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오죽헌2. 관련 인물과 용인이씨 분재기(李氏分財記)

이름없는풀뿌리 2019. 3. 20. 14:51
오죽헌 관련 인물과 용인이씨 분재기(李氏分財記) * 오죽헌 주인 변천사 최치운(1390∼1440)건축 → 아들 최응현(1428∼1507)상속 → 둘째딸 사위 이사온 상속 → 딸 용인이씨(신사임당母, 남편 신명화)상속 → 넷째딸 아들 권처균 상속 → 권씨 가문 대대로 상속 → 1975년 강릉시 이전 1. 최치운 1390∼1440(공양왕 2∼세종 22) 조선 초기 문신. 자는 백경, 호는 경호·조은, 본관은 강릉, 1408년(태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집현전에서 학문에 힘썼다. 1433년(세종 15) 평안도도절제사 최윤덕의 종사관으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우고 돌아와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그 뒤 판승문원사·공조참의·이조참의·좌승지 등을 지냈다. 공조참판·예문관제학을 지내면서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녀와 외교적인 공을 세웠다. 왕명으로 《무원록》을 주석하고 율문을 강해하는 등 학문정비에 기여하였고, 형옥에 관하여 여러 번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이조참판까지 올랐다. 강릉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오죽헌을 지었음. 2. 최응현 1428(세종 10)∼1507(중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보신, 호는 수재. 아버지는 이조참판 치운이며, 어머니는 현령 함화의 딸이다. 1448년(세종 3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보직이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훈도를 자원하여갔다. 그뒤 저작·박사·전적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462년(세조 8) 강원도도사가 되어 1년 만에 양친하기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뒤 고성·영월 두 고을의 군수를 역임할 때 선치하였으며, 만기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성균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483년(성종 14) 대신의 천거로 집의가 되고 이어 예빈시·봉상시의 정을 역임하였다. 이어 송도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파견되어 명석하게 해결하여 상으로 안마를 받았다. 1487년 호남의 수적 10여인을 잡은 공으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를 지내고 충청도감찰사에 임명되었다. 1489년 대사헌, 1491년 경주부윤, 149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500년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1505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자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였다. 3. 용인 이씨 부인(龍仁 李氏 夫人, 1480~1569) 조선 중기의 화가인 신사임당의 어머니. 본관은 용인(龍仁)이며,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세조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유약(李有若)의 손자인 이사온(李思溫)이고, 어머니는 대사헌ㆍ한성부좌윤ㆍ형조참판 등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딸인 강릉 최씨(江陵崔氏)이다. 신명화(申命和)와 결혼해서 다섯 딸을 낳았는데, 둘째가 조선 중기의 화가이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생모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이씨 부인은 1480년(성종 11) 강원도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이사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사온이 결혼한 뒤 처가로부터 오죽헌(烏竹軒)을 물려받아 그곳에 살았으므로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성장했다. 이사온은 1483년(성종 14)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해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관직에는 오르지 않았다. 이씨 부인의 삶에 대해서는 외손자인 이이가 쓴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 〈외조비이씨묘지명(外祖妣李氏墓誌銘)〉 등을 통해 기록이 전해진다. 이이는 〈이씨감천기〉에서 이씨 부인의 성품에 관해 “말은 서툴러도 행동은 민활했으며, 모든 것에 신중히 하되 선행을 하는 데에는 과단성이 있었다”라고 나타냈다. 이씨 부인은 영월군수(寧越郡守) 등을 지낸 신숙권(申叔權)의 아들 신명화와 결혼했다. 남편인 신명화는 1516년(중종 11)에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관직에 오르지는 않았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 딸을 낳았는데, 첫째는 수양부위(修養副尉) 장인우(張仁友)와, 둘째인 신사임당은 진사 이원수(李元秀)와, 셋째는 생원(生員) 홍호(洪浩)와, 넷째는 권화(權和)와, 다섯째는 이주남(李冑南)과 결혼했다. 이이의 기록에 따르면 이씨 부인은 어머니 최씨 부인을 돌보기 위해 강릉에 머물면서 16년 동안이나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그리고 1521년 남편인 신명화가 장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강릉으로 오던 길에 중병이 들자 조상의 무덤에 가서 가운데손가락을 자르며 기원해 남편의 병을 낫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신명화는 이듬해인 1522년(중종 17) 한양에서 죽었는데 강원도 관찰사이던 황효헌(黃孝獻)이 1526년 이 일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리고 1528년 예조가 다시 표창을 건의하면서 이씨 부인의 절의(節義)를 기리기 위한 정각(旌閣)이 세워졌다. 이씨 부인은 1551년 딸인 신사임당이 죽은 뒤에도 이이를 비롯한 외손들을 보살폈다. 이씨 부인은 1569년에 사망했으며, 오죽헌은 넷째 사위인 권화가 물려받았다. 한편, 이씨 부인이 1522년 남편 신명화가 죽은 뒤에 다섯 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 위해 작성한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한지에 두루마리 형태로 된 이 문서는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3-1) 율곡과 외조모 이씨부인 - 용인이씨대동보 부록 P.39~42.에서- 한국에 유학이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2~3세기로 소급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학을 국교로 삼아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를 형성한 것은 조선조이다. 조선조의 유학은 退溪퇴계 李滉이황(1501-1570)과 栗谷율곡 李珥이이(1536-1584)를 배출하는 16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퇴계와 율곡은 일반적으로 중국 성리학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율곡은,퇴계가 인간의 존엄성을 천명하는데 주력한 것에 비하여, 인간의 내적 성실성을 강조하는 한편 성실성의 사회적 실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播溪반계 柳馨遠유형원(1622-1673)이나 星湖성호 李瀷이익(1681-1763)과 같은 후세의 실학자들에게 추앙을 받게 된다. 율곡은 본관이 德水덕수이고 字자는 淑獻숙헌이며 시호는 文成문성으로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元秀원수이며, 어머니는 흔히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간주되는 師任堂사임당 申氏신씨이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사임당에게 주로 수학하였고,따로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7세 무렵에 이미 사서四書 등의 경서經書를 두루 통달하였다고 한다. 즉 율곡에게 있어서 사임당은 한편으로는 어머니이면서, 한편으로는 학문의 기초를 세우도록 지도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율곡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임당은 율곡의 나이 16세 때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에 율곡은 계속되는 슬픔으로 인하여 잠시 세상을 등지고 금강산에 들어가지만,일 년 뒤에는 다시 하산하여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사임당에 대한 효심을 외조모 이씨부인에게 펼치게 된다. 율곡의 行狀행장에 의하면 율곡은 33세인 무진년(1568) 11월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의조모 이씨의 병보를 듣자 사직의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갔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사)간원(司)諫院은 율곡을 파직할 것을 간하였으나, 선조는 “외조라 하더라도 情理정리가 깊으면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효행의 일로 파직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라고 하고 파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기사년(1569) 6월에 선조는 다시 율곡에게 홍문관 교리를 제수한다. 이에 율곡은 외조모의 봉양을 위하여 교리를 사직하는 “辭校理陳사교리진”를 올린다. 그러나 이 상소는 선조에게 윤허되지 않았다. 율곡은 7월에 다시 선조로부터 소명을 받고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지만,8월에는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辭校理仍사교리잉 陳情疎진정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상소도 윤허 되지 않았다. 율곡은 10월에 다시 외조모의 봉양을 위해 사직을 간청하였고 결국은 선조로부터 휴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강릉으로 가는 도중에 외조모의 부음을 듣게 된다. 결국 외조모의 병보를 들은 무진년 11월부터 율곡에게는 노쇠한 외조모의 봉양이 어떤 다른 것보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율곡의 외조모에 대한 기록은 위에서 언급한 기사년의 “辭校理疎”사교리소와 “辭校理仍陳情疎”사교리잉진정소 이외에, 이씨부인의 일화를 기록한 “李氏感天記”이씨감천기, 그리고 墓誌銘묘지명인 “外祖妣李氏墓誌銘외조비이씨묘지명” 과 제문인 “祭外祖母李氏文제외조모이씨문” 등이 있다. 이상의 글에서 율곡은 자주 외조모에 대한 정감을 극진히 펼치는데,특히 기사년 6월에 올린 “辭校理疎 사교리소”의 내용이 자세하다. “辭校理疎 사교리소”에서 율곡은 “소신은 갓난 아이 적에 강릉의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외조모 이씨께서 쓰다듬고 안아주며 자상히 돌보아주셨으니 은혜와 사랑을 지극히 받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었으므로 그 분을 어머니처럼 받들었고, 외조모께서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을 자식과 같이 의지하시며 뒷날의 일을 모두 저에게 의탁하셨습니다. 명목은 비록 외조와 외손이지마는 정분은 사실 모자입니다. “名雖祖孫 명리조손 情實母子정실모자”라고 하여 외조모와의 관계가 단순한 祖孫조손의 사이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율곡은 “辭校理仍陳情疎 사교리잉진정소”에서도 외조모를 ‘실로 친모와 같다. “實同親母실동친모” 라고 하였으며, “祭外祖母李氏文 제외조모이씨문”에서도 “祖孫조손은 그 명목이요 모자가 그 실정이다 “祖孫其名母子其情 조손기명모자기정”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율곡에게 있어서 이씨부인은 사임당의 역할을 겸비한 외조모였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각별한 정분을 지닌 외조모이기 때문에 율곡은 외조모가 병환에 걸렸다는 소식에 만사를 뒤로 하고 강릉으로 달려가게 된다. “辭校理疎 사교리소” 에서 율곡은 “외조모는 올해 나이가 아흔으로 사실 날이 멀지 않았고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오랫동안 병석에 계셨습니다. 몸은 벼슬에 매어 있어 찾아가 뵈올 길이 없었고, 一朝일조에 갑자기 운명하신다면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될까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병환을 이유로 (무진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급히 강릉으로 돌아와 간병하며 약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외조모님은 거동이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기력을 근근이 부지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타계하시어 다시 회생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서울로 돌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여, 자신이 무진년 11월에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오게 된 연유와 기사년 6월에 제수된 校理교리를 사직해야만 하는 정황을 선조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상소는 윤허되지 않았고, 결국은 앞서 말한 대로 외조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씨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는 율곡이 기록한 “李氏感天記 이씨감천기”나 “外祖批李氏墓 誌銘 외조비이씨묘지명”등 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율곡은 “外祖批李氏 墓誌銘 외조비이씨묘지명” 에서 다음과 같이 이씨의 출생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이씨는 용인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三水郡守 삼수군수인 諱휘 有若유약이 譯휘 益達익달을 낳았고, 전라도 兵馬盧候병마노후인 益達익달이 휘 思溫사온을 낳았다. 사온은 생원으로 벼슬하지 않았고, 참판 崔應賢최응현의 여식에게 장가들었다. 참판은 어질어서 가법이 있었으므로 최씨부인은 규범을 잘 닦아 단정했으며, 成化(**성화) 경자년(1480) 정월 24일 이씨부인을 낳았다. (** 成化: 중국 명나라 헌종 때의 연호(1465~1487)) 그리고 “이씨감천기”에서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맑았으며, 행 동거지가 침착하고 조용하셨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행하는데 민첩하였으며, 일에는 신중을 기하였지만 선한 일을 하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다. 약간 학문을 알아 “삼강행실”을 구송하였으며 문장으로써 학문을 삼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순수한 자질을 지니고 실천적 학문을 익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자질과 학문적 경향은 순탄치 못한 부인의 일생을 지탱하는 기본 바탕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씨감천기”에 의하면 부인은 어려서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살았지만, 진사 申命和신명화에게 시집가서는 진사의 어버이가 계시는 한성으로 가서 시부모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모친 최씨가 병환으로 앓게 되자 외동딸인 이씨는 모친을 간호하기 위하여 강릉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효성을 다하는 극진한 간호로 일찍이 향리에 칭송하는 말이 자자했다고 한다. 한번은 진사가 강릉으로 찾아와 서울로 돌아가자고 하였는데, 이씨가 눈물을 흘리면서 “여자는 三從之道삼종지도가 있으니 분부를 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가 모두 노쇠하시고 저는 바로 외동딸이니 제가 없게 되면 부모님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더구나 당신의 모친께서도 오랜 병환으로 탕약을 끊지 못하시니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습니까? 