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 (박성일)
- 충청일보연재 2008.1.22. ∼ 2008.6.10. -
1. 조선 기틀만든 '삼봉 정도전' 충북이 낳은 '세기의 혁명가'
충북이 낳은 위인 가운데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인물이 있으니, 500년이나 지속된 국가운영시스템을 거의 혼자 힘으로
완벽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삼봉 전도전(三峰 鄭道傳 : 1342~1398)이다.
그리하여『1인자를 만든 참모들』이란 정치서적을 쓴 정치평론가 이철희는
한민족 역사에서 필적할 만한 이가 없는 '한국사 최강의 개혁 경세가'로 평가했듯이,
삼봉은 웅대한 구상을 가진 경세가만이 할 수 있는 시대 기획·국가 설계를 통해
조선을 건국한 것만은 누구도 부인 못할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선생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젊은시절 이곳에서 청유하였다고 전해지는 도담삼봉.
하지만 500년 조선역사는 물론이고 근세까지도 삼봉에 대한 평가는 이 명백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정치가이자 혁명가'라는 무미건조한 내용,
또는 국사 교과서에서조차도 '경망한 인물이니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묘사하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다행히도 20세기에 들어와 재야사학자 이이화(李離和)는
『인물한국사』에서 "흔히 반란을 벌이거나 역적 노릇한 사람쯤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아우로부터 왕의 자리를 빼앗은 이방원이 그 장애인물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나서
그에게 온갖 혐의를 씌웠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그는 역신(逆臣)으로 몰려 죽었기에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고, 한 사람의 일생을 적어 알리는 행장이나
신도비나 묘비의 글조차 없었다."고 지적하고는
"적어도 고려 말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을 바로잡고 사회적 혼돈을 수습하고 나선
혁명가요, 실질적인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점을 간과해버리고 한 왕을 높이기 위해 이루어진 곡필만을 믿어서야
죽은 자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란 문제 제기로 삼봉을 변호했는데,
최근 들어 삼봉을 새롭게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그러면 조선 역사에서 삼봉에 대한 평가가 왜 부정적이었는지,
그리고 현대의 평가는 어떠한지 등을 살펴보면서 삼봉의 인물 탐구를 시작하기로 하자.
태조 3년(1395)에 삼봉이 정당문학(正堂文學) 부재 정총(復齋 鄭摠)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지어 바치자, 태조 이성계는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까지 파고 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말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 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며 치하했다고 한다.
또한 태조는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으뜸가는 공신이었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봉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내가 정도전을 벌주려는 것은
천하만세의 계책을 위함이다. 태조가 그렇게 강하고 현명한 임금이었는데도
정도전과 같은 신하가 나왔다. 하물며 후세에 만일 용렬한 임금, 약한 임금이 있으면
신하가 정도전을 본받아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고 하여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부터 삼봉에 대한 평가는 왜곡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태종의 말에서도 드러났듯 태종 이하 역대 왕들은
삼봉 같은 걸출한 신하의 출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봉은 조선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망각된 인물로 치부된 것이다.
▲평택 소재 정도전기념관.
삼봉의 이름을 고의로 지운 또 하나의 세력은 사림파(士林派)였다.
그 맥은 여말선초 개혁을 주창한 신흥사대부 중에서 삼봉에 패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로부터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로 이어졌는데, 이들은 조선 건국 후 80~90년 동안
재야에서 절치부심하며 정몽주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폐쇄적 '통 이론(統 理論)'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삼봉은 당연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터부였다.
특히 사림 역사에서 가장 강하게 '통(統)'과 '예(禮)'를 주장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삼봉을 지칭할 때마다 썼다는
'간신(姦臣)'이란 표현은 그들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오직 권력을 탐한 이방원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쿠데타를 일으켜
동생과 조카를 죽이고 태종과 세조(世祖)로 등극했지만, 이들의 행위는
오히려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권신들에게 휘둘리게 되면서 그들이 그렇게도 지키고자 했던 왕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다 더 가관인 것은 이방원의 참모로서 삼봉을 죽이고
왕권을 탈취한 무인정사(戊寅靖社)의 일등공신 호정 하륜(浩亭 河崙)이나
수양대군의 참모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를 죽이고
단종(端宗)을 내쫓은 압구정 한명회(狎鷗亭 韓明澮)는
여전히 역사의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으며,
또한 삼봉의 모범적인 신권중심주의를 악용해 자기들의 권력 놀음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당쟁이나 사화도 불사하는 등 삼봉의 신권중심주의의
최대 수혜자가 그들임에도 오히려 삼봉을 간신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분위기에서도 삼봉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작업은 간간이 이루어졌다.
태조가 삼봉을 일컬어 "유종(儒宗)"이라 칭한 이후, 삼봉의 배불운동을 보면서
당시 유학자들은 "유일한 동방의 진유(眞儒)"라 극찬했으며,
개혁을 꿈꾼『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 교산 허균(蛟山 許筠)은
삼봉을 평생 동안 흠모했다고 한다. 또한 개혁군주인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삼봉을 재평가했고, 조선조 마지막 개혁의 주인공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마침내 삼봉을 복권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현대의 평가는 어떠할까?
1973년 한영우(韓永愚) 전 서울대교수의 기념비적인 저서『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계기로 철학·정치학 분야에서 삼봉 연구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1998년 KBS-TV 대하사극『용의 눈물』에서 부각되면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 교수는
"당대 호걸 중의 호걸로 정치·경제·국방·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남다르다."고 평가하면서
"삼봉학(三峰學)이 율곡학(栗谷學)·퇴계학(退溪學)·다산학(茶山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학자층이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런 예측대로 2003년 '삼봉 정도전 선생 기념사업회' 주최의
'제1회 삼봉학 학술회의'가 드디어 개최되었다.
여기서 최상용(崔相龍) 고려대 정외과 명예교수는「정치가 정도전을 생각한다」란 논문을
통해 '정치가로서의 삼봉'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벌이면서
"삼봉은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철학(Philosophia)·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말하는 덕성(Virtue)·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하는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가 모두 겸비된
정치가로서 단테(Dante)나 마키아벨리를 뛰어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올 김용옥(金容沃) 또한『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에서
"정치가의 평가란 본시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력의 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과를 냈느냐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자나 예술가처럼 무조건 호의적인 평가만 얻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정치적 권력에 헌신하고,
그 권력을 공적인 가치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를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에 부합되는 인물로서 우리는 삼봉을 뛰어넘는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삼봉은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세계 정치사에 치립할 수 있는 인물로서
내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혁명아요, 프로페셔널 폴리티션일지도 모른다."는
최 교수의 평가에 동의하는 한편, "레닌(Lenin)이 마르크시즘에 대한 확고한
자기류의 해석을 완성함으로써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듯이,
삼봉은 주자학에 촉발받아 이념적인 혁명의 틀을 완성함으로써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기에 성공한 정치가이자 사상가"라는 평가를 내렸다.
삼봉의 평가와 관련해 보다 현실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한 연구자도 있다.
이철희는『1인자를 만든 참모들』에서 참모의 등급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는
먼저 가장 등급이 높은 '경세가'는 '세상과 시대를 경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무릇 경세가는 최소 한 세대는 지속될 시스템이나 정책을 만들어낼 경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 대표적 인물로 삼봉과 장량(張良)을 지명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등급인 '책사'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 책략을 짜내는 사람'으로 정의하면서
삼봉을 죽이는데 앞장선 하륜과 한명회를 대표 인물로 꼽았으며,
가장 하급 참모라 할 '모사꾼'은 '짧은 순간에 유용한 간계나
네거티브한 술수를 꾸미는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2. 비운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
한미한 출신이던 봉화 정씨(奉化 鄭氏) 가문은
삼봉의 부친 운경(云敬)에 이르러 그의 학문적 재능을 발판으로 출세하는데,
수령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하게 선정을 베푼 것이 후세의 평가를 받아
『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양리조(良吏條)」에 등재됐을 만큼 청백리였고,
또한 사후에는 시호를 받을 만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어도 친우들이
그의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 염의(廉義) 선생이란 개인 시호도 지어주었다고 한다.
