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인류의 기원을 만나러 떠나는 여정 / EBS 다큐프라임 - 사라진 인류 -

이름없는풀뿌리 2018. 4. 10. 15:56

인류의 기원을 만나러 떠나는 여정 / 한겨레 신문 (1) 인류의 기원 지금으로부터 157년 전,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그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단 한 줄 밖에 서술하지 못하였다. 그 말은, “사람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도 조명해봐야 할 것이다.”였다. 그가 인류 최고의 과학적 성과로 추앙받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론’을 펼치면서, 왜 인류도 진화와 관련이 있다고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신(神)이 생명을 창조하였다는 시대의 거센 조류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한 본능은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는 침팬지 같은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했을까?’ 등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었다. 이러한 인간의 궁금증에 화답한 것이 바로 ‘인류 화석’이었다. 인류 화석은 최초의 인간 기원을 추적하는 데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하였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인류의 기원은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어서 자바원인, 베이징원인 등의 발견으로 다시 50만 년 전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은 ‘분자시계’ 등의 활약으로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단 1% 정도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불어 오스트랄로피테신(호미니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종을 총칭하는 말)과 인류 진화단계의 첫 단계로 보이는 약 600~700만 년 전의 ‘투마이’ 화석 등이 발견되어 인류 기원을 찾는 과거로의 여정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가고 있다. 루시의 아기 셀람 1974년 11월, 에티오피아의 하다르 아와시 강가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미국의 인류학연구팀 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호미니드(인간과 가까운 종을 통칭하는 말)의 화석을 발견했다. 그것도 한 점이 아니라 여러 점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키 1m 가량의 20세 전후 여성으로 추정되었다. 인체의 40% 정도의 척추뼈, 골반뼈 등을 찾았고, 당시까지 발견된 인류 화석 중 가장 완벽한 형태였다. 특히, 무릎뼈와 휘어진 척추 등은 두 발로 걷는 인간의 그것과 흡사했다. 새로운 발견에 들떠 있던 발굴단 캠프에는 당시 유행하던 비틀즈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울려 펴졌다. 그 화석의 여성은 비틀즈의 노래 제목을 따라 ‘루시’라는 별칭을 얻었다. ‘루시’는 그렇게 320만 년의 깊은 잠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어서 2006년에 과학잡지 <네이처>는 독일 막스 프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의 알렘세게드의연구팀이 ‘루시’와 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속하는 아기 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에티오피아 북동부지역에서 발견된 화석은 3세 아기로 330만 년 전 홍수에 떠밀려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화석은 에티오피아 말로 ‘평화’를 뜻하는 ‘셀람’이라고 불렸다. 7년여의 작업 끝에 셀람의 두개골과 몸통, 척추, 팔다리는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복원되었다. 셀람의 뇌 크기는 성인의 70% 정도였다. 학자들은 셀람의 뇌 성장속도가 침팬지보다 느린 것으로 봐서 인간에 더 가깝다고 추정하였다. 루시와 셀람은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걸었지만, 나무도 역시 잘 탔다는 것을 화석의 분석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완전한 사람의 단계는 아니었지만, 분명 인류 쪽으로 진화하는 중이었다. 이로서 300~370만 년 전에 살았던 루시와 셀람의 종(種)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는 초기 인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학자들이 붙여준 이름인 ‘루시의 아기 셀람’은 인류의 기원을 밝힐 수 있도록 300만 년 전 과거로 우리를 데려갔다. 다르게 진화한 인간과 유인원 ‘루시와 셀람’의 발견처럼 인류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고인류학은, 1억 년 전부터 진화해 온 영장류 가운데서 우리 인류에 가장 가까운 종(種)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약 2천만 년 전에서 8백만 년 전에 이르는 지층에서 다량의 화석을 발굴하고 있다. 이미 약 1400만 년 전에 살았던 유인원의 턱뼈 화석을 발견하였다. 그 화석 ‘드리오피테쿠스’는 사람과 유인원이 갈라지기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인류만의 조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진화론이 발표된 초기에 ‘다윈의 개(불독)’라는 별명을 얻은 토마스 헉슬리는 1863년 《자연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발표하였다. 그 책에서 헉슬리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분명히 밝히지 않았던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진화론을 적용하여 인간도 진화의 과정에서 생긴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침팬지 같은 유인원이 원숭이보다는 우리 인간에 훨씬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헉슬리의 견해는 처음에는 조롱과 빈축을 샀지만, 오늘날 해부학이나 단백질의 분자구조에 대한 연구결과들은 점차 헉슬리의 이론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류의 공동조상을 침팬지나 고릴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유인원 역시 인간과 다른 갈래로 진화해 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견과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인류학자들은 드리오피테쿠스 같은 종으로부터 인간과 유인원은 약 700만 년경 전에 서로 다른 종으로 분리되어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두 발로 걷기 이와 같이 초기 인류의 화석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 우리는 사람과(科)와 원숭이과(科)가 갈라져 진화하는 분기점을 추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과(科)의 화석은 아프리카 차드에서 발견된 약 700만 년 전의 ‘투마이(차드어로 ‘삶의 희망’이란 뜻)’화석도 있지만, 비교적 폭넓게 인정되는 경우는 약 400만 년에서 3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이 화석은 두뇌용량이 500cc가량이며 “두 발로 걸었고” 돌과 나무를 도구로 사용하고 집단수렵을 했다.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 근처의 타웅에서 1924년에 발견한 화석을 연구한 레이몬드 다트는 그 얼굴과 이빨로 미루어 보아 사람과 유인원의 중간단계라고 생각하고, ‘남쪽의 원숭이’란 뜻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남쪽의 원숭이’가 초기 인류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다른 영장류와 달리 ‘두 발로 걸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학계에서는 초기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와 두발로 걷게된 이유를 다양한 관점에서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초기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을 하게 된 이유를, 기후의 변화로 열대우림이 줄어들고 넓은 초원이 늘어나 먹이를 찾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직립보행의 이유로 ‘육아(섹스)가설’ 등과 같은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허리를 곧게 펴고 직립 보행을 한다. 곧게 서서 걸으면서 두 손이 자유로워진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혁명적 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직립 보행을 위해서 골반이 작아지는 진화를 겪어야했다. 그 때문에 ‘아기집’이 작아진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목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약하고 미성숙한 아이를 낳아 집단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미성숙한 아이를 오랜 기간 양육하게 되면서 집단의 문화를 전수하며 자식에게 생존을 위한 지혜를 심어주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도 바로, ‘두 발로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류의 기원을 찾아서 인간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과학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외계 종족이 원시 지구를 찾아와 외계인의 몸을 분화시켜 인류의 기원이 되는 유전자를 지구에 퍼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한편, 최초의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서 만들었다는 중국의 신화인 <여와(女?)> 이야기나, 하느님이 흙먼지로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빚었다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서술처럼 신화와 종교도 인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기원은 수백만 년 전 화석의 발견과 그 화석의 연대와 변화과정을 증명할 수 있는 ‘분자시계’의 이용 등으로 새로운 영역이 꾸준히 개척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머지않아 좀 더 구체적인 증거로 최초 인류의 근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인류의 기원을 밝히려는 노력은 늘 우리를 과거로 흥미로운 여정을 떠나게 한다. 분자시계의 원리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말에서 ‘영장류’가 유래하였다. 그렇다면 영장류에 가장 가까운 포유동물은 무엇일까. 진화생물학에서 분류한 내용을 보면, 소나 개, 호랑이보다 땅속이나 동굴 등에 사는 두더지나 박쥐가 더 영장류에 가깝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는 연구에 사용되는 방법이 바로 ‘분자시계’이다. 