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율곡 이이 7남매의 ‘분재기’

이름없는풀뿌리 2019. 5. 4. 07:58

(25)2m 빼곡히 쓴 이 유산분배 기록에 '없는 것' [도재기의 천년향기]

도재기 문화에디터 입력 2019.05.04. 06:00

               

[경향신문] ㆍ25 율곡 이이 7남매의 ‘분재기’

율곡 이이 비롯 4남3녀가 부모 타계 뒤 나눠가지며 작성한 ‘화회문기’…

‘남녀 차별’ 없이 출생순으로 ‘공평하게’ 땅·노비 배분 후 각자 서명

 재산 배분 앞서 제사·묘 돌보는 ‘봉사조’ 등 공동재원 설정…

당시 가족제도·제사 관습·아들과 딸의 지위 등 사회상 읽을 수 있어

유산 다툼·효도계약서 오르내리는 지금과 달리

갈등 없이 돈독한 우애를 바탕으로 화목하게 합의된 기록에 새삼 ‘눈길’

 

450여년 전인 1566년 5월20일, 율곡 이이의 형제자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셋째 아들인 이이를 비롯, 4남3녀 7남매다. 아들들은 본인이, 딸들은 남편이 대신 참석했다. 남편과 사별한 셋째 딸의 참석 여부는 불분명하다. 7남매가 어렵게 모인 것은 아버지(이원수·1501~1561), 어머니(신사임당·1504~1551)가 남긴 재산을 배분하기 위해서다. 이날 있었던 7남매의 유산분배 내용은 상세히 기록한 문서로 전해진다. 보물 제477호인 ‘율곡 이이 남매 화회문기(和會文記)’다. 건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화회문기는 7남매와 더불어 서모(아버지의 첩) 권씨 몫도 기록, 모두 8명의 재산분배 결과를 담고 있다.

 

조선 중기의 대표학자인 율곡 이이(1536~1584)의 7남매는 어떤 유산을 어떻게 나눠가졌을까? 그들의 분배 방식·내용에 호기심이 솟는다. 사실 재산의 상속·분배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심의 대상이다.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된 이래 유구한 세월 동안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고, 때론 당대 사회경제의 영향을 받았다. 분배를 둘러싼 자식들 사이의 갈등의 역사도 깊다. 이미 고려시대에 자식들 간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물신·배금주의가 지배적인 지금은 더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율곡 이이 남매 화회문기’는 분배 내용도 흥미롭고 중요하지만, 16세기 조선 중기 사회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한 문화재다. 재산상속과 상속재산의 분배는 한 사회의 거울이다. 상속·분배 과정을 보면 그 사회의 가족제도, 아들과 딸의 지위, 사회상, 나아가 당대 가치관까지 읽어낼 수 있어서다.

 

■ 남녀 차별 없이 아들·딸 공평하게

부모 재산을 자식들이 분배한 내용을 기록한 옛 문서를 ‘분재기(分財記)’라 한다. 분재기는 상속·분배의 시점이나 방법, 관청의 개입 여부 등에 따라 여러 형식, 이름으로 나눠진다. 거칠게 요약하면, 부모 등 재산의 주인이 생전에 자식들에게 직접 분배한 분재기에는 ‘분급문기(分給文記)’ ‘허여문기(許與文記)’ ‘깃부문기’ 등이 있다. 재산 주인이 축하·사례 등을 위해 특별 상속한 ‘별급(別給)문기’ 등도 있다. 부모가 타계한 뒤 자식들이 유산을 나눠가지며 작성한 문서로는 ‘화회문기’ 등이 있다. 이이 7남매 분재기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바로 ‘화회문기’다. ‘화의(和議)문기’라고도 하는 화회문기는 형제자매가 모여 화목하고 돈독한 우애 속에 서로 합의하에 분배한 내용을 기록했다.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문서로 작성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 말에는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54년에 윤광전이 아들 단학에게 노비를 재산으로 상속한 문서 ‘윤단학 노비 허여문기 및 입안’(지정십사년 노비문서·보물 제483호)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분재기, 특히 후기 분재기는 많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희귀하다.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책, 분재기 같은 문서 등 대부분의 기록문화유산이 불탔기 때문이다.

