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仁祖實錄중 남한산성 出城이후 기록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1637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018)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형조 판서 심집(沈諿)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註 018]갑자년 : 1624 인조 2년.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일 1637년
백관들이 모두 대궐안에 들어가다
이때 몽고(蒙古) 사람들이 그대로 성중(城中)에 있었다.
백관들은 모두 대궐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여염(閭閻)이 대부분 불타고 넘어져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일 1637년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가 고려옥인을 가져오다
상이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를 양화당(養和堂)에서 접견하였다.
용골대가 황제의 명으로 고려 옥인(高麗玉印) 및
신경원(申景瑗)의 부원수(副元帥)의 인(印)을 올리니, 왕이 사례하였다.
상이 이어 몽고 사람들이 아직도 도성에 있으면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한다고 말하니,
용골대가 즉시 종호(從胡)로 하여금 몽고 사람들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게 하고,
진달(眞㺚)로 하여금 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나와서 전송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고, 인하여 사로잡힌 사람을 쇄환하도록 요청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직접 처분하실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또 세공(歲貢)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두 장수가 말하기를, "귀국의 형세를 황제께서 직접 보셨으니,
의당 재명년(再明年)부터 시행할 것입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일 1637년
청 나라 사람이 인평 대군과 부인을 경성으로 돌려 보내다
청나라 사람이 왕세자와 빈궁 및 봉림 대군과 부인을
그대로 진중(陣中)에 머물러 두고, 인평 대군과 부인은 경성으로 돌려 보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일 1637년
철군하는 청의 한을 전송하다
청나라 한(汗)이 삼전도(三田渡)에서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전곶장(箭串場)에 나가 전송하였다. 한이 높은 언덕에 앉아
상을 제왕의 윗자리로 인도하여 앉게 하였는데, 도승지 이경직(李景稷)만 따라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일 1637년
제도의 군사를 파하다
제도(諸道)의 군사를 파(罷)하여 보냈다.
산성에 머물고 있던 백관이 경사(京師)로 돌아올 때에
길에서 적병으로부터 약탈을 당했는데,
병조 참지 이상급(李尙伋)이 길에서 얼어 죽었으므로
상이 염습(斂襲)하고 장사지낼 기구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일 1637년
청이 본국으로 하여금 주사를 조발하게 하다
청나라 사람이 장차 가도(椵島)를 습격하려고
경중명(耿仲明)과 공유덕(孔有德)으로 하여금 크게 배를 수선하게 하고,
또 본국으로 하여금 주사(舟師)를 조발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이에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숭원(李崇元)과 영변 부사(寧邊府使) 이준(李浚)에게 명하여
황해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경중명과 공유덕은 바로 명나라를 배반한 장수로 오랑캐에게 항복한 자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3일 1637년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가 대궐에 오다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가 대궐에 왔으므로 상이 불러서 보니,
용골대가 정명수(鄭命壽)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였다.
정명수는 평안도 은산(殷山)의 천례(賤隷)로서 젊어서 노적(奴賊)에게 사로잡혔는데,
성질이 본래 교활하여 본국의 사정을 몰래 고해 바쳤으므로 한(汗)이 신임하고 아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4일 1637년
영중추부사 윤방이 강도에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오다
영중추부사 윤방이 강도(江都)에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오니, 상이 불러 보았다.
윤방이 상을 보고 울자 상도 울었다. 이어 어제 봉안(奉安)한 곳을 하문하니, 답하기를,
"어제 밤이 깊었기 때문에 미처 계품하지 못하고
신이 우거(寓居)하는 곳의 정결한 곳에 봉안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즉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시민당(時敏堂)에 봉안하도록 하고,
근신(近臣)을 거느리고 곡(哭)하며 절하는 예를 행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5일 1637년
호조 참의 신계영을 강도에 급파하다
상이 호조 참의 신계영(辛啓榮)을 불러다 보고 일렀다.
"강도(江都)의 창곡(倉穀)을 급히 수습해야 하니, 그대가 속히 가도록 하라.
그리고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바야흐로 배를 수선하러 서쪽으로 갔으니,
연해(沿海)의 제도(諸島)가 약탈당할 염려가 없지 않다.
원손(元孫)이 지금 교동(喬桐)에 있고 백성들 중에도 섬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많으니,
이 뜻을 아울러 유시하여 즉시 옮겨 피하도록 하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5일 1637년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다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니,
신하들이 길 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하였는데, 혹 재갈을 잡고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가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에 정명수(鄭命壽)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하였으므로
이를 보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호위해가는 재신(宰臣) 남이웅(南以雄),
좌부빈객 박황(朴潢), 우부빈객 박로(朴𥶇), 보덕 이명웅(李命雄), 필선 민응협(閔應協),
문학 이시해(李時楷), 사서 정뇌경(鄭雷卿), 설서 이회(李禬) 및
익위사(翊衛司)의 관원 3명이 따라갔는데,
우의정 이성구(李聖求)가 오랑캐 지역에 흉년이 든 것을 계달하여 아뢰면서
따라가는 관원을 줄여 보내도록 청했기 때문이었다.
상이설서 유계(兪棨)는 산성에서 화의를 극력 비난하면서
나라 일을 담당한 대신을 참(斬)하도록 청했다는 이유로 배행(陪行)하지 못하게 명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5일 1637년
강석기·이경석·이경직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승지 정지우를 파직하다
강석기(姜碩期)를 예조 판서로, 이경석(李景奭)을 도승지로,
이경직(李景稷)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당시 육경(六卿)은 아들을 오랑캐에게 인질로 보내야 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회피하였다.
호조 판서 김신국이 드디어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차자를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자 상이 그의 체직을 허락하고
승지 정지우(鄭之羽)는 사정(私情)을 따라 차자를 봉입(捧入)하였다는 이유로 파직을 명하고,
이경직으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6일 1637년
구왕을 성산의 진영에서 만나다
상이 구왕(九王)을 성산(城山)의 진영으로 가서 만났다.
성산은 성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7일 1637년
근신을 보내어 강도에서 잡힌 사람들은 쇄환해 오다
상이 세 차례 근신(近臣)을 보내 강도에서 사로잡힌 사람들을 쇄환해 줄 것을 청하니,
한(汗)이 남녀 1천 6백여 명을 돌려보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8일 1637년
구왕이 철군하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 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구왕(九王)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 대군과 부인을 서쪽으로 데리고 갔다.
상이 창릉(昌陵)의 서쪽에 거둥하여 전송하였다.
길 곁에 말을 머물게 하고 구왕과 서로 읍(揖)하니, 구왕이 말하기를,
"멀리 오셔서 서로 전송하니 실로 매우 감사합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지금 따라가니, 대왕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구왕이 말하기를,
"세자의 연세가 벌써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건대
실로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
"자식들이 깊은 궁궐에서만 생장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여러 날 동안 노숙(露宿)하여 질병이 벌써 생겼다 합니다.
가는 동안에 온돌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하자,
구왕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만리 길을 떠나 보내니 필시 여러모로 마음을 쓰실 텐데
국왕께서 건강을 해칠까 매우 두렵습니다. 세자가 간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니, 행여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군대가 갈 길이 매우 바쁘니 하직했으면 합니다."하였다.
세자와 대군이 절하며 하직하고 떠나자, 상이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기를,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하니,
세자가 엎드려 분부를 받았다.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세자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주상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는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각자 진중하도록 하라."하고,
마침내 말에 올라 떠났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1일 1637년
양사의 합계로 팔도의 군사 거느린 신하의 죄를 다스리게 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도(江都)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날이나 보내면서 노닐다가 적의 배가 강을 건너자 멀리서 바라보고 흩어져 무너진 채
각자 살려고 도망하느라 종묘와 사직 그리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버렸을 뿐 아니라
섬에 가득한 생령(生靈)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약탈당하게 하였으니,
말을 하려면 기가 막힙니다.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경기 수사 신경진(申景珍),
충청 수사 강진흔(姜晋昕)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김경징·이민구·장신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경진·강진흔 등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 등은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2일 1637년
한성부의 고아 문제에 건의를 따르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자는
자기의 아들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 법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더구나 이런 병란을 치른 뒤이겠습니까.
