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도 공녀가 있었다.1. 청주 한 씨 자매 이야기
공녀 차출은 원나라가 멸망한 후
잠시 없어진 듯했으나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즉위한 후 다시 시작되었다.
고려 시대 공녀가 주로 일반 백성을 상대로 이루어졌다면
조선 초기의 공녀는 양반의 딸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공녀로 차출된 후, 혹시라도 중국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된다면
조선에 있는 자신의 집에는 부와 명예를 주게 될지 모르지만
명으로 떠나는 어린 딸들의 마음은 그저 피하고 싶은 두려움 자체였을 것이다.
조선 왕실에서도 공녀 선발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여인들이 중풍 환자인 척을 하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거나 다리를 절뚝거리며
신체가 불편한 듯한 모습으로 공녀 차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행동이 거짓임이 탄로 날 경우
사헌부에서는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물어 그 아버지에게 벌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게 뽑은 공녀들일지라도 외모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명나라 사신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되면
조선 왕실은 또다시 곤욕을 치르곤 하였다.
조선시대 처음 공녀가 요구된 것은 태종 8년(1408) 4월이었다.
명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하자 조선에서는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 간택이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5명의 여인들이 선발되었으니 조선의 1차 공녀 차출이었다.
그런데 이후 특이하게도 자매가 공녀로 발탁되어
언니와 동생이 나란히 명나라 후궁이 된 예가 있다.
청주 한 씨 집안의 언니 규란 과 동생 계란이었다.
이들은 세조 때 한명회와 더불어 오른팔 역할을 했던 한확의 누이들이었다.
한규란은 명나라 태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 여비에 올랐으며
명나라 황후가 죽은 후에는 명 황실에서 황후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규란의 친동생인 계란은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의 후궁으로 소의에 봉해졌다.
두 명의 누이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면서
한확은 조선 왕실에서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한확의 딸은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세자가 요절한 후 궁에서 쫓겨나 잠시 불안한 생활을 하였으나
예종이 죽은 후 그녀의 둘째 아들, 자을 산군이 성종이 되면서
다시 화려하게 궁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 여인이 바로 소혜왕후 한 씨, 훗날 인수대비이다.
그러니까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된 계란과 인수대비는 고모와 조카 사이로
청주 한 씨 집안의 권세는 당시 조선과 명을 아우르고 있었다.
전기에 명나라에서는 모두 12차례에 걸쳐 조선의 처녀를 공녀로 요구하였다.
이 가운데 명나라 황제의 사망 등으로 5차례는 중지되고
실제로 공녀가 보내진 것은 7차례였다.
청주 한 씨 한영정의 큰딸이며 한확의 누이인 한규란이
명나라로 가게 된 것은 3차 공녀 요구가 있었던 태종 17년(1417) 8월의 일이었다.
이들이 명으로 향할 때 태종도 모화루에 나가 일행을 전송하였고,
공녀들이 떠날 때 바라보던 사람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한규란과 함께 3차 공녀로 뽑혀갔던 황 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명의 영락제가 크게 분노하게 된다.
황제인 자신에게 처녀가 아닌 여자를 공녀로 바쳤다며
조선 태종에게 그 책임 묻게 하였는데 이것을 막은 사람이 한규란이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명 황제가 왜 처녀가 아닌지 꾸짖으며 연유를 묻자 황 씨 처녀는
“형부 김덕장의 이웃에 있는 조례라는 관노와 간통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성을 내며 조선의 왕을 문책하려고 칙서까지 작성했는데
한규란 이 울면서 황제에게 애걸하기를
“황 씨는 개인 집에 있는 사사로운 사람인데
우리 임금님이 어떻게 그 자세한 내용까지 알겠습니까?”
라고 하며 태종에 대한 분노를 잠재웠다는 것이다.
황제가 감동하여 한 씨에게 대신 벌을 주라고 명하자,
한 씨는 황제 앞에서 황 씨의 뺨을 크게 때려 벌주고
황제의 분노를 대신하여 일을 마무리하였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당시 한 씨의 유모로 한규란과 함께 갔던 여인이
조선으로 돌아와 그간의 일을 아뢰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한 씨의 인품과 미모를 칭찬하며
조선에 칙사를 보낼 때마다 한 씨의 친정집으로 각종 선물을 보내곤 하였다.
한규란에 대한 황제의 사랑은 그녀의 오빠 한확을
황제의 사위로 삼아 곁에 두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한 씨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명나라로 간지 7년 만에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당시 명나라의 법은 황제를 모시던 궁녀들은 영락제와 함께 순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때 궁인 30여 명과 함께 아직 20대 초반의 어린 한규란도
영락제의 죽음과 함께 순장 당하였다.
당시 죽음을 면하고자 하는 많은 궁녀들의 애절하고 안타까운내용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영락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일시 중지되었던 공녀 차출은
명나라의 새 황제 선종이 즉위한 후 다시금 시작되었다.
세종 10년(1428) 10월 4일의 일이었다.
5차 조선 공녀의 차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은 다른 여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한규란의 동생인 한 씨 여인만을 고집하였다.
영락제의 후궁이었던 언니와 마찬가지로 동생도 뛰어난 미인임을 알고 있던
명나라 사신들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씨 여인을 데리고 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 여인이 선덕제의 후궁으로 뽑힌 공신 부인, 한계란 이었다.
언니의 삶을 잘 알고 있던 한계란은
공녀가 되어 명으로 가야 된다는 사실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어느 날 그녀가 병이 나서 오빠 한확이 약을 지어다 주자
“동생 한 명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만도 족할 것인데
남아있는 동생마저 팔려고 약을 주는가?”
라고 하면서 칼로 이불을 찢고 마련해 둔 혼숫감을 모두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계란의 명나라행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공녀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은
“언니 한 씨가 영락제의 궁녀가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인데, 이제 또 동생이 가는구나”
라며 눈물을 흘렸고 그녀를 산송장이라 하며 동정하였다.
