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3. 신사임당과 이매창, 이우, 황기로의 예술세계(The Future is Beautiful / Daniel Kobialka)
이름없는풀뿌리2019. 3. 20. 15:29
신사임당과 이매창, 이우, 황기로의 예술세계1) 신사임당, 7남매를 키우며 그림과 글씨까지
[다시 찾는 박물관과 미술관 16] 강릉 율곡기념관
19.02.26 08:31l최종 업데이트 19.02.26 08:31l
이상기(skrie)
▲ 오죽헌의 이이 동상
오죽헌에서 율곡 가문의 역사를 알게 되다
오죽헌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집이다.
그것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결혼 후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쓴 행장에 보면 율곡은 1536년 12월 26일 관동(關東))
임영(臨瀛)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났다. 임영은 강릉을 말하고,
북평촌은 현재 오죽헌 주변을 말한다.
율곡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서 세 살 때 이미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 신부인(申夫人)의 꿈에, 용(龍)이 아이를 감싸
품 안에 넣어 주는 것을 보았으므로, 어렸을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했다.
나면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뛰어나서 말을 배우면서 바로 글을 알았다.
세 살 때 외할머니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 같으냐?’ 하고 물어보자,
선생은 곧 고시(古詩)를 들어 대답했다. ‘석류 껍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石榴皮裏醉紅珠)이다.’ 이에 사람들은 기특하게 여겼다.”
▲ 오죽헌
율곡에 태어난 방은 오죽헌의 바깥채다.
그것은 안채에 사임당의 어머니가 거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칸짜리 건물로 가운데 오죽헌, 오른쪽에 몽룡실(夢龍室)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그리고 몽룡실 안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집의 주인은 신사임당이다.
건물 안쪽의 벽과 서까래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의 시문이 걸려 있다.
중수기에 따르면 오죽헌은 1962년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사임당은 이곳 오죽헌에서 평산신씨 신명화(申命和)와 용인이씨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덕수이씨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해 아들 넷, 딸 셋을 낳았다.
그 중 셋째 아들이 율곡 이이다. 이들 형제자매 중
첫째 딸인 매창(梅窓: 1529-1592)과
막내 아들인 우(瑀: 1542-1609)가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 때문에 오죽헌의 율곡기념관은
신사임당과 율곡 삼남매의 글과 글씨 그리고 그림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되고 있다.
▲ 신사임당
신사임당의 글과 글씨 그리고 그림
사임당 신씨는 시서화에 능한 문인이었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 중 글씨가 적어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다.
시로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시가 유명하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踰大關嶺望親庭)’라는 칠언절구에서
사임당은 친정어머니가 계신 강릉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원 제목은 ‘대관령 반정에 이르러 북평을 바라보다(行至大嶺半程望北坪)’이다.
학처럼 백발이 된 어머니 임영에 계신데 慈親鶴髮在臨瀛
홀로 한양을 향해 가니 마음이 아파 身向長安獨去情
머리 돌려 북촌을 다시 한 번 바라보니 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 아래 푸른 산에 저녁이 내리네. 白雲飛下暮山靑
▲ 심사임당의 초서(병풍): 왼쪽에 "江南雨初歇..."이 보인다.
여섯 폭으로 남아 있는 초서 병풍은 우여곡절 끝에 율곡기념관에 오게 되었다.
그 과정이 영조 때 강릉부사를 지낸 이형규(李亨逵)와
노산 이은상 선생의 발문을 통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병풍의 글은 신사임당이 쓴 당시(唐詩) 오언절구로 한 폭에 한 편씩
모두 여섯 편이 실려 있다.
시는 강남(江南)의 사계(四季)를 보면서 느낀 시인의 마음을 노래했다.
그 중 네 번째 시가 보편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당나라 시인 대숙륜(戴叔倫)의 시 ‘희유고십일명부(戱留顧十一明府)’ 라고 한다.
자료에 보니 사임당 글씨의 자획이 명료하고 품격이 있다고 적혀 있다.
초서지만 꿰뚫어 보면 그 글씨가 어느 정도 보인다.
이 초서병풍은 1973년 7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 신사임당의 초충도
강남에 비가 막 개었건만 江南雨初歇
산은 어둡고 구름도 젖어있네. 山暗雲猶濕
아직 노 저어 돌아가지 못하는데 未可動歸橈
앞 시내 바람이 정말 거세네. 前溪風正急
그림으로는 초충도(草蟲圖) 팔폭 병풍이 유명하다.
초충도는 식물과 꽃 그리고 벌레를 그린 그림이다.