제가 애통하여 눈물 흘리며 우는 것은 오직 이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서울로 가시고 저는 시골에 머물면서 각각 노친을 모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진사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부인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또한 1521년에 이씨의 모친 최씨가 돌아가셨을 때에, 진사가 서울을 떠나 강릉으로 가다가 여주에서 計音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한 나머지 냉증이 머리에 발생하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쉬면서 몸조리를 해야 하지만 진사는 급한 마음에 길을 서둘렀고, 강릉에 도착 하였을 때에는 거의 죽음을 피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씨는 막 모친상을 겪은 상태에서 다시 갑작스럽고 괴이한 災厄재액을 만났지만, 정성을 다하여 천지의 신에게 분향하며 七書夜7주야를 눈 한번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小刀소도로 왼쪽 손 중지의 두 마디를 끊고 하늘을 우러러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감히 상할 수 없지만, 제가 하늘로 삼는 바는 남편이오니 하늘이 만약 무너진다면 어떻게 홀로 살겠습니까?" 라고 하고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한다. 다음날 次女차녀(사임당)가 이씨를 모시고 앉았다가 어렴풋이 잠들었는데, 하늘로부터 대추씨만한 크기의 약이 내려오고 이를 神人신인이 받아서 진사에게 먹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사도 꿈속에서 신인이 나타나서 “마땅히 낫게 하리라" 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진사가 홀연히 병환을 떨치고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식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이룬 일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종은 旌門정문을 세우고 戶役호역을 면제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부모를 섬기고 지아비를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이씨에 대하여 율곡은 “이씨감천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씨는 나의 외조모이시다. 부자의 사이와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 힘써서 仁禮인예로써 행동하였으니,참으로 이른바 婦道부도를 잘 실천한 분이다. 마땅히 부인들이 규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부의 情分정분이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16여 년을 떨어져 사시었고, 진사께서 질병이 나셨을 적에는 마침내 지성으로 하늘에 빌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켰으니,빼어난 사람의 행실과 古人고인을 뛰어 넘는 節義절의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士君子사군자에 배열되어 임금과 아비의 사이에 처하게 하였다면 충효를 갖추고서 국가를 바로 잡았을 것임을 여기서 알 수 있도다. 율곡의 견해로서는 남자가 임금과 부모를 대함과 여자가 부모와 남편을 대함은 비록 일은 다르지만 이치는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얼마나 그 상황에 맞추어 최선을 다 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씨부인과 같이 하나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다른 상황에서도 또한 최선을 다해서 또 다른 성취를 이룩했을 것이다. 율곡의 말대로 이씨부인이 만약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부모와 지아비에 대한 정성이 임금과 국가에 대한 정성으로 펼쳐져서 반드시 거대한 사업을 이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현실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씨의 태도는 후손에게 실천적 교훈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사임당이나 율곡과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대종회 감사 李道漢 弟, 李慶漢 씀). 3-2) 外祖妣李氏墓誌銘 李氏。龍仁望族也。有諱有若。位三水郡守。生諱益達。位全羅道兵馬虞候。生諱思溫。 以生員不仕。娶崔參判諱應賢之女。參判賢有家法。崔氏閨範修整。 以成化庚子正月二十四日生李氏。稟性和柔。操心純靜。幼讀三綱行實。能曉大義。旣笄。 適于申氏。卽進士府君諱命和也。申乃平山大姓。進士曾祖考。議政府左議政諱㮣。祖考。 成均館大司成諱自繩。考。寧越郡守諱叔權。妣。南陽洪氏。進士飭躬有守。不爲非義。 燕山朝短喪之令甚嚴。進士執親喪。哀毀三年。不以法044_403b撓。己卯年閒。 有欲薦以賢良者。進士力辭竟已。進士是介士。李氏爲賢婦。兩美相合。禮敬備至。 正德辛巳。進士遘癘疾濱死。李氏禱天斷指。誓以俱死。進士忽夢神人報以當瘳。次女侍側。 亦夢天降靈藥。是日陰雲晦暝。雷雨大作。進士疾遂瘳。鄕人異其誠。事聞于朝。 中宗大王命旌門復戶。明年壬午。進士終于京城。初葬于砥平。後遷于江陵助山之原。 李氏仍居于江陵。寔崔氏之鄕也。隆慶己巳冬十月二十二日。以疾終。享年九十。 其年十二月八日。葬于助山。進士墓在前。李氏無男有五女。長適張仁友。 次適李主簿諱元秀。次適生員洪浩。次適習讀權和。次適李044_403c冑男。諸孫二十餘人。 主簿卽珥先君也。俾珥主外祖考妣之祀。銘曰。 有美閨秀。窈窕柔儀。庭闈承訓。室家孔宜。謂天有報。晝哭無兒。謂天無報。 壽到期頤。鬱鬱助山。合兆於斯。猗歟流芳。百歲無隳。 3-3)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 李氏分財記(Yi's Property Division Document)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재산의 상속과 분배를 기록한 문서. ① 제작발급경위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는 아버지 생원 이사온(李思溫)과 어머니 최씨(崔氏) 사이에 태어난 무남독녀(無男獨女)로 남편 신명화(申命和) 보다는 네 살 아랫니다. 생전에 다섯 명의 딸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기 위해 분급문기(分給文記)를 작성하였다. ② 구성과 형태 분배내용이 먼저 나오고 재주(財主)인 용인이씨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서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로 240㎝, 세로 28㎝의 긴 한지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③ 내용 첫째 사위인 수양부위(修養副尉) 장인우(張仁友), 둘째 사위인 이원수(李元秀), 셋째 사위인 성균생원(成均生員) 홍호(洪浩), 넷째 사위인 유학(幼學) 권화(權和), 다섯째 사위인 유학 이주남(李冑南)에게 토지와 노비(奴婢)를 분배해 주는 내용이 차례로 실려 있다. 끝부분에는 외손 이이(李珥)에게 봉사조(奉祀條)로, 외손 권처균(權處 均)에게는 배묘조(拜墓條)로 전답과 와가 한 동을 별도로 지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④ 의의와 평가 표기방법에서 이두방식(吏讀方式)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재산상의 문서나 법률서에는 이두로 현토(懸吐: 한문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토를 달아주는 것)했던 당시의 관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재산분배에 대한 원칙과 상속대상 등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한지에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으며, 첫부분이 떨어져나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본 재주(財主)인 신명화(申命和) 사후에 그의 처 이씨가 분재하였기 때문에 1522년(중종 17) 이후에 작성한 것이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딸만 다섯을 두었으므로 ‘장녀 사위 장인우(張仁友) 처의 몫’, ‘이녀 사위 최난수(崔蘭秀) 처의 몫’ 등과 같이 사위의 이름을 병기 하였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는 대체로 균등분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노비·가옥 등을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앞으로 제사를 받들 손자 현룡(見龍:李珥의 어린시절 이름)에게는 서울 수진방에 있는 집과 전답을, 묘소를 돌볼 손자 운홍(雲鴻)에게는 강릉 북평촌에 있는 집과 전답을 분배하였다. 다른 문서에서와 같이 분재 당사자인 사위 다섯 모두 문서 작성에 참여, 수결(手決)하였다. 필집(筆執)은 서출(庶出)인 사촌 최난손(崔蘭孫)이 맡았다. 이는 조선시대 재산상속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권민구(權敏求)가 소장하고 있다. 4. 신명화(申命和, 1476 ∼1522) 자는 계흠(季欽), 호는 송정(松亭). 고려 때의 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증조는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할아버지는 신자승(申自繩), 아버지는 신숙권(申叔權),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부인은 이사온(李思溫)의 딸 용인이씨이다.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첫째는 장인우(張仁友)의 부인, 둘째는 이원수(李元秀)의 부인인 신사임당(申師任堂), 셋째는 좌찬성 홍호(洪浩)의 부인, 넷째는 습곡 권화(權和)의 부인, 다섯째는 이주남(李冑男)의 부인이다. 1476년(성종 7)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즐겨하고 선악(善惡)을 권계(勸戒)하였다. 1516년(중종 11)에 진사에 입격하였다. 중종 대의 신진사류(新進士類)인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며, 연산군 때 부친상을 당하자 단상법에 반대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극진히 상례를 마쳤다. 현량과로 천거되었으나 거절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22년(중종 17)에 세상을 떠났다. 외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오죽헌(烏竹軒) 권처균(權處均)이 강릉부 북쪽 두왕동(豆旺洞) (지금의 강릉시 대전동 조산리)으로 이장하였다. 후손이 없어 외손인 안동권씨들이 봉사(奉祀)한다. 1885년(고종 22)에 세워진 묘비가 있다. - 이당 김은호 作 신사임당 - 5. 신사임당 생몰년 1504-1551(연산군10-명종6) 본관 평산(平山) 다른 이름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 5-1) 출생과 성장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5-2) 출가후의 생활 19세에 덕수이씨 (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5-3) 자질과 재능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몽유도원도, 안견, 1447, 비단에 엷은 채색, 38.7%106.5cm, 천리대 소장 - 5-4) 그림재능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 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5) 글씨 재능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5-6) 예술적 환경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 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5-7) 후손과 작품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로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 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 김홍도 작 대관령도 - 5-8) 신사임당의 시 [思親] 千里家山 萬疊峯 (천리가산 만첩봉)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歸心長存 夢魂中 (귀심장존 몽혼중)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寒松亭畔 孤輪月 (한송정반 고륜월) 한송정 앞에는 외로이 뜬달 鏡浦臺前 一陳風 (경포대전 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沙上白鷺 恒聚山 (사상백로 항취산) 갈매기는 모래 위에 흩어졌다가 모이고 波頭漁船 各選動 (파두어선 각서동) 고기 배들은 바다위로 오가는데 何時重踏 臨瀛路 (하시중답 임영로) 언제 강릉 길 다시 밟아서 彩舞斑衣 膝下縫 (채무반의 슬하봉)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까 [行至大嶺半程望北坪] 蹂大關嶺望親庭 (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백발 되신 어머니 강릉 친정에 계시는데 身向長安獨居情 (신향장안독거정) 홀로 서울로 향해가는 이 몸 괴로운 마음 回首北坪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 고개 돌려 북쪽 하늘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만 저무는 푸른 산에 날아내리네 5-9) 사임당 추가자료 사임당의 성장과정에서 보았듯이 사임당은 일찍이 사서오경(四書五經)에 통달하여 높은 학문에 이르렀으며 특히 기품있는 가문과 문향으로 이름난 강릉 땅에서 자라난 까닭에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깊이 젖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자(朱子)학설에도 깊이 공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자신의 아호를 사임당이라 지은 배경에서 보았듯이 사임당은 자녀교육에 있어 몸소 실천하며 가르침에 엄격했다. 또한 사임당이 당시 사대부 부인들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내훈(內訓)을 즐겨 읽어 모두 암송한 것으로 보아도 태교에서부터 양육에 이르기까지 조심하고 살폈음을 알 수 있다. 몸과 마음과의 관계, 감정이 사람의 몸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태아의 정신생활에도 세심한 관심을 두어 사물을 보는 것, 냄새를 맡는 것, 식사를 하는 것, 남의 말이나 소리를 듣는 것, 말을 하는 것, 갖추어야 할 몸가짐에 이르는 모든 것에서 올바르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않도록 했고, 감정에 약한 여인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에까지도 세밀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몸소 실천하였고 진실한 마음으로 성심 성의껏 자녀들을 훈육하였다. 이처럼 지성으로 가르친 사임당의 자녀 4남 3녀 가운데 셋째 아들인 율곡은 물론, 맏딸 매창(梅窓) 부인도 서울의 조대남(趙大男)에게 시집가 남편이 벼슬길에 나가도록 극진히 내조하여 고위직은 아닐지라도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등에 종사토록하였으며 학문과 예술에도 뛰어나 오늘날에도 유적이 남아 있으리 만큼 현숙한 부인이었던 까닭에 살아 생전 작은 사임당이라 불리었다. 맏아들 선(璿)은 진사에 올라 서울의 남부 참봉(參奉)을 끝으로 47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번(번)은 아우 율곡에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권하는 글을 쓸 만큼 학식이 높았던 것으로 전하나 그 뒤의 자취는 분명치 않다. 둘째딸은 윤섭(尹涉)에게 출가하여 황해도 황주(黃州) 땅에서 살았으며 율곡이 황해도 감사(監司)가 되어 “누이 집을 방문하는 일로 황주에 이르면 ...... ” 한 것을 미루어 남매의 정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딸은 홍천우(洪天祐)에게 출가했으나 일찍 홀몸이 되었고, 막내아들 우(瑀)는 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는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괴산(槐山)·고부(古阜)·비안(比安)군수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으나, 벼슬길보다 학문과 예술로 그 이름이 더욱 높았으니 높은 학문에 그림과 글씨는 물론 거문고에까지 능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린 보기 드문 천재적인 예술가였던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율곡이 “내 아우가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면 나를 앞섰을 것”이라고 찬양한 것에서도 옥산의 인품을 알 수 있다. 이처럼 4남 3녀의 7남매를 한결같이 이름난 학자요 철인으로 그리고 예술가요 뛰어난 부덕을 함양한 여인으로 길러낸 것을 보면 사임당의 모습과 인품을 알 수 있다. 5-10) 신사임당 묘갈명(申師任堂墓碣銘) - 1670년 음력 윤2월 은진 송시열 짓고 송준길은 공경하게 쓰다. 파주(坡州)의 두문리(斗文里)에 감찰 이공(李公)과 신씨(申氏)가 부장(祔葬)된 묘소는 율곡선생(栗谷先生)의 황고(皇考) 비(妣)의 묘소이다. 지문(誌文)이 있는데, 이는 청송 처사(聽松處士) 성공 수침(成公守琛)이 지은 것이다. 거기에 의하면, ‘공은 곤핍(悃愊)하여 사치함이 없었고 남과의 경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아름다이 선(善)을 즐기는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신씨는 평산(平山)의 큰 성씨(姓氏)로써 기묘명헌(己卯名賢) 명화(命和)의 따님이다. 자품(資稟)이 월등하게 뛰어나 예(禮)를 익히고 시(詩)에도 밝았다. 서화(書畫)에 있어서도 묘경(妙境)에 이르러 이것을 얻은 자는 구슬을 안은 듯이 보배로 여겼다. 공은 이 현숙한 부인을 얻어서 대현(大賢)을 낳았다. 