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싸리나무기둥은 과연 실재했을까?(17/05/27)

이름없는풀뿌리 2021. 6. 18. 10:15

<<싸리나무 기둥이라는 대둔산 안심사 일주문>> 싸리나무기둥은 과연 실재했을까? (1) 예전에 역사서를 탐독하다보니 궁예가 철원에 태봉국을 세우면서 대궐기둥을 싸리나무로 세웠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또한 대전 살 때 고즈넉하여 자주 찾았던 대둔산 안심사 일주문도 싸리기둥이라 들었던 기억이 있다. (2) 그 뒤 軍에 가서 최전방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가을이면 싸리나무를 잘라 1년 동안 사용할 마당 빗자루를 만드는 일이 연례 행사였다. 그 때마다 그게 사실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전방이라 후방보다 싸리가 훨씬 크기는 하지만 겨우 손가락 굵기 정도인 싸리나무로 과연 대궐기둥을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그 뒤에도 계속 나의 숙제일 수 밖에 없었다. 싸리나무를 다발로 묶어서 세우지는 않았을까? 혹은 예전에는 싸리나무가 크게 자라는 종류가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벼라별 상상을 해 보기까지 하였다. (3) 요즘 탄천변을 달리면서 보니 족제비 싸리꽃이 한창 만개하고 있다. 그 걸 바라보노라니 다시 예전의 그 의문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참에 족제비 싸리와 함께 싸리나무 기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자료를 찾다보니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식물학자는 실재 싸리나무 기둥으로 알려진 많은 사찰 기둥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슴을 알게 되었다. 결론은 기실 싸리나무 기둥으로 알려진 사찰들의 기둥은 느티나무, 소나무등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게 불리우는 이유는 사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불교에서 사리(舍利)가 싸리로 와전되었을 것이란 것이다. 궁예가 미륵의 현신이라 자처했으므로 이런 추론은 상당히 일리가 있어보인다. 배달9214/개천5915/단기4350/서기2017/05/27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덧붙임) 족제비싸리 분류 장미목 > 콩과 > 족제비싸리속 꽃색 파란색 학명 Amorpha fruticosa L. 개화기 5월, 6월 우리 속담에 ‘족제비 잡는데 꼬리 달라는 격’이란 말이 있다. 남이 기껏 노력하여 얻은 성과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공짜로 얻겠다는 얌체족을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족제비 꼬리는 신체의 어느 부위보다 쓰임이 많아 사람들이 탐내는 물건이었다. 족제비싸리란 이름의 작은 나무가 있다. 접두어 족제비는 이 나무의 꽃대가 족제비 꼬리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족제비는 암수가 약간 차이가 있지만 몸길이 25~40센티미터에 꼬리 길이 10~20센티미터의 날렵하게 생긴 동물이다. 족제비싸리가 꽃을 피울 때를 보면 곧추선 꽃대가 족제비의 꼬리와 영락없이 닮았다. 물론 색깔이야 족제비가 황갈색인데 비하여 보라색 꽃이 달리므로 조금 다르지만 꽃대의 길이가 7~15센티미터이니 족제비 꼬리와 길이도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생김새가 좀 날카롭고 약빠르게 생겼으면 흔히 족제비처럼 생겼다고 약간 부정적인 비유를 한다. 옛날에 족제비는 닭장에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용케 들어가서 닭을 물어 죽이는 못된 짓을 서슴지 않아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그래도 족제비싸리의 꽃대에 꽃 핀 모습이 너무 고와 족제비도 덩달아 예뻐 보인다. 족제비싸리는 북아메리카 남부가 고향이며, 1910년경 일본에 수입되었는데 자기 나라는 물론 만주까지 널리 심었다. 우리나라에는 1930년경 만주를 거쳐서 들어왔다고 한다. 족제비싸리는 키가 3미터 정도 자라는 갈잎나무로 11~25개의 작은 잎이 한 잎 대궁에 매달리는 겹잎이고, 얼핏 보아 잎 모양이나 달림 방식이 아기 아까시나무와 같다. 실제로도 아까시나무와는 같은 집안의 콩과 식물이다. 이름에 싸리가 들어 있지만 싸리와는 속(屬)이 다르다. 꽃은 새로 난 가지 끝에 빈틈없이 촘촘히 달리고 늦봄에 짙은 보라색 꽃이 강한 향기를 풍기며 핀다. 열매는 손톱 크기만 한 콩팥모양으로 약간 굽으며 가을에 꽃자리마다 수십 개씩 익는다. 족제비싸리가 일찌감치 멀리 동양 땅으로 시집을 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쬐어 메마르고 건조하며 거름기 하나 없는 황폐지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강인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말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대부분의 산은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광복 이후로 들어오면서 민둥산을 푸르게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산림과학자들은 세계에 눈을 돌려 황폐한 우리 땅에 맞는 나무를 찾았다. 