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시담록

조지 오웰과 최장집의 경고 / 개돼지로 살아보니 / 그래도 되니까 / '잊혀질 권리' 없다

이름없는풀뿌리 2020. 1. 15. 09:06

[태평로] 조지 오웰과 최장집의 경고

조선일보 한현우 논설위원    입력 2020.01.15 03:15

권력 속성 간파한 '동물농장'… 과거 청산·내로남불 판박이
권위주의 시절 운동권 세력, 우리를 다시 길들이려 한다                            

조지 오웰의 신랄한 우화 '동물농장'을 결국 다시 꺼내 읽었다. 이른바 '조국 사태' 이후 자주 비유된 소설이긴 하지만 워낙 잘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최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 강연에서 "현 진보 세력의 직접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고 책장을 뒤졌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러시아혁명에 이은 스탈린 전체주의를 낱낱이 까발려, 권력이 어떻게 부패하는가 통찰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반공 소설'로 알려진 이 작품은 모든 종류와 크기의 권력 속성을 기막히게 간파하고 있었다. 70년 전 작고한 오웰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았다.

반란을 앞둔 동물들의 비밀 회합에서 우두머리 돼지가 처음 던지는 질문은 "쥐는 우리의 동지인가"였다. 권력이 곧 바뀔 것을 간파한 쥐는 벌벌 떨지만, 돼지는 뜻밖에도 쥐를 동지로 받아들인다. 권력 쟁취를 위해 '인간의 적은 동물의 친구'라는 정치 구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을 쫓아낸 동물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과거 청산이다. 멍에와 마구, 재갈과 코뚜레, 갈기와 꼬리를 장식했던 댕기들도 모두 우물에 던져버린다. 어떤 동물이 "댕기는 달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돼지들은 "그 댕기가 바로 노예의 상징"이라고 혼쭐낸다. 좋든 나쁘든 과거 정권의 것들은 모두 적폐로 몰아 청산하는 데 몰두해 온 권력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최 교수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촛불 시위 이후 가장 큰 정치적 방향 착오가 적폐 청산"이라며 "완전히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정치, 보수 진영을 궤멸시키려는 의지가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농장을 장악한 돼지들은 우유를 독차지한다. 암탉들이 "인간 주인은 우리 모이에 우유를 섞어주기도 했다"고 푸념하자 돼지들은 "우리는 우유가 좋아서 먹는 게 아니다. 우리가 건강해야 당신들을 돌볼 수 있다. 여러분을 위해 우유를 먹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현 정권의 수많은 '내로남불' 사례와 무엇이 다른가. 정의를 주창한 권력은 어떤 짓을 해도 정의롭다는 궤변이다. 최 교수 역시 "운동권 출신들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대의제 민주주의나 민주적 정부가 아니라 '인민의 권력'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동물들은 인간 지배를 받던 시절보다 훨씬 열심히 일하지만 사는 건 그때만 못하다고 느낀다. 그럴 때면 돼지들이 나타나 무슨 수치가 몇 퍼센트 늘었다는 자료를 내밀며 좋아지고 있다고 윽박지른다.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따지려 하면 돼지들이 따로 사육한 개들이 나타나 으르렁거린다. 길들여진 양들은 그 옆에서 돼지 찬가를 목 놓아 부른다.

'동물농장'을 처음 접했을 때는 돼지 무리와 그에 빌붙은 동물들 위주로 읽었다. 다시 읽으면서 새로 발견한 동물은 말과 당나귀이다. 말은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내가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며 모든 일에 앞장선다. 그러나 결국 폐마업자에게 팔려간다. 당나귀는 "나는 오래 사는 동물"이라고 습관처럼 말하며 모든 일에 체념한다. 그는 "삶은 항상 나쁠 것이며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우리 중 상당수는 말이나 당나귀였다. 그때 개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이 다시 우리를 말이나 당나귀로 길들이려 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교수들이 옛날처럼 언론 통제가 겁나는 게 아니라 집단의 공격이 무서워서 얘기를 '자체 검열'해서 한다."