분자시계는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DNA나 단백질 등의 분자 속에 시계처럼 시간을 새겨가며 변화하는 부분을 추정하여, 그 변화를 나타내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전학자들은 인간의 DNA가 ‘변화(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속도’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분자시계의 핵심원리는 ‘돌연변이 속도’로 진화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이다. 이 원리로 분자시계는 생물의 종(種)이 나누어진 시기를 추정하는 데 널리 이용된다. 사람과 유인원이 약 700만 년 전에 분리되었다고 측정한 방법이 바로, 분자시계의 원리이다. 인류기원설 논쟁 재연, “현생 인류는 누구 자손인가?” 아프리카기원설과 다지역기원설 …인류학자들은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를 놓고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아프리카기원설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의 직립원인(호모 에렉투스)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모든 인류의 어머니는 하나라 하여 ‘이브이론‘이라고도 일컫는다. 다지역기원설은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진화해 현대인류가 됐다는 학설이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지역기원설의 대변자인 미국 미시간대 인류학자 밀퍼드 월포프는 인류가 200만년 전 지구로 확산된 뒤 각자 독립적으로 떨어져 오늘날의 인간으로 서서히 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호모 에렉투스는 오늘날의 중국인이 됐고, 원시 유럽인에서 영국인, 이탈리아인, 독일인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국 런던 국립역사박물관의 크리스 스트링거 교수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최초의 유럽인이 현대 유럽인의 조상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유럽지역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측정했다. 결론은 고대 유골들은 현대 유럽인의 조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현생 인류가 멀지 않은 과거에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유럽, 아시아 등 다른 지역으로 옮겨다니면서 친척 호모 에렉투스를 멸종시키고 전세계의 주인이 됐다는 가설을 세웠다. 세계인의 어머니는 한사람이라는 것이다. 비밀문의 열쇠, 미토콘드리아 속 유전자 월포프와 스트링거의 논쟁은 10년 전 고생물학 토론에 끼어든 유전학자들에 의해 막을 내리는 듯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앨런 윌슨 교수는 현생 인류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분자 시계‘를 찾아냈다. 세포핵에 들어 있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유전자(디엔에이) 1% 정도는 핵 바깥의 미토콘드리아에 들어 있다. 이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는 여성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특징이 있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될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수정란에 남지 않는다. 또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돌연변이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일어난다. 유골에 남아 있는 디엔에이의 돌연변이를 보고 얼마나 오래 전에 돌연변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는지를 측정하면 그 유골의 조상이 언제 발생했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측정법으로 유골과 현대 인간의 견본을 조사한 결과 지구상의 모든 종족과 인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거의 미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계인의 어머니는 기껏해야 20만년 전에 살았다. 유전적 다양성은 아프리카에서 유독 크게 나타났다. 측정 결과로 추론하면 현생 인류는 1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이동을 했고, 4만년 뒤 호주로, 3만년 전쯤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아프리카기원설에 판정승이 내려진 것이다. 분자 시계 (molecular clock) 진화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나, 환경의 변화가 크면 그 지역에 살던 생물의 수는 줄어들고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물의 수가 증가할 기회가 부여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뒤집어 보면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물체가 많을수록, 즉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진화가 진행된 시간이 길고, 환경의 변화도 컸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유전자의 돌연변이 폭이 크면 클수록 진화의 시간이 오래되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1963년 주커칸들과 라이너스 폴링은 돌연변이에 나타나는 단백질의 변이, 나아가 단백질을 만들도록 지시하는 DNA의 변이를 조사하면 진화가 일어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분자 시계’입니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핵 DNA에 비해 돌연변이가 훨씬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 변이 정도를 조사하면 정밀한 분자시계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영국의 고인류학자 크리스토퍼 스트링거와 미국의 알란 윌슨은 각각 두개골 화석을 비교와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용한 분자유전학적 방법으로 현생 인류가 약 15만 년 전 동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발생한 후, 이 후손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이주하여 모든 인류의 부모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노아의 방주 모델’또는 ‘미토콘드리아 이브’(모든 인류가 한 어머니의 자식들이란 뜻)라 부르기도 합니다. 두 발로 진화의 길을 헤쳐온 인류 (2) 인류의 진화 1982년 12월,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두루봉 일대에서 석회석 채굴을 위해 산을 뒤지던 광산회사 소장 김흥수는 석회동굴을 발견했다. 그런데 석회동굴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동굴 안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사람 유골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뼈들이 예사 유골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고고학자들에게 발견 사실을 알렸다. 조사한 결과 동굴의 유골은 무려 4만 년 전 어린아이의 화석이었다. 놀라운 것은 아이 가슴 부근의 흙을 분석해 보니 국화꽃가루가 다량으로 나온 것으로 봐서 장례를 치른 흔적이 있었다. ▲ 충북청주 두루봉동굴 유적에서 발굴된 4만년전 구석기 시대를 살았던 ‘흥수아이’ 화석. 학계에서는 김흥수가 발견한 공을 기리기 위해 우리나라 처음으로 사람 이름을 유적에 붙여 동굴은 ‘흥수굴’, 아이의 이름은 ‘흥수아이’라고 했다. 흥수아이 이외에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장례 관습을 보여주는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논란이 있지만, 국사편찬위원회는 흥수아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장례법을 보여줬다고 인정하고 있다. 흥수아이는 약 4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 ‘호모 사피엔스’에 속한다. 4만 년이란 시간은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는 어림잡기 힘든 기간이다. 그런데 인류의 진화를 이해하려면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흥수아이 화석과 같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서 하나씩 맞춰가야 한다. 두 발로 일어선 인류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마스 헉슬리는 1893년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출간하여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등이 해부학적으로 인간의 골격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주장은 인간 창조에 대한 종교적 관념을 넘어서 지질학, 생물학 같은 전문 과학 분야가 체계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렇게 전문 분야로 체계화된 각 집단은 인류 진화과정을 밝히기 위한 본격적인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러한 인류 기원을 밝히려는 노력으로 2001년 아프리카 차드에서 ‘삶의 희망’이라는 뜻의 ‘투마이’라는 이름을 붙인 영장류 두개골 화석이 발견되었다. 연구를 통해 투마이 화석은 현재까지 인류의 진화 첫 단계이며, 침팬지와 사람의 중간 연결고리로 보고 있다. ‘분자(진화)시계’ 등을 이용한 분석 결과 투마이인은 약 6~7백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화석의 연구를 통해 인류와 유인원이 분리된 시점을 약 6백만 년 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과 유인원을 나누는 근거 기준은 바로 ‘직립 보행’ 여부이다. 지금까지 두 발로 서서 생활하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1863년 찰스 라이엘은 《옛인류》에서 언젠가는 인류와 유인원을 연결하는 중간형의 존재가 발견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처럼 화석으로 최초의 직립 보행하였다는 증거를 지닌 ‘투마이 원인(猿人)’이 인류의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직립 보행을 한 이유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인원이 두 발로 걸은 흔적인 발자국과 뼈 화석이 발견되어 인류의 기원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화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약 500~600만 년 전 나무 위에 살던 유인원이 땅으로 내려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 이들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인류로 진화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인원을 두 발로 걷게 하였을까? 