옛말에 ‘황류(黃流)는 와기(瓦器)에는 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의 잠덕(潛德)이 청송(聽松)이 말한 것에서 그치지는 않음이 아닐런가. 공의 휘(諱)는 원수(元秀)요, 자(字)는 덕형(德亨)이니, 음직(蔭職)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가정(嘉靖) 신유년 5월 14일 갑자에 61세로 사망하였는데, 선생께서 귀하게 됨으로 인하여 찬성에 증직(贈職)되었고, 신씨도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봉(贈封)되었다. 그 선계(先系)는 모두 선생의 모표(墓表)에 실려 있다. 장남 선(璿)은 참봉이요, 차남은 번(璠)이며, 율곡 선생이 셋째이고, 막내는 우(瑀)인데 그도 또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사위는 직장 조대남(趙大男), 첨사(僉使) 윤섭(尹涉), 사인(士人) 홍천우(洪天祐)이다. 참봉은 아들 경진(景震)과 경항(景恒)을 낳았는데 모두 참봉이요, 딸은 별좌(別坐) 조덕용(趙德容)에게 출가하였다. 번은 경승(景升)과 경정(景井)을 낳았다. 율곡선생은 측실(側室)에게서 교관 경림(景臨)과 경정(景鼎)을 낳았고, 딸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측실이 되었다. 우는 경절(景節)을 낳으니 벼슬은 사의(司議)였다가 승지에 증직되었고, 딸은 정유성(鄭維城)과 권상정(權尙正)에게 출가하였는데, 권상정은 찰방이다. 욱(稶)은 경진의 소생이고, 운(秐)은 전부(典簿)인데 경항의 소생이며, 익(翊)은 부사인데 경승의 소생이다. 또 숙(䎘), 굉(翃), 상(翔), 빈(䎙), 핵(翮)은 경정의 소생이며, 군수(郡守) 집()과 교(穚), 균(稇)은 경절의 소생이다. 내외(內外)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매우 번성하였고, 군수의 아들 동명(東溟)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종신(侍從臣)을 지냈다. 동명이 경외(京外)의 유신(儒紳)들과 의논하기를, “율곡 선생의 묘소는 공의 묘소 뒤에 있는데, 선생은 낙건(洛建)의 연원을 잇고 동로(東魯)의 통서(統緖)를 천양(闡揚)하여 앞으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것이니, 공의 이름도 선생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 그러나 의리(衣履)에 간직한 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드디어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숭정(崇禎) 경술년 윤2월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기술(記述)하고, 송준길(宋浚吉)은 공경하게 쓰다. 묘포(墓表) 가운데 ‘청송처사 성공 수침(聽松處士成公守琛)’의 여덟자는 마땅히 ‘여성위 이암 송공 인(礪城尉㶊菴宋公寅)’으로 고쳐야 하며, 그 아래 문장의 ‘청송(聽松)’ 두 글자도 마땅히 ‘이암(㶊菴)’으로 고쳐야 한다. 아마도 당초 글을 청한 사람이 잘못 알려 주어 그렇게 된 것이리라. 이제 별도로 이 일을 기록하면서 오류를 바로잡는 바이다. 경술년으로부터 22년 뒤인 신미년 5월 일에 반남(潘南) 박세채(朴世采)는 삼가 쓰다. - 원문 - 申師任堂墓碣坡州之斗文里曰監察李公申氏祔葬墓者栗谷先生之皇考妣也有誌文焉聽松 處士成公守琛作也有云公悃愊無華不與物竸休休樂善有古人風噫盡之矣申氏平山大姓己 卯名賢命和之女姿禀絶異習禮明詩至其書畫之類亦臻其妙得之者如寶拱焉公得此賢配克 生大賢語云黃流不注於瓦哭意者公之潜德不止於聽松所稱歟公諱元秀字德亨以蔭入官止 司憲府監察嘉靖辛酉五月十四日甲子周而卒以先生貴 贈賛成申氏亦 贈貞敬夫人其系出 俱在先生墓表男長參奉次璠栗谷先生其第三而季曰瑀亦有名於世女壻直長趙大男僉使尹 涉士人洪天祐參奉生景震景恒皆參奉女適別坐趙德容璠生景升景井栗谷先生側出敎官景 臨景鼎女爲金文敬公集側室瑀生景節官司議 贈承旨女適鄭維城權尙正權察訪也稶景震出 秐典簿景恒出翊府使景升出䎘翔䎙景井出郡守穚稛景節出內外曾玄甚蕃而郡守之子東溟 文科侍從東溟與京外儒紳議曰栗谷先生之葬在公墓之後先生承洛建之淵源闡東魯之統諸 將與天壞無窮則公之名亦與之無窮然衣履之藏不可以不識遂立石于其前▨崇禎庚戌閏二月 日恩津宋時烈謹述恩津宋浚吉敬書 墓表中聽松處士成公守琛八字當作礪城尉㶊菴宋 公寅下文聽松二字亦當作㶊菴盖以當初 請文者不 免誤告而然也今別記其事如此庚戌後二十二年辛 未五月 日 潘南朴世采謹書. <끝> 5-11) 신사임당 [申師任堂]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기억되는 여류 화가" - 집필자 : 김영두 - ① 개요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 중기의 여성 화가요 문사였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신사임당은 연산군 10년(1504) 음력 10월 29일에 강릉(江陵)에서 태어났으며, 명종 6년(1551) 음력 5월 17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가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포도와 풀벌레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임당(師任堂)이라는 당호는 ‘태임(太任)을 본받는다.’ 하는 뜻인데, 태임은 현숙한 부인의 전형으로 이름난 중국 고대 주(周) 문왕(文王)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② 가족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였으며, 어머니는 용인(龍仁) 이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따님이었다. 신명화는 평산 신씨로 중종 11년(1516)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윤은보(尹殷輔)나 남효의(南孝義) 등이 현량과(賢良科)에 천거하려 했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그는 용인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신사임당은 그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부인 신명화의 행장을 지었다. 행장에는 성리학 의례를 엄격하게 준수하였던 선비의 모습 뿐 아니라 딸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힘썼던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명화는 신사임당을 결혼시킨 해인 중종 17년(1522)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은 그 뒤에도 계속 강릉에서 생활하였는데, 강릉은 이씨 부인의 어머니 쪽 집안인 최씨가 세거하던 지역이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처가의 세거지에 정착하였고, 어머니와 딸이 이어서 그 지역을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신사임당 또한 강릉에서 태어났고, 결혼 이후에도 상당 기간은 강릉에서 생활하였다. 그래서 율곡 이이도 강릉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모인 용인 이씨의 묘지명을 지었다. 거기에는 외조모의 가계와 결혼 후의 일화가 실려 있는데, 이씨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던 일로 중종(조선)(中宗)으로부터 정문을 받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모가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던 일에 대해 따로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를 지었다. 율곡은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해서, ‘부부의 정이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16년이나 떨어져 사셨고, 진사께서 질병이 나셨을 적에는 마침내 지성으로 빌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켰으니, 빼어난 사람의 행실과 옛사람을 초월하는 절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신사임당은 중종 17년(1522)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고, 이선(李璿), 이번(李璠), 이이(李珥), 이우(李瑀)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趙大男), 윤섭(尹涉), 홍천우(洪天祐)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남편인 이원수의 자는 덕형(德亨)이며 이름을 난수(蘭秀)라고도 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벼슬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지었다는 이원수의 지문(誌文)에 따르면, 이원수는 성격이 착실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너그럽고 겸손하여 옛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송시열(宋時烈)은 이원수의 묘표를 지었는데, 송자대전 193권에 실린 감찰증좌찬성이공묘표(監察贈左贊成李公墓表)가 그것이다. 송시열은 율곡이 동국 유학의 정통을 밝혀 이름이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율곡의 부친인 이원수 또한 이름이 길이 남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으로부터 이어지는 후손들의 가계를 상세히 밝혔다. 신사임당의 세째 아들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경세가이며 문신인 율곡 이이이다. 율곡 이이 때문에 이원수는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신사임당도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큰 딸인 매창(梅窓)과 넷째 아들인 옥산(玉山) 이우(李瑀)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매창은 시와 그림에 능하였으며, 이우는 거문고, 글씨, 시, 그림의 네 가지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렸다. ③ 생애와 예술 율곡 이이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 대해, ‘천성이 온화하고 얌전하였으며 지조가 정결하고 거동이 조용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 편안하고 자상스러웠으며, 말이 적고 행실을 삼가고 또 겸손하였다.’ 하고 기록하였다. 또한 아버지인 신명화가 딸을 매우 아꼈다고 기록하였다. 신사임당이 결혼할 때 아버지인 신명화는 사위가 될 이원수에게, ‘다른 딸을 시집을 가도 서운하지 않더니 그대의 처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신사임당은 결혼 후 곧바로 서울로 가지 않았고 2년 뒤인 갑신년에 서울에 왔다고 한다. 그 뒤에도 다시 강릉으로 가 있기도 하고 봉평(蓬坪)에서 살기도 했다는 것을 보아 강릉 이외에도 몇 군데의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사임당은 강릉에서의 생활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율곡 이이의 기록에 따르면 고향을 그리워하며 밤중에 조용해지면 울기도 하고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강릉으로 근친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대관령 중턱에 이르러 고향을 바라보면서 지은 시가 남아서 전한다. 신사임당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아들인 이이가 남긴 ‘돌아가신 어머니의 행장[先妣行狀]’일 것이다. 거기에 신사임당이 강릉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리 하연 어머니를 임영(臨瀛)에 두고 / 장안을 향하여 홀로 가는 이 마음 / 고개 돌려 북촌을 바라보노니 / 흰 구름 날아 내리는 저녁 산만 푸르네.’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경전을 읽었고, 글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도 어릴 때 삼강행실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집안의 전통에 따라 문인으로서의 교양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 이이의 연보에 따르면 그는 처음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그림에도 뛰어났다. 이미 7세 때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렸는데, 그 작품이 매우 절묘했다고 한다. 화제 중에는 포도를 가장 잘 그려서 당시에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진다고 한다. 현재는 초충도, 포도도, 화조도, 화초어죽, 매화도 등의 그림이 남아 있다. 패관잡기(稗官雜記)는 중종 말에 어숙권(魚叔權)이 편집한 것으로, 그림에 대한 신사임당의 명성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패관잡기 2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근래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다. 산수화에는 별좌(別坐) 김장(金璋)과 사인(士人) 이난수(李蘭秀)의 아내 신씨(申氏)와 학생(學生) 안찬(安瓉)이 있고, 영모(翎毛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를 그린 잡화(雜畵)에는 종실(宗室) 두성령(杜城令)이 있으며, 풀벌레 그림에는 정랑 채무일(蔡無逸)이 있고, 묵죽(墨竹 먹으로 그린 대)에는 현감 신잠(申潛)이 있는데, 이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저명(著名)한 사람들이다.’ 이난수는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의 다른 이름이다. 패관잡기(稗官雜記)는 중종 말에 어숙권(魚叔權)이 편집한 것으로, 그림에 대한 신사임당의 명성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패관잡기 4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동양(東陽) 신씨(申氏)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도(葡萄)와 산수(山水)는 한 때에 절묘하여 평하는 사람들이, ‘안견(安堅) 다음 간다’ 하였다. 아, 어찌 부인의 필치(筆致)라 해서 소홀히 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부인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책망할 것인가.’ 우암 송시열의 문집에 율곡의 후손이 사임당의 난초 그림을 얻어 소장한 데 대해 발문을 적어 준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까지도 사임당의 그림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신사임당은 중종 36년(1541) 서울로 왔으며, 10년 뒤 삼청동에서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그 사이에는 서울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편인 이원수는 명종 5년(1550)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었고, 조운의 일로 관서를 오갔는데, 명종 6년(1551) 이원수가 아들 이선과 이이를 데리고 관서에 나가 있는 동안, 신사임당은 갑자기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6. 남편 이원수(李元秀) 6-1) 쇠락한 명가의 후예 6-2) 신사임당과 인연을 맺다 6-3) 신사임당의 남편으로, 율곡의 아버지로 6-4) 지엄한 아내보다 화통한 주모가 낫다 6-5) 평범한 관리로 세상을 떠나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업이 없어 가사를 이끌어갈 수 없을 만큼 곤궁하여, 늙으신 아버지가 계신데도 항상 맛있는 음식을 못해 드리니 자식으로서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품팔이나 장사라도 할 수 있다면 내 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겠지만 나라 풍속에 따라 선비와 서민의 생업이 달라 억지로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보는 한 가지 길이 있고, 그것이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몸을 굽혔을 뿐입니다. 감히 가난을 면하고자 녹을 구하는 것이 성인들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명령은 불의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가 힘써 따라야 하는 것이니 어찌 과거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율곡 이이가 19세 때 평생의 친구 우계 성혼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응시하려는 이유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하듯 설명하고 있다. 앞부분으로만 보면 적극적으로 효성을 실천하려는 것 같지만 뒷부분에서는 아버지의 성화 때문에 억지로 과거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를 짙게 풍긴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오랜 세월 아내와 아들이 주연하는 영화의 엑스트라 취급을 받아왔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로 떠받들어지고 율곡이 일세의 대학자로 추앙받을 때 그는 늘 부실한 남편이자 무심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가 당대에 보편적이었던 양반가의 관습과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웠다면 두 사람이 그처럼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남자가 재기 발랄한 아내와 똑똑한 자식을 건사하려면 참을 인(忍) 자 열 개를 가슴에 새겨도 부족하다. 