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산성길5 (연금이능선1 ②숭렬전 崇烈殿, First Love / Violin Solo & Chamber)

이름없는풀뿌리 2020. 10. 14. 22:45
요즈음 – 산성길5(② 숭렬전 崇烈殿) – 삼전도 삼궤구고두 치욕을 당했지만 오랑캐 발 못 디디게 지켜낸 溫祚의 魂 장군은 죽어서 까지 이 곳 지켜 내리라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또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고두례는 본래 신불이나 직계 존친속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행하던 것이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황제에 대한 일종의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당시에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가 행해졌으며, 번속국의 조공사가 수도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할 때 이 의식이 행해졌다. 청나라가 입관하여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에 명나라 시대의 오배삼고례는 삼궤구고두례로 대체되었다. 신해혁명 이후에 삼궤구고두례는 폐지되어 허리만 가볍게 굽히는 국궁(鞠躬)으로 대체되었다. 류큐의 제2차 쇼씨 왕조 시대에 청나라 책봉사가 도착하면 국왕과 관원들은 황제에 대한 예를 의미하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의 편액이 걸린 슈레이 문에서 책봉사를 맞이하였고, 슈리 성의 궁전에서 삼궤구고두례의 의식을 행하였다. 후금의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새롭게 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조선에 조공과 명나라 출병을 요구하였다. 조선 국왕 인조가 이를 거절하자 숭덕제는 1636년 12월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하였고, 조선은 불과 두 달 만에 항복하였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에 삼전도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석촌호수 부근)에서 숭덕제를 향해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항복 의식을 하였다. 1793년 대영 제국의 외교관 조지 매카트니가 건륭제를 알현할 때 삼궤구고두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였고, 매카트니는 영국식을 고집하였으나 쟁론 끝에 왼쪽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1816년 윌리엄 애머스트(William Amherst)도 삼궤구고두례를 요구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여 가경제를 알현하지 못하였다. 1873년 일본 제국의 특명전권대사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동치제를 알현할 때 청나라 예부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여 입례(立禮)를 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나날히 교묘해지고 해가 지날수록 심해지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쇠퇴하는 가운데 열강의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청나라 예부의 삼궤구고두례 요청을 거절하고 입례(立禮)로 알현하였다. * 온조왕(溫祚王) 백제 제1대 국왕(재위: 기원전 18년∼기원후 28년) 온조(溫祚)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온조, 비류(沸流), 구태(仇台) 등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연맹체를 주도한 대세력으로는 먼저 미추홀(彌鄒忽:현재의 인천부근으로 추정)에 웅거한 집단이며,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風納土城 또는 경기도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東明)이라 하는 한편, 동명을 백제의 시조라고도 하였다. 현존 문헌들에 의하면, 북부여(北扶餘)·고구려(卒本扶餘라고도 함)·백제(南扶餘라고도 함) 등 부여족 사회들은 모두 동명을 시조라 하고, 그를 숭배하는 제전(祭典)을 각기 가지고 있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라 하는 것도 그러한 부여족 일반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건국설화가 다양하고 그 건국시조에 대한 이견(異見)이 많은 것은 그만큼 백제를 형성한 지배집단의 계통이 복잡하다는 방증이다. 또한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고도 하였다. 이는 두 집단의 연맹관계를 형제의 관계로 강조하기 위해 만든 연맹설화(聯盟說話)의 구성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비류가 형으로 기록된 것은 초기에는 온조계 집단보다 비류계 집단의 세력이 우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례의 온조계 세력이 위례지역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후기에 와서는 비류계 집단을 포섭하여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온조계 집단이 비류계 집단을 아울렀던 시점은 서기전 18년이었다는 견해와 온조왕 치세 어느 시기였다는 견해, 온조왕대가 아니라 한참 후대의 시기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온조왕은 백제의 성장을 위협하는 낙랑군(樂浪郡)의 사주를 받은 말갈(靺鞨)의 침공을 수 차례 막아냈다. 또한 마한(馬韓) 영역의 일부를 복속시켜서 일련의 정복사업을 마무리했고 낙랑군 침공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백제는 주변의 낙랑·말갈·마한 등 외부 세력의 압력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한 지방통치구획으로 부(部)를 설치했다. 하지만,『삼국사기』등에 온조왕 치세(治世)의 일이라고 한 것들의 상당한 부분은 실제로는 백제의 발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소급해놓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를테면, 온조왕대에 마한지역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한 전체를 정복한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일이다. 