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年表)로 본 三峰 鄭道傳(1342∼1398)○ 1세/1342년 충혜왕 복위3년
부친 정운경(鄭云敬), 모친 영천 우씨 사이에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장남 道傳, 차남 道存, 3남 道復)
조부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정균(鄭均)
○ 정운경(鄭云敬, 1305-1366) 약력
- 본관은 奉化, 봉화현 호장 정공미(鄭公美)의 증손, 檢校軍器監 정균(鄭均)의 아들
- 1305(충렬31) 출생
- 1326(충숙13) 사마시 합격
- 1330(충숙17) 문과 급제 상주목 사록 출사
전교교감(典校校勘), 주부(注簿),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삼사도사(三司都事),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전의주부(典儀注簿), 홍복도감(弘福都監)의 판관을 거쳐
- 1342 장남 정도전 출생(정운경 38세)
- 1343(충혜복위4) 밀성군지사(密城郡知事)
- 1344 복주목의 판관에 전임, 삼사판관, 서운부정(書雲副正)
- 1346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 성균사예, 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製敎)
- 1348(충목4)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 1349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 1352(충정3) 전법총랑(典法摠郎)
- 1353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로 전주목사
- 1356(공민5) 병부시랑에 올라 무반의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
- 1357 비서감보문각직학사(秘書監寶文閣直學士)
강릉도(江陵道) 삭방도(朔方道)의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어 백성을 안찰
- 1358 지형부사(知刑部事)
- 1359 형부상서에 특별히 제수
- 1361 장손 정진 출생 (정운경57세)
- 1363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제수
- 1365 병이 들어 사퇴 영주에 돌아와
- 1366 62세졸, 사시(私諡)는 염의(廉義),
《고려사(高麗史)》 열전 양리전(良吏傳)에 등재
○ 4세/1345년 충목왕 원년
2월5일, 나중에 공양왕이 될 왕요 태어남
○ 6세-7세(1347-1348)
선향 영주에서 보낸 유년기
○ 15세/1356년 공민왕5년
12월 26일, 원나라 관할이던 쌍성총관부를 회복
이때 만호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화
○ 16세/1357년 공민왕6년
개경의 이색 문하에 들어감, 이색(부친 친구 이곡 子) 문하에서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양촌 권근(陽村 權近),
고산 이존오(孤山 李存吾)등과 성리학 공부
7월1일, 조선 국왕 정종이 될 방과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 19세/1360년 공민왕 9년
성균시 합격
○ 20세/1361년 공민왕 10년
큰아들 정진 출생, 11월14일, 이성계 홍건적을 대파
○ 21세/1362년 공민왕 11년
9월, 진사시 합격(지공거 홍언박, 동지공거 유숙)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박상춘과 교유 견문 넓힘.
이판서 집에서 포은과 함께 시를 짓다
[李判書席上同圃隱賦詩]
정원은 깊고 깊어 나무 빛깔 은은하고 / 庭院深沈樹色微
구름 속 해 보여라 비는 상기 부슬부슬 / 駁雲漏日兩霏霏
비파소리 둥둥둥 미인은 노래하니 / 一聲瑤瑟美人唱
동이 술 넘실넘실 손은 아니 돌아가네 / 酒滿金尊客未歸
○ 22세/1363년 공민왕 12년
봄, 충주 사록(정 8품)으로 첫 벼슬길에 오름
○ 23세/1364년 공민왕 13년
여름 전교주부(典校注簿)
○ 24세/1365년 공민왕 14년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정7품)로 승급
신돈 국정에 실망,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
7월7일,고 려 국왕 우왕이 될 왕우가 태어나다
○ 25세/1366년 공민왕 15년
1월23일, 부친상, 12월18일에는 모친상,
시묘살이 기간(3년, 1366-1369)에
정몽주(1337-1392)가 보내준 맹자(孟子) 탐독, 민본사상 심취
○ 26세/1367년 공민왕 16년
5월16일, 조선 태종이 되고 정도전을 죽이게 될 이방원(1367-1422)출생
○ 28세/1369년 공민왕 18년
삼봉 삼각산 옛집에 머묾
삼봉에 올라 경도의 옛 친구를 추억함
[登三峯憶京都故舊]
공이 병오년(1366)부터 계속 양친의 상(喪)을 당하여 영주(榮州)에
살면서 복제를 마치고 기유년(1369)에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오다.
고요히 앉았자니 먼 생각 일어 / 端居興遠思
저 삼봉의 마루를 오르게 하네 / 陟彼三峰頭
송악산 서북쪽 바라보니 / 松山西北望
높고 높게 검은 구름 무심히 떴네 / 峨峨玄雲浮
벗님네 집이 그 밑에 있어 / 故人在其下
낮과 저녁 어울려 서로 노누나 / 日夕相追遊
나는 새 구름 뚫고 들어가니 / 飛鳥入雲去
내 생각 끝끝내 유유하네 / 我思終悠悠
캐는 지초 한 줌도 차지 않아 / 採芝不盈匊
저기 저 한길 가에 내버려졌네 / 寘彼道之周
한 번 가기 어려움도 아니건마는 / 一徃諒非難
어째서 이다지 머뭇거리는지 / 胡爲此淹留
도성 안이 즐거운 곳 아니리요마는/ 城闕豈不樂
깊숙한 바윗골이 사랑스러운걸 / 亦愛巖壑幽
계수나무가지 부여잡고 노래부르며/ 浩歌攀桂枝
세월아 가거라 실컷 노니니 / 卒歲以優游
○ 28세/1369년 공민왕 18년
공민왕이 죽은 부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해
암영전(岩影殿)이라는 집을 지었는데,
삼봉은「원유가(遠遊歌)」를 지어 이 공사를 풍자.