반면 삼봉의 외조모는 종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런 과거사로 인해 삼봉은 정몽주로부터 "천지(賤地)에서 몸을 일으켜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도올 김용옥은 외조부가 영주사족이자 산원 벼슬을 했기 때문에
단양 우씨(丹陽 禹氏)와는 다른 영주 우씨(榮州 禹氏)라고 주장하면서
외조모 혈통에 대한 날조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이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피살된 선죽교.
한편, 삼봉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단양 지방에 다음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운경이 젊었을 때 한 관상가가 '당신은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자, 이 말을 믿은 운경이 10년 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단양 삼봉(丹陽 三峰)에 이르러
어느 초가에 유숙했는데, 이곳에서 우씨 여자를 만나 정을 나누고 낳은 아이가 정도전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조선개국의 으뜸공신인
삼봉 정도전 (1337∼1398)의 시문과 글을 모은 삼봉집 의 목판.
삼봉은 운경과 우씨 사이에 3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났는데,
'삼봉'이라는 호의 유래와 관련해 한영우 교수는 삼봉이 어릴 때 살았던
개경 부근의 삼각산(三角山)에서 차명했을 가능성을 높게 본 반면,
역사평론가 이덕일은『조선선비살해사건』에서 단양 삼봉에서 딴 것임을 명시하였다.
당시는 외가 출생이 관례였기에 삼봉은 단양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부친이 개경에서 벼슬한 탓으로 일찍이 올라와 개경 동남방의 삼각산에서 살았으며,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했기에 부친의 친구였던
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아들이자 당대 유학자로 명망이 높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 문하에서 정몽주·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양촌 권근(陽村 權近)·고산 이존오(孤山 李存吾) 등과 함께 성리학을 익히게 된다.
1362년 조정에 나온 삼봉은 충주사록(忠州司祿)을 거쳐
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등으로 승진했으나
공민왕이 총애한 신돈(辛旽)이 국정에 관여하자 실망하여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고 만다.
그러다가 1366년 부모의 잇단 사망으로 영주에서 여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정몽주가 보내준『맹자(孟子)』에 몰두하는데, 이때 삼봉은
맹자(孟子)의 민본사상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된다. 3년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공민왕이 죽은 부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해 암영전(岩影殿)이라는 집을 지었는데,
삼봉은「원유가(遠遊歌)」를 지어 이 공사를 풍자하기도 했다.
1370년 유교 진흥을 위해 성균관을 개혁하면서 목은 이색이 대사성(大司成)을,
정몽주·이숭인 등 동문수학한 친구들이 교관을 맡자,
이듬해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된 삼봉은 다시 태상박사(太常博士)에 특진됐다가
종묘제사에 쓸 악기 만드는 일을 잘 처리한 공으로 예의정랑(禮儀正郞)에 승진했으나,
1374년 그를 아끼던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삼봉의 출세가도에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다.
우왕 원년(1374) 원(元)의 사신이 명(明)나라를 치기 위한 작전을 상의하러 오자,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염흥방(廉興邦) 등 친원파 대신들이
삼봉을 영접사(迎接使)로 임명해 접대하도록 했다. 하지만 삼봉은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오거나 아니면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노여움을 사 전라도 나주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당한다. 이때 유배를 떠나던 삼봉은
「감흥(感興)」이란 시를 통해 자신의 비장한 각오를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自古有一死 옛부터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이니
偸生非所安 살기를 탐내는 것은 편안한 일이 아니다.
▲선죽교 표지석.
귀양지에서「심문천답(心問天答)」을 써서
불교의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과 유교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불행은 일시적이고 언젠가는 천리가 회복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한
삼봉은 저술에 열중하고 찌든 백성의 생활을 몸소 겪으면서
3년을 보내는 동안 정신적으로 성숙하였다. 삼봉이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느낀 체험이나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작품이「가난(家難)」·「소재동기(消災洞記)」·
「답전부(答田父)」·「금남야인(錦南野人)」같은 명문들인데
나중에 삼봉집(三峰集)』에 실리기도 했다.
1377년 영주로 귀양지가 옮겨진 삼봉은 왜구의 잇단 침입으로
다시 단양·제천·안동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종편거처(從便居處)로 완화되자 개성 옛집
으로 돌아와 삼봉재(三峰齋)란 오두막을 짓고 생계 수단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한 재상이 그를 미워해 그의 재실을 헐어버리자 어쩔 수 없이 부평으로 쫓겨갔고,
거기서도 왕(王)모라는 재상이 자기 별장을 만든다며 그의 재옥을
헐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김포로 쫓겨가는 등 무려 9년 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겪는다.
조선이 개국한 뒤 삼봉은 여러 요직을 차지하고 건국사업을 주도했기에
저술에 몰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개국 후 출판된 삼봉의 많은 저술들은
실제로 이 기간에 구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봉은 지금 전해지지는 않지만
뒤에 권근의『입학도설(入學圖說)』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유학입문서『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를 저술해 제자들에게 이단을 배척하고
유학(儒學)을 높이는 이론을 가르치면서 친명정책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한편,
불교배척이론을 가다듬는 등 원대한 개혁의 뜻을 다져나갔다. 이렇듯 삼봉의 학문과
개혁사상은 편안한 성균관의 강당이나 따뜻한 안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친 들판에서 백성들과 눈물 젖은 밥을 나눠 먹으면서 완성되었기에
일반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호탕한 야성과 백성에 대한 깊은애정을 담고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던 중 1383년 삼봉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이던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음으로써 역사를 바꾸는 만남이 시작되는데, 그의 막사를 찾아
엄격한 군율과 질서정연한 군사들을 보고 그의 참모가 되기로 결심한 삼봉은
군영 앞 노송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의 시로 토로하기도 했다.
蒼茫歲月一株松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生長靑山幾萬重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인가
好在他年相見否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人間俯仰便陳?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 남겼네.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정몽주는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1384년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돌아온 삼봉은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수도 금릉(金陵)에 가서 왕위 교체 사실을 고했고,
귀국해서는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됐으며, 1387년에는 자원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나 조정의 사정으로 오래 머물지 못한 채 돌아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올랐다. 1388년 5월 22일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즉위시키는 등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삼봉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자, 삼봉은 그때까지 계획했던 일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전(私田) 혁파 및 과전법(科田法) 실시였으며,
이로 인해 삼봉은 이색·정몽주 등의 수구파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듬해에는 우재 조준(?齋 趙浚)과 함께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등극시킨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奉化縣 忠義君)에 봉해졌고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지만,
왕에게 형벌과 상을 바르게 시행하라고 건의했다가 수구파에 의해 유배와 함께
공신녹권(功臣綠券)까지 빼앗겼으나, 삼봉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었던
이성계의 도움으로 풀려나 고향에 체류하게 된다.