약 1천만 년 전, 지각 변동으로 아프리카 지구대가 생겨났다. 그로 인해 아프리카 중앙의 밀림에서 발생한 습한 대지가 동쪽에 솟은 지구대의 경계에 부딪히면서 경계지역에 비를 내린 후, 습기를 잃은 건조한 바람으로 바뀌어 지구대 쪽으로 불었다. 이런 과정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이 지역은 점차 건조해졌으며, 오늘날과 같은 사바나 초원으로 변하였다. 그 때문에 숲이 점점 사라지면서 초기 인류는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먹이를 찾아 먼 거리까지 자주 걷다 보니, 네 발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두 발로 걷는 것이 에너지 소모가 덜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숲이 무성한 곳의 유인원은 살던 대로 변화 없이 생존하였고, 바뀐 기후에 살아남기 위해 적응한 유인원은 직립 보행을 하면서 인류로 진화의 길을 나섰다. 호모(Homo)라는 이름 이렇게 초기 인류가 직립 보행을 시작하자 앞발은 두 손으로 변하였다. 그렇게 생긴 손으로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분류학적으로 사람에 대한 분류를 요약하면 사람은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사람종(학명:Homo Sapiens)’이다. 학계에서는 두 손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초기 인류에게 사람이라는 의미의 ‘호모(Homo)’라는 명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최초로 이름을 갖게 된 초기 인류가 ‘호모 하빌리스(손을 쓴 사람)’이다. 호모 하빌리스는 250~160만 년 전에 살았고, 키는 침팬지처럼 1m가 조금 넘었다. 하지만 ‘남방 원숭이’라는 뜻인 초기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400cc 정도의 뇌 용량을 가진데 비해, 호모 하빌리스의 뇌는 700~800cc 정도로 두 배 이상이었다. 이들은 뇌도 발달하였지만, 특히 엄지손가락이 넓적하여 ‘하빌리스(손을 쓴 사람)’라는 이름처럼 물건을 잡기 좋고 도구를 다룰 수 있었다. 호모 하빌리스 때 뇌 용량이 급속도로 커진 이유도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고 손을 쓰면서 지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약 170~30만 년 전 살았던 화석인류로 ‘똑바로 선 사람’이란 뜻의 ‘호모 에렉투스’가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유럽, 아시아 등으로 삶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자바원인, 북경원인, 하이델베르크인 등이 호모 에렉투스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똑바로 선 사람’이란 명칭이 붙여진 이유는, 더 오래전에 직립 보행을 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화석이 먼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을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철이 있는 온대지방까지 분포하게 되었다. 뇌용량은 850∼1,200cc로 호모 하빌리스보다 2배 정도 더 컸다.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호모 에렉투스 이후에 등장한 ‘옛인류(舊人)’는 약 20만∼2만5000년 전에 존재하였다. 이 옛사람들은 추운 빙하 지역까지 삶의 범위를 넓혔다. 그 대표적인 인종이 네안데르탈인이다. 1856년 독일 네안데르계곡에서 발견된 화석을 통해 네안데르탈인이 알려졌고, 그들 뇌의 크기는 1,200~1,600cc 정도로 우리와 비슷하다. 이들에게는 시체를 매장하거나 채색을 하는 등 장례문화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동굴에 살았으며, 돌칼, 돌도끼 등의 석기도 제작하였다. 이어서 3만 년 전부터 살았던 상동인, 그리말디인, 크로마뇽인 등과 우리를 가리켜 ‘현생인류(新人)’라고 한다. 1868년 프랑스 남부 크로마뇽 지방에서 화석이 발견된 크로마뇽인은 오늘날 북부 유럽인과 외모, 두뇌 크기가 비슷하다. 이들의 특징은 타제석기를 사용하였으며, 라스코 동굴벽화 같은 예술적 활동도 하였다. 지금까지는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옛인류와 현생인류는 전혀 별개의 인종으로 여겼던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2010년 5월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스반테 파보가 이끄는 연구팀이 옛인류와 현생인류 사이에 이종교배를 하였다는 연구 논문을 소개하였다. 스반테 파보 연구팀은 그 증거로 우리의 유전체(게놈)에 1~4% 정도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음을 제시했다. 이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이후, 유럽인과 아시아인으로 나뉘기 전에 네안데르탈인과 이종교배를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유럽인과 아시아인과 다르게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류 진화 과정으로 볼 때, 우리나라 충청도 청주지방의 두루봉 동굴에서 4만 년 전에 살았던 ‘흥수아이’는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시기를 살았다. 지금까지 흥수아이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 직계조상이 아닌 ‘옛인류(舊人)’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 몸속에 흥수아이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는 사실로 보아 그들도 지금 우리와 같은 땅에서 살다간 우리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뇌에서 월상고랑이 뭐야? 초기 원시인류와 현재 우리의 뇌는 크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하다. 아주 작은 차이점은 뇌에서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의 위치이다. 두뇌에서는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이 뒤쪽에 있다. 뇌에서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의 영역 경계선이 마치 초승달이나 반달의 생김새 같다고 하여, ‘월상(月相)’이란 말을 써서 ‘월상고랑’이라고 한다. 월상고랑은 두뇌 표면이 아치형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이다. 침팬지 같은 유인원은 월상고랑이 뇌의 앞쪽에 위치하여 같은 크기라도 두뇌가 인간보다 작다. 대신 유인원은 월상고랑이 뇌의 앞쪽으로 나와 넓어진 뇌의 뒷부분 시각 영역만큼 시력은 인간보다 뛰어나다. 오스트랄로피테킨이기도한 340만 년 전의 ‘셀람(<책과삶> 3월호 ‘삶은책’ 팟캐스트 참조)’은 침팬지 뇌와 비슷한 크기였지만, 월상고랑은 현재 인류처럼 뇌의 뒤쪽에 있다. 이렇게 인류와 유인원은 수백만 년 전부터 생김새는 비슷하더라도 뇌는 달랐다. 이것은 초기 인류의 두뇌가 이미 현재 인류와 같은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독서신문 책과 삶 EBS 다큐프라임 ★사라진 인류★ 7백만 년의 인류 진화사에 존재했던 스무 종 이상의 다른 인류. 그들은 왜 사라졌고, 우리는 왜 남았을까요? [사라진 인류 방송 안내] 제1부 <멸종> [EBS 1TV] 11월 28일(월) 밤 9시 50분 제2부 <생존> [EBS 1TV] 11월 29일(화) 밤 9시 50분 크리스 스트링어/영국국립 자연사박물관 교수 - 우리 직계 조상뿐 아니라 지금은 멸종되고 없어진 특이한 인류도 흥미롭습니다. 오늘날은 지구에 인류가 단 한 종만 생존해 있는 예외적인 시대입니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죠. 줄리아리 소프/옥스퍼드 고고학과 교수-유일한 인간인 우리는 이 지구에서 참 외로운 존재예요. 개인적으로 제게 가장 흥미로운 의문은 우리가 지구에 남은 유일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 스프링어 - 왜 다른 인간 종은 멸종했을까요? 우리 때문이었을까요? 이 지구상엔 우리 말고 적어도 스물네 종의 인류가 있었습니다. 살을 찌르는 추위에서도 살아남았고 혹독한 기아, 맹수의 공격도 견뎌냈죠. 모두 사라졌습니다. 우리 호모사피엔스만 남았습니다. 어떤 종의 마지막 날을 생각합니다. 무리를 지어서 살던 그가 마침내 혼자가 되었습니다. 소멸의 두려움을 나눌 상대도 없이 그는 얼마간을 혼자 살아갔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기억은 우리에게도 남아 있을까요? 해발 950미터 스페인 고원지대에 북동쪽 끝, 1890년대 후반 기차가 다니는 길을 내기 위해 굴을 파다가 석회암 언덕을 발견합니다. 스페인 부르코스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곳은 100만년 전부터 기원전 후까지 인류의 주거지였습니다 (아타푸에르카 유적지). 1976년 한 학생이 인간의 턱 뼈를 발견하면서 이곳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고고학 유적지가 되었죠.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Sierra de Atapuerca)의 동굴군(群)에서 약 100만 년 전부터 기원전후까지 거주했던 유럽의 초기 인류에 관한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었다. 이 동굴군은 매우 특별한 자료의 보고(寶庫)이다. 이곳 동굴과 화석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인류 조상의 생김새와 생활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유적지는 지금까지 전해 오는 인류 문명과 지금은 사라져버린 문화의 기원과 진화에 관해 매우 독특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현생 인류의 아프리카 조상들로부터 비롯되는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진화 계보에 관한 자료가 이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최초로 유럽 거주 인류에 관한 풍부한 증거 자료를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동굴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유적지는 독특한 생태계와 지리적 입지 때문에 인류가 꾸준히 거주해 온 지역이다.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에 남아 있는 화석은 유럽에 살던 초기 인류 공동체의 생김새와 생활상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남은 매우 특별한 자료의 보고이다. 이 유적지는 카스티야(Castilian) 고원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다. 해발 1,000m 이상의 고원 지대이지만 대부분 관목으로 우거지고 일부가 경작되는 이곳은 오늘날 단순한 산등성이에 불과하다. 강줄기에 의한 침식이 과거 500만 년 동안 진행된 결과 동굴 체계가 정교하게 발달한 카르스트(karst; 용식 지형) 풍광이 형성되었다. 지형이 발달함에 따라 지하수면도 낮아졌다. 덕분에 이곳의 동굴은 동물이나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되었다. 시에라 산 남쪽의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계단식 지형을 통해 홍적세[Pleistocene; 플라이스토세] 중기와 초기에 강줄기가 이들 동굴 입구 가까이에 흘러 특히 인간의 정주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다. 