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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농경문 청동기' 속엔 벌거숭이 사내가 산다

이름없는풀뿌리 2019. 7. 13. 10:13

2000년 전 '농경문 청동기' 속엔 벌거숭이 사내가 산다

[도재기의 천년향기]도재기 문화에디터 입력 2019.07.13

[경향신문] ㆍ농경문 청동기

실제 크기의 ‘농경문 청동기’(12.8㎝×7.3㎝×1.5㎜)

이 땅에 청동기시대의 등장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1000년 전후쯤으로 본다(물론 그 시기를 둘러싼 엇갈린 학설들이 있다). 석기시대를 지나 석기보다 효율성이 뛰어난 청동기가 나타난 시대다. 논·밭농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인구도 늘어나 씨족사회가 부족사회로 전환됐다. 생산력도 이전 시대보다 급증했으며, 그 생산력 차이는 부족 내, 부족과 부족 사이에 계급도 발생시켰다. 청동기시대가 발전하면서 기원전 5~4세기 전후에는 철기시대가 등장한다. 청동기·철기시대는 흔히 함께 거론되는데,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철기와 청동기가 함께 발굴되는 경우가 많다.

2000년 전에도 솟대가? 나뭇가지에 앉은 새 두 마리 저세상잇는 ‘영혼의 전달자’일까 풍요 비는 솟대의 원형일까

청동기·철기시대는 무엇보다 금속을 찾아내고, 합금기술까지 확보함으로써 이전 시대와 질적으로 큰 차이를 드러낸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 중심의 합금이다. 쇠는 제련 과정 등을 거쳐야 하는, 당시로선 최첨단 재료다. 선사시대이다 보니 이 시대도 관련 문헌자료는 극히 드물다. 다만 고고학적 유적과 갖가지 청동기·철기 유물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어 당시 사회문화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청동기·철기는 당시 지배계급만이 소유해 권위를 나타내거나 의례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청동검·청동거울 등 여러 청동기 유물 가운데 당시 사람들의 생활문화상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있으니 바로 ‘농경문 청동기’(보물 1823호)다. 어른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지만 그 속에는 청동기시대 후반이나 초기 철기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정보들이 새겨져 있다.

■ 2000여년 전의 생활문화상 포착

\'농경문 청동기\'의 원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방패형 동기’(대전 괴정동 출토). 길이 15.9㎝·중앙박물관

농경무늬가 새겨진 이 청동기는 기원전 4~3세기 철기시대 초기 유물로 여겨진다. 안타깝게도 발굴조사로 나온 게 아니어서 학술적 정보가 없다. 대전의 한 상인이 고철수집상에게서 샀고, 서울 고미술계로 흘러들어 196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당시 2만여원을 주고 구입, 소장하게 됐다. 출토 지역은 대전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귀한 유물이다 보니 교과서 등을 통해 이미지는 널리 알려졌다. 크기는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작아 관람객들이 놀란다. 너비는 12.8㎝, 길이는 7.3㎝, 두께는 1.5㎜다. 이 자그마한 청동판에 음각으로 새겨진 사실적인 그림들은 2200~2300여년 전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한 장면을 잘 보여준다. 기하학 무늬가 새겨진 청동기는 있지만 이 청동기처럼 사실적인 그림이 담긴 경우는 아주 드물다. 따라서 국보급으로 평가받을 만큼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큰 소중한 문화재다.

‘용도의 비밀’ 품은 구멍 청동기 윗부분에는 6개의 구멍끈을 매달아 사용한 듯한 흔적

농경문 청동기는 아랫부분이 사라졌지만 원래 모양은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방패 모양 청동기’(방패형 동기)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한쪽 면에는 굵은 실을 꼰 듯한 모양의 둥근 고리가 하나 달려 있는데, 원래는 고리가 2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끈하게 다듬은 청동기 윗부분에는 6개의 구멍이 있다. 구멍들을 자세히 보면 닳아 있다. 끈을 매달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거물’ 나체 남성의 비밀 머리에 기다란 깃털(?)을 꽂고 옛 농기구 ‘따비’로 밭 일구는 남성.양다리 사이 성기는 과장되게 표현 풍년 비는 ‘주술적 의미’ 해석 많아
이랑·고랑이 선명한 밭

흥미를 끄는 그림들은 전체 윤곽을 따라 새겨놓은 띠 안쪽에 자리한다. 고리가 없는 면의 그림들이 더 눈길을 끄는데, 관람객이 보기에 오른쪽 위에는 머리에 기다란 깃털 같은 것을 꽂은 벌거벗은 남성이 따비로 보이는 농기구로 밭을 일구는 장면이다. 따비는 논밭을 일구는 데 사용된 농기구로 근대 시기까지도 사용됐으며, 끝이 두 개의 날로 돼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남성은 특히 양다리 사이에 성기가 삼각형으로 과장되게 표현돼 있다. 따비 같은 농기구 바로 밑에는 이랑과 고랑이 선명한 밭이 새겨졌는데, 실제 발굴되는 밭 유적과 흡사하다. 그 밭 밑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 어떤 물건(농기구 괭이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을 두 팔로 힘껏 들어올린 자세다.

마름모꼴 무늬가 선명한 항아리 당시 토기와 흡사한 마름모꼴 무늬의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한 사람. 여성이라는 추정이 많다.