[안혜리의 시선] 개돼지로 살아보니

 

 개돼지. 요즘 세태를 관통하는 대표 키워드는 단연 ‘개돼지’가 아닐까 싶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불길한 예언서로 읽히던 현 정권 초반부터 슬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니 지난해 9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전후로 아예 국민 단어가 됐다. 도덕성과 위선은 둘째치고 온갖 의혹으로 온 가족이 수사받는 인물을 굳이 법무부 장관에 앉힌 데 대해 이언주 의원은 항의표시로 삭발하며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것”이라고 날을 세웠고,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국민들이 ‘우리를 개돼지로 아느냐’고 분노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을 무시하는듯한 오만한 인사권 행사를 맞닥뜨린 보통 사람들 역시 망연자실한 채 광화문 광장으로 뛰쳐나와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라고 항변해야 했다.      

국민 얕보는 청와대·여당 폭주에
둘로 쪼개진 ‘개돼지 나라’로 전락
노무현에 부끄럽지도 않나

눈길을 끄는 건 개돼지의 일등 덕목인 맹목적 지지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 정권 지지자들도 개돼지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가령 한 전교조 소속 교사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조국 관련 뉴스를 모조리 가짜로 규정하며 “조국 뉴스를 믿으면 개돼지”라 했고, 조국 얘기만 나오면 거의 이성을 잃는 소설가 공지영은 “이게(조 장관 낙마) 먹히면 우린 조중동자한(주요 보수 언론과 자유한국당)에게 영원히 개돼지”라며 ‘조국 반대=개돼지’ 공식을 들고나와 선동에 앞장서 왔다.
 
한마디로 지금 대한민국은 서로가 서로를 개돼지라 손가락질하며 둘로 찢어진 나라가 됐다.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세력이 누구인지, 또 누가 개돼지 노릇을 자처하는지는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어느 쪽 의견을 따르더라도 우리가 지금 개돼지 신세인 것만은 분명한 모양이다.
 
이러니 ‘나향욱의 재발견’이라는 자조적인 한탄마저 시중에 떠돈다. 박근혜 정부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그는 2016년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영화 ‘내부자들’에 빗대 “99%의 민중은 개·돼지,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발언해 파면됐다. 불과 몇 년 뒤 이렇게 개돼지 나라의 국민이 되고 보니 그가 진실을 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그때 그는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는데 길게는 이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부터, 짧게는 조국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 8월부터 막상 개돼지로 살아보니 그건 영 아닌듯싶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조국 전 장관을 언급하며 “지금까지 겪었던 고초만으로도 아주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며 국민들더러 “이젠 놓아주라”고 했다. 국민이 안 된다는 인물을 기어이 써서 나라를 두 동강 내놓고는 범죄로 조사 받는 걸 ‘고초’라 표현하며 오히려 국민을 탓하다니, 아무리 우리가 개돼지여도 이쯤되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지난 대선 때 문 대통령을 지지했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국민을 개돼지로 보고 능멸하고 있다”고 맹공을 퍼부었을까.  
     
여론에 떠밀려 철회하긴 했지만 청와대가 조 전 장관 가족의 수사를 인권침해라며 국가인권위에 송부한 걸 비롯해 이 정부의 비상식적 폭주는 이루 다 헤아리기도 어렵다. 상식은커녕 법치 부정과 헌법 무시도 예사다. 자기편 수사 방해 의도로 검찰총장 의견을 배제한 채 손발 자르기 인사를 강행하고도 거꾸로 총장더러 항명했다고 징계 방안을 찾으라 하질 않나, 같은 진영 사람들조차 반발하는 청와대 압수수색 거부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한다.
 
청와대가 이러니 장관이며 여당 의원 등도 딱 그 수준으로 국민을 대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부동산 급등에 ‘타다’ 문제까지 손대는 것마다 재앙 수준의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김현미 국토부 장관(민주당의원)이 비판적 발언을 한 자기 지역구 주민에 “물 나빠졌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고,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며 장애인을 비하하는 망언을 예사로 하는 것도 다 이런 인식인 듯싶다. “증거 인멸이 아니라 증거 보존”이라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궤변도 빼놓을 수 없겠다.
 