이원수 역시 다재다능하지만 엄격한 아내와 천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아들 틈에 끼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때문에 그는 무식하지만 인간적인 주막집 여자 권씨의 품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다. 물론 아내와 자식들은 그런 이원수의 처신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6-1) 쇠락한 명가의 후예 이원수(李元秀)는 1501년(연산군 7년) 파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형(德亨),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아버지는 참찬공 이천, 어머니는 현감 홍귀손의 딸 남양 홍씨이다. 덕수 이씨 집안은 대학자 율곡 이이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조선 최고의 명가로 각인되었지만 실상은 여말선초부터 신흥사족으로 등장한 유력 가문이었다.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는 고려 말 중랑장을 지낸 무관이고, 그의 아들도 무관이었는데 손자 이소가 최초로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판서를 지냈고, 4세 이윤은 판도판서에 오르며 가문을 빛냈다. 5세 이천선은 공민왕 때 기철 제거에 공을 세워 수사공주국낙안백이 되었고, 6세 이인범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7세 이양이 정3품 공조참의를 지냈고, 8세 이명신은 세종의 장인 심온의 친형이었던 심종의 딸과 혼인한 뒤 지중추부사, 동지돈녕부사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한데 그 뒤로 4대에 걸쳐 고관대작을 배출하지 못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9세 이추가 윤회의 사위로서 군수를 지냈고, 10세 이의석이 최만리의 사위로서 현감을 지냈을 뿐이다. 11세인 아버지 이천은 과거에 낙방하여 벼슬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2세 이원수 역시 과거에 거듭 낙방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5촌 당숙 이기, 이행 형제는 출셋길을 걸었다. 문무를 겸비했던 이기는 과거에 급제한 뒤 이언적의 도움으로 요직에 진출하여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는 명종 대에 윤원형, 윤원로, 임백령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 뒤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선조 대에 을사사화가 그들의 조작으로 밝혀지면서 작위를 삭탈당했다. 그의 아우 이행도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을 주도한 뒤 좌의정이 되었는데, 대사헌에 재임할 때 중종의 조강지처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반대한 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렇듯 가까운 인척들이 정계에서 약진하고 있을 때 이원수는 과거 공부는 게을리 한 채 한량으로 세월을 보냈다. 양반이라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는 일이 최고의 모럴이었던 그 시대에 이원수는 성공 의지가 박약한 실로 무능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들 율곡은 신사임당을 추모하며 쓴 〈선비행장(先妣行狀)〉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데다 꾸밈이 없으며, 너그럽고 검소하여 옛사람과 같은 풍모가 있다.’ 6-2) 사임당과 인연을 맺다 1522년(중종 17년)에 22세의 이원수는 19세의 신사임당과 혼인했다. 그의 장인 신명화는 조광조가 현량과를 실시할 때 윤은보, 남효의 등에 의해 현량으로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큰 화를 당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자녀교육에 전념했다. 신명화의 다섯 딸 중에 둘째였던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에 통달했고, 익히 알려진 그림솜씨에 정묘한 자수솜씨까지 뽐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녀의 〈포도도〉를 보면 채 영글지 않은 포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고 큼직한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 세련되고 생기가 흘러넘친다. 그러기에 율곡은 일찍이 어머니의 그림은 많지만 포도 그림만은 세상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상찬 했다. 남편 이원수도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아내의 그림을 지인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고 한다. 신명화는 그처럼 출중한 딸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가게 할 수 있는 사윗감을 찾던 중 가난한 명가의 후예 이원수를 사위로 낙점했던 것이다. 16세기까지 조선의 혼인 풍습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인한 다음 자식을 낳고 사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원수에게는 홀어머니 홍씨가 있었으므로 처가살이를 강요하기가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신명화는 이원수에게 이렇게 애원했던 것이다. “내가 딸이 많지만 다른 딸은 시집을 보내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대의 아내만은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 이원수는 이런 장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결혼한 뒤 처가인 오죽헌에서 살림을 꾸렸다. 한데 그해에 장인이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강릉에 머물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이원수는 장인의 3년상을 마친 뒤 사임당과 함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부터 이원수 부부는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혼자된 장모와 어머니를 보살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신사임당이 힘들어하자 중간지점인 강원도 평창에 거처를 마련하고 몇 년 동안 살기도 했다. 1541년(중종 36년) 서울에 올라온 이원수 부부는 장모가 외손자 율곡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수진방의 집으로 이사했다. 수진방은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과 청진동 사이에 있었다. 당시 이원수는 과거 공부하는 선비로서 변변한 수입이 없었으므로 가정을 건사하기가 힘들었다. 생활비는 신사임당이 처가에서 물려받은 유산을 아껴 써야 했다. 이원수가 가부장적인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림이 점점 곤궁해지자 부부는 고심 끝에 덕수 이씨의 터전이었던 경기도 파주군 율곡리로 이사했다. 그로 인해 아들 이이가 ‘율곡(栗谷)’이란 호를 쓰게 된 것이다. 6-3) 신사임당의 남편으로, 율곡의 아버지로 이원수와 신사임당은 4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선(璿), 장녀 매창(梅窓), 차남 번(璠), 차녀, 삼남 이(珥), 삼녀, 사남 우(玗)의 순이다. 장남 이선은 율곡보다 12세 연상으로 어린 시절부터 과거 공부에 몰두했지만 낙방을 거듭한 끝에 41세에 이르러서야 늦깎이로 소과에 급제했고, 47세 때 한성부의 종9품 남부참봉을 지냈다. 장녀 매창은 시서화에 두루 뛰어나 ‘여중군자(女中君子)’에 ‘작은 사임당’으로 불렸는데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등을 지낸 조대남과 혼인했다. 뛰어난 품격의 〈매화도(梅花圖)〉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 외에 차녀와 삼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차남 이번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세상 물정이 어두워서 평생 출세한 동생 율곡에 기대어 살았다. 신사임당은 1536년(중종 31년) 12월 26일 강릉의 오죽헌에서 삼남 율곡을 낳았다. 당시 신사임당은 동해바다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더니 검은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안방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그러자 이원수는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고, 아기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고 지었다. 현룡은 어린 시절부터 말을 배우자마자 바로 글을 읽는 등 엄청난 천재성을 드러냈다. 효심도 뛰어나서 1546년 이원수가 병석에 눕자 자신의 팔뚝을 찔러 피를 뽑아 마시게 한 다음 사당에 들어가 울면서 자신이 아버지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빌기까지 했다. 그와 같은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이원수는 금세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현룡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우리나라의 대학자가 될 터인데 그 이름은 옥(玉)에다 귀(耳)를 붙인 글자이다.” 잠에서 깬 이원수는 꿈에 따라 현룡의 이름을 귀고리를 뜻하는 이(珥) 자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이현룡은 이이(李珥)가 되었던 것이다. 이이는 13세 때인 1548년(명종 3년) 소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다. 이원수는 그가 장차 가문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 여기고 자랑스러워했지만 신사임당은 기쁨을 애써 감추고 자만하지 못하도록 아들을 엄히 단속했다. 이이는 훗날 과거에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고,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큰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한데 그의 드높은 명성 때문에 당대 최고의 여류화가였던 어머니 신사임당이 현모양처(賢母良妻)로 떠받들어졌고, 아버지 이원수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낙인찍혔다. 사남 이우는 여러 모로 어머니 신사임당을 닮았다. 1567년(명종 년) 진사시에 급제한 뒤 비안현감, 옥산군수, 고부군수를 거쳐 정3품 당하관인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군자감은 군사 물자를 취급하는 관청이고 군자감정은 이 기구의 책임자였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 거문고에도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칭송받았는데, 어머니처럼 식물과 곤충 그림을 잘 그렸다. 한 번은 그가 풀벌레를 그린 종이를 길에 던지자 닭들이 진짜 벌레인 줄 알고 달려들어 쪼았다고 한다. 율곡조차 이런 동생의 재능을 부러워하며 ‘아우가 진실로 학문에 종사했다면 내가 따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찬탄했다. 6-4) 지엄한 아내보다 화통한 주모가 낫다 신사임당은 평소 남편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고금의 규범을 내세워 설득했다. 한때 남편이 과거 공부를 게을리 하자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했고, 급기야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 동안 따로 살자며 절간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원수는 그렇게 평생 박식하고 지엄한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으니 마음이 편했을 리 없었다. 신사임당은 일찍부터 ‘신씨’, ‘동양 신씨’ 등의 별칭으로 불렸던 유명 여류화가였다. 당대의 명사 소세양은 그녀의 그림을 보고 ‘신묘한 붓이 하늘의 조화를 빼앗았다.’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당쟁이 한창이던 17세기경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그녀를 율곡을 키워낸 현모양처로 떠받들면서 화가로서의 명성이 가려졌던 것이다. 기실 신사임당의 예술 활동은 남편 이원수의 배려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녀가 수시로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를 찾아 뵙고, 서울에서는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여러 자녀들의 양육까지 도맡았다면 붓을 들고 그림이나 그릴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원수는 아내의 학문이나 재능을 인정하고 후원했던 온후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가부장적인 전통을 답습하면서 살아온 양반의 후예인지라 매사에 법도를 따지고 일처리가 분명한 아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힘에 겨웠을 것이다. 그렇듯 지친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위로해준 사람이 주막집에서 일하던 여인 권씨였다. 권씨는 근엄하고 현학적인 신사임당과는 달리 매우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술을 좋아해서 수시로 만취하여 주정을 부리는 일도 예사였지만 아내의 그늘에 묻혀 사는 이원수로서는 색다른 해방감을 느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일탈이 신사임당을 추앙하는 유학자들에게는 그의 무능을 증거하는 구실이 되었다. 영조 때의 문신이자 예학자였던 정래주가 《동계만록(東溪漫錄)》에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가상대화를 실어놓은 것도 그런 편견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새장가를 들지 마세요. 우리에게 이미 5남 3녀가 있는데 다른 자식이 어찌 필요합니까? 또다시 자식을 두어 《예기》의 가르침을 어기면 안 됩니다.” “가당찮은 소리, 공자도 부인을 내친 적이 있지 않소?” “그것은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 땅으로 피난을 갔는데 부인은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그녀와 다시 살지 않았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공자가 아내를 내친 적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증자가 부인을 내친 것은 무슨 까닭이오?”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부득이 내친 것입니다. 하지만 증자는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새장가를 들지 않았습니다.” “주자의 집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소이다.” “아닙니다.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씨가 죽었는데 맏아들 숙이 미혼이라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조선 후기에는 율곡의 학풍이 널리 퍼져 선비들이 그를 깊이 추앙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한 존경심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이런 위인의 아버지 이원수가 고매한 부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천한 주모를 후처로 들였다는 점이 그들에게는 매우 고까웠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정래주는 신사임당의 입을 빌려 그녀의 사후 벌어진 이원수의 재혼이 성인들의 경우와 달리 유교의 도덕관념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신사임당의 유학에 대한 지식이 남편보다 훨씬 뛰어난 것처럼 묘사했다. 무릇 위인들에게는 대개 못 미더운 조연이 곁에 있어서 당사자의 광채를 돋보이게 해준다. 그러므로 정래주는 자신의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율곡과 신사임당에게 묻은 옥에 티를 이원수로 상정했던 것이다. 6-5) 평범한 관리로 세상을 떠나다 이원수는 50세 되던 1550년(명종 5년)에 음직으로 종5품 수운판관 벼슬을 받았다. 수운판관은 지방에서 바치는 세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조운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여기에는 당대의 거물급 대신이었던 당숙 이기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1551년(명종 6년) 봄, 이원수는 삼청동으로 이사한 다음 5월에 이선과 이이 두 아들을 대동하고 평안도로 떠났다. 