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12/14일 들어와 다시 강화로 가려다가 또 다시 들어온 남문(南門, 至和門)>>
□ 仁祖實錄중 남한산성 入城에서 出城까지의 기록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9월 23일 1636년
수찬 오달제 등이 오랑캐에 사람을 파견하지 말라는 글을 올리다
수찬 오달제·이도(李禂)가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오랑캐에 사람을 보내는 일은 크게 불가한 바가 있습니다.
아, 이것 역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까? 교활한 오랑캐가 창궐하여 더욱 방자하게
공갈을 치고 제멋대로 참호하며 감히 와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으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이 성충(聖衷)을 계도하여 흉서(兇書)를 발송하지 아니하고
오랑캐의 사신을 준엄하게 배척한 다음 팔도에 포고하니
사기가 배가되고 상국에 전주하니 의성이 충분히 들리었으며,
칙사가 광림하고 장유(奬諭)가 돈독하니 온 동토 전역이 눈을 씻고
서로 하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요즈음 여기저기서 이론이 생겨나
정탐을 칭탁하여 차사를 보내고 책유(責諭)를 핑계하여 서신을 통하였습니다.
이에 모책(謀策)이 불량하여 의리가 막히고 떠도는 소문이 자자하여 인심이 이미
흩어졌으며, 비방하는 의논이 흉흉하여 국사가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미처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까.
지금 의논드리는 자는 권변(權變)을 칭탁하고 이해로 움직여서 위로는 천청(天聽)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묘산(廟算)을 현란시켜 반드시 다시 화친을 닦아 구차스럽게
편안하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아, 너무 심합니다.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자강책을 강구하지 않고 오로지 고식적인 것만 힘쓰며 의리를 돌보지 않고
치욕을 달게 여기면, 위로 명조를 섬김에 어떻게 변명하며 아래로 신민에 임함에
어떻게 충성을 권하겠습니까. 만세에 기롱을 끼칠 뿐 목전의 급함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득실의 기미를 어찌 지혜로운 자라야 알겠습니까. 인심이 분노하여 허물을 위에 돌리고
사기가 쇠약해져 목숨을 바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니,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신민에게 충의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지경에 이른 후에는 의논한 자의 살을 씹어 먹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봄 화친을 끊은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우리가 먼저 끊지 않으면
어찌 족히 의리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도리어 사람을 보내고 서찰을 통하여
먼저 끊지 않은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 참역(僭逆)한 오랑캐는 참으로 당연히
우리 스스로 먼저 끊어야 할 것인데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기에 이처럼 꼭
변명하고자 하십니까? 구차한 거조는 차마 말할 수 없고 묘당의 성산(成算)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차사를 보내는 것은 본디 간첩을 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간첩을 행하는 일을 중지하였은즉 다시 무슨 명분을 빌리겠습니까?
본의가 서신을 통하는 데 있으면서 반드시 겉으로 가리고자 하니, 이처럼 정직하지 못하면
어떻게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역관을 보내고
서신을 통한다는 명을 속히 중지하여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
"격서를 보내어 적정을 탐색하는 것은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으니
그대들은 자세히 살피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0월 1일 1636년
오달제가 최명길을 논박하는 상소로 파직되다. 일의 전말을 적은 사론
수찬 오달제가 상소하기를,
"지난번 최명길이 사신을 보내어 서신을 통하자는 의논을 화의(和議)를 거절한 후에
발론했고, 또 삼사의 공론이 이미 제기되었는데도 오히려 국가의 사체(事體)는
생각지 않고 상의 의중만 믿고서 경연 석상에서 등대한 날 감히 황당한 말을 진달하여
위로는 성상의 귀를 현혹시키고 공의(公議)를 견제하였으며, 심지어는 대론(臺論)이
제기되었더라도 한편으로 사신을 들여보내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 ‘한 마디의 말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인가 봅니다.
그 말의 전도됨이 몹시 해괴합니다. 옥당(玉堂)이 대면하여 책망하고 중론이 격분하여
일어나기까지 하였으니, 명길은 의당 황공해 하고 위축되어 물의를 기다리는 것이
도리일텐데, 오히려 태연하게 차자를 올려 이치에 어긋나는 논리를 다시 전개하여 오히려
강화하는 일이 끊기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면서 의리가 어떠한지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대각(臺閣)의 의논은 체면이 몹시 중한 것입니다. 비록 대신의 지위에 있더라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책임을 지고 사직하여 불안한 뜻을 보이는 것인데,
명길은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죄를 바로잡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런 의향을 본관(本館)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여러 번 발론하였으나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발론했으나 견제가 이와 같으니 신을 파직하소서."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대체로 사람이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된 것만 책망하는 것은 옳지만
만약 경중을 살피지 않고 또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기회를 틈타
마음내키는 대로 매도하는 것은 몹시 옳지 못한 것이다.
판윤 최명길은 1품 중신으로 사직에 공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이 설사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절대로 멸시하고 욕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인데,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도 모욕을 주니,(黃口小兒, 亦加侮辱)
오늘날 국가 풍습은 과연 한심스럽다 하겠다. 오달제를 우선 파직하라."하였다.
정원과 헌부가 함께,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주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上不報, 仍下敎曰:
"凡人有過, 則只責其失可矣。 若不察輕重, 不顧尊卑, 乘時慢罵, 惟意所欲, 則甚不可也。
判尹崔鳴吉, 以一品重臣, 功存社稷。 其言設或不中, 決不可蔑視僇辱,
而黃口小兒, 亦加侮辱, 今日國習, 可謂寒心。吳達濟姑先罷職"
政院、憲府竝請還收罷職之命, 上終不聽
살펴보건대, 달제가 차자를 올려 명길을 논박하려고 하자
교리 김광혁은 ‘이 논핵은 없을 수 없다.’ 하여 몹시 힘을 주어 말했는데, 그 후에 말하기를
‘나의 처가 명길의 처와 족분(族分)이 있으니 혐의가 있어 논의에 참석할 수 없다.’ 하였고,
수찬 이도는 처음에는 함께 상의하였으나 뒤에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으니,
달제가 분개하여 마침내 상소하여 대항한 것이다. 달제가 후일 화를 당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도의 부정함은 참으로 논할 것도 없지만,
광혁은 평소 기개가 있다고 일컬어진 사람으로 명길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상의 뜻이 명길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리고 또 홍처후 등이 명길을 논핵하였다가
견책당한 것을 보고는 당초의 소견을 바꾸어
억지로 법 밖의 일로 인혐하니, 물의가 그르게 여겼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8일 1636년
부교리 윤집이 최명길의 죄를 논한 상소
부교리 윤집(尹集)이 상소하기를,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 나라가 살아서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형세가
크게 확장하여 경사(京師)를 핍박하고 황릉(皇陵)을 더럽혔는데,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는 이때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력이 미약하여 모두 출병시켜 정벌에 나가지 못하였지만,
또한 어찌 차마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제창할 수야 있겠습니까.
지난날 성명께서 크게 분발하시어 의리에 의거하여 화의를 물리치고 중외에 포고하고
명나라에 알리시니, 온 동토(東土) 수천 리가 모두 크게 기뻐하여 서로 고하기를
‘우리가 오랑캐가 됨을 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려하는 칙서가 내려지자마자 부정한 의논이 나왔는데
차마 ‘청국 한(淸國汗)’이란 3자를 그 입에서 거론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승지와 시신(侍臣)을 내보내라고 한 말이 있으니, 아, 너무도 심합니다.
국정을 도모하는 것은 귓속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군신간에는 밀어(密語)하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이라면 천만 명이 참석하여 듣더라도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으며 만일 의롭지 못한 것이라면 아무리 은밀한 곳에서 하더라도
부끄러운 것이니 비밀로 한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는 진회(秦檜)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하였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홍처후의 계사와 오달제의 상소는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준엄한 견책을 당하여 사정(私情)을 따라 모함하였다고 지척하고,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으로 지목하였으며, 심지어는 신상(申恦)을 의망(擬望)하였다는
이유로 특별히 전관(銓官)을 파직시키기까지 하여 만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였으니,
천둥 같은 위엄에 억눌려 꺾이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삼사의 직책을 가진 자가 벌벌 떨면서 모두 입을 다물었고
심지어 이민구 같은 이는 관직이 높은 간장(諫長)으로서 스스로 성상의 총애만 믿고
공의는 생각지 아니하여 글을 얽어 인피하고 갑자기 지난번 올린 계사를 중지하여
위로는 성상의 뜻에 영합하고 아래로는 명길에게 아첨하고 있으니,
기타 신진 후배 중 이시우(李時雨) 같은 사람들이 간사하게 아첨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는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은 후에는 잃을까 걱정하는 그들의 작태를 살피고 계십니까?
신이 명길의 차자를 취하여 보니, 사설을 장황하게 하여 성상의 귀를 현혹하고 있기에
다 훑어 보기도 전에 눈언저리가 찢어지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국가의 대계(大計)는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연소한 무리가 감히 참여하여
알 것이 아니라는 것과, 정치가 대각(臺閣)에 돌아가고 부의(浮議)에 제재당한다는 등의 말은
은연 중 대각을 협박하고 공의를 저지하려는 흉계가 있는 것이니,
아, 간교하고 참혹스럽습니다. 옛날에 좋지 못한 일을 하는 자는 남이 알까봐 숨기려고
하였는데, 지금 명길이 화의를 주장함에 있어서는 팔뚝을 걷어올리고 나서서
조금도 기휘(忌諱)함이 없이 방자하며, 마침내 주희(朱熹)·호안국(胡安國) 두 현인과
우리 나라의 몇몇 명현을 들어서 구실을 삼았습니다. 또 지난번 화의를 물리친 것을
성상의 과오로 지적하였고, 심지어는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였으며,
계속하여 말하기를,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종묘 사직이 혈식(血食)을 하지 못할 것이라
고 하여, 말을 변화시켜 성심(聖心)을 동요케 하였습니다. 대체로 밖으로 도적의 강성한
세력을 업고서 안으로 자기 임금을 겁주었으니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대론이 제기되었더라도 한편으로 서찰을 보내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전하를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신은 듣건대, 이것도 명길이 경연에서 드린 말이라고 합니다.
조정을 무시하고 대각을 무시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이 말 역시 전하의 나라를 망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 죄를 바로잡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말을 들어주어 합계(合啓)가
한참 펼쳐지고 있는데 국서(國書)는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아, 국가가 대간을 설치한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독단하여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대론(臺論)을 생각지 않으며
부정한 의논만을 따르고 아첨하는 신하만을 의지하여 결국 나라를 잃게 한 후에 말 것이니,
이것은 명길이 계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머리털이 곤두섭니다.
이행건(李行健)의 피혐하는 말에 이르기를 ‘대론이 조정되기 전에
지레 들여 보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만일 시비를 몰랐다면
이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이니 크게 책망할 것이 못되거니와,
혹 시비를 알고도 일부러 이런 모호한 말을 하였다면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속이고 밖으로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태화(鄭太和)는 공의(公議)가 한참 펼쳐질 당시에 부정한 의논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곡진히 아첨하다가 청의(淸議)에 버림을 당했는데 전하께서 특별히 집의를 제수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신하들에게 아첨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전하의 이목(耳目)이 되고 전하의 유악(帷幄)에 있는 자 중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직간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하들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지은 것인데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아, 조종조의 부여한 책임과 신민의 커다란 소망이 모두 전하의 한 몸에 모여 있는데,
뜻을 영합하는 부정한 말에 현혹되시어 직간하는 자가 있으면 온 힘을 기울여 진노하여
물리치시고, 성의(聖意)를 살피어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자는 미치지 못할 듯이 높여
권장하고 총애하여 발탁하시니, 신은 천하 후세에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이르며
나라를 어떤 지경에 놓아 두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당당하던 수백 년의 종묘 사직을
결국 명길의 말 한 마디에 망하게 하시렵니까? 신은 대정(大庭)에서 통곡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고 망녕되어 때에 따라 맞추어
나가지 못하니, 차마 오늘날의 삼사와 더불어 행동을 같이하여 구차스럽게 마음에 들도록
결코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사판에서 깎아내어 공사(公私)간에 편케 하소서."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대내에 머물려 두었다.
이에 대사간 이민구는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양사의 많은 관원도 서로 뒤를 이어 인피하였으며,
옥당은, 삼사는 한몸이니 감히 처치할 수 없다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윤집(尹集)이 삼사를 꾸짖어 욕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싶고
옥당이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것도 소견이 있는 듯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처럼 걸핏하면 허물을 얻는 자는 진퇴시키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윤집으로 하여금 양사를 처리하게 하든지 해조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라. 그리고 판윤
최명길은 당일의 말이 중신을 침범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몹시 부당하다.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여 시비를 함부로 논하여 국가에 해를 끼친 죄를 징계하라."하였다.
대개 지난날 경연 석상에서 명길이 조경(趙絅)의 일로 인하여
김상헌(金尙憲)의 단점을 말하였는데, 윤집은 상헌의 일가 사람이다.
상은 그가 상헌에게 편당하여 명길을 공박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으므로
이런 하교가 있은 것이다. 정원이, 양사가 윤집의 상소로 인하여 인피하였는데
윤집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니,
이에 이조가 옥당 신하들로 하여금 처치하게 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교리 조빈(趙贇), 수찬 이도(李禂)·이만(李曼) 등이 마침내 차자를 올리기를,
"사람들의 말이 실정 밖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처신을
구차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신들이 얼굴을 치켜들고 무릅쓰고 나온 것도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대간이 된 자는 반드시 남의 비방을 당하고도
그대로 재직하는 이치가 없으니, 함께 체차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이미 말이 실정 밖에서 나왔다고 하고는 또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니
고금에 어찌 이런 공론이 있는가. 그대들은 시비를 가리는 것으로 중함을 삼지 않고
다만 꾀를 부려 피하고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참으로 몹시 한심스럽다. 위로는 임금의 손을 묶어놓고 아래로는 의견을 달리하는 자의
혀를 붙들어 맨 뒤에야 마음이 상쾌하겠는가. 모두 계사에 따라 시행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3일 1636년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이 안주에 이르렀다고 치계하자 이에 대해 논의하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치계에 적병이 이미 안주(安州)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상이 삼공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왔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사태가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속히 징병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송경(松京)의 병사 1천 6백 명을 원수에게 넘겨주어
그로 하여금 조용(調用)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에 동의하였다.