○ 29세/1370년 공민왕 19년
여름, 성균관 대사성 이색(1328-1396) 부름,
성균관 박사(정7품)에 임명(성리학 강론)
정몽주, 이숭인, 박의중, 김구용, 박상춘 교관
○ 30세/1371년 공민왕 20년
7월11일, 신돈을 처형하다.
7월, 태상박사(太常博士), 고유 예법, 악기제작
예의정랑(禮儀正郞, 정6품) 겸직으로 특진, 예문응교, 성균사예
전선(銓選)관장 5년
○ 33세/1374년, 공민왕23년, 우왕1
9월22일, 공민왕 피살되고, 우왕 즉위하다.
○ 34세/1375년 우왕2년
1월, 성균관 예문응교 지제교로 승진함.
이인임, 경복흥 지시 원 사신 접대 거부(김구용, 이숭인, 권근),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 유배(3년), 소재동 황연 집 기거,
감흥(感興) 작시, 심문천답(心問天答) 저술,
가난(家難)·소재동기(消災洞記)·답전부(答田父)·금남야인(錦南野人)등 저술,
금남잡제(산문), 금남잡영(시)로 집약
감흥(感興)
을묘년(1375) 여름에 공이 성균사예(成均司藝)로서
이 시를 짓고 드디어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따지니
재상(宰相)이 미워하여 전라도(全羅道)회진현(會津縣)으로 추방하였다.
내 수레에 기름 칠해 먼 길을 떠나 / 膏車邁行役
험한 저 태항산을 올라가노라 / 登彼太行山
황하 물이 그 아래로 내리쏟는다 / 黃流奔其下
삼박(三亳)의 사이를 돌아다보니 / 顧瞻三亳間
아득히 다 달라지고 / 茫茫皆異國
두 무덤만 마주서 우뚝하다 / 雙墳對巍然
어느 시대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 且問何代人
용방과 비간이라 일러주네 / 龍逄與比干
조국의 멸망을 차마 못본 체할 수 없어서 / 不忍宗國墜
충의의 심간이 찢어지기에 / 忠義裂心肝
대궐문을 손수 밀고 들어가 / 手排閶闔門
임금 앞에 언성 높혀 간했더라오 / 抗辭犯主顔
예부터 한 번 죽음 뉘나 있으니 / 自古有一死
구차한 삶은 처할 바 아니지 않나 / 偸生非所安
천 년 지난 광막한 오늘날에도 / 寥寥千載下
영렬이 가을 하늘에 비끼었구려 / 英烈橫秋天
[주]삼박(三亳) : 땅 이름. 황보밀(皇甫謐)의 설에 의하면,
삼박(三亳)은 곡숙(穀熟)인 남박(南亳), 즉 탕(湯) 임금의 도읍지와
몽(蒙)이 북박(北亳) 즉 경박(景亳)으로 탕임금이 명(命)을 받은 곳과
언사(偃師) 즉 서박(西亳)으로 곧 반경(盤庚)이 도읍을 옮긴 곳이라 하였다.
[주]용방과 비간 : 하(夏)나라 충신. 관용방이 하걸(夏桀)의 학정을 보고,
“임금을 뵈오니 위석(危石)의 관을 쓰고, 춘빙(春氷)을 밟는 격이다.” 하니
걸이 포락(炮烙)의 형벌을 받게 하였다. 비간(比干)은 은(殷)나라 소사(少師).
주(紂)에게 간(諫)하여 3일을 가지 않으니 주가
“듣자니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 있다 한다.” 하고
배를 짜개고 보았다 한다. 은(殷)의 3인(仁) 중의 한 사람.
○ 36세/1377년 우왕3년
영주, 단양, 제천, 안동등으로 귀양지 전전,
7월 종편거처(從便居處)로 귀양 완화,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삼봉재(三峰齋)란 오두막을 짓고 후학을 양성,
이후 부평, 김포 등으로 쫓겨 가 9년간 유배, 유랑 이어감.(34세∼42세)
[이가(移家)] 鄭道傳
五年三卜宅 今歲又移居
오 년간 세 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올해에 또 다시 집을 옮겼네
野濶團茅小 山長古木疎
탁 트인 들에 초가는 작기도 하고, 기다란 산에는 고목이 드문드문
耕人相問姓 故友絶來書
농부들이 찾아와 성을 묻는데, 옛 친구들은 편지조차 끊어버렸네
天地能容我 飄飄任所如
하늘과 땅이 나를 용납할 수 있을까, 바람 부는 대로 가는 곳을 맡길 수밖에.
뒤에 권근의 『입학도설(入學圖說)』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유학입문서『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를 저술.
이단을 배척, 유학(儒學)을 높이는 이론을 가르치면서,
친명정책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한편 배불론 정립.
