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烏竹軒)의 유래와 관련 인물들1) 오죽헌 유래
신사임당과 율곡의 탄생지라는
오죽헌에서 새삼 알게 된 사실들...
오죽헌은 최초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부친 최치운(崔致雲)이 창건하여
최응현에게 상속되었고,
최응현이 둘째 사위인 이사온(李思溫)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인 용인 이씨에게 상속,
용인 이씨(신사임당 어머니)는 딸만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둘째 딸(신사임당)의 아들인 외손 율곡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외손 권처균(權處均)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어
최종적으로 권씨 소유로 오랬동안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
그리고 외할머니로부터 오죽헌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하여 오죽헌의 유래가 되었다는 사실,
오랫동안 권씨 소유였던 오죽헌이
강릉시에 기증되어 현재는 강릉시 소유라는 사실 등
600여년간 주인이 많이 바뀌게 되었으며
이조초기 유독 사위에게 몇 번 상속된 것은 참 재미있다고 하겠다.
* 오죽헌 역사를 정리하면,
최치운(1390∼1440)건축
→ 최치운 아들 최응현(1428∼1507)상속
→ 최응현 둘째딸 사위 이사온 상속
→ 이사온 딸 용인이씨(신사임당母, 남편 신명화)상속
→ 용인이씨 넷째딸 아들 권처균 상속
→ 권씨 가문 대대로 상속
→ 1975년 강릉시 이전
* 남자 성씨 위주로 소유권을 정리하면
최씨 → 이씨 → 신씨 → 권씨 → 강릉시 인데
사임당과 율곡은 한번도 소유한 사실이 없지만
사임당도 외갓집에서 나고 자랐고
율곡도 외갓집에서 나고 자랐으니
오죽헌의 정기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신사임당 母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언 할 점은 사임당과 율곡을 길러낸 용인 이씨도
외갓집인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상속 받았으니 오
죽헌은 외갓집 역사로써 의미가 있다는 점이고
조선의 TOP 인물인 사임당, 매창, 율곡, 옥산등을
배출한 이면에 "용인 이씨"란 중심인물이 있어서
그녀의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한없이 자애로운 마음과
그리고 서울과 강릉에 부동산을 소유한 재력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겠다.
2) 사임당 어머니 용인이씨란 인물
사실 남성우위 신분 질서가 엄연하던 시절
아녀자가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참 여려운 환경이었으리라.
여기에는 헌신적인 신사인당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글과 그림, 글씨 등 예술인이었던 사임당,
이매창, 이우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용인이씨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사임당이 먼저 죽어
율곡, 권처균등 외손들이 어머니처럼 여겼던 데에는
글은 몰랐지만 자애로 외손들을 키운 용인이씨의 헌신이 낳은 결과였다.
3) 그 옛날 여기저기 다니신 율곡과 사임당3-1) 신사임당(1504∼1551)
오죽헌 출생 → 19세 혼인 → 21세 1子 출산 → 파주, 강릉, 봉평
→ 26세 1女매창 → 33세 율곡 → 38세 서울 → 39세 막내이우(1542∼1609)
→ 48세 별세 파주선영 안장
3-2) 율곡(1536∼1584)
오죽헌 출생 → 6세사임당과 서울 본가로 → 8세 파주
→ 16세 사임당별세 파주에서 시묘 → 19세 금강산 → 20세, 강릉
→ 21세 서울한성시장원 → 22세 혼인 → 예안 이황 방문
→ 26세 부친 별세 → 29세 청송 → 34세 강릉
(외조모봉양 90세 별세1480∼1569) → 35세 해주
→ 36세 파주율곡 해주 청주 → 37세 서울 파주 → 38세 서울 파주
→ 39세 황해도 → 41세 파주 해주 → 해주석담 → 48세 시무책 해주 파주
→ 49세 서울수진방 별세 파주 선영 안장
강릉(친정), 서울(본가), 해주(율곡 처가), 파주(본가)
– 요즘도 짧은 거리가 아닌데 그 옛날에 어떻게 다녔을까?
대관령 중턱에서 강릉 어머니 생각하며 지은 시가 있는 걸 보면
걸어서 갔을 것 같기도 한데... 가마를 타고 다녔을까?
율곡도 항상 病을 달고 산 것 같은데
강릉, 서울, 파주, 해주... 이동 수단은 뭐였을까?
4 )신사임당의 큰 딸 이매창
신사임당 첫째 딸 이매창(李梅窓, 1529∼1592)은
학식, 인품, 용모가 신사임당을 닮았다는데
도무지 그녀의 행적이 추적이 안 되지만
예전에는 여성에게 이름은 없었는데 이름까지 지어준 것을 보면
맏딸을 끔직히 사랑했슴을 짐직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매화를 좋아하여
직접 매창(梅窓)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며
커가면서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작은 사임당으로 불릴 만큼
학문적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셨다.
사임당은 딸 매창을 사랑하여 틈틈이
학문을 가르치고 서예법과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다.