김류가 기보(畿輔)의 군사를 소집하여 어가(御駕)를 호위하게 해서
강도(江都)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적이 반드시 깊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니 잠시 정확한 보고를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김류가 굳이 청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대신과 대간이 세자의 분조(分朝)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류가 유도 대장(留都大將)을 선출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누가 적당한가?"하니,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심기원(沈器遠)이 현재 상중에 있는데, 기복(起復)시켜 등용해야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조정의 신하 중 늙고 병든 자를 먼저 강도로 가게 할 것을 명하고,
이어 죄수를 소방(疏放)할 것과 파산된 문무관을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1636년
적병이 송도를 지나자 파천을 논의, 신주와 빈궁을 강도로 가게 하다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도(江都)로 향하게 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1636년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김류가 상에게 강도(江都)로 옮겨 피할 것을 권하였는데,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李聖求)도 그 말에 찬동하였으며,
이홍주(李弘胄)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낭패하게 될 것이니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1636년
대가가 강도로 떠났다가 되돌아오다. 양사가 김자점 등을 정죄하길 청하다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
양사가 아뢰기를,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오로지 변방을 굳게 지키고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적병이 강을 건넌 뒤로
어느 한 곳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적을 깊이 들어오도록 버려둠으로써
종묘 사직이 파월(播越)하고 거가가 창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큰 변란이요, 신민의 지극한 고통이니,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부원수 신경원(申景瑗),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을 모두 율(律)대로 정죄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1636년
수어사 이시백의 청으로 체찰사 이하를 유시하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나아가 아뢰기를,
"장사(將士)를 뜰에다 불러 모아놓고 한 번 교유(敎諭)하시면
군정(軍情)이 반드시 다 감동할 것입니다."하고,
사관 김홍욱(金弘郁)·이지항(李之恒)·유철(兪㯙),설서 유계(兪棨),
주서 이도장(李道長)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적이 성 아래까지 압박해 왔으므로 군정(羣情)이 흉흉하니,
일이 경각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김류 등은 가족이 이미 강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사세를 헤아리지 않고 굳이 대가를 옮기기를 청하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망극한 변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군병들은 대가가 장차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궐 아래에 모여 기다리고만 있으면서
아직도 성을 나눠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상께서 전문(殿門)에 나가시어 체찰사 이하 모든 장수를 불러서 갑주(甲胄)를 갖추고
군령을 듣게 함으로써 수성(守城)하는 뜻을 굳게 정하소서."하니,
상이 이에 깨닫고서 이르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다."하고,
곧 이경증(李景曾)으로 하여금 체찰사 이하를 불러오게 하고 유시하기를,
"경들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마음과 힘을 다하라.
만약 명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군율로 처치하겠다."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1636년
노적의 사신이 오다. 김류 등이 강도로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호차(胡差)가 성 아래에 도착했다. 최명길도 노영(虜營)에서 와서 아뢰기를,
"그들의 말과 기색을 살펴보니 세 가지 조건으로 강화를 정하는 외에는
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필시 속은 것이다. 어찌 세 가지 조건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겠는가."하였다.
대신이 청대(請對)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사세가 점점 급박해지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고,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은 모두 놔두고 대장 십여 명만 거느리고
강도로 달려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사대부 및 종족(宗族)과 함께 이 성에 들어왔으니, 가령 위험을 벗어나
나 혼자 살아난다 한들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군하(群下)를 보겠는가."하자,
성구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세자를 수십 기(騎)로 호위하게 하여
강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하였다.
이때 세자가 상의 곁에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자 상이 달래었는데,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김류와 성구가
여러 차례 강도로 어가를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6일 1636년
체부에 하교하여 산성에 들어온 수령을 기록하게 하다
상이 체부(體府)에 하교하였다.
"각 고을 수령으로서 병사를 거느리고 온 자는
모두 기록해 두어 훗날 상벌의 자료로 삼도록 하라."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6일 1636년
가짜 왕제와 대신을 보낸 것이 탄로나 박난영이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하다
능봉군(綾峯君) 칭(偁)과 심집(沈諿)이 노영(虜營)으로 가서 강화를 의논하였다.
오랑캐가 묻기를,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 사람은 진짜 왕제(王弟)인가?"하니, 심집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또 묻기를,
"그대는 진짜 대신인가?"하니, 심집이 또 대답하지 못하였다.
오랑캐가 마침내 박난영(朴蘭英)에게 묻자 난영이 칭(偁)은 진짜 왕제이고
심집은 진짜 대신이라고 답하니, 오랑캐가 크게 노하여 난영을 죽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세자를 보내온 뒤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6일 1636년
원두표를 어영 부사로 삼다
원두표(元斗杓)를 어영 부사(御營副使)로 삼았는데,
대장 이서(李曙)의 병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6일 1636년
납서로 제도의 군사를 부르고 도원수·부원수 에게 들어와 구원하게 하다
납서(蠟書)027) 로 제도(諸道)의 군사를 부르고,
또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진군하여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다.
[註 027]납서(蠟書) : 잔 글씨로 써서 밀[蠟]로 뭉쳐 몰래 전하는 글.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7일 1636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화의의 부당함을 극언하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청대(請對)하여 화의(和議)의 부당함을 극언하니,
상이 용모를 바르게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7일 1636년
대신을 인견하고 사태를 의논하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였다. 김류가 나아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토록 걱정하고 수고하시니 옥체가 손상될까 매우 걱정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결은 못할망정 어찌 먹고 마시면서 살기를 구할 마음이 있겠는가.
설혹 살아 있다 한들 훗날 무슨 면목으로 중국 조정의 사람을 볼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선왕의 묘정(廟庭)에 절을 하겠는가."하자,
신하들이 모두 울먹이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대부분 판교(板橋)로 향하고 있다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필시 삼남(三南)의 길을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다른 부마(駙馬)는 모두 오지 않았는데
경이 홀로 이곳에 와서 어려움을 함께 하고 있으니, 내가 늘 잊지 않고 있다."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7일 1636년
김류·홍서봉·김신국 등이 청대하고 세자의 인질문제를 논의하다
김류(金瑬)·홍서봉(洪瑞鳳)·김신국·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이성구(李聖求)·
이경직(李景稷)·홍방(洪霶)·윤휘(尹暉)가 청대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적이 또 군대를 증강시켰는데,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한 조각 고립된 성의 형세가
이미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떤 계책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에게도 반드시 의견이 있을 것이니 전부 말하도록 하라."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신들이 계달하고 싶어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습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는데 감히 말을 못하는 것인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인질을 교환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세자를 노영(虜營)에 가게 하더라도
핍박하여 심양(瀋陽)으로 데려가기까지는 않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인질을 교환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의 경우는 인질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뜻이 이와 같으니 내가 보내겠다. 세 대신이 수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양사와 강원(講院)의 신하들이 나아가 아뢰기를,
"비국의 신하들이 세자를 기화(奇貨)로 삼아 노영(虜營)에 들여 보내려 하니,
이는 실로 나라를 망치는 말입니다.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묘 사직과 백성을 위한 계책이다."하였다.
동양위 신익성도 청대하여 아뢰기를,
"전하를 위해 이 계책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전하께서는 유독 송조(宋朝)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흠종(欽宗)이 잡혀가자 휘종(徽宗)이 뒤이어 포로가 되었습니다.028)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사리를 살피지 않으십니까. 지금 군부(君父)를 잡아
적로(賊虜)에게 보내려는 대신과 함께 국사를 도모하고 있으니,
망하는 것 외에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신은 15세에 선조(先朝)의 부마가 된 뒤로
큰 은혜를 받았는데, 세자를 잡아 적로에게 보내는 일을 차마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차고 있는 칼을 뽑아 이러한 의논을 꺼낸 자의 머리를 베고 세자의 말 머리를
붙잡고 그 앞에서 머리를 부수고 죽겠으니, 삼가 원하건대 괴이하게 여기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의 말이 그런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경이 필시 잘못 들은 것이다."하였다.
[註 028]휘종(徽宗)이 뒤이어 포로가 되었습니다. :
송(宋)나라 정강(靖康) 1년(1126) 1월에 금(金)나라가 변경(汴京)을 함락시켰는데,
화친의 조건으로 먼저 흠종을 인질로 요구하여 데려가고 뒤이어 상황(上皇)인
휘종과 태자·후비(后妃) 등을 인질로 데려간 일을 말함, 《송사(宋史)》 권22, 23.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8일 1636년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을 베길 청하다. 하교하여 전승의 결의를 다지다
상이 행궁의 남문에 거둥하여 백관을 교유(敎諭)하였다.
전 참봉 심광수(沈光洙)가 땅에 엎드려, 한 사람을 목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그 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최명길입니다."하자, 상이 유시하기를,
"너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하였다. 이때 최명길이 반열(班列)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자리를 피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 이 같은 비운(否運)을 만나 노로(奴虜)가 침략하였다.
정묘년에 변란이 생겼을 때에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달게 받아들였으나
이는 부득이한 계책으로서 마음은 역시 편치 않았다.
이번에 오랑캐가 대호(大號)를 참칭하고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단호히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화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지금 군신 상하가 함께 한 성을 지키고 있는데,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싸워서 이기면 상하가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을 것이니, 오직 죽음 가운데에서 삶을 구하고
위험에 처함으로써 안녕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과 힘을 합하여 떨치고 일어나
적을 상대한다면 깊이 들어온 오랑캐의 고군(孤軍)은 아무리 강해도 쉽게 약화될 것이고,
사방의 원병이 계속하여 올 것이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아, 같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 서로 도와주고
같은 병을 잃는 사람이 서로 돌보아 주는 것은 이웃끼리도 그런 법인데,
더구나 부자와 같은 군신이며 한 성을 함께 지키며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이겠는가.
나는 그대들이 이 혹한 속에서 어려움을 함께 하며
허술한 옷과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추위에 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음을 생각하고,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오직 바라건대 그대들은 각자 충의심을 분발하고 함께 맹세하여 기어코 이 오랑캐를 물리쳐
함께 큰 복을 도모하라. 그러면 훗날 작상(爵賞)을 어찌 조금이라도 아끼겠는가."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8일 1636년
병사들을 승진시켜 위로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장사(將士)가 이 엄동 설한에 밤낮으로 성을 지키고 있으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참획(斬獲)한 공이 없더라도 내가 매우 기쁘니, 적을 이긴 후에는 논공 행상 하겠다.
중군(中軍) 이하로 아직 6품이 안 된 자는 우선 6품 실직에 올려 제수하고,
5품 이상은 순서대로 실직에 승진시키고,
당상과 가선(嘉善)은 실직을 제수하고,
군졸은 10년을 기한으로 1결(結)을 복호(復戶)하라."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9일 1636년
성을 순시하다
상이 성을 순시하였는데, 북문에서 북쪽 곡성(曲城)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上巡城。 自北門, 至北曲城而還)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9일 1636년
납서로 강도유수·검찰사 등에게 유시하여 빨리 구원하게 하다
납서(蠟書)로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검찰사 김경징(金慶徵),
부검찰사 이민구(李敏求)에게 유시하였다.
"적병이 남한 산성을 포위한 지 벌써 엿새째 되었다.
군신 상하가 고립된 성에 의지하며 위태롭기가 한 가닥 머리카락과 같은데,
외부의 원병은 이르지 않고 통유(通諭)할 길도 끊어졌다.
경들은 이런 뜻으로 도원수·부원수 및 제도(諸道)의 감사와 병사에게 전유(傳諭)하여
빨리 달려와 구원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구하게 하라. 그리고 본부(本府)의 방비도
마땅히 검칙해야 할 것이니, 나루를 건너는 자를 엄히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기어코 회보(回報)하게 하라."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9일 1636년
적병의 진격을 격퇴하다. 성을 순시하다
적병이 진격하여 남성(南城)에 육박했는데, 아군이 화포로 공격하여 물리쳤다.
상이 성을 순시하며 장사를 위로하고, 이어 전사한 장졸에게
휼전(恤典)을 베풀 것과 그 자손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0일 1636년
사신이 와서 한이 송경에 도착했다고 하다. 납서를 도원수 등에게 보내다
호차(胡差) 3명이 성밖에 도착했다. 김류가 최명길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기를 청했으나,
상은 명길이 갈 때마다 속는다고 하여 김신국과 이경직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김류가 비로소 군사를 뽑아 나가 공격할 계책을 아뢰었다.
김신국과 이경직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호차가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이 돌아간 뒤로 전혀 소식이 없는데,
이제 한(汗)이 송경(松京)에 도착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우리가 양국 백성을 위해 계책을 베풀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그 차인(差人)을 물리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다시 납서(蠟書)를 도원수·부원수에게 보내어
진격해 들어와 구원하라고 유시하고,
이어 각 도의 감사와 병사 및 경기 열읍(列邑)에 통유(通諭)하여
군대를 선발해서 적을 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김경징 등에게 하삼도(下三道)의 주사(舟師)를 전부 징집하라고 명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2일 1636년
김류에게 결전할 것을 명하다
상이 김류를 불러 이르기를,
"오늘 한번 결전하라."하니, 김류가 어렵게 여기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 영에 전령하여 식후에 출전하게 하라.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은 모두 잘못되었다.
심열이 어찌 오늘날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몰라서 차자의 말을 그렇게 했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매우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이다."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여러 대장들과 한 곳에 약속을 정하겠습니다."하고,
신경진(申景禛)과 구굉(具宏)이 아뢰기를,
"근래에 접전하는 상황을 보니, 사냥개가 짐승을 쫓는 것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2일 1636년
삼사가 주화자를 참할 것을 청하려다 대사간 김반 등에 의해 그만두다
삼사가 한 자리에 모여 주화(主和)한 사람을 참할 것을 청하려 하였는데,
교리 윤집(尹集)이 논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대사간 김반(金槃)과 집의 채유후(蔡𥙿後)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며 힘써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3일 1636년
성을 순시하고 호궤하다
자모군(自募軍) 등이 출전하여 50명 가까운 적을 죽였다.
상이 소여(小輿)를 타고 북성(北城)으로부터 순시하여 서성(西城)까지 이르렀다.
그 길로 정청(正廳)에 나아가 군사를 호궤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유시하였다.
"너희들이 힘을 합해 적을 죽였으니 참으로 가상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산성에 물자가 부족하여 호궤 역시 넉넉하게 하지 못하니,
내가 한스럽게 여긴다. 너희들은 더욱 마음을 다하여 적을 초멸하도록 하라."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4일 1636년
출전한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다
군사 4백여 명을 보내어 출전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상이 몸소 나아가 호궤하였다.
어떤 병졸이 대열을 벗어나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비단옷 입은 사람을 장수로 정하면 자기는 성 밑에 앉아 있으면서
고군(孤軍)만 나가 싸우게 하니,
대오 중의 사람을 장수로 정하여 출전하도록 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희 대장에게 말해라."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에 어영청이 아뢰기를,
"오늘 출전하여 적을 죽인 수가 그들의 말대로 계산하면 1백 명이 넘습니다.
과장된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나,
방패(防牌) 아래에 둔친 적이 얼마 남지 않았고 흐른 피가 땅에 가득합니다.
전장에서 얻은 것은 호전(胡箭) 1백 4개, 호궁(胡弓) 4개, 검 1자루,
궁대(弓帒) 1부, 갑주(甲胄) 1부, 양구(羊裘) 1벌입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5일 1636년
예조가 온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온조(溫祚)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은 군사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城隍)에도 이미 사전(祀典)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5일 1636년
사영 대장 신경진 등이 청대하고 한 번 싸울 것을 허락받다
사영 대장(四營大將) 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원두표(元斗杓)·이시백(李時白)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체부가 사영에 전령하여 서로 의논해서 적을 섬멸하라고 하였습니다.
동문이나 남문으로 출병하고 싶은데, 어느 곳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하자, 대답하기를,
"망월봉(望月峯)과 동문 밖은 모두 형세가 불리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밤에 결사대를 보내어 적장이 있는 곳을 엄습하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적장이 반드시 진영 안에서 잔다고 볼 수도 없는데, 밤에 놀라게 하는 것도 난처합니다."