그런데 그달 17일에 신사임당이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원수가 서강에 도착했을 때 가져온 놋그릇이 모두 뻘겋게 녹이 슬어 이상하게 여겼는데 집에서 사람이 와서 신사임당의 부음을 전해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원수는 따로 방을 얻어 살던 권씨를 후처로 집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권씨는 말씨도 거친 데다 종종 술에 취해 신사임당이 낳은 자녀들을 괴롭혔다. 그 때문에 맏아들 이선은 자신과 나이가 같은 새어머니 권씨에게 반발하여 수시로 말다툼을 벌였다. 이원수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그러자 실망한 율곡은 19세 때인 1554년, 가출하여 외할머니가 계신 강릉으로 가던 도중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가 1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다. 앞날이 촉망되는 아들의 출가 기간이 길어지자 이원수는 율곡에게 과거 응시를 강력하게 권유했다. 충효를 중시하던 유교사회에서 자식들은 출장입상(出將入相)함으로써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것이 최고의 효도였다. 그 때문에 율곡은 어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와 과거 공부를 시작했고, 1556년(명종 11년)에 치러진 한성시에서 장원급제함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1557년(명종 12년) 율곡은 상주목사 노경린의 딸 노씨와 혼인한 뒤 이듬해 별시에 또 다시 장원급제했다. 이런 아들의 약진을 보면서 이원수는 장차 가문의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이후 그는 내섬시와 종부시의 주부를 거쳐 정6품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가 1561년(명종 16년) 5월 14일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아들 율곡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지만 훗날 대성함으로써 이원수는 종1품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실로 그는 평생 빛나는 아내와 아들의 곁에서 조연으로 살았지만 자신의 역량에 맞게 나름의 삶을 누리고 개척하며 살았던 조선 시대 양반 중에 한 사람이었다. 4남 3녀를 둔 사임당은 자신의 호를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태교를 염두에 두고 지은 호였다고 할 만큼 자녀 교육에도 정성을 들여 성리학자 겸 정치가인 율곡 이이와 사임당을 닮아 그림과 시에 재능을 보인 큰딸 매창, 아들 이우 등을 문인화가로 이끌었다. 그러나 지금껏 가려져 왔던 그의 가정사를 보면, 사임당의 재능을 인정하고 받들어준 남편 이원수와 원만하지 않은 부부 사이를 유지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사임당의 말을 따라주었으나 결국 여성의 위로는 다른 여인에게서 취한 결과이니 한켠에 남았을 사임당의 외로움이 안쓰럽기만 하다. 주막집 여주인 권 씨와 외도한 것으로 모자라, 사임당이 자기 죽음을 앞두고 일곱 아이를 생각해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고 살기를 주문하자 남편은 공자, 증자, 주자의 경우를 비교하며 빈정거렸고 결국 사임당의 사후에 권 씨를 아내로 들인 일화는 생전에 사임당의 부부 불화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로 남는다. 성격이 지극히 불안하고 포악하기 그지없는 권 씨 여인이 사임당의 남편에게 어느 만큼의 위로가 되었을지는 모르나 사임당에게는 크나큰 마음의 상처가 되었고 마침내 심장병으로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마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사실은 천하의 문장가 사임당으로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부분이라는 점에서 한 사회 안에서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삶에 다시 한번 집중하게 된다. 이런 일화는 지금껏 사임당에 대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적인 내용이어서 영웅시되기만 하던 사임당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애환과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어 한결 가깝게 와 닿았다. 7. 신사임당의 큰 딸 이매창 신사임당 첫째 딸 이매창(李梅窓, 1529∼1592)은 학식, 인품, 용모가 신사임당을 닮았다는데 도무지 그녀의 행적이 추적이 안 되지만 예전에는 여성에게 이름은 없었는데 이름까지 지어준 것을 보면 맏딸을 끔직히 사랑했슴을 짐직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매화를 좋아하여 직접 매창(梅窓)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며 커가면서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작은 사임당으로 불릴 만큼 학문적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셨다. 사임당은 딸 매창을 사랑하여 틈틈이 학문을 가르치고 서예법과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다.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과는 동명이인이자 동시대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매창의 생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파주 율곡 가족묘원에 가면 율곡의 큰 누님 이매창과 매부 조대남의 쌍분묘,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 씨의 합장묘, 이매창의 둘째 아들 조영 묘가 있다 한다. 다만, 그의 그림은 신사임당도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그림이라고 인정했듯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점, 어머니 사임당 신씨, 허균 누이 허난설헌등 여성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던 시절, (일설에 사임당도 인선(仁宣)이란 이름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어느 사료에도 나오지 않은 주장임) 이매창(李梅窓)이란 이름을 가질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는 사실은 오죽헌 기념관에 진열된 그림과 글씨등 그녀의 극소수의 작품을 보아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더불어 율곡이 누이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는 것, 옥산 이우의 장인 황기로(黃耆老)가 사돈 이매창에 대해서 글씨와 거문고 및 풀벌레 그림에 뛰어난 사실에 대하여 부녀자 중의 군자(女中君子)라고 언급하였다는 점 등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7-1) 이매창(李梅窓, 1529 ~ ?) - 두산백과 - 조선 중기의 화가로 신사임당의 맏딸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매창(梅窓)은 호이다. 조선 중기의 화가로 유명한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첫째딸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는 손윗누이가 된다.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조말생(趙末生)의 4대손인 조건(趙鍵)의 아들이자 강절교위(康節校尉)ㆍ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등을 지낸 조대남(趙大男)과 결혼해서 조영(趙嶸) 등 3남 3녀를 낳았다. 이매창은 신사임당이 26세 때인 1529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를 닮아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조선 중기 명필로 유명한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에게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특히 풀벌레 그림을 잘 그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에는 이매창이 그린 〈매화도(梅花圖)〉가 전해진다. 지본수목화(紙本水墨畵)로 30 × 20.5㎝의 크기인 이매창의 〈매화도〉는 동생인 옥산(玉山) 이우(李瑀)가 그린 〈국화도(菊花圖)〉와 함께 화첩으로 만들어져 보존되고 있으며, 이 화첩은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매창의 둘째아들인 조영도 글씨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그린 〈군산이우도(君山二友圖)〉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그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매창은 남편인 조대남과 함께 경기도 파주의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 매장되었다.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현재 이이와 신사임당을 비롯해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씨 부인의 합장묘, 이매창의 아들인 조영의 묘 등이 있다. 이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인 율곡선생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8. 이매창 둘째아들 조영(趙嶸: 1572-1606) 작성자 건국대학교 박물관 / 김상엽(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 건국대 연구교수) 전란중에 이루어진 선비들의 운치있는 만남 - 군산이우도- 임진왜란(1592-1598)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조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종묘사직을 지켜냈지만 그 상처는 너무나 커서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 중국에서는 항왜원조전(抗倭援朝戰)·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조선왜화(朝鮮倭禍),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조의 역(文祿慶長の役)·정한역(征韓役)이라 부르는 전쟁 이후 명은 청으로 왕조가 바뀌었고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서 도쿠가와 막부 정권으로 바뀌었다. 조선과 명, 일본에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인데, 삼국은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전쟁터가 된 조선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림 역시 세종연간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활력을 잃었음은 물론 조선의 가장 중요한 대외교섭창구이자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었던 명나라의 문화적 자극도 조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1550년에서 1700년의 기간을 지칭하는 조선 중기의 회화는 조선 초기 그림의 양상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작품의 제작 등에서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문인들의 교유와 풍류는 단절되지 않았고 문화활동도 지속되었음을 우리는 『군산이우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진 마음이 통하는 문인들의 조우야말로 평상시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반가움이었으리라. 조선 초기의 문신 조말생의 6대손이자 율곡 이이의 생질인 조영(趙嶸: 1572-1606)은 임진왜란 중에 서해의 군산도로 피신을 하였다. 군산도는 천혜의 경관으로 유명한 선유도가 있는 고군산군도로서 현재는 전라북도 군산시에 속하며 군산 남서쪽 약 50㎞에 해상에 위치해 있는데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인해 육로로 연결되었다. 조영은 “시를 잘 읊고 술 마시기를 즐겼으며 세상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미수 허목이 『미수기언』에서 언급한 것으로 보면 그의 성품이 대략 짐작된다. 조영은 그의 성품처럼 벼슬에 오르지 않고 시문과 글씨, 산수화에 두루 관심을 보이며 일생을 즐기며 살아간 인물이었나 보다. 조영은 그의 나이 20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인 성로(成輅)와 함께 군산도로 피신하였다가 문인 김주(金輳: 1564-1636)를 만났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서로의 정회를 돈독히 하기 위해 김주가 시를 짓고 조영이 그림을 그려 ≪군산이우도첩≫을 1593년에 완성하였다. 성로와 조영, 김주는 1597년까지는 군산도에 있다가 정유재란이 시작되어 왜군이 충청도로 침입하자 강화도로 다시 피신하였다. 『군산이우도』의 뒤쪽에 붙어있는 김주, 조영, 권필, 박경립 등 당시 문인들의 『군산이우도』에 대하여 쓴 「서(序)」, 「시(詩)」, 「제(題)」, 「발(跋)」 등은 조영과 김주의 생과 그림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김주의 『운암문집』, 권필의 『석주집』, 허목의 『미수기언』 등 16·17세기 문인들의 글 속에 『군산이우도』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조영과 김주의 만남과 『군산이우도』는 알려진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서화사의 보전(寶典)’ 또는 ‘한국 서화사의 시작과 끝’이라 평가되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도 소개되어 있는 『군산이우도』는 조선 중기 이전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의 상황,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 군산이우도, 견본담채, 33.3*45.8cm, 개인소장이었다가 건국대박물관에서 매입소장 - 이제 『군산이우도』를 보자. 작품 전반에서 깔끔하고 정갈한 표현이 돋보인다.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길게 자라난 소나무, 진한 먹으로 표현된 소나무 옹이, 먹색의 대비가 강한 물가의 바위 등은 조선 초기에 명으로부터 들어와 조선 중기 화단에 큰 영향을 준 절파(浙派)화풍의 반영이다. 소나무 아래 책갑과 술병이 올려 있는 작은 책상(.案)을 옆에 두고 앉아 있는 두 선비 중 은은한 회색의 학창의를 입고 책을 들고 있는 인물이 김주, 흰색 학창의를 입고 돌아 앉아 술을 권하는 인물이 조영으로 생각되는데 두 사람 모두 방건(方巾)을 쓰고 있다. 학창의와 방건은 모두 학자나 고관이 편안히 생활할 적에 사용하는 것으로서 어려운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여겨진다. 궤안 위에 놓인 책갑과 술병 역시 이와 같은 경향이다. 『군산이우도』에서 특정한 경치가 묘사되지 않은 것은 문인들의 교유의 기념과 아취 있는 서정을 표현하려는 것이 제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593년 봄에 각각 그림과 글씨를 나누어 『군산이우도』를 그릴 당시 조영은 21세, 김주는 29세가 된다. 『군산이우도』는 자연경관과 인물의 적절한 조화와 원숙한 농담 조절 등으로 미루어 남아있는 작품이 이 한 점밖에 없지만 조영의 화가로서의 기량과 격조가 뛰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군산이우도』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대혼란 속에서도 고아한 품격과 이상을 잃지 않으려 했던 문인들의 노력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자 국난의 와중에도 문화 예술활동의 명맥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예이다. 특히 전해오는 작품의 수효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중기 회화사 연구에 『군산이우도』는 인식의 깊이와 폭을 심화하고 확장하는 데에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다. 필자 : 김상엽(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 건국대 연구교수) 9. 율곡(栗谷)이이 생몰년 1536-1584(중종31-선조17)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 문성(文成) 활동분야 학자, 정치가 9-1) 가계와 수학 출생하던 날 밤 어머니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어와 서렸다고 하여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산실(産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죽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19세에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다 9-2) 관직과 저술 29세에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되고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을 논하였다. 34세에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고,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으며, 40세 때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제진하였다. 