부안 기생 이매창(1573∼1610)과는 동명이인이자 동시대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매창의 생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파주 율곡 가족묘원에 가면
율곡의 큰 누님 이매창과 매부 조대남의 쌍분묘,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 씨의 합장묘,
이매창의 둘째 아들 조영 묘가 있다 한다.
다만, 그의 그림은 신사임당도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그림이라고 인정했듯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점,
어머니 사임당 신씨, 허균 누이 허난설헌등
여성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던 시절,
(일설에 사임당도 인선(仁宣)이란 이름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어느 사료에도 나오지 않은 주장임)
이매창(李梅窓)이란 이름을 가질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고,
율곡이 누이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는 것,
옥산 이우의 장인 황기로(黃耆老)가 이매창에 대해서
글씨와 거문고 및 풀벌레 그림에 뛰어난 사실과
오죽헌에 전해오는 그림과 글씨등 작품과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고 언급하였다는 점 등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배달9216/개천5917/단기4352/서기2019/03/09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2/1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補正
덧붙임)
1) 율곡 동상인데 몽룡실 초상과 많이 다른 듯
2) 신사임당 동상
3) 오죽
4) 자경문
5) 편액이 걸린 오죽헌 별당(여러번 리모델링, 단지 구조는 600년전과 동일)
6) 신사임당(48세), 율곡(49세), 용인이씨(90)세
7) 어제각에 있는 율곡이 쓰던 벼루
8) 복원한 안채(용인 이씨 거주)
9) 이나라의 財政이 된 母子(재정으로 보면 율곡은 사임당의 1/10)
□ 오죽헌(烏竹軒) 유래와 시설
조선초기 최응현 소유
1504년(연산군 10년)신사임당 탄생
1536년(중종 31년)율곡 이이 탄생
1788년(正祖12년)
율곡 친필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유년에 쓰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어제각(御製閣) 건립
1962년 11월 2일제1회 율곡제전(栗谷祭典) 봉행
1963년보물 제165호로 지정
1975년 6월 30일권씨가로부터 관리 이전
1975년 10월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
1998년 1월 17일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오죽헌은 이후 최치운의 아들 형조참판을 지낸 수재 최응현이 살았다.
최응현은 조산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북평촌으로 옮겨왔는데,
둘째 딸이 이사온과 혼인하자 이 집을 둘째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이사온과 최씨(최응현의 딸) 사이에는 용인 이씨만이 태어났으며,
용인 이씨는 서울 사람인 신명화와 혼인하였다.
용인 이씨는 혼인 후 서울에서 살았으나
병이 난 친정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강릉에 내려왔다가
그 길로 계속 강릉 오죽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씨는 딸 다섯을 두었다. 그 중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은 이원수와 혼인을 하였는데 친정에 머물러 지낼 때가 많았다.
때문에 훗날 이곳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는 딸만 다섯 낳았습니다.
이씨는 생전에 다섯 딸에게 재산을 나눠준다는 내용의 분재기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건에는 다섯 딸에게 재산을 고루 분배한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그 뒷부분에
둘째 딸의 아들 율곡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외가댁 묘소를 보살피라며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
오죽헌 기와집과 주위 전답을 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기와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지었습니다.
이렇듯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지어진 집주인의 호가
언제부턴가 집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부장의 권위가 강화되면서
재산상속이 장자 우선의 원칙으로 일관되어 오던 조선 후기와는 달리,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균분상속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모든 자녀가 균등하게 분급받았으며,
부부라 하더라도 상속받은 재산은 따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렇듯 조선초기 재산상속의 관행에 따라
최응현의 집은 그 딸을 거쳐 권처균에게까지 상속될 수 있었던 것인데,
그후 계속 권처균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가 강릉시가 관리하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이 사임당의 이름을 인선(仁宣)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근거도 없이 사임당의 본명을 인선이라고 쓴 것을
또 다른 사람들이 그대로 수용하면서 발생된 오류입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여성들이 그랬듯이
사임당 역시 이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가 재산을 분재해 준 문서에도
다섯 딸들의 이름은 기록돼 있지 않고 사위들의 이름만 기록돼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의 어머니 민씨, 이순신장군의 어머니 변씨,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등도 이름이 전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여성으로 이름이 전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사임당은 호가 전하고 있어, 평산 신씨라고 부르지 않고
사임당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임당의 호는 여러 가지가 전하지만
율곡 이이가 외할아버지(신명화) 행장을 쓰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사임당(師任堂)이라 기록했기 때문에
師任堂으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오죽헌 안에 유명한 세 그루의 나무가 있다. 흔히 '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이다.
1년에 백일동안 꽃을 피워 백일홍이라 부른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에도 꽃이 피어 있었다.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1788년 율곡 선생의 친필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는 어제각을 건립하였다.
1961년 11월 제1회 율곡제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 매년 10월에 봉행하고 있다.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1. 몽룡실(夢龍室)
조선초기 형식의 별당 건물로 가장 오래 되었으며, 율곡 선생이 태어나신 방이다.
2. 문성사(文成祠)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서기 1624년 인조로부터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받은데 연유하여 명명되었다.
시호의 의미는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음' 이다.
현액(판)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다.
