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산성길5(① 행궁) –
웅장한 성곽 속에 들어찬 보물들은
교황님 기거하는 바티칸 닮았는데
임금님 계시건 말건 현대인들 거닐고...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행궁(11:30)-숭렬전-국청사-서문-연주봉
(+30=30분(11:30-12:05), +1.3=1.3km)
부산한 행궁앞 – 코로나에 지친 수많은 산객들.
통일신라의 안학궁보다도 큰 건물터에서
일반기와의 4배크기의 기와가 발견된 터로 보아
산성은 주장성(晝長城)이란 이름으로 예전부터 존재했고
산성은 옛 성의 기반 위에 인조 때 개축한 것으로 봐야 할 것.
1626년 6월 총융사 이서의 건의로 건립되어
병자호란 45일 항전시 인조의 거처였던 행궁 앞에
처연한 구절초가 반기는데
전각사이 종묘를 지나 언덕에서 소나무 사이로 행궁을 내려다 보니
그 날의 피난온 신하들과 병졸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예전 로마를 갔을 때 스위스 용병이 지키는
높은 성벽 속의 바티칸 시국을 보았는데
보물들 가득하고 교황이 기거하는 바티칸 궁전이 행궁 같다는 생각.
다만 바티칸엔 교황이 기거하는데 이 곳 행궁은 텅 비어
관람객만 기웃거리고 적막한데 좋은 점은
바티칸에는 없는 야생화 가득한 숲 속에 위치한다는 점일 것임.
그 솔밭 사이로 처음 가보는 복구 완료된
백제 온조대왕과 수어사 이서를 기리는 숭렬전(崇烈殿),
그리고 1625년(인조 3)에 팔도총섭 각성(覺性)이 창건한 국청사(國淸寺),
삼전도로 치욕의 삼궤구고두의 례를 행하기 의해 나간 서문(右翼門)을 지나
성밖길로 나아가니 그제야 성벽을 따라 야생화들이 보인다.
꽃층층이, 층꽃, 향유, 송장풀꽃이 아직 자리를 차지.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
남한산성 원성은 1624년(인조 2년)~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 · 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2,135,752㎡(2.1㎢)로서 대략 627,200평으로 측량되었다
바티칸시국이 0.44㎢이므로 바티칸시국의 4.8배 면적이다.
남한산성 원성내 행궁(行宮)은
왕이 본궁 밖으로 나아가 머무는 임시장소로서의 궁궐을 말한다.
이궁(離宮) 또는 행재소(行在所), 행궐(行闕)이라고도 했다.
행궁에는 낙생행궁, 세조가 다니던 온양행궁,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했던 의주행궁,
인조 때 건립한 광주행궁(남한행궁) , 강화행궁, 부안행궁,
숙종 때 북한산성에 건립한 양주행궁, 정조 대 건립한 화성행궁과 전주행궁이 있었다.
명례궁이라는 별궁도 전국 각처에 있었다.
님한산성 원성은 1624년(인조 2년) ~ 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 · 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2,135,752m3로서 대략 627,200평으로 측량되었는데
광주 행궁, 남한산성 행궁이라 불리는
행궁은 원성 축성시기인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남한지(南漢誌)》에는 숙종·영조·정조가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수(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의 행궁에 대한 발굴조사가 1999년 부터 한국토지공사 박물관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2007년까지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는 동서 약 18m, 남북 53.5m 총 290평의 매우 큰 규모로,
안학궁의 외전이 정면 11칸 49m, 측면 4칸 16.3m로 약 242평이라는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굉장한 규모임을 알 수가 있다. 건물의 규모로 인해
궁궐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두꺼운 벽과 방충을 위한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의 구조를 볼 때 대체로 창고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같이 발견된 기와는 크기가 매우 큰데 무게가 보통의 기와의 4배가 넘어
암기와는 한 장이 약 19kg이고, 숫키와는 약 15kg이나 된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중기와가 약 4 kg, 3.3kg인 것에 비하면 상당한 무게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이다.
그 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초석(礎石)은 37개가 남아 있는데,
화강석재로서 초석 상면에 따로 주좌(柱坐)를 만들지 않았으며,
건물기둥이 있었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둥글게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원형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석의 크기는 균일하지 않으며,
그 형태 또한 장방형, 정방형, 부정형 등으로 다양하다.
건물 중앙의 어칸대청(御間大廳)으로 사용한 공간은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면 북퇴칸 내주(內柱) 초석은 훼손되었다.
기단은 건물 정면 동편기단이 이중기단이며, 남북·서편은 단일기단이다.
기단의 높이는 약 80㎝로 가구식(架構式) 기단구조로 축조되었다.
기단토는 할석과 잡석·회덩이·와편 등을 황갈색 점토로 섞어서 다짐했다.
기단 장대석인 지대석(地帶石)·면석(面石)·갑석(甲石)은 훼손되어 없어지고
기단 하부의 적심석열만 남아 있다.
온돌은 상궐 건물지 내 남·북퇴간 옆 협간에서 각 2개소씩 모두 4개소가 발견되었다.
이 온돌시설들은 건물 기단토를 구축한 후 되파기하여 축조하였다. 상궐의 담장지는
건물을 중심으로 내곽과 외곽의 2중으로 구축되었으며, 담장 폭은 1m 내외이다.
하궐은 상궐의 외전인 외행전으로서 상궐 동편 삼문 밖에 있으며,
해발 369m로서 상궐지에 비해 약 6m 낮은 위치에 있다.
하궐은 상궐과 함께 1624년(인조 2) 총융사 이서(李曙)가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되었다.
서쪽 담의 문으로 일장각(日長閣)과 통하였고, 동쪽의 정문이 한남루이다.
하궐지의 규모는 동서 30m, 남북 70m, 전체 면적 2,100㎡(635평)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하궐지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음이 밝혀졌다.
상궐과 하궐을 포함하여 행궁을 구성했던 부속시설로 좌전(左殿), 우실(右室), 재덕당(在德堂),
한남루(漢南樓), 인화관(人和館) 등이 있었다.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다.
남한산성은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은 성이다.
몽고군의 1, 2차 침입 시 몇 번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청 태종 13만 대군의 공격도 막아냈다.
인조대왕이 47일 씩이나 버티다 삼전도에서 항복한 것은 강화도로 피신한 왕자가 붙잡혔고
성안의 식량이 바닥난 때문이지 성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가장 큰 성곽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그냥 성벽일 뿐이다.
성안에 사람이 살고 궁궐과 사직단, 관아의 집무소가 있는 성으로는 세계적으로 특이하다.
자연의 지세가 아름답고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국 20여개의 행궁 중에서 사직단을 모신 것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
2007년 발굴 과정에서 신라시대의 대형 기왓장이 무더기로 470장 이상 발견 되었다.
큰 것은 무게가 19kg이나 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기와이다.
행궁관람
https://kangdante.tistory.com/718
1-1) 행궁 앞에 도착하자 지난 주엔 개화전의 구절초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고...(11:30)
1-2) 사직단(명녕전) 뒤편의 소나마 숲에서 넘어다 본 행궁 전경
1-3)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센터 자료
1-4) 주장성 무기고 옛터(현 외행전 근처) 발굴 세계최대 기와(20Kg) 관련 기사
1-5) 을미의병(1895-1896), 정미의병(1907-1910)의 1600명 의병 거점지였던 산성
1-6) 행궁에서 연주봉까지 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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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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