 세조가 매양 정토(征討)하고자 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분운(紛紜)하였으나, 신숙주가 홀로 계책을 세워 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경진년572) 에 신숙주를 강원도 함길도 도체찰사(江原道咸吉道都體察使)로
삼아 가서 토벌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첩(勝捷)이 들리자
표리(表裏)·토전(土田)·노비를 하사하였다. 임오년573) 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성화(成化)병술년574) 에 사면하고, 고령군(高靈君)으로 개봉(改封)하였다.
무자년575) 에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자 세조의 유명(遺命)으로써
원상(院相)을 설치하여 신숙주도 참여하였다.
남이(南怡)의 난을 참정(參定)하고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기축년576) 에 예종이 승하(升遐)하자 중외(中外)가 황황(遑遑)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신숙주가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품(稟)하여
대책(大策)을 처음으로 정하였다.
신묘년577) 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또 영의정에 제수되자 신숙주가 여러 번 사면하기를 상서(上書)하니,
대왕 대비가 전지(傳旨)하기를, ‘세조께서 경(卿)을 일컬어 위징(魏徵)578) 이라
하였는데, 이제 이를 잊었느냐? 어찌하여 사양하느냐?’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9세였다. 부음이 들리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내가 깊이 의지하던 대신(大臣)들이
근래에 많이 죽었는데, 이제 영의정이 또 죽었으니,
내가 매우 애처롭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신숙주는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하고 관후(寬厚)하면서 활달(豁達)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미치고 의논(議論)에 항상 대체(大體)를 지녀서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아니하였으며,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있어
강하(江河)579) 를 터놓은 것과 같이 막힘이 없어서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오랫동안 예조(禮曹)를 관장하여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자신의 소임을 삼아
사명(詞命)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정음(正音)을 알고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였으며, 한음(漢音)을 배우는 자들이 많이 이에 힘입었다.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무릇 그 산천(山川)·관제(官制)·풍속(風俗)·족계(族系)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를 지어 올렸다.
세종이 《오례의(五禮儀)》를 찬술하였으나 아직 반포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신숙주에게 명하여 간정(刊定)하여 이를 인행(印行)하게 하였다.
문장(文章)을 만드는 것은 모두 가슴 속에서 우러나왔고,
각삭(刻削)580) 을 일삼지 않았으며, 스스로 호(號)를 보한재(保閑齋)라 하고
그 집(集)581) 이 있어 세상에 인행되었다.
친척(親戚)을 은혜로써 위무(慰撫)하였고, 요우(寮友)를 성심으로 대접하였으며,
비록 복례(僕隷)와 같이 천한 자라도 모두 은의(恩義)로써 대우하였다.
졸(卒)하게 되자 듣는 자가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유명(遺命)으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부도(浮屠)582) 의 법을 쓰지 말게 하였으며
서적(書籍)을 함께 묻도록 하였다.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는데,
도덕(道德)을 지키고 문장에 박학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신숙주는 증 영의정 부사(贈領議政府事) 윤경연(尹景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여덟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長男)은 신주(申澍)인데 먼저 죽었고,
다음은 신면(申㴐)인데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道觀察使)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만나 죽었으며,
다음은 신찬(申澯)인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고,
다음은 신정(申瀞)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며,
다음은 신준(申浚)인데 병조 참의(兵曹參議)로서,
신정과 신준은 모두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였다.
다음은 신부(申溥)이고, 다음은 신형(申泂)이며, 다음은 신필(申泌)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신숙주는 일찍이 중한 명망이 있어, 세종이 문종(文宗)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
세조를 조우(遭遇)583) 하여 계책이 행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져,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고 하였고,
매양 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았다. 임금으로 즉위함에 미쳐서는 보양(輔養)하고
찬도(贊導)하는 공이 많았다. 그러나 세조를 섬김에는 승순(承順)만을 힘썼고,
예종조(睿宗朝)에는 형정(刑政)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광구(匡救)584) 한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은권(恩眷)이 바야흐로 성하였으나
자신이 유설(縲絏)585)의 욕(辱)을 만났고, 죽은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신정도 또한 베임을 당했으니, 슬퍼할진저!" 하였다.