 

이이 7남매의 분재기, 즉 화회문기는 가로 257㎝, 세로 48㎝의 한지에 분배 내용을 초서로 빼곡하게 적고 있다. 문서는 당시 화회문기 양식을 따랐다. 첫 문장에는 ‘1566년(명종 21년) 5월20일에 형제자매들이 모여 합의’했음을 밝힌다. 이어 <경국대전>(조선시대 기본 법전)을 근거로 분배함을 덧붙이고 조상 제사를 어떻게 모실지를 기록했다. 제사는 ‘돌아가며 지내지 말고 맏아들의 집에서 지내되 형제 중의 한 명을 유사로 삼아 맏아들과 상의’토록 했다. 또 해마다 자녀·손자녀들이 쌀을 내놓아 제사를 돕도록 했다. 이어 개인별 배분에 앞서, 제사와 묘를 돌보는 데 필요한 ‘봉사조(奉祀條)’ 등 공용재원을 설정했다. 논과 밭·노비로 구성된 공용재산은 오직 제사·묘 관리에만 사용할 것도 명시했다.

 

이이 7남매 분재기는 이어 맏아들-맏딸-둘째 아들-둘째 딸 등 출생 순서로 7남매와 서모 권씨가 나눠가진 재산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맏아들인 이선의 경우 옛 양주에 있는 논 15두락(마지기)과 밭, 서울과 파주·영천 등에 살고 있는 노비 총 16구(명) 등을 배분받았다(노비는 재물로 여겨졌기에 문서에 ‘명(名)’ ‘인(人)’이 아니라 ‘구(口)’로 표현돼 있다). 맏딸 이씨(조대남의 처)는 논 10두락과 밭·노비 16명 등을, 차남인 이번은 논 8두락과 밭·노비 16명 등을, 차녀 이씨(윤섭의 처)는 논 8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받았다. 삼남인 이이는 논 8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삼녀 이씨(고 홍천우의 처)는 논 12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사남은 논 12두락과 밭·노비 15명 등을 받았다. 서모 권씨 몫으로는 논 12두락과 밭·노비 3명이 배분됐다. 분재기의 끝에는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쓰고 각자 수결(手決·서명)을 했다. 다만 딸들은 남편이 수결하거나 남편이 없는 경우엔 수결 없이 이름만 적었다. 서모 권씨는 이름, 수결도 없다.

 

이이 7남매의 유산분배 내용을 보면, 통념과 달리 남녀 즉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분배했다는 것이 주목된다. 노비 숫자는 물론 논밭의 경우 비옥한 정도나 위치 등을 고려했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재산분배의 근거가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아들딸 구별 없이 유산의 균등한 분배를 규정한다. 실제 이이 남매의 분재기뿐 아니라 조선 성종 때인 1480년 상산 김씨 가문의 16대손인 김광려·광범 형제와 딸 김씨(한건의 처)가 작성한 ‘김광려 3남매 화회문기’(보물 제1020호) 등 다른 분재기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적어도 유산분배에서는 남녀평등이 실현된 것이다.

 

■ 핵심 재산은 땅, 그리고 119명의 노비

‘이이 남매 화회문기’ 등 조선 초중기 분재기들은 유산의 상속·분배에서 남녀 차별이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조선시대의 16세기 이전과 고려시대에는 남녀 차별이 적었다. 아들딸 구별 없이 공평분배했고, 제사도 돌아가며 지내기도 했다. 아들에게 재산이 많이 배분되자 딸이 소송을 제기해 이긴 사례도 있다. 땅과 노비 등을 상속받은 여성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거나 팔 수도 있었다. 여성의 경제력 소유와 재산권 행사는 당시 여성의 지위를 드러낸다. 호주도 아들만이 아니라 부인, 딸이 되는 여성호주제가 가능했다.