그때 간택된 나무들이 아까시나무, 리기다소나무, 사방오리나무, 족제비싸리의 4인방이다. 다른 세 나무가 큰 덩치로 운신의 폭에 제약이 있는데 비하여 족제비싸리는 덩치가 작고 수많은 종자를 매달아 심고 가꾸기가 쉬운 것이 장점이다. 또 일단 황폐지에 정착을 했다가도 토종 우리 나무들이 들어와 그늘을 만들어버리면 족제비싸리는 조용히 사라져주는 양보정신도 돋보인다. 햇빛을 너무 좋아하는 나무라 지금은 황폐지라는 옛 자람 터를 떠나 제방길이나 철로 옆 등으로 이사와 있다. 녹음이 짙어 갈 때 보라색 꽃으로 우리의 눈을 유혹한다. 싸리나무 속 찬 듯 비어있는 욕심없는 싸리나무 허정균의 나무이야기 -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담았던 싸리나무 쉽게 구할 수 있고 어디서나 잘 자라는 특징 가볍고 작아 실크로드를 건너는 길에 선택 다양한 쓰임새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 입력시간 : 2017. 05.12. 00:00 목조 건축으로 만들어진 전국 각지 수많은 사찰의 기둥을 비롯하여 구시(구유)와 목불(木佛)에 이르기까지 사찰에서 사용하는 큰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은 대부분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3대 사찰 중 하나인 송광사는 많은 스님들을 교육하고 배출하였던 승보사찰답게 그 규모를 느낄 수 있는 데, 4000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분량의밥을 담아 놓았던 커다란 구시 역시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송광사 비사리구시는 얼핏 보아도 지름이 거의 2m나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싸리나무는 콩과의 식물로 아무리 크게 자라도 높이 2~3m, 굵기 2~3cm에 불과한 작은 나무일뿐이다. 활을 잘 쏘았다는 태조 이성계는 광대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을 애용하였다고 하는데, 광대싸리는 참싸리, 조록싸리, 족제비싸리, 땅비싸리 보다 더 큰 나무 이긴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콩과의 싸리나무와 대극과의 광대싸리나무는 족보가 다르다. 단지 싸리나무처럼 보일 뿐이고 흉내를 잘 낸다고 앞에 광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부처가 열반하고 다비식을 치른 후 많은 진신 사리가 나왔는데 그 사리들은 다시 부처의 설법처럼 인도, 중국을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던 여러 나라로 나누어졌다. 이때 사리를 담았던 함을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디든 잘 자라고 또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험준한 산을 지나는 실크로드를 따라 먼 길을 가야 하는 형편상 무겁고 큰 나무로 만들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각 사찰엔 부처의 진신사리를 오랜 기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도록 내구성이 강한 나무로 사리(舍利)를 담을 함을 만들었다. 이때 주로 느티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찰의 기둥이나 커다란 구시 같은 사찰유물 역시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리를 담았던 느티나무나무로 만들어졌던 '사리(舍利) 나무함'이 오랜 기간 전해오면서 싸리나무로 와전된 경우다. 지금도 송광사의 비사리구시 역시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관 하는 곳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엔 5곳에 나눠서 보관하고 있는데 양산 통도사(通度寺), 오대산 중대(中臺) 상원사(上院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이 있다. 여타의 사찰은 부처의 무덤형식인 탑을 세워 부처의 뜻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싸리나무를 사리함으로 선택했던 건 먼 길을 가기 위해 가벼움이 우선시 되었을 것이지만 한편으론 모든 사람이 쉽게 구할 수 있고 그 성질이 속이 찬 듯하나 비어있는 듯 가벼우니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부처님의 뜻이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 싸리나무는 빗자루, 삼태기, 바지게, 채반, 바구니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추운 겨울에도 쉽게 구할 수 있고, 불이 잘 붙어 땔감으로도 그만이다. 특히 전쟁터에서 싸리나무를 모르면 굶어야 한다는데,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아 적에게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항상 깨어 있으라고 자식의 훈육을 위한 배움의 터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회초리로 쓰였다. 