중앙과 지방에 게시하여 본주(本主) 및 그 부모로 하여금 도로 찾아가지 못하게 하고
영을 어긴 자는 중하게 다스려 용서하지 못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3일 1637년
도승지 이경석이 일반 백성의 속환을 대신해 주길 청하자 윤허하다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사로잡힌 사람들이 가난하여 속(贖)바치고 돌아올 수 없는데,
일반 백성들은 귀족(貴族)과 달리 그 값이 또한 많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1백여 냥의 은(銀)을 내어 통관(通官)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속바치고
돌아오게 한다면, 소득은 많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족히 백성을 감동시키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매우 불쌍하고 측은하다. 해조로 하여금 값으로 주는 은을 넉넉하게 지급하게 하여
많은 사람이 속바치고 돌아오도록 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5일 1637년
잃어버렸던 세조의 영정을 찾아 시민당에 봉안하다
강도(江都)가 함락되면서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잃어버렸다.
세조(世祖)의 영정은 성 밖에서 찾았는데, 약간 찢어진 곳이 있었다.
상이 듣고서 울며 이르기를,
"내가 실덕(失德)하여 보전하지 못한 탓으로 조상의 영정을 잃어버렸다.
종묘의 신주는 그래도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영정은 무슨 방법으로 모사(模寫)하겠는가.
내가 매우 가슴이 아프다."하고,
즉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모시고 와서 시민당(時敏堂)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그리고 상이 배곡(拜哭)하려 하였으나, 예관이 종묘의 신주를 봉안할 적에
이미 배곡하였으니 두 번 행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자,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6일 1637년
남한 산성 장사들의 전공을 조사하여 자급을 더하여 주다
남한 산성 장사(將士)들의 전공(戰功)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는데,
서성(西城)에서 힘을 다해 싸운 자는 두 자급(資級)을 올리고,
전투를 도우며 계속 지원한 자는 한 자급을 올리도록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6일 1637년
예조의 건의로 종묘의 신주를 봉안한 후 열성 어보를 모셔 오기로 하다
난리가 일어난 초기에 종묘의 열성 어보(列聖御寶)를 강도(江都)에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종묘의 신주를
도로 봉안하기를 기다린 뒤에 모셔 오도록 청하니,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8일 1637년
조정이 강도 함락 시 원손의 탈출 사실을 처음 알다
강도가 함락되었을 때 송국택(宋國澤)·민광훈(閔光勳)이
원손(元孫)을 모시고 성을 넘어 도망하여 마침내 교동(喬桐)으로 들어갔는데,
전전하다가 당진(唐津)으로 갔다. 박동선(朴東善)이 또한 강도에서 따라가
이 사실을 계문(啓聞)하였으므로 조정이 비로소 알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9일 1637년
중앙과 지방의 군사와 백성에게 교유한 글
중앙과 지방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교유(敎諭)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 대위(大位)에 있은 지 지금 15년이 되었다.
운명이 험한데다 나라일도 어려움이 많아 잇따라 변고를 당하고
두 번이나 파월(播越)하였으니,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실로 이미 적지 않은데, 하늘이 바야흐로
재앙을 내리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어렵게 알고 징계할 줄을 모르고 있다.
오직 대의(大義)를 지켜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뜻밖의 화가 거듭 닥칠 줄을 깨닫지 못한 나머지
외로운 성에서 포위당한 채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게 되었다. 지
키는 군졸이 부족하자 유신(儒臣)을 항오(行伍)에 편입시키고 저축한 식량이 모자라자
콩 반쪽으로 군사의 배를 채웠으며, 심지어 집을 뜯어 꼴로 충당하고
나무뿌리로 불때어 밥을 지었는데, 위급한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굳게 지킬 것을 죽기로 맹세하면서
외부의 구원을 기다렸는데, 호남과 영남의 5개 진(陣)이 잇따라 패배하고
서북의 제군(諸軍)은 전연 소식조차 없었다.
포탄이 날아와 성벽을 공격하니 맞는 곳마다 모두 날아갔는데,
사람 수와 식량을 계산하니 열흘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군신 상하가 망할 날만 기다리는 형편이었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두 아들과 한 손자가 종묘사직을 받들어 모시고 강도(江都)에 건너가 있었으므로
신민(臣民)을 의탁할 희망이 아직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람의 지모(智謀)가 훌륭하지 못해 자연의 요새도 함락되고 말았다.
가령 내가 하루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변통성 없이 필부의 의리만을 지켰던들
이씨(李氏)의 혈식(血食)은 여기에서 끊어졌을 것이다.
전자와 후자를 비교하면 죄에 경중(輕重)이 있기 때문에 2, 3대신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억지로 청하였으니, 본래의 마음과 일이 어긋나 오늘날 얼굴을 들기가 실로 부끄럽다.
아, 겹겹이 포위된 약한 군졸은 백등(白登)의 위태로움보다 심했는데,
뜻을 굽히고 보존하기를 도모하여 겨우 청성(靑城)의 재액만은 모면하였다.
그러나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인데 지금 나는 헤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려 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인데
지금 나는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이미 북쪽으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내가 매우 마음 아파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이 도를 잃은 나머지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그리하여 난을 구하러 달려온 군사들로 하여금
길이 전장의 원혼(冤魂)이 되게 하였고, 죄 없는 백성을 모두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어디를 보든지 간에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책임을 장차 누구에게 전가할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이는 듯하여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건대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단련하여 환란에 대비할 것을 생각했지만
각 마을이 이로 인해 불안해 하였고, 미곡을 무역하여 군량을 비축하려고 했지만
민력이 이로 인해 크게 곤궁해졌던 것이었다.
명예와 절개를 포상(褒賞)함은 세상 사람들을 격려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근거 없는 의논이 이로 인해 더욱 심해졌고,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부과하여 독촉함은 완악함을 경계하기 위한 것인데도
포악한 관리가 이로 인하여 횡포를 부렸다.
조정에는 아첨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고, 세상에는 순후한 풍속이 결여되었다.
재앙과 이변이 번갈아 나타났는데도 나는 두려워 할줄 몰랐고,
원망과 한탄이 떼로 일어났는데도 나는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이는 실로 천성이 용렬하고 어두워 정치의 요체를 몰랐기 때문인데,
합당한 정치를 펴려다가 도리어 혼란으로 몰고 갔으니,
대군이 몰려오기도 전에 나라는 이미 병들었던 것이다.
전(傳)에 ‘나라는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이다.’고 한 말을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이제 묵은 폐단을 통렬히 징계하고 가혹한 정치를 모두 없애며,
사당(私黨)을 떨쳐 버리고 공도(公道)를 회복시키며,
농사를 힘쓰고 병란을 그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보전시키려 한다.
아, 그대 팔도의 사민(士民)과 진신 대부들은 나의 어쩔 수 없었던 까닭을 양해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잘못을 가지고 나를 멀리 버리지 말고,
상하가 합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함으로써 천명(天命)이 계속 이어져
우리 태조(太祖)·태종(太宗)의 유업을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라.
이 모든 일을 오늘부터 시작해야 하는 까닭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모두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9일 1637년
윤황·유황·홍전 등은 정배를, 조경·김수익·신상은 문외 출송시키다
영의정 김류(金瑬),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이성구(李聖求),
병조 판서 신경진(申景禛), 공조 판서 구굉(具宏),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호조 판서 이경직(李景稷)이 회의하여 나라를 그르친 사람들의 죄를
경중(輕重)으로 나누어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날 명망 있는 관원으로 준엄하게 논한 자가 매우 많지만,
그 언론이 문자 사이에 나타나지 않은 자는 소문으로만 죄를 논하기는 어려우므로,
각 사람의 계차(啓箚) 가운데 언어가 합당하지 않은 자만을 뽑아 아룁니다.
지난해 가을 무렵 윤황(尹煌)은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강도(江都)를 태우고 평양(平壤)에 머물러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하였고,
이일상(李一相)·유황(兪榥)·홍연(洪瑑) 등은 인피(引避)하면서
‘명나라를 속이고 우리 백성을 속인다.’는 등의 말을 하였고,
김수익(金壽翼)은 호역(胡譯)을 의논하여 보낼 때를 당하여
그만 정지시키자는 논의를 제기하였고,
조경(趙絅)은 지난해 봄 무렵 묘당을 극력 헐뜯으며 말이 매우 광망(狂妄)하였고,
유계(兪棨)는 그 상소를 보지는 못했지만 전하는 자들이 모두 놀랍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그 경중을 논하건대
윤황은 내용이 상서롭지 못한 데 관계되고,
이일상·유황·홍연은 군상(君上)을 지목하여 배척하였으니,
이 네 사람은 그 죄가 중할 듯합니다.