3. 사랑채
오죽헌 사랑채 건물로써 기둥의 주련 글씨는 서예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필적이다.
4. 어제각(御製閣)
오죽헌에 격몽요결 친필과 율곡 선생이 어려서부터 쓰던
벼루가 보관된 것을 1788년 정조임금이 직접보고 강원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유물을 보관하게 하기 위해 어명에 따라 지어진 건물로 어제각의 이름을 붙였다.
5. 용벼루(龍硯)
율곡 선생이 스던 벼루로, 안동 고산석(安東 高山石)으로 만들어 졌으며,
매화무늬의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1788년 정조임금이 직접보고 벼루 뒷면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무원(주자)의 못에 적셔내어,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품이여!
용(율곡)은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구름(명성)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에 남았구나!
원시(原詩)
涵무池 象孔石 普厥施 龍歸洞 雲潑墨 文在玆
함무지 상공석 보궐시 용귀동 운발묵 문재자
6. 자경문(自警門)
율곡선생이 20세 때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뜻을 기리고자 이름한 문으로 오죽헌의 외삼문(外三門)이다.
7. 구용정(九容亭)
오죽헌 입구에서 우측으로 가면
격몽요결의 지신장(持身章) 구절을 따서 만든 소박한 정자와 아름다운 연못이 나온다.
구용이란 발을 무겁게, 손은 공손히,
눈은 단정하게, 입은 무겁게, 목소리는 조용하게, 머리는 곱게,
기운은 엄숙하게, 서 있는 것은 반듯하게, 얼굴빛은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입구의 문 이름이 자경문이다. 이율곡이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의고
19세에 불교를 연구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1년만에 오죽헌으로 돌아와 삶의 목표를 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우는 글을 지었는데 이 책의 이름이 자경문이다.
8. 구사정(九思亭)
구용정에서 바라다보면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 구사정이다.
구사(九思)란 사물을 볼 때는 밝게 생각하고, 소리를 들을 때는 귀 밝은 것을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게 생각하며, 몸 모양은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할 때는 충성된 것을 생각하며, 어른을 섬길 때는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의심이 나면 남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 말며, 분이 났을 때는 참을 것을 생각하며,
재물 앞에서는 의리를 따져 분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구사 또한 격몽요결의 지산장에서 따온 것이다.
9. 오죽(烏竹)
오죽은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색이어서
오죽 또는 검죽이라 하였는데, 담배대와 지팡이 가구장식으로 쓰였다.
화분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풀)으로 죽순(5~6월)은
첫해에는 초록색이었다가 한 해를 넘겨야만 완전히 오죽이 된다.
10. 율곡 기념관
오죽헌 고택을 나오면 우측에 율곡기념관이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이이 그리고 신사임당의 다른 자녀들인 이우, 이매창 등의 유품과
오죽헌의 기타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중요한 곳이다.
《율곡전서》를 비롯한 율곡 선생의 저서와 간찰이 전시되어 있다.
간찰은 짧은 글이긴 하나 율곡 선생이 그의 신변적인 내용을 직접 쓴 것으로
율곡선생의 서정과 생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유품이기도 하다.
신사임당의 유품으로서는 습작매화도, 초서병풍, 초충도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초충도에서는 사임당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11. 오죽헌 사랑채 추사체 주련
오죽헌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정면 앞기둥에 4개, 뒤에 3개, 측면에 3개로 총 10개가 걸려있다.
※주련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김원동 중어중문학과 교수님 해석
"明末淸言과 글쓰기의 변화 : 陳繼儒의 <<巖棲幽事>>를 중심으로"에서
客過草堂,叩餘岩棲之事,余倦於酬答,但拈古人詩句以應之。
객이 초당을 지나다 바위산에 사는 일에 관해 나에게 묻길래
내가 답하기 싫증나 그냥 고인의 시구를 가지고 응답했다.
問:是何感慨而甘棲遁(遯)? 문 : 시하감개이감서둔
어떤 느낀 바가 있어 기꺼이 바위산에 은둔하시려고 합니까?
曰:得閒多事外,知足少年中。왈 : 득한다사외 지족소년중
번잡한 일을 벗어나 한적함을 얻을 수 있고, 젊은 나이에 자족할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問:是何功課而能遣日? 문 : 시하공과이능견일 어떤 일을 하며 소일을 하시는가요?
曰:種花春掃雪,看籙夜焚香。왈 : 종화춘소설 간록야분향
봄엔 꽃을 심고 겨울에는 눈을 쓸고, 책을 보며 밤엔 향을 사르기도 합니다.
問:是何利養而獲終老? 문 : 시하리양이 획종로
어떤 수양으로 오래도록 살 수 있겠습니까?
曰:硯田無惡歲,酒國有長春。왈 : 연전무악세 주국유장춘
독서와 글쓰기에 흉년이 없고, 취향(醉鄕)에서는 장생불로지요.
問:是何往還而破寂寥? 문 : 시하왕환이파적요
누구와 교유하며 적막함을 달래는지요?
曰:有客來相訪,通名是伏羲。왈 : 유객래상방 통명시복희
손님이 방문하여 통성명을 하고보니 복희씨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