명으로 간 한계란은 언니와 같이 산송장이 될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57년간 4명의 황제를 섬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74세까지 장수하였다.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생을 마쳐야 했던 기구한 여인들의 삶.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겪어야만 했던 어린 딸들의 삶.
조선시대 공녀가 아닐까 싶다.
2. 조선궁녀들의 한이 서린 자금성
자금성((紫禁城.자주색의 금지된 성)의
‘자(紫)’는 북쪽별자리인 자미원(紫微垣)에서 유래한 것으로
옛날 천제(天梯)가 자미원에 살고 있고, '자궁(紫宮)'은 하늘궁전을 이름이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라 칭했고,
‘금(禁)’은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라 누구도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
그 자금성에 돈 몇 푼주고 들어섰다.
모택동초상화가 걸린 오문(午門)을 통과하면 태화문이 있다. 오문은 황제전용이다.
태화문을 나서면 나무 한 그루 없이 엄청 넓은 돌바닥 저만치에
자금성경내 돌바닥엔 특별한 벽돌이 깔려있다.
누군가가 걸으면 경쾌한 발소리음향이 난다.
불순분자들의 침입을 차단하려는 방책이고
정원수 하나 없음도 암살자의 은신을 막기 위해서다.
한 장의 거대한 판석에 용 문양을 새긴 중앙어도(御道)는 지금도 출입금지다.
자금성은 명성조 영락제(永樂帝)가 수도를 남경에서 천도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처형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 피비린내 나는 살상 중에 궁녀와 환관 3천여 명을 살해한 참혹한 비극이 있다.
비극의 주역에 조선의 젊은 여인(궁녀)들과 환관들이 있었다.
나는 600여 년 전에 조선의 애먼 청춘들이 처형을 당해야 했던
드넓은 황궁 안을 서성대며 그 원혼들을 생각해봤다.
명나라태조 주원장의 후궁 중에 조선의 비빈들이 있었고
영락제는 그 조선인공비의 소생 이였다.
조선혈통을 지녀선지 영락제는 여차하면 조선국왕에게 공녀를 보내라고 재촉했다.
하명 받은 조선왕은 전국에 혼인금지령을 내려 미녀를 선발한다.
허나 어느 누가 딸을 명나라궁녀로 보내겠는가?
처녀들은 삭발하고, 얼굴에 흉터를 만들며 숨어버리자 국법으로 엄단했다.
1408년엔 지방관리들한테 명령을 내려 이쁜 처녀들을 색출하라도 닥달한다.
권비(18세)와 17세의 임씨(任氏)와 이씨(李氏), 여씨(呂氏16세 ),
최씨(崔氏14세)성을 가진 미모의 여인 5명을 강제선발 한다.
또한 그녀들을 따르는 12명의 시녀와
12명의 요리사도 함께 수천리 떨어진 북경으로 끌려갔다.
가족들과는 영원히 생이별하게 된 사람조공은 영락제6년의 일이다.
왕이 짜잔하여 나라가 약소국이 되면 부녀자는 늘 봉변의 대상이라.
이무렵 영락제황후 서씨가 사망하자 가장 총애를 받던 권씨(權氏)가 현비(賢妃) 가 된다.
그녀는 미모에 총명하였고, 가무에 능했는데
특히 옥소(玉簫.피리)를 잘 불어 영락제의 사랑을 독차지 했었다.
영락8년(1410년),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북방을 징벌하고 개선하는 도중에
동반한 권현비가 임성(臨城)에서 급사한다. 권비의 나이는 아마 22세였다.
영락제는 권비를 산동 봉현에 묻고 지방관아에 분묘를 지키라고 명 내렸다.
실의와 슬픔에 빠진 영락제!
황제를 꼬시려는 여인의 질투가 참혹한 살상극으로 번진다.
당시 궁중에는 여(呂)씨 성을 가진 두 명의 조선궁녀가 있었다.
두 여씨는 서로 반목하다가 여씨가 권현비가 마시는 차에 독약을 넣어 독살한 것이라고 고여가 무고한다.
하여 영락제는 여씨와 관련된 수백명의 궁녀와 환관을 죽여버렸다.
글고 영락18년(1420년)에는 아끼던 왕귀비까지 죽자
후궁을 잃은 슬픔에 빠진 영락제는 괴이한 소문에 울컥한다.
고여와 궁인 어씨(魚氏)가 어린 환관과 놀아난다는 소문에
성정 급한 영락제는 불같이 화를 냈다.
참살당할 게 두려운 고여와 어씨는 자진 목매어 자살한다.
역정이 난 영락제는 친히 고여의 시비들을 심문하다
어떤 궁녀로부터 그들이 황제를 모살하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게 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락제는 친히 궁녀들에게 혹형을 가해
주살당한 궁녀가 약 2800명이었다.
어떤 궁녀가 죽임 당하는 그 자리에서 영락제를 욕한다.
"네가 나이가 들어 양기가 쇠하여 궁녀가 환관과
잘 지내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말인가?"라고.
그 후 궁녀들의 질시와 암투가 심해지자
황제들은 수십 개의 침실을 만들어 오늘 어느 궁녀침실에 드는지 모르게 했단다.
뿐이랴, 63세의 영락제가 죽자
조선궁녀 2명과 환관들은 순장까지 당해야 했다,고 ‘이조실록’은 기술하고 있다.
지금 내가 자금성을 관광하면서도 말이 통하질 않고 모든 게 낯설어 어설프고 답답한데,
앳된 처녀들이 만리타국에 끌려와 불안과 슬픔으로
전전긍긍한 삶을 살아야 했던 정황이 어찌 상상이나 되겠나?
영락제 후에도 명과 청은 조선왕에게 인신조공을 명했고,
젊은 남녀는 강제선발 되어 자금성으로 끌려가 한 많은 일생을 살아야 했다.
