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丙子胡亂 江華島 함락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
- 金慶徵 패전책임론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
許 泰 玖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目 次>
Ⅰ. 머리말
Ⅱ. 金慶徵 관련 丙子錄 서술의 한계
Ⅲ. 江華島 함락의 원인 재검토
Ⅳ. 終戰 이후 江華島 함락 책임자의 처벌 논의
Ⅴ. 金慶徵 賜死의 맥락
Ⅵ. 맺음말
주제어 : 丙子胡亂, 江華島, 金慶徵 張紳, 金瑬, 羅萬甲, 丙子錄, 主和派, 斥和派
<국문 요약>
이 논문은 강화도 함락의 원인을 기술하는 데 활용된 대표적인 사료인 羅萬甲의 丙子錄을
비판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이 저술이 史料로서 갖고 있는 한계점을 부각하였다.
그리고 敗戰의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강화도의 함락이 지휘관의 역량보다는
朝․淸 양국 간의 현격한 戰力 차이에서 초래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종전 후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사안이
단순히 전투상의 功過만을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淸軍의 상륙 당시 江都檢察使 金慶徵은 소수의 육군 병력을 지휘하면서
다수의 판단 착오와 실책을 저질렀다. 그러나 軍務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은
여러 사료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江華留守兼舟師大將 張紳의 몫이었다.
장신의 처형 이후에도 朝野의 여론은 김경징의 처형을 집요하게 주장하였다.
그 배경에는 종전 이후 패전의 책임을 둘러싸고 벌어진 金瑬 등의 主和派 大臣과
이를 공격하는 斥和派 言官 간의 갈등이 내재하고 있었다. 김경징에 대한 공격은
아버지 김류의 전쟁 책임 및 정치적 입지와 긴밀하게 연관된 정치적 사안이었다.
강화도 방어작전의 중심 역할과는 거리가 있었던 김경징이 끝내 처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함락 이후 그가 보인 保身的 태도와 행적 때문이었다.
世子嬪과 元孫, 大君, 老母 등을 남겨두고 홀로 도주한 행위는
강도검찰사의 임무와 책임뿐만 아니라 父母에 대한 義理마저 저버린 敗逆한 행위였다.
요컨대 김경징의 처벌은 군사적인 측면의 책임보다
도덕적․의리적 측면의 책임을 물어 시행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Ⅰ. 머리말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더불어 조선의 2대 保障處 중 하나였던 강화도의 함락은
인조가 出城降服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로 알려져 있다.
世子嬪과 元孫, 大君을 비롯한 많은 왕실과 사대부 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농성 지속의 동력을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
청태종도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강화도 공략을 지시한 것이 확인된다. 2)
그러나 남한산성의 농성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강화도 함락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조가 이미 출성항복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3)
이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강화도 함락은 궁지에 몰린 인조정권에게
명분상 퇴로를 열어준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화도의 함락은 이처럼 병자호란의 전개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패배가 어디에서 초래되었는가라는 문제는
병자호란의 전반적 이해와도 연관되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 함락의 상세한 전말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로는
병자호란 당시 管餉使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扈從한 羅萬甲의 丙子錄과
이를 토대로 작성된 李肯翊의 燃藜室記述에 실려 있는 「江都敗沒」조가 있다.
이들 기록에 의거한다면, 강화도 함락의 원인은 자연스럽게
江都檢察使 金慶徵과 江都留守兼舟師大將 張紳의 反目,
이들의 전략적 판단 착오와 안일 및 비겁 등으로 정리된다.4)
선행 연구도 예외 없이 이러한 관점에 많은 비중을 두어
강화도 함락의 전말을 재구성하고 있다.5)
1)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1월 丙寅(26일)
“上曰 卿等雖不言 予豈不知乎 初意此擧決不可從 惟欲背城一戰 同死社稷 而軍情已變 事機大異
日夜所望 庶幾江都之得全 今則非但予之子婦 皆已被拘 百官族姓 擧將係累而北 予雖獨生
將何面目 復見於地下乎 諸臣痛哭而出”.
2)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年 1월 甲辰(16일)
“又得人問之 有云國王與長子及羣臣 俱在南漢 其餘妻子 在江華島 又有云王與妻子 俱在一處
朕意欲造船 先攻此島 若得其妻子 則城內之人 自然歸順 若猶不順 然後攻城 計亦未晩 觀此島亦似易取”.
3) 조선은 남한산성 농성의 말미로 갈수록 청군 戰力의 증강과 攻勢의 가중, 식량의 부족, 근왕군의
패배, 軍心의 이반 등으로 인해 출성항복과 결사항전이란 양자의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었다.
남한산성의 농성 과정에 대해서는
이상배, 「丙子胡亂과 三田渡碑文 撰述」, 江原史學 19․20,2004 및
許泰玖, 「병자호란 講和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 52, 2010 참조.