인류의 조상이 유럽의 홍적세 퇴적층에 남긴 최초의 인간유골 화석을 트린체라 델 페로카릴(Trinchera del Ferrocarril) 유적군 중의 하나인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그란 돌리나(Gran Dolina) 유적지에서 발굴했다. 고지자기 분석[palaeomagnetic analysis]에 따르면 이 화석의 연대는 현세로부터[BP; 연대를 과학적으로 측정해 구분한 상고시대를 일컫는데 모든 탄소 연대 측정법의 기준이 되는 ‘1950년 이전’이라는 뜻이다.] 80만 년 전쯤이다. 이 인간 유골 화석들은 아슐리안(Acheulean) 이전 시대에 단순한 형태로 만든 석기들과 관련이 있으며, 유적지의 연대를 측정해 보니 시기가 일치했다. 또한 트린체라 델 페로카릴(Trinchera del Ferrocarril) 유적군에는 트레스 시마스(Tres Simas)라고 알려진 유적도 있다. 갈레리아(Galeria) 유적지에서 발굴한 가장 연대가 오래된 유골은 현세로부터 40만 년 전과 20만 년 전 사이에 아슐리안의 석기를 사용하던 인류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쿠에바 마요르(Cueva Mayor)의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Sima de los Huesos; ‘해골의 구덩이’)에서 발굴한 인간 유골도 연대가 비슷하리라고 추정된다. 이 지역에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초식동물이 없었는데 32구 이상의 인간 유해가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이 아마도 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많은 수의 표본으로 대부분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으로 판단된다. 그 덕분에 이 유적지에 살았던 인구에 대한 고대 질병 연구, 원인(猿人)들의 성장과 발달, 그들의 평균 체격에 관한 매우 중요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현세(現世; Holocene)의 퇴적층은 측정 결과 제4기에 속한다. 쿠에바 마요르의 포르탈론(Portalon)이 고고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1910년에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동굴 입구에서 말의 머리를 묘사한 화석을 발견했는데 구석기시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잇따른 발굴 조사를 통해 다양한 인류 집단이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해 로마 시대, 초기 서고트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갈레리아 델 실렉스(Galeria del Silex)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인류가 거주했다는 풍부한 증거를 발굴했다. 기록에 따르면 기하학 문양, 수렵 장면, 의인화한 동물 또는 동물 형상을 한 인간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으로 새긴 패널이 50점 이상 발굴되었다. 제의를 치르던 성소도 찾아냈다. 이곳에서 대부분이 젊은 성인이거나 어린이인 유골과 자기(磁器)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제물을 바치는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갱도의 맨 끝에서는 동굴 이름을 차용한 부싯돌을 발견했다. 쿠에바 델 실로(Cueva del Silo)에도 비슷한 성소가 있었다는 증거가 출토되었다. 인류의 여러 가지 활동은 쿠에바 펠루다(Cueva Peluda), 쿠에바 시에가(Cueva Ciega), 엘 미라도르(El Mirador) 같은 다른 몇몇 유적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원 아래쪽에 영구 정착촌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중세 시대에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 산에 있었던 초기 인류의 활동은 쇠퇴했다. 학계는 19세기 중반부터 이들 동굴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특히 쿠에바 마요르에 집중했다. 남쪽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이 동굴은 곧바로 엘 포르탈론(El Portalon)과 연결된다. 동쪽에는 갈레리아 델 실렉스가 구불구불한 형태로 300m 이상 뻗어 있다. 서쪽에는 일단의 동굴군[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은 자체의 입구가 따로 있는 갈레리아 델 실로를 향해 1㎞ 이상 뻗어 있다. 북서쪽에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광산 철로 [여기서 라 트린체라 데 페로카릴(La Trinchera del Ferrocarril)이라는 이름이 비롯됨]의 굴착 작업을 하다가 드러난 유적지가 있다. 이들 동굴과 암반 은신처는 사실상 광산 철로 공사 때문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북쪽에는 그란 돌리나(Gran Dolina)가, 더 먼 남쪽에는 트레스 시마스(Tres Simas)가 있다. 라 갈레이아(La Galeria)에서도 중요한 유물을 발굴했다. 예우팔드 카보넬/스페인 고고학 교수 - 이건 호모 안테세소르의 두개골입니다. 정확히 이 지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란 돌리나(Gran Dolina)의 여섯번째 지층에서요. 제 왼쪽에 들고 있는 것은 턱뼈입니다. 발견 당시 무엇인가 덮인 채 엎어져 있었습니다. 발굴후 세워보니 우리 턱과 굉장히 유사했습니다. 80만년전 인류의 턱이 현재 우리 턱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고고학은 뼈와 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종이 인간이 됐는지 우리는 어떻게 그 길에 접어들었는지 치밀하게 단서를 찾아갑니다. 유사이래 가장 많은 인류의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시간을 털어내고 그조각들을 맞춰봤습니다. 호모 안테세소르 아래 턱뼈, 100만년 동안 이 한 종류만 산게 아니었습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두개골.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두개골.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있었습니다. 수십만년 후에 네안데르탈렌이 살았습니다. 마지막은 호모사피엔스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두개골. 인류의 계보는 가지 많은 나무와 같습니다. 700만년전 침팬지 계통에서 떨어져 나와 여러 종으로 진화를 거듭했지요. 여기서 발견된 네 종의 인류는 거의 최근에 살았던 인류입니다. 지금은 인류라는 나무에 우리만 살아남은 시대죠. 왜 우리 혈통이 살아 남았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뿐입니다. 마요르 동굴 스페인 이타푸에르카. 진실은 가끔 불편합니다. 땅 아래 14미터 가량 파내려 가다가 거대한 해골 구덩이를 발견합니다. 5500여개 종류의 뼈 조각이 나왔습니다. 모두 28명. 대부분이 10대 후반 그리고 20대. 집단 매장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또 이상한 건 이 돌도끼입니다. 도구로 쓰기엔 너무 물컹한 규암입니다. 주인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예우팔드 카보넬/스페인 교수 - 호모 하이델 베르겐시스가 누가 죽었을 때 시체를 의도적으로 동굴 안쪽에 두었다는 사실은 17번 두개골에 나있는 두 구멍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두개골 왼쪽 눈 부근에 지속적인 타격, 의도적인 살해였습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 70만년전에 나타나 50만년을 살았던 인류입니다. 우리 호모사피엔스와 호모네안데르탈렌의 공통의 조상입니다. 동료를 살해한 최초의 인류로 알려져 있죠. 영국국립 자연사박물관에 트레져스 갤러리. 이 단단한 침묵은 또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 스프링어 - 원시 인류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사자와 하이에나와 늑대와 곰과 함께 말이죠. 복스그로브에 그 직접적인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영국 잉글랜드 남부에 위치한 복스그로브, 원래는 채석장이었습니다. 이곳에서 20살 정도의 건장한 남성의 다리뼈가 발견됩니다. 마크 로버츠/유니버시티 칼리지런던 고고학과 교수 - 이 뼈 주인은 키가 아마 거의 6피트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180에서 182cm 정도죠. 키가 컸고 체격이 다부졌습니다. 골격이 거대하고 근육질이었습니다. 오늘날 럭비 선수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뼈는 이 남자의 마지막 순간도 보여줍니다. 동물이 뼈끝을 씹어 먹은 것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씹히면 생기는 자국입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 정강이 뼈/영국 복스그로브. 이 뼈 주인은 동물에게 잡아먹혔습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 정강이뼈/스페인 아타푸에르카.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의 뼈는 유난히 상처가 많습니다. 얼마나 삶이 고단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 골반뼈/스페인 아타푸에르카. 그래도 90kg의 체중을 거뜬히 지탱했던 강인한 골격의 소유자.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 골반 및 허벅지 뼈/탄자니아 올드바이 계곡. 당시 지구에서 가장 영리한 생명체였습니다. 이들과 같이 살던 일부가 두 셋은 더 있었습니다. 다른 인류 누구도 이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크리스 스트링어 - 이 사람들은 확실히 위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을 잡아 먹을지도 모르는 포식자가 주변에 널려 있었습니다. 독특한 기후에서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겨울은 매우 추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상당히 강했을 것입니다. 근육이 많았고 뼈는 두꺼웠습니다. 삶이 가혹했기 때문에 몸이 그에 맞춰 강하게 진화한 것입니다. 그때에 대지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얼룩말은 80kg이나 더 무거웠고 아프리카 물소 뿔은 지금보다 2.5배나 길었습니다. 인류도 커져야 했을 것입니다. 빙하기가 도래하고 있었고 지구는 건조해졌습니다. 식량경쟁은 더 치열해졌죠. 동료의 죽음은 집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집단은 이 충격을 감당해야 합니다. 안토니오 로사스곤살레스/스페인국립 자연사박물관 교수 -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도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단체 사냥이나 음식 나눠먹기와 같이 도구를 사용하는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고 사회활동을 했는데 이는 의사소통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엑스칼리버-붉은 규암재질의 돌도끼). 이 돌도끼가 언어의 가능성을 말해 줍니다. 규암은 이 근처에서 나오는 암석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죽은 동료가 눈 앞에 있습니다. 그는 죽은 시체에 확인사살을 합니다. 이 살해현장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죽은 시체의 머리 뼈를 으깬뒤 뇌를 꺼내 먹었습니다. 단순히 배고픔 때문이었을까요? 뇌를 먹음으로서 상대방의 지혜를 흡수한다는 원시적 사고가 떠오릅니다. 