또한 백제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왕족으로부터 위례성 왕족에게 넘어간 것이 온조왕대였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연맹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는 것도 온조왕대에서 훨씬 후대인 고이왕(古爾王)대에나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러한 견해에 반하여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 성과에 힘입어 온조왕 치세의 업적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 이서(李曙) 장군 1580(선조 13)∼1637(인조 15) 본관은 전주. 자는 인숙, 호는 월봉.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며, 아버지는 목사 경록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사용·진도군수를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중형을 받을 뻔했으나 화를 면했으며 그뒤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를 지냈다. 1623년 장단부사로 있을 때 병력 700명을 동원, 능양군(뒤의 인조)에게 합류하여 인조반정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으로 완풍군에 봉해졌으며, 호조판서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부원수로서 반란군을 추격하다 멈춘 죄로 파직되었다. 그뒤 총융사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삼혈총과 조총을 제조했으며, 이어 형조판서·공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조판서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지키다 이듬해 성 안에서 죽었다. 그의 저서인 〈화포식언해 火砲式諺解〉는 각종의 총을 쏘는 방법과 화약 굽는 방법을 기술한 것으로 당시에 사용된 화약병기의 종류와 용약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밖에 말의 여러 가지 병에 대해 기록한 〈마경언해 馬經諺解〉가 있다. 남한산성의 온조왕 사당과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 숭렬전(崇烈殿) 숭렬전(崇烈殿)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 내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BC 18~AD 28)과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수어사 이서(1580년~1637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다. 사당은 1464년(세조 10년) 충청남도 천안에 있었으나 임진왜란(1592년~1598년)때 화재로 소실됐고, 이후 1638년(인조 16년) 온조왕사를 남한산성에 건립했다. 이후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병자호란 때 싸우다 죽은 수어사 이서를 함께 배향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와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울 때였다. 그날도 인조는 밤이 깊도록 청나라 군사 와 대치하면서 우리 군사들을 돌보다가 몹시 피곤하여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웬 사람이 나타나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북쪽 성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 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사람의 출현에 놀란 인조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는 성주 온조대왕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었다. 이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인조는 꿈에서 들은 대로 즉시 북쪽 성 근처를 살펴보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꿈속에서의 예시와 같이 청나라 군사가 북쪽 성벽을 오르는 것이었다. 인조는 즉시 군사들에 게 명령을 내려 몰래 성벽을 오르던 청나라 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온조대왕의 은혜를 입은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 서울로 돌아온 이후, 남한산성에 온조대왕의 사당을 짓고 봄·가을로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인조가 제사를 지낸지 며칠 안 되어 온조대왕이 다시 꿈에 나타났다. 그리고 "대왕이 내 사당을 지으시니 진실로 감사하오. 그러나 혼자 있기 몹시 외로우니 대왕의 신하 중에서 명망 있는 신하 한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시오"라고 말했다. 아침에 잠에서 깐 인조는 이 꿈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뜻 밖에도 간밤에 남한산성의 총융사로 성을 쌓는데 공을 세운 이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인조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여기고, 이서를 온조대왕 묘에 함께 모시도록 했다. 온조대왕이 이서를 선택해 데려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한다. 1795년 정조 19년에 왕이 사액하여 숭렬전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성곽의 북서쪽 산 능선 아래 남향으로 지어진 작은 건물이다. 담장안에 근래에 새로 복원한 강당과 그 북쪽에 담장으로 막아 구성한 사당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공사비는 26여억원이며 공사 기간은 2017년 10월17일 시작해 2019년 10월18일 준공 공사를 마쳤다. 숭렬전 둘러보기 http://cafe.daum.net/nbalive03/8Y1Q/102?q=%EC%88%AD%EB%A0%AC%EC%A0%84 숭렬전 제향 모습 http://cafe.daum.net/sunyuricyh/4hnm/18900?q=%EC%88%AD%EB%A0%AC%EC%A0%84 2-1) 행궁에서 숭렬전 가는 고즈넉한 오솔길 2-2) 인조와 온조와 효령대군 7대손 이서 장군의 설화 2-3) 최근 개축한 충렬사 o o o First Love 첫 사랑 / Violin Solo & Chamber o o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