4) 仁祖實錄에 실려있는 史論과 척화론을 옹호하는 관원 상소에도 유사한 인식이 흔히 보인다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9월 丙戌(21일) 등).
5) 류재성, 제3장 5절「강화도 전투」, 丙子胡亂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pp.174~188;
이장희,「강화실함과 남한산성」,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pp.289~291;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pp.415~419 참조.
1) 청태종도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강화도 공략을 지시한 것이 확인된다.
2) 그러나 남한산성의 농성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강화도 함락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조가 이미 출성항복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3) 이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강화도 함락은 궁지에 몰린 인조정권에게
명분상 퇴로를 열어준 사건이라고 도 볼 수 있다. 강화도의 함락은 이처럼 병자호란의 전개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패배가 어디에서 초래되었는가라는 문제는
병자호란의 전반적 이해와도 연관되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선행 연구가 丙子錄과 燃藜室記述을 주요 사료로 적극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終戰 이후 시행된 김경징과 장신의 처형은
丙子錄 燃藜室記述의 내용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이 당대 사회, 제도, 국력의 총체적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강화도
함락의 원인을 지휘관의 과실이라는 人的 요인에서만 비롯된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보
다 兵力, 戰術 및 戰略, 氣候, 兵器 등 다른 군사적 諸 요소의 종합적 검토를 통해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실상이 종합적으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6)
이상의 문제의식 하에 본고는
먼저 강화도 함락의 원인을 기술하는 데 활용된 대표적인 사료7)
인 나만갑의 丙子錄을 비판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이 저술이 史料로서 갖고 있는 한계점을 부각하고자 한다.
이어서 지휘관의 자질이라는 人的 요소 외의 군사적인 측면에서
강화도 敗戰의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선행 연구에서는
크게 부각하지 않았던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실상을 새로이 조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병자호란의 전후 처리과정에서 시행된
강화도 함락 책임자의 처벌이 어떠한 상황과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도 상세히 고찰해 보겠다.
이를 통해 종전후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규명하고 처벌하는 사안이
단순히 전투상의 功過만을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 이상의 사회․문화적 컨텍스트가 내재해 있었다는 점을 논증해 보고자 한다.
Ⅱ. 金慶徵 관련 丙子錄 서술의 한계
丙子錄은 병자호란 당시 管餉使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한 羅萬甲이 병자호란의
발발과 전개, 전후 처리과정을 자신의 체험과 見聞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8)
나만갑은 丙子錄에서 김경징의 방자한 인품, 안일한 방어 태세,
전술적 판단 착오, 비겁한 도주 행위등을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6) 結氷이라는 기후적 요소와 淸軍의 紅夷砲 사용은 이미 한명기의 연구에서도 강화도 함락의
주요원인으로 강조된 바 있다(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pp.417~418).
7) 燃藜室記述의 細註에 의하면 「江都敗沒」 조는 亂離雜記, 江都錄, 丙子錄을 合錄하여
작성되었다고 한다. 나만갑의 丙子錄이 燃藜室記述보다 훨씬 앞선 기록이고,
두 사료의 내용이 상당 부분 중복됨으로 본고에서는 丙子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8) 丙子錄의 완성 연대는 대략 1641년(인조19) 6월부터 1642년(인조 20) 11월 사이로 추정된다
(丁奎福․高憲植, 「<山城日記>의 文獻學的 硏究」, 敎育論叢 12,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1982).
경징은 江都가 金城湯池라 적이 날아서도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여겨,
朝夕으로 잔치를 벌여 날마다 술잔 기울이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山城이 포위된 지 이미 月餘가 지나 소식이 통하지 않는데도 임금은 전혀 걱정하지도 않고,
大臣이 혹 무슨 말을 하면 그는, “피란 온 대신이 감히 지휘하려고 하시오?”라 하고,
大君이 혹 뭐라고 말씀하시면, “이 위급한 때에 대군이 어떻게 감히 참견하려 하시오?”
라고 하여, 대군이나 대신 이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9)
丁丑年 正月 21일에 通津 假守 金廸이 검찰사에게, “적이 방금 童車에다가
조금만 배를 실러 가지고 강화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牒報를 올려 아뢰었으나,
경징은 “강물이 아직 단단히 얼어 있는데 어떻게 배를 움직인단 말이냐?”라고 하여,
(김적이) 軍情을 어지럽힌다고 말하며 바야흐로 목을 베어 죽이려고 하는데, 갑곶 把守長의
보고가 또한 김적의 말과 같으니, 경징이 비로소 놀라고 당황하기 시작하였다.10)
(충청수사 姜)晉昕이 거느린 배가 매우 적었는데,
장신은 賊勢가 매우 急함을 보고 前進할 생각이 없어,
진흔이 북을 울리고 기를 휘둘러 장신을 독촉하는데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진흔이 배 위에 서서,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
나는 네 목을 베고야 말겠다”라고 호통을 쳤으나,
장신은 끝내 움직이지 않고 곧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11)
이 때 강화의 哨官은 모두 장신의 배 안에 있었는데,
主將인 장신이 물러나 가버리자 한 사람도 뭍에 오르는 자가 없었다.
