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코란과 하디스, 이슬람의 다섯 기둥 그리고 카바(2020/04/23, 여름날의소야곡 / 폴모리아)

이름없는풀뿌리 2020. 4. 23. 12:42
■ 코란과 하디스, 이슬람의 다섯 기둥 그리고 카바 1) 코란 쿠란(아랍어: أَلْقُرآن)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 이후 23년간 알라('하나님'이라는 의미)에게 받은 계시를 구전으로 전하다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장소에서 여러 시대를 걸쳐 기록한 기록물들을 모아서 집대성한 책으로, 이 계시는 무함마드가 40세 무렵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히라산 동굴에서 천사 지브릴을 통해 처음 받았다. 쿠란은 까라아(قَرَأَ, 낭송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낭송'이라는 뜻을 지닌다. 쿠란은 계시되어 가르쳐지면, 제자들이 그것을 낙타의 골편이나 야자의 엽피, 양피지 등에 기록하였으며,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이후 제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 시절에 꾸란을 한 권으로 집대성해 보관하였고, 제3대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은 꾸란 결집위원회를 조직하여 최종적으로 집대성 작업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꾸라이쉬 부족의 언어로 그 기재 방법을 통일하였으며, 정통본을 암송자인 하피즈와 함께 이슬람 각지로 파견하여 전파하도록 했으며, 이것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쿠란의 정본(定本)이다. 또한 이것을 달리 '이맘본' 또는 '우스만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우트만 코란 중 하나가 티무르 정벌시 탈취되어 우즈베키스탄 텔리아샤야크흐 모스크(Telyashayakh Mosque, Khast Imam Mosque)에 보관되어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스만 이븐 아판('Uthman ibn 'Affan) 예언자 마호메트 사후 그를 계승한 제3대 칼리프 칼리프 통치를 중앙집권화했고 〈코란〉의 정본을 편찬하게 했다. 우스만은 이슬람사에서 혹평을 받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이슬람 공동체내의 종교적·정치적 분쟁이 공개적으로 시작되었다(→ 피트나). 우스만은 메카의 부유하고 권력있는 우마이야 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상인이 되었다. 615년경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설교를 시작했을 때 마호메트는 우마이야 가문의 적개심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약 5년 후 우스만은 마호메트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있는 인물 중 첫번째 개종자가 되었다. 마호메트는 메카의 귀족계급과의 교제를 소중하게 생각했으며 그의 딸을 우스만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우스만은 힘을 행사하거나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잡지는 않았다. 이슬람사 원년에 그의 역할은 소극적이었다.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가 644년에 사망하자 우스만은 우마르가 죽기 전에 조직해놓은 선출위원회에서 우마르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우스만이 뽑힌 것은 일종의 타협점이었음이 명백하다. 그때 강력한 후보들이 경쟁을 통해 서로를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우스만은 우마이야 가문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 가문은 예언자 마호메트 생존시 세력이 약간 약해졌으나 다시 그 영향력을 획득하고 있었다. 칼리프가 되자 우스만은 그때까지 여러 종류가 전해지던 〈코란〉의 정본을 반포했다. 우스만은 우마르가 실시했던 일반 정책들을 그대로 실행했으나 우마르만큼 강한 면은 보이지 못했다. 우마르는 이슬람 제국의 넓이를 꾸준히 확장시킨 정복 사업을 계속했으나 이제는 그 승리를 얻기 위해 치른 값이 승리의 보상으로 돌아온 전리품보다 적어졌다. 우스만은 마호메트하에서부터 나타났던 부족간의 느슨한 동맹관계를 대신할 결속력 있는 중 앙권력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우스만은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제도를 만들었으며 자기 가문의 사람을 지방 총독의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되자 중앙 정부가 받아들인 많은 재물이 군대로 가지 않고 우스만 가족들과 지역 총독들에게로 갔다. 이러한 정책 때문에 군대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또한 가족이건 부족이건 상관 없이 총독들에게 막중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우마르와는 달리 그의 친척들의 힘에 압도되었다. 650년이 되자 이집트와 이라크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655년 일단의 이집트 불만 분자들이 칼리프 권력의 중심지인 메디나로 진군해왔다. 그러나 우스만은 그들을 회유하여 이집트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또 다른 반란군들이 우스만의 집을 포위하여 며칠간 계속된 산발적인 싸움 끝에 우스만은 656. 