그만큼 다양하게 쓰임새가 많았던 까닭에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부처가 실현코자 했던 게 모든 사람의 성불이니 그저 단순한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그 뜻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으니 이보다 훌륭한 불법의 전파가또 있겠는가? 숲 해설가 허정균 마곡사 보물 8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광보전은 그 규모도 놀랍지만 기둥을 이루고 있는 아름드리 싸리나무가 눈길을 끈다. 싸리나무 기둥에서 세월이 보인다. 반들반들한 법당 마루에서 마곡사를 다녀간 불자들의 흔적과 정성이 느껴진다. 대광보전에는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있다. “싸리기둥 칡 보”라는 말을 쓴다. 공주 마곡사나 논산 쌍계사등 몇몇 절에 가면은 흔히 법당기둥이 싸리나무이고 대들보가 칡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 재질을 조사해보면 느티나무로 밝혀지는데도 사람들은 끝까지 그것을 싸리나무기둥이고 칡 대들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콩과식물로서 회초리나 빗자루를 메어 쓰는 싸리나무가 어떻게 기둥감이 될 수 있으며 넝쿨과인 칡이 대들보 감으로 자랄 리가 만무한데도 말이다. 이는 건축용어의 와전이 가져온 대표적인 잘못된 사례이다. 옛 목수들은 나무껍질을 깎을 때, 기둥감은 삼일 걸리고 들보는 칠일 걸린다는 뜻으로 “삼일기둥 칠일 보”라 했다. 그 말이 잘못 와전되거나 뻥튀기 되어 “싸리기둥 칡 보”로 변해 그냥그냥 재미있게 전해 내려온 것뿐이다. 세상에 싸리기둥이나 칡 보는 없다. 같은 글이 초부의 블로그에도 있다. http://blog.daum.net/robustus/14630568 절에 가면 아름들이 기둥을 가리켜 싸리나무라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싸리는 빗자루나 맬까? 큰 기둥이 나올 수는 없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런 의문에 대하여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재질연구실장인 정성호 선생이 계간 한옥문화 2007 겨울호에 실린 ‘싸리나무 기둥의 비밀’ 이란 글에서 밝혔다. 그냥 링크만 걸고 싶어도 종이 책이라 되지 않아 여기 간단히 요약해 본다. ‘싸리나무 기둥의 비밀’ 요약 절의 일주문이나 대웅전 기둥이 싸리나무라는 설명이 많이 있다. 함양 장수사 조계문 (=용추사 일주문) 지름이 1.2m 가 넘는 기둥이 싸리나무란다. 제천 무암사 극락보전 전면기둥도 싸리나무 절 뿐만 아니라 울산 만정헌의 기둥도 싸리나무 송광사의 엄청나게 큰 밥통인 ‘비사리구시’도 싸리나무 김천 직지사 일주문, 논산 쌍계사 대웅전 기둥도 싸리나무라고 한다. 싸리나무는 ‘콩’과에 속하며 1-3m 정도까지 밖에 자라지 않는 낙엽성의 키 작은 활엽수다. 따라서 나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사립문이나 빗자루 또는 회초리로나 사용하지 우람한 기둥이 나올 수는 없다. 세포조직 사진 1) 싸리나무, 느티나무와 소나무의 세포구조다. 실은 느티나무 아니면 소나무 정성호 선생은 위에 들은 보기-싸리나무 기둥이라고 알려진 것들을 조사하여 그 세포구조가 실은 느티나무 아니면 소나무라는 사실을 밝혔다. 사진2) 울산 만정헌. 기둥이 싸리나무라고 하나 막상 정선생이 나무의 속살을 들여다 보니 느티나무였다. 사진3) 마곡사 대웅전 내부 기둥. 싸리나무라고 하나 정선생이 세포구조를 현미경으로 보니 소나무였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에 ‘마곡사 대웅전’ 하고 치면 대웅전 기둥이 싸리나무 라는 설명이 수도 없이 나온다. 사진4) 송광사 비사리구시. 사람들이 먹을 밥을 저장하는 용기다. 엄청난 크기의 밥통이라고 해야 할지 구유라고 해야 할지. 송광사에서는 ‘비사리구시’ 라고 하는데 위 사진에 붙은 설명대로 싸리나무라고 한다. 역시 정선생이 조사하니 싸리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 였다. 느티나무-괴목(槐木) 느티나무는 목재의 색깔이 금색을 띠는 아름다운 황갈색으로 미려하고 나이테가 선명하여 무늬도 매우 아름답다. 견고하고 변형도 잘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썩지도 않고 가공도 잘 되는 결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나라 제일의 재목이다. 이 느티나무는 괴목(槐木)으로도 불린다. 으음.. 필자 집사람이 시집올 때 해온 장롱이 괴목이었는데 그게 느티나무구먼. 왜 느티나무를 싸리나무라고 했을까? 정성호 선생이 싸리나무 기둥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느티나무거나 소나무라는 사실은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그러나 왜 느티나무로 만들어 놓고 싸리나무라고 했을까? 이것은 아직 의문이다. 다만 정선생 추측은 다음과 같다. 절에서도 건물의 기둥이나 불상뿐만 아니라 각종 불교용구에 느티나무를 매우 선호하였으니 사리함 내지 사리용구도 느티나무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사리’와 관련이 깊다 하여 ‘사리나무’로 불리다가 ‘싸리나무’로 발음이 바뀐 것이 아닐까? 