그러나 공양왕 4년(1392)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한 사건을 기회로
그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정몽주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강회백(姜淮白) 등을 시켜 탄핵상소를 올리고
삼봉·조준·남은(南誾)의 주살을 요구하자, 봉화에서 체포된 삼봉은
보주(甫州) 감옥에 갇히지만,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양왕의 반대로 인해
죽음은 면하게 된다. 이 위기의 순간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고 권력을 쥐면서
개경으로 돌아온 삼봉은 다시 충의군에 봉해졌고,
7월 17일 마침내 이성계를 추대해 태조로 모시고
조선왕조를 개국하면서 개국 1등공신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3. 정도전, 식견ㆍ돌파력 '조선을 만들다'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 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 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조선경국전 창전…중앙집권 왕도정치 민본주의 토대 마련
한양 천도 요동정벌론 공식화 등 대 내외적 국가기강 확립
조선왕조 수립 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봉화백(奉化伯)까지 하사받은 삼봉은
다재다능한 식견과 특유의 돌파력을 활용해
문하부 시중(門下府 侍中) 다음 직책인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인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국가경제를 총괄하는 판호조사(判戶曹事),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
문헌 책임을 맡은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왕을 교육시키고 역사를 편찬하는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그리고 태조의 친병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두 번째 책임자인
의흥친군위 절제사(節制使)를 겸직하고는
건국의 토대를 다지고 국가기강을 확립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삼봉은 죽을 때까지의 7년 동안 도저히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성과를 남겼는데, 가끔 취중에
"한 고조(漢 高祖)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썼도다."고
중얼거렸다는 삼봉이 이룬 사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봉은 국가이념을 유교로 삼고 성리학을 정통교학으로 내세우는 한편,
도교와 불교가 지닌 공허한 이론을 비판했는데,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심(心)]·도교[기(氣)]를 비판하는 한편,
유교[이(理)]가 실천덕목을 중심으로 인간 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또한 살해되기 직전에는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의 이론을 조목조목 들어 비판을 가함으로써
동양 역사상 가장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불교비판서로 평가받고 있는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일련의 개혁운동 가운데서 학문과 종교를 혁신하여 문명개혁을
마무리 지으려는 삼봉의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삼봉은 나라의 기본을 바로 세우고 통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창전했는데,
이 책은 조선의 헌법전인『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초가 된 법전으로서
『주례(周禮)』의 육전(六典) 체제를 본받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조정한 책이다.
삼봉은 그 후에도 계속하여『조선경국전』의 보유편(補遺篇)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재상 제도에 관해서 서술한
『경제문감(經濟文鑑)』및 다시『경제문감』의 보유편으로서
중국 역대의 제왕과 고려 역대 왕의 치적을 논하면서
군왕(君王)의 치도(治道)를 정리한『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등을 창전하기도 했는데,
삼봉은 이 저서들을 통해 통치제도로는 중앙집권을,
통치철학으로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그 기저로 삼았다.
삼봉은 중농주의를 바탕으로 사전의 혁파를 더욱 확대하여
국가 공전 및 균전을 확대했는데, 이는 수구세력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박탈하여
토지를 국가소유 또는 직접 생산자인 농민소유로의 전환을 꾀한 것이었기에
가장 반발이 심한 개혁정책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용단이 필요한 정책이었다.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성은 언제나 저항적 기세가 깔려 있었고,
또 새 왕조의 참신한 분위기를 천도로 표현해야 할 필요성도 컸기에
삼봉의 주도로 천도가 단행되었다. 태조 3년(1394) 말에 시작된 천도 작업은
삼봉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단 10개월 만에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왕조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우선 중심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의 방향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바탕으로 "인왕산(仁旺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궁궐이 서북방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무학(無學 : 1327~1405) 왕사에 맞서
삼봉은 "전래로 임금은 북쪽을 의지해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쪽을 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남쪽을 향해 남산(南山)을 진산으로 삼아야 한다."
고 주장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그 외에도 왕실과 백성이
무궁하게 태평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삼봉은 경복궁의 이름은 물론이고
정전인 근정전(勤政殿)·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그리고 서울의 모든 궁궐과 성문의 이름을『시경(詩經)』과『서경(書經)』등
중국의 고전에서 아름다운 뜻을 취해 손수 작명하였고
심지어 수도의 행정 분할까지 직접 결정하였다.
삼봉의 이러한 노력은 오로지 이씨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왕실을 오래도록 유지하려던 그의 열망 때문이었는데,
그리하여 1396년 10월 29일 태조가 낙성된 경복궁에서 여러 공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가운데, 몸소 '유종공종(儒宗功宗 : 유학(儒學)에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功)도 으뜸이다)'이란 네 글자를 대서특필하여 삼봉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삼봉은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기 위해
새 도읍에 대한 환희와 희망과 경사로움을 노래한「신도가(新都歌)」를 지었으며,
한양 궁궐이 완성된 다음에는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까지
지었다고 하는데, 한시로는 전하지 않고 국문 악장만『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려
전하는「신도가(新都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녜는 楊洲(양주)ㅣ 고올히여
디위예 新都形勝(신도형승)이샷다.
開國聖王(개국성왕)이 聖代(성대)를 니르어샷다.
잣다온뎌 當今景(당금경) 잣다온뎌
聖壽萬年(성수만년)하샤 萬民(만민)이 咸樂(함락)이샷다.
아으 다롱디리
알픈 漢江水(한강수)여 뒤흔 三角山(삼각산)이여
德重(덕중)하신 江山(강산) 즈으메 萬歲(만세)를 누리쇼셔.
왕위에 오르고 얼마 되지도 않아 태조는 삼봉의 동의를 받아
새 왕조 건설에 공헌했던 전비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왕자들은 무시한 채,
후비 강씨(康氏) 소생의 둘째이자 막내로 남달리 영리했던
의안군 방석(宜安君 芳碩)을 세자로 삼고는 삼봉에게 세자의 교육을 맡겼다.
그런데 왕자들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참여하면서
각기 거느렸던 사병들을 쿠데타 성공 후에도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자,
어린 왕세자의 등극에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되리라고 판단한 삼봉은
왕권 안정을 위해 이들의 사병 조직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이 사병(私兵) 혁파 작업이
결과적으로는 뒤에 삼봉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명나라가 새 왕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따지고 들자,
삼봉은 1397년부터 "요동 출병이 단순한 정벌이 아니라 고토회복"임을 역설하면서
"지난날 중원을 차지했던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 몽고의 원(元)도 외이(外夷)요
조선도 외이인데, 그들이 이룬 일을 조선이라고 못 이룰 바 있느냐?"고
조선사 500년에 찬란하게 빛나는 독보적인 자주사상의 결정체라 할
'요동정벌론(遼東征伐論)'을 공식화했다.
삼봉은 거기서 더 나아가 군사력을 확충하고자 태조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하여『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등의
병서를 손수 지어 중앙의 관리는 물론이고 지방의 군사들에게 군사연습을 시키는 등
요동 수복 계획을 치밀한 계획 하에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그 결과, 원나라를 멸하고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太祖 朱元璋)조차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으며, 감히 조선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다만
대명온건파인 이방원을 간접 지원함으로써 견제세력으로 활용하는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다가 주원장이 사망하고 그의 손자이자 2대 황제인 혜제(惠帝)와
주원장의 24명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자,
이 절호의 기회를 틈탄 정벌계획이 한창 추진 중이던 1398년,
삼봉이 결국 이방원의 측근인 이숙번(李叔蕃)에게 살해됨으로써
오랫동안 학수고대해온 고토회복의 꿈은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삼봉이 죽은 다음 해인 1399년에 명나라에서는 혜제(惠帝)와 그의 삼촌
연왕(燕王) 사이에 내전이 발생해 극심한 권력교체기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이 내전은 3년 가까이 끌며 명나라 조정을 마비시키다가 마침내
1402년 연왕이 조카를 죽이고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고서야 끝을 맺었다.
그 외에도 삼봉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6개의 악사를 지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교훈으로 삼게 했는데,
먼저「문덕곡(文德曲)」은 태조가 건국 후에 언로를 개방하고 공신을 보전하며
전제를 개혁하고 예악을 제정한 공로를 기린 노래이고,
「몽금척(夢金尺)」은 태조가 즉위 직전에 선인에게서
금척을 받는 꿈을 꾸었다는 내용을 담은 노래로
태조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왕이 되었음을 알리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다.