조경은 논의가 과격한 그 습성이 가증스럽고,
유계는 그저 일개 망령된 사람이고,
김수익은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셈이니,
이 세 사람은 가벼운 쪽으로 논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신상(申恦)·조빈(趙贇)·홍처후(洪處厚) 세 사람은
이미 처벌을 받았으니 겹쳐서 받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개 이 사람들의 심술(心術)을 논하건대
사특한 마음을 가지고 혼란케 한 자와는 차이가 있는데,
얕은 계책으로 섣불리 생각하여 감히 큰 소리를 쳐서
마침내 나라 일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나라를 그르친 죄를 어떻게 면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율을 논할 즈음에는 정상을 참작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모두 관직을 삭탈하라. 윤황·유황·홍연·유계는 정배(定配)하라.
이일상은 또 난리를 당하여 국가를 저버리고
성을 나가 도망한 죄가 있으니 절도(絶島)에 정배하라.
조경·김수익·신상 세 사람은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0일 1637년
남한산성에 오거나 오지 않은 수령 등을 비국에게 조사하게 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남한산성에 군사를 이끌고 온 수령,
주사(舟師)를 이끌고 먼저 달려 온 자,
태만하여 나중에 도착한 자,
처음부터 끝까지 오지 않은 자를 모두 비국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3일 1637년
비국이 몽고병의 약탈에 대해 아뢰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북 병사 이항(李沆)과 남 병사 서우신(徐佑申)의 장계를 보건대,
몽고병(蒙古兵)이 끝없이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들과 교전 중이라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불화가 생긴다면 또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지금은 우선 군사들을 정돈하고 진(陣)을 쳐 충돌을 방지하게 하고 곡진히 타일러서
격렬한 분노를 가라앉히는 한편, 백성들에게 통고하여 피해 숨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뜻으로 본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7일 1637년
진휼청의 청으로 도망오는 자들을 구휼하게 하다
진휼청(賑恤廳)이 아뢰기를,
"사로잡혔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들이
중로(中路)에서 굶주리고 어려움을 당하며 살길이 막막한 상황은
필시 원근(遠近)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청나라 군사가 물러가기를 기다려 일로(一路)의 각참(各站)에 모두 청(廳)을 설치하여
차례로 진구(賑救)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8일 1637년
비국이 모든 문서에 숭덕의 연호 쓰기를 청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듣건대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청나라 군사에게 빼앗겼는데
숭정(崇禎)의 연호를 썼다 하니, 일이 벌어질까 지극히 염려됩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종 문서에 모두 숭덕(崇德)의 연호를 사용하고,
이런 뜻으로 양서(兩西) 및 함경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2일 1637년
병조참판 이시백이 수원 군병의 포로 문제와 명에 대한 파병 문제를 아뢰다
병조참판 이시백(李時白)이 뵙기를 청하므로 상이 소견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파병(罷兵) 때 수원의 군병 태반이 포로가 되었으니, 매우 참통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첩을 수비하는 사졸은 노고도 많았는데,
또 이러한 환란을 만나다니 당시의 파병을 너무 서둘렀던 것은 아닌가?"하고,
이어 한숨쉬며 탄식하기를,
"이서(李曙)의 공로를 어찌 잊겠는가.
국가가 이렇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산성 때문이었는데,
이서만은 미처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나는 그것을 매우 슬퍼한다.
산성에서 내려올 때 한번 찾아가 통곡을 하려고 하였는데
경황이 없어서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심히 한스럽다."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저들의 약속 조항에 군병을 조발하여 명나라를 침범한다는 설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약속 조항은 아니고 국서(國書) 중에 있었다."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저들이 만일 사람을 보내 파병을 독촉한다면 매우 난처합니다.
심양에 들어간 대신에게 자세히 알리고 힘써 다투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병을 조발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는 일을 어찌 차마 하겠는가. 경의 말이 옳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5일 1637년
홍익한의 졸기
청나라 사람이 홍익한(洪翼漢)을 죽였다.
홍익한은 일찍이 장령이 되어 노사(虜使)를 베어 대의를 밝히자고 상소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병이 침입하여 서울을 떠나는 날 묘당에서 건의하여
홍익한을 평양 서윤으로 차출하여 속히 부임하게 하였다.
오달제(吳達濟)와 윤집(尹集)이 잡혀가게 되자 조정에서 평안 도사에게
홍익한을 함거에 실어 함께 노진(虜陣)에 보내게 하였는데, 심
양에 들어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죽을 때 지필을 구하여 글을 지어 그 뜻을 말하고
노인(虜人)을 꾸짖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명 조선국의 잡혀온 신하 홍익한이 화친을 배척한 뜻을 역역히 진달할 수 있으나,
다만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므로 감히 글로써 밝힌다.
무릇 사해의 안이 모두 형제는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버지가 둘인 자식은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숭상하고 간신(諫臣)은 오직 직절(直截)로 기풍을 삼는다.
그러므로 지난해 봄에 마침 언책(言責)의 임무를 부여받고,
금(金)나라가 맹약를 어기고 황제라 칭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만일 과연 맹약을 어겼다면 이는 패역한 형제이며
만일 과연 황제라 칭했다면 이는 두 천자가 있는 것이다.
한 집안에 어찌 패역한 형제가 있을 수 있으며,
천지간에 어찌 두 천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금나라는 조선과 새로운 교린(交隣)의 조약이 있는데 먼저 배반하였고
명나라는 조선에 옛부터 돌보아준 은혜가 있어 깊이 맺어졌다.
그런데 감히 맺어진 큰 은혜를 망각하고 먼저 배반한 헛된 조약을 지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의리에도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맨 먼저 이 논의를 주장하여
예의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이는 신하의 직분일 뿐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자의 분의는 충과 효를 다할 뿐인데, 위로는 임금과 어버이가 있으나
모두 보호하여 안전하게 하지 못하였고 왕세자와 대군을 포로가 되게 하였으며,
노모의 생사도 알지 못한다. 진실로 쓸데없는 상소 한장을 올림으로써
가정과 나라에 패망을 초래하였으니, 충효의 도리로 헤아려 보면
비로 쓸어버린 듯이 없어진 것이다.
나의 죄를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죽어야 하고 용서될 수 없다.
비록 만번을 도륙당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달게 받을 뿐,
이 밖에 다시 할 말은 없다. 오직 속히 죽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5일 1637년
완풍 부원군 이서의 상을 예장하게 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상(喪)을
법에 따라 예장하게 하고 삼 년 동안의 제전(祭典)에 필요한 것은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의 예에 의거하여 매월 제급하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11일 1637년
패하여 도망간 병사에게 물건을 바치고 속죄하게 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도망한 군사는 이미 군율을 범하였으니, 단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팔도에 패하여 도망간 자들이 수만 명도 넘으니
형세상 일일이 군법을 시행하기도 어렵고,
포(布)를 내게 하여 속죄를 시키는 것도 역시 근거가 없어
정묘년027) 의 거조는 외부의 물의가 많았으니, 타이르고 불러모아
모두 탕척을 허락해 주어서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장관의 경우는 병졸과 달라서 버려두고 논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수감자를 초출하여 경중을 나누어서 계문하여
조정에서 처결할 수 있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뜻으로 삼남 및 강원도 등의 감사와 병사에게 알리소서."하니,
답하기를,
"정묘년의 거조가 많은 외부의 물의가 있었던 것은 군율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모두 포를 내게 하여 속죄하게 하려다 그만두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모두 포를 내고 속죄하게 하려다 그만 두는 것은
과연 지나치게 헐한 듯하니 물건을 바치고 속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세규(鄭世規)가 거느린 군사는 거론하지 말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26일 1637년
비국이 김준룡을 사면·파발군·산성 수비군의 구휼에 대해 아뢰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준룡(金俊龍)이 전라 병사로서 비록 패군한 죄는 있으나
광교산(光敎山)의 싸움에서 한 차례 대승리를 하였는데
잡아다가 국문하고 유배 보내는 것은 억울할 듯합니다.
연신이 죄를 용서해주라고 청한 것은 실로 공의에서 나온 것입니다."하니,
상이 사면하였다. 또 아뢰기를,
"파발군을 배치하여 급보를 역마로 전달하는 것은
비록 평상시라 하더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위란한 때이겠습니까.
지금 서로(西路)가 잔폐하여 보는 곳마다 상처 투성이므로
파발을 다시 설치한다는 것은 그 형세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다만 청(淸)나라 병사가 국경 안에 있는데,
오늘은 어느 곳에 있고 내일은 어느 곳으로 향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비록 뜻밖의 일이 발생하더라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양서(兩西)036) 와 함경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연변의 모든 군읍에 공문을 보내어
걸음 잘 걷는 사람 2, 3명을 모집하여 듣고 보는 대로
급히 보고서를 작성하여 비국으로 직송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남한 산성을 수비하던 군병들이 모두
부모와 처자를 잃고 의탁할 곳이 없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풍설 속에서 야영하며 온갖 고생을 겪었는데, 끝내 그들의 목숨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더욱 가련하고 민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특별히 진휼하여 병들고 굶주려 죽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경기 및 삼남의 감사에게 하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註 036]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30일 1637년
예조의 건의로 태조의 옛 영정을 매안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영숭전의 영정을 개조하는 일로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김류와 우의정 이성구가 이르기를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닌데, 성진(聖眞)이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
이는 아마 장년과 만년에 그린 것이어서 그런 듯하다.