6. 17, 메디나에서 살해당했다. 9세기 말부터 모음 기호(타쉬킬)가 붙어 표기되기 시작했으며 운율에 따른 읽는 법과 문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그 내용은 같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는 꾸란의 구절로서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의 하나인 샤하다(하나님 이외에는 경배받을 존재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이다)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조기를 게양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가) 구성 문체는 사즈아이고 일종의 운을 단 산문체로 되었고, 독송 할 때 리듬감을 느낀다. 6342개의 아야(절)와 114의 수라(장)로 되어 있으며 각 수라는 암소·이므란일가·여자등과 같은 제목으로 분류된다. 꾸란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점 하나까지도 리듬과 운율로 연결되어 소홀히 할 수 없다. 나) 주석서 (타프씨르) 꾸란의 주석서는 타프시르(Tafsir)로 불리며 어근은 아랍어 fassara(설명하다)이다. 꾸란 구절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사용되는 것은 먼저 꾸란 그 자체의 다른 구절이며, 두 번째로는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이며, 마지막으로는 사하바(무함마드의 교우)의 전승이다. 다) 독송 하루 5번 기도시 무슬림은 정확한 발음으로 꾸란을 암송하여야 하며 꾸란 전체를 암기하는 자를 하피즈(Hafiz)라고 한다. 각종 의식에서는 정규 독송자가 소리 높이 독송한다. 10여 개의 유파가 각기 다른 정지나 성조로 독송했으며 10세기경 이후는 7파로 통일되어 부르고 있다. 모든 예배 시에 알 파티하는 반드시 독송하며, 하루 다섯 차례 기도를 올리는 동안 최소한 17회 이상 개경장을 암송하게 된다. 라) 번역 알라가 계시한 꾸란은 문학적 아랍어로 되어있으며 아랍어 자체로써 꾸란을 이해할 때만이 그 의미에 가장 정확히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원뜻을 훼손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하여, 꾸란은 타언어로 번역된 꾸란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아랍어를 사용하는 독자, 예를 들어 한국인을 위해 한국어로 번역된 꾸란은 ‘한국어 꾸란’이 아닌 ‘꾸란 의미의 한국어 해설’로 불린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관심을 가져 12세기에 꾸란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다시 독일어·이탈리아어·네덜란드어 등으로 중역되었다. 한국어로는 1980년 김용선 교수가 펴낸 《한역주해 코란 역편》이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최영길 교수에 의해 이루어진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이 번역본으로 나와 있으며, 이후 한국어로 완역하고 주석과 해석을 첨가한 《꾸란 주해》를 다시 펴내었다. 마) 꾸란의 장 (수라) 여기서의 수라(아랍어: سورة)는 "꾸란의 장"에 대한 아랍어 표기이다. 이는 보통 메디나 수라와 메카 수라로 구분되나 그 구분은 확실하지 않다. 모든 수라는 아야트, 즉 절로 나뉜다. 114개의 수라는 다음과 같다. 이때 "알"은 정관사이고, 그에 따라, 예를 들면 "알 진"은 "정령 장"이라는 뜻을 가진다. 바) 꾸란(코란)은 어떻게 탄생했나/이만석 목사 이슬람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꾸란은 천상에 원본이 있으며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완벽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꾸란으로 신구약 성서의 진위를 구별하는 기준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성경은 여러 사람이 수천년 동안 쓴 것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많지만 꾸란은 무함마드 한 사람에게 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혼돈과 오류가 없고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일점일획도 변치 않고 원본이 그대로 보존돼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점에 의심을 품으면 거룩한 꾸란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꾸란이 변질되었다거나 한 구절이나 한 단어라도 추가되거나 삭제되었다고 말하는 자체가 알라의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모순이 이슬람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슬람 학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 이슬람권에서의 자신의 영향력과 신분 유지를 위해, 또 사실을 말했을 경우 직면하게 될 핍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부카리(Bukhari)나 무슬림(Muslim)의 하디스는 이슬람에서 공식적으로 경전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경전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꾸란보다 더한 권위가 부여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의 교리를 설명할 때면 제일 먼저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다섯 기둥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꾸란에서는 이 다섯 가지 의무를 모아 놓은 곳이 없다. 