42세에 《격몽요결 擊蒙要訣》을 지었고, 45세에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었다. 이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과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9-3) 사화와 사회경제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할 수 없었으며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正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방축(放逐)·사망으로 나라 안의 정세는 일변하고 을사사화 이후의 피죄인(被罪人)은 소방(疏放)되었다. 이때는 이이가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이때부터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1566년에는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사액하였으며,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해 6월에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며,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서용(敍用)하였다. 선조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삭탈, 이황의 《성학십도 聖學十圖》 제진, 1569년(선조 2)에는 이이의 〈동호문답〉 제진, 그리고 1570년에는 유권(柳灌)·유인숙(柳仁淑)의 역명신원(逆名伸寃) 등 새로운 국면이 전개됨과 아울러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렇듯 상황이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근본적인 개혁없이 유림의 활동은 특별한 설시(設施)를 볼 수 없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인하여 사림은 분열되고 무위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9-4) 성리사상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하여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이이와 같은 인물이 조정에 나와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하여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였다. 경장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가능하다 함에 대하여는 이미 조광조도 강조한 바 있거니와, 이이의 시대에 있어서는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었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하였고, 세종이 수성(守成)하여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으며,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하여 《경국대전》을 제정하였으니, 이것은 다 ‘인시이제의(因時而制宜)’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을 고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였다. 이이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하는 이이에 있어서 항상 강조되는 것은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니, 언제나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효(治效)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이는 항시 위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하며,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같이, 이이에 있어서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에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율곡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9-5) 학문과 업적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 각기 다른 것이라 하였다. 그는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였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그리고 ⑤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었으며,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하여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하여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절실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일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요, 언로를 개방하여 국인은 다 말할 수 있고, 위정자는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에게 있어서도 그러하였지만, 이이에게 있어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흥망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인의 정당한 일반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 여기에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존중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이이는 그의 논의에 있어서 항시 실사와 실공에 토대를 두었던 것이며, 이렇듯 성리와 실사, 의리와 공리, 인간과 사회, 이념과 현실, 실사와 원리 등 형이상하와 내외본말을 적의(適宜)하게 갖추었던 그의 사상이 성리학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일컬었던 바 의리와 실리의 상호매개 이론을 보았거니와, 이이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단지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구체적인 시책 속에서 시(是)와 이(利)를 하나로 구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의 양면은 후기에 있어서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의리와 실리가 조화를 이루는 바 연관성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양자가 균형을 얻지 못하고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전개에 있어서 율곡성리설이 끼친 영향에 대하여 매우 주의깊게 관찰하여야 할 문제를 볼 수 있거니와,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에 있어서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함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는 바라 하겠다. 9-6) 율곡 이이 약전 ① 가계와 출생 율곡은 1536년(중종 31년) 강릉부 북평촌(지금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수 공과 어머니 신사임당은 7남매를 두었는데 율곡은 4남 3녀 중 셋째 아들이다. 이름은 이(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호인 율곡은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촌에서 따온 것이고, 처음 이름은 현룡(現龍)이었는데 11세 때 이로 바꾸었다. 율곡을 낳던 날 저녁에 신사임당의 꿈에 검은 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 있는 꿈을 꾸어서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고 한다. ② 유·소년기 율곡은 출생하여 오죽헌에서 자라다가 6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10년간 살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일컬어졌으며, 13세에 진사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는데, 이후 9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9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16세 되던 해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고, 수운판관으로 임명되어 평안도로 출장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신사임당이 1551년(명종 6년) 48세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어머니를 경기도 파주시 동문리 자운산에 장사지내고 3년상을 지냈다. 모든 절차를 가례에 따라하여 상복과 삼띠를 벗거나 풀지 않았으며, 음식을 올리고 그릇을 씻는 등 모든 일을 노비들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서모 권씨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던 율곡은 18세에 봉은사를 찾아 불경을 읽기도 하였다. ③ 청년기 19세 때 평생의 동지가 된 우계 성혼을 만나게 되고, 3년상을 마친 그 해 3월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 공부를 하게 된다. 그 당시 중은 가장 천대를 받던 때이므로 이러한 행동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 불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노장사상도 함께 탐구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유교만 공부하던 그 당시 보통 선비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러다가 논어를 다시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산을 내려왔다. 금강산에 들어간 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이 때 율곡은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지표로 삼는 자경문을 지었다. 21세에 한성시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고,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 때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예안의 퇴계 이황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퇴계는 그 때 58세의 원숙한 대학자였다. 이 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시를 주고 받고, 학문에 대하여도 서로 강론하게 되었으며 후에 편지도 주고 받았으며 율곡은 퇴계를 스승처럼 존경하게 되었다. 퇴계는 율곡을 만난 후 여러 사람에게 후생가외(後生可畏 : 후배들이 두려운 것이라는 뜻)라고 칭찬하였다. 23세 겨울에 별시서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여 당시 고시관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26세 때인 1561년(명종 1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자운산에 모신 신사임당의 묘에 합장한 후 3년상을 치렀다. ④ 장년기 율곡이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펼치고 동서 붕당의 조정을 위해 노력한 시기이다. 29세에 문과와 명경과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40세 까지 예조좌랑, 이조좌랑,홍문관 교리, 청주목사, 우부승지, 황해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 시기에 건의한 개혁정책과 주요 저술은 시무삼사, 간원진시사소, 동호문답, 시무구사,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명종이 승하하고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다. ⑤ 말년기 41세에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의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였는데 은퇴을 결심하고 해주 석담으로 돌아가 청계당을 짓고, 43세에 은병정사를 지어 교육에 힘쓰던 시기이다. 이 때 가족헌장과 같은 동거계사를 지어 실천했으며, 격몽요결과 고산구곡가, 소학집주, 경연일기, 인심도심설, 학교모범, 6조방략 등을 지은 시기이다. 이 시기에 대사헌,호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48세에 유명한 10만양병설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죽음을 이틀 앞 둔 위중한 때에 좌우의 부축을 받아가며 일어나 국방의 임무를 띠고 전선으로 가게된 서익에게 6조방략을 가르쳐 주었다. 49세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종로 화신백화점 일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계 성혼이 곡하고, 송강 정철이 곡했다. 율곡은 집안에 모아 놓은 재산이 없어 다른 이의 수의를 얻어다 염습을 했다. 선조 역시 애통해하며 3일간 조회를 보지 않았다. 인조 2년(1642년) 시호를 문성이라 내리고, 숙종 8년에 문묘에 배향하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1615년 (광해군 7년)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이 고향인 율곡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자운서원을 세웠다. 해주의 서현서원(은병정사),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참고자료) 순절한 곡산노씨에 얽힌 전설 파주 율곡리 자운서원 경내 율곡선생의 가족묘역에 가면 율곡선생 내외분의 묘가 전후면에 있는 것을 보고 누구나 의아한 생각을 품게 된다. 여기에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을 방방곡곡 각 지역을 휩쓸며 양민학살과 부녀자 강탈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런데 선조 18년 율곡선생은 돌아가실 때 머지않아 큰 화가 닥칠 것이니 권율장균을 찾아가 의탁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7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인은 권율장군을 찾아가 사연을 말했으나, 전란 중에 식솔들의 생사조차 모르던 장군은 부인을 도와줄 수 없었다고 한다. 왜군들에게 쫒기며 겨우겨우 선생의 묘에 이른 부인은 변을 당할까 두려워 물을 떠오라며 하녀를 내려 보낸 후 나라 운세를 거정하며 통곡을 하였다. 이때 마침 왜군이 몰아닥치자 부인은 왜군을 향해 크게 꾸짖고 선생묘소 뒤에서 비수를 꺼내 자결하였다.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다 나무숲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본 하녀는 왜군이 흩어지자 발을 동동 구르고 애통해 하며 아랫마을에 가서 참상을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동리문하생들이 시신이 있는 곳에 임시로 흙만 덮어 건평을 하였다. 7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전쟁이 종식되어 의주에서 환궁한 선조임금은 율곡선생의 부인이 선생묘소 용미 그 자리에 봉분을 하라 하명하여 문하생들이 몰려와 치장하였다 한다. 9-7) 율곡 이야기 - 제가기술잡록(諸家記述雜錄)에서* *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생애를 적은 「연보초고(年譜草槀)」를 비롯하여 정홍명(鄭弘溟)의「기암잡록(畸菴雜錄)」․ 송익필(宋翼弼)의「구봉간첩(龜峯簡帖)」․ 정철(鄭澈)의「송강일기(松江日記)」․ 윤선거(尹宣擧)의「노서기문(魯西記聞))」․ 김창협(金昌協)의「농암문집(農巖文集)」․ 허 균(許筠)의「성소부부고(惺所覆瓿槀)」․ 이식(李植)의「택당문집(澤堂文集)」․ 이귀(李貴)의「등대록(登對錄)」등 여러 문헌에서 율곡의 언행 ․ 사상 ․ 학술 ․ 경륜 등에 관한 제반 자료들을 뽑아 기록한 것이다. (그 중에서 국방사상과 관련된 글을 가려내고, 율곡의 국방문제에 대하여 동시대인과 후대인이 직 ․ 간접적으로 표현한 글을 통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율곡의 국방사상 자료집"에 싣기 위하여 율곡전서에서 관련 자료를 뽑아놓은 것이다.) ① 우산문집(牛山文集)에서 율곡이 경연에 들어가서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자고 청하니, 서애(西厓)가 그것을 저지하고 물러 나와서 율곡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태평시대이니, 경연에서 권면할 일은 마땅히 성학(聖學)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고 군사의 일은 급무가 아니거늘, 공은 어떤 소견이 있기에 우리들과 상의도 않고 이처럼 지레 진달하였소.” 하니, 율곡은, “속유(俗儒)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겠는가.” 