이번 강화에 봉안한 이 영정은 바로 전주의 진전(眞殿)에서 모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에 그린 진상(眞像)을 각처에 나누어 보관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여러 차례 변고를 겪으면서 분실될 때마다 개조하였는데
한 본을 가지고 여러 본을 그려내니 일이 매우 잘못되었다.
그리고 모사할 때 더럽혀 지는 것을 면할 수 없으므로
말하는 이들이 오래 전부터 미안하게 여겨왔다.
이번에 이 망극한 변을 당하였으니 매우 난처하다.
신의 생각으로는, 옛 영정은 정결한 곳에 매안(埋安)하고
새 영정은 굳이 개조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마침내 태조의 옛 영정을 종묘의 북쪽 계단 위에 매안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4월 7일 1637년
예조의 청으로 쌍령과 험천의 시체를 매장하고 제사하게 하다
예조가 사람을 모집하여 쌍령(雙嶺)과 험천(險川)에 쌓인 시체를 거두어 묻고
관원를 보내 제사를 올리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4월 14일 1637년
비국이 용골대·마부대·정명수에게 주기로한 은화에 대해 아뢰다
비국이 아뢰기를,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두 장수와 정명수(鄭命壽)에게
일찍이 각기 은화를 주겠다고 이미 서로 약속하였으니,
이번 사신의 행차에 부쳐 보낸 다음에야 마침내 일에 따라 주선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4월 14일 1637년
가도가 청 나라에 의해 함락되다
청나라 장수 마부달(馬夫達)이 주사 70여 척을 이끌고 와서 가도를 격파하였다.
도독 심세괴(沈世魁)가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으며 군병도 사망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4월 19일 1637년
윤집과 오달제가 문초 당하다 오달제가 죽은 일
윤집과 오달제는 청나라 병사의 후진(後陣)에 있어서 이달 15일이야 심양에 도착하였다.
19일에 용골대가 재신과 강관을 아문에 불러들여 두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황제의 말로 묻기를,
"그대들이 화친을 단절하자는 의논을 앞장서 외쳐 두 나라의 틈이 생기게 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다. 죽여야 하겠지만 특별히 인명이 지중하여 살려주고자 하니
너희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들어와서 살겠는가?"하니,
윤집이 대답하기를,
"난리 이후에 처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니,
천천히 들어보고 처신하겠다."하였고,
달제는 대답하기를,
"내가 참고 여기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다시 보려는 것이었다. 다시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속히 나를 죽여라."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저것이 황제가 살려주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항거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이제는 다시 용서할 수 없다."하였다.
재신 박황(朴潢)과 궁관(宮官) 이명웅(李命雄)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라 다만 임금과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만 간절하여
함부로 생각하였던 것을 말한 것이니 아무쪼록 그를 용서해 주시오."하면서,
간절히 부탁해 마지 않았다. 박황이 이어 뒤돌아보고 달제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유독 서서(徐庶)의 일039]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대의 노친에게 그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게 하는 것이
비록 이역에 있다 하더라도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하니,
달제가 대답하지 않고 다만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호인(胡人)이 즉시 묶어다가 서문 밖에서 죽였다.
시체를 수렴하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달제가 끌려가는 도중에 시(詩)를 지어 그의 노모와 형에게 부쳤는데,
그 절구 1 수에 이르기를,
孤臣義正心無怍,
聖主恩深死亦輕。
最是此生無限慟,
北堂虛負倚門情。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하였는데, 이 글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039] 서서(徐庶)의 일 : 모친을 위하여 절개를 굽혔던 일.
조조(曹操)가 형주(荊州)에서 패배하고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잡아 서서를 부르니,
서서가 패업을 맹세했던 유비를 하직하고 노모를 찾아 조조에게로 간 일을 말함
《삼국지(三國志)》 권35(卷三十五).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4월 21일 1637년
포로를 속환하는 문제에 대한 최명길의 차자
우의정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기를,
"속환(贖還)하는 일은 오늘날의 급한 일입니다.
일찍이 정묘년 화친을 약속하였을 당시에는
한 사람의 값이 겨우 10여 필(匹)이었는데, 지금 들으니 유림(柳琳)도 역시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과 함께 10냥(兩)으로 약정하였다고 합니다.
저들이 정한 값은 본래 저렴하였는데 점점 값이 올라가는 것은,
모두가 속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골육(骨肉)의 속환에 다급하여
값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된 것으로,
한 사람의 값을 혹 몇 백금으로 논하는 자도 있다 합니다.
이럴 경우에 가난한 백성은 끝내 속환할 길이 없게 됩니다.
왕이란 백성에게 있어서 귀천 빈부를 마땅히 동일시하여야 합니다.
한두 명의 재물 있는 자가 많은 값을 아끼지 아니한 탓으로
수많은 사람을 끝내 이역에서 죽게 한다면, 이는 실로 심히 경중을 잃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조정에서 금제(禁制)를 설치하여
사람마다의 값을 노소와 귀천에 따라 다소의 차등을 두더라도
많은 자의 경우 1백 냥을 넘지 못하게 하고
저들이 높은 값을 요구한다면 차라리 버려두고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이 액수를 넘기지 못하게 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중죄로 논한다면,
저들 역시 유익함이 없는 줄 알고 스스로 공평한 값을 따를 것이어서
사람마다 그 소원을 이룰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신이 갈 때 분부하여 이것에 의거하여 주선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5월 28일 1637년
전 판서 김상헌이 호종한 일로 표창 받자 자신의 죄를 논한 상소문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병든 사람입니다.
게다가 나이도 많고 도리에도 어두워서
마음은 잘못을 사죄하는 글에 시들고 본성은 천지가 번복될 때 잃었습니다.
형체는 있어도 마음은 죽었으니 토목과 동일하여 다시는 조정에 서서 벼슬할 희망이 없고
보잘것없는 신세로 전락하여 아침저녁으로 생명이 다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뜻밖에 들으니 남한산성에서 호종했던 여러 신하가 모두 표창을 받았는데,
신의 이름도 그 중에 있다고 합니다.
신은 처음에는 놀라고 의심하다가 마침내는 두려움에 쌓여 날이 갈수록 더욱 불안합니다.
어가가 산성에 계셨을 때 대신과 집정이 다투어 출성(出城)하기를 권하였으나
신은 감히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의리로
망녕스레 탑전에 진달하였으니, 신의 죄가 하나이며,
항복하는 문자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 초본을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하였으니, 신의 죄가 둘이며,
양궁(兩宮)이 친히 적의 진영에 나아갔는데, 신은 이미 말 앞에서 머리를 부수지도 못했고
질병으로 또한 수행하지도 못했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신이 이 세 가지의 대죄를 지고도 아직 형장(刑章)을 받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끝까지 수행한 제신과 함께 균등하게 은전을 받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성명을 거두시어 권선 징악하는 도리를 밝히소서.
신처럼 외람한 자는 반드시 개정하라는 공론이 있을 것인데,
멀리 떨어진 시골에 있다 보니 보고 듣는 것이 미치질 못하므로
외람되게 번거롭게 구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추위와 더위가 끝나지 않으면
구의(裘衣)와 갈포(葛布)를 버릴 수 없는 것이며,
적국이 멸망하지 않으면 전쟁과 수비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와신상담의 뜻을 가다듬고
보장(保障)의 지방을 더욱 수리하여 국가가 또다시 욕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 일시의 맹약을 믿지 말으시고 전일의 대덕을 잊지 마소서.
짐승같은 자의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말으시고 부모의 나라를 가벼이 단절하지 마소서.
누가 능히 이것으로 전하를 위하여 진계하겠습니까.
대저 천리의 나라를 가지고 남의 부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을 옛사람이 수치로 여겼습니다.
매번 선왕(先王)께서 주문(奏文)에 쓴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은 생각하노라면
저절로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생각하고 생각하소서.
신은 광혹하고 미란하여 또다시 망발을 하였으니, 신의 죄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소를 올렸는데 회답하지 않았다.