자금성규모는 상상을 불허한다.
며칠간을 답사해도 부족할 테다.
허나 우리네 경복궁이나 창경궁을 답사하면 대충 감잡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궁궐이 자금성의 축소판쯤 될 터 여서다.
3. 현비 권씨 (영락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헌현비 권씨(恭獻賢妃 權氏,
1391년 10월 26일[1]~1410년 10월 24일)는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 주체(朱棣)의 후궁으로, 조선인 공녀(貢女) 출신이다.
사후 공헌(恭獻)의 시호를 받았다.
농민(農民) 출신인 권집중(權執中)의 딸이자 권영균(權永均)의 누이이다.
1408년(태종 8년, 영락 6년) 조선에 흠차대신으로 온
명나라 환관 황엄이 귀국을 앞두고
'조선에 잘생긴 처녀가 있거든 몇 명을 선택해 데려오라'고 했다는
영락제의 언급이 있었음을 귀뜸하니, 이에 태종이 즉시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 각도(各道)에서 노비(奴婢)가 없는 양반(兩班)과 서인(庶人)의 딸을
제외한 13세~25세의 양가(良家)의 처녀를 선발하여 궁에 데려오도록 했다.
그리고 간선된 후보들에게 명나라의 복색과 화장을 시켜 황엄이 직접 뽑도록 했는데
이 중 1등급으로 뽑힌 5인 중에서도 일 등으로 뽑힌 여인이 권씨였다.
이 사건에 앞서 태종의 세자(양녕대군)와 명나라 황녀의 국혼이 오갔는데
이를 꺼린 태종이 세자가 이미 장가를 가버렸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황엄이 중간에 무마해주어 문제가 해결된 바 있어 보은을 한 것이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공녀를 진헌한 것은 이때가 최초로,
이는 이후 관례로 정착되어 조선 여성사의 수난으로 꼽힌다.
진헌녀로 뽑힌 권씨의 아버지 권집중에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의 벼슬이 제수되었으며,
권씨의 오빠 권영균은 중군사정(中軍司正)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12일, 황엄과 함께 명나라로 떠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영락제의 후궁전에 머물다가,
1409년 2월 9일 조선의 진헌녀를 보기 위해 북경으로 돌아온 영락제와 처음 조우했다.
영락제는 권씨의 뛰어난 미모에 반해 그녀를 현비(顯妃)를 봉하고,
그 오라비 권영균(權永均)을 3품 광록시경(光祿寺卿)에 제수하여
채단(綵段) 60필, 채견(綵絹) 3백 필, 금(錦) 10필, 황금 2정(錠), 백은(白銀) 10정,
말 5필, 안장[鞍] 2면(面), 옷 2벌[襲], 초(鈔) 3천 장을 하사하였다.
명사(明史)》 기록에 따르면,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권씨의 아름다움에 반한 영락제가
그녀에게 어떤 장기가 있느냐고 물었고, 권씨가 옥소를 꺼내 불자
아름다운 곡조가 울려 퍼져 영락제가 매우 기뻐했으며
곧 권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한 달 만에 그녀를 정비(正妃) 책봉하고
그녀와 동행해 온 권영균에게도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전한다.
영락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1407년에 사망한 인효문황후를 대리하여 명 황실의 내명부를 관장했던 권씨는
1410년 10월 24일에, 북방 정벌을 나선 영락제를 동행하였다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던 길에 중병을 얻어
산동 임성(臨城) 제남로(濟南路)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죽음에 크게 비통해 한 영락제는 친히 그녀의 제사를 지내주기도 하였으며
1414년에는 권씨의 죽음이 권씨를 질투한
다른 조선의 공녀 여미인(呂美人)이 권씨와 함께
영락제의 북방 정벌을 동행했던 길에 미리 내관을 통해
은장이에게 구했던 비상을 권씨의 호도차에 넣었기 때문이라며
은장이와 내관 6인을 모두 죽이고
여씨에게도 낙형(烙刑: 단근질)을 가해 죽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여씨 성을 가진 명나라 궁인이 조선 출신 여미인에게
동성애를 구애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원한을 품고 무고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를 어여(魚呂)의 난(亂)이라고도 한다.
4.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조선여인 현인비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오라”
태종8년(1408) 4월 16일 한양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 황엄은 황제의 명을 태종에게 전한다.
건국 초 늘 갈등과 불화를 빚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겨우 정상화시켜 놓으니
여자를 내놓으라? 그러나 태종은 명 황제 영락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여차하면 조선 따위는 단숨에 정복해 버릴
그런 성품의 소유자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신생국 조선은 이렇게 해서 진헌녀(進獻女)들을 명나라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태종이 명 황제의 명을 얼마나 엄중하게 생각했는지는
바로 그날 처녀 간택을 담당하게 될 임시기구인 진헌색(進獻色)이 발족된 데서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처녀가 선발 대상이었다.
노비나 서얼 출신은 제외되었다. 물론 온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두 달여의 탐문 끝에 6월 3일 전국에서 뽑힌 처녀들이 한양에 집결했다.
경상도에서 6인, 전라도에서 4인, 충청도에서 3인, 개성에서 12인,
경기도에서 4인, 황해도에서 1인 등 모두 30명이었다.
의정부에서는 일단 이 중에서 7명을 추려냈다.
처녀 간택을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는 의정부에서 맡은 것이다.
이들 중에서 권집중의 딸이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10월 11일 경복궁에서 태종과 황엄이 직접 고른 5인의 여성은
공조판서를 지낸 권집중의 딸, 판서를 지낸 임첨년의 딸, 영주지사를 지낸 이문명의 딸,
사직(司直) 여귀진의 딸, 수원기관(記官) 최득비의 딸 등이었다.
아마도 미모의 순서도 이대로였던 것 같은데
그 평점은 황엄이 독단적으로 결정했던 것 같다.