하고, 웃기만 하면서 답하지 않았다. 아계(鵝溪)가 말하기를, “이현(而見)이 잘못이오. 숙헌(叔獻)이 어찌 소견이 없겠소.” 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묵묵히 있었다. 율곡이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제군들은 어찌 한 마디씩 말을 하여 그 가부를 정하지 않소.” 하니, 동강(東岡)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감히 논할 바 아니오.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을 옛 사람이 어떻게 여겼소.” 하고, 서로 농담하고 웃으면서 파하였다. *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 1573-1654) : 자는 士彦, 호는 牛山, 隱峰이며 벼슬은 追贈 吏曹判書, 諡號는 文岡公.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 의병활동.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학자. ② 택당잡고(澤堂雜藁)에서 계미년(1583) 5월에 서얼(庶孼)과 천예(賤隸)들에게 벼슬길을 터주고 양민이 되게 할 일에 대하여 복명하였다. 자력으로 장비를 갖춰 가서 만 3년 동안 변방에서 수자리를 산 자에게는 벼슬길을 터주고 양민이 되게 해 주었으며, 또 서얼이 변방에 쌀을 납입할 경우에도 또한 벼슬길이 트이고 양민이 될 수 있었는데, 첩자(妾子)와 천첩자(賤妾子)의 납입하는 바에는 차등이 있었다. 모(某)는 또, 병조 군사의 궐번 속포(闕番贖布)를 누고(樓庫)에 쌓아두어, 관원들은 그것을 마치 사장(私藏)처럼 보아 물 쓰듯 하고 있는 반면에, 변방으로 수송되어 군사의 복장이 될 사섬시(司贍寺)에 저장된 베는 곧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그 속포를 모조리 변방으로 수송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군자감(軍資監)에 저장된 베로 전사(戰士)의 옷을 충당하고, 백관들의 녹봉을 덜어서 수자리 사는 군사들 처자의 양식을 공급하기를 청하였다. 이래서 수자리 사는 군사가 남아돌고 내지(內地)의 징발이 많지 않았으며, 변방의 양식은 요족하게 조달되고 새상 원곡(塞上原穀)은 줄어들지 않았으므로 사졸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어서 집 생각을 잊었다. 그리고 또 상벌을 분명히 하니, 진보(鎭堡)의 장졸들은 점차로 적군을 향하여 적을 죽여 갔다. 그래서 육진(六鎭)이 다시 안정되고 번호(藩胡)가 다시 반란하지 모한지 20여년이 되니, 이는 대개 모가 한때 조치를 잘한 효험인 것인데, 논자(論者)는 오히려 나라를 병들게 했다고 공격한다. ③ 기암잡록(畸巖雜錄)에서 율곡이 벼슬에 오른 뒤에 무릇 국가 중대사가 있으면 그 누이에게 물었다. 계미년 북방 변란 때 율곡이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군량의 부족을 걱정하자, 그 누이가, “오늘날의 급선무는 반드시 인심을 즐겨 따를 것을 생각해서 행하여야 성취할 수 있다. 재주 있는 서얼들이 폐고(廢錮)된지 이미 백년이 넘어서 모두 울분을 품고 있으니, 지금 만일 그들에게 곡식을 납입함에 따라 벼슬길을 틔워준다면 군량을 금방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율곡은 탄복하고 즉시 계청해서 시행하였다. ④ 연보초고(年譜草藁)에서 계미년(癸未年)에 북병사(北兵使) 이공 제신(李公濟臣)이 방호책(防胡策) 20조목을 올리니, 상이 이품 이상이 모여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비구(備局)의 모든 재신(宰臣)이 다 모였는데, 선군자가 군병에 관한 급무로 병조에 앉아 미처 참석하지 못하였다. 당시 서애(西厓) 유 성룡(柳成龍) 또한 중망(衆望)이 있었으므로 임금으로부터 ‘양현(兩賢)’이란 말씀이 있었는데, 이때 서애는 도승지로서 또한 그 자리에 참여해 있었다. 삼공(三公)이, 붓을 들어 회계(回啓)의 초안을 잡도록 하였으나 서애는 곧 붓을 대지 못하였고, 좌우에서도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하였다. 해는 이미 중천에 솟았고, 중사(中使)의 재촉하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영상인 사암(思菴) 박공(朴公)이, “시급한 일을 이렇게까지 천연시키니 매우 미안한 일이오. 병조 판서를 청해 와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모두들 좋다고 응낙하였다. 선군자는 자리에 들어가 곧 서리 한 사람에게 명하여 초주지(草注紙) 한 권을 연달아 붙이게 하고, 또 한 사람으로 하여금 먹을 갈도록 하고는, 이에 붓을 쥐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씀하기를, “각각 생각한 바를 진술해 주시오. 마땅히 말씀하는 대로 따라 적겠소.” 하매, 모두가, “우리가 만일 할 말이 있었다면 어찌 병조판서를 청하였겠소.” 하였다. 선군자는 부득이 조목에 따라 논열(論列)하고 가부를 변석하여 잠깐 동안에 다 적었다. 좌우가 돌려보되 한 마디의 말이 없었고, 삼공이 두루 보고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가 아뢰었다. 상이 보고, “이는 병조판서가 한 것인가.”물었다. 사암은, 물러나와 일기에 쓰기를, “누가 율곡을 뜻은 크고 재주는 소활하다고 했는가. 그 재주를 써 보지도 않고 소활하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나는 그의 조처한 것을 보니, 아무리 극난한 일이라 하더라도 조용히 행하되 마치 구름이 공중을 지나가듯이 하여 흔적이 있지 않으니, 참으로 이른바, 세상에 드문 자질인 것이다.” 하였다. ⑤ 우산잡록(牛山雜錄)에서 계미년에 배로 해주(海州)로 내려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사방 먼 산엔 모두 먹구름인데 四遠雲俱黑(사원운구흑) 중천엔 햇볕 정말 밝구나. 中天日正明(중천일정명) 외로운 신하 한 줌 눈물을 孤臣一掬淚(고신일국루) 한양성을 향하여 뿌리누나. 灑向漢陽城(쇄향한양성)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이 간절하다. 또 다음과 같은 시도 지었다. 풍진에 시달려 반백이 되었는데 風塵局促二毛生(풍진국촉이모생) 일엽편주로 돌아오니 만사가 가볍다. 一葦歸來萬事輕(일위귀래만사경) 강상 청산 서로 싫지 않으니 江上靑山不相厭(강상청산불상염) 세간의 교도는 무정도 하여라. 世間交道在無情(세간교도재무정) 상시탄속(傷時歎俗)의 뜻이 깊다. ⑥ 사계어록에서 계미년 이전에는 동 ․ 서가 모두 사류들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율곡이 매양 보합론(保合論)을 피력하였지만, 계미년 이후에는 사(邪)와 정(正)이 나뉘어 두 당이 되었다. ⑦ 백사문집(白沙文集)에서 선묘(宣廟)가 이미「강목(綱目)」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이어 옥당(玉堂) ․ 서당(書堂)의 인선을 재촉하였다. 율곡이 막 문형(文衡)을 맡아 있어 실제 이 일을 주관하였다. 임오년에 재신(才臣)을 뽑아 그로 하여금 강독(講讀)을 전적으로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명하니, 선생이 봉교(奉敎) 이 항복(李恒福) ․ 정자(正字) 이 덕형(李德馨) ․ 검열(檢閱) 오 억령(吳億齡) ․ 수찬(修撰) 이 정립(李廷立) ․ 봉교(奉敎) 이 영(李 嶸)으로 선발에 응하매, 상이 내부(內府)에 비장(秘藏)한 「강목(綱目)」을 각각 하사하였다. 계미년 후에는 조정 의논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가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명보(明甫)는 후배로서 명성이 자자하였고, 나 또한 얕은 지식이 있었으므로 함께 선발에 응할 희망이 있었다. 한 재상이 밤에 율곡을 찾아와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나서 말하기를, “양리(兩李)가 과연 인망이 있으나 의향을 모르니, 가벼이 천거하여 시사를 그르치게 만들어서는 안 되오.”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명성이 바야흐로 성한데 어떻게 그 어짊을 가릴 수 있소. 또 사람을 천거하는 데는 인재를 얻는 것이 제일이거늘, 어찌 의향을 논하겠소.” 하였다. 그 사람이 야심하도록 다투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⑧ 택당잡고(澤堂雜藁)에서 서 익(徐益)이 순무어사(巡撫御使)로 관북에 가게 되니, 상이 이 이에게 나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그 자제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중이므로 노동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응접하는 일을 사양하시라’고 하니, 이 이는 말하기를, “이 내 몸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이 가중된다 하더라도 역시 운명이다.” 하고, 입으로 여섯 조목의 방략을 불러주었다. 다 쓰고 나니, 기색(氣塞)하였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그 이튿날 작고하였다. ⑨ 남곽(南郭) 박 동열(朴東說)의 「수록(手錄)」에서 임진년(壬辰年)에 이 일(李鎰)과 신 립(申砬)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이어 남하하는데, 병조판서 홍 여순(洪汝諄)은 속수무책이었고, 면포(緜布) 같은 물건을 또한 전례를 끌어 지급해서 그들의 행군을 위로하지도 못하였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은 분노하여 ‘계미년 이 이’를 길에서 크게 부르짖는 자가 서로 연달았으니, 아마 선생을 사모한 것이었으리라. ⑩ 우산문집(牛山文集)에서 아계(鵝溪)는 남하고 말할 때마다 언필칭 ‘율곡은 성인이고 송강은 병통이 많은 군자라’고 하였고, 서애는 매양 율곡을 칭찬하기를, “숙헌은 능히 수십 년 장래의 일을 내다보았는데, 우리 같은 무리는 몸소 직접 난을 당하여 어떻게 대처할 줄을 몰라서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우리는 숙헌의 죄인이다.” 라고 차탄해 마지않았다. ⑪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기록한 「서애유사(西崖遺事)」에서 공(서애)가 말하기를, “큰 난을 겪은 뒤에 무슨 일을 한 번 해 보고 싶으나 사람들 심정이 모두 옛 관습에 젖어서 시세를 깨닫지 못한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금에 와서야 이 율곡의 마음이 공평하고 재주가 높음을 알겠소. 율곡이 살아계신다면 아마 공과 더불어 서로 나라를 구했을 것이오.” 하매, 공은 얼른 칭찬하기를, “숙헌은 일을 처리하는데 매우 과감하였다. 동료들이 그 당시에는 경솔하게 보아, 그 군사를 양성하고 공안(貢案)을 고치자는 말들이 모두 시대의 병폐를 환히 보고 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숙헌은 재주가 놀라운데다 평탄하고 화평한 사람이었다.” 하였다. ⑫ 연보초고(年譜草藁)에서 만전(晩全) 홍 가신(洪可臣)이 해주를 맡았을 때, 곧 석담(石潭)을 방문하여 조용히 경림(景臨)에게 말하기를, “율곡은 나를 자세하게 알고 깊이 인정하였다. 그런 때문에 나의 당초 천양(薦揚)은 모두 율곡으로 인한 것이었다. 모르는 자는 동서의 의논을 가지고 서로 계교를 하는데, 설사 의논에 불합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이것으로 흠을 잡을 것이겠는가. 하물며 율곡은 본래 치우친 바가 없고 매양 화합시킬 것으로 힘을 썼음이랴. 나는 깊이 그것을 알고 서로 믿기를 종시 한결같이 하였다. 율곡의 경륜으로 주상의 의중(倚重)이 되고 세무(世務)를 담당하여 매번 경장책(更張策)을 진언하였으니, 그 말이 행해지게 하였더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 이현(柳而見)같은 자가 나란히 한 시대에 태어나서 매번 그 책략을 저지하였으니, 율곡의 경장책이 행해지지 못한 것은 모두 이현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하였다. 경림이 묻기를, “유 정승은 재주는 진실로 아름다우나 기백이 부족한 때문에 사업에 단점을 보인 것이지, 또한 어찌 기량이 좁아서 그런 것입니까.”하니, 만전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현은 재주와 기백은 다 훌륭하나 단지 처심(處心)이 부정할 뿐이다. 임오년 간에 내가 장령(掌令)으로서 사정전(思政殿)에 입시하였더니, 그 때 마침 율곡의 봉사(封事)가 올려졌다. 상이 그 소(疏)를 좌우에 두루 보이면서 묻기를 ‘경장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찬성이 전부터 매번 청하는데, 나는 중난하게 여긴다.’ 하였다. 내가 곧 자리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이는 실로 당금의 급무입니다.’ 하고, 따라서 전우(殿宇)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전우는 바로 조종조(祖宗朝)에서 창건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퇴패(頹敗)가 이미 삼한데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조종조에서 창건한 전우이니, 개수할 수 없다고 한다면, 반드시 훼멸에 이를 것입니다. 그 형세는 모름지기 다시 재목을 모으고 공인들을 소집하여 썩은 것은 고치고 헐어진 곳은 보수하여 옛 것을 새롭게 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중신(重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의 경장책이 어찌 이 경우와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튿날 ‘저보(邸報)를 보니, 부제학 유성룡이, 우찬성 이모가 소진(疏陳)한 제설(諸說)은 가벼이 변경할 수 없다는 일로 들어가 아뢰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놀랍고 의아스러워서 이현의 집에 찾아갔더니, 이현의 외부인을 꺼리고 있었다. 내가 중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니, 이현은 나를 맞이하여 말하기를, ‘흥도(興道 : 홍가신의 자)도 숙헌에게 부회(傅會)하는가’ 하였다. 내가 묻기를 ‘영공(令公)은 일찍이 율곡과 더불어 국사를 의논하지 않았오’ 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일찍이 의논하였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그렇다면 그 경장책이 어떠하오.’ 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좋은 것이요.’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좋다면 영공이 왜 저지하오.’ 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경장책은 비록 좋으나 숙헌의 재주가 그것을 처리할 수 없을 듯싶으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도 율곡과 더불어 말했소.’ 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일찍이 말하지 않았소.’ 하였다. 내가 탄식하기를 ‘영공의 생각이 틀렸소. 남과 국사를 의논함에 있어 면전에서는 응낙해 놓고 돌아서서는 저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하니, 이현은 안색이 변하며 답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부정한 곳이다. 대개 율곡과 이현이 나란히 한 시대에 태어나서 서로 합하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 또한 기수(氣數)였던 것이다. 난을 겪은 후 이현이 스스로 당해본 연후에야 비로소 율곡의 선경지명에 복종하였으나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선군자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이현이 재기(才氣)는 아름다운데 다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 나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무리가 죽고 나면 반드시 그 재주를 실시할 것이다.” 하였다. 임진난 이후, 서애가 국사를 담당하여 매양 조당(朝堂)에서 선군자의 선견 ․ 재조를 크게 칭찬하였다. 어떤 이가 서애는 율곡을 추허(追許)한다고 하자, 우계 선생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현은 본시 그러하다. 그가 어찌 율곡의 어짊을 몰랐겠는가. 단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해서 죽은 뒤에 추허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남명(南冥)의 시에, 사람이 바른 선비 좋아하는 것이 人之好正士(인지호정사) 호피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好虎皮相似(호호피상사) 생전에는 죽이려 하고는 生前欲殺之(생정욕살지) 사후에야 바야흐로 칭미한다. 死後方稱美(사후방칭미) 는 것이 있으니, 이현이 이에 가깝다.” 하였다. ⑬ 이 귀(李貴)가 지은 「한음유사(漢陰遺事)」에서 이에 앞서 조정의 의논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동인은 심의겸(沈義謙)더러 외척이라고 하고, 서인은 김효원(金孝元)더러 앙갚음을 한다고 하였다. 그때 김응남(金應南)이 시망(時望)을 업고 외척을 공격하는 것으로 사론(士論)을 삼고 있었다. 공(公 : 이덕형<李德馨>)은 후진으로서 김 응남의 논의가 이와 같음을 보고 마음속으로 꽤 믿었었는데, 그 후 김응남이 행사하는 것을 보니 조금도 취할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율곡의 문집을 읽어보고 그 행기(行己) ․ 입심(立心)이 광명정대하여 탁연히 백대의 유종(儒宗)이 됨을 알게 된 연후에는 전일의 소견을 별안간 변경하였다.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율곡의 학력의 높은 곳은 비록 퇴계라 할지라도 역시 이르지 못할 데가 있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이내 율곡의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대현의 행장을 짓겠소.” 