◯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8일 을사 2번째기사 1637년
심양에 배종한 재신이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이 살해당한 정상을 치계하다
심양(瀋陽)에 배종(陪從)한 재신(宰臣)이 치계하여,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등이 살해당한 정상을 말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매우 슬픈 일이다. 전에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하였다.
그래서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의 늙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월름(月廩)을 내렸다.
◯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26일 1637년
삼전도를 수리하게 하다
삼전도(三田渡)의 단소(壇所)를 고쳐 쌓고 벽돌을 깔고 각(閣)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장차 비석을 세우고 청인의 공덕을 찬술(撰述)하기 위해서이다.
◯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7월 4일 1637년
사은사에게 청의 실정과 삼학사 등의 일을 묻고 술 마신 일을 문책하다
상이 이르기를,
"오달제(吳達濟) 등의 일은 슬프다.
종관(從官)들이 구제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는가?"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신이 남이웅(南以雄)에게서 들으니, 용장(龍將)이 와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이 두 사람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내가 살리려 하였는데,
그들이 반드시 죽으려 하므로 죽였다.’하더라 합니다.
문답할 때 그 뜻을 따랐으면 혹 살 길이 있었을 것인데,
오달제의 말이 ‘죽음을 참고 있는 까닭은 만일 살아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늙은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잡혀 있게 된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저들이 성내었고,
게다가 이번 싸움에서 그들의 죽은 자가 장관(將官) 3백 인과 갑졸(甲卒) 7천인인데
죽은 자의 처자가 다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밤낮으로 호소하므로 면할 수 없었다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죽이지 않았으므로 혹 보전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면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슬프다."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서문 밖에 사람을 죽이는 곳이 있는데 뼈가 쌓여 있는 가운데에서
주검을 찾을 길이 없으므로 그 종을 시켜 초혼(招魂)하여 왔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가엾고 또한 아름답다. 대신이 말한 것을 따라
뜻을 굽혀 애걸하였더라면 혹 살길이 있었을 것인데, 되[虜]에게 항복할 수 없는
의리 때문에 죽도록 굽히지 않아서 나라에 빛이 있게 하였다."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윤집(尹集)은 말하는 것이 오달제처럼 명백하지 못하였다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달제의 말은 매우 아름답다. 죽고 살 즈음에
명예와 절조를 잃지 않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하니,
김수현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이 공초한 말은 매우 명백하고 정당하여 보기에 어엿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심양에서도 이런 말이 있던가?"하니,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신도 보았습니다마는, 심양에 들어간 뒤에 물었더니 몰랐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에는 본디 공초받는 일이 없으므로 공초한 말이라 하는 것은
헛되이 전해진 것인 듯하고, 글에는 각각 다른 체가 있는데
그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던가?"하니,
채유후가 아뢰기를,
"글씨는 비슷합니다마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김수현이 아뢰기를, "그 종이 그 공초한 말을 얻어 왔다 합니다."하고,
이성구가 아뢰기를,
"윤집·오달제 두 사람은 다 나라의 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가엾이 여겨 돌보는 은전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시행하였다. 또 오달제의 형 중에 수령의 망(望)에 든 자가 있으니,
내가 곧 제수하여 그 늙은 어미를 봉양하게 하겠다.
배종(陪從)한 신하들은 다 한때에 가려보낸 사람인데,
이제 방자하게 술을 마시고 삼가지 않는다고 한다. 경은 친히 임금의 명을
받았는데 금지하지 않을 뿐더러 함께 마셨으니, 무슨 까닭인가?"하였다.
채유후가 나아가 아뢰기를,
"그때에 술마시고 실수한 것은 신 혼자뿐입니다. 매우 황공합니다."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말이 없다가 이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박로(朴𥶇)는 심양에 들어간 뒤로 한 번도 술잔을 잡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자신이 스스로 담당하였다 한다. 그 충성이 아름다우니
털옷 한 벌을 장만해 보내어 내 뜻을 나타내라. 저곳에 있는 종신(從臣)도
나중에 죄를 다스리겠거니와, 나온 자는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하였다.
드디어 전 사서(司書) 이회(李禬)와 전 익위(翊衛) 서택리(徐擇履)를
잡아다 추문하고 이어서 정배(定配)하게 하고, 또 사신은 파직하고
서장관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 10월 29일 1638년
대사헌 이행원·지평 정태제 등이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에 대해 계하다
대사헌 이행원(李行遠)이 아뢰기를,
"근래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로 점점 혼란하여
공격하는 자는 터무니없는 말로 덮어 씌우고
구원하는 자도 또한 실상(實狀)을 얻지 못하니, 신은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 두 신하는 남한산성에 있을 때부터 죽으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돌아온 뒤에 미쳐서는 척화(斥和)를 배척하는 의논이 날로 더욱 성하였습니다.
그 본심을 헤아려 보건대, 감히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서였던 것이니, 그 정상이 참으로 애처로워 성낼 수 없습니다.
지금 그를 공격하는 자는 애당초 내려보내지도 않은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냈다.[封還]’ 하고
난리 전에 이미 체직한 빈객(賓客)을 ‘아직까지 지니고 있다.[猶帶]’ 하며,
한번 호서(湖西)에 가서 그 형의 상(喪)에 곡(哭)한 것을 ‘떠돌아 다닌다.[浮遊]’고 합니다.
옛 도읍으로 임금이 돌아가는 것은 애산(厓山)과 비교할 수 없고056)
영남에 피하여 숨어 사는 것은 또한 점성(占城)과 같지 않은데057) ,
심지어는 의중(宜中)이 도망친 것에 비유하였으니,
말한 바가 분명하지 못하고 시비가 뒤바뀌었습니다.
이같이 하고도 능히 공론을 세울 수 있으며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정온의 죄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여
처음에는 ‘명예를 구한다.[要名]’ 하였고,
끝내는 ‘발끈 성을 냈다.[悻悻]’는 것으로 구실을 삼았으니, 아, 또한 괴이합니다.
죄를 주려고 하다가 구실을 찾지 못했으면 그만두는 것이 옳은데,
어찌 반드시 억지로 꾸며서 말을 만듭니까.
두 신하를 구원하는 자도 또한 말은 번잡하나 뜻을 다 밝히지 못하고
혹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마치 피차 서로 다투는 자와 같으니,
아마도 성상의 마음을 일깨우고 시비를 밝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신처럼 쇠약하고 용렬한 자가 외람되게 장관 지위에 있으니,
이처럼 의논이 마구 분열되는 때를 당하여 결코 근거 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정태제(鄭泰齊)가 아뢰기를,
"요즈음 본부(本府)에는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로 논의가 무성한데,
그 사이에 의견이 조금 같지 않은 자가 있으면 문득 배척하니,
신은 실로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아, 천지가 번복하는 때를 당하여
마음에 맹서하고 뜻을 바꾸지 않은 자는 다만 김상헌과 정온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뜻을 끝내 이루지 못했고 척화(斥和)의 의논이 국가를 그르쳤다고 한다면,
두 신하가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겨 다시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그 정상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이러한 것은 헤아리지 않고
시기를 틈타 모함하는 것이 이에 이르니, 아, 또한 심합니다.
칼로 찌르고 목을 맨 것이 죽기를 도모한 것은 마찬가지이고,
살아서 자정(自靖)한 것도 그 뜻이 서로 다르지 않은데,
억지로 분별하니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냈다는 것이
이미 근거가 없자 즉시 상으로 가자(加資)한 것을 받지 않았다 말하고,
지니고 있다는 빈객(賓客)의 직위는 난리 전에 이미 체직된 것인데
갑자기 억지로 죄목(罪目)으로 더하였습니다.
정온에 이르러서는 취사(取舍)의 자취를 엄폐시키려고 추후하여 발론하고,
그 죄를 찾았으나 죄목이 없자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니,
그들이 말한 ‘당론(黨論)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렸다.’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를 말한 것입니다. 신의 소견이 이미 여러 동료들과 서로 다르니,
억지로 굽히고 구차스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홍진(洪瑱)·박돈복(朴敦復), 지평 이운재(李雲栽),
정언 이도장(李道長)·임효달(任孝達)이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김세렴이 아뢰기를,
"김상헌의 일은 당초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의논이 한번 분열되자 갑(甲)과 을(乙)이 모순되어 진정과 화합은 다시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신처럼 쇠약하고 용렬한 자가 장관 지위에 있으니,
어찌 감히 시비를 타개하고 근거 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겠습니까. 신을 체직시키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홍명일(洪命一)이 이행원(李行遠)과 정태제(鄭泰齊)는
출사시키고 홍진·박돈복·이운재·이도장·임효달·김세렴은 체차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행원과 정태제는 별도로 의견을 내어 저들의 허물을
엄폐하려고 하였으니, 또한 몹시 오활하고 괴이하다. 아울러 체차하라."하였다.
