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의 유묵.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는 임진왜란부터 10년간 사명대사의 감회가 담긴 시다. 일본에서의 사명을 잘 마무리 지은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간다는 사명대사의 의지가 드러난다.|일본 교토 고쇼지 소장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지 오래되지만(有約江湖晩)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紅塵已十年)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白鷗如有意)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故故近樓前)” 이 글은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이 임진왜란 발발 13년이 지난 16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1543~1616)와 강화 담판을 벌이면서 다짐한 시(‘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이다. 강화의 임무를 마무리 지은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은 사명대사가 ‘중생을 구하라’는 스승 서산대사(1520~1604)가 남긴 뜻에 따라 일본에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행(使行)의 목적이 포로송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고쇼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은 15일부터 11월17일까지 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 일본 교토(京都)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 6점을 400년 만에 국내 최초로 특별공개한다. 이번에 전시될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 유묵은 ‘벽란도…’외에도 한시 2점(‘최치원의 시구’)과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 ‘승려 엔니에게 지어준 도호’,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등이다. 모두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후 처리와 포로협상 등을 위해 1604~05년 일본에 갔을 때 교토에서 남긴 유묵들이다.
사명대사가 일본 승려 엔니에게 ‘허응’이라는 도호를 지어주고 써준 글씨.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는 교토에 머물면서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1559~1619)과 교분을 맺었다. 대사는 조선-일본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의 외교승 센소 겐소(仙巢玄蘇·1537~1611)의 소개로 엔니를 만났다. 사명대사는 교토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승려들과 교분을 맺었다.
사명대사는 ‘도호(道號·도사의 호)를 써달라’는 엔니의 부탁에 ‘허응(虛應)’과 ‘무염(無染)’이라는 자와 호를 지어주었다, 사명대사는 엔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응과 무염으로 지어 관세음보살이 두루 중생의 소리를 듣고 살핀다는 뜻을 담았으니 잘 새겨서 마음에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사명대사는 ‘계속 정진하고 중생 구제에 힘쓸 것’을 강조하는 시도 함께 적어두었다.
사명대사의 칠필 시구. 신라말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시 중 두 구절이다. |고쇼지 소장
첫 공개되는 사명대수 유묵 중에는 대혜선사(1089~1163)의 전서(篆書) 글씨를 보고 감상을 적은 글이 있다. 즉 ‘중생을 구하라는 스승 서산대사(1520~1604)가 남긴 뜻에 따라 일본에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행(使行)의 목적이 포로송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사명대사는 이 유묵에서 “나는 대혜선사의 37대 직계 후손”이라고 밝혔다. 임제종은 중국 불교 선종(禪宗) 5가(家)의 한 파이다. 한국의 선종은 대개가 이 임제종풍이었다. 태고 보우(1301~1382)와 나옹 혜근(1320~1376)이후부터는 확실하게 임제종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사명대사가 ‘대혜선사의 직계후손’임을 밝힌 것은 임제종의 법맥이 중국 선종의 제6조인 혜능(638~713)-대혜선사를 거쳐 사명대사 본인으로 이어진다는 조선 불교계의 법통인식을 보여준다.
“자순불법록”은 고쇼지를 창건한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이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고쇼지 소장
임제종으로 개종한 일본 승려 엔니도 사명대사와의 교분에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은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이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엔니는 “다행히 만 리 길을 가지 않고 이곳에 앉아서 자신이 속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사명대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며 기쁨과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출품작 중에는 통일신라말 문장가인 최치원(857~?)의 시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 중 두 구절을 사명대사 친필로 쓴 유물들도 있다.