이날 태종은 간택을 끝낸 후 집무실로 돌아와 승정원 대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2등을 한 임씨는 관음보살의 상과 같아서 애교가 없고
여씨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으니 그게 무슨 인물이냐?”
황엄의 사람보는 눈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도 1등을 한 권집중의 딸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한 달 후인 11월 12일 황엄은 진헌녀 5명을 데리고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조정에서는 예문관 대제학 이문화를 진헌사(進獻使)로 임명해 황엄과 함께 보냈다.
그런데 이문화의 진헌의 명목은 처녀 진헌이 아니고
명 황제가 요구한 두꺼운 순백지 6000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강한 태종으로서는 향후 역사에
"조선 최초로 진헌녀를 명에 보낸 국왕"으로 남게 될 것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5명의 처녀 중에는 이문화의 조카도 포함돼 있었다. 이문화는 이문명의 형이었다.
그들이 떠나던 날 “그 부모 친척의 울음소리가
길에 끝없이 이어졌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이때 권집중의 딸 18세, 임첨년의 딸 17세, 이문명의 딸 17세,
여귀진의 딸 16세, 최득비의 딸 14세였다.
이때 명나라로 간 처녀 일행은 이듬해인
1409년 2월 9일 베이징(北京)으로 거동한 황제와 직접 알현하게 된다.
당시 명나라의 수도는 아직 난징(南京)이었다.
그 자리에서 권씨에게 마음이 빼앗긴 영락제는
권씨를 현인비(顯仁妃)에 봉하고 권씨를 수행했던 오빠 권영균은 광록시 경에 임명하였다.
3품의 벼슬이었다. 권영균은 훗날 광록시 대경으로 승진한다.
이때부터 현인비 권씨와 광록시 경 권영균이 누리게 되는 권력은
조선의 국왕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오히려 조선 국왕도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할 지경이었다.
현인비에 대한 영락제의 총애는 남달랐다.
현인비 또한 고려 말 원나라 황후가 되었던 공녀 출신 기황후와 달리
현명한 처신으로 크게 신망을 얻었다.
반면 그 오빠 권영균은 조선에서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게되자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1424년 세종 6년 권영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갑자기 귀하고 부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권력자와 교제하여
자못 교만하였으며 주색(酒色)을 좋아하여 일찍 죽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현인비가 누린 권세는 너무나도 짧았다.
현인비에 봉해진 지 불과 2년도 채 안된
1410년 10월 24일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권영균이 이듬해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조선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병사(病死)가 아니라 독살(毒殺)이었다.
황후에 준하는 예로 현인비를 대했던 영락제는
조사에 착수했고 황엄을 비롯한 측근인사들은
여씨가 현인비를 시기 질투하여 독살한 것처럼 사건을 조작했다.
여씨란 태종이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으니 그게 무슨 인물이야”고 했던
바로 그 여귀진의 딸이다.
그 바람에 태종 14년 9월 19일 명나라에서 돌아온
통사 원민생이 그 같은 사실을 보고하자마자
태종은 여씨의 어머니와 친족들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기도 했다.
여씨는 명나라 조정의 한 달여에 걸친 단근질형(烙刑)을 당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어 임첨년의 딸도 불려가 목을 매 자살했고
이문명의 딸은 모진 국문 끝에 참형을 당했다.
결국 최득비의 딸을 제외한 4인의 진헌녀는 모두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다.
당시 현인비 독살사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만 3000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조선에서 간 환관이나 몸종들도 대거 포함돼 있었다.
태종 10년 10월 2차 진헌녀로 뽑혀갔던 정윤후의 딸도 임첨년의 딸처럼 목매 자살했고
3차 진헌녀 둘 중 하나인 황하신의 딸도 참형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국인 궁녀 어씨와 여씨가 황엄과 손잡고 벌인
무고사건이라 하여 ‘어여의 난’이라고 한다.
이때의 여씨는 조선인 여씨가 아니라 중국 상인의 딸 여씨이다.
3차 진헌녀 두 사람 중 또 한 명은 한영정의 딸이자 한확의 누이다.
당시 한영정의 딸도 죽을 뻔했으나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10여년 후인 1424년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자
30여명의 궁인과 함께 순장을 당했다. 역시 비명횡사를 했다.
그러고 보면 3차에 걸쳐 모두 8명이 진헌녀로 가서
최씨의 딸을 제외한 7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세종이라고 해서 진헌녀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세종 10년 이번에는 광록시 경 한확의 막내 여동생이 진헌녀로 뽑혀 갔다.
권영균과 달리 늘 조심하고 처신이 뛰어났던 한확은
세종 세조대를 거치며 좌의정에까지 오르고 그의 딸은 세조의 큰며느리가 된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바로 그다.
이로써 한확은 명나라 황실과 조선 왕실을 동시에 사돈집안으로 두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
5. 3대 영락제(永樂帝)
명 성조 영락제(明成祖 永樂帝,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는
명 왕조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1424년)이다. 그의 휘는 체(棣)이고,
명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영락제는 대외 정벌과 해외 무역로 확장 등의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쳐
주변국을 굴복시켜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였다.
이에 베트남이 명에 정복당하여 한때 중국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홍무제 시기에는 연왕에 봉(封)해졌다.
홍무제 사후 조카 건문제의 제위계승 및 제후 숙청 정책에 반발하여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난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후 베이징으로의 수도 천도를 추진하였다.
그는 운하인 회통하를 완공시켜 남북 물자 교류의 교두보를 확보한 후
1421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영락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건문제가 영락제의 정변에 의해 축출됐을 때 건문제의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하여
그의 가족, 친구, 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847명이 몰살당했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을 비롯한 십족과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하는 인사들을 모두숙청하고,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나 첩,기녀로 보냈다.
이는 '십족을 멸한다' 또는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어원이 되기도했다.