식물로는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양귀비, 봉숭아, 원추리가 있다.
이들 식물에 꽃이 피었고, 주변에 곤충들이 움직이고 있다.
메뚜기, 쇠똥구리, 여치, 사마귀, 개구리, 거미, 잠자리, 벌이 보인다.
이들 동식물을 보는 화가의 관찰력이 뛰어나고 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다.
초충도는 5000원권 지폐 후면 그림으로 들어가 있다.
이곳에 있는 초충도는 송담서원에 있던 것을 복제했다고 한다.
▲ 이매창의 묵매도(오른쪽)와 이우의 국화도(왼쪽)
율곡 누님과 아우의 그림과 글씨도
율곡의 큰누님인 이매창은 자연을 서경적으로 표현한 화가로 유명하다.
묵매도가 가장 유명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부러진 굵은 매화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고 그곳에 매화꽃과 봉오리가 달려 있다.
이러한 표현방식을 절지(折枝)와 비백(飛白)이라고 한다.
먹으로 농담을 조절해 줄기와 꽃의 강약을 표현했다.
그를 통해 줄기와 꽃의 정중동(靜中動)을 느낄 수 있다.
매창의 그림으로는 화첩이 전해진다.
이 화첩에는 사계절 풍경과 화조 그림이 들어 있다.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 참새를 그린 ‘참새’,
달밤에 갈대밭의 기러기를 그린 ‘달과 새’,
대나무 밭의 참새를 그린 ‘참새와 대나무’,
‘설경과 새’, ‘안개 속의 매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사계절의 풍경, 사군자, 화조를 적절하게
결합하고 변화시켜 그녀만의 특징을 만들어 냈다.
▲ 옥산서병: 귀거래사
이우의 그림은 더 많이 남아 있다. 그의 대표작은 ‘국화도’와 ‘묵포도도’다.
국화와 포도는 그 특징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이우는 이들을 개성적으로 잘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옥산화첩(玉山畫帖)으로 남아 있다. 이 화첩에는
가지, 게, 매화, 대나무, 포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내판에 보니 이우의 그림에서 “빠르면서 대담하고 다소 거친듯하면서도
분방한 필선이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우는 초서에도 능해 옥산서병(玉山書屛)을 남겼다.
서병은 글씨가 들어간 병풍이라는 뜻이다. 이 9폭 병풍은
이우가 15살 때 쓴 것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1편을 초서로 썼다.
그것은 제1폭 첫머리에 “돌아가련도다. 전원에 풀이 무성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라는 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글씨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씨는 결혼 후 장인인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영향을 받는다.
▲ 황기로의 초서: 이군옥의 시 "파산(坡山)"
황기로는 율곡가와 사돈간이다.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황기로는 16세기를 대표하는 초서체의 대가다.
경상도 선산 사람으로 14살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고향인 고산(孤山)에 매학정(梅鶴亭)을 짓고 명리를 떠나
글과 글씨로 소일하며 평생을 지냈다.
황기로는 당나라 회소(懷素)의 서풍에 토대를 두고,
명나라 장필(張弼)의 서풍을 따랐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획과 글자체를 간명하게 하면서도 호방한 자신만의 서법을 완성해 나갔다.
이러한 그의 서법이 사위인 이우와 아계 이산해(李山海) 같은
조선 중기 문인들에게 전해졌다. 이곳에는 초서로 쓴 황기로의 글씨 두 점이 있다.
당나라 시인 이군옥(李群玉)의 오언율시 ‘파산(坡山)’과
사공서(司空暑)의 시 ‘금릉회고(金陵懷古)’다.
이 중 이군옥의 시는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의 작품은 원본을 복제한 것이다.
또 이백의 시 ‘초서가행(草書歌行)’을 황기로가 써서 석판에 새긴 원석(原石)이 있다.
‘기유춘고산서(己酉春孤山書)’라는 서각을 통해 1549년 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충도 10폭 병풍, 전신사임당, 종이 수묵담채, 각폭 48.5*36cm 강원유형문화재]
[율곡기념관 소장, 옥산 이우 후손 이장희 발견 율곡 기념관에 기증]
맨드라미 : 벼슬, 출세
패랭이꽃 : 검은머리, 젊음
포도 : 장수, 자손번성
덩굴 : 자손번성
수박 : 장수, 복, 자손번성
나비 : 장수, 행복
매미 : 면류관, 군자, 벼슬
백로 : 시험성적
알락할미새(물새) : 학업, 성공
쥐 : 재물, 재산
[조상인의 예(藝)-<63>신사임당 '초충도']
고고한 양귀비꽃에 날아든 나비 한쌍...多産·長壽를 기원하다
양귀비와 도마뱀 등 8폭짜리 작품으로
꽃·식물 한두종 그림 가운데 배치하고
주변에 작은 동물·벌레 두는 방식 독특
보물 595호로 5만원권 지폐에도 등장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알려진 신사임당
학계 중심으로 예술적 업적 재평가 활발
신사임당 ‘초충도’ 8폭 중 ‘양귀비와 도마뱀’,
16세기초, 32.8x28.0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간밤에 모기에게 물렸다.