하고, 시백이 아뢰기를,
"적은 용병(用兵)에 뛰어나 신출귀몰하니, 평야에서 접전하면 우리에게 불리할 것입니다.
다만 사졸을 쉬게 하면서 적이 올려다보고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초격(勦擊)하든가,
아니면 외부의 원병을 기다려 협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토록 지구전을 벌이다가 장차 어찌할 것인가.
형세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한 번 싸우도록 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5일 1636년
이경증이 아뢰어 이수림·오영발 등을 논상하다
이서(李曙)가 입시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지금 호왕(胡王)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있는 곳을 정탐하게 하는 한편
그들의 군정(軍情)을 해이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고,
이서가 아뢰기를,
"세시(歲時)가 임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 궤유(饋遺)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 사람을 보내는 것은 괜한 일인 듯하다.
그리고 무장은 오직 싸우고 지키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하자,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싸우는 것을 잊었겠습니까. 계략을 써서 이기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 성세(聲勢)를 과장한 거짓 문서를 만들어 성밖에 떨어뜨려 놓아
적이 알게 하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경은 항상 장신(張紳)을 칭찬했는데 그의 재주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큰 그릇은 못 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수림(李秀林)은 그저께 전투에서 적의 방패 아래까지 진격해 갔는데,
담력과 용기가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못할 것이니, 장수로 삼았으면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직 논상하지 않았는가? 즉시 별도로 논상하게 하라."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파총(把摠) 오영발(吳永發)도 쓸 만한 자입니다.
수십 군데를 화살에 맞고서도 뜻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 장사이구나. 이들은 우선 수령에 제수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어 이수림과 오영발을 불러오라고 명하고, 유시하기를,
"그대들이 앞장 서서 용기를 떨쳤으니 나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
장상(將相)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각자 더욱 힘쓰도록 하라."하면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술을 주도록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7일 1636년
이기남이 소와 술을 가지고 갔으나 노장이 받지 않다
이날 소와 술을 노영(虜營)에 보내려 하는데 대신이 들어와 청하기를,
"재신(宰臣)을 보내었다가 구류되면 도리어 나라의 체면이 손상될 것이니,
이기남(李箕男)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김반(金槃)과 승지 최연(崔葕)은 사람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였고,
교리 윤집(尹集)은 상소하여 논의를 주도한 자를 목베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기남으로 하여금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노장(虜將)이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우리에게 동방을 주셨으니,
팔도의 주육(酒肉) 등 모든 물건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국왕이 현재 석혈(石穴)에 처해 있고 내외가 통하지 않아서,
종신(從臣) 이하가 모두 굶주릴 것인데,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르겠다.
너는 가지고 가서 굶주린 신민에게 나누어 주라."하고,
또 말하기를,
"원병이 어느 곳에 도착했기에 우리가 3천 군사로 모조리 죽였고,
또 다른 곳에서 2천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
황제가 이미 나온 것을 너희 나라는 듣지 못하였는가?"하니,
기남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8일 1636년
최명길의 건의로 적진에 익위 허한을 보내어 강화를 논의하게 하다
이조 판서 최명길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사람을 보내어 강화에 대한 일을 시험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하자,
대답하기를,
"일의 성사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을 보내는 것은 무방합니다.
익위(翊衛) 허한(許僩)은 나이가 많아도 제법 구변이 있는데,
전에 강화를 반드시 성사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뭐라고 말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허한이 말하기를 ‘한(汗)이 왔다고 하는데 한은 우리와 형제의 의가 있으니,
서로 존문(存問)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언제 올 것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허한을 불러서 하문하기를,
"듣건대 너에게 소견이 있다고 하니 한번 말해 보라."하자,
허한이 대답하기를,
"금한(金汗)이 왔다고 하지만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오는 것은 바로
병가에서 꺼리는 일입니다. 저들이 강화를 바라는 마음은 반드시 우리의 배는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다. 다만 강화를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한이 언제 오느냐고 물은 뒤에
바야흐로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왔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사자를 보내어 존문하면 그 허실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재신(宰臣)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는 강화를 성사시킬 수 없다고 여겨지는데,
허한은 반드시 성사시킬 수 있다고 하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도 허한과 같습니다. 성사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을 듯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가서 의논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9일 1636년
유도 대장 심기원이 승전했다고 납서로 아뢰다
유도 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이 사람을 모집하고 납서(蠟書)로 아뢰기를,
"경성에 주둔한 적은 대략 5백∼6백 명이고 아군은 겨우 2백 70명이었는데,
다행히도 화공(火攻)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어 낙후된 포수를 불러 모아 이정길(李井吉)을 영장(領將)으로 삼았습니다."하였는데,
공을 과장하여 자랑하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그 때문에 꽤나 사기가 배가되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9일 1636년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1636년
김신국 등을 사자로 보내기로 하고 심기원을 제도의 원수로 삼다
삼공과 이조 판서 최명길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사자를 보내는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지휘를 잘못하여 참패하였으니,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병과 기병의 형세는 현격하게 다른데,
경솔하게 평지에 내려갔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겠는가.
중원(中原)에는 평지에 내려갔을 경우 처벌하는 군율이 있는데,
이는 패몰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일승 일패는 병가에 항상 있는 일입니다.
어제 설령 조금 꺾였더라도 오늘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실정과 형세를 탐지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하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김신국과 이경직 등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판이 명민하니 그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허한(許僩)을 위산보(魏山寶)의 예에 따라 함께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성 안의 호령이 밖으로 통하지 않으니, 심기원(沈器遠)을
제도의 원수로 임명하여 사방의 근왕병을 거느리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1636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사자 문제와 강도유수 장신에 대해 아뢰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내일 재신을 오랑캐 진영에 보내려 한다고 하는데, 가령 오랑캐가
우리의 뜻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말인가?"하자, 대답하기를,
"며칠 전 소와 술을 저들이 이미 받지 않았는데다가
어제의 일을 바야흐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것이니,
지금 사람을 보내더라도 반드시 그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성안의 사람들과 근왕병이 많이들 풀이 죽어 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면 사태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저들이 사람을 보내오기를 기다려 대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좋지만, 세시(歲時)에 존문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다."하였다. 아뢰기를,
"세시의 예는 우리가 이미 행하였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시라는 말은 지난번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내일 사람을 보내도 명분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일 1637년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일 1637년
비국 낭청 위산보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의 진영에 갔다 오다
비국 낭청 위산보(魏山寶)를 파견하여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새해 인사를 하면서 오랑캐의 형세를 엿보게 하였는데,
청나라 장수가 황제가 이미 왔으므로 감히 마음대로 받지 못한다고 하며
공갈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산보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상이 삼공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어떠한가?"하니,
영의정 김류 등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형세가 필시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인 듯합니다."하고,
이조 판서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가 이름은 황제여도 스스로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않으니,
그가 오지 않았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한(汗)이 만약 온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면
분명 까닭 없이 군사를 되돌리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 병력으로는
결단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화친하는 뜻으로
저들의 실정을 은밀하게 탐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어 사신을 파견해서
편지를 가지고 한에게 곧장 보내어
‘듣건대 황제가 나왔다고 하니 본국의 실정을 모두 진달해야 하겠다.’고 한다면
저들이 응당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그러나 제신들은 모두 이를 불가하다고 하였으므로
오래도록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상이 마침내 최명길의 말을 따라
드디어 김신국(金藎國)·이경직(李景稷)을 파견하여
오랑캐 진에 가서 화친을 청하게 하였다. 오랑캐 장수 마부달(馬夫達)이 말하기를,
"황제가 지금 성을 순찰하고 있으므로 천천히 여쭈어 결정해야 할 것이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파견하시오."하였으므로,
김신국 등이 되돌아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일 1637년
귀순하라는 내용의 황제의 글과 그에 대한 의논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홍서봉 등이 한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그 글001) 에,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002) 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003) 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 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하였다. 상이 즉시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앞으로의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하니,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저들이 이미 조유(詔諭)란 글자를 사용한 이상 회답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한(漢)나라 때에도 묵특의 편지에 회답하였으니,
오늘날에도 회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회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 처리하소서."하였다.
상이 각자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으나 모두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영의정·좌의정과 다름이 없습니다."하고,
김상헌이 아뢰기를,
"지금 사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서(賊書)를 삼군(三軍)에 반포해 보여주어 사기를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한이 일단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첩(城堞)을 굳게 지키면서 속히 회답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김상헌은 답서의 방식을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극력 간하였는데,
최명길은 답서에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고 칭하기를 청하고
홍서봉은 저쪽을 제형(帝兄)이라고 부르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이야말로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다.
위로 종묘 사직이 있고 아래로 백성이 있으니 고담(高談)이나 하다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예판은 여전히 고집만 부리지 말라."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한갓 고담이나 하면서 존망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저 적의 뜻이 거짓으로 꾸미는 겉치레의 문자에 있지 않고
마침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해올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비국 당상이
왕복하는 글을 소매에다 넣고 출납하였으므로 승지와 사관도 볼 수 없었다.
[註 001]그 글 : 본 기사에 수록된 청의 국서는
같은 일자 승정원일기에 실린 청의 국서와는 내용이 다름.
[註 002]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註 003]정묘년 : 1627 인조 5년.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일 1637년
완풍 부원군 이서의 졸기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상이 그를 위하여 통곡하였는데 곡성이 밖에까지 들렸다.
의복과 명주를 하사하여 염습하게 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하였으며,
도성에 돌아온 뒤에는 빈소를 그 집안에 들이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서는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후손이다.
무과로 진출하였는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지조가 있었다.
광해군 때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반정(反正) 때에는 장단 부사(長湍府使)로서 관군을 규합 통솔하여
상을 받들어 내란을 평정함으로써 상훈(上勳)에 기록되었다.
경기 감사·판의금부사·호조 판서·병조 판서·형조 판서·공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강명(剛明)하고 부지런하게 마음을 다해 봉직하였는데,
까다롭고 잗단 결함이 있어 이익을 늘이려 하다가 원망을 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역사를 감독하여 완성시키고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는 대가가 머물면서 의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溫王廟) 를 세워
이서를 배향(配享)하도록 명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일 1637년
홍서봉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지고 간 국서
다시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다. 그 글에,
"조선 국왕 성(姓) 모(某)는 삼가
대청(大淸)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에게 글을 올립니다.
소방이 대국에 죄를 얻어 스스로 병화를 불러 외로운 성에 몸을 의탁한 채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닥쳤습니다. 전사(專使)에게 글을 받들게 하여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려고 생각했지만 군사가 대치한 상황에서
길이 막혀 자연 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듣건대 황제께서 궁벽하고 누추한 곳까지 오셨다기에
반신반의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습니다.
이제 대국이 옛날의 맹약을 잊지 않고 분명하게 가르침과 책망을 내려 주어
스스로 죄를 알게 하였으니, 지금이야말로 소방의 심사(心事)를 펼 수 있는 때입니다.
소방이 정묘년에 화친을 맺은 이래 10여 년간 돈독하게 우의를 다지고
공손히 예절을 지킨 것은 대국이 아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실로 황천(皇天)이 살피는 바인데,
지난해의 일은 소방이 참으로 그 죄를 변명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소방의 신민이 식견이 얕고 좁아
명분과 의리를 변통성 없이 지키려고 한 데 연유한 것으로
마침내는 사신이 화를 내고 곧바로 떠나게 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방의 군신이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변신(邊臣)을 신칙하였는데,
사신(詞臣)이 글을 지으면서 내용이 사리에 어긋나고 자극하는 것이 많아
모르는 사이에 대국의 노여움을 촉발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하들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하여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명나라는 바로 우리나라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전후에 걸쳐 대국의 병마(兵馬)가 관(關)에 들어갔을 적에
소방은 일찍이 화살 하나도 서로 겨누지 않으면서
형제국으로서의 맹약과 우호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토록까지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 역시 소방의 성실성이 미덥지 못해
대국의 의심을 받게 된 데서 나온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일에 대한 죄는 소방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으면 정벌했다가 죄를 깨달으면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심(天心)을 체득하여 만물을 포용하는 대국이 취하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만일 정묘년에 하늘을 두고 맹서한 언약을 생각하고
소방 생령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소방으로 하여금 계책을 바꾸어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용납한다면, 소방이 마음을 씻고 종사(從事)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대국이 기꺼이 용서해 주지 않고서
기필코 그 병력을 끝까지 쓰려고 한다면, 소방은 사리가 막히고 형세가 극에 달하여
스스로 죽기를 기약할 따름 입니다. 감히 심정을 진달하며 공손히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하였는데,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삼사가 간하여 중지시켰다.
당시 문장을 대부분 최명길이 작성했는데, 못할 말없이 우리를 낮추고 아첨하였으므로,
보고는 통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일 1637년
홍서봉이 오랑캐에게 상을 ’신하’라 일컫을 것을 아뢰다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오늘부터 비로소 다른 법식을 【다른 법식이란 신(臣)이라고 일컫는 것을 말한다.】 쓰는데,
일이 매우 중대하니, 2품 이상이 모여 의논하게 하소서.
그러나 사기(事幾)를 지연시킬까 두렵습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사람마다 생각이 있겠지만 일이 막중하기 때문에 감히 드러내 발설하지 못합니다.
전하를 받들어 모시고 이 성에 들어왔는데 어찌 다른 것을 돌아 볼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오늘날의 일을 담당하여 기꺼이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겠습니다."하니,
상이 울면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죽지 않고 오래 살아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4일 1637년
척화와 강화의 의논이 있었다. 김자점과 심기원을 각각 원수로 삼다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사신을 자주 왕래시키는 것은 한갓 그들의 술책에 빠지는 것이고
호서(胡書)에 답서를 보내는 것은 오늘날의 급무가 아닙니다. 군신 상하가
마음을 굳게 정하여 동요됨이 없이 한 뜻으로 싸우고 지키는 데 대비해야 합니다."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제로(諸路)의 관군 대부분이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으니
이때 아무리 군사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적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사도 많이 꺾이고 손상되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것도
점점 엉성해지고 있으니,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합니다."하였는데,
꽤나 화가 난 기색이었다.
이성구(李聖求)가 김자점을 양서 원수(兩西元帥)로 일컫고,
심기원을 삼남·강원도 원수로 일컫기를 청하니,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4일 1637년
사간 이명웅 등이 최명길을 죄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사간 이명웅(李命雄), 교리 윤집(尹集), 정언 김중일(金重鎰),
수찬 이상형(李尙馨) 등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어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했지만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화친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오직 싸움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계책은 단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인데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문(南門)이 위태롭고 급박했을 즈음에 이조 판서가 나와 적진에 가기를 청해서
적의 예봉을 늦추었으니, 나라를 위한 그 정성이 가상하였다.
지금 여러 재신들이 저들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최명길의 죄만 다스린다면 역시 원통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모두 최명길의 죄입니다.
사신을 보내자고 청하여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을 불러들였고,
답서 보내기를 서두르면서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그가 지은 문서에 대해서는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삼사의 제신들은 대부분 용렬하여 꼬리와 머리를 감추고 자신의 몸만 보호할 계책을
품고 있으니, 성명께서 무슨 방법으로 아시겠습니까.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전투와 수비를 말하면 번번이 저지시켰고 적의 형세를 논할 때는 반드시 과장하였으니,
이것으로 죄를 삼더라도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무슨 말인가. 이와 같이 실정에 어긋난 말은 하지 말라."하였다.
