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사료로 본 남한산성 전투일지 시계열표(22/04/13, Richard Clayderman 연주곡 모음)

이름없는풀뿌리 2022. 4. 13. 17:51
사료로 본 남한산성 전투일지 시계열표 (1) 남한산성의 항전 47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조선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으며 그에 대한 수많은 사료와 역사를 탄생시키고 영화와 소설등 예술에 영향을 준 이유는 뭘까? 사실 47일의 항전이라지만 1619년 明金의 사르후 전투 참여를 시발로 1627년 정묘호란,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27년간 이어진 일관된 전쟁이었으며, 그러므로 47일의 항전이 아니라 27년간 연속된 전쟁이었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며, 1876년(고종13년) 조선개국(朝鮮開國)이란 연호를 채택하고 1897년(고종34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채택하기까지 1629년(인조7년)부터 청의 연호 숭정(崇禎)이란 연호 사용을 강요당하여야했으니 250여 년간 청의 간섭을 받아야만 하는 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그 47일간의 항전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며 항전의 기간 동안 산성에 갇혀서 가만히 지키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홍이포를 앞세운 그들에 대항하여 무려 13번의 처절한 교전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인조가 산성에 입성한 1636.12.14일 이후 12월 15일 새벽 강화로 가려다가 길이 너무 미끄러워 다시 산성에 들어오자마자 12월 16일 청군 4천명이 산성에 도달 포위하기 시작했으니 그 때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는지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입성 3일 후 북문에서의 첫 교전을 시작으로 필자가 정리하여 본 바에 의하면 무려 13번의 크고 작은 交戰이 있었으니 47일간 3∼4일에 한번 꼴로 生死를 넘나드는 전투가 있었던 셈이다. (3) 入城 초기인 12/14 ∼ 12/22일 까지는 소규모나마 5차의 전투를 치루며 6∼20명의 청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두렵기만 했던 날랜 기병 위주의 청군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게 되어 12/23일에는 사영(四營)에서 500여명이 출전 청군 50여명을 사살하여 고무된 인조가 친히 북문에서 연주봉까지 순시하며 격려하기까지 하였으며 12/24일에는 400여명이 연주봉 곡성(曲城)에 출전, 100여명의 청군을 사살하였을 뿐더러 많은 노획물이 있었고 조선군도 수십 명이 전사하는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4) 12/20일 즈음부터 청군은 산성 아래 80보의 거리에 길이 100여리, 높이 3∼4길로 소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12/25일 즈음 송책(松柵)을 완성하게 되는데 이는 城의 안과 밖의 연통을 차단하는 고사 작전의 일환이었다. 이 때만해도 청군 포위병력은 5천 5백 명 정도여서 그리 큰 병력이 아니었고 조선군 사영(四營) 諸將이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려 제법 사기가 진작되자 공명심에 눈 뒤집힌 산성 총사령관(체찰사) 김류의 독전으로 무모한 출전을 반대하는 제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문에서 고골 방향으로 12월 29일 어영군 300여명을 출전시켜 몰살당하는 참패를 당한 이후부터는 전투 의지가 크게 꺾여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5) 그러한 참패 후 성안의 식량이 고갈되기 시작하고 1월 1일 홍타이지가 도착하면서 더불어 大軍이 속속 산성에 도달하여 청군 포위 병력은 3만 5천명에 이르게 되고 1월 18일까지 지구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홍이포 30여문까지 착착 도착하면서 1월 19일부터 조선으로서는 처음으로 겪게 되는 망월봉(벌봉일대)과 남격대(검단산)에서 하루 종일 쏘아대는 거위알 만한 포탄과 우레와 같은 소리등 조선으로서는 최초로 경험하는 길이 215cm, 구경 12cm, 중량 1.8t, 최대사거리2~5km 유효사거리 700m인 홍이포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당시 조선이 대항한 천자포의 제원은 길이 130cm, 구경 12cm, 최대사거리1km, 유효사거리 200-500m 정도였다. 홍이포 성능의 1/2 정도였던 셈이다. 그렇게 혼비백산한 틈을 타 청군은 1/25일까지 여러 번 동문, 서문, 곡성 쪽을 공략하여 함락 직전까지 이르지만 조선군은 백전불굴의 정신으로 지켜내게 된다. 하지만 1월 26일 강화도 함락과 세자 및 왕족 체포 소식이 전해지면서 급격하게 主和派로 대세가 기울지고 강화 협상에 돌입하게 되면서 청군은 1월 28일부터 홍이포 공격을 멈추게 되고 1월 30일 삼전도에서의 항복식이 거행되며 전쟁은 종료되고 조선은 청의 형제국에서 신하국으로 전락하게 되지만 청군은 47일간의 전쟁 기간 내내 산성에 한 발짝도 디뎌보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4/1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병자호란 시계열표(날짜는 양력/음력) ◇ 1616년 누르하치 후금 건국 ◇ 1619년 사르후전투 -> 강홍립 포로 ◇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 ◇ 1624년 이괄의 난 -> 한명윤 아들(한윤, 한택) ◇ 1626년 영원성 전투(원숭환) 후금 패배 -> 누르하치 사망 ◇ 1627년 후금 3만 침략 -> 강홍립, 한윤, 한택 -> 최명길, 정묘화약 -> 형제지국 ◇ 1628년 벨테브레(박연) 내도 -> 서양 인식 ◇ 1636년 음4/11 후금 -> 청(칭제건청) 12/27(12/01) - 비변사가 청나라에 서신을 보낼 것을 제안하여 인조가 허락하다. -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다이곤(多爾袞),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등 심양에 집합 12/28(12/02) - 박로가 사신으로 출발. 