○ 36세/1377년 우왕3년
10월 26일, 명나라 2대황제 건문제가 될 주원장의 손자 주윤문이 태어나다.
○ 39세/1380년 우왕6년
9월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에서 왜적을 쳐서 격파하다.
이해, 고려 창왕이 될 왕창이 태어나다.
○ 41세/1382년 우왕8년
7월, 이성계, 동북면도지휘사가 되다.
○ 42세/1383년 우왕9년
10월 함주막사의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1335-1408, 7년 연상)를 찾아가 역성혁명을 계획.
이듬해 봄까지 머물며 준비.
철령(鐵嶺)
철령이라 산은 높아 칼끝과 같고 / 鐵嶺山高似劒鋩
동해를 바라보니 정히 아득해 / 海天東望正茫茫
가을바람 두 귀밑에 불어오는데 / 秋風特地吹雙鬢
말 몰고 오늘 아침 북방에 왔네 / 驅馬今朝到朔方
○ 43세/1384년 우왕10년
여름 함주 2차 방문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鄭道傳
우리 태조를 따라 동북면으로 갔을 때 지음.
세월이 아득아득 한 그루 솔이 / 蒼茫歲月一株松
몇 만 겹 산속에 생장했던고 /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거라 다른 해에 서로 볼는지 /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이란 돌아서면 묵은 자췬걸 / 人間俯仰便陳蹤
구본에는 진(陳)이 진(塵)으로 되어 있음.
○ 43세/1384년 우왕10년
7월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관직 복귀,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수도 금릉(金陵)에 가서
왕위 교체 사실을 고함. (억류 김유, 홍상재 구함)
○ 44세/1385년 우왕11년
성균제주 겸 지제교(知製敎)에 임명.
○ 44세-45세/1385-86년, 제 1차 삼봉집
삼봉집 초간, 권근(1352-1409) 서문,
시문, 학자지남도, 진삼십육변도보, 태을칠십이국도 수록
○ 46세/1387년 우왕13년
자원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가 선정,
이후 성균관 대사성(成均大司成)에 오름.
○ 47세/1388년 우왕14년
5월22, 이성계 위화도 회군,
정도전등 개혁파 전면에 등장, 최영 유배, 우왕 폐위,
조민수, 이색지지 창왕 등극,
삼봉 성균관 대사성 밀직부사(密直副使), 조준 사헌부 대사헌.
7월 사전(私田) 혁파 조준 상소
○ 48세/1389년 창왕1년
4월 사전문제 도당 논의, 삼봉, 윤소종, 조준지지,
이색, 이림, 유백유, 권근, 우현보 전면실시 반대, 개선론 제시,
이때 삼봉은 이색, 정몽주 등의 수구파와 완전히 결별.
사전 혁파 및 과전법(科田法) 실시
○ 48세/1389년 창왕1년, 공양왕 1년
우재 조준(?齋 趙浚, 1346-1405), 정몽주, 설장수 주도,
폐가입진(廢假立眞, 신돈의 종 반야)을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시킴.
공양왕을 등극시킨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奉化縣 忠義君)에 봉해졌고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나
왕에게 형벌과 상을 바르게 시행하라고 건의했다가
수구파에 의해 유배와 함께 공신녹권(功臣綠券)까지 빼앗겼으나,
삼봉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었던 이성계의 도움으로 풀려나 고향에 체류.
○ 49세/1390년 공양왕 2년
이초의 옥(彝初의 獄), 윤이 이초 명 망명, 이성계 무고사건
삼봉 성절사로 무고 변명, 배후 이색 지목, 정몽주 이탈, 이색 처벌 반대
○ 50세/1391년 공양왕 3년
가뭄, 삼봉, 김자수, 김초, 박초 상소 보제사 탑공사 중지, 불교 배척(이색 견제)
삼봉, 이색, 우현보의 우왕, 창왕 옹립은 반역, 수구파, 개혁파 대립 절정
9월 대사헌 김주, 형조 관원 삼봉 탄핵, 봉화, 10월 나주, 봉화 이배,
상봉 두 아들도 삭탈,
○ 51세/1392년 공양왕 4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한 사건을 기회로 핵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정몽주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강회백(姜淮白) 등을 시켜 탄핵상소
조준, 남은(南誾), 남재, 윤소종, 조박은 공권 회수,
삼봉 주살 건의, 봉화에서 체포된 삼봉은 보주(甫州) 감옥에 갇히고,
삼봉 귀양지에 金龜聯, 李蟠 보내 죽임 모의하였으나
삼봉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양왕의 반대로 인해 죽음은 면.
이숭인, 이종학, 조호는 순군옥에 구금, 김진양, 이확, 이내, 이감, 권홍, 정희,
김묘, 서견, 이작, 이신, 이숭인, 이종학 귀양
○ 51세/1392년 공양왕 4년, 태조 1년
4월4일, 이방원이 조영규를 보내 정몽주를 살해하고 권력을 쥐면서
개경으로 돌아온 삼봉은 다시 충의군에 봉해졌고,
7월 17일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왕대비 교지 형식). 조선왕조 창업.