태조가 즉위 직전에 어떤 이로부터 받은 지리산 석벽에서 나온
참서 내용을 노래한 것이「수보록(受寶籙)」이며,
「납씨곡(納氏曲)」은 태조가 몽고의 유족인 나하추를 격퇴시킨 공로를,
「궁수분곡(窮獸奔曲)」은 왜구 격퇴 공로를,
「정동방곡(靖東方曲)」은 위화도회군을 각각 찬양한 노래다.
끝으로 삼봉은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개국 직후에 착수해
3년 만에 고려사(高麗史)』37권을 편찬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재상 중심 체제를 지향하는 그의 정치의식이 반영되었으며, 뒷날 절재 김종서
(節齋 金宗瑞)가 편찬한『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정도전,조선500년 법치 기틀 다져
로크보다 300년 앞서 사회계약설 설파...
민본 애민사상 바탕…
재상중심정치 주장
삼봉 정치·사회사상의 핵심은 "군주보다는 국가가,
국가보다는 백성이 윗자리에 있기 때문에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므로
군주는 백성을 위하고[위민(爲民)], 백성을 사랑하고[애민(愛民)],
백성을 존중하고[중민(重民)], 백성을 보호하고[보민(保民)],
백성을 기르고[목민(牧民) 또는 양민(養民)],
백성을 편안하게[안민(安民)]해야 한다."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이었다.
먼저 삼봉이 창전한『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부전(賦典)」「부세(賦稅)」항목에는
"통치자는 법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평화롭게 해주어야만 민생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그 일은 농사를 지으면서 병행할 수 없기에
백성은 1/10을 세로 바쳐 통치자를 봉양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자기를 봉양해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 역시 중한 것이다.
후세 사람은 부세법을 만든 의의가 이러한 것을 모르고
'백성들이 나를 공양하는 것은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가렴주구를 자행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걱정하는데,
백성들이 또한 이를 본받아서 서로 일어나 다투고 싸우니
화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내용은 벼슬아치들이 법이라는 공평한 잣대로
백성들 사이에 평화와 안정을 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세금을 내는 것이라는
일종의 '사회계약사상'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맺고 정부를 세운다.'는
계몽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 1632~1704)의 사회계약설보다
무려 3백 년이나 앞선 시기에 이미 사회계약설의 핵심을 설파하였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왕제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지만, 삼봉이 생각한 정치의 본질은 윤리적 규범을 전제로 하고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는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였다.
이는 군왕이 전권을 행사하지 않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각 조직이 자기 역할을
해나가는 정치제도로서 지금의 내각책임제와 비슷한 제도였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 제도와 상당히 유사한 재상중심주의에 대해
"왕조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제도"라고 주장한 삼봉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간(臺諫)의 견제 기능을 강화하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기본 체계를 잡기 위한 노력을 밤낮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삼봉의 이런 입장은 왕권중심주의를 신봉하던 태종 이방원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대 군주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기에
개혁군주인 영·정조(英·正祖)를 제외하고는 조선왕조 내내
만고역적의 족쇄에서 풀려나지 못하다가 사후 467년 만인 고종 2년(1865)에야
비로소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복권됐던 것이다.
광해군 때 조선 명문가로 꼽힌 양천 허씨 가문의 적자로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교산 허균이 특출한 재능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면서도
서얼 출신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워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반역을 꾀하다가
역모죄로 체포됐을 때, "역적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했으며「동인시문(同人詩文)」을 뽑을 때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듯이
그가 삼봉의 시를 좋아한 것조차 역모의 증거로 제시될 정도였다.
한편, 맹자(孟子)에 의하면 통치권은 '하늘의 명령',
즉 '천명(天命) = 천공(天工) = 천리(天理)'에 의하여 부여되고 합리화되는 것으로서,
천명이 떠나면 통치권은 소멸되고 덕이 있는 다른 자에게 천명이 옮아가서
그가 새로운 통치자로서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는데,
이처럼 부덕한 통치자에서 유덕한 통치자로 천명이 바뀌는 것을 곧 혁명이라 하며,
천명이 성이 다른 자에게 돌아갈 때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통치자가 민본·애민의 도덕규범을 저버리고
이에 위배되는 악정을 베푼다면 언제든지 역성혁명은 가능하다는 것인데,
삼봉은 맹자의 이 역성혁명론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주장하는
유가의 도덕주의 및 사회참여론을 바탕으로 조선건국의 논리로 삼았을뿐더러,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여기서 삼봉의 민본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전제개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삼봉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색 및 같은 문하생이면서
한때는 뜻을 같이했던 정몽주 등과 갈라섰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최대의
정적 관계가 된 근본적 이유도 바로 이 전제개혁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사유지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고리대로 자영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은 예사고,
심지어는 무력을 사용해 약탈하거나 강점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산천으로 그 경계를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영농민들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이색·정몽주·이숭인·길재 등의 온건파는 자기네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 땅의 소유자인 지주와 소유자를 대신하여
농사를 짓는 소작농 제도)'를 옹호했다. 반면에 조선왕조 개국에 적극 참여한 급진파는
대부분이 신흥사대부들로 권문세족의 물질적 기반인 사전을 혁파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실권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경자유전(耕者有田 : 농사를 짓는 농민이 땅을 소유함)'을 주장하면서
'계민수전(計民授田 : 또는 '계구수전(計口授田)'이라고도 하는데,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켜 나라 안의 모든 농민들에게 식구 수대로
토지를 분배하는 방식'임)' 방식의 가장 철저한 전제 개혁을 지향했던 것이다.
삼봉이 전제개혁을 추진한 배경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삼봉의 모계가 천인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이는 삼봉을 두 번 죽이는 짓일 뿐이다.
삼봉은 전라도 나주 부근의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체험한 비참한 농촌 현실과 삼봉이 초옥을 짓기 전에
임시로 기거하던 집의 주인인 농부 황연(黃延)의 위로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경험담들을
「소재동기(消災洞記)」에서 그대로 밝혔듯이,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가 최고조에 이르고 사병이 혁파되면서
이에 협조를 거부하던 반대세력이 궁지에 몰려 있을 즈음,
다섯째 왕자 이방원은 삼봉으로 인해 왕실 세력이 위축되고
중신 중심의 집권 체제가 강화되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고는 난을 일으킬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태조가 궁중에서 심한 해소병을 앓고 있는 틈을 타
셋째 형 익안군 방의(益安君 芳毅)와 넷째 형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을 불러들이고
처남이던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 형제와
하수인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을 동원해
1398년 8월 26일 새벽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는
당시 조정의 중심 세력이 모여 있던 송현동 남은의 첩 집을 급습하여
삼봉과 남은·부성군 심효생(富城君 沈孝生) 등을 살해한다.
삼봉의 최후와 관련하여『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삼봉이 이웃 민부(閔富) 집으로 피신했다가 그의 고발로 이방원 앞에 끌려나오자,
"옛날에 그대가 나를 살려주었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며
비겁한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참수당하기 직전에 삼봉이 읊었다는
「자조(自嘲)」라는 다음의 시에는 오히려
그의 혁명가다운 기개가 오롯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繰存省察兩加功 내 몸을 바로잡고 세상을 살피는데 공력을 다해 살면서
不負聖賢黃卷中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린 적이 없었노라
三十年來勤苦業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업적이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헛되이 사라졌네.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은 요동정벌이라는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마지막 야망을 펴보지도 못한 채 허망한 최후를 맞고 말았지만,
삼봉을 비명에 가게 한 태종조차 개혁의 기본 방향만큼은 삼봉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고,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세계 왕조 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500년 역사를 이어갔던 것이다.
세조 11년 영의정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는 삼봉의 증손자였던
야수 정문형(野叟 鄭文炯)의 부탁으로『삼봉집(三峰集)』의 후서를 써주면서,
삼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고 한다.