국민을 개돼지 삼으며 신뢰와 공정, 아니 보다 근본적인 옳고 그름의 가치관마저 무너뜨린 이 정권을 보고 있자니 “한 사회의 가치관이 거꾸로 서 있거나 가치 판단이 흔들릴 때, 잘못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지식은 어떤 도둑질이나 살인보다 위험한 범죄”라던 누군가의 비판이 떠오른다.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얘기다. 그는 『여보, 나좀 도와줘』에서 국민을 속이고 무시하는 머리 좋은 사람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걸핏하면 노무현 정신 운운하는 이 정권 사람들이 분명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인데,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정작 개돼지들만 부끄러워하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안혜리 논설위원




[이현상의 시시각각] 그래도 되니까

 

표출되지 못하는 감정은 안으로 파고들어 신경증이 된다. 불면·불안·두통을 초래하기도 하고, 충동 및 분노 조절 장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더 움츠러들었다가는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을까. 조국 사태에 가위눌렸던 집권 세력이 ‘검찰 평정’ 후 완연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여기저기서 솔직한 감정 표출이 목격된다. 때로는 실언을 가장했고, 때로는 진솔함으로 포장했다.  


부쩍 잦아진 권력의 오만한 행태
‘검찰 평정’ 후 되찾은 자신감인가


‘선출된 권력’ 통제는 누가 할 건가
“동네 물 나빠졌네.” 자신을 3선 중진으로 키워준 지역구를 찾은 국토부 장관은 대놓고 주민을 모독했다. 1년 전 장애인 비하 논란을 빚었던 집권 여당 대표는 비슷한 실언을 반복했다. 청와대 정무수석은 ‘부동산 매매 허가제’라는 초헌법적 발상을 꺼냈다가 ‘개인 견해’라는 변명 뒤에 숨었다. 무심함인가 경솔함인가, 아니면 오만함인가. 실수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사극에서나 등장할 법한 ‘명(命)’ ‘거역’이라는 단어가 현대 민주정치의 핵심 기구인 국회에서, 그것도 법무부 장관의 입에서 결연한 어조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입법부 수장 출신을 총리로 앉혀 삼권분립 훼손 논란을 빚었던 청와대는 이번엔 대놓고 법원이 발부한 수색영장을 무시했다.
 
솔직함의 절정은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고초를 겪은 조국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역시 사람이 먼저라서? 진보의 상식과 가치를 뒤흔들었던 배신감은 어디로 갔을까.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공수처 설치, 선거법 개정, 검찰 인사 및 조직 개편으로 권력의 정지작업을 끝낸 마당에 굳이 속내를 숨겨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제없이 권력이 재창출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 아니면 이런 무람없는 말들이 나올 수 없다. 무력한 야당은 조력자다.
 
정권이 검찰을 압박한 명분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다. 이 멋있는 수사(修辭)에 숨은 뜻은 “선거를 통해 뽑힌 대통령에게 덤비지 말라”는 것이다. 선거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적 통제’는 민주주의의 또 다른 축인 ‘권력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과 맞선다. 상반되는 두 개념 사이에서 균형점을 잃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험해진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선출된 권력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보장받은 5년의 임기는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인가. 책임지는(responsible) 정부는 반응하는(responsive) 정부다. 지난 3년 가까운 집권 동안 권력은 반응했는가. 자신을 찍지 않은 과반의 국민은 그저 배제의 대상 아니었던가. ‘민주적 통제’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향하는 창끝을 부러뜨린 권력을 과연 ‘반응하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국민이 던지는 표의 가치마저 계산하기 힘든 잡탕 선거법으로 뽑는 국회는 ‘반응하는 대의 기구’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 즉 공감 능력이다.”(대커 켈트너, 『선한 권력의 탄생』) 현 정권은 유달리 공감 능력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권력은 이율배반적이다. “권력은 다른 사람의 생각·지식·감정 등을 상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 즉 ‘조망 수용(perspective taking)’ 능력을 떨어뜨린다.”(김병수, 『마음의 사생활』) 완성되는 순간 스스로 허물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자 역설이다.
 