 

1123년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온 서긍이 당시 문물과 풍속을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여성들은 이혼·재혼도 쉬웠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에 들면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체제가 다져진다. 이이 7남매의 분재기에서도 기존과 달리 제사를 맏아들 집에서만 지내도록 해 장자의 제사 독점이 나타난다. 17세기가 되면 장자의 제사 독점은 확고해지고 유산도 아들, 특히 장자 중심으로 배분된다. 유산분배에서 여성들의 배제, 이혼·재혼의 제한 등 남녀 차별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체제가 공고화되는 것이다. 사실 남존여비로 대표되는 남녀 차별은 수백, 수천년 이어져온 전통사상이 아니다. 그저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 유교적 지배질서 속에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굳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이 7남매 분재기를 통해 당시 가족제도나 제사 관습,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또 재산의 핵심이 논밭 같은 토지, 노비임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분재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는 땅, 그리고 인력인 노비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분재기에 기록된 노비의 숫자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이가 소유하게 된 15명 등 분배된 노비가 무려 119명에 이른다. 이들 노비는 파주는 물론 성주, 함흥, 영천, 강릉 등 전국에 흩어져 있다. 당시엔 노비들의 자식도 노비이므로 이이를 비롯한 남매들은 노년에 더 많은 노비를 소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정의 달, 5월이다 보니 이이 7남매의 분재기가 새삼 다시 읽힌다. 유산분배를 놓고 형제자매가 모여 화목하고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모습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부모와 자식 사이의 재산상속, 또 재산분배를 둘러싼 자식들 사이의 다툼이 심심찮게 뉴스가 되고 있다. 심지어 상속을 놓고 부모와 자식 사이엔 이른바 ‘효도계약서’가 언급된다. 자식들이 재산만 상속받고 늙은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니, 여러 부양조건을 단 ‘효도계약서’를 맺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대법원은 ‘부모를 잘 모시겠다는 조건으로 재산을 상속받은 자녀가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면 받은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부모는 어린 자식을 먹여 키우고, 성장한 자식은 늙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당연하다. 너무나 마땅히, 당연하게 여겨져 천륜(天倫)으로 불리던 부모·자식의 관계마저 이젠 ‘효도계약서’를 통한 계약관계로 전락하는 현실이 슬프고 안타깝다. 나아가 자식들끼리 유산분배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속재산은 자식들에게 ‘보약’이다. 부모들은 애써 모은 재산이 자식들에게 보약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유산 다툼을 불러 오히려 ‘독약’이 되기도 한다. 이 시대 우리 사회, 가족상의 민낯이다.

 

지난해 이맘때, 가정의 달을 맞아 ‘도재기의 천년향기’에선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보물 1683-2호·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을 다뤘다. 하피첩은 다산이 강진 유배 중 아내가 보내온 낡은 노을빛 치마(하피)를 잘라 첩을 만든 뒤 자식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은 서첩이다. 다산은 하피첩에서 “나는 벼슬이 없으니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다”며 “대신 두 글자의 신령한 부적을 남기니 박하다고 여기지 말라”고 썼다. 다산이 재산 대신 자식들에게 물려준 두 글자는 ‘一字曰勤, 一字曰儉’(일자왈근 일자왈검), 바로 근면과 검소를 뜻하는 ‘勤’(근)과 ‘儉’(검)자다. 다산은 “근면과 검소는 좋은 논밭보다 나아 한평생을 쓰고도 남는다”고 강조했다. 문득 물질적 재산인 ‘물고기’ 대신 무형의 ‘물고기 잡는 법’을 유산으로 남기는 게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건국대박물관

도재기 문화에디터 jae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