이는 부카리의 하디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슬람의 교리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는 문제점을 제기할 때는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말하기 보다는 꾸란과 부카리 혹은 무슬림의 하디스를 인용한다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서는 하디스에 비교적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런데 그 자료들은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듣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무함마드는 책을 받은 일이 없고 그가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으로 만든 일도 없고 후대 무슬림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책으로 묶으라고 명령한 일도 없다. 그런데 꾸란에는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책을 내려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함마드는 알라가 자신에게 성서의 모체가 되는 책을 내려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대에게 그 책을 계시하신 분은 알라이시며 그 안에는 근본의 말씀이 있어 성서의 모체가 되고...”(꾸란3:7) “그분의 종(무함마드)에게 그 책(꾸란)을 계시한 알라께 찬미를 드리나니 그 안에는 일점의 왜곡됨도 없노라.”(꾸란18:1) 이 두 구절 외에도 꾸란에는 여러 곳에서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책(al-kitab-the Book)을 내려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죽었을 때까지도 꾸란이라는 책이 없었다. 이슬람의 역사와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의 형태로 묶은 일이 없었다. 다만 그가 간헐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암송하던 소리를 들었던 제자들이 그 내용을 나뭇잎이나 돌 등에 새겨놓고 암기하기도 했던 것들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꾸란의 내용을 암기하던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하게 되어 무함마드의 계시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우마르(Umar)의 제안을 받아들여 첫 번째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가 그것을 모으게 하였고, 1차 수집한 것을 우마르의 딸 하프사에게 맡겼다가 결국 3대 칼리프였던 우트만(Uthman)의 명에 의해서 하프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흩어져 있던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여 종합 편집하게 되었다. 그것들 외에는 어떤 종류의 완본이든지 조각본이든지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초기 무슬림은 꾸란은 책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카리의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죽은 후 전쟁터에서 꾸란을 암송하던 사람들이 죽자 전쟁이 더 심해져 꾸란을 암송하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리면 꾸란 자체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구절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묶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주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명하지 않았던 일을 그의 허락 없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자기들이 볼 때는 좋은 일이지만 알라가 나중에 그 일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에게 명하여 꾸란의 조각들을 모으라고 명했던 것이었다. 그 명령을 받은 타비트는 산을 옮기라는 명령보다 더 어려운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무함마드는 자기가 계시 받았다고 말했던 꾸란 구절들을 잊었다. 무함마드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낭송해 준 구절들을 나중에 망각하고 잊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낭송하는 것을 듣고 생각났다고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다음 하디스 구절이 그 증거다. “메신저께서는 사원에서 낭송자가 꾸란을 낭송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가 잊었던 꾸란의 0장 0절을 생각하게 했으니 알라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62) 꾸란의 구절을 망각하는데 대한 계시는 꾸란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취소하거나 망각케 한 어떤 계시의 구절이 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낫거나 비슷한 것을 가지고 온다. 