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성밖길1(성벽 야생화)
땀으로 얼룩이 진 퍼즐이 맞춰지며
하나 둘 이루어낸 길고 긴 성벽 돌 틈
쌓아둔 時間의 사이 뿌리내린 야생화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07/2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성밖길1(성벽 야생화)(1) 계획
성벽길을 두 번 환주하면서
성밖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또한 성밖길은 좋아하는 야생화 천국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성벽길 환주중 보니 [남문-서문-북문-봉암성]까지와
[남문-남장대]까지는 성밖길이 형성돼있지만
[남장대-동문-동장대]까지는 성밖길이 형성돼있지 않았기에
오늘은 [남문-서문-북문-봉암성]까지 성밖길로 간 후
봉암성을 경유 벌봉을 한 바퀴 돈 후
아직 미답인 [벌봉-한봉-큰골]까지 돌아보기로 계획했다.
(2) 남문-영춘정-6암문(서암문)-수어장대(1.5km)-병암-서문
(右翼門, +55(10:55-11:50)=55분, +2.3=2.3km)
버스로 남문 앞에 도착하여 오른편 서문 방향으로 向.
이질풀꽃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성벽을 바깥 면에서 올려다보니 색다르다.
하단부는 약간 배부르게 하였는데
이는 하중을 효율적으로 부담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런데 아무렇게 막돌 쌓은 것이 아니고
모치기를 하여 정갈하게 쌓아 올린 정성이 대단하다.
부분적으로 보수한 부분이 보이지만
남아있는 이끼를 두껍게 쓴 부분들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예전 팔도에서 차출당한 스님들에 의하여
이런 만고의 성을 8km에 걸쳐 쌓았다니 대단하다.
영춘정 근처를 지나니 멍석딸기, 기린초, 꿩의비름이 성벽의 틈에
무더기로 自生하여 성벽을 은폐하고 있고
으아리덩굴 사이로 고대하던 큰제비고깔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가래나무가 가려주는 햇볕아래 비짜루가 보이는데
암문을 지나니 서문(우익문이) 반겨준다.
(3) 서문-매탄터-5암문(연주봉옹성)-북장대터-북문
(戰勝門, +35(11:50-12:25)=90분, +1.1=3.4km)
서문을 지나니 조망터가 마련되어 있다.
아래로 펼쳐진 위례신시가지 너머 인구 1천만의 한양이 뚜렷하다.
돌양지, 자주조희, 바위채송화가 성벽에 의지하여
잘 자라고 있음을 확인하며 나아가니 연주봉암문.
북측 성벽에는 거기 쏟아진 솔가루에 의지하여 개모시풀이
담쟁이가 점령하듯 군락을 이루고 있어 성채가 마치 푸른 언덕 같다.
북장대터 성벽이 사각돈대를 이룬 모퉁이를 지나니
오솔길에 작은 텐트를 치고 부부가 누워서 자는 척 한다.
조용히 지나치니 내리막 아래 북문(戰勝門).
(4) 북문-1군포터-4암문-2군포터-3암문(봉암성)
(+50(12:25-13:15)=140분, +1.4=4.8km)
북문을 지나니 가파른 오름길.
멀리 동장대가 보이는 아래 성벽엔 광대싸리 군락.
어수리와 원추리의 자태를 보며 발아래를 보니 상사창동.
4암문을 지나니 오름은 한층 기세를 올리고
장딴지가 퉁퉁 당겨와 쉬엄쉬엄 오르니 드디어 3암문.
(5) 3암문(봉암성)-한봉갈림길-벌봉-13암문-한봉-큰골
(=105(13:15-15:00)=245분, +2.2=7.0km)
3암문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가니 봉암성.
봉암성은 본성과 마주하여 쌓은 호리병 같은 성인데
허물어져가는 성벽에 폐허 같은 동화 속의
난장이들의 城 같은 뉘앙스.
한봉 갈림길에서 벌봉으로 가 벌집 같은 바위에 올라
주위를 조망하고 내려와 한봉 방향으로 직행.
그러고 보니 일대에서 제일 높은 남한산(522m)을 밟지 못함.
되돌아 가 볼까하다 한봉(418m)으로 向.
그래! 그래야 또 와 보겠다는 위안으로 삼으며 간다.