이명웅이 아뢰기를,
"전투와 수비에 관한 계책을 언제나 최명길이 감언(甘言)으로 동요시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을 헤아려 볼 때 꼭 나라를 그르치려는 것이 아니었고
또 사직에 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말감(末減)하여 청하는 것이니,
그의 죄를 바로잡아 화친과 전투가 양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이소서.
만일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신들의 죄를 다스리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평소에 이러한 환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언제나 시기에 맞춰 주선하려고 하였다.
지금 속임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실로 남보다 뛰어난 식견이 있었으니 처벌할 수 없다.
그대들은 물러나서 생각해 보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4일 1637년
협수사 기평군 유백증이 김류와 윤방을 주벌할 것을 상소하고는 파직되다
협수사(協守使)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지금 추악한 오랑캐가 지구전(持久戰)에 뜻을 두고는 아직 화친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구원병의 진로를 차단하여 전진할 수 없게 하고
오래도록 포위하고 풀지 않아 안팎으로 하여금 막히고 단절되게 하고 있으니,
존망의 기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하겠습니다.
지금 만약 신(臣)이라고 일컫기만 하고 포위가 풀린다면
그래도 오히려 후일을 기약할 수 있으니, 신이 꼭 극력 다투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성(靑城)에서 당한 것과 같은 결과를 필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사전을 벌여야 한다는 뜻을 구원병에게 신칙하고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을 경우
즉시 목을 벤다면 사기가 저절로 배가 될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형세상 반드시 망할 것이고 결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는 이치가 있으니
지금 해야 할 계책은 오직 위엄을 크게 세우고 대의를 밝히며
군율(軍律)을 시행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무릇 화란을 수습하고 평정하는 일은 평소 관위만 차지하고
녹을 받아먹던 무리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에 있는 자는 윤방(尹昉)과 김류뿐입니다.
그런데 윤방은 재능도 없고 덕망도 없이 조당(朝堂)에서 녹봉만 받아먹으면서
임금에게 실책이 있어도 감히 한 마디의 말을 올려 바로잡지 못하였고,
국가의 형세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도 한 가지 계책을 계획하여 구원하지도 못한 채
자기 몸만 돌보고 지위만 보전하려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때 영의정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을 형편없이 처리하여
전쟁의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오늘날의 변고는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김류는 겁만 많고 꾀는 없으며 시기하고 괴팍스러워 제멋대로 하는데
정승으로 병권을 아울러 쥐어 뇌물이 그 집 문에 폭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병이 치달려 와 흉봉(兇鋒)이 육박했을 때 강도(江都)로 행차하기를 청하며
상에게 미복(微服)으로 몰래 떠나도록 권하였는데,
만약 성명께서 성을 나갔다가 되돌아오시지 않았다면,
일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싸우느냐 화친하느냐를 결단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하고 적을 구경만 하면서
날짜를 보내, 군사들을 지치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추악한 오랑캐에게 글을 올려 화친을 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따진다면 누가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이 두 신하를 주벌(誅罰)하고 또 애통해 하는 분부를 내려
사방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면, 큰 위엄이 저절로 수립되고
대의가 저절로 밝혀질 것이며 군율도 저절로 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인하여 생각건대 장사(壯士)의 마음을 용동(聳動)시키는 데는
관작(官爵)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장사(壯士)를 많이 모집하여
상직(賞職)을 내린 뒤, 형세를 보아 야습하기도 하고 복병을 섬멸하는 등 날마다 이와 같이
하게 함으로써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구원병이 대거 모이기를 기다려 한번 사생(死生)을 건 결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김류가 감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인퇴(引退)하였다.
상이 즉시 불러다 보고 이어 위로하며 출사하도록 권하고,
유백증이 상소하면서 두 대신을 공척(攻斥)하였다고 하여 그의 파직을 명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재신(宰臣)을 뽑아 협수사(協守使)의 명칭을 주어
성중(城中)의 사대부를 통솔하면서 북성(北城)의 수비를 돕도록 하였는데,
유백증이 파면되자 이목(李楘)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5일 1637년
전라 병사 김준룡이 치계하여 승전 소식을 전하다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들어와
광교산(光敎山)에 【경기의 수원(水原)과 용인(龍仁) 사이에 있다.】 주둔하며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치계(馳啓)하였다.
당시 남한 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원병의 소식이 잇따라 이르렀으므로 성 안에서 이를 믿고 안정을 되찾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6일 1637년
강원 감사 조정호가 장계하여 전투 상황을 전하다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의 장계가 들어 왔는데, 건치(乾雉) 4수(首)를 올렸다.
그 장계에 "춘천 영장(春川營將) 권정길(權井吉)이 군사를 거느리고
검단산(儉丹山)에 주둔하면서 여러 차례 싸워 많이 이겼는데
갑자기 청병(淸兵)이 뒤를 엄습하는 바람에 무너졌고,
조정호는 현재 용진(龍津)에 주둔하면서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북병(北兵)을 기다렸다가 연합작전으로 진격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6일 1637년
도승지 정광경이 상소하여 체직되고 이경직을 후임으로 삼다
도승지 정광경(鄭廣敬)이 수원(水原)이 공격당하였음을 듣고,
그의 아비 정창연(鄭昌衍)이 현재 수원에서 피난 중인데 생사를 모른다는 것으로
마침내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이경직(李景稷)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7일 1637년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
성 안에 사는 서흔남(徐欣男)과 승려 두청(斗淸)이
모집에 응하여 나갔다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장계를 가지고 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8일 1637년
대신을 인견하고 구원병, 강화, 군량의 문제에 대해 하문하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요즈음 묘당에서 계획하는 것이 있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들이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보아도 지려(智慮)가 얕고 부족하니,
무슨 모책(謀策)이 있겠습니까. 단지 외부의 구원만 기다릴 뿐입니다."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구원병의 수효가 적병에 비교해서 당연히 10배 이상이 될 텐데
발판을 마련하기도 전에 모두 꺾여 버렸고,
이제 믿을 곳은 민성휘(閔聖徽)와 서우신(徐佑申)이 합세하여 전진해 오는 것뿐인데,
성 안의 사기가 점점 위축되고 있으니, 이러한 처지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고,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두 원수가 가까운 거리까지 진군했을 것으로 추측되니,
만약 제진(諸鎭)을 잘 절제(節制)하여 합세해서 전진해 온다면,
적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횃불을 올려도 응하지 않고 호령이 통하지 않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지난번 국서(國書)를 보냈을 적에 적들이 회답하는 말이 있었으니
다시 사람을 보내 물어 보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첩을 지키는 군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굳게 지키는 계책을 삼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이다."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이 적이 필시 무단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니,
우선 사신 보내는 길을 끊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나가서 싸울 수 없다 하더라도 꼴과 양식이 여유가 있으면 지킬 수도 있는데
전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싸울 수도 없고 또 지킬 수도 없다면 화친뿐입니다."하고,
이홍주가 아뢰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만전을 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날랜 군사를 뽑아 적의 허술한 틈을 타서 나가 공격한다면
저들도 반드시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포위를 뚫는다는 것은 마병(馬兵)으로 보병(步兵)을 공격할 때나 해당된다.
보병으로 마병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적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만에 하나 차질을 빚게 되면 성을 지키는 것도 어렵게 될 것인데,
외간(外間)의 논의가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니,
오늘밤 달이 진 뒤에 각영(各營)의 날랜 군사를 대강 뽑아
송책(松柵)을 공격하여 깨뜨리기로 이미 제장(諸將)과 의논하여 정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 지휘하도록 하라."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적의 군사는 배가 부르고 말은 날렵한데, 우리 군사는 날마다 더욱 피폐해지기만 하니,
이런 상태로 저들을 대적한다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상이 관량사(管粮使) 나만갑(羅萬甲)을 명소(命召)하여 이르기를,
"이미 방출한 군량은 얼마이고 남아 있는 군량은 얼마인가?"하니,
대답하기를,
"원래의 수효는 6천여 석(石)이었는데, 현재는 2천 8백여 석이 남았습니다."하였다.
나만갑이 인하여 날을 헛되이 보내며
지구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향(管餉)의 책임을 맡은 자는 이런 마음을 내지 말고
언제나 지구전을 벌일 수 있는 계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8일 1637년
예조가 온조왕의 제사를 다시 지낼 것을 청하다
"지난번 온조왕(溫祚王)의 도사(禱祀)를 행할 때
엉겁결에 구차하게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미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날짜를 가려 중신(重臣)을 파견해서
경건하게 정성껏 치제(致祭)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궁해지면 근본을 생각하게 되고
병이 들어 아프면 부모를 부르게 마련입니다.
숭은전(崇恩殿)의 수용(睟容)을 방금 성 안의 사찰에 봉안하였으니,
상께서 친히 제사를 지내어 명명(冥冥)한 가운데
신의 가호(加護)를 비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註 004]온왕묘(溫王廟)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9일 1637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청대하고 사신 보내는 것에 반대하다
예조 판서 김상헌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어제 대신이 사신을 보내자고 청했을 때는 상께서 무익하다고 하였는데,
오늘 또 청대하여 윤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성상의 뜻은 파견하고 싶지 않은데
대신이 이해관계를 진달하였기 때문에 따르신 것은 아닙니까?
저들이 이미 상의하여 회보(回報)하겠다고 한 이상,
우리가 아무리 자주 사신을 파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우니,
한갓 보탬이 없을 뿐만이 아니고 해로울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해로움이 있는가?"하였다. 대답하기를,
"무도(無道)한 말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데
사람들이 모두 화친을 믿고 있으니 사기가 필시 저하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사신을 구류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무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만, 구류할 근심은 필시 없을 것이다.이것은
참으로 계책이 궁해서 나온 것이니, 어찌 기모(奇謀)와 선책(善策)이라고 하겠는가."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1일 1637년
김류·홍서봉·최명길 등이 청대하고 수정한 국서
김류·홍서봉·최명길 등이 청대하였다.
김류가 글을 보낼 것을 굳이 청하니, 상이 열람하고 하문하기를,
"고쳐야 할 곳은 없는가?"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성상 앞에서 여쭈어 고쳤으면 합니다."하고,
인하여 붓을 잡고 문장의 자구를 고쳤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소방의 재신(宰臣)이 군문(軍門)에 글을 올려 품청(稟請)하였는데,
황제로부터 장차 후명(後命)이 있을 것이라고 돌아와서 말하기에,
소방의 군신(君臣)은 발돋움하고 목을 빼어 날마다 덕음(德音)을 기다렸으나
지금 열흘이 지나도록 분명한 회답이 없습니다. 이에 곤궁하고
사정이 급박하여 다시 아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황제께서는 살펴 주소서.
소방은 앞서 대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도 형제의 의리를 맺고 천지에 명백히 고하였으니,
지역은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정의(情意)는 간격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손만대의 한없는 복이 되었다고 스스로 여겼는데
맹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혹으로 인한 분쟁의 발단이 마음속에서 생겨나
그만 위태롭고 급박한 화란을 당함으로써 거듭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찾아 보건대,
모두가 천성이 유약한 탓으로 군신(羣臣)에게 잘못 이끌린 채
사리에 어두워 살피지 못함으로써 오늘날의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스스로를 책망할 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형이 아우에게 잘못이 있음을 보고 노여워하여 책망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나 엄하게 책망한 나머지 도리어 형제의 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되면, 어찌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소방은 바다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을 일삼고
병혁(兵革)은 일삼지 않았습니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복종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서로 견주겠습니까. 다만 명나라와는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명분(名分)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에
소방이 조석(朝夕)으로 망하게 될 운명이었는데,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수화(水火) 가운데 빠진 백성들을 건져내고 구제하셨으므로,
소방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마음과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대국에게 잘못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하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은혜를 베푼 것이 두터워 사람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사람에게 베푸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진실로 생령(生靈)의 목숨을 살리고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군사를 일으켜 환란을 구제하거나 회군하여 보존되도록 도모해 주는 그 일이
비록 다르다고는 하더라도 그 은혜는 마찬가지라고 할 것입니다.
지난해 소방의 일처리가 잘못되어 대국으로부터 여러 차례나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여전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여 화란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일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되도록 허락하여
종사를 보존하고 대국을 오래도록 받들게 해 주신다면,
소방의 군신(君臣)이 장차 마음에 새기고 감격하여 자손 대대로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고,
천하에서도 이를 듣고 대국의 위신(威信)에 복종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대국이 한번의 거사로 큰 은혜를 조선에 베푸는 일이 됨과 동시에,
더 없는 영예를 사방의 나라에 베푸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직 하루아침의 분함을 쾌하게 하려고 병력으로 추궁하기를 힘써
형제 사이의 은혜를 손상시키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길을 막음으로써
제국(諸國)의 소망을 끊어버린다면, 대국의 입장으로 볼 때에도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할 듯합니다. 고명하신 황제께서 어찌 이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못하시겠습니까.
가을에 만물을 죽이고 봄에 살리는 것은 천지의 도이고,
약한 나라를 어여삐 여기고 망해가는 나라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패왕(伯王)의 사업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바야흐로 영명하고 용맹스런 계략으로 제국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고
새로 대호(大號)를 세우면서 맨 먼저 관온 인성(寬溫仁聖) 네 글자를 내걸었습니다.
이 뜻이 대체로 장차 천지의 도를 체득하여 패왕의 사업을 넓히려고 하는 것이니,
소방처럼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넓은 은혜에 의지하기를 바라는 자에 대해서는
의당 끊어서 버리는 가운데에 포함시키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이에 다시 구구한 정을 펴 집사(執事)에게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1일 1637년
이의정 이홍주와 호조 판서 김신국 등이 국서 대신 말로 물어보길 청하다
우의정 이홍주, 호조 판서 김신국, 예조 판서 김상헌 및 비국 당상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갖가지를 생각하고 헤아려 보아도 국서(國書)를 보내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일 왕래한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먼저 말로
용골대(龍骨大)에게 가서 물어보게 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로 전하는 이야기를 저들이 어찌 응답하겠는가."하였다.
김상헌이 아뢰기를,
"문서 가운데에 ‘임진년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군사를 출동시켜 난리를 구원하였다.
지금 만약 군사를 거두어 보존하도록 도모해 준다면 그 은혜가 다름이 없으니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 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로는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리라고 기대하기 어렵고,
문장을 작성한 것도 매우 타당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김류·홍서봉·최명길을 불러서 들어 오게 하고, 이르기를,
"우상의 뜻은 문서를 보내지 말고 단지 말로 먼저 탐지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하니,
김류와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허다한 이해 관계를 말로 전달하기는 어렵습니다."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국서는 이미 작성되었는데, 여러 갈래로 논의가 많으니 어느 때나 결정되겠습니까.
지금은 여러 의논을 배격하고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1637년
홍서봉의 건의로 정명수와 용골대·마부대에게 은을 주게 하다
홍서봉·최명길·윤휘(尹暉)가 청대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호역(胡譯) 이신검(李信儉)이 와서 말하기를
‘일찍이 정묘년에 유해(劉海)에게 기만책을 써서 그 덕분에 강화하였다. 지금도
정명수(鄭命壽)에게 뇌물을 주면 강화하는 일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런 계책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모름지기 비밀리에 주고 누설되지 않도록 하라."하고, 은(銀) 1천 냥(兩)을 정명수에게 주고
용골대와 마부대(馬夫大)에게도 각각 3천 냥씩 주게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1637년
성을 순시하다가 장졸을 위로하다
상이 세자와 성을 순시하다가 동성(東城)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려 장사(將士)들을 위로하였다.