알라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꾸란2:106, 힐럴리 역) 꾸란을 낭송하는 방법은 원래 여러 가지였다. 알라의 메신저(무함마드)께서 “가브리엘 천사가 내게 꾸란을 어떤 식으로 낭송해 주기에 내가 다른 식으로 낭송해달라고 계속 부탁을 했더니 결국은 7가지 방법으로 낭송해 주셨다”고 말했다. (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13) 꾸란은 원래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할 수 있도록 계시되었다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무함마드는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준 꾸란을 그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의 요청에 의해서 가브리엘 천사가 낭송하는 방법을 7가지로 다시 계시해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무슬림들은 7세기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한 가지 억양과 발음과 악센트로 낭송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의미도 모르는 아랍어로 꾸란을 낭송하게 하는 것일까? 우트만 꾸란의 편집이 완료되었을 때 꾸라이시 족들이 교정을 보았다. 우트만은 3명의 꾸라이시 사람들에게 “자이드 빈 타비트의 꾸란 중 어느 부분이라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꾸라이시 방언으로 기록하라. 왜냐하면 꾸란은 그들의 방언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7) 꾸란을 수집할 때 실수로 빠뜨렸던 구절들이 있었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꾸란을 가장 잘 외우고 있었던 4사람이 있었다. 무함마드는 사람들에게 압둘라 빈 마수드, 쌀림, 무아드, 우바이 빈 카압, 이 네 사람에게 꾸란을 배우라고 명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21) 그러나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를 역임했던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에게 꾸란을 모으라고 명령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타비트는 실수로 꾸란의 한 구절을 빠뜨렸다고 고백하고는 나중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것을 들었던 생각이 나서 그 구절을 찾아 나섰다가 결국은 쿠자이마 빈 타비트 알 안싸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구절은 꾸란 쑤라 타우바(9:128~129)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계시된 꾸란 구절이 즉시 수정된 경우도 있다. 꾸란 4장95절에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는 구절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다고 하여 자이드가 기록하려는데, 그 때 아므르 빈 움막툼(Amr bin Um Maktum)이라는 소경이 무함마드 뒤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오 알라의 메신저여 나 같은 소경에 대한 당신의 명령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계시가 다시 내려왔다는 것이다.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불구자도 아닌데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 (꾸란4:95)(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2) 꾸란에는 사탄에게 받은 계시도 있었다. 무함마드가 소속되어 있던 메카의 꾸라이시 족이 섬기던 신 알라(Allah)에게는 세 딸 신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라트, 우짜, 마나트였다. 그들에 대한 꾸란이 계시되었는데 “너희는 라트, 우짜, 마나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느냐? 저들은 하늘 높이 나는 학과 같아서 그들의 중재는 알라께서 열납하시느니라”(꾸란53:19~23)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알라의 단일신론을 주장하면서 딸 신들을 인정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계시를 취소하는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계시는 지금 꾸란에 있는 것처럼 세 딸들의 권위를 부인(꾸란53:19~23)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왜 알라의 계시가 바뀌었냐고 물었을 때 “그 구절은 사탄이 내 혀에 넣어준 것이었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에 의해서 취소되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Al Tabari Hadith Book6 No. 107) 그와 같은 것을 보편화시키면서 인정하는 구절도 있다. “그대 이전에 우리가 보낸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계시를 낭송할 때 사탄이 거짓을 그 속에 섞어 넣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러나 알라께서는 사탄이 섞은 것을 취소하시고 자신의 계시를 세우셨다. 