남한산과 한봉의 표고차가 100m이므로 그만큼 급한 내리막.
그 길 따라 폐허같이 중간 중간 무너져 내리는 한봉성이 이어짐.
하지만 청순한 원추리, 으아리 군락이 끝없이 이어져 위안.
있는 듯 없는 듯한 한봉성 표지석을 겨우 찾아보고
남측 사면을 따라 희미한 오솔길을
허위허위 30여분 내려오니 큰골 돌문화공원.(7km)
버스 정류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다시 걸어서 동문을 경유 세계문화유산센터, 지수당, 연무관을 지나
행궁 앞에서(9km) 버스로 귀가.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07/2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계획
1-1) 언제 보아도 늠름한 남문(지화문, 10:55)
(2) 남문-영춘정-6암문(서암문)-수어장대(1.5km)-병암-서문
(右翼門, +55(10:55-11:50)=55분, +2.3=2.3km)
2-1) 城 밖에서 바라보는 성벽은 아름답긴한데 이렇게 쌓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2-2) 이질풀(쥐손이풀), 털별꽃아재비
2-3) 하나하나 모치기하여 정성들여 쌓은 성벽
2-4) 녹색 공원 옆 우리집이 손에 잡힐 듯...
2-5) 왼쪽 봉우리 속에 숨어있는 영춘정(11:15)
2-6) 새악시 입술 같은 멍석딸기꽃, 그리고 아름다운 오동나무순
2-7) 기린초, 꿩의비름이 솔가루가 뿌려진 성벽 온통 점령
2-8) 참으아리 덩굴이 눈가루를 뒤집어 쓴 듯....
2-9) 아름다운 큰제비고깔(사실 오늘은 이 얘를 기대하고 왔다.)
2-10) 가래나무 그늘 아래 비짜루(야생화의 寶庫)
2-11) 6암문(서암문, 11:30)
(3) 서문-매탄터-5암문(연주봉옹성)-북장대터-북문
(全勝門, +35(11:50-12:25)=90분, +1.1=3.4km)
3-1) 서문(우익문 11:50)
3-2) 서문 근처 조망터에서
3-3) 돌양지꽃, 자주조희꽃, 바위채송화
3-4) 연주봉옹성(12:00)
3-5) 북문 가는 성벽은 온통 개모시풀과 기린초 세상
3-6) 북장대터(12:15, 북문0.2km, 법화골1.9km)
3-7) 북문 가는 아름다운 성밖길에 소형텐트치고 누워 휴식중인 사람의 용기는?
(4) 북문-1군포터-4암문-2군포터-3암문(봉암성)
(+50(12:25-13:15)=140분, +1.4=4.8km)
4-1) 북문(戰勝門, 12:25)
4-2) 북문에서 동장대 가는 성벽의 완벽한 복원
4-3) 왼편 높은 곳이 동장대지
4-4) 원추리, 광대싸리, 어수리 군락
4-5) 교산신도시 들어설 상사창동, 교산동 일대
4-6) 제4암문(북암문, 12:55)
4-7) 봉암성 오르는 된비알
4-8) 제3암문(13:15, 동문1.5km, 벌봉0.6km)
4-9) 동장대지 아래 봉암성(13:20)
4-10) 그로테스크한 벌봉 가는 길(한봉갈림길, 한봉1.4km,노적봉6km,북문1.8km,벌봉0.2km)
(5) 3암문(봉암성)-한봉갈림길-벌봉-13암문-한봉-큰골
(=105(13:15-15:00)=245분, +2.2=7.0km)
5-1) 벌봉의 송파조망(13:50, 은고개3.9km,동장대0.7km,객산4.5km,고골2.0km,한봉1.6km)
5-2) 벌봉에서 내려와 10년 전 하남검단산에서 오다 통과한 13암문
5-3) 한봉 가는 길의 한봉성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끝없이 무너지는 중
5-4) 한봉 가는 길은 다른 야생화는 드물고 연속되는 원추리와 으아리의 향연.
5-5) 남한산(522m)을 뒤돌아보고...
5-6) 한봉(14:30)
5-7) 무너진 한봉성 사이로 나와 희미한 남측 육산의 급경사 30여분 내림.