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나 그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2리에 위치하고 있는 삼봉 정도전 사당
5. 충청인 자긍심·기상 강화 계기되길…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박성일(朴聖日)의 역사기행(歷史紀行)'을 아끼고 사랑해주신
충청일보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필자의 '제2의 고향'인 충북의 많은 애독자들과 지면을 통해서나마
마음으로의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지난 8개월 가까운 시간은
필자에게 무척 보람되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집필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충청 지역의 문화나 인물, 유적 등을 통해 충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충청인의 힘찬 기상을 소개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왜곡된 우리 문화를 바로 알고, 또한 역사 바로세우기를 통해
충청인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도 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로 보낸 8개월인데 벌써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군요.
필자 나름대로 약속하고 다짐했던 것들이 과연 처음에 생각했던 목표치에
얼마나 도달했는지 제 자신도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10여 년 전
충북과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로 필자로 하여금 충북을 '또다른 고향'으로 삼겠다고
마음먹게 한 그 무엇을 이번 기회에 새삼 느낀 것같아 보람은 있었습니다.
필자는 그동안 일곱 분의 인물(人物)과 다섯 종류의 충북 명품(名品)을 소개했습니다.
먼저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서도 한일 재야사학자들 중심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는
연개소문(淵蓋蘇文 : 610(?)~682(?))과
김유신(金庾信 : 595~673) 장군 및
신라 문무왕(文武王 : 625(?)~708(?))에 대해 그들의 충격적인 주장을
가감 없이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많은 사극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물론 사실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한 사극들도 있겠지만
작가의 상상력이나 추측에 근거한 사극,
심지어 퓨전 사극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이나 김유신, 문무왕은
역사책을 통해 너무나 많이 들은 친근한 이름이고 또한 엔간한 내용은
초등학생도 줄줄 꿰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충격이긴 하지만
현재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새로운 시각의 역사 해석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충청 젊은이들로 하여금 웅대한 꿈을 품고 글로벌 세계를 경영할
미래를 그리게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판단했기에
논란을 예상하면서도 감히 소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인물인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 1342~1398)에 대해서는
필자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 분의 인생이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까웠기에
과대포장은 못 해드리더라도 최소한 그 분이 이루어놓은 업적의 10분지 1이라도
보상해 드리는 것이 못난 후학이 해드릴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해 소개하였습니다.
세계 정치사상 지금까지 삼봉만한 위대한 정치가가 없다는 것은
삼봉을 제대로 아는 많은 학자들의 대체적인 평가이니까요.
다섯 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 1731~1783)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실용'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용이 무엇을 위한 실용이고
누구를 위한 실용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담헌의 실용은 그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허둥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예관 신규식(?觀 申圭植 : 1880~1922)과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 1880~1936)를 마지막 인물로 골랐습니다.
올곧은 마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힘든 시절에 대다수 지식인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또는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 변절의 길을 걸을 때에도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진정한 애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팔아서 치부하고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다간
친일파의 후손들이 국가에 수용된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법적 소송까지 불사하는 마당에, 이 분들의 후손들은 불도 피우지 못하는
사글세 냉골방에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 모순의 시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는 생각에서 소개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필자의 고향에서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모셔지고 있는
김시민(金時敏 : 1554~1592) 장군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東萊城 戰鬪)의 맹장이었던 천곡 송상현(泉谷 宋象賢 : 1551~1592),
스승 부휴 선수(浮休 善修 : 1543~1615) 선사(禪師)와 더불어
대불(大佛)?소불(小佛)로 불린 벽암 각성(碧巖 覺性 : 1574~1659) 선사(禪師),
기호학파(畿湖學派)냐 영남학파(嶺南學派)냐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정반대로 갈리고 있지만
그래도『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3,000번 이상이나 그 이름이 등장한다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 1607~1689),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역사대하소설 가운데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임꺽정(林巨正)』의 저자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 1888~1968) 등을 비롯하여
'한국 근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鄭芝溶 : 1903~?) 시인 등
아직도 다루고 싶은 인물들이 많지만 능력 부족으로 인해
이 즈음에서 붓을 놓아야 하는 필자로서는 죄송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충북은 산좋고 물맑아 예로부터 청풍명월(淸風明月)이란 별칭으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상표권(商標權)이란 희한한 괴물로 인해
비록 그 이름은 타 지역에 빼앗기고 말았지만 청풍명월의 실체만큼은
어느 누구도 뺏아갈 수 없는 충북의 품 속 깊이 그대로 간직돼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식량 안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나돌았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최근 들어 점차 그 위력을 절감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광우병이니 AI 인플루엔자니 하는 전문 용어가 연일 매스컴을 통해
융단폭격을 해대다보니 이제는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는
일상용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지구가 이런 상황에 빠졌기 때문에
청풍명월은 조만간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각광받을 것입니다.
청풍명월의 본향인 충북의 자연과 그런 자연에서 생산되는 친환경적이면서도 맛있고
질좋은 농.축.임산물은 세계인이 주목하는 세계최고의 명품이 될수밖에 없기 때문이니까요.
필자는 충북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톱타자로 약수(藥水)를 골라
'충북 제일의 명품'으로 명명(命名)했습니다.
여러 전설과 사연을 간직한 충북의 이름난 약수들에
최근 개발된 약수까지 포함해 충북의 약수 계보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청원생명쌀과 생거진천쌀 등 충북 쌀의 우수성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물이 최곤데 거기서 나는 농산물은 그것이 무엇인들 좋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버섯도 그렇고 인삼도 그렇고 고추도 그렇겠지요.
두 번째로는 충북이 자랑하는 세계유산(世界遺産)을 소개했습니다.
『직지심체요절 하권(直指心體要節 下卷 : Buljo Jikji simche yojeol,
the second volume of "Anthology of Great Buddhist Priests' Zen Teachings")』은
하도 유명해서 충북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특별히 세계유산이라는 관점과 이를 최초로 찾아내서 세계에 알린
박병선(朴炳善 : 1928~ ) 박사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재 '한반도 중부 내륙(韓半島 中部 內陸) 옛 산성군(山城群)'이란
이름으로 '잠정 목록(暫定 目錄)'에 올라 세계유산(世界遺産) 등재를 기다리고 있는
충북의 대표적인 산성(山城)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유적들은 충북인들의 관심과 관련 자료들이 형편없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충북인들의 애정과 관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인삼(人蔘)을 골랐습니다.
사실 인삼은 한국담배인삼공사(KT&G)에서 앞장서서 관리해야 할 품목입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삼은 세계를 휩쓰는 건강식품이었으며,
가격도 미국?캐나다 쪽의 화기삼(花旗蔘 : Panax Quinquefolium L.)에 비해 3~4배,
중국의 전칠삼(田七蔘 : Panax Notoginseng F. H. Chen)에 비해서는 무려 10배나 비쌌지만
지금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로부터 들어온 인삼의 놀라운 효능은
이미 세계의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신문을 보니 충청북도에서 '충북고려인삼'이란 브랜드로
2012년까지 2,879억 원을 투입하여 인삼 명품화 4대 정책을 추진해
충북을 세계적인 인삼 메카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네 번째와 다섯 번째로는 온돌(溫突)과 한국종(韓國鐘)을 선택했습니다.
비록 이것들이 충북인만의 것은 아니지만 현재 충북에는
우리 선조의 흔적들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고른 것들입니다.
그 밖에 송이버섯과 된장 등의 장류(醬類)?고추?마늘?약초(藥草) 등
많은 명품들이 있지만 역시 손대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입니다.
끝으로 한국의 대표적 법상종 사찰로서 한국 불교사에서
위상이 만만치 않은 법주사(法住寺)와
서양철학(西洋哲學)에서 그 어렵다는 현상학(現象學)을 명쾌한 논리로 풀어낸
법상종(法相宗)을 꼭 한 번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못하게 되었군요.
