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실록 속의 정도전 그리고 야율초재, 하륜과의 비교(18/01/20)

이름없는풀뿌리 2021. 6. 7. 10:16

실록 속의 정도전 그리고 야율초재, 하륜과의 비교 1. 실록 속의 정도전 요즘 삼봉(三峯) 정도전을 탐구면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삼봉을 검색 일별하여 보았다. 앞서 열거한 그의 生前 찬란한 업적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패배자로 낙인 찍혀 간신으로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대에도 그의 동생, 큰 아들, 증손까지도 조정의 중책을 담당하고 천수를 누릴 정도로 성종대까지 삼봉의 조선 창업의 공로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그가 조선 중기 이후 허균, 정여립의 롤모델이 정도전이었고 허균, 정여립과 교류한 최영경, 심우영등과 대척점에 서 있던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유학자 그룹을 중심으로 그를 역적으로 배척하는 극심한 분위기에 그의 자손들의 출사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정조의 명으로 그의 사상을 망라한 "삼봉집"이 발간되고 조선 말엽 자주성을 표방한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시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설계하고 감독하고 작명한 이가 삼봉 정도전임이 밝혀지고, 아울러 그의 엄청난 업적이 다시 재조명 됨과 아울러 공식적으로 신원이 회복되기에 이르른다. 2. 야율초재와 정도전 역사를 탐구하면서 몽골이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7대에 걸쳐 160여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에 대하여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의 창업자가 이성계이지만 실질적 기획자는 정도전이란 인물이 존재하였듯이 야율초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음을 알고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인물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한 징기스칸과 이성계의 식견은 비슷하지만 징기스칸 사후 오고타이대칸도 계속 그를 중용한데 비하여 이방원과 책사 하륜은 주권재민의 위대한 사상가 정도전을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위하여 주살한 점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삼봉 정도전은 주저하는 이성계를 움직여 망해가는 고려를 버리고 창업 단계부터 간여하여 그의 재상중심 이상국가를 실현코자한 반면 준비된 책사 야율초재는 이미 건설된 침입자 징기스칸의 제국에 식민국가의 포로로 발탁되어 그의 조국을 버리고 그의 이상을 실현코자 한 점도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그는 거란의 창업자 야율아보기의 약 7대 후손으로 귀족가문에서 성장하여 유교적 소양과 방대한 철학으로 무장한 야율초재의 입장에서 보면 불학무식한 야만인 집단으로 보였을 몽골 제국에 종사하면서 미개한 몽골 무사 가신들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와일드한 습속을 타파하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원대한 뜻을 관철하고 세계적 대국가 몽골의 국가체계를 세워 수많은 모사꾼들 틈에서도 무려 3대의 군주를 섬긴 점은 정도전이 1대에도 종사하지 못한 점과 비교하여 보면 그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원대한 뜻을 지닌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우후죽순처럼 커져가는 몽골제국의 수 많은 무사, 공신들 틈에서 그들과 싸워가며 중원의 유교적 중앙집권적 국가 체계와 조직을 이식하기에도 벅찼던 야율초재에 비해 민주주의의 본산 서구에서 조차 주권재민의 공화주의 사상이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17세기에 등장했고 天下는 公物이라 한 정여립의 공화사상의 모태이기도 한 " 대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민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라 하여 조선에서 이미 14세기에 삼봉에 의해 진정한 유교적 주권재민의 재상중심 사상이 등장했었고 그의 사상을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조선5백년의 국가 토대가 되었던 것을 보면 사상의 크기, 깊이 면에서 삼봉 정도전과 야율초재를 비교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하겠다. 그래서 야율초재가 기획한 대몽골은 160년 존속한 반면 정도전이 기획한 대조선은 500년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하여 당초 삼봉이 주장한 대로 조선이 다스려 졌다면, 이방원이 하륜과 더불어 삼봉까지 중용하는 오고타이대칸의 포용력을 발휘했다면 조선은 500년 이상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36년, 남북분단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2. 하륜과 정도전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애당초 패배자는 그의 행적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받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조선을 실질적으로 디자인한 삼봉 정도전과 디자인된 조선에 인테리어를 가한 하륜, 당시에는 패배자였던 삼봉과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승리자였던 하륜, 그러기에 삼봉은 假墓로만 남아있고, 하륜은 實墓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역사의 라이벌로 비교하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승리자는 삼봉이고 패배자는 하륜 아닐까? 이방원의 일개 책사에 불과했던 하륜을 조선을 기획한 삼봉에 비교한다는 자체가 비둘기를 봉황에 비유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륜과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1) 5살 차이인 그와는 안향-이제현-이색을 잇는 이색 문하의 동문으로 포은과 함께 친명파에 속했으나 하륜은 최초에 혁명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2)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적인 불교를 배척하고 현실적인 유교, 성리학을 지향하였다. 