결국 싸리나무 기둥이란 결국 전설인데 전설의 출처와 원인을 밝히기는 어렵다. 사진 5) 논산 쌍계사 칡덩굴 기둥은 밤나무 위 사진의 설명대로 논산 쌍계사 대웅전 기둥이 칡덩굴이라고 하나 칡은 재목이 될 수가 없다. 정성호 선생 조사에 의하면 밤나무다. 그 외 싸리나무로 알려진 직지사 일주문은 실은 전나무고, 장수사 조계문 기둥은 느티나무, 제천 무암사 극락보전의 기둥은 소나무였다. 보리수와 싸리나무 (불교세계 99년 1월호) 경북대 임산공학과 박상진 전국의 왠 만큼 알려진 절에 가면 대웅전 앞에 보리수(菩提樹)}라고 하는 나무가 한두 그루 심겨져있는 것을 흔히 본다. 보리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부처님이 이 나무 아래서 정진하여 도를 깨우친 나무로서 불가에서 매우 신성시하는 나무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태어나고 불법을 설파하신 곳은 아열대 지방이므로 우리 나라에 심고 있는 보리수는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인도보리수와는 다른 나무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어떻게 다르며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 유래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울러서 흔히 사찰건물의 기둥 등을 싸리나무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오늘날의 싸리나무는 손가락 굵기 남짓한데 과연 옛날에는 아름드리 크기로 자랐는지 아니면 잘 못 알려진 것인지도 흥미로운 일이다. 필자는 나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사찰에서 만나는 보리수와 싸리나무에 대한 의문을 나름대로 풀어 보고자 한다. 보리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부처님은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 또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 등을 보시면서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을 구하고자 고민하였다. 29세 때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6년간에 걸치는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때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인도보리수는 아열대 지방에 자라는 뽕나무무리의 무화과 종류에 포함되는 나무로서 높이 30m, 지름이 2m 정도나 되는 큰 상록수이다. 인도가 원산이며 가지가 넓게 뻗어서 한 포기가 작은 숲을 형성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다. 이 나무를 불교에서는 범어로 마음을 깨쳐준다는 뜻의 Bodhidruama라고 하며 Pippala 혹은 Bo라고도 하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자로 번역할 때 그대로 음역(音譯)하여 보리수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는 진짜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인도보리수는 추워서 자랄 수 없으므로 불교신자들은 대용 나무가 필요하였다. 이에 스님들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리수라고 말하는 피나무 무리의 나무 중 염주를 만들기에 적당한 열매가 달리고 Tilia miqueliana라는 학명(學名)을 가진 나무를 선택하여 보리수란 이름을 붙여 널리 심기 시작하였다. 왜 많은 나무 중에 피나무 무리를 인도보리수의 대용나무로 선택하였을까? 피나무 무리에는 단단하고 새까만 열매가 지천으로 달려서 염주로 쓸 수 있고 잎이 하트모양으로 부처님의 인도보리수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산에는 남쪽 섬지방을 중심으로 열매를 먹는 보리장나무, 보리밥나무를 비롯한 Elaeagnus 무리를 보리수(甫里樹)라 하여 옛날부터 자라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들을 보리수라고 부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연산6년(1499) 3월1일 조에 전라도 감사에게 이르기를, “동백나무 5∼6 그루를 각기 화분에 담고 흙을 덮어 모두 조운선에 실어보내고, 보리수(甫里樹) 열매를 익은 다음에 봉하여 올려보내라“라는 기록이 있다. 식물학자들은 본래부터 우리 나라에 자라고 있든 Elaeagnus 무리의 보리수(甫里樹)와 스님들이 심는 Tilia miqueliana의 보리수(菩提樹)를 구별하기 위하여 후자를 보리자나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오늘날 절에 심겨져 스님들이 보리수라고 하는 나무는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인도보리수와는 다른 {보리자나무}이다. 그러나 보리자나무를 비롯한 피나무, 찰피나무, 달피나무, 염주나무 등의 피나무 무리들은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여 식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서로 식별하기가 무척 어려우므로 반드시 보리자나무가 아니더라도 스님들은 피나무 무리의 나무를 심고 {보리수(菩提樹)}라고 불러왔다. 