영락제는 중국 황제로는 역사상 최초로 다섯 번에 걸친
막북 친정을 통해 몽골 족 등과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로인해 명은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여진족은 위소에 편입시켰으며 누르칸도사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패권 확립,
베트남의 정벌, 티베트의 회유와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 준비,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문물 교류 등의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내정에서는 홍무제의 방침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의 치세로 명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유년 시절
영락제 주체는 1360년 홍무제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 주원장(朱元璋)이 초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주체의 아버지 주원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읜뒤
절에 걸승이 되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홍건적의 지도급 인사가 되어 있었다.
당시 주원장에게는 마씨 부인(훗날의 마황후) 외에도 고려 출신 첩이 있었는데
이때문에 그의 생모가 고려 여인 또는 몽골계 여인이라는 설도 전한다.
1366년 아버지 주원장이 명나라를 창건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 뒤 28년 후에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한다.
홍무 3년 (1370년), 10세인 그를 북평왕(후일 연왕(燕王)으로 개봉)에 봉해지지만
실제로 북평으로 향해 것은 홍무 13년인 (1380년), 21세 때이다.
청소년기 때에는 이른 아침부터 학자를 초청하였고,
한 번 읽은 책 내용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명나라 초기의 개국공신의 한사람인
장군 위국공(魏國公) 서달(徐達)의 딸 서씨(서 황후)와 혼인하였다.
부인 서씨는 영락제가 제위에 올라 황후에 책봉되었지만
그가 황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1407년에 사망한다.
장인인 서달은 홍무제의 황권강화책에 의해 그가 보낸 거위(독약)를 먹고 죽게 된다.
연왕 책봉
그 후 주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10년 동안 명 제국은 안정을 얻고
정교한 행정기구를 마련하였으며 많은 분야에서 강력하게 개편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질서를 확립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대신들의 정사를 보는 것에 유난히 관심을 가졌고,
아버지 홍무제는 그의 기질을 알아보았다.
주체는 아버지의 강인하고 정력적이며 변덕스러운 성격을 닮아
범상하지 않은 인물로 성장했고,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의 타고난 지도자적 자질은 형제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1368년 명나라가 중국을 회복하자 정식으로 연왕(燕王)에 책봉되고
성년이 되자 수도인 남경을 떠나 북평에 주둔하며 북방의 군사들을 총괄하고
중국 대륙에서 쫓겨난 북원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1380년 20세가 되어 베이징을 근거지로 하여
국경지역에서 타타르 등과 교전하여 승리하였고,
1393년 국경지대 수비군 지휘관이 되어 북부 국경을 지키는 수비군을 맡았다.
1392년에 황태자가죽자 홍무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으려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홍무제는 반 년 동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전통에 따라
죽은 황태자의 아들 주윤문(朱允炆)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때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지 못한 것을 홍무제는 많이 아쉬워했다 한다.
당시 황태손인 윤문은 만 15세의 소년이었다.
1395년과 1398년, 부왕이 죽기 전 두 형이 각각 차례로 죽은 뒤
연왕은 점점 더 거만하고 도도해졌다고 한다.
정난의 변
1398년 홍무제가 죽었다. 뒤이어 즉위한 건문제는 자신의 숙부들을 견제하고자 한다.
건문제의 할아버지인 홍무제 연간에 황실을 보호할 울타리로써
홍무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변경의 왕으로 봉하였다.
이러한 변경의 군왕세력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건문제에게 큰 부담이 되었으며,
따라서 건문제는 황제로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서 이른바 '삭번 정책'을 펼쳤다.
이에 당시 홍무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이며 세력이 강대한
연왕 주체가 중심이 되어 1399년 7월 거병하니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1402년 6월 주체는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가 바로 명조(明朝)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永樂帝)이다.
영락제는 즉위 이후 얼마간 난징에서 머물다가
1421년 자신의 정치 기반인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중국의 정치 중심지는 베이징이 되었다.
영락제의 베이징 천도는 그가 북방의 군사력을 온전히 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강남지방의 경제력을 화북지방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중국의 경제적 통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방에서 건국된 명 왕조가 북방을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명실상부한 통일 정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치세 기간
즉위 초반
1403년 영락제는 환관들과 장수들을 시켜서 3개의 대함대를 편성, 동남아시아로 파견한다.
이 함대는 자바 섬, 보르네오 섬, 필리핀, 베트남, 인도 남부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 파견되어 그의 즉위를 알리게 했다.
즉위 초기 그는 주변 대외국으로부터 패자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지역의 군주들한테도 인정을 받고 싶어하였다.
그의 위세에 눌린 말라카, 브루나이를 비롯한 자바, 보르네오, 필리핀 등의
부족국가와 족장들은 그가 재위에 있는 동안 정기적으로 중국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이러한 사절 파견이 신통치 않으면 그는 즉시 해당국에 경고와 통첩을 보내기도 했고,
그의 정복전쟁이 실제감행되고 있었으므로 동남아군주들은 그의 위압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영락제는 티베트와 네팔에도 환관과 사절로 파견하여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거듭 요구하였다.
그 뒤 네팔 등에서도 수시로 사신과 조공이 오게 된다.
이어 중앙 아시아를 지나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의 투르키스탄까지 사절과 관료를 파견하여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또한 일본에도 사절을 파견하여 종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실권자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쓰시마 섬 등의 왜구를 잡아가다 난징으로 보내기도 했다.
아시카가가 있을 동안 일본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안가를 노략, 약탈하던
왜구들의 송환 명령에 적극 호응하여 이들을 중국 조정에 보내어
벌을 받게 할 만큼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그러나 아시카가의 후임자들은 중국의 종주권과 조공을 거절했고
그의 사후 세력이 약화된 명나라는 원나라 때의 현해탄 카미카제 사건 등을 언급하며
일본원정을 반대, 일본원정을 포기하게 된다.