하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이고 이자정회(離者定會)라고 했던가요.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는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 1879~1944) 선사(禪師)의
「님의 침묵」의 한 구절로서 모든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박성일 저술가ㆍ문화해설가ㆍblog.naver.com/geochips
鄭道傳에 관한 談論
發題 金 泰 詢 / 2014. 4. 28. 퇴계학부산연구원 사랑방
1.
年初 1월 4일(土)부터 KBS 주말 歷史드라마 「鄭道傳」이
시청률 선두권을 이끌고 있단다. 주인공역을 하는 조재현은
이 고장 경성大 연극영화과를 나왔다. 그는 성신女大 예술大
미디어영상연기과 교수이면서 母校인 경성大에서 가르치고 있다.
MBC에서도 <奇皇后>의 후속으로 ‘정도전’을 주제로 한 史劇
「파천황」을 준비하다가 先手를 빼앗겨 보류하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 「정도전」에 눈이 쏠리자 많은 作家와 학자들이
그 이름의 小說, 傳記, 人物평설 등 著書와 논술을 펴내고 있다.
그 中 몇 편은 best10속에 진입하고 있단다.
한동안 同志요 協助者이던 이방원에게 不意의 습격을 당해
人生60을 못 채우고 쓰러진 정도전,
600년을 가뭇없이 묻혔던 三峯 정도전의 이름과 정령(精靈)이
서울大사학과 한영우교수의 연구를 필두로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2.
그는 不世出의 天才, 破天荒의 사상가, 정치가, 革命家, 企劃家로 지칭된다.
백성을 위한 나라, 君主보다 民이 더 貴重하다고 여긴
民本主義 臣權主義 사상가다. 中世的이었던 캄캄한 고려 말,
元나라의 지배 속에서 自主力을 잃은 君主들, 굶어 죽은 시체가 도처에
널브러진 처절한 民生苦를 보고 겪으며, 생각하는 선비 젊은 정도전,
머릿속의 구상은 ‘宰相政治’, 최소한 ‘君臣共治’였다.
「孟子」의 摘示대로 與民同樂 없이 백성에게 고통과 배고픔을 안겨주는
어리석은 君主나 포악한 帝王이라면 갈아 치워야 하는 易姓革命을 꿈꾸었고
실현한 혁명가다. 그는 刑曹判書를 지낸 아버지가 淸白吏여서
어렵게 자라고 가난하게 살았다. 궁핍했으나 정신은 맑았다.
그는 구걸자들에게 만두조각을 던져주는 權臣 이인임과 맞서는 강골이었으나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明太祖 朱元璋이 힘을 비축하기 전에,
私兵을 혁파해 義興三軍府에 통합하고 「陳圖 陣法」으로 훈련된
강력한 조선국군으로 키워, 잃어버린 땅 요동을 되찾으려는
大望을 위해 무진 애썼던 戰略家이기도 하다. 그는 훌륭한 독서가다.
儒宗이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經典을 읽고 특히 포은 정몽주가 전해 준
「孟子」를 열독했다.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저술한
당대의 정치학자요 경륜가였다. 교육 농사 외교 국방 건설 사회제도와
염전 광산 등 民生 제반에 걸쳐 실천적 기획가요 經世濟民의 경영인이었다.
「불씨잡변」을 펴내 斥佛崇儒의 조선사회 기풍을 진작시킨 사상가요 경륜가였다.
수많은 詩와 文을 읊고 썼다. 逆臣으로 처단된 뒤 그의 수많은 저술이
없어진 것은 안타깝지만 아쉬우나마 「三峯集」이 남아 있다.
3.
1342年生 정도전은 고려말 조선초의 57年 삶을
참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영위한 인물이다. 先代에 인연이 있던
거유 牧隱 李穡을 스승으로 유학과 經史를 공부했다.
學緣으로 만난 포은 정몽주와 兄弟처럼 親交하였고 이존오 이숭인 권근 등과
同門修學하며 新進士大夫로 성장했다.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들어서 파란 많은 政治활동을 하는 한편,
困苦한 革命의 길을 탐색하며 부지런하고 굳굳하게 간다.
國力이 허약해 女眞族과 倭寇의 침략에 紅巾賊까지,
오랜 元의 지배에 지친 고려사회는 기진맥진인데,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지윤 등 權門勢家들의 不正非理로
땅과 곡식을 빼앗기니 百姓들의 삶은 거듭 시들고 아사자는 늘어만 갔다.
34세 되던 1375년 北元의 使臣영접문제로 맞서다가
권신 李仁任에게 미움을 사, 유배와 유랑의 9년 동안,
농지를 독점한 권신귀족의 탐학과, 그와 반대로 땅 없는 農民들의
쓰라린 상실감과 유리걸식의 배고픈 삶,
타락한 승려와 사찰의 비리 폐해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는 열심히 책 읽고 생각하고 고심한다.
목숨을 지탱하기도 벅차고 편안한 날이 없는 백성을 위해
어떻게든 革新하겠다는 결의를 굳혀간다.
4.
가슴에 끓고 있는 火山의 마그마 같은 革命에의 열망은
1383년(우왕9) 가을 스스로 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李成桂의 막사를 찾아간다.
功많고 信望이 있되 愚君의 丈人이 되고 마는 늙은 名將 崔瑩보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는 東北方面의 名弓强將으로
外寇도 쩔쩔매게 하는 李成桂를 선택한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意氣相通하여 革命의 成就를 向해 苦難과 逆境을 극복해나간다.
이방원, 조준, 남은, 이지란, 조민수 등과 힘을 모아 大業을 이루어 낸다.
漢陽遷都의 과업을 주도하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도성의 자리를 정하고
전각들의 명칭과 四大門과 여러 성문 이름 및 한성부 52방의 이름을 짓는다.
그의 손발과 머리는 쉴 틈 없이 다니고 확인하고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불씨잡변」외 많은 방면의 책들을 저술함으로써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길잡이가 된다.
科田法으로 土地제도를 개혁, 농민에게 땅을 주는 耕者有田으로 이끌고
私兵을 혁파 삼군부에 통합 국군으로서의 위용을 갖춰
고려건국의 뜻이기도 한 요동땅 수복을 위해 노심한다.
5.
鄭三峯의 아버지가 형부상서에 오르지만 드러난 家系는 아닌 듯하다.
외조모와 어머니가 婢出이었다는 이른바 절름발이 양반이었다.
先鄕은 경상도 영주이며 고조부 公美가 봉화호장을 지냈다.
어머니는 正八品의 낮은 軍官 禹淵의 딸이다.
아버지 文敬이 當代의 名儒文人이었던 李穀의 친구라는 인연으로
곡의 아들인 巨儒 이색의 門下生이 될 수 있었다.
三男一女의 長子로 태어났는데 道傳, 道存, 道復 三兄弟의 名字를 보면
道學君子로 자라기를 바라는 父情이 읽힌다.
家系탓으로 政治生活에 장애가 적지 않았으나
그는 결코 비굴하지 않았고 의기소침하지도 않는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國泰民安, 富國强兵이란 政治目標는 같았다.
그러나 바라보는 목표는 같되 權力을 쓴 뜻은 달랐다.
이방원은 정도전 제거에 용의주도하였다. 장차 王位에 올랐을 때는
정도전은 필요 없는 장애물로 간파되었다. 이방원은 냉혈한이었고 梟雄이었다.
강력한 私兵을 거느린 이방원이 先手를 쳤다. 自身의 멘토이며 恩人이요,
아버지의 일등참모이자 心友이던 정도전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린다.
三峯은 芳遠에 대한 경계심도 없었고 대동한 호위무사도 없었다.