또 남격대(南格臺)에 이르러 총융사(憁戎使) 구굉(具宏)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 장졸(將卒)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보내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두루 유시하게 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1637년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국서를 전하다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글을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는데,
용골대가 황제에게 품하여 즉시 회보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홍서봉 등이 돌아 와서 강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1637년
동풍이 크게 불고, 헌릉에 불이 나다
동풍이 크게 불었다. 헌릉(獻陵)에 불이 나서 연기와 화염이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4일 1637년
성첩을 지키는 군사 중 원하는 자에게 직책을 제수하도록 명하다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 중에 직책을 받기를 자원하는 자는
차등있게 직책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한량(閑良)은 금군(禁軍)에, 금군은 수문장(守門將)에 임명하고,
수문장과 부장(部將)은 사과(司果)로 옮기고,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은 복호하고 아울러 직첩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4일 1637년
얼어 죽은 군졸이 나오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있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5일 1637년
도원수 심기원이 장계를 보내, 구원병들이 대부분 패했다고 하다
도원수 심기원(沈器遠)의 군관 지기룡(池起龍)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
대구어(大口魚) 알과 연어(漣魚) 등의 물품을 바쳤다. 체부(體府)가 아뢰기를,
"지기룡·김기량(金起良)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와
구원병의 소식을 알렸으니, 논상하소서."하니, 따랐다.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군사를 합쳐
양근(楊根)의 미원(薇原)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2만 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평안도 별장이 8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안협(安峽)에 도착하였다.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이 군사를 거느리고 쌍령(雙嶺)에 도착하였는데,
교전하지도 못하고 군사가 패하여 죽었으며,
우병사 민영(閔栐)은 한참동안 힘껏 싸우다가 역시 패하여 죽었다.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진군하여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 진을 쳤으나
적에게 패하여 생사를 모른다고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6일 1637년
오랑캐가 ‘초항’이란 글자를 성 중에 보이다
오랑캐가 ‘초항(招降)’이라는 두 글자를 기폭에 크게 써서 성중에 보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6일 1637년
무조건 항복하라는 요구에 대해 의논하였으나 사책에는 쓰지 못하게 하다
홍서봉·윤휘·최명길을 오랑캐 진영에 보냈는데, 용골대가 말하기를,
"새로운 말이 없으면 다시 올 필요가 없다."하였다.
최명길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이신검(李信儉)006) 에게 물었더니
이신검이 여량(汝亮)과 정명수(鄭命守)의 뜻을 전하였는데,
이른바 새로운 말이란 바로 무조건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군(人君)과 필부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어떻게든 보존될 수만 있다면
최후의 방법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말을 운운한 것은 우리가 먼저 꺼내도록 한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적당한 시기에 우리가 먼저 그 말을 꺼내어 화친하는 일을
완결짓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영상을 불러 의논하여 결정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갑작스레 의논해서 정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런 이야기를 사책(史冊)에 쓰게 하면 안 되겠습니다."하니,
상이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註 006]이신검(李信儉) : 호역(胡譯) 임.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7일 1637년
오랑캐가 황제의 글을 보냈는데 ‘조선 국왕에게 조유한다’고 하다
오랑캐가 보낸 사람이 서문(西門) 밖에 와서 사신을 불렀다.
이에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오랑캐 진영에 가도록 하였다.
홍서봉 등이 무릎을 꿇고 한(汗)의 글을 받아 돌아왔는데,
그 글에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에게
조유(詔諭)한다."고 하였다. 그 대략에,
"짐(朕)이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그대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고
그대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치의 곡직(曲直)을 따지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천지의 도는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법이다.
짐은 천지의 도를 체득하여,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관대하게 길러주고,
소문만 듣고도 항복하기를 원하는 자는 안전하게 해 주되,
명을 거역하는 자는 천명을 받들어 토벌하고,
악의 무리를 지어 예봉에 맞서는 자는 주벌(誅罰)하고,
완악한 백성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로잡고,
구태여 고집을 부려 굴복하지 않는 자는 경계를 시키고,
교활하게 속이는 자는 할 말이 없도록 만들 것이다.
지금 그대가 짐과 대적하므로 내가 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여기에 이르렀으나,
만약 그대 나라가 모두 우리의 판도에 들어온다면,
짐이 어떻게 살리고 기르며 안전하게 하고 사랑하기를 적자(赤子)처럼 하지 않겠는가.
지금 그대가 살고 싶다면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다면 또한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양국의 군사가 서로 싸우다 보면 하늘이 자연 처분을 내릴 것이다."하였는데,
홍서봉 등이 입대(入對)하여 답서를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나가서 제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8일 1637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청하다
대신이 문서(文書)를 품정(稟定)하였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문서를 제술(製述)한 사람도 들어오게 하라."하였다.
상이 문서 열람을 마치고 최명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勘定)하게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군부(君父)를 모시고 외로운 성에 들어와 이토록 위급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에 누가 다른 의논을 내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바로 국가의 막중한 조치인데 어떻게 비밀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 및 2품 이상을 불러 분명하게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마음은 성실성이 부족하여 속 마음과 말이 다르다.
나랏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니, 이 점이 염려스럽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설령 다른 의논이 있더라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하였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羣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성(二聖)009) 이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하였다.
상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 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 무제(晋武帝)나 송 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의 일010) 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金)나라의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지만,
급기야 사막(沙漠)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汴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이때 김상헌의 말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였으며 말하면서 눈물이 줄을 이었으므로
입시한 제신들로서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상의 곁에 있으면서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
【이 밑에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제신이 간쟁하여 지웠다.】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건대 거듭 유시해 주셨으니,
간절히 책망하신 것은 바로 지극하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서
추상과 같이 엄한 말 속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기운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국이 위덕(威德)을 멀리 가해 주시니 여러 번국(藩國)이 사례해야 마땅하고,
천명과 인심이 돌아갔으니 크나큰 명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운세(運勢)가 일어나는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한다면,
문서(文書)와 예절(禮節)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이 저절로 있으니,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간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반드시 죽고자 하여 자결하려 하니
그 심정이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방의 진정한 소원이 이미 위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보면,
이는 변명도 궁하게 된 것이고 경계할 줄 알게 된 것이며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관대하게 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기에,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註 009]이성(二聖) : 인조와 소현세자를 가리킴.
[註 010]정강(靖康)의 일 : 송(宋)나라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변경(汴京)이 함락되어 휘종과 흠종 부자를 비롯해서
많은 황족과 신하가 사로잡혀 간 변란을 말함.
《송사(宋史)》 권23(卷二十三) 본기(本紀) 제20(第二十).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8일 1637년
이조 참판 정온이 화친을 배척한 죄로 대죄하다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대죄(待罪)하기를,
"신 또한 화친을 배척하였으니, 청나라 진영에 나아가 죽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1637년
오랑캐의 사신 요구로 우상 이홍주·최명길·윤휘가 가다
오랑캐가 보낸 사람이 서문(西門) 밖에 와서 사신을 보내라고 독촉하였다.
좌상 홍서봉이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였으므로
우상 이홍주와 최명길·윤휘를 보내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1637년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虜放大砲於城中, 砲丸大如鵝卵, 或有中死者, 人皆駭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1637년
이조 참판 정온의 최명길이 나라를 팔아 넘겼다는 내용의 차자
이조 참판 정온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외간에 떠들썩하게 전파된 말을 듣건대,
어제 사신의 행차에 신(臣)이라고 일컬으며 애걸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말 맞습니까? 만약 실제로 그러하다면 이는 필시 최명길의 말일 것입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간담이 다 떨어져 목이 메어 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후에 걸쳐 국서는 모두 최명길의 손에서 나왔는데,
매우 비루하고 아첨하는 말 뿐이었으니, 이는 곧 하나의 항서(降書)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래도 신(臣)이라는 한 글자를 쓰지 않아
명분이 아직은 미정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신이라고 일컫는다면
군신(君臣)의 명분이 이미 정하여진 것입니다. 군신의 명분이 이미 정해졌으면
앞으로 그 명령만을 따라야 할 것인데 저들이 만약 나와서 항복하라고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나가서 항복하시렵니까? 북쪽으로 떠나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북쪽으로 떠나시겠습니까? 옷을 갈아 입고 술을 따르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술을 따라 올리겠습니까? 따르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군신의 의리를 가지고 그 죄를 따지며 토벌할 것이고,
따른다면 나라가 이미 망한 것이니,
이러한 처지에 이르러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최명길의 생각으로는, 한번 신이라고 일컬으면 포위당한 성도 풀 수 있으며
군부도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이와 같이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부녀자들이나 소인의 충성 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절대로 이럴 리도 없음이겠습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하의 국가가
길이 보존되기만 하고 망하지 않은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정도(正道)를 지키며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한 번 결전을 벌인다면 성을 완전하게 하는 방법이 없지 않은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 명나라에 대한 우리나라의 입장은
고려 말엽의 금(金)나라나 원(元)나라의 경우와 같지 않은데,
부자와 같은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으며 군신의 의리를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인데 최명길은 두 개의 태양을 만들려고 하며,
백성들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두 임금을 만들려 합니다.
이런 일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신은 몸이 병들고 힘이 약하여
비록 수판(手板)으로 후려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같은 좌석 사이에서
서로 용납하고 싶지 않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최명길의 말을 통렬히 배척하여
나라를 팔아 넘긴 죄를 바로잡으소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거든
속히 신을 파척(罷斥)하도록 명하시어 망언을 하지 못하도록 하소서."하니,
답하지 않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0일 1637년
대사헌 김수현 등이 ‘신하’란 글자에 대해 진달하니 영의정에게 하문하다
대사헌 김수현(金壽賢), 집의 채유후(蔡𥙿後),
장령 임담(林墰)·황일호(黃一皓) 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국서에 그 전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기로 의논하여 정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신 자를 썼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신이라고 일컬으면
다시는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일이 아무리 위태롭고 급박하다 하더라도 명분은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번 신 자를 썼다가 문득 신하의 도리로 책망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하시렵니까?"하면서
끊임없이 이해관계를 반복하여 진달하였다.
상이 영상을 명초(命招)하여 하문하기를,
"헌부가 불가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모르겠습니만, 헌부가, 명분이 지극히 엄하니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야말로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것입니다."하였는데,
최명길이 들어와 상에게 나아가 귀에 대고 말을 하였으므로
입시한 사람들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은 죄인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마땅하니,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만약 신 자를 일컫지 아니하고 한갓 지난번과 같은 모양의 문서를 주고받는다면,
저들이 반드시 화를 내어 다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외복(外服)의 제후(諸侯)로서 상국(上國)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의리에 죽은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사론(士論)을 견지하는 자는 하루라도 늦추어 신이라고 일컬으려 하며,
계려(計慮)가 있는 자는 약조 맺기를 기다린 뒤에 일컬어 여지를 만들려 하는데,
신은 빨리 일컫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0일 1637년
오랑캐가 답서를 보내어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묶어 보내라 하다
이홍주(李弘胄) 등을 보내 지난번의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도록 하였는데,
답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글에,
"그대가 하늘의 명을 어기고 맹세를 배반하였기에 짐이 매우 노엽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러 왔으니 뜻이 용서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직접 준절하게 책망한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알아 여러 번 글을 올려 면하기를 원했으므로,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는 힘으로 공격해서 취할 수 없거나 형세상 에워쌀 수 없어서가 아니라
불러서 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성은 공격하기만 하면 진실로 함락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대의 꼴과 식량을 군사와 말이 다 먹도록 해서
저절로 곤궁하게 하면 또한 함락시킬 수 있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면 장차 어떻게 유연(幽燕)을 함락시키겠는가.
그대에게 성을 나와 짐과 대면하기를 명하는 것은,
첫째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를 보려 함이며,
둘째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어 나라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줌으로써
천하에 인자함과 신의를 보이려 함이다. 꾀로 그대를 유인하려는 짓은 하지 않는다.
짐은 바야흐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사방을 평정하고 있으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여 줌으로써 남조(南朝)에 본보기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 큰 천하를 어떻게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니,
진실로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다 아는 일이다.
그대가 만약 날짜를 미루고 나오지 않는다면,
지방이 유린되고 꼴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생령이 도탄에 허덕이고
재해와 고통이 날마다 더할 것이니, 진실로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일이다.
맹서를 어기도록 앞장서서 모의한 그대의 신하에 대해
짐이 처음에는 모두 죽인 뒤에야 그만 두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정말로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앞장서서 모의한
신하 2, 3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 짐이 효시(梟示)하여 후인을 경계시키겠다.
짐이 서쪽으로 정벌하려는 큰 계책을 그르치게 하고
백성을 수화(水火)에 빠뜨린 자가 이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만약 앞장서서 모의한 자를 미리 보내지 않더라도
그대가 이미 귀순한 뒤에 비로소 찾아내는 짓은 짐이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간절하게 빌고 청하더라도 짐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유시한다."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오늘 저들의 말이 어떠하였는가?"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정말로 조금도 호의를 가지지 않았는데,
그대 나라가 한결같이 사죄하였기 때문에 황제께서 지난날의 노여움을 모두 푼 것이다.
지금 만일 성에서 나오려거든 먼저 앞장 서서 화친을 배척한 1, 2명을 잡아 보내라.
이와 같이 한다면 내일 포위를 풀고 떠나겠다.
그렇지 않으면 성에서 나온 뒤에 또 한 번 다투는 단서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어찌 차마 묶어서 보내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남조(南朝)에 복종하여 섬겨 온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배신할 수 없다고 한 몇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부터 대국(大國)을 섬긴다면
그들도 오늘날 남조를 배반하지 않는 것처럼
뒷날 대국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조약(條約)을 강정(講定)하면서 그들의 답변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다만 답서를 지어내도록 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1일 1637년
이홍주 등을 통해 보낸 국서
이홍주(李弘胄) 등을 보내 국서를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 신 성휘(姓諱)는 삼가 대청국(大淸國)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 폐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신이 하늘에 죄를 얻어 고립된 성에서 고달프게 지내면서
곧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여러 번 서소(書疏)를 올려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찾았습니다만,
실제로 감히 크게 노여워하시는 하늘에 꼭 용서받으리라고 확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은혜로운 유지(諭旨)를 받들건대 지난날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여
추상(秋霜)같은 엄숙한 위엄을 늦추시고 양춘(陽春)같은 혜택을 베푸심으로써
장차 동방 수천 리의 백성들로 하여금 수화(水火) 가운데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니,
어찌 한 성(城)의 목숨만 연장되는 것이겠습니까.
군신 부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를 모를 것입니다.
저번에 성에서 나오라는 명을 받고는 실로 의혹되고 두려워지는 단서가 많았는데,
마침 하늘의 노여움이 아직 거치지 않은 때라서
감히 마음에 품은 생각을 모두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실을 숨김없이 알리고 정령하게 인도하시는 유시를 받들건대,
이는 참으로 옛사람이 이른바 ‘입장을 바꿔서 잘 헤아려 준다.’고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대국을 받들어 섬긴 지 10여 년 동안에 폐하의 신의를 심복해 온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평상시의 언행도 서로 부합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더구나 신실하기가 사시(四時)와 같은
사륜(絲綸)의 명이겠습니까. 따라서 신은 다시 이것을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에게 안타깝고 절박한 사정이 있기에 폐하에게 호소하려 합니다.