같은 때 청군 12만명 압록강 도하.(親征 전쟁개시) 12/30(12/04) - 이후 며칠 동안 척화파들이 박로를 도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1637년 01/03(12/08) - 청군 야루 우라 도하 01/04(12/09) - 청군 압록강 도하,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 01/07(12/12) - 청군 안주 도달(청군 침공 장계 조정에 도달) 01/08(12/13) - 청군 평양에 도달 01/09(12/14) - 청군이 장단에 도달하다. 마복탑 홍제원 도달 파천을 논의하고 종묘의 신주 및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2子효종(孝宗)(鳳林大君), 3子인평대군(麟坪大君)을 강화로 보내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 도착. 01/10(12/15) - 청군 한성 함락 주변 차단으로 인조와 조정도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도로 남한산성에 들어가다. 적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최명길이 돌아오다.(王弟및 대신 인질 요구) 01/11(12/16) - 청군 담태(潭泰)의 군사 남한산성 도달. 능봉수(綾峯守) 칭(偁)을 王弟라 칭하고 판서 심집(沈諿)을 보냈으나 탄로 나서 잉굴다이가 그 자리에서 박난영을 살해하다. 01/12(12/17) - 강원감사 조정호 7천 근왕군 출발. 김상헌 화의 부당함 극언. 01/13(12/18) - 평안감사 홍명구, 평안병사 유림 근왕군 5천이 출발하다. 심광수 최명길 참 건의, 전승결의 01/14(12/19) - 1차교전, 청군이 남성에 육박, 공격하는 것을 화포로 격퇴하다. 충청도 근왕군 죽산에서 멈춤 01/15(12/20) - 홍타이지가 개성에 도착하다. 전라병사 이시방 근왕 명령 01/16(12/21) - 충청도 원병 헌릉도착, 화전(火箭)으로 서로 응하다. 마푸타(馬夫達)가 남한산성 밑에 와서 조선 대신들과 회동하다. 01/17(12/22) - 김류(체찰사)에게 결전 촉구, 김류 주저함. 윤집 등이 주도하여 주화파 처형 주청하려다가 김반, 채유후 만류. 01/18(12/23) - 경상도 근왕군이 충주에 도달하다. 01/19(12/24) - 어영청 군사 400여명 출전, 적 100여명 사살 원주 영장 권정길 1천 검단산에서 패퇴. 강원감사 조정호 가평으로 퇴각.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천지신명에게 제사 지내며 통곡하다. 01/20(12/25) - 충청감사 정세규 근왕군이 출발하다. 예조가 백제 온조왕에게 제사 지낼 것을 청하다. 사영대장(四營大將, 申景禛, 具宏, 元斗杓, 李時白)에 결전 촉구 01/21(12/26) - 강원도 근왕군이 검단산 근처까지 왔으나 청군에게 패하고 후퇴하다. 01/22(12/27) - 함경감사 민성휘 7천 근왕군이 출발하다. 청군에게 술과 고기를 전달했으나 잉굴다이가 필요 없으니 너희들이나 먹으라며 거부하다. 公淸監司 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했으나 패몰 01/23(12/28) - 최명길의 건의로 익위(翊衛) 허한(許僩)보내 강화를 논하게 하다. 01/24(12/29) - 전라감사 이시방 6천 근왕군, 전라병사 김준용 2천, 화엄사 승병 2천 합류 출발하다. 유도 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승전보고. 김류가 북문으로 나갔다가 장수8명, 병사 300여명 전사하다. 01/25(12/30) - 김상헌이 지금은 적진에 사자를 보낼 때가 아니라고 주장하다. 대간들이 나서서 사자를 아예 보내지 말라고 주장하다. 01/26(01/01) - 홍타이지가 탄천에 도달, 진(陣)을 치다. 조정에서는 홍타이지 도착믿지 못함 위산보(魏山寶)를 파견 정탐 01/27(01/02) - 충청도 근왕군이 청군에게 패배하고 공주까지 후퇴하다. 홍타이지가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교유하노라”라는 유명한 항복 요구 서한을 보내다. 일부 신하가 홍타이지가 보낸 서한을 소각할 것을 주장하다. 완풍부원군 이서가 성 안에서 죽다. 01/28(01/03) - 홍타이지에 최명길 작성 답서, 홍서봉이 신하국 칭 건의 경상감사 심연,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 4만 집결 허완, 민영 8천 쌍령 전투 청군 기병 3백에 패사, 경상도 근왕군이 쌍령전투에서 전멸하다. 선봉 패배로 주력 여주 경상감사 심연 조령 이남 철수 01/29(01/04) - 척화와 강화의 의논이 진행되다. 김준용 3,700 광교산 도착 윤집, 이명웅 등이 최명길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나 허락하지 않다. 01/30(01/05) - 전라도 근왕군(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하다. 01/31(01/06) - 전라병사 김준용 양고리 전사(청 장군2, 1만여명 전사) 함경도 근왕군이 강원도 금화에 도달했다는 장계가 도착하다. 강원도 근왕병 검단산 전투후 용진(龍津)으로 후퇴 전열 정비 02/01(01/07) - 인조가 말단 병사들을 위무하다. 서흔남,두청, 도원수金自點, 황해병사 李碩達, 전라감사 李時昉의 장계 전달 전라감사 이시방 여주 본대 광교산 전투 패배로 오인 공주방면 철수 02/02(01/08) - 식량이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다.(당초 6천석->2.8천석) 02/03(01/09) - 김류, 최명길 등이 적진에 국서 보낼 것을 허락받다. 김상헌과 대간들이 반대하다. 02/04(01/10) - 국서를 작성 및 수정하다. 02/05(01/11) - 작성한 국서를 인조가 확인하다. 척화파는 계속 사신 파견 반대를 주장하다. 02/07(01/13) - 최명길 등을 적진에 사신으로 보내다. 정명수에게 은 1천 냥, 마푸타와 잉굴다이에게 각각 3천 냥을 뇌물로 주다. 헌릉에 불이 나서 3일 밤낮 불타다. 02/08(01/14) - 얼어 죽는 병사가 발생하기 시작하다. 02/09(01/15) - 근왕군들이 대부분 패배, 궤멸했음을 알리는 심기원의 장계가 도착하다. 02/10(01/16) - 청군이 커다란 깃발에 "항복하라"[招降]고 써서 내보이다. 