조선왕조를 개국하면서 개국 1등공신 녹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봉화백(奉化伯)까지 하사받은 삼봉은
다재다능한 식견과 특유의 돌파력을 활용해
문하부 시중(門下府 侍中) 다음 직책인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인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국가경제를 총괄하는 판호조사(判戶曹事),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
문헌 책임을 맡은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왕을 교육시키고 역사를 편찬하는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그리고 태조의 친위병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두 번째 책임자인 의흥친군위 절제사(節制使)를 겸직하고는
건국의 토대를 다지고 국가기강을 확립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한 고조(漢 高祖)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썼도다."○ 51세/1392년 태조 1년
7월28일, 태조 즉위 교서 작성
8월20일. 방원을 제치고 방석을 세자로 앉힘
○ 52세/1393년 태조 2년
7월26일, 문덕곡, 몽금척, 수보록 등 악사 3편 헌정
납씨곡, 궁수분곡, 정동방곡 무공 완성 헌정
8월20일,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완성 헌정
10월27일, 문덕(文德)·무공(武功)·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 등
새 악곡을 전악서의 무공방 설치 연주.
신궁 양청에서 잔치 모시면서 짓다
[新宮凉廳侍宴作]
신궁은 바로 한양(漢陽)경복궁(景福宮)을 이름.
금원에 봄이 깊어 꽃은 한창 화사한데 / 禁院春深花正繁
옛 신하 불러들여 잔치를 베푸셨네 / 爲招耆舊置金尊
하느님도 때맞춰 비를 보내니 / 天工忽放知時雨
온몸에 함초롬히 젖은 우로의 은혜 / 便覺渾身雨露恩
수보록 서도 함께 씀. [受寶籙 幷序 ]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 석벽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친 일이 있었다. 그 후 십 수년 만에 그 말이 다 징험되었다.
높다랗다 저 산이여 / 彼高矣山
석벽이 하늘과 가지런하네 / 石與天齊
그 석벽을 쪼개내어 / 于以剖之
이상한 글 얻었구려 / 得之異書
굳세고 굳센 목자가 / 桓桓木子
때를 타고 일어나니 / 乘時而作
누가 그를 돕느냐 / 誰其輔之
주초의 그 덕이로세 / 走肖其德
비의의 군자가 / 非衣君子
금성으로부터 오고 / 來自金城
삼전 삼읍이 / 三奠三邑
도와서 공 이루리 / 贊而成之
신도에 자리 정하여 / 奠于神都
팔백 년을 전하도다 / 傳祚八百
우리가 사랑받으니 / 我寵受之
이를 보록이라 이르도다 / 曰惟寶籙
【안】 석벽 속의 글에 이르기를,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삼한의 지경을
다시 바로잡도다[木子乘猪下復正三韓境].” 하였고, 비서(秘書)에 이르기를,
“목자 장군의 칼이요, 주초(走肖) 대부의 붓이로다.
비의(非衣) 군자의 지혜로 다시 삼한을 바로잡았도다
[木子將軍劒 走肖大夫筆 非衣君子智 復正三韓格].” 하였다.
주초는 조준(趙浚)을 이름이요, 비의(非衣)는 배극렴(裴克廉)을 이름이다.
또 이르기를 “삼전 삼읍이 응당 삼한을 없앨 것이다[三奠三邑 應滅三韓].” 하였으니,
공 및 정총(鄭摠) 정희계(鄭熙啓)를 이름이요, 또 이르기를
“조선은 대(代)로는 팔백 대 해(年)로는 팔천 년을 내려갈 것이다.” 하였음.
○ 52세/1393년 태조 2년
12월11일, 하윤의 상언대로
계룡산의 신도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다시 물색.
○ 53세/1394년 태조 3년
2월29일, 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소문 올림.
8개 조목 병제 개혁안 제시(사병 혁파, 국가 공병화 목적)
5월30일,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바치다.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는 전 갑술
[撰進朝鮮經國典箋 甲戌 ] 태조(太祖) 3년(1394)
분의좌명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奮義佐明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
판삼사사동판도평의사사사 겸판상서사사 수문전태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판의흥삼군부사 세자이사 봉화백
(判三司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尙瑞司事修文殿太學士
知經筵藝文春秋館事判義興三軍府事世子貳師奉化伯) 신 정도전은 말씀드립니다.
삼가 도승지 신, 상경(尙敬)이 신을 위해서 구계(具啓)한 것을 받았사온데,
그는 신에게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어서,
교서를 받들고 지어 올리는 것이옵니다. 이에 부명(符命)을 잡고
도참(圖讖)을 받아 비로소 홍휴(鴻休 개국)의 운수를 열었으니,
강기(綱紀)를 세우고 베풀어서 자손에 대한 계책을 해야 하므로,
주(周) 육관(六官)의 이름을 모방하여 조선 일대의 법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의 덕을 체받으시어 왕위를 인(仁)으로써 얻으셨습니다.
국호(國號)를 정하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고,
세자[儲副]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셨습니다.
세계(世系)로써 쌓이고 쌓인 경사(慶事)를 나타내셨고,
교서(敎書)로써 관대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다스리는 방법은 상신(相臣)에게 책임지우시고,
세금[貞賦]은 실지로 공용(公用)에 쓰여졌습니다.
