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산성길5(③ 國淸寺) –
쌓으랴 城 지키랴 땀흘린 낮의 시간
졸음이 밀려와도 수행으로 지세운 밤
지금도 나라 걱정에 독경소리 울린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國淸寺
국청사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절이다.
1624년(인조 2) 벽암(碧巖) 각성(覺性) 창건.
각성이 팔도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八道都摠攝總節制中軍主將)으로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하게 할 때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ㆍ군량미 등을 비축하기 위하여
국청사와 천주사·개원사·남단사·한흥사·장경사·동림사 등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국청사이다.
당시 산성 내에는 이들 7개 사찰 외에 신라 때 지은 망월사와 옥정사도 있었다.
조선 말기까지 있었던 9개 사찰 중 국청사는 현존하며,
망월사·개원사·장경사는 복구되었다. 한흥사의 경우
그 명맥을 잇는 약사사가 창건되었지만, 기존의 절터는 복구되지 않았다.
국청사는 남한산성 내의 다른 사찰들과 함께
전국의 사찰에서 소집된 의승군(義僧軍)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한 승군총섭(僧軍總攝)의 지휘 아래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350여 명의 의승(義僧)이
의승입번제(義僧立番制)에 따라 매년 2개월씩 윤번(輪番)으로 사찰에 복무하였다.
전국의 사찰에 할당된 수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방위하는 이 제도는
지방 사찰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등 많은 폐단을 가져와 1756년(영조 32)에 폐지되었다.
대신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의해 번을 서지 않는 대가로
방번전(防番錢)을 10~22냥 납부하면 산성 사찰에서 복무하는 것을 면제받도록 하고,
본래부터 거주하는 승려[元住僧]로 하여금 그 역에 응하도록 하였다.
1785년(정조 9) 의승의 방번전이 절감되는 조치가 내려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승군에 의한 사찰 운영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군제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 한말에 의병의 군기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청사에는 성삼문(成三問)의 친필이라고 전하는 병풍 1점과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책자 3권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인근에 국청사정(國淸寺井)이라는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서 금닭이 홰를 치며 울었다고 한다.
또 이 약수로 아버지의 종기를 고쳤다는 효자에 관한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가 하면 국청사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맑은 우물[國淸寺井]이 있었다고 한다.
그 물이 일찍부터 위장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에 효험이 있어
인조와 소현세자, 문무백관, 군사,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물을 마시며 건강을 유지했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도 내려온다.
옛날 이집이라는 남자가 등창을 앓는 아버지에게 온갖 약을 해드려 봐도
효험이 없자 국청사에서 불공을 드리게 되었다.
100일째 불공을 드리고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샘물에 있던 금붕어를 잡아 집으로 가져왔다.
그날 밤 아버지가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일어나서 금붕어가 들어있는 물을 먹었다.
순간 종기가 터지고 시원해지면서 등창이 바로 나았다고 한다.
이후 국청사의 샘물은 전국에 알려져,
피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3-1) 각성이 창건한 산성내 7개 사찰 중의 하나인 국청사 입구
3-2) 국청사 대웅전
3-3) 국청사 삼성사
3-4) 국청사 연혁
송학사 / 김태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 갈래 깊은 산속 헤매냐
밤벌레의 울음계곡 별빛곱게 내려 앉나니
그리운 맘 님에게로 어서 달려가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