왼쪽 면에는 또 다른 인물이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그 앞에는 토기가 1개 있는데, 마름모꼴 무늬가 선명한 항아리다. 이 항아리도 당시 유적에서 발굴되는 토기와 닮았다. 이 인물은 손에 어떤 것을 잡고 있는데, 청동기의 그 부분이 부식된 바람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한 여성이 수확한 농산물을 항아리에 담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리가 부착된 면에는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가 새겨졌다. 고리가 있는 왼쪽 편에는 두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양 끝에 한 마리씩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 모습에서 솟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다듬은 새를 긴 장대 끝에 올린 뒤 이를 마을 어귀에 세운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산물이다. 요즘에는 기쁜 소식을 부르는 상징성을 담아 문화상품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오른쪽에도 한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 새, 나체의 남성…풍년의 간절한 염원?

괭이와 비슷한 물건을 두팔로 힘껏 들어올린 사람의 모습.

청동기에 새겨진 그림들은 들여다볼수록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진다. 밭을 일구는 남자는 왜 나체이며 성기를 강조했을까, 새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청동기가 공개된 초기엔 나체로 밭을 가는 표현을 놓고 여러 추측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풍년을 바라는 주술적 의미가 상징화된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그렇게 해석할 만한 풍속이 수백년의 시차가 있지만 실제 확인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신인 미암 유시춘(1513~1577)의 문집(<미암선생집>)에 나체 농경의 풍속을 전하는 글이 실려 있다. 이조참판·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낸 미암은 앞서 함경도에서 10여년의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 지역 풍습을 글로 남겼다. 입춘에 행해지는 나체 농경에 대한 논의란 뜻의 글 ‘입춘나경의(立春裸耕議)’에 따르면, 함경도에는 입춘 때 나무로 만든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흉내를 내는 풍습이 있었다.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이기를 바라는 세시행사인데,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 나체라는 것이다. 미암은 야만적인 나경 풍속을 없애야 한다는 취지로 글을 썼다. 실제 민속학계에서는 근대까지도 함경도·평안도 일부 지역에 나경 풍속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벌거벗은 채 밭을 일구는 농경문 청동기 속의 그림은 결국 풍년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상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밭을 일구는 남자의 성기를 강조한 것도 의미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선사시대 동굴벽화나 암각화, 유물에는 남성·여성의 성기를 과장해 강조하는 사례가 꽤 있다.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돼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 불리는 구석기시대 조각상이 대표적이다. 이 나체 조각상은 여성의 성기와 유방, 복부, 엉덩이를 유독 과장해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의 라스코동굴 벽화에도 성기가 강조된 남성 인물이 있으며,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도 비슷한 유물·유적이 확인됐다.

국내에서는 신석기~청동기시대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에 있다. 새끼를 밴 고래, 거북이 등 여러 동물들 사이에 한 남성이 새겨졌는데, 역시 성기가 과장돼 있다. 고대에 남녀의 성기를 강조한 것은 생식의 신비로움·성스러움의 표현이자, 성공적인 사냥이나 풍년·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로 읽힌다. 따라서 농경문 청동기 속 남자의 강조된 성기 또한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녹아든 표현으로 해석된다. 일부에선 밭가는 남성은 봄의 밭갈이를, 여성은 가을의 추수 장면을 형상화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면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어떻게 봐야 하나. 새를 형상화한 고대 유물은 장신구나 토기, 청동기, 목기 등이 있다. 특히 무덤이나 제사 관련 유적에서는 새 모양을 하거나, 새를 응용한 의례용기들이 발굴된다. 고대인들에게 새는 인간의 영혼을 이 세상의 지상에서 저세상의 천상으로 인도하는 ‘영혼의 전달자’나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로 인식됐다는 게 정설이다. 특히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형상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와 일맥상통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솟대와도 관련 있는 삼한시대의 ‘소도’와의 연관성을 찾는 분석도 있다. 또 농경이 중요하던 시대에 새가 곡식을 물고 온다는 상징성을 담아 마을에 풍년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의식의 반영으로도 읽힌다. 이 농경문 청동기에는 장식적인 고리도 있다. 하지만 고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청동기가 흔들릴 때 고리가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소리와의 연관성이 주목된다.

2000여년의 유구한 시간이 녹아든 이 작은 농경문 청동기는 결국 한 공동체의 풍년과 삶의 풍요로움, 나아가 공동체의 안녕을 간절하게 기원하는 주술의식과 관련된 의례용기로 볼 수 있다. 어쩌면 당시 샤먼이나 제사장, 지배자가 특별의식 때 몸에 부착하거나 어디에 걸어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비록 작은 크기지만 매우 반들반들하기 때문에 빛을 받을 경우 꽤 번쩍였을 가능성도 높다. 어떤 의례에서 번쩍이는 청동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초월적인 존재와의 교감 같은 또 다른 신비로운 경험을 안기지 않았을까.

지금의 우리는 다행히도 이 농경문 청동기를 통해 초기 철기시대의 농경문화, 신앙,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정신세계, 생활상 등을 읽어낼 수 있다. 몇년 전, 이 농경무늬 청동기가 전시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들딸과 엄마가 청동기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일반적인 설명을 한 뒤 이렇게 한마디 던지는 것이 아닌가. “얘들아, 이 밑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잖아. 없어진 부분에도 그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 게 그려졌을까 생각해보자.” 없어진 부분을 안타깝게만 여기던 필자에게 이 엄마의 한마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난 한 시대 삶과 문화의 결정체인 문화유산은 시공간과 상관없이, 학술적 의미와 가치도 훌쩍 뛰어넘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도 있다. 그 사실을 새삼 깨우쳐준 것이다. 정말이지 농경문 청동기의 저 없어진 부분에는 어떤 그림이 새겨졌을까.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