동방의 풍속은 대국적이 못되어 예절이 너무하리만큼 꼼꼼합니다.
그리하여 군상(君上)의 행동에 조금만 상도(常度)와 다른 점이 보이면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며 괴상한 일로 여깁니다.
만약 이런 풍속을 따라서 다스리지 않으면 마침내는 나라를 세울 수가 없게 됩니다.
정묘년 이후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사실 다른 논의가 많았으나
가능한 한 진정시키려고 하면서 거연히 나무라거나 책망하지를 감히 못했던 것은
대체로 이런 점을 염려해서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온 성의 백관과 사서(士庶)가 위태롭고 급박한 사세를 목도하고
귀순하자는 의논에 대해서는 똑같은 말로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성에서 나가는 한 조목에 대해서만은 모두들
고려조(高麗朝) 이래로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죽는 것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나가지 않으려 합니다.
따라서 만약 대국이 독촉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뒷날 얻는 것은 쌓인 시체와 텅 빈 성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조만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말들 하는데,
더구나 다른 일의 경우이겠습니까.
예로부터 국가가 망한 이유가 오로지 적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폐하의 은덕을 입어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인정(人情)을 살펴 보건대 반드시 신을 임금으로 떠받들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
것이 신이 크게 두렵게 여기는 바입니다. 폐하께서 귀순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대체로 소방의 종사(宗社)를 보전시키려 함인데,
이 한 가지일 때문에 나라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한 채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면
이는 분명히 폐하께서 감싸주고 돌보아 주시는 본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가 천둥 번개와 같은 군사로 깊이 천 리나 떨어진 지경에 들어와
두 달도 채 못 되어 그 나라를 신하로 만들고 그 백성들을 어루만지셨으니,
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공으로서 전대(前代)에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꼭 신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야 바야흐로 이 성을 이겼다고 말하겠습니까.
폐하의 위무(威武)에도 손상이 가지 않고 소방의 존망(存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 점 하나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국이 이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이기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또 성을 공격하는 목적은 죄 있는 자를 토벌하기 위함인데,
지금 이미 신하로서 복종하였으니, 성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천부적인 예지(睿智)로 만물을 밝게 살피시니,
소방의 진정(眞情)과 실상에 대하여 반드시 남김없이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화친을 배척한 제신(諸臣)의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방은 으레 대간(臺諫)을 두어 쟁논(諍論)하는 직무를 주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행동은 실로 그릇되고 망령되기 짝이 없었으니,
소방의 생령으로 하여금 도탄에 허덕이게 한 것은 이 무리들의 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가을 무렵에 이미 근거 없는 논의로 일을 그르친 자를 적발하여
모두 배척해서 내쫓았습니다. 지금 황제의 명을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마는,
지금 이 무리들의 본정(本情)을 생각해 보면, 식견이 좁고 어두워
천명(天命)이 있는 곳을 모르고 마음속으로 옛날의 습관만 융통성 없이 지키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데 불과합니다. 이제 폐하께서 바야흐로 군신의 대의로 한 세대를 감화시킨다면,
이와 같은 무리도 당연히 불쌍히 여겨 용서하는 가운데 포함시켜야 될 듯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 하늘과 같은 도량으로 이미 국군(國君)의 죄를 용서해 주신 이상,
보잘것없는 이들 소신(小臣)을 곧바로 소방의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도록 회부해 주신다면,
관대한 덕이 더욱 나타날 것이기에 아울러 어리석은 견해를 진달하며
폐하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숭덕(崇德) 모년 월 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1일 1637년
최명길이 국왕이 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오랑캐의 말을 아뢰다
이홍주(李弘胄) 등이 국서를 전하고 온 뒤에 인견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난번의 글에 두 건의 일이 있었는데 듣고 싶다.’ 하기에
신이 먼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일을 대답하고,
성에서 나오는 한 건은 국서 내용을 해석하여 말했더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황제가 심양(瀋陽)에 있다면 문서(文書)만 보내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나왔으니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기필코 유인하여 성에서 나오게 하려는 것은 잡아서
북쪽으로 데려 가려는 계책이다. 경들은 대답을 우물쭈물하지 않았는가?"하자,
대답하기를,
"준엄한 말로 끊었습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1일 1637년
용골대가 급히 사신을 청하다
저녁 때에 용골대가 서문 밖에 와서 급히 사신을 청했다.
상이 대신 이하를 명하여 인견하고, 분부하기를,
"성에서 나가는 한 건은 다시 응답하지도 말도록 하라."하니,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필경 따르기 어려운 일을 어찌 섣불리 대답하겠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는 성질이 본래 유약하니, 저들이 혹시라도 화를 내면
틀림없이 좋은 말로 해명할 것인데, 이렇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혹시 등급을 낮추는 말을 꺼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하였는데,
등급을 낮춘다는 것은 세자(世子)가 성에서 나오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홍주가 아뢰기를,
"세자는 상제(祥制)도 아직 마치지 못했으니, 병이 중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1일 기사 1637년
용골대가 국서를 되돌려 주다
우상 이하가 나가니, 용골대가 국서를 되돌려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답한 것은 황제의 글 내용과 틀리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사간 이명웅이 청대하여 자신을 묶어 보낼 것을 청하다
사간 이명웅(李命雄)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적이 위협하는 것은 단지 두 가지일 뿐인데, 신도 화친을 배척한 사람입니다.
만에 하나 포위를 푸는 데 보탬이 된다면, 신자(臣子)의 직분과 의리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니, 먼저 나가서 그들의 뜻을 막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령 포위를 푼다 하더라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절대로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경우이겠는가."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김류·이성구·최명길이 입대하여 신하를 묶어 보내는 것에 대해 아뢰다
김류·이성구(李聖求)·최명길이 입대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다시 문서를 작성하여 회답해야겠습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의 의논이 당시에는 정론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그르친 죄를 피할 길이 없으니,
그들이 나가기를 자청한다면 좋겠습니다. 홍익한(洪翼漢)은 현재 평양(平壤)에 있는데,
저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처치를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은 홍익한과 한 집안입니다. 그러나 연(燕)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자 태자 단(丹)의 목을
베어 보냈으며,011) 송조(宋朝)에도 한탁주(韓侂胄)의 일012) 이 있었습니다.
만약 상의 명령이 있으면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겠습니까."하고,
이홍주가 아뢰기를,
"지금 만약 묶어 보내어 저들이 즉시 포위를 푼다면
그런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들이 꼭 포위를 푼다는 보장이 없는데
묶어서 보내는 일을 어떻게 차마 하겠습니까."하고,
이성구가 아뢰기를,
"이런 일은 아래에서 강정할 일입니다. 중한 군부(君父)의 입장에서
그런 것을 어떻게 돌아보겠습니까. 홍익한의 죄는 경연광(景延廣)의 죄013) 보다도 크니
저들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이 일은 아래에서 해야 하니, 어찌 품지(稟旨)할 필요가 있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註 011]연(燕)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자 태자 단(丹)의 목을 베어 보냈으며, :
전국 시대(戰國時代) 연왕 희(燕王喜)의 태자 단(丹)이 자객(刺客) 형가(荊軻)를
진(秦)나라에 보내어 진왕(秦王)을 척살(刺殺)하려 하다가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진나라가 연나라로 쳐들어 갔을 때 연왕이 태자 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친 고사임.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
[註 012]송조(宋朝)에도 한탁주(韓侂胄)의 일 :
송(宋)나라 영종(寧宗)이 즉위하여 오태후(吳太后)가 수렴 청정 했을 때,
한탁주가 신임을 받아 평원군 왕(平原郡王)·평장군 국사(平章軍國事)가 되었는데,
전횡(專橫)이 극심하였다. 뒤에 중원을 회복하여 자기의 지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금(金)나라와 무력 충돌을 극력 주장하다가 패하였다.
이에 그의 머리를 함(函)에 담아 금나라에 보내 사죄한 고사임.
《송사(宋史)》 권474 열전(列傳) 제233.
[註 013]경연광(景延廣)의 죄 :
경연광은 오대(五代) 후진(後晋) 고조(高祖) 때의 사람으로 여러 번 공을 세워
마보군 지휘사(馬步軍指揮使)가 되어 병권(兵權)을 장악하였다.
당시 진(晋)나라는 거란(契丹)에 눌려 표문(表文)을 올릴 때 신(臣)이라고 호칭하고
거란주(契丹主)를 부 황제(父皇帝)라고 불렀다. 그런데 출제(出帝)가 즉위해서는
경연광의 의견대로 표문에 신 자 대신 손(孫) 자로 고쳐 호칭했다.
이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꾸짖자 경연광이 전쟁도 불사한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이내 진나라에 쳐들어 왔는데, 경연광이 진문(鎭門)을 닫고 나오지 않으므로
되돌아가기는 하였으나, 이때부터 두 나라 사이가 악화되었다.
출제가 경연광을 하남윤(河南尹)으로 내보낸 얼마 뒤에 거란이 습격하여 그를 잡아 갔는데
호송 도중 틈을 보아 자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진나라는 거란에게 멸망당했다.
《구오대사(舊五代史)》 권88 진서(晋書)14 열전(列傳) 제3.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정부가 화친을 배척한 자에게 자수하도록 하다
정부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자수(自首)하도록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세자가 성을 나가겠다는 내용의 봉서를 비국에 내리다
세자가 봉서(封書)를 비국에 내렸다.
"태산(泰山)이 이미 새알[鳥卵]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의 운명을 누가 경돌[磬石]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이조 참판 정온이 차자하여 자신을 묶어 보내길 청하다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구구하게 차자를 진달한 뜻은 실로 최명길이 신(臣)이라고 일컫는 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그 계책이 행해지고 말았습니다.
신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죽음으로 간쟁하지 못했으니 신의 죄가 크기만 한데,
군주가 이토록까지 치욕을 당했으니, 신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머뭇거리고 은인자중하며 자결(自決)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다행히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니,
어떻게 신이 앞질러 죽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저 오랑캐가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매우 급히 찾는다고 합니다.
신이 그들의 사신을 베고 국서를 태우도록 앞장서서 청한 사람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일은 신이 실제로 하였습니다.
신이 죽어서 조금이라도 존망(存亡)의 계책에 도움이 된다면
신이 어찌 감히 자신을 아끼고 군부를 위하여 죽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오랑캐의 요구를 신으로 응답하게 하소서."하니,
답하지 않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014) 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적이 성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중관(中官)이 원손(元孫)을 업고 나가 피했으며,
성에 있던 조사(朝士)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出擊)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얼마 뒤에 대병(大兵)이 성을 포위하였다. 노왕(虜王)이 사람을 보내어 성 밑에서 소리치기를,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쉽지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조명(詔命) 때문이다.
황제가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급히 관원을 보내 와서 듣도록 하라."하였는데,
대군이 한흥일(韓興一)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말은 믿을 수 없으나 화친하는 일은 이미 들었다. 시험삼아 가서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즉시 말을 달려 진소(陣所)로 가니,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와야만 한다."하였으므로,
대군이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에게 가도록 하였다.
견여(肩輿)로 진중(陣中)에 들어가 늙고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음을 핑계대고
예모를 갖추지 않으니, 좌우에서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으나 노왕(虜王)이 중지하게 하였다.
이어 조정이 화친을 이룬 일을 말하고 대군과 서로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돌아와서 보고하니, 대군이 이르기를,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듣건대 동궁(東宮)께서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하고,
마침내 진문(陣門)으로 갔다. 그러자 노왕(虜王)이 역자(譯者)로 하여금 인도해 들이게 하고
경례(敬禮)를 하였다. 저물녘에 대군이 노왕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갔는데,
군사들은 성 밖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동서(東西)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하게 하였으며,
제진(諸陣)으로 하여금 사로잡힌 사녀(士女)를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대군에게 행재소(行在所)에 글을 올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치계(馳啓)하도록 청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 역자(譯者)가 돌아와 말하기를
‘국왕이 장차 황제를 만나보고 인하여 도성(都城)으로 돌아갈 것이니,
대군과 궁빈(宮嬪) 그리고 여러 재신(宰臣)도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출발할 즈음에 국구(國舅)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자손으로서
궁내(宮內)에 피신해 있다가 자결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이튿날 노왕이 도로 강을 건너갔는데, 몽병(蒙兵)이 난을 일으켜 거의 남김없이 불지르고
파헤치며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도제조 윤방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성중(城中)에 뒤떨어져 머물면서 묘(廟) 아래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몽병(蒙兵)이 파헤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신주(神主)를 잃어버렸다.
[註 014]구왕(九王) : 예친왕(睿親王).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강도 함락 시,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과 전 우승지 홍명형 등의 졸기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인하여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이고 호는 선원(仙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묘(宣廟)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해야 할 일을 만나면 임금이 싫어해도 극언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박두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이 반정(反正)함에 이르러 더욱 중하게 은총을 받아 지위가 정축(鼎軸)015) 에 이르렀지만,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국가가 위망에 처하자 먼저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강도의 인사들이 그의 충렬(忠烈)에 감복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은 젊었을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번 종반(從班)을 역임하였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던 날,
미처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뒤따라 강도에 들어갔다가
김상용을 따라 남문루(南門樓)의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뒤에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생원 김익겸(金益兼)은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재명(才名)이 있었다. 어미를 모시고 강도에 피난 중
적이 이르자 남문루에서 김상용을 따랐다.
그의 어미가 장차 자결하려고 불러다 서로 이별하자 익겸이 울면서
‘내가 어찌 차마 어미가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고, 마침내 떠나지 않고 함께 타죽었다.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은 참판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다.
김익겸과 함께 남문루에 갔는데, 김상용이 장차 스스로 불에 타죽으려 하면서
그들에게 피해 떠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함께 죽었다.
뒤에 모두 관직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은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로
본래 조행(操行)이 있었으며 충효를 스스로 힘썼다.
강도가 함락되자 먼저 스스로 염습(斂襲)할 기구를 마련해 놓은 뒤
신기(神氣)를 편안히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후손으로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했으며
공평하고 정직하였다. 적이 성에 들어오자 송시영(宋時榮)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인(古人)의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 수 있겠는가?"하였다.
송시영이 먼저 죽자 스스로 가서 초빈한 뒤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그 중 하나를 비워두고 말하기를,
"나를 묻어라."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그의 아들 이경(李憬)에게 부치기를,
"장강(長江)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
아, 내 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구구하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네가 나의 뜻을 잘 잇는 데 있다."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심현(沈誢)은 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뜻을 맹세하였다. 적의 공격을 받던 날,
그의 가족이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피하도록 청하니, 듣지 않고 직접 유소(遺疏)를 쓰기를,
"뜻하지 않게 흉적이 오늘 갑진(甲津)을 건넜으니,
종사(宗社)가 이미 망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부인(夫人) 송성(宋姓)과 함께 진강(鎭江)에서 죽어
맹세코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려 합니다."하고,
드디어 관대(冠帶)를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처도 손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함께 죽었다. 상이 유소를 보고 이르기를,
"국가가 심현에게 별로 은택을 내려 준 일이 없는데,
난리에 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기를 중신(重臣)들보다 먼저 했으니
대현(大賢)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그의 처 송씨가 함께 죽은 절개 또한 매우 가상하다. 해조로 하여금 함께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여 그 충렬(忠烈)을 드러내도록 하라."하였다.