최명길이 적진을 다시 찾아갔으나 잉굴다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하며 문전박대하다. 02/11(01/17) - 홍타이지의 서한이 서문에 도달하여 밖에 나가 받아보다. 02/12(01/18) - 김상헌이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고 울부짖다. 대간이 계속 항복은 불가하다 주장하자 폭발한 최명길이 그들을 꾸짖다. 눈이 엄청 내리다. 국서를 받지 않아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를 더하다. 02/13(01/19) - 홍이포 포환이 성 안에 떨어져 맞아 죽은 사람이 더러 나오다. 이조참판 정온이 최명길이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다. 검찰사(수비대장)김경징, 강화유수(주사대장) 장신 지휘권 다툼 강화도 청군 공격 개시, 충청수군 강진흔 분전, 장신 도주 02/14(01/20) - 청측에서 답서를 보내며 항복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묶어 보내라 하다. 02/15(01/21) - 최명길이 돌아와 국왕이 성 밖으로 나오라는 청측의 요구를 전달하다. 잉굴다이가 서문 아래 왔기에 나가 보니 국서는 우리 황제의 말씀을 거슬러 받을 수 없다며 되돌려 주고 가버리다. 청군 1,6만 강화로 출발 02/16(01/22) - 세자가 부왕 대신 자신이 나가겠다고 청하다. 척화파 대신들이 자신들을 묶어 보낼 것을 청하다. 검찰사 김경진, 강화부사 이민구 배를 타고 섬으로 도주 강화 방어전에서 조선군이 패배, 강화 함락되고 왕족들이 포로로 잡히다. 02/17(01/23) - 김상헌이 죽게 해 줄 것을 청하다. 水原의 將官들이 政院 문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도록 청 청군이 서성과 동성을 공격했으나 이시백이 막아내다. 윤집, 오달제, 윤황 오랑캐에 보내달라 상소 최명길이 척화신들을 내보낸다는 국서를 작성하다. 02/18(01/24) - 망월봉에서 청군 홍이포를 발사했는데 포환이 행궁에 떨어져 박살나다. 청군이 남성에 육박하였으나 격퇴하다. 청측 강화 함락 통고, 출성요구 02/19(01/25) - 성첩이 적의 대포에 모두 허물어지다. 잉굴다이와 마푸타가 와서 국왕이 나오지 않으려거든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말라며 그동안의 국서를 몽땅 돌려주고 가버리다. 02/20(01/26) - 평안도 근왕군 홍명구 전사, 유림 김화 전투에서 승리하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교, 병사들이 척화신을 내보내라고 시위하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남한산성에 도달. 인조가 성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하다. 02/21(01/27) - 황제의 약속을 보장받고자 하는 국서를 마푸타에게 전달하다. 02/22(01/28) - 잉굴다이가 홍타이지의 항복 조유칙서를 가지고 오다. 그동안 청을 오랑캐라고 지칭했던 문서들을 모아 소각하다. 정온, 김상헌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다. 항복 결정.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자살을 하냐고 최명길이 김상헌을 비웃다. 02/23(01/29) - 항복 국서 전달, 윤집, 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02/24(01/30) - 정축하성. 인조와 대신들이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전쟁 종료) 의식이 끝나고 창경궁 양화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들이 울부짖는데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다. 02/26(02/02) - 청태조 심양으로 출발. 02/15의주, 02/21 심양도착 03/04(02/08) - 구왕(예친왕, 도르곤), 소현세자, 봉림대군 심양으로 출발. 05/04(04/10) - 구왕(예친왕, 도르곤), 소현세자, 봉림대군 심양도착. 윤04/05 홍타이지 면대. □ 남한산성 조선군/청군 군사력및 전투일지 - 실록, 중정 남한지, 연려실기술 참조(음력기준) ◯ 1차 전투(12/18, 북문 청군 6명 사살) ◯ 2차 전투(12/19, 남성 청군 10∼20명 사살) ◯ 3차 전투(12/20, 북문, 남성 청군 미상 사살) ◯ 4차 전투(12/21, 서문 동문 청군 10여명 사살, 청군100명 공성전) ◯ 5차 전투(12/22, 북문 10여명, 동문 40여명 청군 사살) ◯ 6차 전투(12/23, 자모군500명 四營 출전, 51명 청군 사살, 조선군 수십명 전사) ◯ 7차 전투(12/24, 400여명 연주봉출전, 100여명 청군사살, 조선군 수십명 전사) ◯ 8차 전투(12/29, 300명 북문출전, 2명청군 사살, 조선군 장수8, 병사300명 전사) ◯ 9차 전투(1/3, 장성인 3명 청군사살) ◯ 10차 전투(1/19, 홍이포 최초 공격, 동문 이기축 함락직전 격퇴) ◯ 11차 전투(1/23, 서문 이시백 3번교전, 동문 신경전 4번교전 격퇴) ◯ 12차 전투(1/24, 남성, 곡성 구굉 격퇴, 망월봉 홍이포 발사 대응 신경진 천자포 발사) ◯ 13차 전투(1/25, 남성, 망월봉 종일 대포 공격) ◇ 인조2(1624) 7월 산성 축성 命, 9월 행궁 건립 총용사(摠戎使) 이서(李曙) 목사 남양부사 유림 僧 覺性, 應聖, 별장 문희성, 이일원, 비장 이광춘 감독 ◇ 인조4년(1626) 11월 완료, 산성 축조후 총융청에서 관할하다가 ◇ 1627년 정묘호란후 남한산성 전담 수어청(守禦廳)을 신설하여 수어청 관할하의 5營을 설치하여 수비하게 하였는데 전영장은 남장대, 중영장은 북장대,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쳤다. 전란 전 수어청 수어사는 이시백(李貴 子)이었다. ◇ 1636.12.14. 