하였다. 그러나 굳이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더욱이 율곡의 동서를 타파해야 된다는 설을 옳게 여기어, 차자를 올려서 자신이 전일 한 쪽에 그릇 떨어졌던 잘못을 자책하였고, 또 무편무당(無偏無黨)을 가지고 탑전에서 진계(陳戒)하여 끝내 당론을 하지 않았으니, 그 율곡에 대한 경신(敬信)의 깊음을 볼 수 있다. ⑭ 택당잡고(澤堂雜藁)에서 율곡은 자품(資稟)이 매우 높고 충양(充養)이 더욱 두터웠으며, 청명(淸明) ․ 화수(和粹)하고 탄이(坦夷) ․ 영과(英果)하였다. 사람을 상대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고, 은혐(恩嫌) ․ 애오(愛惡)를 일호도 개의치 않으니, 어리석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을 막론하고 진심으로 율곡을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율곡은 세상을 구제하는 일을 급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미 물러났다가 다시 진출하여 사류(士類)를 보합(保合)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사심없이 할 말을 다하여 좌우로 기휘(忌諱)에 저촉되니, 드디어 당인(黨人)의 원수가 되어 거의 큰 화를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 그가 사람을 천거하는 데는 반드시 학문과 명검(名檢)을 위주로 하였다. 그런 때문에 거짓을 꾸며 슬쩍 합한 자들은 뒤에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유속(流俗)의 논의에서는 율곡을 가리켜 소활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율곡이 작고한 뒤에 편당이 크게 승하여 한쪽으로 치달아 갔으므로, 조정이 이미 바로잡혀졌다고 하였으나 속은 저절로 괴리되어 사분오열하여 결국 국가의 무궁한 화가 되었다. 임진년의 난에 이르러 봉강(封疆)이 스스로 무너지고 나라가 드디어 기울어지니, 율곡이 평일에 미리 염려하고 먼저 말한 바가 부험(符驗)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편의를 건청(建淸)한 책략이 뒤늦게 채용되고 국론(國論)과 민언(民言)이 모두 그를 칭송하니, 그 도덕 충의의 실상에는 굽히지 못할 것이 있는 것이다. ⑮ 택당문집(澤堂文集)에서 나의 종친인 율곡공은 자품과 학식이 정암(靜菴)과 퇴계(退溪)에 내리지 않았고, 게다가 경제재략(經濟才略)이 있었다. 이미 선조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선조는 그의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국가의 안위를 스스로 책임지고 아는 일이면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할 경우에 숨김없이 다 역설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그것은 대개 폐법(弊法)을 변통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튼튼하게 만들어서 큰 난의 조짐을 막으려고 했던 것인데, 먼저 조정을 화합하고 인재를 모은 연후에 시행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득 당인에게 모함된 된 바가 되었다. 선조의 진정시킴을 힘입어서 겨우 정암(靜菴)이 당한 화를 면하고 자택에서 편안히 죽을 수 있었으니 도의 행해지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 ⑯ 상촌(象邨) 신 흠(申欽)의 문집에서 선생이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국경이 조용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므로 걱정할만한 일이 없는 듯하였는데, 선생은 임금에게 충언을 드림에 노력과 성의를 기울이면서 조처하고 배치하는 일 등을 모두 황급하게 서두르기를 마치 난망(亂亡)의 화가 조석간에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니, 당시 논자(論者)들 중 그 누가 오원(迂遠)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에 본다면 선생의 말이 마치 부계(符契)처럼 착착 맞으니, 그 때 가사 그것이 세상에 시행되어 고택(膏澤)이 위에서 막히지 않고 풍화가 아래에서 크게 변하였더라면 민생의 도탄이 필시 이처럼 가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⑰ 「양천 부부고」에서 이 이가 곤란을 당한 이유는, 의논하는 자가, 공안(貢案)을 변경하는 것은 불편하다. 여러 고을에 정원 외의 군사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 곡식을 바침에 따라 관작을 제수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서얼(庶孼)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것은 불가하다. 성과 보루(堡壘)를 다시 쌓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병란을 겪은 뒤에 조정에서 적을 막고 백성을 편케 할 대책을 부지런히 강구하는 것이 이 다섯 가지에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이 이의 선견지명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환히 알고 있었으므로, 비록 몇 가지의 시행이 평시에 있어서는 구차한 일인 줄 알았지만 환난을 예상하여 미리 방지하자면 경장(更張)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뭇 사람들의 기탄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속된 선비들은 좁은 소견에 이끌려서 요란스럽다느니, 타당치 못하다느니 하면서 어지럽게 서로 시새워 미워하였으니, 그 몸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수 없었음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논의하는 자는 이 이를 배척하는 데는 힘을 아끼지 않으면서 다섯 가지를 받들어 시행하는 데 있어서는 행여 미치지 못할 세라 하고들 있으니, 크게 가소로운 일이다. 9-8)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세상 사람들이 모르더니, 내가 풀을 베고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사니(그때야) 벗님네 모두들 찾아오는구나. 아, 주자가 읊은 무이산에서 후학을 가르친 주자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 일곡은 어디인가? 갓머리처럼 우뚝 솟은 바위(관암)에 아침해가 비쳤도다. 잡초 무성한 들판에 안개가 걷히니, 먼 곳 가까운 곳 가릴 것 없이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숲속에 맛좋은 술이 담긴 술통을 놓고 벗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 이곡은 어디인가? 화암의 늦봄 경치로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으로 보내노라. 사람들이 경치 좋은 이곳을 모르니, (꽃을 띄워 보내) 알게하여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 삼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인 취병에 녹음이 짙어졌도다. 푸른 숲 속에서 산새들은 높이락 낮추락 노래를 부르는 때에 키가 작고 가로퍼진 소나무가 맑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니 여름같지 않게 시원스럽기 그지없구나.​ 사곡은 어디인가? 소나무가 선 물가의 낭떠러지인 송애에 해가 진다. 깊은 물 한가운데에 비친 바위 그림자는 온갖 빛과 함께 잠겨있구나. 숲속의 샘물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오곡은 어디인가 으슥한 절벽같은 은병이 보기도 좋구나. 물가에 지어놓은 정사는 맑고 깨끗하기가 더할 나위 없구나. 이 중에서 글도 가르치고 연구하려니와 시를 짓고 읊으면서 풍류도 즐기리라.​ 육곡은 어디인가? 낚시질하기에 좋은 골짜기에 물이 많이 고여 있구나. 나와 고기와 어느 쪽이 더 즐기는가? 해가 저물거든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리라.​ 칠곡은 어디인가? 단풍으로 둘러싸인 바위에 가을빛이 좋구나. 맑은 서리가 엷게 내리니 단풍에 둘러싸인 바위가 비단처럼 아름답구나.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 집(속세)의 일을 잊어버리고 있도다.​ 팔곡은 어디인가? 악기를 연주하며 흐르는 시냇가에 달이 밝구나. 좋은 거문고로 몇 곡조를 연주했지만,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 듣고 즐기노라.​ 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돌인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혀 버렸구나. 놀러 다니는 사람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9-9)浮碧樓(부벽루)-李珥 箕城東畔浿江頭(기성동반패강두) 中有祋渺之飛樓(중유대묘지비루) 靑山一望何袞袞(청산일망하곤곤)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猩袍仙子此時過(성포선자차시과) 麟馬天孫何處遊(인마천손하처유) 玉簫吹澈彩霞盡(옥소취철채하진) 古國煙波人自愁(고국연파인자수) 기성의 동쪽 언덕 패강 어귀에 가물가물 높은 다락 솟아 있구나 푸른 산 바라보니 어찌 그리 곤곤한가 흰 구름 언제 봐도 한가로이 떠다닌다네 성포 입은 신선은 지금 지나가는데 기린 탄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나 옥퉁소 불어도 단장한 노을 없으니 고국의 연기 나부껴 절로 시름에 잠기노라. 10.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년(중종 37) ∼ 1609년(광해군 1) 경력 비안현감, 괴산군수, 고부군수, 군자감정 대표작 설중매죽도, 노매도, 수과초충도, 포도도 본관은 덕수(德水). 이름은 이위(李瑋) 또는 이후(李珝).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죽와(竹窩)·기와(寄窩). 이원수(李元秀)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동생으로,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비안현감과 괴산·고부군수를 거쳐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시(詩)·서(書)·화(畫)·금(琴)을 다 잘하여 4절(四絶)이라 불렸다. 그림은 초충(草蟲)·사군자·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어머니의 화풍을 따랐다. 아들 경절(景節)도 가법(家法)을 이어 서·화·금에 능하여 3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화훼초충(花卉草蟲)을 잘 그렸다고 한다. 묵매화(墨梅畫)는 주로 횡관식구도(橫貫式構圖)로 힘차게 묘사하였다. 유작으로는 「설중매죽도(雪中梅竹圖)」(개인 소장)· 「노매도(老梅圖)」·「수과초충도(水瓜草蟲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포도도(葡萄圖)」 등이 전하고 있다. 개인 문집으로 『옥산시고(玉山詩稿)』가 있으며, 초서 필적으로는 「옥산서병(玉山書屛)」이 전하고 있다. 10. 황기로(黃耆老, 1521년(중종16)∼1575년(선조8)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 또는 매학정(梅鶴亭). ‘초성(草聖)’이라 불릴 정도로 초서에 능하였던 조선 중기의 서예가이다. 황기로의 조부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황필(黃㻶), 부친은 빙고 별좌(氷庫別坐)를 지낸 황이옥(黃李沃), 모친은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현감을 지낸 정내필(鄭來弼)의 딸이다.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은 별좌(別坐)를 지냈다.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산(寶泉山) 위에 정자를 짓고 고산정(孤山亭) 또는 매학정梅鶴亭)이라 이름을 지어 그곳에서 필묵(筆墨)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조선시대의 명필. 필법이 뛰어났고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황기로의 몰년을 알려 주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남명 조식(曺植) 문하의 동문 박제현(朴齊賢)을 위해 1575년에 제문을 써 주었고, 권호문(權好文)이 1579년에 이우의 글씨를 보고 고인이 된 황기로의 필적과 닮았다고 언급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그의 몰년은 1575년에서 1579년 사이로 추정된다. 황기로는 청송 심씨 심흥원(沈興源)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일찍 작고한 듯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후취로 문화 유씨 유혼(柳混)의 딸을 맞아 1녀를 두었다. 그의 딸은 율곡 이이(李珥)의 아우이자 명서가인 옥산(玉山) 이우(李瑀)와 혼인하였다. 황기로의 유묵은 딸과 혼인 관계를 맺은 덕수 이씨(德水李氏) 옥산공파 종손댁에 전해지다가 2007년에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일괄 기증되었다. 황기로는 1534년(중종 29)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 황이옥이 남곤(南袞)·심정(沈貞)의 사주를 받아 신진 사림의 거두 조광조(趙光祖)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다 사판(士版)에서 삭제된 일로 인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조부 황필의 유지를 받들어 고향 선산(善山)에 위치한 고산(孤山) 언덕에 매학정(梅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글씨와 술로 일생을 보냈다. ‘고산’과 ‘매학정’이라는 아호는 중국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던 북송(北宋)의 은둔 시인 임포(林逋)의 처사적 삶을 동경한 데서 온 것이다. 황기로는 ‘초성’이라 불릴 정도로 초서에 능하였고, 특히 술과 관련된 일화가 많아 취흥을 빌려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종종 전해진다. 이는 당(唐)의 장욱(張旭)과 회소(懷素) 등 광초(狂草)로 불린 초서 명가들의 자유롭고 방일(放逸)한 태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실제 그의 글씨에 장욱·회소와 명대의 초서 명가 장필(張弼)의 서풍이 적극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들 간의 유사성과 영향 관계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회소의 글씨를 찬미한 이백(李白) 시를 1549년에 쓴 「초서가행(草書歌行)」이 석각본으로 간행되어 여러 곳에 전해지고 있고, 필적을 새긴 원석도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에 기증되어 있다. 이 밖에 『동국명필(東國名筆)』·『대동서법(大東書法)』 등의 법첩에도 그의 필적이 실려 있다. 그의 초서풍은 사위 이우를 포함하여 이산해(李山海), 이지정(李志定) 등에게 전해지며 조선 중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세속을 멀리하며 유유자적 살다 간 처사로서의 삶과 함께 당대 및 후대인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황기로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을 율곡 이이의 동생인 옥산 이우와 결혼시키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서인인 사위를 얻은 것입니다. 예전에 이문건의 일기가 발견되어 살펴봤는데, 이이와 이우의 아버지인 이원수와 황기로, 이문건 이 세 사람이 아주 친밀한 친구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황기로는 구미에, 이문건은 화암(괴산 인근)에 살면서 왔다 갔다 하며 충청 부근에서 만나 어울렸습니다. 옥산 이우 집안이 대대로 그의 글씨체인 옥산체를 쓰는데, 이것이 황기로 글씨와 유사합니다. 사위가 장인 글씨를 본받아 쓴 셈입니다. 고산 황기로의 글씨는 그의 고향 구미 금오산에 남아있는 그의 정자 고산정, 매학정 등에도 남아있습니다. 금오산은 황기로 집안의 땅이었지만 사위에게 물려주었는지 덕수 이씨 집안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언젠가 옥산 이우의 증손자 글씨를 보았는데, 이 글씨도 황기로의 글씨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황기로의 글씨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빛이 났던 것은 성호 이익의 집안으로 전해지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기로가 구미 사람이어서 영남의 남인들에게 영향을 준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성호 집안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청선 이지정, 이지정의 조카인 매산 이하진, 이하진의 아들인 옥동 이서와 성호 이익 네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 중에서 이지정이 황기로의 글씨를 거의 그대로 씁니다. 장필도 참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배달9216/개천5917/단기4352/서기2019/03/09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2/1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補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