전 사헌부 장령 정백형(鄭百亨)은 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인데,
그의 고조(高祖) 이하 4세(世)가 모두 절의(節義)와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정효성이 연로한데다 병까지 위독하여 강도에 피난하였는데,
적이 성에 침입하자 정백형이 그의 아비를 돌보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게 노략질하자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조복(朝服)을 갖추고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두 첩도 함께 죽었다.
전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시골집에 있었는데,
적병이 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성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상길은 선조(先朝)의 기구(耆舊)로서 양사의 장관을 역임하였고,
뒤에 나이 80이 넘었다 하여 초자(超資)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예조가 정표(旌表)하도록 계청하였다.
충의(忠義) 민성(閔垶)은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의 아들이다.
강도가 함락되던 날, 먼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벤 뒤 자살하였다.
기타 유사(儒士)와 부녀(婦女)로서 변란을 듣고 자결한 자와 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註 015]정축(鼎軸) : 삼공(三公).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죽게 해 줄 것을 청하다
예조 판서 김상헌이 관을 벗고 대궐 문 밖에서 짚을 깔고 엎드려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수원의 장관들이 화친 배척한 신하 내보내도록 청하다
수원(水原)의 장관(將官)들이 정원(政院) 문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도록 청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서성과 동성을 습격한 적을 패퇴시키다
밤중에 적이 서성(西城)에 육박하였는데,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힘을 다해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적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갔다.
조금 뒤에 또 동성(東城)을 습격하였다가 패배하여 도망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부사과 윤문거가 아비 대신 성을 나갈 것을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부사과(副司果)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자신이 아비016) 를 대신하여 성에서 나가 그의 목숨으로 속(贖) 바치기를 청하는 한편,
그 역시 일찍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사신을 보내는 것의 부당함을 논한 이상
실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이니 오랑캐 진영에 가기를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註 016]아비 : 척화파인 윤황(尹煌)을 가리킴.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전 교리 윤집과 전 수찬 오달제가 상소하여 오랑캐에게 가서 죽을 것을 청하다
전 교리 윤집(尹集), 전 수찬 오달제(吳達濟)가 상소하였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묘당이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수(自首)하고
가게 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군부의 위급함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조정에 있는 어느 제신(諸臣)인들 감히 나가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지난해 가을과 겨울에 상소를 올려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였으니
이는 바로 더욱 드러나게 화친을 배척한 것입니다.
오랑캐 진영에 가 한 번 칼날을 받음으로써 교활한 오랑캐의 한 건의 요청을 막도록 하소서.
다만 듣건대 묘당의 의논이 신들로 하여금 짐승들에게 사죄시키려 한다고 하니,
묘당의 뜻 역시 슬프기만 합니다. 신들에게 이미 사죄할 것이 없고
또 명을 받든 신하도 아닌데, 어떻게 노적(虜賊)과 수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부호군 윤황이 오랑캐에게 가서 죽을 것을 청하다
부호군 윤황(尹煌)이 상소하였다.
"신이 일찍이 간원의 장관으로 있으면서 망령되게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진달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야 합니다.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하소서."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1637년
시강원 설서 유계의 적극 싸울 것을 청한 상소문
시강원 설서 유계(兪棨)가 상소하였다.
"신이 지난밤에 삼가 듣건대, 묘당의 신하들이 성상께 여쭈지도 않고
마음대로 양전(兩銓)에 분부하여 각사(各司)에 통지해서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명단을 기록하게 한 뒤,
장차 그들을 오랑캐 진영에 잡아 보내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지극히 분하고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는데, 송(宋)나라 변경(汴京)에서도
없었던 일을 바로 오늘날에 보게 될줄이야 일찍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외간에서 전해지는 말을 삼가 듣건대,
이 무리들이 오래도록 불측한 마음을 품고 한 시대의 명류(名流)를 반드시 제거하려고 했는데,
그 뜻을 이룰 길이 없자 겉으로 교활한 오랑캐의 말을 빌려
살육하는 빌미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온 성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다만 이 무리들의 기세에 위축된 나머지
감히 성상에게 진언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그 사실을 듣고 믿지 않았는데 이번 일을 겪고 나서는 과연 징험하였습니다.
아, 전하께서 계해년 반정(反正) 초기에 광해군(光海君)의 죄를 낱낱이 거론할 때에,
오랑캐와 서로 통한 것이 실로 그 중 하나를 차지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나라를 세우게 된 근본이라 할 것입니다.
저 화친을 배척한 인사들이 또한 어찌 자신을 위하여 계책한 것이겠습니까.
단지 천지의 떳떳한 법도를 알아 바꿀 수 없는 대의를 붙들어 세우려고 한 것일 뿐인데,
무슨 나라를 그르친 죄가 있겠습니까.
설령 조정이 그 말을 모두 적용한 결과로 전쟁을 야기시켰다 하더라도,
고금 천하 어디에 자신의 지체(肢體)를 잘라 이리와 호랑이에게 먹이로 주면서
‘저가 앞으로 나를 아껴 깨물지 않을 것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 좌상 홍서봉(洪瑞鳳)이 오랑캐 진영에서 돌아와
감히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분주하게 와서 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들 무리 8, 9명이 같은 소리로 서로 호응하고 행동을 같이 하며
입대해서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태도를 보이면서 실제로 속으로는 임금을 버리고
자신을 안전하게 보전할 계책을 품고서 반드시 저군(儲君)017) 을 협박하여
호랑이의 입에다 던져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여 칼을 품고 노려보면서 다투어
그들의 배에 칼을 꽂으려 하자, 이 무리들도 스스로 저지른 죄가 막중하여
천하에 용납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약 속히 당초의 계획을 진척시켜 오랑캐의 세력을 끼고서
조정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몸도 보전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갖가지로 시간을 끌면서 사기(事機)를 저지시키고 그르치게 하였는데,
적의 형세가 약화되고 전사(戰士)들이 적개심으로 충만될 때에는
혹 날짜가 불길하다거나 바람이 순조롭지 않다고 핑계대는가 하면,
장차 군사를 내보려고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경우가 혹 하루에 두세 차례나 있게 하는 등
시일을 지체시키고 날짜를 끌어 사기가 꺾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의 원병이 크게 이른 뒤에는 허세를 부리며 을러대고 공갈하여
성상의 마음을 동요시킴으로써 조종(祖宗)의 수백 년 종사(宗社)를
마침내 짐승 같은 오랑캐의 번국(蕃國)이 되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겹겹의 포위는 풀리지 않고 오랑캐는 불만족스럽게 여겨
기필코 우리 임금과 세자에게 푸른 옷을 입혀 종으로 삼으려 하니,
신하된 자로서 또한 어떻게 차마 입을 열고 말하며 다시 이 적과 서로 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무리들은 도리어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한 시대의 명류(名流)를 모두 제거시킴으로써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게 한 연후에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를 팔아 자신을 온전하게 하여
혼자 왕시옹(王時雍)이나 범경(范瓊)처럼 이득을 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감히 떳떳치 못한 해괴한 행동을 하면서도
오히려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차마 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궁문(宮門)을 지척에 두고도
상께 여쭈지 않고 마음대로 분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강제로 문안(文案)을 작성케 한 뒤
성에서 나가 사죄한다고 일컬으며 잡아 보내는 흔적을 숨기려고 한 것인데,
실제로는 사류(士流)를 해치려고 한 것입니다.
아, 그들의 계교가 교활하고도 참혹한데 어떻게 그런 줄을 알겠습니까.
오랑캐의 글에는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약을 무너뜨린 자를 말하였는데
이 무리들은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자를 섞어서 거론하였으며,
오랑캐의 글에는 두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이 무리들은 그 수효를 정하지 않고
꼭 그들이 미워하는 자를 모두 섬멸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지난날의 사사로운 유감을 보복하고
한편으로는 훗날의 언로(言路)를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 몇 가지만 가지고 살피더라도 그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환히 알 수 있는데,
신은 아마도 한 시대의 명류가 모두 죽은 뒤에는
이 무리들의 마음에 못할 짓이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신이 감히 성상의 뜻을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잡아 보내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당초 이 무리들은 말하기를
‘만약 왕자와 대신을 보내면 화친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미 보낸 뒤에는 곧 이어 세자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또 말하기를 ‘신하라고 일컬으면 포위를 풀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신이라고 일컬은 뒤에는 또 성에서 나오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이것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교활한 오랑캐의 욕심이 끝이 없어 갈수록 요구 조건이 더 심각해지기만 하니,
신은 백마역(白馬驛)의 화(禍)처럼 사류를 일망타진하는 것이
왕과 대신이 끌려간 청성(靑城)의 치욕을 완화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삼군(三軍)을 지휘하는 원수(元帥)는 꺾을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선비에게는 진실로 몸이 가루가 되어도 본래의 마음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아무리 왜곡되게 사죄하는 명목을 붙여 축출하는 계교를 이룬다 하더라도
화친을 배척한 인사들의 입장에서는 당초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 죄가 있겠습니까. 그저 흉측한 무리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에 불과하여
전하의 처지에서 군신(君臣) 간의 대의를 끊는 결과가 되어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모두 배반하여 흩어질 것을 생각하게 할 뿐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차마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설혹 이렇게 해서 겹겹의 포위가 풀린다 하더라도
국가의 명맥(命脈)은 이미 끊어졌으니, 결코 얼마 동안이라도 연장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함께 망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필이면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을 하여
천하 후세에 비웃음을 남긴 뒤에야 그만두려 하십니까.
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구하고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진실로 이 무리들을 베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끝내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에서 나가기도 전에
먼저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있을 듯싶습니다.
신이 근일에 이 무리들의 정상을 익숙히 보고 통분스러운 마음이 골수에 사무쳐
한마디 하려고 생각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무리들이 바야흐로
국사를 맡고 있어 말해도 무익할 뿐 분란만 초래할까 참으로 염려되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은인자중하며 감히 발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이미 끝장이 나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에 한번 죽을 계획을 결심하고 어리석은 심정을 모두 진달하니,
전하께서 혹시라도 신이 무고하는 말을 한다고 여겨지시거든
먼저 신의 머리를 베어 간교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신은 차라리 송(宋)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죽을지언정
차마 이 무리들과 함께 천지 사이에 서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드릴 말씀이 한 가지 있는데, 신이 죽게 된 때를 당하여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창업하거나 중흥한 제왕치고 죽음 가운데에서 살기를 구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 번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한 번 살 수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간신들이 자신을 안전하게 하는 계책을 곧이듣고서
늘 죽을 사(死) 자를 한 쪽에 비켜둔 채 감히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단지 애처로운 사연과 괴로운 말로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요행히 모면하는 훌륭한 계책을 삼으면서 힘없이 구차스럽게 행동하여
오늘날처럼 극도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만전(萬全)을 기하는 계책은 실로 만위(萬危)의 방법 속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 마음을 굳게 정하여 흥망과 성패에 동요됨이 없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계책과 힘이 다하여 장차 망할 운명에 이르면 온 성 안의 무리를
네 문으로 나누어 내보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길을 떠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들과 뒤섞여
형양(滎陽)에서 한 고조(漢高祖)가 했던 일이나
계성(薊城)에서 광무제(光武帝)가 했던 것처럼 말을 달려 탈출하셔야 합니다.
하늘이 만약 순조롭게 도와주어 국가의 운명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흥복(興復)시킬 기약을 그래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설혹 불행하게 된다 하더라도 온 족속이 북쪽으로 끌려 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데, 그야말로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註 017]저군(儲君) : 세자.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1637년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賊放大砲於南格臺、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辟易。 賊兵進逼南城, 我軍擊却之)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1637년
적이 사신을 독촉하자 이홍주 등이 국서를 전달하고 오다
적이 서문(西門) 밖에 와서 사신을 보내라고 독촉하였다.
사신 이홍주(李弘胄)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1637년
대사헌 김수현 등이 차자를 올려 묘당의 의논을 개정하도록 청하다
대사헌 김수현(金壽賢), 부제학 이경석(李景奭),
집의 채유후(蔡𥙿後), 정언 이시우(李時雨)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교활한 오랑캐가 갖가지로 속임수를 쓰면서 갈수록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지금 아무리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보낸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그만두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군부의 화를 구원할 수만 있다면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필시 자진하여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박하여 보내는 일을 어찌 조정이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난을 해소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먼저 그 수족(手足)을 스스로 자른다면 망하는 것을 재촉하는 결과만 될 뿐이니,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습니까.
더구나 당초 오랑캐에게 답할 때 이미 배척하여 쫓아냈다고 말했고 보면,
오늘날 그들보다 조금 가벼운 자들을 조사하여 보내겠다는 말은 앞뒤가 틀릴 뿐만 아니라,
오랑캐가 요구한 것은 주모자인데 그들보다 가벼운 자들까지 아울러 거론하는 것은
아, 또한 참혹합니다.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그 의논을 개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5일 1637년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砲聲終日不止。 城堞遇丸盡頹, 軍情益洶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5일 1637년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청하고는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돌려주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덕형(李德泂)·최명길(崔鳴吉)·이성구(李聖求) 등이 가서 그들을 보니,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인데,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거든 사신은 절대로 다시 오지 말라."하고,
이어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되돌려 주었으므로
최명길이 이야기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1637년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졸이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에게 보낼 것을 청하다
훈련도감의 장졸 및 어영청의 군병이 성 위에서 서로 인솔하여 와서
대궐문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 진영에 보낼 것을 청하였다.
당시 신경진(申景禛)이 훈련도감의 군병을 거느리고 동성(東城)을 지켰으며,
구굉(具宏)은 남성(南城)을 지켰고,
구인후(具仁垕)는 수원 부사(水原府使)로서 남문(南門)을 지켰는데,
홍진도(洪振道)와 은밀히 모의하고 군졸들을 교유(敎誘)하여
이렇게 협박하는 변고를 일으켰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기면서 두려워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기를,
"군정(軍情)이 어떠한가?"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군정이 이미 동요되어 물러가도록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습니다.
저들은 부모와 처자가 모두 살육 당했으므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보기를 원수처럼 여겨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진정시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직 그 뜻을 따르도록 힘쓰는 것이 마땅하니,
오늘 의논해서 결정하여 내일 내보내도록 하소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태가 이미 위급해졌다. 세자가 자진하여 나가려고 하니,
오늘 사람을 보내 말하도록 하라."하니,
대신이 모두 아뢰기를,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군병들이 중로(中路)에서 배회하며 아직도 물러나지 않고 있는데,
신은 변고가 목전에 닥칠까 염려됩니다.
이것은 대신이 처리할 일이니, 어찌 상의 분부를 기다리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성을 보전하지 못하면 역시 화를 벗어나기 어려우니 함께 죽을 뿐이다.
