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탄(Sultan)과 칼리프(Caliph)
술탄(아랍어: سُلْطَان)은 이슬람 세계에서 세습 군주제로 통치하는
국가 또는 지역의 군주를 부르는 말이다. 술탄은 아랍어로 "권위", "권력"을 뜻한다.
아랍 제국의 경우에는 왕으로 취급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는 황제로 취급되지만 실은 술탄은 황족을 지칭하는 칭호이다.
쿠란에서는 술탄을 "알라에서 유래된 권위"를 의미하는 말로 정의하였으며
11세기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의 비호자로서 세력을 늘린
셀주크 왕조의 투그릴은 칼리파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셀주크 왕조가 쇠퇴한 후에는 룸술탄국이나 호라즘 왕국 등
셀주크 왕조로부터 자립한 이슬람 왕조들이 군주의 칭호로서 채용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일반적인 칭호로 정착한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등의 나라들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의 승인 아래에서
군주를 술탄이라고 칭해, 스스로의 권위 부여에 이용하였지만,
자주 비교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에 의해 즉위하는 것처럼
반드시 칼리파의 임명을 필요로 한 것은 아니다.
오스만 왕조에 술탄의 칭호를 최초로 자칭한 것은 2대째인 오르한이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서양의 프린스(Prince)에 해당하는 술탄으로 지칭되었고,
메흐메트 2세 이후로는 황제라는 의미의 파디샤(Padishah), 샤한샤(Shahanshah),
술탄 에스 셀라틴{Sultan-es-selatin(술탄 중의 술탄)} 및 로마 황제 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제정(帝政)이 된 메흐메트 2세 이후 기존 술탄, 여술탄의 칭호는
황자, 황녀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역대 군주를 가리켜
술탄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관용적으로 용납되고는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19세기에 술탄-칼리파제가 등장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군주는
세속적 권력인 왕권과 종교적 권위인 칼리파권을 겸비하게 되었다.
가) 술탄국
술탄국은 술탄이 통치하는 나라 또는 지역을 뜻한다.
현재 오만과 브루나이, 말레이시아의 군주들이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도 술탄직이 명예직으로 계승되고 있다.
대부분의 술탄직이 세습직인 데 비해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의 술탄직은 선출직이다.
나) 칼리프(Caliph , Khalifah) 후계자, 대리인, 총독’
코란(2:30)에서는 아담을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피뜨라(fiṭrah)
즉 본래의 규범이 구체화한 형상으로 칼리프,
곧 하나님의 대표자나 권력 대행자(Khalifah)라고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에게 떨어진 것이 아닌 진정한 본성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의 역할이 주어졌다.
또한 이슬람의 예언자는 아담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칼리프였다.
반면에 그의 후계자들은 오로지 그의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이슬람 국가의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또 세속적인 지배자로서 수행했다.
예언자는 자신의 한 몸에 종교의 창시자, 계시를 나타내는 자, 성직자, 또 군주였다.
따라서 칼리프제는 역사속의 그의 그림자라고 불리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당연히 예언적인 역할을 계속 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칼리프의 궁극적인 의미는 직무에 밀착되어 있었다.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는 최초의 4명의 칼리프들로서
그들 각각이 맡은 역할에 어울리는 정신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올바르게 인도하는 칼리프들’의 의미인
훌라파 알 라쉬둔(al-Khulafā‘ al-rāshidun)이라고 불린다.
다른 일부 칼리프들도 종교적인 사람들이어서 갈리프란 이름에 걸맞지만
‘올바르게 인도하는 칼리프들’은 오직 최초의 4명에게만 주어진 이름이다.
그들을 정통 칼리프(Patriarchal Caliphs)라 한다.
그러나 칼리프제의 개념은 종교적인 역할만이 아니고 세속적이며 공적인 것이다.
원래 예언자가 죽은 후에 아부 바크르가 우마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칼리프는 선출되었다.
초기 네 명의 칼리프 시대 이후에 그 직위는 사실상 세습화 되었다.
그러나 세습화의 합법화과정은 울라마(‘ulamā’)라고 불리는 종교학자들의 모임에서
저명한 종교적 지도자들이나 책임자들이 정하는 것이었다.
최고 군사 지도자로서 칼리프는 우마르의 시대부터
아미르 알 무미닌(amir al-Mu’mimīn, ‘신자들의 지도자’), 즉 군주라는 칭호를 지니게 되었다.
칼리프제의 첫 번째 수도는 메디나였고
그 후 알리 시대에는 병영도시인 쿠파(Kufah)였다.
우마이야조를 창시한 칼리프 무아위야의 지배 아래 수도는 다마스쿠스로 옮겨졌고
다시 압바시야조에 의해 바그다드로 옮겨졌다.
9년 동안 압드 알라 이븐 알 주바이르(‘Abd Allāh ibn al-Zubayr, 71/692 죽음)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조 칼리프 압드 알 말릭(‘Abd al-Mālik)을 무시하고
메카에서 자신을 칼리프라 주장했다.
압바시야 칼리프조는 몽골족의 훌라구 한(Hūlāgū Khān)이 바그다드를 침략하고
칼리프 무스타씸(al-Musta‘ṣim)을 죽인 후인 656/1258에 끝이 났다.
그 후로 그 칼리프위는 아주 상징적인 지위로
맘룩 카이로에서 압바시야조의 후손들에 의해 이어졌다.
오스만 터키의 셀림 1세가 923/1517에 카이로를 점령했을 때
카이로의 마지막 압바시야조 칼리프로부터 그 칭호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오스만조의 이러한 주장은 지난 3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꾸민 날조된 가설일 것이다.
칼리프는 항상 꾸라이쉬라는 아랍 부족 출신이어야 된다는 하디스도 있다.
오스만조는 분명히 꾸라이쉬 족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탄불의 오스만조는 정통파를 보호하고
이슬람의 정치 중심 세력으로서 칼리프의 역할을 자신있게 행하여 왔다.
오스만 칼리프조가 1342/1924년에 세속적인 터키 공화국의 창설과 더불어
종말을 고했을 때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Sharif Ḥusayn)은 칼리프의 칭호를 자칭했다.
그 후 10년 동안 요르단의 왕인 그의 아들 압드 알라(‘Abd Allāh)도 역시
자신이 칼리프임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물론 꾸라이쉬였다.
그러나 그들의 영역 밖에 있는 그 누구도 그들의 칼리프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 아무도 그 칭호를 주장하지 않았다.
바그다드의 압바시야조 시대에 대등하게 칼리프제를 자칭한 경쟁국가들이 존재했었다.
이들은 296/909부터 567/1171까지 카이로에 있었던 파띠마 제국이었고
또 159/775부터 633/1236까지 스페인 땅에서
아랍-이슬람 문화의 찬란한 시대를 주관한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칼리프조이다.
그라나다의 술탄위는 897/1492에 스페인의 ‘카톨릭 왕’인
페르디난드(Ferdinand)와 이사벨라(Isa-bella)에게 그라나다가 함락 당할 때까지
코르도바 우마이야조의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04/23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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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omungo Sanjo Jajinmori 거문고 산조 잦은머리 / Kimyund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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