알라는 모든 것을 아시고 지혜로우시다.”(꾸란22:52 힐럴리 역) 꾸란에서 사라진 구절도 있다. “알라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때 그 계시함이 무엇인가는 알라만 아심이라. 이에 그들이 그대는 위조자라고 말하나 그들 대다수는 알지 못하더라.” (꾸란16:101 최영길 역) 대체라는 말은 하나를 취소하고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말인데 하늘에 원본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꾸란에 대해서 미화된 홍보용 자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꾸란은 사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부터 수시로 취소 또는 첨가되기도 하며 대체되기도 하는 변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책으로 묶을 생각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나열된 사례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계시가 분명히 꾸란에 있었고 무함마드도 투석형을 집행했고 그의 후계자들인 칼리프들도 투석형을 알라의 명령으로 알고 집행했는데 지금은 꾸란에 그 구절이 없다는 것을 보더라도 양심있는 무슬림 학자들이라면 꾸란이 하늘에 원본이 있었던 것이 그대로 책으로 계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하디스 하디스(아랍어: حديث نبوي)는 무함마드가 말하고(Qaul), 행동하고(Fi'ul), 다른 사람의 행위를 묵인한(Taqreer)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하디스는 꾸란(코란), 이즈마, 끼야쓰와 함께 샤리아(이슬람법)의 4대 원천을 이루며 그 중 꾸란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무슬림은 하나님의 말씀인 꾸란과 더불어 하디스에 기록된 무함마드의 언행(순나)에 따라 행동함을 삶의 기반으로 한다. 하디스를 수집한 유명한 이슬람 학자로는 이맘 부카리, 이맘 무슬림 등이 있다. 기독교의 Q문서처럼 종교의 시조의 말을 담은 종교적인 어록인 것이다. 가) 배경 이슬람교 최초 백년간의 사업상 특색은 무함마드의 언행에 관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사항을 수집, 전달하는 활동이었다. 이 사업은 자발적인 것으로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였던 메디나에서 발전하였다. 당연히 그 지역은 무함마드와 접촉을 가졌던 많은 '교우'들이 모여살던 곳이어서 제1차적인 자료를 얻기에는 매우 적당한 곳이었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 사회에서는 '순나(전통)'가 규범적 가치를 지녀서 각 종족은 그들 조상의 순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이 관념으로부터 초기 이슬람에서는 교단 전체의 수나를 종교와 사회규범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정복사업에 따라서 아랍족이 주둔하게 된 새로운 정복지마다 순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하디스 학자들은 순나를 무함마드가 설정한 관례에 한정할 것을 주장하고 이 견해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나) 역사 본래 문자로 쓰여진 것은 계시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하디스는 구전(口傳)으로 전승된 것이었다. 그러나 뒤 이어 율법과 교리를 마호메트의 언행에 연관시키기 위하여 많은 하디스가 유포되었고 각 분파와 정치적 당파는 자기 파에 유리하도록 하디스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교리상·율법상 후세의 시대적 필요에 따라서 하디스의 공급이 성행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유태교·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훈화,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된 잠언(箴言)까지도 마호메트가 말한 것처럼 꾸며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순수한 하디스를 엄선하는 방법을 하디스 학자들이 만들어냈다. 그것은 전달자의 세대적 연속을 음미해 보는 방법으로서, 이스나드(isnad)라고 한다. 이 하디스 비판의 방법은 이슬람력 2,3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샤리아(율법) 형성기에 해당되며, 율법의 필요에 의하여 하디스가 규범으로서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디스의 집대성은 법학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슬람력 3세기 초엽(서기 9세기초)에는 법학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학문체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동 3세기 중엽(서기 9세기 중엽)에는 법학과 교차하여 이에 비판적 집대성이 확립되고 '사히하(확실한 것)'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하디스의 정전(正典)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는데, 편집 형식은 법학자와 신학자를 위하여 신앙과 실천 등 모든 사항에 걸쳐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하디스의 편찬사업이 발전하여 동 시대의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권위를 주기 위하여 새로운 하디스가 편찬되었다. 