빨갛게 부어오른 자리를 긁으며 이제 여름이 오나 보다, 생각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 튀어나온다는 ‘경칩’이 우수와 춘분 사이에서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듯 그렇게 계절의 변화는 작은 동물들,
꽃과 나무가 먼저 알려온다. 사람이 생각만 빨랐지
뭐가 그리 잘나서 자연의 동반자를 ‘미물’이라 부르는가 반성할 일이다.
낭창거리는 줄기 끝에 붉은 양귀비꽃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사임당(1504~1551)의 작품으로 소장한 ‘초충도’ 8폭 그림 중
‘양귀비와 도마뱀’이다. 양귀비의 품새가 어찌나 당당한지
‘꽃 중의 왕’이라는 모란도 누를 기세다.
양귀비는 불룩한 주머니처럼 생긴 씨방을 맺고 그 안에 좁쌀 같은 씨앗이 가득하기에
‘다산’을 상징한다. 자식을 많이 나아 번창하라는 기원을 품은 꽃이다.
빨간 양귀비 오른쪽으로 벌써 씨방 하나가 맺혔는데, 제법 묵직해 줄기가 기울었다.
꽃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는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장수’를 뜻한다.
나비 접(蝶) 자의 발음이 중국어의 팔십 노인 ‘질’자와 같기 때문이다.
펄럭거리는 날갯짓에 온몸이 반으로 접히듯 합쳐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니
부부간의 금슬도 은유한다. 게다가 흰나비다. 흰색을 의미하는 백(白) 자는 으뜸을 뜻한다.
양귀비 허리춤 아래로 붉은 패랭이꽃이 피어올랐다.
패랭이는 줄기 마디마디가 대나무를 닮아서 한자로는 ‘석죽화’라 불린다.
단단한 바위(石)는 장수를, 축하한다는 뜻의 축(祝) 자와
발음이 같은 죽(竹) 자가 들어있으니 두루 좋은 뜻을 가진 꽃이다.
게다가 모래밭에서도 뿌리내려 꽃 피울 만큼 강인하다.
시들시들 늙어도 굽지 않는 패랭이꽃이라 젊음과 장수를 상징한다.
바닥 가까이, 화면의 오른쪽으로 한 무더기 핀 푸른 꽃은 달개비다.
‘닭의장풀’이라고도 불린다. 생명력이 대단한 꽃이다.
게다가 덩굴식물인데, 덩굴은 한자로 ‘만대(蔓帶)’라 하니
자손만대 번창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림의 왼편 아래로 야리야리하고 유연한 허리를 과시하는 도마뱀 한 마리가 보인다.
유약해 보이지만 도마뱀은 용을 닮은 동물이다.
용 그림은 왕실에서나 사용하는 것이니 사대부 민가에서는
종종 도마뱀이나 도롱뇽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게다가 도마뱀은 꼬리를 잘라내도 다시 재생하는 힘을 갖고 있는 범상치 않은 동물이다.
이 도마뱀이 지긋이 바라보는 쪽에 검고 커다란 장수하늘소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하늘소처럼 딱딱한 갑옷을 입은 곤충은 ‘갑충(甲蟲)’이라 불렸다.
여기서 ‘갑’은 갑제(甲第)를 뜻하니
과거 시험에서 1등으로 장원급제하고 출세하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신사임당 ‘초충도’중 ‘가지와 방아깨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그림 한 폭에 이토록 사려 깊은 마음을 담은 신사임당은
식물 한두 종을 가운데 배치하고 그 주변에 작은 동물과 벌레들을 두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초충도’ 양식을 이뤘다. 일상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5만 원권 지폐 앞면에 그려진 가지 그림이다.
보물 제595호로 부산 동아대박물관이 소장한 ‘자수 초충도 병풍’의 8폭 그림 중 하나다.
현재 전하는 신사임당의 그림은 낙관도 서명도 없는 게 대부분이다.
이 자수병풍도 공식적으로는 ‘작자미상’이지만
기법이나 도안의 특징 등으로 볼 때 신사임당의 작품이거나
최소한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가지는 그 형태 때문에 남성 혹은 아들을 상징한다.