예(禮)와 악(樂)을 제정하시어 귀신과 사람을 화하게 하셨으며,
무사(武事)를 강론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형벌로써 간사한 이를 꾸짖고 난폭한 짓을 막으며,
공(工)으로써는 한도와 분량을 알맞게 하셨으니,
이에서 창업(創業)하여 자손에게 이어 줌이 어려움을 보여,
충분한 준비로써 수성(守成 창업의 뒤를 이어받아 지킴)함을 오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서책[汗簡]에 실어 명산(名山)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용졸한 자질로서 외람되게 전하의 지우(知遇)를 얻어,
저작(著作)의 자그마한 재주를 가지고 생성(生成)의 지극하신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마는 그 성덕(盛德)과 풍공(豊功)은 진실로
다 기술하기 어려워서 대강(大綱)ㆍ소기(小紀)만을 모두 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경국전》을 삼가 써서 전(箋)과 함께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옵서는 한가한 시간이 있으시면 관람해 주옵소서.
비록 성상의 밝은[緝熙] 학문에는 도움이 못되더라도
시정(施政)에 있어서는 조금은 취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격절하고 송구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53세/1394년 태조 3년
8월 한양 천도 논의 삼봉은 최초 반대(민생 주력)
8월 24일 도평의사사 건의, 추인 한양 천도 확정,
9월1일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 9월9일 답사 12월4일 종묘 시작
○ 54세/1395년 태조 4년
《경제문감》 (조선경국전의 치전 보완) 편찬
삼봉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단 10개월 만에 궁궐 완성(1395.9.29.)
윤9월13일 도성축조도감 설치,
10월7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
"인왕산(仁旺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궁궐이 서북방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무학(無學 : 1327~1405) 왕사에 맞서
삼봉은 "전래로 임금은 북쪽을 의지해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쪽을 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남쪽을 향해 남산(南山)을 진산으로 삼아야 한다."
고 주장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광화문(光化門),
서울의 모든 궁궐과 성문의 이름을
『시경(詩經)』과 『서경(書經)』등
고전에서 아름다운 뜻을 취해 손수 작명,
수도의 행정 분할까지 직접 결정.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 작시(신도가)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進新都八景詩]
기전산하(畿甸山河)
기름지고 걸도다 천 리의 기전 / 沃饒畿甸千里
안팎의 산과 물은 백이(百二)로구려 / 表裏山河百二
덕교에다 형세마저 아울렀으니 / 德敎得兼形勢
역년은 천 세기를 기약하도다 / 歷年可卜千紀
도성궁원(都城宮苑)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 城高鐵甕千尋
구름 둘렀어라 봉래오색(蓬萊五色)이/ 雲繞蓬萊五色
연년이 상원에는 앵화 가득하고 / 年年上苑鶯花
세세로 도성 사람 놀며 즐기네 / 歲歲都人遊樂
열서성공(列署星拱)
열서는 우뚝하게 서로 마주서서 / 列署岧嶤相向
마치 별이 북두칠성을 끼고 있는 듯 / 有如星拱北辰
새벽달에 한길 거리 물과 같으니 / 月曉官街如水
명가(鳴珂)는 먼지 하나 일지 않누나/ 鳴珂不動纖塵
제방기포(諸坊碁布)
제택은 구름 위로 우뚝이 솟고 / 第宅凌雲屹立
여염은 땅에 가득 서로 연달았네 / 閭閻撲地相連
아침과 저녁에 연화 잇달아 / 朝朝暮暮煙火
한 시대는 번화롭고 태평하다오 / 一代繁華晏然
동문교장(東門敎場)
북소리 두둥둥 땅을 흔들고 / 鐘鼓轟轟動地
깃발은 나풀나풀 공중에 이었네 / 旌旗旆旆連空
만 마리 말 한결같이 굽을 맞추니 / 萬馬周旋如一
몰아서 전장에 나갈 만하다 / 驅之可以卽戎
서강조박(西江漕泊)
사방 물건 서강으로 폭주해 오니 / 四方輻湊西江
거센 파도를 끌어가네 / 拖以龍驤萬斛
여보게 썩어 가는 창고의 곡식 보소 / 淸看紅腐千倉
정치란 의식의 풍족에 있네 / 爲政在於足食
남도행인(南渡行人)
남도라 넘실넘실 물이 흐르나 / 南渡之水淊淊
사방의 나그네들 줄지어 오네 / 行人四至鑣鑣
늙은이 쉬고 젊은 자 짐지고 / 老者休少者負
앞뒤로 호응하며 노래 부르네 / 謳歌前後相酬
북교목마(北郊牧馬)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 / 瞻彼北郊如砥
봄이 와서 풀 성하고 물맛도 다네 / 春來草茂泉甘
만 마리 말 구름처럼 뭉쳐 있으니 / 萬馬雲屯鵲厲
목인은 서쪽 남쪽 가리질 않네 / 牧人隨意西南
[주1]백이(百二) :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말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진(秦)나라는 땅이 험고하여 2만 명만 있으면
족히 제후(諸侯)의 백만 군사를 당할 수 있다.” 하였다.
[주2]봉래 오색(蓬萊五色) : 봉래궁(蓬萊宮)은 당(唐)나라 대명궁(大明宮)인데,
여기서는 우리 궁궐에 비유하여 쓴 것. “천자(天子)의 정궁(正宮)이어서
그 뒤에는 항상 오색의 서운(瑞雲)이 떠 있다.” 하였다.