5-8) 큰골의 돌문화공원(15:00) 여기 계곡에서 洗足
5-9) 오늘 만나본 버섯
5-10) 산행 개략도
병자호란의 개요와 김상헌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페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 사항이 이처럼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해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 비 한 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 관계를 군신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빌려 급히 본국으로 도주해갔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유문을 읽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재차 침략할 뜻을 비친다.
그리고 이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으며,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하지만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제의를 묵살해버린다.
그해 11월 청은 다시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내세우는 인물들을
심양으로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해왔으나 이번에도 조선 조정을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해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청군이 그렇게 빨리 밀고 내려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장계로 극도로 혼란에 휩싸였고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4일 개성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조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 수비를 명령했다.
또한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 씨 원손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 자신도 그날 밤 도성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불광동)을 통과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를 포기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사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명길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 등은 그곳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야음을 틈타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했다.
다음 날 15일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떠나려 했지만
폭설로 인해 말을 움직일 수가 없어 포기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남게 되자
한성 주변의 관리들은 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이에 총 병력은 약 1만 3천이 되었다. 이때 성안에 있는 식량은
양곡 1만 4천3백 석 장 220항아리 정도로 약 50일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한편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청 태종은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 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조선군들은 싸움에서 모두 대패하여 패주하고
명에 청한 원군도 내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재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홍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 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서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총 열한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공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도의 동강진에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 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낼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오는 경우도 꽤나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 김상헌(金尙憲, 1570∼1652)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시절(時節)> : 여기서는 시세(時勢)ㆍ사국9時局)의 뜻.
<삼각산(三角山)> :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옛 이름. 보통 북한산이라 부른다.
백운(白雲)ㆍ인수(仁壽)ㆍ국망(國望)의 세 봉우리가 빼어나서 이렇게 불린다.
<한강수(漢江水)> : 한강의 물줄기, 곧 한강.
<고국산천(故國山川)> : 고국(故國)의 산과 물. 조상 적부터 살아온 고향인 나라. 祖國山河.
<하랴마는> : 하겠는가마는. 물론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하 수상(殊常)하니> : 하도 별스러우니. 하도 보통 때와 다르니. 뒤숭숭하니.
<올동말동> : 올지 어떨지.
인조(仁祖) 14년 병자호란 때 작자는 끝까지 청나라를 대항해 싸울 것을 주장하던
'주전파'였으나, '주화파'의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전란 후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그 때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출전 : <청구영언> <고금가곡>
작자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척화항전(斥和抗戰)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화전(和戰)이 성립되자 파직(罷職)되고,
1639년(인조 17) 청 나라가 명을 치기 위하여 출병을 요구함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청의 노여움을 사
1640년 심양(瀋陽)에 잡혀가1642년에 풀려났으나,
당시 청과 밀무역(密貿易)을 하던 이계(李桂)의 무고로 심양에 다시 잡혀갔다가
1645년에야 풀려나 귀국했다.
이 시조는 제1차로 잡혀갈 때의 작으로 전한다.
초장의 ‘삼각산’을 ‘화산(華山)’, ‘한강수’를 ‘한수(漢水)’라 했는데,
조선 초기의 악장 <화산별곡> <용비어천가>에도 쓰인 왕도(王都) 한양을 대표하는
산천이다. 패전국의 전범자(戰犯者)로 승전국(勝戰國)에 끌려가는 지은이로서
부르지 않을 수 없던 간절한 이름이었다. 중장ㆍ종장은 고국 산천에 대한 애착과
귀국에 대한 얼마쯤의 회의가 서정되어 있다.
그는 처음부터 대청 감정(對淸感情)에 결연(決然)하였으므로
불굴의 저항과 꿋꿋한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그의 이러한 저항의식은 대단했다.
남팔(南八)아 남아(男兒)이 사(死)이언정 불가이불의굴의(不可以不義屈矣)여다.
웃고 대답하되 공(公)이 유언 감불사(有言敢不死)아
천고(千古)에 눈물 진 영웅이 몇몇인 줄 알리오. <청구영언>
애국충정이 끓어 넘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시조이다.
지은이 자신의 체험적 상황이 단적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초장의 적절한 도치법이 의미의 강조와 운율의 신선미를 한껏 돋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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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리라 / Mischa Mai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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