인조의 최초 입성, 12.15 새벽 강화로 가려다 재입성후 조선군 12,000명의 수비 체재를 개편하여 군통수권자는 인조, 도체찰사(총사령관) 김류의 총지휘하에 협수사(사대부 규율, 북문 지원) 유백증, 관향사(군량 지원)는 나만갑으로 하고 사영 대장(四營大將)은 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원두표(元斗杓)·이시백(李時白)으로 하여 동성 망월대는 대장 신경진(申景禛), 부장 중군 이영달(李頴達), 남성은 대장 구굉(具宏), 부장 수원부사 구인후(具仁垕), 중군 이확(李廓) 북성은 대장 이서(李曙), 부장 원두표 → 대장 원두표(元斗杓), 중군 황즙(黃緝) 서성은 대장 이시백(李時白), 부장 중군 이직(李稷)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는 병졸은 영남의 군사로 각각 맡아 수비에 임하였는 바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여주 목사 한필원(韓必遠), 이천 부사 조명욱(曺明勖), 양근 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 현감(砥平縣監) 박환(朴煥)이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오고, 파주 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하니, 경성과 지방의 군병이 1만 2천여 명이고, 문관ㆍ무관ㆍ음관이 2백여 명, 종실과 삼의사(三醫司)가 2백여 명, 호종관(扈從官)이 인솔한 노복이 3백여 명이었으며 성을 나누어 맡아 지켰다. (실록) (중정남한지) ◇ 12월 16일 (난리잡기) 적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자 안팎이 비로소 통하지 못하였는데, 대개 이것은 마부대가 대군을 거느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우선 감언으로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적의 군사가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그 숫자도 많지 않고 얼음 길에 멀리 와서 형색이 귀신 같고 말도 모두 지쳤는데, 우리는 곧장 황급히 성으로 들어와 두려워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였다. ※ 청군 선봉군 산성 포위 병력 : 4천명 ◇ 12월 16일 (실록) 원두표를 어영 부사로 삼다 원두표(元斗杓)를 어영 부사(御營副使)로 삼았는데, 대장 이서(李曙)의 병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 12월 16일 (병자록) 이서(李曙)가 병으로 성을 잘 지키지 못하자, 원두표(元斗杓)로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황즙(黃緝)을 중군으로 삼았다. ◯ 1차 전투(12/18, 북문 청군 6명 사살) ◇ 12월 18일 (중정남한지) 날씨가 다소 온화했다. 북문 대장 원두표가 처음으로 장사들을 모집하여 성을 나가 출전하여 오랑캐 순찰군을 쳐서 여섯 사람을 죽이니, 죽인 숫자는 비록 적었지만 군사들이 적을 공격하려는 마음을 비로소 지니게 되었다. ◇ 12월18일 (산성일기) 정예 50명으로 출격하여 방심하고 있는 법화골 청군을 급습하여 청군 6명을 사살하는 입성 최초의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 2차 전투(12/19, 남성 청군 10∼20명 사살) ◇ 12월 19일 (실록) 성을 순시하다 상이 성을 순시하였는데, 북문에서 북쪽 곡성(曲城)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上巡城。 自北門, 至北曲城而還) ◇ 12월 19일 (실록) 적병의 진격을 격퇴하다. 성을 순시하다 적이 남성 육박, 아군이 화포로 물리치다. 전사한 장졸에 휼전(恤典)을 베풀 것과 그 자손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 ◇ 12월 19일 (산성일기) 남문 수비대장 구굉과 군관 이성익(李成翼)이 역시 성문을 나가 청군 2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 12월 19일 (중정남한지) 남성대장 구굉이 군사를 모집하여 성을 나가서 오랑캐 10여명을 죽이니 이로부터 모집에 응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졌다. 體府에서 曲城이 허술하다고 보고하니 협수사가 곧바로 사대부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뜰에 모아놓고 백관으로 하여금 힘을 합해 그 지역을 지키게 하였는데, 두 부대로 나누어 돌아가며 교체하도록 하였다. ◯ 3차 전투(12/20, 북문, 남성 청군 미상 사살) ◇ 12월 20일 (중정남한지) 이 때 북문과 남성에서 연일 오랑캐를 참수하고 사로잡았다. ◯ 4차 전투(12/21, 서문 동문 청군 10여명 사살, 청군100명 공성전) ◇ 12월 21일 (산성일기) (중정남한지) 진언하는 자들이 모두 기회를 틈타 한번 싸우고자 하였지만 김류눈 체부의 체찰사로서 끝내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어영별장(御營別將)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성(西城)을 나가 적 10여 명을 죽이고, 동성(東城)의 신경진(申景禛)도 조금 쳐서 죽였다. ◯ 5차 전투(12/22, 북문 10여명, 동문 40여명 청군 사살) ◇ 12월 22일 (실록) 김류에게 결전할 것을 명하다 상이 김류를 불러 이르기를, "오늘 한번 결전하라."하니, 김류가 어렵게 여기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 영에 전령하여 식후에 출전하게 하라.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은 모두 잘못되었다. 심열이 어찌 오늘날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몰라서 차자의 말을 그렇게 했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매우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이다."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여러 대장들과 한 곳에 약속을 정하겠습니다."하고, 신경진(申景禛)과 구굉(具宏)이 아뢰기를, "근래에 접전하는 상황을 보니, 사냥개가 짐승을 쫓는 것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하였다. ◇ 12월 22일 (중정남한지) 동성과 북문에서 각각 오랑캐를 베고 사로잡았다. 협수사가 백관 중에 늦게 도착한 자 5명에게 장을 치고 군사를 모집하여 나가 싸우게 하였는데 유학 윤지원이 모집에 응하여 먼저 나가서 철편으로 두 명의 오랑캐 기병을 쳐서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상이 召見하고 술을 내리는 한편 6품직을 제수하였다. 