일부러 멀리서 구해온 붉으스럼한 돌이 있었습니다. 시체 옆에 돌도끼를 놓았죠. 현실과 떨어진 어떤 의식이 생겼다는 증거, 그렇다면 언어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우팔드 카보넬 - 호모 하이델베르겐 시스가 그 재질을 골라 엑스칼리버로 만든게 아닐까요? 이 재질은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거든요. 특별히 따로 채취해서 이런 특징으로 다듬은 것이죠. 그래서 저희는 엑스칼리버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망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 봅니다. 지구는 점점 추워집니다. 몸이 컸던 이들은 한계 이상을 버텨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지구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다음에 추위를 이길 수 있는 더 강한 인류가 나타납니다. 아타푸에르카 추가 자료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Sierra de Atapuerca)의 동굴군(群)에서 약 100만 년 전부터 기원전후까지 거주했던 유럽의 초기 인류에 관한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었다. 이 동굴군은 매우 특별한 자료의 보고(寶庫)이다. 이곳 동굴과 화석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인류 조상의 생김새와 생활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유적지는 지금까지 전해 오는 인류 문명과 지금은 사라져버린 문화의 기원과 진화에 관해 매우 독특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현생 인류의 아프리카 조상들로부터 비롯되는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진화 계보에 관한 자료가 이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최초로 유럽 거주 인류에 관한 풍부한 증거 자료를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동굴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유적지는 독특한 생태계와 지리적 입지 때문에 인류가 꾸준히 거주해 온 지역이다.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에 남아 있는 화석은 유럽에 살던 초기 인류 공동체의 생김새와 생활상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남은 매우 특별한 자료의 보고이다. 이 유적지는 카스티야(Castilian) 고원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다. 해발 1,000m 이상의 고원 지대이지만 대부분 관목으로 우거지고 일부가 경작되는 이곳은 오늘날 단순한 산등성이에 불과하다. 강줄기에 의한 침식이 과거 500만 년 동안 진행된 결과 동굴 체계가 정교하게 발달한 카르스트(karst; 용식 지형) 풍광이 형성되었다. 지형이 발달함에 따라 지하수면도 낮아졌다. 덕분에 이곳의 동굴은 동물이나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되었다. 시에라 산 남쪽의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계단식 지형을 통해 홍적세[Pleistocene; 플라이스토세] 중기와 초기에 강줄기가 이들 동굴 입구 가까이에 흘러 특히 인간의 정주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다. 인류의 조상이 유럽의 홍적세 퇴적층에 남긴 최초의 인간유골 화석을 트린체라 델 페로카릴(Trinchera del Ferrocarril) 유적군 중의 하나인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그란 돌리나(Gran Dolina) 유적지에서 발굴했다. 고지자기 분석[palaeomagnetic analysis]에 따르면 이 화석의 연대는 현세로부터[BP; 연대를 과학적으로 측정해 구분한 상고시대를 일컫는데 모든 탄소 연대 측정법의 기준이 되는 ‘1950년 이전’이라는 뜻이다.] 80만 년 전쯤이다. 이 인간 유골 화석들은 아슐리안(Acheulean) 이전 시대에 단순한 형태로 만든 석기들과 관련이 있으며, 유적지의 연대를 측정해 보니 시기가 일치했다. 또한 트린체라 델 페로카릴(Trinchera del Ferrocarril) 유적군에는 트레스 시마스(Tres Simas)라고 알려진 유적도 있다. 갈레리아(Galeria) 유적지에서 발굴한 가장 연대가 오래된 유골은 현세로부터 40만 년 전과 20만 년 전 사이에 아슐리안의 석기를 사용하던 인류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쿠에바 마요르(Cueva Mayor)의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Sima de los Huesos; ‘해골의 구덩이’)에서 발굴한 인간 유골도 연대가 비슷하리라고 추정된다. 이 지역에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초식동물이 없었는데 32구 이상의 인간 유해가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이 아마도 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많은 수의 표본으로 대부분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으로 판단된다. 그 덕분에 이 유적지에 살았던 인구에 대한 고대 질병 연구, 원인(猿人)들의 성장과 발달, 그들의 평균 체격에 관한 매우 중요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현세(現世; Holocene)의 퇴적층은 측정 결과 제4기에 속한다. 쿠에바 마요르의 포르탈론(Portalon)이 고고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1910년에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동굴 입구에서 말의 머리를 묘사한 화석을 발견했는데 구석기시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잇따른 발굴 조사를 통해 다양한 인류 집단이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해 로마 시대, 초기 서고트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갈레리아 델 실렉스(Galeria del Silex)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인류가 거주했다는 풍부한 증거를 발굴했다. 기록에 따르면 기하학 문양, 수렵 장면, 의인화한 동물 또는 동물 형상을 한 인간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으로 새긴 패널이 50점 이상 발굴되었다. 제의를 치르던 성소도 찾아냈다. 이곳에서 대부분이 젊은 성인이거나 어린이인 유골과 자기(磁器)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제물을 바치는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갱도의 맨 끝에서는 동굴 이름을 차용한 부싯돌을 발견했다. 쿠에바 델 실로(Cueva del Silo)에도 비슷한 성소가 있었다는 증거가 출토되었다. 인류의 여러 가지 활동은 쿠에바 펠루다(Cueva Peluda), 쿠에바 시에가(Cueva Ciega), 엘 미라도르(El Mirador) 같은 다른 몇몇 유적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원 아래쪽에 영구 정착촌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중세 시대에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 산에 있었던 초기 인류의 활동은 쇠퇴했다. 학계는 19세기 중반부터 이들 동굴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특히 쿠에바 마요르에 집중했다. 남쪽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이 동굴은 곧바로 엘 포르탈론(El Portalon)과 연결된다. 동쪽에는 갈레리아 델 실렉스가 구불구불한 형태로 300m 이상 뻗어 있다. 서쪽에는 일단의 동굴군[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은 자체의 입구가 따로 있는 갈레리아 델 실로를 향해 1㎞ 이상 뻗어 있다. 북서쪽에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광산 철로 [여기서 라 트린체라 데 페로카릴(La Trinchera del Ferrocarril)이라는 이름이 비롯됨]의 굴착 작업을 하다가 드러난 유적지가 있다. 이들 동굴과 암반 은신처는 사실상 광산 철로 공사 때문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북쪽에는 그 란 돌리나(Gran Dolina)가, 더 먼 남쪽에는 트레스 시마스(Tres Simas)가 있다. 라 갈레이아(La Galeria)에서도 중요한 유물을 발굴했다. 탄자니아 올드바이 협곡. 한때 인류는 하나의 조상에서 서서히 진화해 우리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다른 생물들처럼 수많은 가지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걸 알게 됐을까요? 1975년 케냐에서 호모 에렉투스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이상했습니다. 같은 지층이었던 이곳에 이미 다른 인류가 있었으니까요. 한 시기에 두 종류의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 그 주인공입니다.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두개골 발굴지 마리리키, 1959. 나중에 붙은 이름은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두개골. 줄리아리-쏘프/옥스퍼드대 고고학과 교수 - 현대인 치아는 1㎠ 정도되는데 이 원시인 치아는 그 두 배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큰 치아입니다. 거대한 치아입니다. 앞니에 비해 어금니가 거대합니다.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 앞니와 어금니 사진, 호모사피엔스 - 앞니와 어금니 사진. 얼굴은 펑퍼짐합니다. 약 2백만년전에 살았던 인류의 한 종입니다. 턱 때문에 호두까기맨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죠. 뇌는 우리의 약 3분의 1정도 됩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엔 대 여섯 종의 인류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나무가 자란 후 500만년 정도가 흐른 뒤 입니다. 아프리카 케냐 지역에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르가스터 같이 몸이 가날픈 종, 세 종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건장한 종도 살았습니다.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도 이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이 가날픈 종의 계열입니다. 인류도 다른 생물처럼 수많은 가지를 가진 대가족입니다. 보이세이는 채식을 했습니다. 수컷의 경우 평균 신장 약 130cm입니다. 평균 체중은 49kg 어떻게 이 몸을 유지 했을까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자연사 박물관. 200만년전의 시간을 보존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가브리엘 마초/옥스퍼드대 고고미술사학 연구소 - 마초 교수는 고인류가 남긴 치아를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지요. 이건 보이세이가 즐겨 먹었던 풀의 저장기관입니다. 비교적 큰 편이예요. 거의 병아리콩 크기인데 달달하고 탄수화물이 풍부합니다. 한 줌이 300 칼로리 정도됩니다. 영양가가 높은 거죠. 물론 이걸 소화시키려면 상당히 거칠게 씹어야 합니다. 