사명대사 유정은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명을 이끌고 왜병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년 가을에 송운(사명대사 유정)은 ‘승려는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의병을 일으키라’는 통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의승병 1000여명을 모았다”(<서애별집>)고 기록했다. 의승병을 이끌고 순안(평안도 평원)으로 행하던 사명대사가 읊은 시가 자못 비장하다. “10월에 상남(湘南)을 의병이 건너가니 나팔소리 기(旗)의 그림자 강성을 진동한다, 칼집 속 보검은 밤중에도 울부짖네. 원컨대 요사(왜병)를 베어 성명에 보답코자….”(<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 유정의 초상화. 화면 왼쪽 위에 ‘널리 세상을 구하는 스님’이라는 뜻의 사명대사의 시호인 ‘자통홍제존자’에서 나왔다. ‘송운’은 사명대사의 별호이다. |동국대박물관 소장
사명대사는 이후 스승인 서산대사의 부장이 되어 군량과 제반 병기를 마련, 손질하고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조정은 사명대사에게 절충장군의 직함과 함께 팔도의승군 부총섭이 되었다. 사명대사의 공이 컸음을 알 수 있는 <선조실록> 기사가 있다. 즉 1593년(선조 26년) 4월 12일 선조는 ‘승장 유정(사명대사)에게 당상관의 상급을 내리라’는 특명을 내린다. “승장 유정의 군사들이 정예로워서 왜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여러번 세웠다. 그렇지만 군직(軍職)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닌 듯하다. 그는 속세를 떠난 사람이니 파격적인 특별상을 내려 훗날의 공효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정에게는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정 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
이때 실록을 쓴 기자는 “전란을 당해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면서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실록>의 사가는 쉰살이 된 사명대사의 분전을 인용하면서 임진왜란 때 도망가기 바빴고, 두려움에 떨기에 급급했던 무사는 물론이고 조정대신들까지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1596년(선조 29년) 12월5일 선조가 “유정(사명대사)이 어디 있느냐”고 다급하게 찾는 기사가 등장한다. “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 사람은 비록 중이기는 하나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다. 유정은 영남 사람이니 영남으로 내려 보내어 원수(元帥)의 절제를 받게 하는 한편,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한쪽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국사에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후하게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그후 4차에 걸쳐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펼친 사명대사는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 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의 허황된 일본의 요구를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사명대사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년) 2월21일 스승 서산대사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던 길에 “일본에 가서 일본의 실정을 상세히 탐지하고 그들의 강화 속셈을 알아보라”는 선조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실록을 쓴 사관은 “조정에 얼마나 자모가 없기에 왜적의 사신 하나를 감당못해서 어쩔 줄 몰라하느냐”면서 “사명대사가 아니고는 국가의 긴급대사를 맡을 사람이 그렇게 없느냐”고 한탄했다.(<선조실록> 1604년 2월24일)
그러나 조선 조정이 특별히 사명대사를 사신으로 선택한 이유는 있었다, “유정은 왕년에 여러번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출입해서도 대언(大言·큰소리)으로 굽히지 않아 가토 기요마사가 매우 존경했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기요마사는 사명대사의 사람됨을 칭송했으므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왔다가 도망쳐온 조선사람들까지 ‘송운(사명대사의 호)의 이름이 일본인들 사이에 자자하다’고 했다. 그래서….”(<선조실록> 1604년 6월 8일)
또 일본의 재침을 우려한 조선 조정이 일본의 속셈을 몰랐기 때문에 ‘승려’(사명대사)를 보낸 점도 있다. “유정(사명대사)가 대마도로 가면 일본 본토로 가자고 협박할 것인데…만약 그들이 협박하면 가지 않을 수 없으나 일본인들이 물으면 ‘대마도에서 생령들을 구제할 것이고 그 외에는 산승(사명대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답변해야 합니다…그러다 뜻밖에 협박하는 일이 있으면 다만 죽을 각오로 완강히 거절하여 국가에 치욕을 남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선조실록>).
조선정부를 대표하는 관리를 공식 사절로 보냈다가 일본 외교의 농간에 놀아날 경우를 대비해서 ‘산승’, 즉 사명대사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명대사는 조선-일본의 전후처리를 위해 대마도로 향했으며, 약 3~4개월 후인 그해(1604년) 12월27일 도쿄에 닿았다. 포로송환을 위한 길이었다.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보자 “설보(說寶)화상이 왔다. 저 스님이 설보화상이다”하고 환영하며 존경했다. ‘설보화상’이란 지난날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서 기요마사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다”라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인들은 ‘보배를 그렇게 멋지게 설명한 스님’이라며 설보화상이라 일컬으며 존경했다는 것이다.
사명대사는 결국 1605년(선조 38년) 3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성립시켜 조선 조야의 근심을 없앴으며 특히 일본에 잡혀갔던 3000여 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조선조정은 1605년(선조 38년) 5월4일까지만 해도 “일본에 간지 10개월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망연하다”(<선조실록> 1605년 5월4일)며 초조하게 사명대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과 8일 뒤인 12일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쇼 요시토시)가 “화호를 허락해 주셔서 그 감격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답서를 보냄으로써 조선-일본간 화의가 이뤄졌음을 알게 됐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전시회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백성을 구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한 사명대사의 뜻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