성안에 비축한 말먹이풀이 이미 바닥이 나서 굶어 죽는 말들이 많아지니 죽은 말들을 모아 거둬들여서 군사들에게 먹였다. ◇ 12월 22일 (병자록) 북문 어영군이 청군 10여명을, 동문대장 신경진이 청군 3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 12/22 : 청군 산성 포위 병력 : 4천3백명 ◯ 6차 전투(12/23, 자모군500명 四營 출전, 51명 청군 사살, 조선군 수십명 전사) ◇ 12월 23일 (실록) 성을 순시하고 호궤하다 자모군(自募軍) 등이 출전하여 50명 가까운 적을 죽였다. 상이 소여(小輿)를 타고 북성(北城)으로부터 순시하여 서성(西城)까지 이르렀다. ◇ 12월 23일 (병자록) (중정남한지) 사영(四營)에서 출병하고 임금이 북문에 거둥하여 싸움을 독려하니 각각 적을 죽여 공을 세웠는데, 우리 군사 중에서 사상한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오랑캐는 비록 전사하더라도 오랑캐의 법이 시체를 거두어 가는 것을 첫째 가는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죽으면 곧 실어가 버려 적의 수급을 바칠 수 없으므로 죽인 적의 숫자를 명확히 아는 자에게는 수급을 바치는 것과 같이 상을 주었다. ◯ 7차 전투(12/24, 400여명 연주봉출전, 100여명 청군사살, 조선군 수십명 전사) ◇ 12월 24일 (실록) 출전한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다 군사 4백여 명을 보내어 출전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상이 몸소 나아가 호궤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에 어영청이 아뢰기를, "오늘 출전하여 적을 죽인 수가 그들의 말대로 계산하면 1백 명이 넘습니다. 과장된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나, 방패(防牌) 아래에 둔친 적이 얼마 남지 않았고 흐른 피가 땅에 가득합니다. 전장에서 얻은 것은 호전(胡箭) 1백 4개, 호궁(胡弓) 4개, 검 1자루, 궁대(弓帒) 1부, 갑주(甲胄) 1부, 양구(羊裘) 1벌입니다."하였다. ◇ 12월 24일 (중정남한지) 어영군이 북문에 나가 싸워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오랑캐가 많았다. 이때 어떤 한 병졸이 상에게 청하기를 “이들 적은 상대하기 쉬우니, 오직 비단옷을 입은 사람만 자수로 삼지 마십시오. 그런 뒤에야 싸울 수 있습니다.“ 하였다. ◇ 12월 25일 (실록) 사영 대장 신경진 등이 청대하고 한 번 싸울 것을 허락받다 사영 대장(四營大將) 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원두표(元斗杓)·이시백(李時白)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체부가 사영에 전령하여 서로 의논해서 적을 섬멸하라고 하였습니다. 동문이나 남문으로 출병하고 싶은데, 어느 곳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하자, 대답하기를, "망월봉(望月峯)과 동문 밖은 모두 형세가 불리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밤에 결사대를 보내어 적장이 있는 곳을 엄습하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적장이 반드시 진영 안에서 잔다고 볼 수도 없는데, 밤에 놀라게 하는 것도 난처합니다." 하고, 시백이 아뢰기를, "적은 용병(用兵)에 뛰어나 신출귀몰하니, 평야에서 접전하면 우리에게 불리할 것입니다. 다만 사졸을 쉬게 하면서 적이 올려다보고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초격(勦擊)하든가, 아니면 외부의 원병을 기다려 협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토록 지구전을 벌이다가 장차 어찌할 것인가. 형세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한 번 싸우도록 하라."하였다. ◇ 12월 25일 (연려실기술) 날씨가 몹시 차가웠다. 적이 소나무 가지와 잡목을 성 밖에 쌓아 6, 7일 동안 삥 둘러싸 한 외성(外城)을 이루니, 둘레가 1백여 리이고 높이는 서너 길이나 되었다. ◇ 12월 25일 (병자록) 소나무를 베어 성 아래 80보에 울타리를 벌여놓고 새끼줄로 쇠방울을 달아매어 넘는 자가 있으면 딸랑하고 소리가 나도록 하여 성 안과 밖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송책(松柵)이라 한다. ◇ 12월 25일 (중정남한지) 이날 청인들이 성 밖에 소나무 가지와 잡목을 쌓아서 본성을 포위하였는데 둘레는 100여리, 높이는 두 서너 길이나 되었다. 새끼줄로 띠를 두르고 놋쇠와 구리 등의 기물을 매달아 서로 부딪히면 소리가 나도록 함으로써 우리 쪽의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을 염탐하였다. 안에는 나무판대기 방패를 설치하고 또 그 안에 복병을 설치하여 4명을 1隊로 만들었는데 100여 步의 거리를 두었으며, 이 소나무로 만든 성 밖에 있는 각 진영에는 모두 포장과 초막을 설치하였다. ◇ 12월 26일 (연려실기술) 원주 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正吉)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금단(黔丹)에 진을 치니, 산성 안에서 구원병을 바라보고 대포를 쏘고 불을 들어서 서로 응하였다. ※ 12/27 : 청군 산성 포위 병력 : 5천5백명 ◯ 8차 전투(12/29, 300명 북문출전, 2명청군 사살, 조선군 장수8, 병사300명 전사) ◇ 12월 29일 (실록)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 12월 29일 (병자록) (연려실기술)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ㆍ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 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책을 불사르면 군사가 진격하는 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불사르도록 명하여 송책을 이미 불살라 버렸으므로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공격하는 데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또 처음 접전할 때에 군사들에게 화약을 많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시끄럽더니, 접전이 벌어진 다음에야 어느 겨를에 화약을 청하겠는가. 