3) 이슬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다섯 기둥(Five Pillars of Islam, 아랍어: أركان الإسلام)은 수니파의 가장 기본적인 다섯 의례(실천; دين, dīn)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이며, 이슬람 삶의 근본이다. 이슬람은 믿음(إيمان, īmān)과 실천 (دين, dīn)으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유명한 가브리엘의 하디트로 요약된다. 수니에서 다섯 기둥(Arkan-al-Islam)은 샤리아(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에는 '종교의 뿌리'(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의 가지(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순니의 "이슬람의 기둥"과 유사한 것이다. (제1의 기둥) 신앙고백(샤하다) -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선언. (제2의 기둥) 기도(살라트) - 하루에 다섯 번 알라에 기도해야 하므로 여행을 하다 일정한 시간이 되어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 (제3의 기둥) 자선(자카트) - 무슬림들은 자산의 2.5%, 교역품의 2.5%, 농업 생산의 5-10%정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도록 되어있다. (제4의 기둥) 단식(사움) - 라마단(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 및 음료의 섭취와 어떠한 성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제5의 기둥) 메카 순례(하즈) - 이슬람력 12월(둘 힛자)에 이루어지며,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는 무슬림이라면 모두가 일생에 한 번은 행하는 것이 좋다. 시아파와 수니파는 이러한 교리의 실천에 대한 동의를 하고 있지만, 시아파에서는 동일한 이름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4) 카바(Kaaba) 가) 개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이슬람 최고의 성지. 카으바(아랍어: الكعبة)는 이슬람의 예배와 순례의 중심이다. 이슬람 이전으로부터 고대 아랍인의 지방적 성역(聖域)이었다. 그 주위는 성역화하고 전투, 수목 벌채, 동물 살해는 종교 의례상 금지되었고 또한 죄인의 피난처이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소재 '하람 성원'(알-마스지드 알-하람)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 이주 후, 하나님의 명령으로 예배의 방향(끼블라)을 예루살렘에서 카으바로 바꾸었다. 이로써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 성지가 이슬람 성지의 중심으로 전화(轉化)되었고 동시에 이슬람 이전의 신성한 여러 관념이 변용(變容)되어 계승되었다. 서기 630년, 무함마드가 메카를 점령하고 카바 신전을 정화할 적에 아랍인들이 받들던 우상 360여 개가 안에 있었는데 이를 모조리 끄집어내어 없앴다고 전해진다. 이 우상들은 아랍 신화에 나오는, 여러 씨족들과 부족국가가 섬긴 신들로 추정된다. 여담으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성전에 우상인 이슈타르 신상을 꺼내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나) 외형 정방형 즉 큐브(cube)를 의미하는 단어로, 메카하면 떠오르는 검은색 신전이다. 한국 이슬람에서는 '카으바'라고 쓰기도 한다. 외벽은 화강암으로, 내부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외벽을 기준으로 하면 면적은 12.04 X 10.18 m 에 높이는 15 m 정도로, 위상에 비하면 별로 크지 않다. 건축면적이 37평, 내부의 바닥면적이 25평 정도에 불과하다. 대리석으로 꾸며진 내부에는 기둥 세 개가 있고, 기둥 위쪽을 관통하는 줄에는 향로들이 걸렸다. 벽면에는 쿠란 구절을 새긴 서예 장식이 있다. 건물 외벽에는 키스와(Kiswah)라는 검은색 비단천을 드리운다. 키스와에는 금실로 쿠란 구절을 새겨 장식해 둔다. 때때로 키스와를 교체하느라 일꾼들이 카바 꼭대기에 올라가기도 한다. 이렇게 키스와를 교체하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몰려 키스와 안쪽, 카바 신전의 외벽이 그대로 보일 때도 있는데, 녹색빛 도는 회색에 가깝다. 외벽 재질이 화강암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강암과는 좀 다른 듯? 《꾸란》에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카으바를 지으면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행위를 받아달라는 기도가 언급되어 있다(꾸란 제 2장 127-129절) 현존하는 건물은 네모꼴이며 네 귀퉁이는 거의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놓여 있지 않다. 이곳의 '검은 돌'(알-하자르 알-아스와드)을 만지는 행위는 성지순례(핫즈 또는 우므라)의 일부이며, 카으바의 지하 방향에는 '잠잠' 우물의 수원(水源)이 있다. 다) 검은 돌 카으바의 검은 돌(Kaaba mirror edit jj.jpg, 알-하자르 알-아스와드) 카으바 동쪽의 벽에 박혀 있는 검은 돌을 말하며 순례자가 손으로 만지거나 이것에 입맞춘다. 