가지는 한자로 가자(柯子)라고 하는데 가지 가(柯) 자를 더할 가(加)자로 바꾸면
‘아들을 더한다’는 뜻이 돼 다산을 나타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초충도’에서는 ‘가지와 방아깨비’가 함께 등장한다.
방아깨비를 비롯한 메뚜기, 여치류의 곤충은 한번에 백 개 가까운
알을 낳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다.
방아깨비 위로는 꿀벌이 날아다니고 아래로는 개미가 줄지어 걸어간다.
여왕벌,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벌과 개미는 군신관계를 은유하니
충(忠)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다.
게다가 두 마리씩 짝지어 등장시킨 것에서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를 바라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사임당 ‘초충도’ 중 ‘수박과 들쥐’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잘 알려진 ‘수박과 들쥐’의 수박은 덩굴식물의 이름이 뜻하는
자손만대 번영과 촘촘한 씨앗이 상징하는 다산을 함축하고 있다.
게다가 수박은 수복(壽福)으로도 읽기 때문에 그림 속 의미가 남다르다.
잘 익은 수박 속살을 들쥐 두 마리가 파먹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쥐는 부지런히 일해서 부자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신사임당 ‘초충도’ 중 ‘오이와 개구리’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길쭉한 모양의 오이도 가지처럼 남성성과 아들을 상징한다.
‘오이와 개구리’에서 개구리는 올챙이에서 변태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게다가 알도 많이 낳는다. 오이 옆으로 고개 숙인 조(粟)가 함께 서 있다.
벼처럼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니 승승장구하더라도 겸손함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맨드라미와 쇠똥벌레’의 주인공 격인 맨드라미는
그 모양이 닭 벼슬을 닮았기 때문에 장원급제해서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꽃이다.
그 역시 씨앗이 많은 식물이다. 이외에도 사마귀는 수컷이 교미 후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습성 때문에 자손을 위한 부모의 희생을 의미하고,
고추잠자리는 득남을 뜻한다. 이처럼 수십 종의 동식물이 등장하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일일이 언급하기 숨찰 정도로 많은 얘기거리를 품고 있다.
신사임당 ‘초충도’ 중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한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1536~1584)의 어머니로
‘현모양처’의 표상인 인물이다. 어진 어머니, 지혜로운 아내인 동시에
시서화에 두루 능한 예술가였다. 오십을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지만
4남 3녀를 낳고 키웠으며 그중 큰딸 이매창(1529~1592)은 어머니를 닮아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매화를 특히 좋아한 신사임당이
딸 이름 ‘매창(梅窓)’을 직접 지었다고 전한다.
신사임당 ‘초충도’ 중 ‘어숭이와 개구리’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최근에는 현모양처로 ‘포장’된 신사임당에 대한
재평가가 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생전의 신사임당은
‘포도와 산수’를 특히 잘 그려 당대 최고 화가인 안견(1410년 경~1464년 이후)에
버금간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요절한 지 100년 쯤 지나
이이의 제자 송시열을 중심으로 그림에 대한 재조명이 진행된다.
기량이 뛰어난 그림과 글씨는 율곡 같은 훌륭한 인물을
“낳았음이 마땅한” 하나의 자료가 됐고 사임당의 그림을 통해 이이를 추앙했고
그를 따르는 학파 전체를 추켜세웠다. 미술사학자 조규희 교수는 논문
‘만들어진 명작:신사임당과 초충도’에서 “신사임당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남편의 출사와 관련하여 ‘동양신씨’라는 자신의 낙관을 직접 찍은 그림들을
이들(세도가)에게 직간접적으로 선물했을 가능성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신사임당의 그림이 어떻게 ‘외간 남자’들인 서울의 특권층과 지식인들이
감상하고 소장하고 평가할 수 있었는지 배경을 분석했다.
정치적인 이유가 은연중에 깔려 있었다.
신사임당의 화첩은 1715년에 궁궐에까지 들어간다.
숙종(재위 1674~1720)은 장인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을 통해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게 된다. 화첩에는 그림뿐 아니라
율곡학파를 계승한 노론 핵심 인물들의 발문이 적혀 있었다.
숙종은 그림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율곡 이이의 어머니가 그렸음을 환기시키며
그림을 모사해 병풍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 안에 적을 시까지 지어주었다.
조규희 교수는 신사임당의 그림에 새로운 문화적 의미가 더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포도와 산수를 잘 그리던” 신사임당은
“포도와 ‘초충도’를 잘 그린 화가”로 평가가 바뀌었다.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또 한 번의 ‘재포장’이 진행된다.