영락제는 1410년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 원정하였고
이후 1424년 진중에서 병사할 때까지 5차례의 친정(親征)을 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티베트와 필리핀, 수마트라, 인도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변경의 소수민족을 억제할 목적으로 구이저우 포정사사(貴州布政使司)를 설치하여
변방 소수민족의 움직임을 통제하였다.
정벌 사업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여 홍무제의 신중책을 바꿔,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다.
북쪽으로 후퇴한 원나라의 잔당(북원,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타타르라고 부른다)은
1388년 토곤 테무르의 왕통이 단절되었으나, 영락제는 원정을 감행해 이들을 제압했다.
만주에는 여진족을 복속시켜 위소제에 조직해 넣는 데 성공했다.
남쪽은 베트남의 진조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정복하였다.
거기에 해외의 동남아시아, 인도양까지 위신을 넓히기 위해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를 파견하여 일부가 메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한
대원정의 결과, 다수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맺었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다섯 번에 걸쳐 몽골 족과 교전하여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그가 국외 정벌과 원정을 위해 출병할 때면
황태자인 홍희제가 부황을 대신해 섭정을 하였다.
홍희제는 황태자 시절에 아버지가 오랫동안 수도를 비울 때마다 섭정으로
유능하게 나라를 다스렸고 이미 그가 병사하기 전에 실력을 인정받아
후계자의 지위를 든든히 굳혔다.
아들의재능을 본그는 아들에게
섭정정권을 맡김으로써 안전한 후계체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환관 정화(鄭和)에게 명하여 대함대(大艦隊)를 인솔하게 하여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 패권 확립 및 서구와의 신 교역로를 개척하였다.
대량의 연좌제
영락제는 즉위 직후 제태와 황자징 등 건문제의 측근 세력을 처형하였다.
그의 즉위 직후, 당시 즉위 조서를 쓰도록 명을 받은
방효유는 붓을 집어던지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던 한편, 건문제의 측근이자 당대의 대문장가인 방효유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오히려 비난하는 글을 쓰자 투옥,
고문한 뒤 회유하였으나 끝내 영락제의 찬양을 거부하였다.
영락제는 그의 십족(구족에다 방효유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
방효유의 문집을 애독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제자 추가)을 차례로 처형하고,
집안 여성들은 노비와 첩으로 분배했으며 제일 마지막에 방효유를 처형하였다.
방효유의 처와 자녀들은 자신의 집에서 음독자살하여 화를 면하였다.
방효유가 극형을 당하면서 그의 9족에다 친구·제자 등 847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방효유 등을 처형하게 된다면 나라에 충신이 사라질 것이라는 일부의 경고에도
그는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비바람에 잊혀지겠지만,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 기록될 것'이라 했다.
방효유의 일족 구족에 그 지인들을 묶어 십족이라 하면서 십족을 처형했는데,
여기서 '십족을 멸한다'는 고사가 나왔다.
또한 이를 가리켜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베트남 정벌과 실패
1400년 안남 진씨(陳氏) 왕조의 후계자인
나이 어린 트란이 폐위당하고 새로운 왕조인 찬 왕조가 선포되었다.
영락제가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진씨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망명자들은
그에게 더욱 열심히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하며,
안남에 개입하여 합법적 통치를 회복시켜 달라고 영락제를 졸랐다.
그는 처음에 형식적으로 응답하여 되돌려보내던 중
1406년 안남에 파견된 명나라의 사절단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락제는 사신 살해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그해 수마트라까지
원정하여 교지 포정사사(文趾布政使司)를 설치하고 역시 직할지배하에 넣었다.
그가 베트남에 보낸 소규모의 명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안남을 정복하여 평정, 함락시켰다.
그러나 진씨 왕조의 후계자 가운데 왕위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1407년 영락제는 속국이었던 안남을 중국의 일개 성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현지에서는 계속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고,
저항이 일어날 때마다 곧 분쇄, 토벌되었지만 항명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그의 치세 말기부터 베트남의 저항운동은 계속 심해졌다.
1418년부터는 명의 관헌에 대한 유격전이 일어났는데
명나라 군대가 패배함으로써 안남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생애 후반의 영락제도 1410년대 후반에는
이미 남방지역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아들인 홍희제의 짧은 치세기간 동안에 겨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그의 사후 1428년 손자 선덕제는 베트남에 대한 식민통치를 포기하게 된다.
정화의 원정 후원
1403년 환관들이 이끄는 3개 함대를 서역 지방에 파견하였으며
1405년부터는 환관 정화(鄭和)의 원정을 후원하였다.
정화는 1405년부터 33년까지 함대를 이끌고 7차례나 항해하여
페르시아 만, 홍해, 카스피해와 비잔틴,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40여개 국가를 방문하였다.
정화는 이들 함대들을 통해 방문한 각국의 정세와 사정을 파악하여
영락제에게 보고하는 한편 방문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 교역로를 확보하려 노력하였다.
정화의 교역로 개척은 이후 서구의 문물이 명나라로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영락제 사후에도 1433년까지 정화의 원정은 계속되었다.
티무르 제국과의 관계
그가 제위에 올랐을 무렵 티베트 넘어 서쪽에서는
투르크-몽골계의 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칭기즈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인도북부와 시리아를 공략했고 1404년부터는 동방 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티베트 또는 중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영락제는 이미 이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으므로
즉위 직후부터 토번에 대한 우호정책을 펼치는 한편
서쪽에 병력을 비밀리에 주둔시키고
서쪽을 지키는 명나라의 장군들에게 분쟁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1405년 티무르가 갑자기 죽자 동방 원정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서변의 방비를 계속 강화하는 한편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의 지도자들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중앙 아시아와의 교역로를 계속 열어놓았다.
황후의 사망과 청혼 거절
1407년 정비(正妃) 서황후가 죽자 인효(仁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인효황후(仁孝皇后)의 여동생이며 명나라의 개국공신인
위국공 서달(徐達)의 셋째 딸 서묘금(徐妙錦)에게 청혼하였다.