말 그대로 혁명동지 남은 등과 술 한잔하던 중에
이웃집의 ‘불났다’ 소리에 놀라 뛰쳐나오다가 목숨을 앗긴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 四書三經을 비롯한 古典을 열독하고
많은 저술을 남기고 새 나라 창업을 기획했던 위대한 경륜가,
一生을 뒷걸음치지 않고 言行一致 知行合一한 사람,
“政治란 모름지기 百姓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信念으로,
革命大業을 이룬 한 사나이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했다.
‘王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국가변란을 획책한 죄인’이란 굴레를 쓴 채
57年의 깊고 큰 발자국을 마친다.
슬프다. ‘賢者는 愚主를 섬기지 않는다.’는 古諺을 成就했으나
스스로는 非命에 처참히 갔으니 ― 家率은 어찌 됐을고?
아들 넷을 두었는데 長男 津은 석왕사에 행차한 太祖를 수행해 살아남아
世宗때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그 후손은 지금 평택에 살고 있단다.
가까이 있던 둘째 游는 이방원 군사에게 죽고
넷째 湛은 집에서 自決했다고 전한다.
셋째 泳의 손자 鄭文炯은 벼슬에 나아가 7王을 거치며
淸白吏로 선발되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子孫들도 父祖들의 淸白한 삶을 닮았던 듯싶다.
머리만 남은 해골을 찾아 三峯의 무덤으로 마련했으나
건설공사에 밀려 옮겨지는 등 편안한 유택이 아닌 듯.
하지만 2003년에 「三峯學術會」가 열리고
100여편의 저술과 논문이 쏟아지는 등 바야흐로 정도전의 꿈이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후손들이 평택 부근에 집성촌을 이루어 산다는 소식이다.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 鄭道傳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흐르르니
반 천년 왕업(王業)이 물소리 뿐이로세
아희야, 고국흥망(故國興亡) 물어 어이 하리오
[何如歌(하여가)] / 李芳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죽지 않은들 어떠하리
[丹心歌 (단심가)] / 鄭夢周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가실 줄 있으랴
[이가(移家)] / 鄭道傳
五年三卜宅 今歲又移居 오 년간 세 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올해에 또 다시 집을 옮겼네
野濶團茅小 山長古木疎 탁 트인 들에 초가는 작기도 하고, 기다란 산에는 고목이 드문드문
耕人相問姓 故友絶來書 농부들이 찾아와 성을 묻는데, 옛 친구들은 편지조차 끊어버렸네
天地能容我 飄飄任所如 하늘과 땅이 나를 용납할 수 있을까, 바람 부는 대로 가는 곳을 맡길 수밖에.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 鄭道傳
蒼茫歲月一株松 아득한 세월(歲月)에 한 그루 소나무
生長靑山幾萬重 푸른 산 몇만겹에 잘 자랐구나
好在他年相見否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잖을까
人間俯仰便陳蹤 사람 사는 서리에 수이 따라 좇으리다.
討論題
∙이 시대 사람들은 왜 정통사극 「정도전」에 열광하는가?
∙이방원은 정도전을 꼭 죽여야 했나?
∙정도전은 과연 奸臣이고 逆賊이었나? 權慾과 財慾을 노린 것은 아닌가?
∙삼봉은 이론가인가 실천가인가?
∙三峯은 失敗者인가? 成功者인가? 成就者인가?
∙비유컨대 정도전은 張子方이었나, 劉邦이었나?
∙정도전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무엇인가?
∙이 시대에 「鄭道傳」이란 인물은 어떻게 必要한가?
∙兄弟처럼 함께 하던 圃隱과 三峯은 왜 길이 갈렸나?
∙이방원이 삼봉선생을 죽이지 말고 동반자로 배려했으면 어떠했을까?
∙故 朴正熙 대통령과 정도전의 닮은 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故 朴正熙 大統領과 鄭道傳 둘 中 누가 더 幸福했나? 누가 더 成功했나?
∙얼설킨 세상, 진구렁 현실 속에서 이상 구현, 정치의 꿈 實現이 얼마나 어려운가?
∙朱元璋은 정도전을 과연 증오했나? 敵臣의 재주와 의기를 아쉬워한 것은 아닌가?
∙정도전 事大주의자였는가? 主體性 강한 獨立주의자였나?
∙「정도전」에 비추어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정도전」에 비추어 오늘날 靑年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우현보와 그의 자식 5형제들과 정도전의 악연
우진희 추천 0 조회 192 13.11.15 18:03 댓글 0
1. 세 아들 ·큰손자 잃고 멸문당할 뻔
유배된 뒤 모진 핍박 … 이방원과의 인연으로 2차 왕자의 난 후 가문 재기
파란만장(波瀾萬丈)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양호당(養浩堂)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살아서 얼마나 환호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비통하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세상을 뜬 지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느꼈을 영욕(榮辱)은 아직 삭혀지지 않았을 것만 같다.
고려 말 최고의 명문가로 한산 이씨와 단양 우씨를 꼽을 수 있다.
한산 이씨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부자(父子)가
중국에서 연달아 급제하면서 문명(文名)을 떨친 집안이다.
단양 우씨는 우탁(禹倬)이 두각을 보였고,
우현보에 이르러 아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면서 고려 말의 막강한 문벌이 됐다.
두문동 72현을 꼽을 때, 구성 인원이 다른 두 개의 명단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정몽주를, 다른 하나는 우현보를 앞장세운다.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三仁)으로 꼽힌다.
이색, 정몽주, 길재로 구성된 고려 말 삼은(三隱)이 후대의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라면, 삼인은 당대의 세력 구도와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다.
2. 선죽교에서 살해된 정몽주의 시신 거둬
우현보의 집안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인물은 시조 우현(禹玄)의 8세손인
역동(易東) 우탁이다. 그는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상소를 할 만큼
결기 있는 선비였고, 작가가 분명한 우리말 노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 ‘탄로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또한 역학(易學)에도 뛰어나
‘역동(易東)’이라 불린 성리학자였으며, 훗날 퇴계 이황이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워 추앙했을 정도로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우탁에게 늦도록 아들이 없어 들인 양자가 우길생(禹吉生)이다.
그는 나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숭록대부(三重大匡崇祿大夫)에 올랐고
적성군에 봉해졌는데, 특히 정몽주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우길생의 아들이 우현보다. 우현보가 10세 때에 우탁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현보는 할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현보는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喪禮)를 삼년상으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衣冠)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洪壽)·홍부(洪富)·
홍강(洪康)·홍득(洪得)·홍명(洪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國事)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비극이 찾아온 것은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부터다.
참살된 정몽주의 시신을 거둬준 이가 바로 우현보였다.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당하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우성범은 개성 남문 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에는 유배지에 있던
첫째 홍수, 넷째 홍득, 다섯째 홍명이 장살(杖殺·곤장을 맞고 살해)됐다.
곤장을 많이 맞으면 장독이 올라 죽는 수도 있지만,
사형(死刑)이 따로 있었으니 죽지 않을 만큼 때리는 게 장형(杖刑)이다.
그런데 세 형제가 죽음에 이른 것은 죄다
정도전(鄭道傳)의 사주로 빚어진 일이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3. 후손들 대구에 시민공원 겸한 박물관 만들어
정도전의 어머니가 단양 우씨인데,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노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도전은 벼슬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었다.
고려시대는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녀도 천민의 신세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우씨 집안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출신 성분을 거론하며 음해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고려와 함께 몰락한 우씨 집안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은
이방원이 주도한 제2차 왕자의 난 때였다. 정종 2년(1400년)에
우현보의 문하생인 이래(李來)가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현보에게 알렸고,
우현보는 이 사실을 둘째 아들 홍부에게 알려 이방원에게 대응하게 했다.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움직여 방간의 사병들을 제거했고,
정종으로부터 권력까지 승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원수이자 집안의 원수인 조선에 우현보가 돌연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왜일까? 이는 우현보와 이방원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때 우현보가 시험관을 맡았다.