[주3]명가(鳴珂) : 말굴레의 장식품이라고도 하고 또는 악기라고도 한다.
○ 54세/1395년 태조 4년
개국 직후에 착수하여 정당문학(正堂文學) 부재 정총(復齋 鄭摠)과 함께
3년 만인 1395년 에 고려사(高麗史)』37권을 편찬,
○ 55세/1396년 태조 5년
아들 정진 승정원 도승지 됨.
1월9일 한양 도성 축조 시작(숭례문, 흥인지문)
4월19일 한성부 5부 52방 구획 작명(도성의 설계자)
10월 29일 태조가 낙성된 경복궁에서 여러 공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품,
태조가 몸소 '유종공종(儒宗功宗 : 유학(儒學)에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功)도 으뜸이다)'이란 네 글자를 대서특필, 삼봉에게 하사
신도가(新都歌) 악장가사(樂章歌詞)
녜는 楊洲(양주)ㅣ 고올히여
디위예 新都形勝(신도형승)이샷다.
開國聖王(개국성왕)이 聖代(성대)를 니르어샷다.
잣다온뎌 當今景(당금경) 잣다온뎌
聖壽萬年(성수만년)하샤 萬民(만민)이 咸樂(함락)이샷다.
아으 다롱디리
알픈 漢江水(한강수)여 뒤흔 三角山(삼각산)이여
德重(덕중)하신 江山(강산) 즈으메 萬歲(만세)를 누리쇼셔.
○ 55세/1396년 태조 5년
6월 표전문 사건(외교문서 트집, 정도전, 정탁 압송 요구)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이 이니 갖춰졌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상소
○ 56세/1397년 태조6년
《경제문감별집》 (경제문감 보유편) 편찬
세종대왕 이도 출생.
○ 56세/1397년 태조6년, 제 2차 삼봉집(홍무 초본)
8월 아들 정진(36세)에 의해서 삼봉집 2권,
시문에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ㆍ봉사록(奉使錄) 등 추가,
시문은 성석린(成石璘)이 정선, 권근(權近)이 비점(批點) 넣음.
○ 57세/1398년 태조7년
2월3일, 동북면 순찰하며 요동 정벌 준비를 마쳤음을 태조 이성계에 보고.
태조가 의안군 방석(宜安君 芳碩)을 세자로 삼고,
삼봉에게 세자의 교육을 맡김.
3월 남은 “여러 절제사를 혁파하고 합하여 관군으로 만들어야” 주장
윤5월 – 8월초 군사 훈련 불참 절도사 상장군 대장군 군관 292인 탄핵.
왕자들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참여하면서
각기 거느렸던 사병들을 쿠데타 성공 후에도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자,
어린 왕세자의 등극에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되리라고 판단한 삼봉은
왕권 안정을 위해 이들의 사병 조직을 해산. 삼봉의 죽음으로 연결 됨.
이 때 명나라가 새 왕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따지고 들자,
삼봉은 1397년부터 "요동 출병이 단순한 정벌이 아니라 고토회복"임을 역설.
"지난날 중원을 차지했던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
몽고의 원(元)도 외이(外夷)요 조선도 외이인데,
그들이 이룬 일을 조선이라고 못 이룰 바 있느냐?"고
조선사 500년에 찬란하게 빛나는 독보적인 자주사상의 결정체라 할
'요동정벌론(遼東征伐論)'을 공식화 함.
삼봉은 거기서 더 나아가 군사력을 확충하고자
태조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하여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등 병서를 손수 지어
중앙의 관리는 물론이고 지방의 군사들에게 군사연습을 시키는 등
요동 수복 계획을 치밀한 계획 하에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진.
그 결과, 원나라를 멸하고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太祖 朱元璋)조차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으며, 감히 조선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다만 대명온건파인 이방원을 간접 지원함으로써 견제세력으로 활용하는 전략으로 일관.
○ 57세/1398년 태조7년
5월24일, 명나라 태조 주원장 사망.
6월5일, 큰아들 정진, 충주원부사에 제수
8월9일, 이방원 요동정벌 진도 훈련에 불참하여 정도전의 태형을 당함.
(몸종 소근이 대신 맞음)
○ 57세/1398년 태조7년, 제1차 왕자의 난
8월26일, 명나라 정벌 준비하던, 정도전이
새벽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사망.
당시 조정의 중심 세력이 모여 있던 송현동 남은의 첩 집을 급습,
삼봉과 남은, 부성군 심효생(富城君 沈孝生) 등을 살해,
장자 정진이외 아들 두 명(정영, 정유)도 살해당하였으나,
1차 왕자의 난 살해 [2子 鄭泳(소윤), 3子 鄭游(통례문 지후)]
경주 최씨와 혼인 1子 鄭津, 孫 鄭來, 鄭束(증손 장남 鄭文炯)
장자 정진은 태조를 수행하여 삼성재(三聖齋) 방문 길을 수행,
안변군 석왕사에 체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함.
자조(自嘲) -삼봉집에서-
操存省察兩加功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不負聖賢黃卷中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 57세/1398년 태조7년
8월27일, 큰아들 정진 등 정도전 일가. 순군옥에 갇힘.