다만 화약통을 서로 두들길 뿐이었다. 산 언덕이 험준하여 이미 갑자가 올라가기 어려웠고 깃발을 휘두르면서 퇴군하였으나 성이 막혀 있어 보지 못해 마침내 모두 섬멸되기에 이르렀다.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 12월 29일 (중정남한지) 術士가 말하기를, “오늘은 화친과 싸움이 모두 길하다.”하니 김류가 이 말을 믿고 한편으로는 화친을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접전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에 羅萬甲이 朴滉에게 말하기를 “싸움을 하려거든 싸움을 하고 화친을 하려거든 화친을 할 것이지 하루 동안에 어떻게 화친과 싸움을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노래를 부르고 곡하는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없는 것과 같다.“하였다. 이날 날씨가 다소 화창하여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였다, 네 城의 장수들이 좋지 않은 계책이라고 극구 말렸지만 김류는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은 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銃手 300여명이 北門에서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성 아래 계곡이 굽어 돌은 곳에 오랑캐의 기병들이 곳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오랑캐는 다섯 군데(소나무 송책 밖에 머물러 주둔해 있던 곳)에서 出軍하여 100여 騎는 고군(古郡)의 남쪽 4, 5백 步 정도 되는 거리로 물러가 주둔하는 한편, 약간의 주둔한 군사와 소ㆍ말을 머물러 놓고 우리 군사를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우리 군사들이 산을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진군하지 않는 자들를 목베게 하자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였다. 이에 어영군 300여명이 비로소 산을 내려가서 미끼로 머물러 놓은 군사와 牛馬를 취하였는데 오랑캐는 못 본 척하였다. 우리 군사가 松柵 밖으로 다 나와서는 인솔하는 장수가 없어 隊伍가 헝클어지면서 陣을 이루지 못한 채 사람들이 제각각 오랑캐와 싸웠다. 김류가 또한 火藥과 鉛丸을 절약하기 위해 쏘는 대로 지급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한 번 총알을 쏠 때마다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오랑캐가 비로소 말을 채찍질하여 돌입하였는데 나는 것처럼 빨랐고 伏兵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곧장 우리 군사와 충돌하였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 쏠 겨를 없이 순식간에 300여명의 군사가 마침내 적에게 섬멸되어 살아 돌아온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여해(池如海), 이원길(李元吉) 등이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는 죽운 자가 겨우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책을 불사르면 우리 군사가 진격하는 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命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그런데 송책을 이미 타버린 뒤에는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공격하는 데 더욱 거칠 것이 없게 되었다. 산비탈이 험준하여 이미 갑자기 올라가기는 어렵고 깃발을 휘두르며 군사를 퇴각시키기는 했지만 城과의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아서 마침내 모조리 섬멸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유호가 또한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제대로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스스로 싸우다가 스스로 패배하고는 허물을 돌릴 곳이 없게 되자 北城長 원두표가 구원하지 않은 탓이라는 핑계를 대어 장차 極罪에 처하려 하자, 左相 洪瑞鳳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副將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待罪하였고, 원두표의 중군을 杖을 쳐서 거의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사기가 저하되어 더 이상 출전하려는 뜻이 없어졌고 廟堂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 12/29 : 청군 산성 포위 병력 : 8천7백명(홍타이지 본군 3천2백명포함) 12/29 : 한양 약탈병력 : 몽고군 주축 1만1천명 ◇ 1월 1일 (실록)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虜汗合諸軍, 結陣于炭川, 號三十萬, 張黃傘, 登城東望月峯, 俯瞰城中。) ◇ 1월 1일 (중정남한지) 오후에 동성 밖에서 두 개의 노란 양산과 두 개의 큰 깃발을 펼치고 총포를 쏘고 북을 치면서 오더니 날이 기울어질 무렵에야 비로소 돌아갔는데 이는 필시 汗일 것이다. ◇ 1월 2일 (실록) 이서의 졸기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 9차 전투(1/3, 장성인 3명 청군사살) ◇ 1월 3일 (일월록) 적 5, 6명이 순찰하다 성 밖에 이르렀는데 훈련원 주부 장성인(張性仁)이 포를 쏘아 세 적을 죽였다. 