견제장치를 무력화시킨 권력은 벌써 폭주 조짐을 보인다. 열렬 지지층이 강력한 방어막을 형성한다. 그러나 배제와 분열의 대상이 된 반쪽 국민은 무력감과 신경증을 호소하며 복수심을 키우고 있다. 반응하지 않는 권력 구조에서 되풀이되는 비극이다. 권력이 오만해지는 이유는 한 인기 웹툰의 인물이 말했듯 단순하다. “그래도 되니까.” 선출 권력을 통제하는 것은 결국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그 주된 수단은 선거다. 4월 총선이 주목되는 이유다.   이현상 논설위원




[동서남북] '잊혀질 권리' 없다

조선일보  황대진 정치부 차장    입력 2020.01.17 03:15

文 "임기 후 잊혀지고 싶다"
남의 과거는 적폐로 파헤치고 자신은 잊어달라는 '내로남불'
정치인은 잊혀질 권리 없어                            

"임기 후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 신년 회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왜 잊혀지고 싶을까. 문 대통령은 정부가 172억원을 들여 자신을 위한 기록관을 짓겠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다.

대통령 주변엔 "잊어 달라"는 사람이 많다.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양정철 민주연구원장도 그랬다. 양 원장은 2017년 대선이 끝나자 "잊혀질(어법으론 '잊힐'이 맞는다) 권리를 허락해달라"며 해외로 나갔다. 양 원장이 이끌던 문재인 대선 캠프에는 '디지털소멸주권강화위원회'란 조직도 있었다. 여기 위원장을 하던 '잊혀질 권리' 전문가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 직원에 대한 '갑질' 의혹으로 수사를 받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잊혀질 권리'는 주로 인터넷상에서 자신과 관련된 정보의 수정이나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EU 사법재판소가 이를 인정했다.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가 아닌 합법 정보도 지워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쪽에선 잘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표현의 자유와 충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자는 대중들 사이의 합법적 소통을 차단하고 검열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개성공단은 국내 일자리를 없애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민주당 신동근 의원은 이 의원이 과거 민주당 소속일 때 '개성공단 지킴이' 모임에 들었던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정치인에게 잊혀질 권리는 없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정치인이다. 그는 신년 회견에서 청와대를 수사하는 검찰 팀을 잘라낸 인사에 대해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이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시절에는 "청와대가 검찰 수사와 인사에 관여했던 악습을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했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을 쉽게 잊을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다.

법적으로도 잊을 수 없게 돼 있다. 문 대통령은 올해 512조원, 작년 470조원, 재작년 428조원 예산 집행의 총책임자다. 임기 동안 국민 돈 2500조원가량을 쓰고 나갈 것이다. 그런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또 예산이 들어간다.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은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모든 과정 및 결과가 기록물로 생산·관리되도록 하여야 한다'(제7조)고 규정한다.

사실 이 정권은 '잊지 않기'의 선수들이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를 품고 다니며 '아름다운 복수'를 다짐했던 사람이다. 대통령 당선 후에는 100대 국정 과제 제1호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다. 부처마다 청산위원회를 만들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조그만 잘못까지 파헤쳐 두 대통령을 감옥에 넣었다. 두 정권에서 일한 공직자 100여명이 기소되고 50여명이 구속됐다. 심지어 무생물, 4대강에 설치한 보(洑)마저 잊지 않고 해체했다. '잊혀질 권리'도 '내로남불'이다.

문 대통령이 퇴임 후 진지하게 '잊혀질 권리'를 주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워낙 인권 과 사생활을 중시하는 분이어서 혹시 어쩔지 모른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신 의원이 괴테의 '파우스트' 속 대사를 인용해 이 의원에게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라." 문 대통령은 "임기 후 좋지 않은 모습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