9월5일, 왕자의 난으로,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버리고,
방과가 왕위를 이음. 도읍을 개경으로 옮김
10월10일, 오몽을(吳蒙乙)을 목 베고
아들 중추원부사 정진은 전라도 수군(水軍)으로 내쫓김.
○ 57세/1398년 태조7년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10일 임자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정도전·남은의 일파인 오몽을을 목베고 정진을 수군에 충군하다
오몽을(吳蒙乙)을 목 베고 정진(鄭津)을 수군(水軍)으로 내쫓았다.
간관(諫官) 권숙(權肅) 등이 말씀을 올리기를,
"오몽을·정진 등은 남은·정도전과 함께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우고자 하여 종친(宗親)을 해치려고 하다가,
실정이 나타나고 일이 명백하게 되어,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이미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했는데도,
오몽을과 정진은 머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죄는 같은데도 처벌은 다르옵니다.
청하옵건대, 형법에 처하여 난적(亂賊)의 근원을 근절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 사후9년/1407년 태종7년
조준, 권근 주청으로 아들 정진 복직.
좌의정 성석린 천거로 판나주목판사(判羅州牧事)로 부임.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3일 계미 3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좌정승 성석린의 의견을 물어 정진을 판나주목사로 삼다
정진(鄭津)으로 판나주목사(判羅州牧事)를 삼았다.
이날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정청(政廳)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이조 좌랑(吏曹佐郞) 조서로(趙瑞老)를 보내어 그 집에 가서 묻게 하였다.
"목사(牧使) 하나를 제수(除授)하고자 하는데, 권숙(權肅)·정진(鄭津)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좋은가? 정진은 이미 추부(樞府)에 들어갔으니,
외관(外官)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성석린이 대답하기를, "일을 처리하는 재주는 정진(鄭津)이
권숙보다 낫습니다."하니, 드디어 정진을 임명하였다.
○ 사후11년/1409년 태종9년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으로 삼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8월 19일 무오 2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으로 삼다
정도복(鄭道復)으로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삼았다.
도복(道復)은 정도전(鄭道傳)의 아우인데,
바야흐로 정도전이 나라 일을 맡아 그 세력이 조야(朝野)를 누를 때에
〈그 아우〉 도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니, 도복이 사양하기를,
"세력과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寒微)한 가문(家門)인데 영화(榮華)가 이미 지극합니다.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땅히 낚시질하고 밭을 갈며 내 천년(天年)을 마치겠습니다.
청컨대, 형(兄)은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뒤에 성주(星州)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이 되었는데,
7년이나 오래 되었으므로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 사후18년/1416년 태종16년
정적 진산부원군 하윤(1347-1416)의 졸
정진 인령부윤(仁寧府尹) 됨.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6월 10일 경오 3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정도전·황거정 자손의 금고를 해제하게 하다
명하여 정도전(鄭道傳)과 황거정(黃居正)의 자손의 금고(禁錮)를 해제하게 하였다.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6월 26일 병술 5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에게 직첩을 주라고 하다
정진(鄭津)에게 직첩(職牒)을 주라고 명하니,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었다.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7월 25일 갑인 2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정도전의 손자 정내와 정속·황거정의 아들 황효신 등에게 직첩을 주다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의 손자 정내(鄭來)와 정속(鄭束),
황거정(黃居正)의 아들 황효신(黃孝信) 등에게 직첩(職牒)을 주었다.
○ 사후19년/1417년 태종17년
정진 판안동대도호부사 됨. 평안도 관찰사 역임
○ 사후21년/1419년 태종19년, 세종1년
정진 충청도 관찰사 역임, 자헌대부 승진 판한성부사, 1420 성절사,
1421 판한성부사, 평안도관찰사, 1423공조판서, 개성부유후, 1425 형조판서
○ 사후29년/1427년 세종9년
아들 형조 판서 정진의 졸(67세)
당시 세종대왕은 각별히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고,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렸다. 바로 증(贈)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讚成)에 추증되고
희절(僖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 경북 영주의 모현사(慕賢祠)에 배향되었으며,
평택의 희절사(僖節祠)에 제향되었다.
○ 정진(鄭津, 1361-1427) 약력
- 1361(공민16) 정도전 장자로 출생
- 1382(우왕8) 낭장, 사재령(司宰令), 전농령(典農令)
- 1391(공양3) 삭직
- 1392(태조1) 연안부사 복직
- 1393(태조2)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경흥부윤, 영원주목사, 공조전서, 형조전서
- 1398(태조7) 중추원부사, 제1차왕자의 난, 아버지 정도전이 주살
벼슬을 삭직, 전라도 수군에 충군.
- 1407년(태종7) 다시 판나주목사로 기용
- 1416년 인녕부윤(仁寧府尹)
- 1419년(세종1) 충청도관찰사
- 1420년 판한성부사, 성절사(聖節使), 평안도도관찰사,
- 1423년 공조판서
- 1424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
- 1425년 형조판서
- 1427년 67세 졸
○ 사후67년/1465년 세조11년, 제 3차 삼봉집(중간 삼봉집)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정도전의 증손 정문형(鄭文炯)이
홍무 초본에 《경제문감》, 《조선경국전》, 불씨잡변(혹은 불씨 변설이라고도 함),
심기리편, 심문천답을 합하여 6책으로 편성, 안동부(安東府)에서 간행.