이슬람 이전부터 신성한 물체였으며 《꾸란》에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하디쓰(무함마드 언행록)에 의하면 검은 돌을 만지는 것은 성지순례의 일부가 된다. 이슬람의 전승에 의하면 이 돌은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진 돌이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도움으로 카바를 세웠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하늘로부터 가져와 당시는 흰 돌이던 것이 인간의 죄와 접촉되면서 검은 색으로 변했다고 설명한다. 신전 외벽 동쪽 모서리에는 성스러운 물건인 '검은 돌(al Hajar al Aswad)'이 박혔다. 이 검은 돌은 이슬람 신화에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에게 이 돌을 주었고 카바신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흰 돌이었으나 이 땅에 내려오면서 인간의 죄와 맞닿으며 검은 돌이 되었다고. 다만 실제 역사 기록상으로는 서기 400년 이후에 등장한다. 참고로 이 검은 돌의 정체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운석(텍타이트)이라는 가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한다. 이 돌은 공개만 되었지 아예 꺼내질 않아서 분석이 불가능 하다고... 이 검은 돌은 지름 약 30 cm 정도로 꽤 크다. 한 덩이 구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각나 있다. 930년에 메카를 침공한 급진 시아파의 일원 까라미타파(Qaramita)가 돌을 가져가면서 깨진 것. 이후 되찾고 난 후에 은으로 만든 끈으로 묶고 은으로 된 못을 박아서 고정했다.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지하는 이슬람의 원칙상 반드시 검은 돌에 입맞추거나 할 필요는 없겠으나, 무함마드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카바에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할 수만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도 사람들이 몰려서 입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직접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손을 그쪽으로 뻗음으로써 대신하기도 한다. 메카에 성지순례 온 순례자들은 이 돌에 입을 맞춘 후 카바 신전을 반시계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4번, 천천히 3번, 총 7번을 도는데, 만약 횟수를 빼먹는다든지 시간이 늦어 제대로 하지 못했다든지 하면 순례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규정을 정확히 준수해야 한다. 이 외에도 지키지 않으면 순례가 무효가 되는 규칙이 여럿 있어 이것을 준수하고자 교육용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한다. 라) 부속시설 카바 신전의 북서쪽 벽면에 반원형으로 담장(?) 같은 것이 있는데 아랍어로 하팀(Hatim)이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전승으로는 하팀 아래에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이사악의 이복형 이스마일이 묻혔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는 메카가 이슬람화되기 이전 시대에 카바 신전에 바칠 동물들을 가둬두거나 기도하기 위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카바 신전 동쪽으로 잠잠 우물이 있어 순례자들은 우물물을 떠가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슬람의 성수인 셈. 마셔본 사람들 말에 따르면 소금기가 약간 있다고 하는데, 물을 구하기 힘든 옛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 정도 우물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쿠란에서 이스마일이 메카 일대에서 주님에 의해 샘솟았다고 한다. 마) 잠잠우물(Well of Zamzam) □ 피끄-어스-순나(Fiqh-us-Sunnah) 5.82, 잠잠 우물의 기원 잠잠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이븐 압바스(Ibn 'Abbas)가 말하였다: 하갈이 그녀의 어린 아들 이스마엘과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물을 찾아 마르와 산에 도달하였을 때, 한 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말하였다, “쉿.” 그녀가 다시 그 소리를 들었고 말하였다, “당신 소리를 들었어요. 할 수 있으면 나를 도와주세요.” 갑자기 그녀는 현재 잠잠 우물이 있는 곳에서 천사를 보았다. 천사가 발굽으로 우물을 파거나 자신의 날개로 (땅을)쳤고 샘물이 나타났다. 하갈은 흙으로 그 물을 둘러쌓다. 그녀는 가지고 있는 물통에 물을 담았고 물은 계속하여 솟아 나왔다. □ 사히 알-부카리 하디스 3.556(Ibn Abbas의 이야기) 예언자가 말하였다, “알라께서 이스마엘의 어머니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녀가 잠잠 (샘)물을 (물을 가두기 위한 보를 만들지 않고)그대로 두었다면 (또는 ‘그녀가 그 물을 담지 않았다면’으로도 말하였다), 그 물은 흐르는 시내가 되었을 것이다. 주르흠[Jurhum; 아랍 부족]이 와서 그녀에게 질문하였다, ‘우리가 당신이 거주하는 곳에 정착해도 됩니까?’ 