다른 본에는 2명의 적으로 되어 있다. 임금이 이르기를, “한 번 쏘아 셋을 죽였으니 쾌하도다.” 하고, 특별히 훈련원 첨정을 제수하였다. ◇ 1월 3일 (실록) 쌍령전투 패배 ◇ 1월 4일 (중정남한지) 오랑캐 5,6명이 순시하다 성 밖에 이르렀는데. 훈련 주부 장성인이 포를 쏘아 오랑캐 3명을 죽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번 쏘아 세 명의 오랑캐를 죽이다니 통쾌하구나” 하고는 본원의 첨정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 1월 5일 (실록) 전라 병사 김준룡이 치계하여 승전 소식을 전하다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들어와 광교산(光敎山)에 【경기의 수원(水原)과 용인(龍仁) 사이에 있다.】 주둔하며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치계(馳啓)하였다. 당시 남한 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원병의 소식이 잇따라 이르렀으므로 성 안에서 이를 믿고 안정을 되찾았다. ◇ 1월 8일 (실록) 예조가 온조왕의 제사를 다시 지낼 것을 청하다. ◇ 1월 9일 (중정남한지) 오랑캐가 산성의 안과 밖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깨닫고 송책(松柵)을 지키기를 더욱 엄중하게 하니, 이로부터 장계가 또한 들어올 수가 없었다. 諸道의 근왕병을 모조리 쫓아내고 사방에서 나와 노략질하니 畿湖 사이에 오랑캐 騎兵이 곳곳에서 횡행하였다. ※ 1/10 : 청군 산성 포위 병력 : 3만4천명(홍타이지 본군 3천2백명포함) 1/10 : 한양 약탈병력 : 몽고군 주축 1만1천명 ◇ 1월 13일 (실록) 홍서봉의 건의로 정명수와 용골대·마부대에게 은을 주게 하다. ◇ 1월 16일 (실록) 오랑캐가 ‘초항’이란 글자를 성 중에 보이다 오랑캐가 ‘초항(招降)’이라는 두 글자를 기폭에 크게 써서 성중에 보였다. (虜大書招降二字于旗面, 以示城中。) ◇ 1월 16일 (병자록), (중정남한지) 홍서봉 등이 오랑캐의 진중에 가서 국서에 대해 지금까지 회답이 없는 이유를 물으니,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공유덕과 경중명의 두 장수가 당병(唐兵) 7만을 거느리고 28병(柄)의 홍이포(紅夷砲)를 싣고 장차 강화도를 침범할 것이다.” 하였다. 적이 흰 깃발에 초항(招降)이란 두 글자를 써서 남별대(南別臺)의 밖 망월대(望月臺) 아래에 세웠는데 바람에 꺾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 1/16 : 청군 1차 300명 귀국명령 1/18 : 산성 포위 병력중 도르곤, 두두 5천 병력 강화로 감. ◯ 10차 전투(1/19, 홍이포 최초 공격, 동문 이기축 함락직전 격퇴) ◇ 1월 19일 (실록)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虜放大砲於城中, 砲丸大如鵝卵, 或有中死者, 人皆駭懼) ◇ 1월 19일 (明谷集) (중정남한지) 한밤중에 적이 동쪽 성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와 성이 거의 함락될 뻔하였다. 남녀가 성을 넘어 달아나는 자가 몹시 많아 성안이 가마속 끓듯 하였다. 이때 어영 별장 이기축(李起築)이 장경사(長慶寺)에 있다가 죽을 힘을 내어 몸을 빼내 독전하니, 적이 물러갔다. 이에 임금이 친림하여 위로의 말을 내리고 특별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완계군(完溪君)을 봉하였다. ◇ 1월 20일 (실록) 오랑캐가 답서를 보내어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묶어 보내라 하다. ◯ 11차 전투(1/23, 서문 이시백 3번교전, 동문 신경전 4번교전 격퇴) ◇ 1월 23일 (실록) 서성과 동성을 습격한 적을 패퇴시키다 밤중에 적이 서성(西城)에 육박하였는데,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힘을 다해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적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갔다. 조금 뒤에 또 동성(東城)을 습격하였다가 패배하여 도망하였다. ◇ 1월 23일 (병자록) 삼경에 적이 서쪽 성을 침범하였다. 수어사 이시백이 지키는 곳이었다. 수어 군관(守禦軍官) 송의영(宋義榮)이 눈 밟는 소리를 듣고 잠결에 놀라 깨니 적이 이미 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있으므로 급히 모난 몽둥이를 잡아 쥐고 적을 쳐서 성 밖으로 떨어뜨리고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성을 지키는 잠자는 군사들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선전관에게 적의 순라 군사가 왔다고 일러라.” 하였다. 이에 잠자던 군사들이 모두 일어나 갑작스러워 화살을 쏠 겨를도 없이 어지럽게 돌을 떨어뜨렸다. 이시백이 몸을 빼어나가 힘껏 싸우니, 적은 세 번 진격하고 세 번 퇴각하는 동안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높은 사다리와 무기를 빼앗았다. 이때 시백은 처음부터, “군졸 중에 모두 갑옷을 입은 자가 없으니 죽고 사는 것을 마땅히 더불어 같이 하겠다.” 하며, 끝내 갑옷을 입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차례 갑옷 입을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화살 두 개를 맞고서 군사들이 놀라 소동할까봐 염려하여 감춘 채 말하지 않다가, 싸움에서 이긴 뒤에야 비로소 그 화살을 뽑으니 피가 이미 등을 적시고 있었다. 이에 상하가 자못 걱정하였지만 마침내 나았다. 대개 시백의 사졸들은 경기 지방 사람들로 교련을 받지 못한 자들인데, 거처와 고락을 한결같이 사졸들과 같이 하여 마침내 그 힘을 얻은 것이다. 오경에 적이 또 동쪽 망월성(望月城)을 침범하자 신경진이 쳐서 물리쳤는데, 네 번 진격하고 네 번 퇴각하는 동안 죽인 적의 숫자가 더욱 많았다. ◇ 1월 23일 (중정남한지) 밤 3경에 오랑캐가 서성을 침범하였는데 수어사 이시백이 지키는 곳이었다. 