[註 056]옛 도읍으로 임금이 돌아가는 것은 애산(厓山)과 비교할 수 없고 :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남송(南宋)이 원나라에 대항하고자 애산으로 옮긴 것에 비유할 수 없다는 것임.
남송 경염(景炎) 3년에 단종(端宗)이 죽자, 문천상(文天祥)·장세걸(張世傑) 등이
단종의 아우 위왕 병(衛王昺)을 황제로 받들고 남해 중의 애산으로 옮겼는데,
다음해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자 육수부(陸秀夫)가 병(昺)을 업고
바다에 빠져 죽으니, 송나라가 드디어 망했다. 《송사(宋史)》 장세걸전(張世傑傳).
[註 057]영남에 피하여 숨어 사는 것은 또한 점성(占城)과 같지 않은데 :
김상헌이 척화를 주장하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의리를 지키려고
영남으로 내려간 것이, 동한(東漢) 말기에 구규(區逵)가 점성을 점거하여
임읍왕(林邑王)이라고 자칭하고 한나라에 반기를 든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임.
◯ 인조실록 39권, 인조 17년 12월 26일 1639년
청나라에 대응할 것에 대한 전 판서 김상헌의 상소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신은 뼈에 사무치는 비방을 받고 거친 외방에 버려짐을 달게 여기고 있었는데,
삼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은혜를 받아 죄를 면해주시고
직첩(職牒)이 또 돌아왔으나 죽을 때까지 초야에서 칩거할 마음으로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늙고 병든 이 목숨은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방법이 없어
오직 밤낮으로 감격하며 눈물을 흘릴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상후(上候)가 불편하시어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삼가 듣고 신하된 자의 마음에
근심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본래 의술(醫術)에 어두워 정성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또 떠도는 소문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장차 5천 명의 군병을 징발하여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의심하는 마음이 정해지지 못한 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군주에 대하여 따를 수 있는 일이 있고 따를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에게서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따르지 않을 바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050)
당초 국가의 형세가 약하고 힘이 다하여
우선 눈앞의 보존만을 도모하는 계획을 하였던 것이나,
지금은 전하께서 난을 평정하고 바르게 되돌리려는 큰뜻을 가지고
와신상담해 오신 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머지 않아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찌 가면 갈수록 미약해져서 일마다 순순히 따라 끝내
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오늘날 계획하는 자들이 예의(禮義)는 족히 지킬 것이 못 된다고 하니
신은 예의로써 분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해만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강포한 이웃의 일시적인 사나움만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원대한 계책이 못 됩니다.
정축년 이후로 중조(中朝)의 사람들이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데,
특별히 용서해 주고 있는 까닭은 우리를 구해 주지 못하여 패배하였고
우리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군병들과 해상 누선(樓船)의 병졸들이 오랑캐를 쓸어내고
옛 강토를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잘못을 금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051) 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문책하는 군대가 벽력같이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면
곧바로 해서(海西)와 기도(畿島) 사이에 당도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이 심양에만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하면 반드시 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끝내 망하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이 순조로우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고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면 근본이 공고해집니다.
이렇게 나라를 지키고서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2백 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임진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천하 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단연코 다시 도모하고 서둘러 대계(大計)를 정하시며
강포함에 뜻을 뺏기지 말고 사특한 얘기에 두려움을 갖지 마시어
충신과 의사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신이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대부(大夫)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 되었습니다.
비록 폐하여 물러나 있는 중이나 이 국가의 막대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번 유림(柳琳)이 갈 적에는
신이 원방에 있었고 일도 급박하여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여한이 뼈에 사무쳐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정성을 진달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註 050]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에게서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따르지 않을 바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
공자의 제자인 자로와 염구가 노(魯)나라의 권력가 계씨(季氏)의 신하가 되었으나
공자는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일만큼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그들의 인격을 인정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註 051]창귀(倀鬼) : 호랑이에게 죽어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귀신.
◯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1월 7일 1640년
김상헌의 상소에 대해 반박하는 장령 유석의 상소
장령 유석(柳碩)이 상소하기를,
"신은 원래 성질이 차분하지 못하고 어리석어 기미를 살피지 못하는데다가
자신의 의견만 믿고서 굽신거리지를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김상헌은 벼슬이 높고 총애가 두터운 신하인데도 임금을 저버리고
국가를 배반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임금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권신(權臣)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차라리 모략에 걸려드는 한이 있어도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외람되이 본직에 있으면서
생각하고 있던 바를 대략 진술하였습니다마는, 신도 속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 이러한 인간을 한 번 논하였다가는 곧바로 뜻밖의 화가 닥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대체로
광망(狂妄)한 신의 소견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조정에는 모두 상헌을 두둔하는 사람만 있어서
눈을 흘기고 이를 갈며 기필코 신을 죽이려 드는데,
다행히도 성상께서 천지 부모와 같이 분에 넘치는 관용을 베풀어 주신 덕택에
말단 직책이나마 채우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틈타 습격하려는 음모가 형체없는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물여우처럼 모래를 머금고 해독을 끼치려 그림자를 살피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으로서 신 역시 스스로 짐작하고 있는 바이니,
마음 씀씀이와 일을 행함에 있어 어찌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니, 어떻게 오늘날의 상황을 아시겠습니까.
상헌이 굳건한 형세와 타오르는 위세로 한 세상의 화복을 마음대로 해 온 지 18년 동안에
자기편이 아닌 자는 곤궁케 하고 자기와 같은 자는 영달케 하였습니다.
신 역시 인간의 정리가 있는 자로서 진실로 이미 얻은 직책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고 보면, 하필 이롭기 마련인 길을 버려두고 범하지 말아야 할
노여움을 돋구어서 스스로 전복되는 결과를 자초하겠습니까. 상헌의 소를 보건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일개 필부의 몸인데도 자결하지 못하고서
스스로 목을 매는 필부의 작은 절개를 종묘 사직을 받드는 임금에게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이렇게도 생각이 부족하단 말입니까.
신은 바로 전하의 신하로서 아낄 분은 오직 임금뿐이니,
비록 수만 번 주륙을 당하더라도 의리상 입을 다물고 있기가 어렵지만,
신 역시 걱정스럽습니다."하니,
답하기를,
"대간의 논이 바르지 못함을 내가 이미 통촉했으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책을 살피라."하였다.
◯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1월 11일 1640년
유석의 상소에 대해 교리 조석윤 등이 반박하는 차자를 올리다
교리 조석윤(趙錫胤), 수찬 조계원(趙啓遠)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장령 유석(柳碩)은 본래 성질이 사악하여 온갖 음험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자로서 행실은 편벽되고 말은 번지르르한데
모략을 장기로 삼고 당파 만들기를 능사로 삼았으므로, 발신(發身)하기 전부터
식자들이 벌써 그의 상서롭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벼슬길에 막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동지 몇 사람과 더불어
괴이한 논을 빚어 냈습니다. 그의 마음의 형적을 추측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평소 절친했던 자도 모두 곁눈질로 흘겨볼 정도이니, 그가 매우 간악하고 사특한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꺼려하여 감히 말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상헌만이 홀로 엄한 말로 배척한 결과 유석이 이에 저촉되어
10여 년간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동안 악감정을 품고
칼날을 감춘 채 기회를 엿보아 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상헌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게 되자 입술을 놀리고 혀를 내둘러
묵은 감정을 마음껏 풀면서 임금을 무시한 부도(不道)의 죄명으로 덮어 씌웠습니다.
유석의 원래의 정체가 이에 이르러 모두 드러났다고 하겠는데,
유독 성상께서만 밝게 보시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가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이 어찌 좋은 곡식을 갉아 먹는 해충의 피해 정도뿐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살펴보실 때 오늘날 조정의 신하 중에 과연 임금을 무시하고
스스로 전횡하면서 위엄과 복록의 권한을 점거하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오늘 유석을 논하는 자가 있어도 유석은 상헌으로써 막아 내고
내일 유석을 논하는 자가 있어도 또 상헌으로 빌미를 삼아 막아 내면서
한결같이 상헌을 이용물로 삼아 종신토록 자신을 보호할 계책을 삼을 것이니,
아, 역시 교활하다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유석은 ‘신은 전하의 신하’라는 등의 말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혼조(昏朝) 때 적신(賊臣)이 남긴 영향으로서 그 당시에도 듣고 경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또 성명의 조정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황(朴潢)이 아뢸 적에 김상헌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유석이 들쑤셔 낸 상소에 의거하여 낱낱이 거론하고 상헌의 죄를 지적하셨으니,
아, 성명께서 치우쳐 얽매인 것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또 이토록 한결같이 잘못된 분부를 내리실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유석의 마음가짐과 행실이 화를 빚어 내고 국가의 발전을 방해한 죄는 버려두고라도,
조정을 경멸하고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현혹시킨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비워 이치를 살피시고
시비를 밝게 분변하시어 속히 파직을 명하심으로써 조정을 안정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유석의 상소가 비록 과격하다 할지라도 그 말이 모두 꼭 옳지 않다고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과연 상소의 말과 같다면 마땅히 더욱 힘쓰기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 감히 이렇듯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하여
위복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말을 실증하려 하는가."하였다.
