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산성길5 (연금이능선1 ④서문(右翼門, 이 마음 다시 여기에 / 노사연)

이름없는풀뿌리 2020. 10. 15. 09:48
요즈음 – 산성길5(④ 서문(右翼門) – 치욕의 受降檀에 나가긴 한다마는 부러진 날개일망정 下城이라 우기며 至和門 면목 없어서 곁문으로 간 게지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수항단(受降檀) :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의식을 하기 위해 마련된 단. * 지화문(至和門) : 인조가 청군에 항전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온 남문. 인조가 차마 정문으로 내려갈 수 없어 서문을 이용했다는 추측. * 하성(下城) : 인조가 삼전도에 항복하며 내려갈 때 하성(下城)이라 했다 함. 서문(西門, 右翼門) 서문은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다.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기석 위에 5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문을 지났다. 仁祖實錄중 남한산성 入城에서 出城까지의 기록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갑신 3번째기사 1636년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김류가 상에게 강도(江都)로 옮겨 피할 것을 권하였는데,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李聖求)도 그 말에 찬동하였으며, 이홍주(李弘胄)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낭패하게 될 것이니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을유 1번째기사 1636년 대가가 강도로 떠났다가 되돌아오다. 양사가 김자점 등을 정죄하길 청하다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 양사가 아뢰기를,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오로지 변방을 굳게 지키고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적병이 강을 건넌 뒤로 어느 한 곳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적을 깊이 들어오도록 버려둠으로써 종묘 사직이 파월(播越)하고 거가가 창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큰 변란이요, 신민의 지극한 고통이니,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부원수 신경원(申景瑗),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을 모두 율(律)대로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5일 을미 2번째기사 1636년 예조가 온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온조(溫祚)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은 군사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城隍)에도 이미 사전(祀典)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일 임인 3번째기사 1637년 완풍 부원군 이서의 졸기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상이 그를 위하여 통곡하였는데 곡성이 밖에까지 들렸다. 의복과 명주를 하사하여 염습하게 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하였으며, 도성에 돌아온 뒤에는 빈소를 그 집안에 들이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서는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후손이다. 무과로 진출하였는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지조가 있었다. 광해군 때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반정(反正) 때에는 장단 부사(長湍府使)로서 관군을 규합 통솔하여 상을 받들어 내란을 평정함으로써 상훈(上勳)에 기록되었다. 경기 감사·판의금부사·호조 판서·병조 판서·형조 판서·공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강명(剛明)하고 부지런하게 마음을 다해 봉직하였는데, 까다롭고 잗단 결함이 있어 이익을 늘이려 하다가 원망을 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남한 산성의 역사를 감독하여 완성시키고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는 대가가 머물면서 의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溫王廟) 를 세워 이서를 배향(配享)하도록 명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8일 무신 2번째기사 1637년 예조가 온조왕의 제사를 다시 지낼 것을 청하다 "지난번 온조왕(溫祚王)의 도사(禱祀)를 행할 때 엉겁결에 구차하게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미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날짜를 가려 중신(重臣)을 파견해서 경건하게 정성껏 치제(致祭)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궁해지면 근본을 생각하게 되고 병이 들어 아프면 부모를 부르게 마련입니다. 숭은전(崇恩殿)의 수용(睟容)을 방금 성 안의 사찰에 봉안하였으니, 상께서 친히 제사를 지내어 명명(冥冥)한 가운데 신의 가호(加護)를 비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기미 2번째기사 1637년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갑자 1번째기사 1637년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5일 을축 1번째기사 1637년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기사 1637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 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018)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 형조 판서 심집(沈諿)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 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일 임신 1번째기사 1637년 철군하는 청의 한을 전송하다 청나라 한(汗)이 삼전도(三田渡)에서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전곶장(箭串場)에 나가 전송하였다. 한이 높은 언덕에 앉아 상을 제왕의 윗자리로 인도하여 앉게 하였는데, 도승지 이경직(李景稷)만 따라갔다. 4-1) 용골대가 문서를 전달하러 오고 인조가 삼정도로 항복하러 나간 서문(西門, 右翼門) 4-2) 서문에서 성밖길로 연주봉가는길에 본 꽃층층이, 탑꽃, 향유, 송장풀꽃 o o o 이 마음 다시 여기에 / 노사연 o o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