3)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삼봉은 고려왕조와 스승 이색, 이숭인을 배반하고 하륜은 포은, 삼봉등 그의 동지들을 배반할 정도로 비정함이 있었다. 4) 삼봉이 혁명에 성공하기 전, 유배생활을 전전하다 이성계를 스스로 찾아갔고, 하륜도 외톨이 생활을 전전하다 민제를 통해 이방원을 스스로 찾아갔다. 하지만 삼봉이 혁명에 성공하고 조선의 기초를 설계하는 찬란한 나날을 보낼 때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삼봉을 척살(刺殺)하기 전까지 지방을 전전해야했다. 5) 계룡산 신도안 천도(遷都)를 반대하고 한양 천도를 주장하였다. 단 삼봉이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하륜은 무악(毋岳)을 주산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점은 1) 삼봉이 외가(외조모가 노비출신이라는 설에 시달림) 문제로 출신이 애매한 반면, 하륜은 본가는 물론 처가까지 대대로 지방 대토호였으며 당시 실권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고려의 권문세족 출신이다. 그리하여 삼봉이 신분철폐를 주장한 반면 하륜은 신분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2) 삼봉이 애당초 역성혁명을 꿈꾸고 이성계를 부추겨 혁명의 정당성을 모색한 반면 하륜은 최초에는 정몽주등과 더불어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시 낙향하였지만 삼봉, 권근의 권고로 새 왕조에 참여하게 된다. 3) 삼봉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宰相정치를 지향한 반면 하륜은 중앙집권적 王道 정치를 지향하여 거사후 6조 직계제로 바꾸었다. 4) 삼봉이 요동정벌을 계획할 정도로 자주성이 강한 반면 하륜은 명(明)에 대하여 실리적인 사대 외교와 통혼정책까지 추구하였다. 5) 삼봉과 하륜의 사상은 둘 다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삼봉이 수도 설계, 성벽 건설, 헌법 기초, 각종 제도 도입 등 조선의 總論을 설계했다면 하륜은 속육전 편찬, 각종 제도 보완, 전지 측량등 조선의 各論적인 부분을 보완했는데 운하 건설 주장, 신문고 설치, 저화유통등이 대표적 제도라 할 것이다. 주저하는 이성계를 끊임없이 설득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고 새 왕조의 수도를 정하고, 스스로 건설하고, 그 지명과 건물에 일일이 명칭을 부여하고, 무엇보다도 새 왕조의 헌법(憲法)의 초안(草案)을 기안했고 조선 500년 내내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때 임금도 하늘인 백성을 배반하면 바꿀 수 있음을 경국대전에 명시하고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을 멸하던 시절,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하였고, 아들 정진은 정적 하륜이 건재하던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을 정도로 자신의 형제, 아들, 증손까지 끄떡없이 고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의 뼈대를 세운 그에 대하여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억지로 대역죄인이라 하였으되 자손들이 살아가는데 지장없게 하고 벼슬까지 부여한 것을 보면 암묵적으로 그의 지대한 功에 대하여 시비할 수 없었다는 방증아니겠는가? 조선 개창 일등공신 삼봉이 이색과 정몽주를 핍박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삼봉사후 혁명파에 반대한 이색, 정몽주의 충절에 대하여 선양하는 내용이 실록 곳곳에 나타나는데 이는 조선의 모순이자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조선에게 삼봉은 그야말로 종두자국같이 떨어버릴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신숙주는 말하길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스스로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장량(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지만 새나라의 개창, 헌법 작성, 도성 설계, 병법서 저작, 의학서 저작, 궁중 제례약 작곡 등등 거의 神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아주 짧은 시간(1392-1398)에 발표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혁명(1392년)이전 이미 써 놓고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발표하였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가 얼마나 평소에 철저히 준비된 혁명가요, 법학자요, 의학자요, 군사전략가요, 건축가요, 예술가요, 음악가였는지 알 수 있으며 그럴진대 대몽골의 뼈대를 세운 야율초재도, 책사 장량도 절대 그에 미치지는 못한다 할 것인데 책사 하륜 정도를 삼봉에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삼봉의 원대한 뜻 앞에서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몽골의 야율초재가 징기스칸 사후 툴루이와 오고타이의 왕위 계승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듯이 만약 삼봉이 나이 어린 방석과 야망가 방원을 잘 조율하여 순차적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하륜과 알력하지 않고 협조하여 조선을 왕권 중심의 6조 직계제가 아닌 오늘날 독일, 일본의 수상 중심인 재상 정치 체제를 발전시켜 갔다면 민주주의 본산 서구보다도 훨씬 앞서서 세계 중심국가가 되지는 않았을까? 그의 뜻대로 요동정벌을 잘 추진했더라면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던 간도 지방, 연해주 지방이 우리 영토가 되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36년, 남북 분단도 없는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배달9215/개천5915/단기4351/서기2018/01/20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