◯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5월 20일 1640년
평안 감사 정태화를 인견하여 사신·잠상의 일 등에 관해 의논하다
구봉서(具鳳瑞) 또 아뢰기를,
"오달제(吳達濟)에게 유복(遺腹)의 딸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의 형인 오달승(吳達升)이 고원 군수(高原郡守)로 있을 때
달제가 가까이한 관창(官娼)이 있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북쪽 태생이어서 감히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몹시 애처롭다. 면천(免賤)하도록 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9월 15일 1640년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원군에 관해 의논하다
호조 판서 이명(李溟)에게 이르기를,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의 부모와 처자에게 다달이 늠료(廩料)를 지급하는가?"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흉년을 당해서 내가 더욱 걱정되니, 경이 잘 헤아려서 더 지급하도록 하라."하고,
또 이르기를,
"홍익한(洪翼漢)은 죄를 범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타국에서 죽었으니, 또한 매우 가엾고
측은하다. 그의 처자에게도 윤집·오달제의 처자와 똑같이 늠료를 지급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9월 16일 1640년
홍익한의 가족에게 늠료를 지급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윤집 등의 죽음을 특별히 진념하시어 은혜가 그들의 가족에게 미치니,
그 말을 들은 자가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윤집·오달제·정뇌경(鄭雷卿) 등의
어미와 아내에게는 각각 쌀 12두, 콩 2두씩 주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았습니다.
홍익한에게는 처음부터 주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 듣건대, 그의 늙은 어미가
아직 시집가지 않은 손녀를 데리고 현재 평택(平澤)에 있다고 하니,
그에게도 윤집 등의 관례에 따라 똑같이 늠료를 지급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8월 23일 1644년
대신과 비국 당상 및 문학 이래를 인견하여 정사를 논의하다
석윤이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 때 신은 외방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일을 몰랐습니다.
그 후 정원에 와서 병자·정축년의 일기(日記)를 상고해 보니,
오달제(吳達濟) 등을 북으로 보낼 때에 성상의 교지에서 진정으로 그를 측은하게 여기시어
심지어는 ‘너희들의 처자를 잘 보살펴 주겠다.’는 말씀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집(尹集)의 조모는 나이 90에 가깝고,
달제의 어미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모두 집이 빈한하고 자질(子姪)들이 고단하여
봉양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만일 지난날 하교하신 뜻에 따라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또 그들의 제질(弟姪)들을 벼슬자리에 채용한다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 모두 매우 감격할 것이요,
또한 국가에서 충신을 포상하여 장려하는 도리에도 합당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매월 봉록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지금은 그것을 물리치고 시행하지 않는가?
물어서 처리하라. 벼슬자리에 채용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조금 천천히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의 노모가 살았는지의 여부를 비록 알 수 없으나,
의당 또한 오달제·윤집과 똑같은 예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그에 대해서도 하교가 있었다."하고,
◯ 효종실록 2권, 효종 즉위년 11월 18일 1649년
오달제의 노모가 죽어 해조에게 물건을 내리게 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오달제(吳達濟)의 노모(老母)가 죽었으니, 휼전(恤典)을 행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미처 듣지 못했다. 실로 매우 불쌍하니, 해조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넉넉히 내리게 하라. 정뇌경(鄭雷卿)의 노모에게 일찍이 선조왕 때
두루 보살피라는 특명이 있었으니, 역시 해조로 하여금 계속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 6월 25일 1652년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의 졸기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별장에서 죽었다.
죽음에 임해서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용렬한 자질로 여러 조정에서 다행히도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반(崇班)에 이르렀는데도 작은 공효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죄만 쌓아 왔습니다.
병자년 정축년 난리 이후로는 벼슬에 뜻을 끊었는데 중간에 다시 화를 당하여
온갖 어려움을 갖추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도 선왕(先王)께서
초야에 있던 신을 부르시어 태사(台司)에다 두시기에, 은명에 감격하여
힘든 몸을 이끌고 한번 나아갔으나, 흔단만 쌓은 여생이 힘을 다할 희망이 없어,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 땅에 물러나 지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남다른 은총을 과분하게 받아 노쇠한 몸이 보답할 길이 없기에,
다만 사류(士類)를 현양하고 강유(綱維)를 진작시켜
새로운 교화의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코자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뜻을 조금도 펴보지 못하고 외로이 성덕을 저버린 채
낭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근심 걱정이 점점 깊이 고질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목숨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거듭 천안(天顔)을 뵙기에는
이 인생 이제 희망이 없으니 멀리 대궐을 우러러보며 점점 죽어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처음 왕위를 물려받으시던 때의 뜻을 더욱 가다듬으시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바꾸지 마시어, 선한 사람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루시고 실제적인 덕업을 잘 닦아 왕업을 넓히소서.
그리하여 우리 동방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의 기반을 크게 마련하시면
신이 비록 죽어 지하에 있더라도 거의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기운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남겨두지 않고 내게서 원로를 앗아갔으니 매우 슬프고 슬프다.
이 유소(遺疏)를 보니 말이 간절하고 훈계가 매우 지극하다.
나라 위한 충성이 죽음에 이르러서 더욱 독실하니 매우 가상하다.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근신에게 하유한다."하였다.
김상헌은 자는 숙도(叔度)이고, 청음(淸陰)이 그의 호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을 무함하여 욕하자
이에 진계하여 변론하였다. 윤리와 기강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저술하여 뜻을 나타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이 있자, 대사간으로서 차자를 올려
‘여덟 조짐[八漸]’에 대하여 논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고 절실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여,
엄한 교지를 받고 바로 시골로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에 제수되었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또 물러나 돌아갔다.
병자년 난리에 남한산성에 호종해 들어가,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는 계책을 힘써 진계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세자를 보내
청나라와 화해를 이루기를 청하니, 상헌이 통렬히 배척하였다.
출성(出城)의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들어가 상을 보고 아뢰기를,
"군신(君臣)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
상이 산성을 내려간 뒤 상헌은 바로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 아래로 돌아가
깊은 골짜기에 몇칸 초옥을 지어놓고 숨어 목석헌(木石軒)이라 편액을 달아놓고 지냈다.
늘 절실히 개탄스러워하는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풍악문답(豊岳問答)》을 지었는데, 그 글에,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에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 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은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변란 때에 초야에 낙오되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하겠거니와,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되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 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092)
옛 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네가 대의는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말은 옳으나,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안 따라 이백 년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가 평소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
맹세코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임금에게 다투어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하였다.
상소하여 산성(山城)의 상자(賞資)를 사양하였는데, 그 상소에,
"신은 머리를 뽑으며 죄를 청한 글에서 【항복하는 글.】
마음이 떨어졌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즈음에 천성을 잃었습니다.
형체는 있으나 정신은 죽어 토목과 같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산성에 계실 때에 대신과 집정자들이
출성(出城)을 다투어 권했는데도 신은 감히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고
탑전에서 망령되이 아뢰었으니 신의 죄가 하나요,
항복하는 글이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초고를 손으로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했으니 신의 죄가 둘이요,
양궁(兩宮)이 몸소 적의 진영으로 갈 때에 신은
말 앞에서 머리를 부딪쳐 죽지도 못하였고 병이 들어 따라가지도 못했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이 세 가지 죄를 지고도
아직 형장(刑章)을 면하고 있으니
어찌 끝까지 말고삐를 잡고 수행한 자들과 더불어
감히 은수를 균등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듣건대,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으면 가죽옷과 갈포옷을 없앨 수 없고
적국이 없어지지 않으면 전쟁과 수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와신상담하는 뜻을 가다듬으시고
보장(保障)의 땅을 증수하시어, 국가로 하여금 다시 욕을 당하는 일을 면케 하소서.
아, 한때의 강요에 의했던 맹약을 믿지 마시고 전일의 큰 덕을 잊지 마소서.