[註 549] 정유년 : 1417 태종 17년.
[註 550]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註 551] 기미년 : 1439 세종 21년.
[註 552]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553] 계해년 : 1443 세종 25년.
[註 554] 의위(依違) : 결정하지 못하는 모양.
[註 555] 구풍(颶風) : 회오리 바람.
[註 556] 금릉(金陵) : 중국의 지명.
[註 557]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註 558]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註 559] 조사(詔使) : 중국 사신.
[註 560] 창화(唱和) : 시를 서로 주고 받음.
[註 561] 보운(步韻) : 다른 사람의 시의 운을 써서 화답하여 시를 지음.
[註 562] 조단(朝端) : 조신(朝臣)의 수위(首位).
[註 563] 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564]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註 565] 책훈(策勳) : 공을 책에 기록함.
[註 566] 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567]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註 568] 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569] 문형(文衡) : 대제학(大提學).
[註 570] 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571] 기묘년 : 1459 세조 5년.
[註 572] 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573] 임오년 : 1462 세조 8년.
[註 574]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註 575] 무자년 : 1468 예종 즉위년.
[註 576]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註 577] 신묘년 : 1471년 성종 2년.
[註 578] 위징(魏徵) : 당나라 태종 때의 명신.
[註 579] 강하(江河) : 양자강과 황하.
[註 580] 각삭(刻削) : 남에게 가혹하게 함.
[註 581] 집(集) : 《보한재집》.
[註 582] 부도(浮屠) : 불교(佛敎).
[註 583] 조우(遭遇) : 현신(賢臣)이 명군(明君)을 만나 마음이 맞음.
[註 584] 광구(匡救) : 악한 일을 못하게 구원함.
[註 585] 유설(縲絏) : 검은 포승으로 죄인을 묶음.
■ 공조 판서 홍섬이 경복궁 중수기의 제술을 사양하니 대제학에게 짓도록 하다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 11월 24일 신유 1번째기사 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공조 판서 홍섬이 아뢰기를, "선수 도감이 신을 시켜 경복궁을 중수한 일에 대해
시말(始末)을 기록하도록 청했습니다. 신이 선조 때부터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기는 했어도 제술에는 부족하여 한갓 허명(虛名)만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항상 마음에 부끄러웠습니다. 법궁(法宮)205) 의 기록은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니
반드시 문장에 노련한 사람이라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당초에 이 궁을 창건하시고서 전각(殿閣)의 명칭과 창건한 시말을
모두 정도전(鄭道傳)을 시켜 기록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리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개 정도전의 문장이 전아(典雅)하면서도 정밀하고 고와
그 당시에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과 같은 사람이 어찌 공졸(工拙)을 헤아려보지도 않고서 뻔뻔스럽게 흉내를 내겠습니까.
보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체통을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전후로 문한을 맡아 보던 사람들이 있으니 다시 명하여 짓게 하신다면
족히 후세에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일은 다 힘쓰면 흉내낼 수 있지만
문장 저술에 있어서는 본시 적합한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신이 저술할 만한
재주가 있다면 어찌 감히 위의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경은 글 짓는 재주가 있는데 어찌 이 기(記)를 짓지 못하겠는가. 사양하지 말라."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소신이 어찌 자신을 헤아려 보지 않았겠습니까.
문형(文衡)을 맡은 사람으로 하여금 짓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경이 굳이 이처럼 사양하니 대제학으로 하여금 짓도록 하라."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문장의 성쇠는 치도(治道)의 고하(高下)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지금 세상의 글을 건국 초기의 글과 비교해 보면 같이 놓고 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러니 다스리는 도리가 날로 저하된 것이 아니겠는가.
[註 205]
법궁(法宮) : 정전(正殿).
■ 대왕대비가 정도전에게 공로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하다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9월 10일 임신 3번째기사 1865년 청 동치(同治) 4년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법궁(法宮)의 전각(殿閣)들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학 국사(無學國師)가 그 당시 수고를 한 사실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야승(野乘)에 자주 보이는데, 나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에게는 특별히 훈봉(勳封)을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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