이후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한국명화근오백년전’이 열렸고
여기에 개인 소장품인 ‘초충도 10곡병’이 출품돼 주목받았다.
대중에게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알려지는 첫 계기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시 이후 권력의 정점인 박정희 대통령의 소유가 됐다.
비슷한 시기인 1975년에 동아대박물관 ‘초충도 자수병풍’이 보물로 지정됐다.
이후 1978년에 박 전 대통령은 이 유물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잘 알려져 있듯 박 전 대통령은 신사임당과 율곡의 탄생지인
오죽헌 보수·관리 등에 지극한 관심을 쏟았고 신사임당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현모양처’가 됐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가 아니었다거나
그의 예술가로서의 기량이 부족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인물에 대한 편견을 걷고 제대로 다시 보자는 청이다.
신사임당의 그림에는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허투루 보지 않는
따뜻한 시선과 남다른 애정이 담겨 있다. 동식물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에서
동화같은 정겨움이 느껴진다. 세상만물이 더불어 사는 삶임을 깨닫게 한다.
모기에게 내 피 빨아먹으라고 내주는 것까지는 좀 고민해볼 일이지만.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송시, 27.8*15.4cm, 강릉시립박물관 제 5폭, 唐人 李白의 詩]
동림송객처 월출백원제(東林送客處 月出白猿啼)
소별려산원 하수과호계(笑別廬山遠 何須過虎溪)
동림사 동구 밖에 달 뜨자 잔나비 우네
여산 스님과 웃으면서 나뉘노니,
아뿔사, 호계를 지났소그려. 돌아 들어 가시오.
[신사임당, 이태백시]
[초충도 산차조기와 사마귀]
[노연도(鷺蓮圖) 근역화휘천첩, 신사임당]
[墨竹圖, 비단에 수묵, 신사임당, 50*35cm]
[알락할미새, 신사임당, 비단에 수묵, 18*14cm, 개인소장]
[묵포도도, 신사임당,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31.5*21.7cm, 간송미술관]
[지폐에까지 들어간 사임당의 포도도, 수박도]
[전 신사임당 초충도 자수 8폭 병풍, 각64*40cm /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보물595호]
[신사임당 묵포도도(간송미술문화재단)]
신사임당(1504-1551)은 화조나 초충을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녀가 살던 시기에는 그보다는 산수와 포도 그림으로 화명이 높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선비행장(先妣行狀, 돌아가신 어머니 행장)」에
“자당(慈堂)께서는 늘 묵적(墨迹)이 남다르셨다. 7세 때부터 안견(安堅, 1418-?)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하였고,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慈堂平日墨迹異常. 自七歲時, 倣安堅所畵, 遂作山水圖極妙, 又畵葡萄.
皆世無能擬者. 所模屛簇, 盛傳于世.)”
초서 (6폭병풍)
종이바탕, 세로 44.5㎝, 가로 33.5㎝.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강
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
제 1폭
비의정무사 폐문풍경지(比意靜無事 閉門風景遲)
유조장백발 상대공수사(柳條將白髮 相對共垂絲)
(唐人 戴幼公의 詩)
어저 고요할레 할 일이 전혀 없네.
문 닫고 앉았으니 날조차 더디 가네
백발만 버들가지랑 하냥 서로 마주 드리웠네.
제 2폭
연로강풍음 한호야초춘(輦路江風音 寒湖野草春)
상심유개부 노작북조신(傷心庾開府 老作北朝臣)
(唐人 司空曙의 詩)
임금다니던 길에 신나무 우거 있고
대궐 뜰에는 봄풀이 푸르렀네
유개부 슬픈 노래 부르며 북조 신하 되단 말가.
제 3폭
귀인승야정 대월과강촌(歸人乘野艇 帶月過江村)
정락한조수 상수야도문(正落寒潮水 相隨野到門)
(唐人 劉文房의 詩)
달 아래 배를 띄워 강 마을 지나는 그대
지금 바로 조수 한창 떨어지는 썰물이라
물따라 한밤중이면 문앞까지 댈걸세.
제 4폭
강남우초헐 산암운유습(江南雨初歇 山暗雲猶濕)
미가동귀요 전계풍정급(未可動歸橈 前溪風正急)
(唐人 戴幼公의 詩)
강남을 바라보매 비는 막 개었건만
산은 컴컴하고 구름 상기 젖었구려
앞길에 바람이 세겠네, 배를 어디 떼겠나.