세자가 성에서 나갈 것이라고 한 번 말해 보라."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옳습니다. 이것을 말하여 굳은 약속을 받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태가 매우 급박하니 신이 나갔으면 합니다."하니,
김류가 안 된다고 하였는데,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금이 진실로 어떤 때인데 형식적으로 하겠습니까?"하자,
김류가 말을 하지 못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1637년
강도의 함락 보고를 처음 듣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세자가 나온다는 뜻을 알리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하고,
인하여 윤방·한흥일의 장계와 대군(大君)의 수서(手書)를 전해 주었다.
이에 처음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1637년
홍서봉·최명길 등이 강도의 함락을 아뢰다
상이 홍서봉 등을 인견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청나라사람들이 매번 강도를 공격하겠다고 하더니, 지금 정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천하 만고에 어찌 이와 같은 화란이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윤방의 장계를 내어 보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빈궁(嬪宮) 이하에 대해서 매우 극진하게 예우하는데,
재상의 가속들도 많이 거느리고 왔다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큰 강으로 가로막힌 천연의 요새가 있다 하더라도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하였다.
승지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신이 강도의 장계를 보건대 네 사람의 서명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혹시 필적을 모방해서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습니까?"하니,
윤구로 하여금 윤방의 서명을 살펴보도록 명하였으나,
윤구 역시 자세히 분변하지 못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1637년
대신 및 최명길이 청대하자 내일 성을 나가기로 결정하다
대신 및 최명길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강도의 장계는 위조한 것인 듯싶은데, 대군의 사서(私書)는 믿을 만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의 서찰은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으며,
편지 내용 중에도 다른 말은 별로 없고 화친하는 일로 만나 보러 나간다고 하였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장계 가운데 김경징(金慶徵)·이민구(李敏求)의 이름이 없는데, 추측하건대
이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른 곳에 있거나 아니면 혹시 전사해서 그럴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외지에 도망하여 피했기 때문에 장계 가운데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늘 청원한 것은 화(禍)를 늦출 만한 것이었는데도 저들이 또 거절했으니,
장차 무슨 계책을 내겠는가."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외로운 성의 형세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
저들이 또 새로 강도까지 얻었으니 지금 한창 뜻이 교만할 때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머뭇거린다면 헤아릴 수 없는 화가 필시 닥칠 것입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조종하는 권한이 그들 손아귀에 쥐어 있으나,
변고에 대처하는 방법은 의당 우리 쪽에서 먼저 정해야 하겠습니다."하고,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반드시 상께서 마음속으로 결단한 뒤에야 할 수 있는데,
신자(臣子)의 입장에서는 차마 우러러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일찍 결단하시면 그래도 만에 하나 희망이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세가 이미 막다른 길까지 왔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제궁(諸宮)을 거느리고 인질로 삼고 있으니,
나 또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하자,
모두 아뢰기를,
"저들의 문서나 언어는 모두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에서 나가면 보존되고 위태로운 확률이 반반이지만
나가지 않을 경우에는 열이면 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성상의 뜻이 정해질 경우, 이로 인해 회복의 기틀이 마련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前朝)때에도 나가 만났다고 한다.
사세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고사(故事)는 있었다."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내일 결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국서를 만들어 약속을 정한 뒤에 하시겠습니까?
응당 표문(表文)은 있어야 할 듯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표문을 만들어야 하겠는가."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1637년
삼사가 청대하여 성을 나가지 말 것을 아뢰다
삼사가 청대하여 통곡하며 아뢰기를,
"내일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하신다니,
사람이 생긴 이래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짐승 같은 나라에게 나가 항복하여
화를 면한 자가 몇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성 안의 식량도 수십 일을 버티기에 충분한데,
내일 성을 나가신다니 이것이 무슨 계책입니까.
더구나 교활한 오랑캐의 흉모는 헤아릴 수 없으니,
한번 나간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처음 생각에 이런 일은 결코 따를 수 없고 오직 성을 등지고서 한 바탕 싸워
사직과 함께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정(軍情)이 이미 변했고 사태도 크게 달라졌다.
밤낮으로 기대했던 것은 그래도 강도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자부(子婦)들이 모두 잡혔을 뿐만 아니라
백관의 족속들도 모두 결박당해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내가 혼자 산다고 하더라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다시 보겠는가."하자,
제신(諸臣)이 통곡하며 나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7일 1637년
부제학 이경석 등이 세자는 성에 머물 것을 청하다
부제학 이경석(李景奭), 집의 이명웅(李命雄)이 세자가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무(軍務)를 통제하고 국사를 감독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대신과 의논하여 정하겠다고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7일 1637년
황제의 약속을 확인하려는 국서
이홍주·김신국·최명길을 보내 글을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다. 그 글에,
"조선 국왕 신 성휘(姓諱)는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달 20 일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절실히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고, 그대가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대의 나라를 회복시켜줌으로써
회군한 뒤에 천하에 인애와 신의를 보이려고 함이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면
천하가 크기도 한데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 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하였는데,
마부대가 글을 받고 말하기를,
"황제에게 품하여 날짜를 정해서 통보하겠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삼공이 청대하여 세자의 출성 여부와 결박해 보낼 신하의 수를 아뢰다
삼공(三公)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대가가 성에서 나간다면 세자가 응당 성중에 머물러 있어야 할 텐데,
성을 나가거나 머물게 하는 권한이 저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으니,
저들이 만약 나오기를 청하면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혹시라도 함께 원한다면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 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 뿐만이 아닐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사람이 많다고 해서 용서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용골대(龍骨大)가 한(汗)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보내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에 대한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는 것인가. 그러나 짐은 본래 나의 정성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니,
지난번의 말을 틀림없이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일 유신(維新)하게 하는 데에도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이 대대로 지킬 신의(信義)로 삼는 바이다.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明)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여,
혹 수만 명으로 하거나, 혹 기한과 모일 곳을 정하면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사로잡은 사람이니,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조칙으로 보이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녹피(鹿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하였다.
홍서봉(洪瑞鳳) 등이 나가서 칙서를 맞았는데,
용골대가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명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의 의례(儀例)는 어떠하였소?"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칙서를 받든 자는 남쪽을 향하여 서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받았소이다."하자,
여기서 의거하여 주고받은 뒤에,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요즈음 매우 추운데 수고스럽지 않소?"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온전히 살려주신 덕택으로 노고를 면하게 되었소이다."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삼전포(三田浦)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았는데,
황제가 서울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용포(龍袍)를 착용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남문(南門)으로 나와야 하겠지요?"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正門)을 통해 나올 수 없소."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문서를 모아 태우다
제사(諸司)의 문서를 거두어 모아 모두 태웠다.
문서 가운데 간혹 적(賊)이라고 호칭한 등의 말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이조 참판 정온과 예조 판서 김상헌이 자결 시도와 사론
이조 참판 정온이 입으로 한 편의 절구(絶句)를 읊기를,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과 같은데
외로운 성 깨뜨리니 군사들 기세 흉흉하네
늙은 신하만은 담소하며 듣고서
모사에다 견주어 조용하다고 하네
하고, 또 읊기를,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또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짓기를,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대가(大駕)를 따라가 항복하는 것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
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하고, 인하여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지 않겠는가.
○吏曹參判鄭蘊口號一絶曰:
"砲聲四發如雷震, 衝破孤城士氣恟。 唯有老臣談笑聽, 擬將茅舍號從容"
又曰:
"外絶勤王帥, 朝多賣國兇。 老臣何所事, 腰下佩霜鋒。"
又作衣帶誓辭曰:
"主辱已極, 臣死何遲? 舍魚取熊, 此正其時。
陪輦投降, 余實恥之。 一劍得仁, 視之如歸。"
因拔所佩刀, 自刺其腹, 殊而不絶。 禮曹判書金尙憲, 亦累日絶食,
至是自縊, 爲子所救解, 得不死, 聞者莫不驚歎。
【史臣曰: "綱常節義, 賴此二人而扶植。 忌之者, 以棄君負國目之, 其無天哉?"】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의 졸기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적과 금화(金化)에서 크게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처음에 홍명구가 적보(賊報)를 듣고 자모성(慈母城)에 들어가 지켰는데,
얼마 뒤에 오랑캐 기병(騎兵)이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의 별장 장훈(張壎) 등 2천 기(騎)를 보내어 들어가 구원하게 하였다.
그 뒤 거가(車駕)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자신이 날랜 포병(砲兵) 3천 명을 조발(調發)하여 먼저 떠나는 한편,
납서(蠟書)로 병사(兵使) 유림(柳琳)에게 동행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유림이 뒤따라 오다가 강동(江東)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이 없다는 것을 핑계대고
군대의 행진을 저지시키려고 하자, 홍명구가 꾸짖기를,
"군부가 화란을 당했으니, 직분상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
더구나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와서 전투하게 함으로써
남한산성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이다."하고,
마침내 진격하니, 전로(前路)에 주둔한 적이 도망하였다.
금화(金化)에 이르러 적을 만나 수백 명을 베고
사로잡힌 사람과 가축을 빼앗았는데 몇 십 몇 백을 헤아렸다.
군사를 백전산(柏田山)으로 옮겼을 때 적의 연합군 1만 기(騎)가 침범해 왔다.
홍명구가 이들을 맞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두 명의 장수를 죽였는데 시체가 즐비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의 한 진(陣)이 산 뒤편을 돌아 나왔는데,
말을 버리고 언덕에 올라 모포로 몸을 감싸고 밀어 부치며 일제히 옹위하여 진격해 오니
그 형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홍명구가 급히 유림을 부르며 서로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유림이 응하지 않고 도망하였으므로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많이 전사하였다.
이에 홍명구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부인(符印)을 가져다 소리(小吏)에게 주며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하고,
활을 당겨 적을 사살하였는데,
몸에 세 개의 화살을 맞자 스스로 뽑아버리고
칼을 빼어 치고 찌르다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그 일이 알려지자 상이 울면서 이르기를,
"내가 평소 그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렇게 나라가 결딴난 때에 단지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하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또 상장(喪葬)의 비용을 관에서 마련하고, 그의 어미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며,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홍명구의 자(字)는 원로(元老)로 사람됨이 명민하고 강직했으며
문행(文行)과 기식(器識)이 후진(後進) 가운데 첫째로 꼽혔다.
이른 나이에 갑과(甲科)의 장원으로 발탁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그 뒤 관서 관찰사의 명을 받자 방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방략(方略)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매우 기의(機宜)에 합당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화란이 장차 박두하자 오직 한 번 죽는 것으로 스스로 맹세하였는데,
행재소(行在所)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전투하고
곧장 전진하면서 죽어도 후퇴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9일 1637년
윤집·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최명길(崔鳴吉)·이영달(李英達)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보내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인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잡아 보내었다.
윤집 등이 하직 인사를 하자,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그대들의 식견이 얕다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도를 살펴 보면
본래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오열(嗚咽)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하였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다시 이르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단지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시게 된 것을 망극
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뜻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대들에게 부모와 처자가 있는가?"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아들 셋이 있는데, 모두 남양(南陽)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부사(府使)가 적을 만나 몰락하였다고 하니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하고,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단지 70세 된 노모가 있고 아직 자녀는 없으며
임신 중인 아이가 있을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혹하고 참혹하다."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들은 떠나갑니다만, 전하께서 만약 세자와 함께 나가신다면
성 안이 무너져 흩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이점이 실로 염려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세자를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함께 나가지 마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차 죽을 곳에 가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하는가.
그대들이 죄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성에서 나간 뒤에 국가의 존망 역시 단정할 수는 없다만,
만일 온전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와 처자는 마땅히 돌보아 주겠다. 모르겠다만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의 연세는 얼마이며, 그대들의 나이는 또 얼마인가?"하였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어미의 나이는 무진생(戊辰生)이며 신의 나이는 무신생(戊申生)입니다."하고,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단지 조모가 있는데 나이는 지금 77세입니다.
신의 나이는 정미생(丁未生)입니다."하고,
드디어 절하고 하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앉아라.“하고,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술을 대접하게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사신이 벌써 문에 나와 재촉하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와 같이 급박하게 제촉하는가."하였다.
두 신하가 술을 다 마시고 아뢰기를,
"시간이 이미 늦었습니다. 하직하고 떠날까 합니다."하니,
상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소중히 하도록 하라.
혹시라도 다행히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하자,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나아가니 조금도 유감이 없습니다."하였다.
이 날 새벽에 김류(金瑬)·이홍주(李弘胄)·최명길(崔鳴吉)이 청대(請對)하여
상이 침전(寢殿) 안에 들어갔는데, 승지와 사관은 문 밖에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이루어진 말을 기록할 수 없었다.
상이 이경직(李景稷)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오늘의 말은 원래 중대한 일과는 관계가 없으니,
사관이 책(策)에 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하였다.
국서(國書)에,
"소방에 일찍이 일종의 근거없는 논의가 있어 국사를 무너뜨리고 그르쳤기 때문에,
작년 가을에 신이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자 약간 명을 적발하여
모두 배척해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수창(首倡)한 대간 한 명은
천병(天兵)이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임명하고
그 날로 즉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촉하였는데,
혹 군사에게 잡혔는지 아니면 샛길로 부임하였는지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성 안에 있는 자는 혹 부화뇌동한 죄는 있다 하더라도
앞서 배척을 당한 자에 비교하면 경중이 현격히 다릅니다.
그러나 신이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게만 여긴다면
폐하께서 본국의 사정을 살피지 못하고 신이 숨겨주는 것으로 의심하시어
신의 진실한 마음을 장차 밝힐 수 없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조사해 내어 군전(軍前)에 보내면서 처분을 기다립니다."하였다.
최명길이 두 사람을 이끌고 청나라 진영에 나아가니,
한(汗)이 그들의 결박을 풀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최명길 등을 불러 자리를 내리고
크게 대접할 기구를 올리게 하면서 초구(貂裘) 1습(襲)을 각각 지급하게 하였다.
최명길 등이 이것을 입고 네 번 절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1637년
이조 참판 정온의 차자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렸다.
"신이 자결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전하의 오늘날의 일을 차마 볼 수 없어서인데,
실오라기 같은 잔명(殘命)이 3일 동안이나 그대로 붙어 있으니,
신은 실로 괴이하게 여겨집니다.
최명길이 이미 전하로 하여금 신이라 일컫게 하고 나가서 항복하게 하였으니,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신하라고 해서
임금에 대해 명령을 잘 받드는 것만으로 공손함을 삼을 것이 아니라
간쟁할 일이 있으면 간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명나라의 인(印)을 바치도록 요구해 오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간쟁하기를
‘조종조로부터 이 인을 받아 사용한 지가 지금 3백 년이 되니,
이 인은 명나라에 도로 바쳐야지 청나라에는 바칠 수 없다.’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이 만약 명나라를 공격할 군사를 요구한다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간쟁하기를
‘명나라와 부자(父子)와 같은 은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청나라도 알 텐데,
자식을 시켜서 부모를 공격하게 하는 것은 윤리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는 공격하는 자에게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한 자 또한 옳지 않다.’고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이 아무리 흉악하고 교활하다 하더라도 또한 필시 양해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 두 가지를 간쟁하여
천하 후세에 죄를 얻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의 목숨이 거의 다하여 이미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할 수도 없고
또 길가에서 통곡하며 하직할 수도 없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을 체직하시어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주소서."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1637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018)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형조 판서 심집(沈諿)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註 018]갑자년 : 1624 인조 2년.
<<용골대가 문서를 전달하러 오고 인조가 삼전도로 항복하러 나간 서문(西門, 右翼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