그녀가 말하였다, ‘그러시오, 그렇지만 당신들은 그 물을 소유할 권리는 없소.’ 그들이 동의하였다.” □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전통은 메카계곡에 히브리인 이스마엘이 정착하기 이전에 주르흠 부족이 아랍부족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나온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원래 아랍부족이 아니며 아랍화된 아랍인들이다. 무슬림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들 가운데 한명인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꾸란 또는 많은 하디스들에서 이름이 절대로 언급되지 않으며 위와 같은 하디스에서 그녀는 단지 '이스마엘의 어머니‘로 언급된다. □ 까라위연 사본(Qarawiyun Manuscript; folio 43a-b)에는 이븐 카디르(Ibn Kathir)의 시라(Sirah) pp 117f에 잠잠에 관한 완전히 다른 버전이 있는데 성경 그리고 이븐 히샴(Ibn Hisham)이 개정한 이븐 이스학(Ibn Ishaq)의 시라 라술 알라(Sirat Rassool Allah)와 다르다: “그리고 예배가 명령되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자에게 왔고 그가 와디(Wadi; 우기 이외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에 그의 발굽으로 한 장소를 파서 물(잠잠 샘물)이 흘러 나왔다. 무함마드가 그를 보고 있는 동안 가브리엘이 자기 몸을 씻었다. 그는 얼굴을 씻고, 입을 행구고, 코로 물을 빨아 들여 코를 풀고, 머리와 귀를 씻고, 발목까지 발을 씻고, 그의 성기에 물을 뿌렸다. 그리고 일어나서 절을 두 번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네 번 엎드렸다. 그리고 알라가 그를 재충전하였고 그의 마음은 평강을 얻어서 예언자는 돌아갔는데 예언자가 바라던 것이 알라에게서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디쟈의 손을 잡고 그 샘으로 와서 가브리엘이 하였던 대로 세정을 하였다. 그리고 그와 카디쟈는 두 번 절을 하고 네 번 엎드렸다. 그 이후로 그 두 사람은 은밀하게 기도하곤 하였다.“ 이 버전은 특히 잠잠 우물이 무함마드 오래전에 메카에서 중요시되었던 우물이라고 전해지기 때문에, 잠잠 우물이 이스마엘 시대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한다. 이제 위의 이야기들을 성경에 있는 원래 버전과 비교해보자: □ 창세기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성경이야기에서, 아라비아, 알라, 잠잠 또는 메카에 관한 언급이 없는데, 왜냐하면 하갈과 이스마엘에 브엘세바와 이집트 근처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름 모르는 천사가 알려준 우물은 메카가 아닌 브엘세바 근처에 있었고 이름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갈이 아들을 아라비아가 아닌 이집트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 꾸란과 하디스들에 나오는 이야기는 성경이 아브라함, 이스마엘, 하갈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모든 것과 모순된다는 사실은 제외하더라도, 아라비아 반도의 건조한 환경에서 모든 수원들, 특히 우물들은 중요시되었고 잠잠 우물은 무함마드와 그의 꾸란 오래전 자힐리야 아랍인들 가운데 거룩한 장소로 전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 어째든, 잠잠 우물 주변에 울타리가 생기고 카바신전이 거룩한 장소가 되어 다신교도 아랍인들이 경배한 것은 잠잠 우물이 수원이었기 때문이다. 아랍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이 만든 주장들-아랍 다신교도들이 하갈과 이스마엘에 관하여 알았기 때문에 잠잠 우물이 그들에게 거룩하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이다. 게다가 논리적 그리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메카 인근의 잠잠 우물은 브엘세바에서 거의 800마일 거리에 있어서 하갈도 이스마엘도(또는 낙타도) 이 거리를 물 한 병으로 여행할 수 없었다. 사실상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여야한다: 그 우물이 그렇게 중요하고 거룩하였다면, 왜 꾸란은 잠잠 또는 하갈이라는 이름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가? 무슬림 신학자들은 자힐리야 ‘전통들’이-꾸란 자체가 주장하는 것과 반대로- 이전 계시들을 알고 있었다는 만들어낸 이야기를 영속화하기 위하여 많은 다신교도 아랍전통들을 아브라함, 이스마엘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에 관한 성경이야기들과 교활하게 연결시켰다. 전해지는 이 다신교도 아랍인들의 전통은 성경에 있는 그 이야기의 모든 구제적인 사실들과 모순된다. 아브라함이 그와 그의 어머니를 브엘세바에서 보냈을 때 이스마엘은 14살이 넘었다. 그는 절대로 어린 아기가 아니었다. 결론으로, 여기서 거짓과 사실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왜냐하면 무함마드 2,200년 이전에 모세에게 계시되었던 성경의 원래 이야기를 아는 독자는 무슬림 버전의 사건들이 완전히 거짓말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04/23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o o o 여름날의소야곡 / 폴모리아 o o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