턱이 강해진 것도 얼굴이 넓적한 것도 많이 씹어서입니다. 치아가 작아지기 시작한 건 음식을 익혀먹기 시작한 뒤가 아니라 호모속(屬)이 출현하고부터 입니다. 이건 습관적으로 육식을 하게된 것과 연관됩니다. 고기는 양질의 음식이라 많이 섭취할 필요가 없죠. 인류에게 육식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일단 사냥을 해야죠. 풀을 먹을 때 보다 훨씬 복잡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뇌가 커지겠죠. 뇌는 지방덩이입니다. 엄청난 영양소가 필요합니다. 같은 칼로리라도 풀은 어마어마한 양을 먹어야 합니다. 인간의 에너지 섭취량은 한계가 있습니다. 뇌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신체 장기랑 경쟁을 합니다. 이상희/미국 UC리버사이드 인류학 교수 - 뇌가 큰 동물은 장이 작더라는 말이죠. 그리고 뇌가 작은 동물은 장이 컸는데 실제로 데이터를 보니까 통계학적 상관관계가 밝혀진 겁니다. 우리 몸은 평균 1kg당 1.25와트의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1kg당 근육은 0.5와트 피부는 0.3와트였습니다. 부피는 많이 차지하는데 에너지 효율은 높죠. 다음은 비슷한 조직입니다. 심장은 32.3와트, 콩팥은 23.3와트, 내장은 12.2와트, 그리고 뇌는 11.2와트입니다. 심장과 콩팥은 제기능을 다하기 위해 크기를 줄일 수 없습니다. 내장은 음식의 질이 높아지면 크기가 줄어도 상관이 없죠. 육식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내장을 줄이고 대신 뇌의 크기를 늘리는 쪽으로 발달합니다. 보이세이는 엄청난 양의 식물을 먹었습니다. 이 몸을 유지하려면 하루 8시간 정도는 먹어야 했죠. 먹이를 찾느라고 포식자에게도 쉽게 노출됩니다. 먹이를 구하러 가는 힘을 얻기 위해 먹어야 하는 삶, 풀을 구하며 느릿느릿 사는 이들의 전략은 옳았을까요? 이상희-뇌가 왜 작았을까가 아니고 그만한 뇌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사항입니다. 이전 시기 인류 조상의 경우에는 비슷한 크기의 뇌를 유지하는 데에 그렇게 보이세이 처럼 극단적으로 가지 않아도 됐거든요. 건장한 인류와 가날픈 인류가 동시에 살았던 땅, 뇌와 위장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위장을 선택한 보이세이의 삶이 꼭 불행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고기를 구하지 못한 가날픈 인류가 굶주릴 때 이들은 벡만년 정도를 잘 삽니다. 약 120만년전쯤 이 종이 사라진 것이 화석기록으로 증명이 됩니다. 네모난 턱과 동그란 얼굴을 가졌던 인류, 이제는 굶주리는 대신, 뇌를 선택한 인류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보이세이처럼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됩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처럼 우리 역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영리합니다. 누구보다도 높은 자의식을 가지고 또한 무리지어 살아가죠. 많이 변한 것 같지만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로빈 던바 교수는 인간의 뇌가 왜 커졌을까에 관심이 많습니다. 뼈와 돌이 아니라 인지 시험을 통해 그것을 밝혀내고 있죠. 로빈 던바/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교수 - 인류 진화학계엔 뇌가 커진 이유에 관한 이론이 많습니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 뇌가 필요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육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은 서로 연대해서 다른 부족이나 맹수와 같은 외부 적과 맞설 수 있는 큰 집단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유인원들은 맹수와 맞서기 위해 집단을 이뤘습니다. 집단의 크기는 두뇌의 크기와 상관이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전두엽의 한 부분 눈과 가까운 곳에 안와 전두피질입니다. 안와전두피질 - 전두엽의 한 부분으로 인지와 감정을 조절. 상대하는 집단이 크면 클수록 안와전두피질의 부피가 큽니다. 안와전두피질이 큰 사람은 일정기간에 더 많은 사람과 연락하며 삽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타인과 소통하고 타인을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종이죠. 집단이야 말로 인류를 싸고 있는 피붑니다. 이제 집단이 인류의 생존을 가눔했던 시기로 접어듭니다. 지구는 마지막 빙하기로 향합니다. 이 맹렬한 추위 속에서 살았던 인류가 있습니다. 약 30만년 전에 등장한 네안데르탈인입니다. 10만년 후엔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 이들과 경쟁하죠. 뇌가 우리 보다 컷습니다. 수명이 길어 봤자 서른살 혹은 서른 다섯살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평생을 바쁘게 뛰어 다닌 종입니다. 전체 인구가 7만명을 넘긴 적이 없는데도 얼어 붙은 대륙을 개척해 갑니다. 안토니오 로사스곤살레스/스페인 고고학과 교수 - 네안데르탈인은 굉장히 작은 집단을 이뤘습니다. 실제로 네안데르탈인 인구는 호모사피엔스 인구보다는 물론이거니와 선사시대 인구보다도 적었습니다. 항상 그 수가 적었죠. 혹독한 환경에서 이들은 서로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장례를 치뤘죠. 현실이 괴로워서 그랬을까요. 죽음의 상실감을 알았습니다. 하루 하루 사는게 힘들었지만 인생에는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굼했습니다. 이들의 매장의식은 우리 보다 빨랐을지 모릅니다. 영장류 인간의 고독을 누구보다 잘 알죠. 우리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지만 네안데르탈인만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안토니오 로사스곤살레스 - 고기를 굉장히 많이 소비했는데요. 실제로 연구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먹이 사슬에서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포식자보다 위에 있다고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거칠고 유능한 사냥꾼입니다. 사슴과 곰, 들소, 매머드까지 꺼꾸로 뜨릴 수 있었죠. 상대가 맹수라면 힘보다 머리를 썼습니다. 이들만큼 인내심 강한 인류도 없었습니다. 맹수의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사냥은 집단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죽음은 인구가 적은 그들로서 뼈아픈 손실이죠. 영리하고 강인하고 또한 용감했던 인류,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점이 멸종을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우리 호모 사피엔스 보다 힘도 세고 근육도 튼튼 했습니다. 체온과 강한 힘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보다 매일 최대 350킬로칼로리가 더 필요했죠. 오늘날 우리라면 이 파이(과일 타르트 약 350 kcal)하나면 충분할 겁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사냥을 해야 했죠. 목숨을 건 사냥으로 폭식 아니면 기아가 반복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협력했고 또 공정하게 나눴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길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라진 인류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미래도 보이죠. 老학자 필립 리버만은 평생에 걸쳐 언어에 대해 사유했습니다. 그는 언어를 우리 호모사피엔스의 전유물로 보지 않습니다. 필립 리버만/미국 브라운대 인지언어과학과 교수 - 50만년 정도 살았고 유럽의 추운 기후와 빙하기 말기도 살아남은 종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분명 언어를 썼을 것입니다. 몇몇은 네안데르탈인이 단순히 흥얼거렸다고 주장하는데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기본적 기능은 소통입니다. 집단을 튼튼하게 하죠. 복잡했던 이들의 삶에도 언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이’ 나 ‘우’소리를 발음할 수 없었다는 것뿐입니다. 아마 비음화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 구조를 보아 알 수 있는 거죠. 두개골과 목뼈를 보면 구조를 알 수 있는데 아마 이런 소리를 냈을 것입니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노래 비슷한 소리, 상징적인 몸짓, 언어는 집단을 결속시킵니다.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남 얘기도 하죠. 그런 시간이 많을수록 집단은 단단해 집니다. 던바 교수는 그런 인간관계가 뇌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커다란 뇌를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우정이라든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얼마나 복잡한지 등에 대해서요. 언어가 그 모든 과정의 끝을 장식했습니다. 원숭이나 유인원은 서로 털을 골라주며 유대를 형성해서 집단을 이룹니다. 큰 집단일수록 털을 고르는 사회적 행동에 시간을 많이 쏟습니다. 로빈 던바 - 큰 집단일수록 털을 고르는 사회적 행동에 시간을 많이 쏟습니다. 언어는 털고르기와 비슷합니다. 유인원의 털고르기는 주로 일대일입니다. 언어는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전할 수 있죠. 인간이 유인원보다 더 큰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던 건 언어 때문입니다. 우리 보다 더 큰 뇌를 가지고 언어의 세계에 들어왔던 네안데르탈인, 그들은 왜 사라졌을까요. 기후 때문일까요. 우리는 혹독하게 추었던 마지막 빙하기를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만 살아 남았을까요. 기본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처럼 수명이 길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명 보다 훨씬 짧았죠. 현재 저희 연구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네안데르탈인 생체시계입니다. 치아는 한 개체의 삶을 통채로 간직하죠. 고인류의 생체시계도 복원할 수 있습니다. 치아는 나무처럼 자랍니다. 층층이 쌓이죠. 맨 처음 생긴 치아는 맨 위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나온 치아를 보면 사망시기를 알 수 있죠. 영양섭취에 문제가 생기거나 병에 걸리면 선이 생깁니다. 이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안토니오 로사스 곤살레스 -네안데르탈인이 젖을 때는 때에 성장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전문용어로는 치아형성 부전이예요. 치아에 줄이 하나 생기는 겁니다. 또 우리는 10살에 나는 어금니가 그들은 6살에 났습니다. 유년기가 우리 보다 4년이나 짧았죠. 그들은 유년기를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루 빨리 자라서 일찍 죽은 연장자의 빈 자리를 채워야 했죠. 빙하기가 끝날 무렵 인구는 5천명 까지 줄었습니다. 타냐 스미스/하버드대 인류진화생물학과 교수 - 우리는 왜 유년기를 늘렸을까요. 현생인류는 지구에서 가장 긴 유년기를 보냅니다. 