처제인 서묘금은 재주와 용모가 친언니이자
영락제의 정비인 인효황후보다 더 뛰어났다고 한다.
정비의 모습을 닮은데다가 그녀의 뛰어난 용모와 재주를 본 영락제는
1407년 그해에 새로운 황후의 간택령을 내렸다가 취소하고,
바로 서묘금을 불러들여 청혼하였다.
서묘금은 학식도 뛰어나고 역사서와 고전에 능했다 한다.
그러나 영락제를 멸시하던 서묘금은 영락제의 청혼을 여러번 사양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신을 보내 영락제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이 서신에서 자신은 양가집 규수로 태어났지만 욕심도 없고
부귀영화도 꿈꾸지 않으며 오직 불교에 귀의하고 싶다는 것과
열심히 불공을 드려 황제의 앞날을 축원하겠다는 것과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했다.
세상을 떠나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은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묘금의 장문으로 된 청혼거부 서신을 받자 결국 그는 결혼을 포기한다.
이후 그는 새 황후를 맞이하지 않고 여생을 보낸다.
여진족 공략
또한 동북지방에 성을 쌓고 여진족을 공략하는 한편
여진족을 통제하는 통제기관의 설치를 추진한다.
1403년 만주의 여진족을 통할하기 위하여 백두산 북쪽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했는데,
건주위의 설치장소는 건주 지린 성 부근의
휘발천(輝發川) 상류에 있는 북산성자(北山城子)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부락은 다양했고,
1411년에는 헤이룽강(黑龍江) 하류에 누르간 도지휘사사(奴兒干都指揮使司)를 두었다.
건주위·우자위(兀者衛)·누르간위(奴兒干衛)를 일괄 통제하기 위하여
영락제는 1411년 태감(太監) 이시하(赤失哈) 등에게 명하여
군병 약 1,000을 인솔하고 25척의 선박으로
쑹화 강(松花江)·헤이룽강이 만나는 하류지점에
행정관청인 도사(都司)를 설치하여 3개의 여진 부락을 감시, 통제하였다.
이어 토착원주민 교화를 위하여 영녕사(永寧寺)를 세우고
2년 교대로 군병 200∼300명을 파견, 주둔하였는데
영락제 말기에는 그 세력이 사할린의 아이누 주거지대까지 미쳤다.
그러나 간도지휘사는 그의 사후 선덕제 때 카이위안(開原)으로 후퇴한 다음으로는
국력이 쇠퇴해지면서 관리가 허술해졌고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다만 그가 만든 건주위 등은 여진 부족의 토착 부족장이
위의 대표노릇을 수행하여 서서히 독자세력화 하게 된다.
생애 후반
베이징 천도
그는 즉위 초부터 난징을 떠나 베이징으로 수도를 이전하려 했다.
베이징은 북평왕에 책봉될 때부터 이미 영락제의 정치적, 세력 기반이었고,
베이징에서는 북부지방의 수비대를 효율적으로 감독할 수 있었다.
1407년에 영락제는 천도를 정식으로 지시한 후
1409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부에서 보냈다.
그러나 수도이전을 반대하는 유학자들과
난징이 생활의 주 터전화된 환경은 쉽게 수도를 옮기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수도 이전계획은 무려 14년만에야 성사된다.
한편으로 문화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져
《영락대전(永樂大典)》 편찬을 주관, 추진하였고,
또 《사서대전(四書大典)》·《오경대전(五經大全)》·《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편찬케 하여 과거(科擧)의 수험참고서(受驗參考書)로 하였다.
1417년에 베이징을 재건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 뒤
그는 직접 베이징의 황궁 건립 현장을 시찰하였으며,
한 번도 난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7년부터 짓기 시작한 베이징의 새 궁전은 1420년에 완공되고,
1421년 1월 1일 그는 베이징을 명나라의 공식 수도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베이징은 명나라의 도읍지가 되었다.
당새아의 반란
그의 치세 후반에는 혹독한 징발과 연이은 기근,
흉년과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영락제는 이를 모두 강경진압하였다.
그 중 당세아의 난은 그의 치세말년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1420년(영락 18년) 2월 청주 포대현(蒲臺縣) 출신
당새아(唐賽兒)라는 여성이 당시 중국 각지 농민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백련교(白蓮敎)라는 종교단체를 근간으로 하여 청주에서 반란을 선언했다.
명나라의 평민 농부인 임삼(林三)의 아내였던 당새아는
어릴 때부터 불경(佛經)을 외웠는데 나중에는 스스로를 불모(佛母)라고 자칭하였고
백련교도가 되었는데 그의 설법에 많은 사람들이 설복하였다.
1420년에는 이들과 백련교도들을 기반으로 1419년 겨울부터 익도(益都)를 점령,
영락제의 실정을 비판하고 그를 폭군이라 규탄했다.
당새아가 이끄는 반란군은 난징과 짱수 성, 산둥 성 주변 점령하고
산둥 지방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쳤다.
영락제는 즉시 진압명령을 내렸으나 관군들은 번번이 패전,
부상당하거나 사상자들만 내던 중 그해 겨우 반란을 가라앉혔다.
나중에 당새아는 체포되어 목과 손발에 형구를 씌우고 굵은 철사로 묶어 놓았는데,
매복한 당새아의 잔당이 그녀를 탈옥시켰다.
이에 시중에는 당새아가 요술(妖術)을 부려
모두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는 전설이 나오게 되었다.
화가 난 영락제는 "삭발하고 중이 되었거나 여도사(女道士) 무리에
당새아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산둥과 난징, 베이징의 비구니들과
출가한 부녀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조칙을 내렸다.
명나라 각지에서 수 만명의 비구니 여승과 여도사들이 잡혀왔으나
결국 당새아는 잡지 못했다.
이는 그의 만년 치세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회자화되어 민담과 전설의 소재가 되었다.