우리 나라 절에 보리수를 심기 시작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사에 보면 “명종11년(1141) 2월 정유일에 묘통사(妙通寺) 남쪽에 있는 보리수가 표범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고려 초 이전부터, 아마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파되면서 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 등 염주를 만들 수 있는 열매를 가진 나무는 한자로는 흔히 보리수라고도 하여 나무 이름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싸리나무 어떤 연유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전국의 수 많은 사찰에는 대웅전의 기둥을 비롯하여 목불(木佛)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유물이 싸리나무로 만들어 졌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어떤 이는 옛날 싸리나무는 지금보다 수 십 배 크게 자란 것으로 아예 믿고 있다. 그러나 싸리나무는 콩과 라는 나무무리의 싸리나무 종류에 포함되는 나무로서 아무리 크게 자라도 높이 2-3m, 굵기 2-3cm에 불과한 작은 나무일 따름이다. 화분분석 등의 과학적인 자료에서도 옛날 싸리나무가 큰 나무로 자랐다는 증거는 없고 식물학적인 상식으로도 있을 수 없다. 잠깐 우리 나라의 사서(史書)에 실린 싸리나무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 31년(330)조에는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하여 화살로 사용하였다. 열전 온달조에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으로 바로 찾아갔다가 온달의 어머니로부터 퇴짜를 맞고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宿柴門下)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온달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자세한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하여 싸리 울타리로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조원년(1392) 총서에 “태조는 활을 쏠 때 큰 깍지와 우는 살을 사용하기 좋아하였는데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의 뿔로써 깍지를 만드니,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고 하고 연산 원년(1495) 2월1일 조에는 국장도감 제조(提調) 한치형 등이 아뢰기를, “발인할 때에, 도성에서 전관(箭串)까지는 사재감에서 싸리 횃불을 장만하여 각사의 노비 5백 명에게 들리고, 전관부터 능소까지는 경기·충청·강원도에서 싸리 횃불을 준비하고 군인을 차출하여 들리게 하여야 할 것이나...“하여 횃불의 재료로 궁중에서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조 원년(1801) 5월28일 조에 강화 유수 황승원의 장계에 이르기를, “...가시 울타리를 다시 엄하게 더 튼튼하게 막도록 하여 목책을 많이 세우고 싸리나무 울타리를 단단히 동여매어 가시 묶음을 빽빽하게 늘어 세워서 아주 견고하기를 힘썼으며 군교를 더 정하여 엄하게 지켰습니다“하였다. 이들 문헌에서 본 것처럼 싸리나무는 삼국시대나 조선왕조 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싸리나무와 쓰임새나 크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따라서 옛날 싸리나무는 대웅전의 기둥을 할 만큼 크게 자랐다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싸리나무로 만들었다는 사찰의 기둥을 현미경으로 세포모양을 조사해본 결과 실제로는 대부분이 느티나무(槐木)이었다. 느티나무는 조상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든 나무로서 우리 나라에 흔히 분포하였으며 아름다운 무늬와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면서 가공이 쉬운 최상의 재질을 가진 나무이다. 천마총의 목관, 화엄사 및 통도사 대웅전,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기둥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가구까지 수많은 느티나무 목질유물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느티나무가 싸리나무가 되었을까? 확실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필자의 추정은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舍利函)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므로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든 나무로서 처음에 사리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