많은 사람이 길고 느린 유년기의 유리한 점이 무엇인지 의견을 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뇌를 발달시키고 사회적 행동을 통달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년기에 우리는 사회의 복잡한 규칙을 배웁니다. 그 시기에 뇌는 질적으로 발달할 시간을 갖죠. 호모 사피엔스는 있고 네안데르탈인은 없는 것, 긴 유년기였습니다. 최후에 남았던 자를 생각합니다. 15명에서 10명, 5명, 결국 혼자가 됐을 것입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 네안데르탈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집니다. 모든 종의 끝이 이럴지도 모릅니다. 크리스 스트링어 - 인간도 예외일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할까요? 과거에 존재한 거의 모든 종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무적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당연히 멸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3만년에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마주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다부지고 머리가 큰 인류를 만났을때 어떻게 대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죽음이 종 전체의 소멸을 뜻한다는 걸 알았을까요. 알았다면 그도 궁굼해 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았을까요. 끝. 오늘날은 지구에 인류가 단 한 종(種)만 생존해 있는 예외적인 시대입니다. 하지만 몇 만년 전만 해도 지구엔 최소 네 종의 인류가 있었습니다. 크리스 스트링어/고고학자 - 우리와 아주 달랐던 세 종은 멸종했습니다. 인류진화 관련증거는 온 세상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삽토모/인도네시아 국립고고학 연구소 - 모든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궁굼해 하기 때문입니다. 요스케 카이후/일본 국립과학 박물관 - 지금 인류만 보면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동물에서 어떻게 지금처럼 변해왔는가를 기원을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왜 지금 이런 모습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지구상엔 우리 말고 적어도 스물네 종의 인류가 있었습니다. 살을 찌르는 추위에서도 살아 남았고 혹독한 기아 맹수의 공격도 견뎌냈습니다. 모두 사라졌습니다. 우리 호모사피엔스만 남았습니다. 왜 우리만 남았을까요. 플로레스는 인도네시아 소순다 열도 가운데에 있는 섬입니다. 폴투칼 말로 꽃이란 뜻입니다. 플로레스 섬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올수록 마을은 올망졸망입니다. 고온 다습한 전형적인 열대기후, 몬순의 영향으로 건기와 우기가 뚜렷합니다. 호모사피엔스가 아시아와 호주로 이동해간 증거를 찾고 있죠. 여기가 목적지입니다. 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 바닷가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면 12시간 정도 걸립니다. 멀기도 하고 숨겨져 있어서 보존이 매우 잘 되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리앙부아 동굴, 높이 약 25m 넓이 40m의 거대한 석회동굴입니다. 바깥 날씨와 달리 안은 서늘합니다. 공기순환도 좋고 햇빛도 잘 들어오고 사람살기에 좋은 곳입니다. 연구팀이 하는 일은 범죄현장에서 범인을 찾는 일과 비슷합니다. 수십만 수백만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죠. 여기서는 시간이 위로 쌓입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옛날이죠. 이 동굴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건 1965년입니다. 한 신부가 여기서 인간의 뼈를 발견합니다. 알고보니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이 살았습니다. 2003년 이 연구팀은 아래로 6m를 더 파내려 갑니다. 2003년 당시 발굴현장. 9명 정도의 뼈가 나왔죠. 그 중엔 어린 아이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도 있었습니다. 토마스 수티크나/인도네시아 고고학자 - 그 뼈는 거의 완전했습니다. 첫번째로 두개골을 찾았는데 정말 작았습니다. 또 턱과 팔과 다리 등 거의 완벽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6m 깊이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연약했습니다. 저희는 아이 뼈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국립고고학 연구소. 리앙부아의 머리글자를 딴 LB1 머리뼈입니다. E.W.삽토모/인도네시아 고고학 교수–이건 LB1을 3D 프린터로 뽑은 것입니다. 이게 아래턱 뼈고 이게 머리뼈죠. 예전에도 저희 팀이 이런 뼈를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보통 더 커야 하는데 이 뼈는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키 106cm 몸무게 약 30kg 25~30세 사이의 여자였습니다. 만 8천년전쯤 살았던 여성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 치고는 너무 작습니다. 이 여성은 누구일까요? 약 7백만년전 인류는 침팬지 계통에서 떨어져 나와 여러 갈래로 진화합니다. 눈이 크고 호기심이 많았죠. 어떤 종은 도구를 손에 쥐기도 했습니다. 맹수들을 사냥했죠. 어떤 종은 건조함과 싸워야 했고 어떤 종은 혹독한 빙하기를 견뎌냈습니다. 생존은 모든 생물들에게 잔혹한 명령 같은 것이죠. 우리는 이들 가운데 누가 우리의 조상일지 정확히 모릅니다. 적어도 스물네 종, 서로 다른 종들이 살아남기 경쟁을 치렀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어떻게 우리에게 이르렀을까요? 인류의 계보는 바람 잘날 없는 거대한 땅입니다.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선택은 달랐습니다. 고기만 먹기도 하고 채식만 하기도 했죠. 키가 큰 종도 있었고 몸이 큰 종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류라는 카테고리에 우리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여성은 우리와 같은 종일까요. 아니면 다른 또 하나의 가지일까요? 우리는 서로 나눠야 할 얘기가 많습니다. 처음엔 이 섬 원주민의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명랑하고 다소 거칠지만 유머를 알죠. 그런데 키를 연구해 보면 아니었습니다. E.W. 삽토모 - 저희는 자바섬의 호모 에렉투스와 LB1을 비교하는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제법 키가 컸거든요. 하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하빌리스는 작았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LB1이 어디엔가 포함되는 인류인지 아니면 새로운 인류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저희가 발견한 이 인류가 굉장히 작지만 성인이라는 점입니다. 작은 키 작은 몸 잘 발달하지 못한 턱 별명이 호빗입니다. 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두뇌가 작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침팬지만한 것, 뇌용량은 대략 395cc 정도 되었습니다. 세척후 다시 측정했을 땐 417cc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뇌가 작다고 해서 지능이 떨어진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인류진화의 역사는 뇌의 용량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류는 서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업데이트되는 소형 컴퓨터를 장착하고 진화의 도를 질주하는 종입니다. 400만년전 오스트랄로피데쿠스, 갓 태어난 아이 같은 주먹 한 개 반 크기 450cc가 채 안됩니다. 200만년전 호모 에렉투스 뇌의 용량은 두배로 늘어 900cc가 됐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0만년전 뇌의 용량은 세배 정도인 1240cc로 늘었습니다. 이 착실한 진화의 역사 어디에서는 호빗의 뇌도 있을 것입니다. 호빗의 뇌 용량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다도 작습니다. 그런데 200만년은 늦게 나타났지요. 이들은 그냥 호모 사피엔스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종일까요? 문제는 이겁니다. 과연 호모 사피엔스 시대에 침팬지만한 뇌로 살아갈 수 있느냐 뇌의 용량이 작으면 지능이 떨어졌을까요? 사토모 교수는 중요한 증거 하나를 제시합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뼈 무덤이 호빗 시대에 살았던 동물입니다. 스테고돈(멸종된 코끼리의 일종) 머리 형상입니다. 저희가 발견한 중요한 뼈입니다. 2008년에 리앙부아 동굴 16번 구역 70미터 깊이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스테고돈 뼈는 호빗이 사는 동굴에서 함께 발견됐습니다. 스테고돈은 어떻게 동굴 안으로 들어왔을까요? 800 kg에서 1000 kg 사이에 코끼리 비슷한 동물 호빗이 떼로 덤벼요. 상대도 안됐을 것입니다. 운좋게 스테고돈을 거저 잡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 짐승을 처리하려면 도구가 있어야 하죠. 잣 이코/인도네시아 고고학연구소 - 여기를 자세히 보면 굉장히 날카로운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물가죽을 벗기거나 나무를 긁어내기 위한 것으로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돌망치를 이용해 이렇게 깎습니다. 호빗의 도구들은 200만년전 돌도끼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물론 호모사피엔스도 이런 식으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호빗 LB1도구/호모 사피엔스도구. 얼른 보면 차이를 모릅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것이 더 하기테크 기술, 200만년은 뒤쳐진 기술, 작은 키 작은 두뇌, 이들은 이 섬에서 최소 만년 전후까지는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온갖 포식자의 위협을 물리치면서 말이죠. 아마 생태계에서 지위도 매우 낮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플로레스 섬에 큰 쥐 정도 됐을까요. 호모 사피엔스 시대에 침팬지의 뇌를 가지고 살았던 인류, 이들은 어떻게 이 섬에 들어왔을까요? 삽토모 - 지금까지 플로레스 섬이 다른 섬과 육지로 맞닿아 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해수면이 120미터나 더 내려 갔을 때 조차도 육지와 닿지 않았습니다. 플로레스는 굉장히 깊은 바다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바다 때문에 더 설명이 안됩니다. 빙하기, 간빙기, 그리고 대륙이 움직일 때도 한번도 육지와 붙어 본적이 없는 섬입니다. 갓난 아이의 뇌를 가진 호빗이 어떻게 이 바다를 건넜을까요? 삽토모 - 저희는 대나무로 만든 땟목으로 사페 지역에서 코모도 섬으로 넘어오는 실험을 했습니다. 당시 약 11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기술을 가지고 이 바다를 건너는 데는 얼마나 걸렸을까요? 이 바다를 건너야 할 만큼 절박했던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풀어야 할 문제는 아직도 많습니다. 