범이나 이리같은 나라의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마시고 부모와 같은 나라를
가벼이 끊지 마소서. 누가 이것으로써 전하를 위해 간절히 진계하겠습니까.
대저 천리 강토로 원수의 부림을 받는 일은 고금에 부끄러운 바입니다.
매양 선왕(先王)의 주문(奏文)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있음을 생각하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하였다.
그 뒤 유석(柳碩)·이도장(李道長)·이계(李烓) 등이,
임금을 버렸다는 것으로 논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삭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청인(淸人)이 장차 우리 군대로 서쪽 명나라를 치려 했는데,
김상헌이 글을 올려 의리로 보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극언하였다. 그 상소에,
"근래 거리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을 따라
장차 군대 오천 명을 발동하여 심양(瀋陽)을 도와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움과 의혹스러움이 진정되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따를 만한 일도 있고 따라서는 안 될 일도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093)
당초 국가가 형세가 약하고 힘이 모자라 우선 목전의 위급한 상황을 넘길 계책을
했던 것인데, 난을 평정하고 바름으로 돌이키신 전하의 큰 뜻으로 와신상담한 것이
이제 3년이 흘러, 치욕을 풀고 원수를 갚는 일을 거의 손꼽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갈수록 더욱 희미해져서 일마다 굽혀 따라 결국 못하는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었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죽는 것과 망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있지만 반역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께 아뢰기를 ‘원수를 도와 부모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전하께서는 필시 유사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말을 잘 꾸며 스스로를 해명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필시 왕법으로 처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도리입니다.
오늘날 일을 계획하는 자들은, 예의는 지킬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신이 예의에 근거하여 변론할 겨를도 없이, 비록 이해만으로 논해 보더라도,
강한 이웃의 일시의 포악함을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의 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정축년 이후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그 구제하지 못하고 패하여 융적(戎賊)에게 절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음을
특별히 이해해 주었습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병사들과 바다 배 위의 수졸들이
비록 가죽 털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오랑캐를 소탕하여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나,
우리 나라가 근심거리가 되는 것을 막기에는 넉넉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 노릇을 한다는 것을 들으면
죄를 묻는 군대가 우레나 번개처럼 치고 들어와
바람을 타고 하루만에 해서(海西) 기도(圻島) 사이에 곧바로 도달할 것이니,
두려워할 만한 것이 오직 심양에만 있다고 하지 마소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니
어기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은 명분 대의가 매우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으리라 여깁니다.
대의를 저버리고 끝내 위망을 면치 못할 바엔 바른 것을 지켜서
하늘에 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이 순리를 따르면 민심이 기뻐하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단단해집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 거의(擧義)하여 회군(回軍)을 하시어 이백 년 공고한 기반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겨 임진년에 구해주는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거조를 한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의논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서
선왕을 뵐 것이며 또한 어떻게 신하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즉시 생각을 바꾸시고 큰 계책을 속히 정하시어
강한 이웃에게 빼앗기는 바 되지 마시고 사악한 의논을 두려워 마시어,
태조와 선조의 뜻을 이으시고 충신과 의사의 여망에 부응하소서."하였다.
흉인(兇人)이 유언 비어로 청인에게 모함하여, 구속되어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길이 서울을 지나게 되자 상이 특별히 초구(貂裘)를 내려 위로하였다.
심양에 이르러 청인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기를,
"내가 지키는 것은 나의 뜻이고
내가 고하는 분은 내 임금뿐이다. 물어도 소용없다."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하였다.
오랜 뒤 비로소 만상(灣上)으로 나왔는데,
그 뒤 신득연(申得淵)·이계(李烓)의 무함을 받아 또 심양에 잡혀가 있게 되었다.
모두 6년 동안 있으면서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인조 말년에 좌상에 발탁되었는데, 와서 사례하고 바로 돌아갔다.
상이 즉위하여 큰 일을 해보려고 다시 불러 정승을 삼았는데,
청인이 잘못된 논의를 하는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다고 책망을 하여,
상헌이 드디어 속 시원히 벼슬을 털어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끝내 그 뜻을 펴보지 못했으므로 조야가 애석히 여겼다.
그의 문장은 간엄(簡嚴)하고 시는 전아(典雅)했다.
《청음집(淸陰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일찍이 광명(壙銘)을 지었는데, 그 명에,
지성은 금석에 맹서했고(至誠矢諸金石)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大義懸乎日月)
천지가 굽어보고(天地監臨)
귀신도 알고 있네(鬼神可質)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蘄以合乎古)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而反盭于今)
아(嗟!)
백년 뒤에(百歲之後)
사람들 내 마음을 알 것이네(人知我心)
하였다. 죽을 때의 나이는 여든 셋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신은 논한다.
옛 사람이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 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註 092]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 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계평자(季平子)를 토벌하다가 실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할 때
자가기가 따라갔다. 소공이 간후(乾侯)에서 죽은 뒤,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씨가 자가기를 불러들여 함께 정치를 하려 하였는데,
자가기가 이런 말을 하였다. 《좌전(左傳)》 정공(定公) 원년(元年).
[註 093]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 :
자로와 염구는 공자의 제자로서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었다.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이들을 대신(大臣)이라고 할 만하냐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대신이라는 것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되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니,
지금의 자로와 염구는 구신(具臣)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묻기를
"그렇다면 계씨가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자들입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아비나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들이 비록 대신 노릇은 제대로 못하나, 군신의 의리를 잘 알기 때문에
시역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 효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5월 14일 1671년
고 교리 오달제의 집에 상을 치를 물품을 내리다
고 교리 오달제(吳達濟)의 집에 상(喪)을 치를 때 필요한 물품을 내렸는데,
오달제의 처자가 여역으로 열흘 안에 잇따라 죽었기 때문이다.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오달제의 어미와 처자는 일찍이 인조 때에 늠급(廩給)의 은혜를 받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그의 처자가 한꺼번에 모두 죽었으니 매우 가엾은 일입니다.
돌봐주는 은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그 뒤에 이단하(李端夏)의 청으로 인하여 3년 동안 늠료(廩料)를 주게 하였다.
◯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 6월 24일 1664년
좌의정 원두표의 졸기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죽어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근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예장(禮葬) 등의 일은 모두 전례와 같이 하였다.
두표는 백신(白身)의 신분으로 일어나
정사(靖社)의 녹훈에 참여하여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여러 차례 지방관을 맡으면서 자못 위풍(威風)이 있었고,
일찍이 대사마(大司馬)·대사도(大司徒)가 되었을 적에도 직임을 잘 수행한다는 칭송이 있었다.
이에 앞서 두표가 역적 김자점(金自點)과 공이 같은 사람으로
명망과 지위가 서로 엇비슷하여 각각 사당(私黨)을 세웠다.
당시 원당(原黨)·낙당(洛黨)의 칭호가 있었는데
한때 조정의 진신들로 두 문하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인조(仁祖)가 승하한 당초에 두표가 앞장서서 한 통의 상소를 진달해
권간이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른 죄를 논하였는데,
상소 가운데 이름을 숨겨 비록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기실은 자점을 가리킨 것이었다.
자점이 끝내 반역을 도모하다 삼족이 멸망한 것은 실로 두표가 빚어내 만든 일이었다.
그 뒤 신묘년036) 사이에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재주는 많지만
덕이 없고 음험하여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등의 말로 두표를 배척하였다.
말년에 드디어 정승에 제수하는 명을 받고
황각(黃閣)037) 에 7년 동안 있었으나 정승으로서의 업적이 없었다.
성품이 엉큼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거칠고 사나워 조금이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끝내 반드시 몰래 해친 뒤에야 그만두어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두려워하였다.
[註 036]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37]황각(黃閣) : 의정부의 별칭.
◯ 영조실록 88권, 영조 32년 11월 1일 1756년
동지를 맞아 재신을 거느리고 명정전에서 망배례를 행하다
이날은 동지였다. 임금이 황조(皇朝)를 감념(感念)하여 문안(問安)한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이 해가 거듭 돌아오자 풍천(風泉)165) 의 생각에 신충(宸衷)이 갑절이나 격동되어
향을 피우고 망배(望拜)하면서 옥루(玉淚)가 얼굴을 덮으니,
족히 지사(志士)와 충신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대사성 오연유(吳彦儒)가 선조(先朝)께서 어제(御製)하고 충렬공(忠烈公)
오달제(吳達濟)가 그린 묵매 장자(墨梅障子)를 올리니,
임금이 제찬(題贊)을 이어 써 하사하였다. 오언유는 곧 오달제의 증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