제 5폭
동림송객처 월출백원제(東林送客處 月出白猿啼)
소별려산원 하수과호계(笑別廬山遠 何須過虎溪)
(唐人 李白의 詩)
동림사 동구 밖에 달 뜨자 잔나비 우네
여산 스님과 웃으면서 나뉘노니,
아뿔사, 호계를 지났소그려. 돌아 들어 가시오.
제 6폭
해안경잔설 계사조석양(海岸 殘雪 溪沙釣夕陽)
가빈하소유 춘초점간장(家貧何所有 春草漸看?
(唐人 皇甫孝常의 詩)
남은 눈을 헤치고서 바닷가에 밭을 갈고
시냇가 모래에 내려 夕陽 아래 고기를 낚소
내 집에 무엇이 있으리. 봄풀만이 자란다오.
신사임당 초서병풍 내력에대한 발문으로
신사임당의 이종 손녀가 최대해에게 시집갈때 가지고 간 것이라고 기록.
영조때 이웃 고을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당시 강릉부사 이형규의
주선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사임당은 대유학자 율곡(栗谷)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자식 교육에 있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서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초서 필적은 당시(唐詩) 오언절구 6수를
각각 한 장에 쓴 것으로 뒤에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글씨는 둥그런 원필세(圓筆勢)가 또렷하고 점획이 매우 깔끔한 점이 특징이다.
병풍 말미의 2폭에는 강릉부사 이형규(李亨逵, 1733∼1789)의 1744년 발문,
강원도지사 이용(李龍)의 1963년 발문, 시인 이은상(李殷相)의 1971년 발문이 있다.
이중 이형규의 발문에 따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인 권처균(權處均)이
초서 6폭을 얻었는데, 그의 딸이 최대해(崔大海)란 사람에게 출가하면서
이것을 시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 뒤 영조 때 이웃고을 사람의 꼬임으로 넘어갔는데
부사가 그 사연을 듣고 후손에게 도로 찾아주었다고 한다.
근래까지 강릉시 두산동의 후손 최돈길(崔燉吉)씨 집에 전해오다가
1971년 강릉시가 양수(讓受)받아 율곡기념관에 보관하였다.
이 필적이 사임당의 진적(眞蹟)이라면 그녀는 명필이던 아들 이우(李瑀)는 물론이요
16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명서가 백광훈(白光勳)·한호(韓濩) 등에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람이 된다. 차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편, 이 필적은 1868년에는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에 의해 목판으로 간행, 널리 전파되었다.
산수도(山水圖) 1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2폭 병풍 형태의 산수도
(크기 : 위 34.2×62.2cm 아래 34.8×63.3cm)
산수도(山水圖) 2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2폭 병풍 형태의 산수도
. 신사임당의 시
[思親]
千里家山 萬疊峯 (천리가산 만첩봉)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歸心長存 夢魂中 (귀심장존 몽혼중)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寒松亭畔 孤輪月 (한송정반 고륜월) 한송정 앞에는 외로이 뜬달
鏡浦臺前 一陳風 (경포대전 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沙上白鷺 恒聚山 (사상백로 항취산) 갈매기는 모래 위에 흩어졌다가 모이고
波頭漁船 各選動 (파두어선 각서동) 고기 배들은 바다위로 오가는데
何時重踏 臨瀛路 (하시중답 임영로) 언제 강릉 길 다시 밟아서
彩舞斑衣 膝下縫 (채무반의 슬하봉)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까
[行至大嶺半程望北坪]
蹂大關嶺望親庭 (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백발 되신 어머니 강릉 친정에 계시는데
身向長安獨居情 (신향장안독거정) 홀로 서울로 향해가는 이 몸 괴로운 마음
回首北坪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 고개 돌려 북쪽 하늘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만 저무는 푸른 산에 날아내리네
2) 매창매화도 및 옥산국화도첩(梅窓梅花圖─玉山菊花圖帖) 2첩
저작자 이매창, 이옥산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
크기 30×20.5㎝(매창매화도), 35×25㎝(옥산국화도)
이우〈국화도〉, 매창 〈매화도〉, 종이에 수묵, 35×25㎝, 강릉시.
이 그림은 신사임당의 넷째 아들인 옥산 이우가 그린 국화그림이다.
국화 한줄기가 화면에 홀로 그려진 그림으로, 국화는 가는 필선으로
꽃잎을 하나하나 묘사하였고 잎은 짙은 먹으로 한 번에 표현하였다.