이 작은 인류는 불도 사용했습니다. 함께 사냥할 후 사냥감을 동굴 안으로 가져오는 데는 협력이 필요하죠. 이들의 지적 능력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작은 두뇌는 그렇다손 쳐도 한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들은 왜 작을까요? 매튜 토세리/캐나다 레이크헤드대 인류학과 연구장 - 그 당시 생태계에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소만한 작은 코끼리 스테고돈과 코모도 도마뱀도 당시 플로레스에 있었습니다. 두 청소부 새도 있었습니다. 거의 180 cm에 달하는 거대 대머리 황새와 독수리가 말이죠. 당시 호빗과 살았으리라 추측되는 호빗과 도마뱀은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보통 도마뱀 보다 휠씬 큽니다. 호빗은 훨씬 작은데 말이죠.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 큰 신체는 골치거리가 된다는 섬의 법칙이 있습니다. 섬의 법칙이론 - 1964년 J. 브리스톨 포스터가 발표한 법칙. 자원이 한정된 섬에서 몸집이 작은 종은 점점 커지고 몸집이 큰 종은 점점 작아진다는 이론. 호빗은 작은 코끼리와 거대한 황새 그리고 3m나 되는 코모도 도마뱀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갇힌 섬에서는 열량을 많이 쓰는 일과 작아 지는게 생존에 유리합니다. 플로레스의 인류는 점점 더 작아졌고 신장 1m 정도에서 안정을 찾은 거죠. 호빗은 누구일까요? 어디에 속할까요? 그것은 인류의 기원을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일본국립 과학박물관의 요스케 카이후 박사는 아시아에서 일어난 진화를 연구합니다. 호빗의 치아를 여러 인류의 치아와 비교분석했습니다. 호모 하빌리스 호빗(LB) 호모 에렉투스 송곳니는 초기 인류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와 비슷합니다.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 약 240만년 전 출현하여 오스트랄로페테쿠스 보다 발전된 석기를 사용하는 인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약 19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유럽과 아시아로 퍼진 직접 인류. 그런데 어금니는 호모 사피엔스와 유사합니다. 호빗은 이들 모두의 중간의 특징을 가집니다. 요스케 카이후 - 호빗은 현생인류일 수 없습니다. 치아뿐 아니라 두개골 중에도 원시 인류의 특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호모 에렉투스 (자바원인)가 극적으로 작아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두개골을 서로 비교해 보았습니다. 호빗은 이쪽(호모에렉투스)과 상당히 닮았습니다. 치아도 적고 얼굴도 작습니다. 더 자세히 보면 머리 형태도 (호모하빌리스)와 다릅니다. 호빗 머리 형태는 호모 에렉투스 머리와 더 닮았습니다. 이 여성은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이고 플로레스 섬에 들어온 후 작아진 것일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인류기원설입니다. 약 2백만년전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나옵니다.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20만년전 아프리카를 탈출한 호모 사피엔스가 전세계로 퍼집니다. 우리 현생인류는 이들의 후예죠. 그러나 호빗이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이라면 시나리오는 달라집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초기 이주자 호모 에렉투스가 전세계로 퍼지면서 각각의 지역에서 번성하고 교배합니다. 플로레스 섬의 호빗도 그중 하납니다. 약 1만년전쯤 어느날 호빗은 사라집니다. 등장만큼 퇴장도 비밀입니다. 삽토모 - 저희는 정말 두꺼운 화산재층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운 형태였습니다. 이쪽은 얕지만 이쪽은 굉장히 두꺼웠습니다. 지층을 살펴보면 그들의 멸종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맨 위층에 코모도와 현인류의 화석이 함께 발견됩니다. 스테고돈과 호빗의 배치는 여기 이상에선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화산재가 쌓여있는 퇴적층이 있습니다. 호빗의 멸종은 화산폭발과 어떤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삽토모 - 아마 플로레스에서 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굉장히 큰 폭발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생태계를 방해했을 것입니다. 그 뒤 저희는 호빗과 스테고돈을 포함한 여러 종이 멸종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폭발은 온 섬을 잿더미로 덮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위기를 이들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작은 인류는 자신의 뇌를 줄여가면서 까지 환경에 적응했습니다. 한계가 오자 리앙부아 6m 아래에 자신의 비밀을 묻습니다. 이들에게 새로운 인류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호모 플로레시엔 시스. 플로레스섬의 인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더 먼 과거와 인류의 기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탄자니아 우갈라는 인류가 아직 아프리카를 떠나기 이전, 수많은 맹수와 서로 다른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곳입니다. 피오나 스튜어트(영국 캠브리지대 생물인류학과 교수)는 탄자니아 숲에서 침팬지의 둥지생활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침팬지 둥지생활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팬지가 되어 보는 것입니다. 침팬지는 평균 3m에서 12m 되는 나무에 둥지를 짓습니다. 이 나무는 12m를 훨씬 넘습니다. 손과 발을 이용해 허공을 오릅니다. 두발에서 네발로 진화를 역행하는 시간이죠. 침팬지는 날마다 둥지를 짓는 특성이 있습니다. 피오나는 둥지 290개 정도를 해체한 후 침팬지가 어떻게 둥지를 짓는지 알아냈죠. 둥지에서 잘 땐 더 따뜻했고 벌레에도 덜 물렸습니다. 근본적으로 둥지는 몸집이 큰 침팬지가 편안한 자세로 잘 수 있게 해줍니다. 수면의 질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두뇌가 더 크게 발달 하겠끔 해줬을 것이고 인지적으로도 진화하게 했을 것입니다. 나무 위가 더 안전하고 편안 합니다. 그런데 초기 인류는 왜 내려왔을까요. 침팬지 계통에서 갈라져 나오고 300만년쯤 되었습니다 (440만년전). 인류는 아직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언뜻봐도 인류라기 보다는 침팬지에 가깝습니다. 두려움에 찬 눈으로 숲 너머를 봅니다. 당시 초원은 맹수들로 살벌했습니다. 반면 이곳은 안전하고 나무 열매 등 먹을 것도 많았죠. 변화가 없다면 언제까지나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드니스 수(미국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 교수) - 440년 된 원시인류입니다. 오래된 인류중 하나죠. 아르디란 별명이 붙은 뼈를 현장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다들 놀랐습니다. 다른 원시 인류와는 아주 달랐기 때문입니다. 두개골은 440만년 전에 살았던 성인여성의 것이었습니다. 아르디 페테쿠스 라이푸스, 줄여서 아르디라고 부르죠. 아르디는 침팬지와 유사합니다. 발입니다. 인류의 발과는 다릅니다. 엄지 발가락이 벌어져 있습니다. 드니스 수 - 모두를 놀라게 한 특징은 아르디의 벌어진 발가락 이었습니다. 엄지 발가락이 나머지 발가락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발로 뭘 집을 수 있었던 것이죠. 발은 땅보다는 나무에 살기에 알맞습니다. 그렇지만 땅에 내려올 때도 있었죠. 이들은 가끔 서툴게 두발로 걸었습니다. 우리 보다 침팬지와 비슷한데도 이들을 인류의 계보에 집어넣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드니스 수 - 아르디가 원시인류로서 우리 계보에 속하게 된 건 치아와 이족보행 때문입니다. 이 두 요소가 원시 인류 및 우리 계보를 가장 잘 나타내는 특징입니다. 인류의 조건 중 하나는 두발로 어떤 목적을 향해 걷는 것, 그리고 또 하나의 근거가 이 서랍에 들어 있습니다. 현재 침팬지 치아입니다. 큰 송곳니가 있습니다. 인류는 침팬지 계통에서 떨어져 나올 때부터 치아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아르디도 당시 다른 영장류 보다 작은 치아를 가지고 있죠. 기후가 점점 건조해 졌습니다. 아르디에게 종 전체의 운명을 건 선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네 발로도 두 발로도 설 수가 있었죠. 그런데 두발을 선택해야 할 때가 생깁니다. 숲이 줄어들어 경쟁이 극심해진 어느 무렵이었을 겁니다. 간신히 걸을 줄 알았던 그들은 위험한 초원으로 비틀거리며 나갑니다. 걸음은 위태롭지만 자유롭게 된 두 손이 보입니다. 이것은 늘 새롭고 위험한 곳을 향하는 인류의 첫 걸음입니다. 숲을 나온 인류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맹수에게 시달리고 먹이 때문에 다른 인류와 경쟁했습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탄자니아 올드바이 계곡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 1978년 인류의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흔적 중에 하나가 이곳에서 발견됩니다. 제 오른쪽을 보시면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데 원시 인류의 발자국이 찍힌 표면을 덮어 놓은 것입니다 (탄자니아 리에틀리 발자국 유적지). 이 발자국은 360만년 전에 찍혔습니다. 여기엔 남쪽에서 북쪽으로 걸었던 세 원시 인류의 발자국이 찍혀있습니다. 축축한 재 위를 걸었던 세 명의 발자국은 아무일 없다는 듯 풀로 덮였습니다. 발자국의 주인공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란시스. 발가락 부분과 뒤꿈치 누르는 부분이 오늘날 인류와 거의 같습니다. 두 명의 어른이 길을 가는데 어린 아이가 이리저리 뛰어 다녔습니다. 두발로 숲을 나왔던 인류에겐 끝없는 도전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 전 지구 구석 구석 안가는데 없는 인류가 나타나죠. 피오나도 영국에서 이곳 탄자니아까지 왔습니다. 연구목표는 우리가 침팬지와 얼마나 다른가가 아닙니다. 침팬지와 우리가 얼마나 같은가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더 잘 알게 하죠. 침팬지 무리들이 오늘의 둥지를 치는 시간에 피오나도 나무에 오릅니다. 나무 위에서 산 침팬지와 위험 속으로 나간 인류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원시 인류는 이미 두 발로 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무 위에서도 유용했기 때문이죠. 네 발에서 두발로 간 것이 아니라 이미 나무에서 사용했던 것을 땅 위에서 더 발전시킨 것입니다. 피오나 스튜어트-우린 하나 밖에 없는 조합입니다. 다른 종과 마찬가지죠. 우릴 인간으로 만드는 것엔 우리만의 특성이 있습니다. 이족보행, 큰 뇌, 복잡한 도구사용을 포함합니다. 간신히 걸을 줄을 아는 자들이 섰던 그 경계를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끝
o o o Twilight At The River Side 강가의 노을 / T. S Nam o o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