이때 옛 판본의 산락(散落)된 부분이 많이 수정ㆍ보완. (중간 《삼봉집》)
신숙주(申叔舟)의 후서(後序)가 들어 있다.
○ 사후77년/1475년 성종6년, 영의정 신숙주(1417-1475) 졸
세조 11년 영의정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는
삼봉의 증손자였던 야수 정문형(野叟 鄭文炯, 1427-1501)의 부탁으로
『삼봉집(三峰集)』의 후서를 써주면서, 삼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찬.
“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나 그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 사후88년/1486년 성종17년, 제 4차 삼봉집
증손 강원감사 정문형 지방 주군과 동료들로부터
누락된 시문과 서책을 다시 수집, 1백 20여 장을 속간.
이때 증보된 것은 시부(詩賦) 1백여 수와 《경제문감별집》인데,
다음해에 성종 18년 강원도에서 추각된 판목(板木)을
안동부의 중판본과 합쳐 전부 8책으로 만들었다.
8책 중 2책(《경제문감》 및 《경제문감별집》)은 지금 서울대학교에 소장.
○ 사후103년/1501년 연산7년
정도전 증손 영중추부사 정문형의 졸
○ 정문형(鄭文炯, 1427-1501) 약력
- 1427(세종9) 부 정속(鄭束), 조부 정진(鄭津) 출생
- 1447년(세종2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 정자, 감찰, 예조좌랑으로
궐내에서 다른 관리들과 더불어 기생을 불러들여 가무음주한 죄로 장형(杖刑).
- 1455년(세조1) 교리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
사간, 예조정랑 가례색도감낭청(嘉禮色都監郎廳) 겸직,
이어 사인 재직시에 또 한번 기생을 불러들여 음주한 죄로 장형.
- 1464년 좌간의대부, 공조참의, 경상도관찰사
- 1465년 진주에 살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어머니 병환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죄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파직. (중간 《삼봉집》)발간
- 1466년 함길도절도사·변정원(辨定院: 掌隷院)의 판결사를 거쳐,
- 1467년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옴
- 1472년(성종3)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중추부지사,
황해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 1486년 강원도관찰사를 역임
- 1489년 우참찬, 호조판서, 세자시강원빈객, 경상도순변사를 거쳐
- 1492년 우찬성,
- 1494년 공조판서로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겸직.
- 1495년 판중추부사, 우의정에 승진, 궤장(几杖)을 하사
이해 용렬하고 탐학한 재상이라는 탄핵을 받고
영중추부사로 체직, 영경연사를 겸직.
- 1498년(연산4) 무오사화 때 조정대신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을
대역죄인으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할 것을 주장.
- 1501(연산7) 75세 졸 시호는 양경(良敬).
○ 정문형 부친 정속(鄭束) 실록 기록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7월 25일 갑인 2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정도전의 손자 정내와 정속·황거정의 아들 황효신 등에게 직첩을 주다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의 손자 정내(鄭來)와 정속(鄭束),
황거정(黃居正)의 아들 황효신(黃孝信) 등에게 직첩(職牒)을 주었다.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5월 2일 을축 1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정속이 사조하니 인견하다
진위 현감(振威縣監) 정속(鄭束)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경기에는 밀·보리가 좀 잘되었다고 하던데,
가뭄이 지금 시작되니 매우 염려된다. 하늘의 뜻을 사람이 돌이킬 수는 없으나,
인력(人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하라." 하였다.
○ 사후393년/1791년 정조15년, 제 5차 삼봉집(대구본)
왕명으로 규장각에 명하여 삼봉집 재간,
규장각에 소장되었던 정문형의 중판본의 초본(抄本)을 토대로 함.
구본에 누락된 진법(陣法)과 시문들을 수록,
정도전의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을 보완,
구본의 누락된 글자나 자귀의 와류(訛謬)를 보충 또는 교정,
기사의 중첩된 부분을 깎아내고, 비점(批點)과 주석(註釋)을 첨가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하여 모두 14권 7책으로 편제,
여기에는 권두에 권근의 서문과 신숙주의 후서가 있고, 권말에는 정문형의 발문이 있슴.
성석린(成石璘)이 시운을 뽑고, 권근이 전편에 걸쳐서 비점(批點)과 교정을 하고 주석.
이 책은 대구(大邱)에서 개간하여 일명 대구본(大邱本)이라 함,
오대산(五臺山)ㆍ정족산(鼎足山)ㆍ태백산(太白山)ㆍ홍문관(弘文館) 등에 수장,
이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정족산 소장본과 태백산 소장본으로 지금 서울대학교에 소장
○ 사후467년/1865년(고종2년)
대왕대비가 정도전에게 공로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법궁(法宮)의 전각(殿閣)들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학 국사(無學國師)가 그 당시 수고를 한 사실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야승(野乘)에 자주 보이는데, 나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에게는 특별히 훈봉(勳封)을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하였다.
○ 사후473년/1871년(고종8년)
시호 문헌(文憲), 편액 유종공종(儒宗功宗) 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