당시 급제자들은 자신을 입신시켜 준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칭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보다도
더 강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같은 인연이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홍부와 셋째 아들 홍강은 원종공신이 돼 우씨 집안은
정치적인 재기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대구시 달서구에 가면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아파트 동네에
송림 언덕과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시민공원을 겸한 박물관이다.
우현보의 후손들이 마련한 것으로 한 문중이 세운 우리나라 유일의 박물관이다.
홍명의 후손인 우배선(禹拜善)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고,
그 후손이 박물관 동네에 모여 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생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것이다. 요사이 도시 외곽에 신도시 개발 바람이 불면서
부자 문중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 자산을 사회로 환원할 줄 아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은 우현보와
그의 후손 우배선의 정신이 그의 집안에 면면히 내려오기 때문이다.
우현보는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
파란만장한 삶 끝에 이른 우현보의 심정이 담긴 말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亡國)의 대부다.
나를 선영에 묻지도 말고, 또한 자손들도 이곳에 묻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휴전선 너머 장단 고현(古縣)에 있다.
4. 양호당 우현보의 후예들
우승흠(대종회 회장대행), 우영제(대제학공파 회장), 우문식(오파회의 총무),
우종택(예안군파 회장), 우기정(대구컨트리클럽 회장), 우종호(전 외교통상부 대사),
우윤근(국회의원), 우원식(국회의원), 우진명(미성산업 대표),
우대규(한일약품 회장), 우윤근(서울화수회 회장), 우종근(판서공파 회장),
우억기(전 성균관 부관장), 우국일(예비역 장군), 우광택(부장판사)
매맞아 죽은 우현보의 아들들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 2008. 1. 23. 08:49 | Posted by 디지몽
다음은 구세력의 추방입니다.
사헌부는 개국 직후 구세력으로 고려의 대사헌이었던
문하부 찬성사 김주를 지목해 처벌토록 건의했습니다.
건의 내용에 과거 정도전이 글을 올리자 처벌을 청했다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권력 핵심에 있던 정도전이 ‘괘씸죄’로 건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경우는 파직 선에서 일단 마무리됐습니다.
구세력에 대한 조직적인 숙청은 즉위 교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태조는 작당하고 반란을 모의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처형이 건의된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 56 명을 살려주겠다고 인심을 쓰면서
이들을 등급에 따라 처벌토록 했습니다.
‘거물급’은 역시 우현보, 이색, 설장수였습니다.
이들은 관리 임명장인 직첩을 빼앗고 서민으로 떨어뜨려 섬으로 귀양보낸 뒤
종신토록 관리 신분을 박탈케 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렇게 처벌했습니다.
이들 구세력 추방 내용이 포함된 즉위 교서는 정도전이 지었습니다.
실록은 정도전이 우현보와 오랜 원한이 있어 우씨 일문(一門)을 모함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으나 속시원히 되지 않자, 이때 여러 사람을 함께 끌어들여
극형에 처하려고 마지막 조항을 얽어서 바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도승지 안경공을 시켜 이를 읽게 하다가 놀라서,
이들이 어찌 극형 감이냐며 모두 논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도전 등이 등급을 낮추어 처벌할 것을 다시 청했습니다.
임금이 이색, 우현보, 설장수는 감형하더라도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정도전 등은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곤장을 칠 것을 청했습니다.
임금은 곤장을 맞고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 굳이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평의사사에서는 교서의 후속 조치로 귀양지를 무릉도(武陵島, 울릉도),
추자도(楸子島)와 제주(濟州) 등지로 하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교서에서 이들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놓고 섬으로 귀양보낸다면
말을 뒤집는 셈이라며, 다른 지방에 나누어 귀양보내도록 했습니다.
우현보는 해양(海陽, 사천), 이색은 장흥부(長興府), 설장수는 장기(長鬐, 포항),
그 나머지 사람도 모두 바닷가 지방으로 귀양가게 됐습니다.
교서가 내려왔을 때 정도전은 이색을 경기 바다 자연도로 귀양보내려고
경기(京畿) 계정사(計程使) 허주(許周)에게 압송케 했습니다.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고 둘 곳을 물으니, 정도전이 대답했습니다.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거야!”
조금 뒤에 이색을 장흥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나와
정도전의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곤장은 귀양지에 가서 집행하게 됐습니다.
집행 관원으로 양광도에는 상장군 김노, 경상도에는 상장군 손흥종,
전라도에는 군기감 판사 황거정, 서해도 서북면에는 군자감 판사 장담,
교주강릉도에는 예빈시 경(卿) 전역(田易)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돌아와서 경상도에 귀양간 이종학, 최을의와
전라도에 귀양간 우홍수, 이숭인, 김진양, 우홍명,
양광도에 귀양간 이확, 강원도에 귀양간 우홍득 등 여덟 명이 죽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곤장 1백 대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습니다.
정도전 등의 사주로 이들이 곤장을 심하게 쳐 죽인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우현보의 아들이 셋이나 포함돼 있습니다.
실록은 이를 정도전의 복수라며 그 내막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전에 우현보의 친척으로 김진(金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중으로 있으면서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범해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김진의 집안에서는 모두 수이의 딸이라고 했으나
김진만은 자기 딸이라며 몰래 사랑하고 보호했습니다.
김진은 나중에 환속해 수이를 내쫓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 딸을 선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는 노비, 토지와 집을 모두 주었습니다.
우연은 딸 하나를 낳아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여러 벼슬을 지내고 형부 상서에 이르렀던 정운경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외할머니가 천출(賤出)이었던 것입니다.
정도전이 처음 벼슬자리에 나서니 우현보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경멸했습니다.
관직을 옮겨 임명할 때마다 대간에서 고신(告身, 임명장)에 서명해주지 않자,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제들이 시켜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해
일찍부터 분개하고 원망했습니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우홍수의 아들 우성범(禹成範)이 부마(駙馬)가 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우성범 등이 세력을 이용해 그 근본을 까발릴까봐
우현보 집안을 모함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은 짓이 없었습니다.
개국할 때 우성범을 모함해 죽이고는,
마침내 우현보 부자(父子)를 모함해 죽이려 했습니다.
또 조준이 이색, 이숭인과 사이가 나빴으므로
이색, 이종학 부자와 이숭인을 얽어 함께 죽이려 했습니다.
즉위 교서를 지으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들을 나열하고는
계속해서 우현보 등 10여 사람의 죄를 논해 극형에 처하게 했으나
임금이 막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에게 등급에 따라 곤장을 치도록 청해 허락을 얻었습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몰래 집행 관원인 황거정 등에게 말했습니다.
“곤장 1백 대를 맞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된다.”
황거정 등은 이들을 곤장쳐 죽이고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으로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것입니다.
실록은 이 일이, 정도전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 개인적인 원한을 갚은 것이며
임금이 처음에는 몰랐다가 나중에 그들이 죽은 것을 듣고는
크게 상심하고 탄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태종 때인 1411년 가을에 이 문제가 불거져나와,
황거정과 손흥종 등이 임금을 속이고 멋대로 사람을 죽였다며 소급해 죄를 다스렸습니다.
한편 죽지 않고 각지로 귀양갔던 사람들은 몇 달 뒤 상황이 안정되면서 풀려납니다.
태조는 이해 10월 11일 자신의 생일을 빌미로
이들의 처벌을 완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그 이튿날 바로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 30 명은 지방 아무 곳에나 살 수 있게 하고
이첨, 허응 등 30 명은 서울이든 지방이든 자유롭게 거처토록 해주었습니다.
이듬해 설날에는 지방으로 거주제한했던 사람들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