몰래 사다리를 설치하고 넘어 들어올 때에 수첩군관(守堞軍官) 송의영(宋義榮)이 눈 밟는 소리를 듣고 잠결에 놀라 깨니 오랑캐가 이미 사다리에 기어올라 성에서 1자 남짓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서둘러 稜杖을 잡아 쥐고 앞으로 나아가 두 번 쳤는데 너무 서두르느라 제대로 맞추지 못하였고 이내 그 능장으로 곧바로 오랑캐 가슴팍을 쳐서 성 밖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잠자는 군사들을 걷어차 깨워서 우선 자잘하게 산재한 돌을 내리 굴리고 그 다음으로 碎磨鐵을 사용하였으며 이어서 포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오랑캐는 세 번 진군하고 세 번 퇴각하였는데 캄캄한 밤이어서 죽운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 보니 얼음과 눈 위가 온통 붉은 피투성이였다. 5경에 오랑캐가 또 동쪽으로 望月城을 침범하여 훈련대장 신경진이 쳐서 물리쳤는데 베어 죽인 숫자가 또한 많았다. ※ 1/23 : 청군 산성 포위 병력 : 3만5천명(홍타이지 본군 3천2백명포함) 1/23 : 한양 약탈병력(몽고군 주축 1만1천명) 귀국명령 ◯ 12차 전투(1/24, 남성, 곡성 구굉 격퇴, 망월봉 홍이포 발사 대응 신경진 천자포 발사) ◇ 1월 24일 (실록)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賊放大砲於南格臺、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辟易。 賊兵進逼南城, 我軍擊却之) ◇ 1월 24일 (연려실기술) 아침에 적이 또 남성(南城)을 침범하고 지난 저녁에도 또 곡성(曲城)을 침범하였는데, 구굉(具宏)이 모두 물리쳐 죽인 적의 수가 또한 많았다. 며칠 전에 적이 망월대(望月臺) 밖에 대포를 설치하니 신경진이 사졸들에게 천자포(天字砲)를 쏘도록 하여 오랑캐의 장수와 졸개 몇 명을 맞추니, 적이 흩어져 갔다.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또 7,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蹲)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 1월 24일 (중정남한지) 해가 뜰 무렵에 오랑캐가 南城과 曲城을 침범하였는데 具宏이 모두 쳐서 물리쳤다. 청나라 군사들이 望月峰과 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대포를 설치하고 발사하였다. 申景禛이 千字砲를 발사하게 하여 오랑캐 장수와 군졸 몇 사람을 맞혔다. 이에 오랑캐도 南格臺 밖에 大砲 10여 門을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虎蹲이라 하고 紅夷砲라고도 불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은 거위 알만하며 수 십리를 날아갈 수 있었는데 매양 行宮을 향하여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잇달아 성첩을 맞혀 동성의 한쪽 모퉁이가 거의 다 파괴되어 성 위의 얕은 담이 이미 가린 것이 없게 되었고 신경진의 軍官과 司僕寺의 아전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에 군량을 담았던 빈가마니 수백 개에 흙을 담아 파괴된 자리에 쌓아서 막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게 하여 단단하게 만들었다. 오랑캐가 새벽부터 모두 다섯 차례 성을 핍박했는데 세 곳에서는 모두 패하였고 두 곳에서는 스스로 물러갔다. 이에 인심은 매우 위안을 받았지만 비축된 식량이 장차 바닥이 나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 13차 전투(1/25, 남성, 망월봉 종일 대포 공격) ◇ 1월 25일 (실록)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砲聲終日不止。 城堞遇丸盡頹, 軍情益洶懼。) ◇ 1월 25일 (병자록) 적의 대포가 망월대에 맞아 대장기(大將旗)의 기둥이 꺾어지고 또 잇달아 성첩에 맞아 한 귀퉁이가 거의 다 파괴되어 성 위의 얕은 담은 이미 가릴 것이 없어졌고, 사복시의 아전과 신경진의 군관이 탄알에 맞아 죽었으나, 곧 군량을 넣었던 빈 섬 수백 개로 흙을 담아 파괴된 자리를 막고 물을 끼얹어 얼음을 얼게 하였다. 대포 알이 성중에 계속 떨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경진은 군관의 죽음을 눈으로 보면서 성이 무너지면 다시 수선하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 장수의 풍모가 있다고 할 만하다. ◇ 1월 25일 (실록)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청하고는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돌려주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덕형(李德泂)·최명길(崔鳴吉)·이성구(李聖求) 등이 가서 그들을 보니,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인데,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거든 사신은 절대로 다시 오지 말라."하고, 이어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되돌려 주었으므로 최명길이 이야기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 1월 26일 (실록) 강도의 함락 보고를 처음 듣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세자가 나온다는 뜻을 알리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하고, 인하여 윤방·한흥일의 장계와 대군(大君)의 수서(手書)를 전해 주었다. 이에 처음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1월 28일 (연려실기술) 淸나라 군사가 대포 쏘기를 정지하고 맞아 죽은 자가 6명이다. 방패(防牌)를 거두고 다만 복병(伏兵)만을 두었다. ◇ 1월 29일 (중정남한지) 최명길이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인 교리 윤집과 수찬 오달제를 잡아 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진영에 갔다. Richard Clayderman 연주곡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