조선중기 그림으로는 남아 있는 예가 드문 국화그림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의 거유(巨儒) 이이(李珥)을 비롯해 7남매를 두었는데
맏딸인 매창(梅窓)과 넷째 아들 이우(李瑀)가 예술적 재능을 승계하여
이들 남매는 모두 시와 그림 양 분야에 뛰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가전된 서화첩에는 이우의 8대손인 이서(李曙)가 남긴 발문이 있다.
초서의 대가 황기로(黃耆老)가 사위 이우의 초서를 평하기를
곱기는 자기만 못해도 웅건하기는 낫다고 했고,
매창에 대해서는 글씨와 거문고 및 풀벌레 그림에 뛰어난 사실 및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고 언급하였다.
이 첩은 율곡의 후손인 이장희가(李璋熹家)에 소장되어 오던 것을
1965년 첩으로 꾸며 강릉시 오죽헌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매창의 것은 「월매도(月梅圖)」로 소품(紙本水墨,30×20.5㎝)으로
조선 중기 화단에 있어 묵매의 정형(定型)을 이룩한 어몽룡(魚夢龍)과 친연성이 크다.
화면 중앙에 시작되는 비백(飛白)으로 된 굵은 줄기와
곧게 뻗은(沒骨 : 그림을 그릴 때 윤곽을 그리지 않음)의 가는 줄기 및
성근 꽃송이 등 구도와 필치 모두에서 동시대 화풍임을 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여러 폭으로 된 『묵매첩(墨梅帖)』에서 산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매창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대나무에 한 쌍의 새를 나타낸
조속(趙涑)·이경윤(李慶胤)이나 이징(李澄) 등과 화풍(畵風)의 친연성이 짙은
조선 중기 사계영모도(四季翎毛圖) 계열의 영모 1폭이 전래되고 있다.
옥산(이우의 호)의 국화는 먹으로 만 그린
「묵국(墨菊)」으로 역시 소품(紙本水墨, 35×25㎝)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산해(李山海) 전칭 「묵국(墨菊)」과 더불어
먹물로만 그린 국화로 비교적 시대가 올라가는 드문 예이다.
잎은 몰골로 꽃은 구륵(鉤勒 : 그림을 그릴 때 테를 분명하게 그림)으로 나타냈다.
옥산의 경우 이외에도 현재 소장처는 다르나 동일 크기로 필치가 같아
(紙本水墨, 43.7×30㎝) 함께 그린 것이 분명한 「묵매」와 「묵란」이 전해진다.
그 외에 「묵포도」도 있다. 묵매에는 이병연(李秉淵)이
매화와 난초를 읊은 7언절구가 붙어 있다. 현재 이 그림 또한 오죽헌에 있다.
[파주 율곡 선산에 있는 이매창/조대남 쌍분묘, 뒤는 조대남 부친 조건묘]
3) 이매창 예술세계
신사임당 첫째 딸 이매창(李梅窓, 1529∼1592)은
학식, 인품, 용모가 신사임당을 닮았다는데
도무지 그녀의 행적이 추적이 안 되지만
예전에는 여성에게 이름은 없었는데 이름까지 지어준 것을 보면
맏딸을 끔직히 사랑했슴을 짐직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매화를 좋아하여
직접 매창(梅窓)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며
커가면서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작은 사임당으로 불릴 만큼
학문적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셨다.
사임당은 딸 매창을 사랑하여 틈틈이
학문을 가르치고 서예법과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다.
부안 기생 이매창(1573∼1610)과는 동명이인이자 동시대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매창의 생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파주 율곡 가족묘원에 가면
율곡의 큰 누님 이매창과 매부 조대남의 쌍분묘,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 씨의 합장묘,
이매창의 둘째 아들 조영 묘가 있다 한다.
다만, 그의 그림은 신사임당도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그림이라고 인정했듯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점,
어머니 사임당 신씨, 허균 누이 허난설헌등
여성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던 시절,
(일설에 사임당도 인선(仁宣)이란 이름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어느 사료에도 나오지 않은 주장임)
이매창(李梅窓)이란 이름을 가질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고,
율곡이 누이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는 것,
옥산 이우의 장인 황기로(黃耆老)가 이매창에 대해서
글씨와 거문고 및 풀벌레 그림에 뛰어난 사실과
오죽헌에 전해오는 그림과 글씨등 작품과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고 언급하였다는 점 등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① 달과 기러기
② 달과 매화
③ 설경 속의 새
④ 참새
⑤ 대나무와 참새
⑥ 좌측 막내동생 이우 국화 / 우측 매창 매화
4) 황기로 초서 계보
사실 초서의 기본은 왕희지이며,
이후 당나라 때의 회소와 장욱 등이 유명한 초서 서예가로 꼽히곤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장욱 보다는 회소의 영향이 더 큰데,
조선 전기 명나라 때의 장필을 활발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종 때 쯤 급격히 수용된 장필의 글씨는 조선 전기의 초서 글씨에
어느 정도는 모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 제일 많이 장필을 받아들인 사람이 황기로입니다.