후일 청나라 때의 백련교도의 난은 당새아의 난과 홍건적의 난을 참고하였으며,
청나라 때의 작가 여능(呂能)은 당새아의 반란을 소재로 하여
소설 '여선외사'(女仙外史)를 쓰기도 했다.
당새아의 난은 조선에도 알려져 인조실록 등에도 고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최후
그는 정화 등의 항해사를 서부에 파견하여 서역 등을 탐험하게 하였고,
이후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 새로운 교역로(해상 교역)을 개척하게 한다.
《영락 대전》을 편찬하게 하는 등 문화에 대한 관심도 컸다.
몽골족과 교전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고,
동아프리카에 자신의 심복인 정화를 보내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문화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명나라 학문을 종합한 《영락대전》(永樂大典),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을 편찬하였다.
1424년 여름 영락제는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과로로 병에 걸렸으나 의관들 조차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병세는 악화되었고 그의 일행은 퇴각하였으나
베이징으로 들어오기 직전인 8월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맏아들인 태자 주고치(朱高熾)가 그 뒤를 이어 홍희제(洪熙帝)가 되었는데,
이미 부황의 출정 중 섭정으로서 정사를 돌본 주고치는
무난히 후계자로 황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영락제의 나이 향년 64세였다.
사후
그가 죽자 30여 명의 궁인을 함께 순장하였다.
이 중 2명이 조선인 출신 공녀였고
그 중 1명은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 한씨로
지순창군사 한영정(韓永矴)의 딸이자
조선에서 좌의정을 지낸 한확의 누이였고 소혜왕후의 고모였다.
사후 영락제는 국가의 기틀을 잡은 황제
또는 두 번째 황제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묘호인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러나 1500년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은
그에게 태종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은
두 번째 황제인 건문제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부당한 행위라는 여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의논이 계속되면서 1538년 영락제의 묘호는 태종에서 성조(成祖)로 바뀌게 된다.
시호, 묘호
사후에 묘호는 태종(太宗)이고,
시호는 체천홍도고명광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라고 추존을 하였으나,
훗날 가정제 때 묘호를 성조(成祖)로,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로 재추존을 하였다.
가계
조부모와 부모
조부 : 추존황제 인조 순황제(仁祖 淳皇帝) 주세진(朱世珍)
조모 : 추존황후 순황후(淳皇后) 진씨(陳氏)
부친 : 태조 홍무고황제(太祖 洪武高皇帝) 주원장(朱元璋)
모친 : 효자고황후 마씨(孝慈高皇后 馬氏)
황후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
후궁
귀비(貴妃)소헌귀비 왕씨(昭獻貴妃 王氏, ? ~ 1420년)
소의귀비 장씨(昭懿貴妃 張氏)
현비(賢妃)공헌현비권씨(恭獻賢妃 權氏, 1391년~1410년)-조선의 공녀, 또는 현인비로 칭함.
충경소순현비 유씨(忠敬昭順賢妃 喩氏, ? ~ 1421년)
공화영순현비 왕씨(恭和榮順賢妃 王氏, )
소숙정혜현비 왕씨(昭肅靖惠賢妃 王氏)
혜비(惠妃)강정장화혜비 최씨(康靖莊和惠妃 崔氏, 1395년 ~ 1424년) - 조선의 공녀
강목의공혜비 오씨(康穆懿恭惠妃 吳氏,)
안순혜비 용씨(安順惠妃 龍氏)
여비(麗妃)공순영목여비 진씨(恭順榮穆麗妃 陳氏)
강혜장숙여비 한씨(康惠莊淑麗妃 韓氏, ? ~ 1424년) - 조선의 공녀로 한확(韓確)의 누이다.
순비(順妃)소혜공의순비 왕씨(昭惠恭懿順妃 王氏)
혜목소경순비 전씨(惠穆昭敬順妃 錢氏)
강의순비 이씨(康懿順妃 李氏)
혜목순비 곽씨(惠穆順妃 郭氏)
정정순비 장씨(貞靜順妃 張氏)
순비 임씨(順妃 任氏, 1392년 ~ 1421년) - 조선의 공녀
비(妃)단정공혜숙비 양씨(端靜恭惠淑妃 楊氏)
소순덕비 유씨(昭順德妃 劉氏)
정비(鄭妃) - 조선의 공녀
송비(宋妃) - 조선의 공녀
황비(黃妃) - 조선의 공녀
여비(呂妃) - 여첩여에게 현인비 살해 혐의를 무고함
어비(魚妃) - 여첩여에게 현인비 살해 혐의를 무고함
기타 후궁소의 이씨(昭儀 李氏, 1392년 ~ 1421년) - 조선의 공녀
첩여 여씨(婕妤 呂氏, 1393년 ~ 1413년) - 조선의 공녀
공영미인 왕씨(恭榮美人 王氏)
경혜미인 노씨(景惠美人 盧氏)
장혜미인(莊惠美人)
황자
1.황태자 주고치(朱高熾) - 인효문황후 소생. 제4대 황제 인종 홍희소황제(仁宗 洪熙昭皇帝).
2.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 1380년 ~ 1426년) - 인효문황후 소생.
영락제 사후에 반란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폐서인됨.
3.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 1383년 ~ 1431년) - 인효문황후 소생.
4.주고희(朱高爔, 1392년) - 강목의공혜비 소생. 요절함.
황녀
1.영안공주(永安公主) 주옥영(朱玉英, 1377년 ~ 1417년) - 인효문황후 소생.
2.영평공주(永平公主, 1379년 ~ 1444년) - 인효문황후 소생.
3.안성공주(安成公主, 1384년 ~ 1443년) - 인효문황후 소생.
4.함녕공주(咸寧公主, 1385년 ~ 1440년) - 인효문황후 소생.
5.상녕공주(常寧公主, 1387년 ~ 1408년)
배달9214/개천5914/단기4350/서기2017/12/09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