회소(懷素, 725~785) 자서첩自敍帖
장욱(張旭, 675~750?) 《고시사첩古詩四帖》중. 요녕성박물관
장필(張弼, 1425~1487) 초서칠절시축草書七絕詩軸
이지정(李志定, 1588~1650) <초서 두보시 거촉 草書杜甫詩去蜀>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하진(李夏鎭, 1628~1682) 〈오언절구〉《천금물전千金物傳》
황기로 <이군옥시李羣玉詩> 오죽헌 보물 제1625-1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5~1575?)가 당나라 이군옥(李羣玉)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그는 낙동강 지류 천보탄(天寶灘) 가에 매학정(梅鶴亭)을 짓고 살았던 처사(處士)로서
회소(懷素)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1425~1487)을 따랐다.
이 초서는 회소와 장필을 배워 활달하고 운동세가 많은 획법과 변화로운 짜임을
잘 구사한 예이다. 이 필적은 황기로(黃耆老)의 사위 덕수이씨(德水 李氏)
옥산(玉山) 이우(李瑀)(1542~1609)의 후손인
이장희(李璋憙)(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黃耆老)의 묵적 가운데
대폭(大幅)이며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고산 황기로의 글씨는 그의 고향 구미 금오산에 남아있는
그의 정자 고산정, 매학정 등에도 남아있습니다.
황기로 초서-차운시 보물 제 1625-2 소재지 서울 종로구 견지동 93 동산방 화랑
차운시(次韻詩)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5~1575)가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짓고 쓴 초서이다.
말미에 “축(軸)에 청천(菁川:柳希齡, 1480~1552), 영천(靈川:申潛, 1491~1554),
귤옹(橘翁:尹衢, 1495~?), 송강(松江:趙澄, 1511~1574), 서하(西河:?)의 시(詩)가
있어 몇번씩 반복함에 그칠 수 없어 이에 시를 짓다”라고 하여
제작동기를 알 수 있으며 말미에 “고산 매학정 주인 쓰다(孤山梅鶴亭主人書)” 라고
한 것에서 진적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필적은 지금의 소장자가 입수할 때
가로로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액자로 개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도 글씨가 손상되지 않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또 [백봉(白峯)]이란 솥모양 인장[鼎形印]이 다섯 군데 찍혀있고 말미에
[태사지후 충신지손(太師之后 忠臣之孫)]이란 장방인(長房印)이 찍혀있는데,
‘백봉(白峯)’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수빈(金壽賓)(1626~?)의 호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선평(金宣平)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의 한 사람이므로 그 후손에게 이러한 인문(印文)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초서 필적은 규모는 작지만 필획이 매우 간정(簡淨)하고 운필이 활달하여
황기로(黃耆老) 글씨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는 뛰어난 수작(秀作)이다.
敬次
秋風千里訪幽人,半日梅窓笑謂親.我亦煙江垂釣者,白鷗相對自爲珍.
怪汝相逢厚意多,自羞樗櫟鬢空華.如何又贈山中扇,不在誠心是物加.
臨江相笑意偏多,話到更深對月華.縱未虎溪三笑過,此時淸興十分加.
當代文章四五人,非師何以得情親.軸中無限蘭荃句,還作禪家萬寶珍.
軸中有菁川靈川橘翁松江西河之詩,圭復不已,故及之.
孤山梅鶴亭 主人書
가을에 천리 길 걸어 숨은 이 찾아와서, 한나절 매학정에서 웃으며 이야기 했네.
나도 안개 낀 강에 낚시 놓는 사람으로, 백구와 서로 마주하는걸 보배로 여기지.
괴이할사! 서로 만나니 두터운 정 많아, 쓸모없는 이 인간은 귀밑털만 희어졌네.
왜 산중에서 철지난 부채를 또 주는가? 이는 성실한 마음 없는 물건일세 그려.
강물 보며 서로 웃으니 정이 두터워져, 밤 깊도록 이야기 나누며 밝은 달 보네.
비록 호계가의 삼소정을 가지 않아도, 이때 흥취는 그곳보다 충분히 더 많네.
한 시대에 훌륭한 문장가 너댓 사람을, 선생 아니면 정으로 친할 수 있겠는가?
시축 가운데 한없는 향기로운 구절들은, 돌아가 불가의 만 개 보배로 만드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