(김)경징은 이젠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하고
浦口로 달려가서 말을 버리고 물에 들어가 전선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때 김경징과 장신의 늙은 어미가 다 城 안에 있었는데, (김경징과 장신이)
모두 배를 타고 달아나 버려 두 집의 늙은 어머니는 결국 성 중에서 죽었다.12)
丙子錄은 이 밖에도 김경징의 여러 부적절한 행태13)
를 집중적으로 고발하였다. 그리고 江都檢察副使 李敏求가 충청감사로 임명받아
안전한 강화도를 나가야할 상황에 몰리자
처삼촌이자 原任大臣인 尹昉의 힘을 빌려 끝내 기피한 행적도 비난하고 있다.14)
丙子錄에 묘사된 강도검찰사 김경징, 강도검찰부사 이민구, 강도유수겸주사대장 장신 등의
비겁하고 무능한 모습은 강화도 함락시 장렬하게 殉節한 것으로
묘사된 金尙容 등의 사대부, 부녀자, 병사들의 행적15)
과 강렬하게 대비되어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9)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10)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11)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12)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13) 강화도 행차시 嬪宮 渡江의 지연, 國穀의 독점, 軍器 및 火藥 수급의 지연,
사형 통보 후의 비겁한 태도 등.
14)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15)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江都殉節人」, 「壇享諸人」, 「殉節婦人」.
아래에 제시된 바와 같이 燃藜室記述 「江都敗沒」 조의 기록도 丙子錄의 기록과
상당부분 중첩되면서 더욱 상세하고 부정적으로 김경징 등의 행태를 서술하였는데,
丙子錄에는 기록되지 않은 김경징과 장신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고 있다.
(김)경징이 자기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하려고 하나
장신은, “나는 명령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서로 배척하고 알력이 심하였다.
(김경징은) 스스로 江都를 金城湯池로 여겨 적이 날아서도 건너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무 걱정없이 방자한 뜻을 품고 날마다 술만 마시며 주정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소식이 이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큰 소리 치기를,
“아버지는 體察使, 아들은 檢察使,
국가의 큰 일을 처리할 자가 우리 집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다.16)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이들의 기록과 해석에만 전적으로 의거한다면,
강화도 함락의 원인은 자연스럽게 江都檢察使 金慶徵과 江都留守兼舟師大將 張紳의
안일 및 비겁, 무능과 전략착오, 不和와 反目 등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丙子錄과 燃藜室記述의 「江都敗沒」조를
좀 더 비판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위와 같은 결론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들 기록에 묘사된 김경징, 장신등의 한심한 행태가
敗戰의 결과를 너무나 완벽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은 위의 기록들을 敗因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는
패인을 바라보는 기록자의 시각이라고 전제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 준다.
과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의 함락은
전적으로 이들 지휘관의 무능과 비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들 지휘관의 과실 이외에 강화도 함락을 초래한 구조적 요인은 없었는가?
병자호란을 총 지휘한 都體察使 金瑬의 아들이며 江都檢察使의 重任을 맡고 있는 김경징이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이처럼 해이한 책임 의식 하에
모든 사람이 알 정도의 방종과 안일을 행하였을까?
따라서 Ⅱ장과 Ⅲ장에서는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실상을 재구성하기 위해
丙子錄의 저술 배경과 강화도 함락 관련 기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한다.
丙子錄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저자 나만갑과 김경징의 아버지 김류와의 관계이다.
나만갑은 1625년(인조 3) 김류의 천거로 北人 출신 南以恭이 大司憲으로 등용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강동현감으로 좌천된 바 있었다.17)
아울러 1629년(인조 7)에는 吏曹郎官의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으나,18)
16)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江都敗沒」.
17) 仁祖實錄 권9, 仁祖 3년 5월 甲寅(7일); 仁祖實錄 권9, 仁祖 3년 7월 己酉(3일).
18) 仁祖實錄권21, 仁祖 7년 7월 戊子(5일).
사람됨이 부박하고 어리석어 이조낭관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김류의 공격을 받았고,
그 뒤에는 士論을 주도하고 是非의 通塞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 했다는
인조의 혐의를 받아 해주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19)
老西와 少西의 대립이라고 칭해진 이들의 갈등은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西人 이외의
인사를 조정에 진출시킬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문제였는데,
老西에는 申欽, 吳允謙, 金尙容이 속해 있었고,
淸西인 金尙憲의 기풍을 흠모했다는 少西에는 三司에 포진하였던
朴炡, 나만갑, 李基祚, 姜碩期 등이 속해 있었다.20)
功臣 출신으로서 노서를 후원한 것은 김류였고, 소서를 후원한 것은 이귀였다.
이귀는 나만갑의 外職 보임[강동현감으로 좌천]이 김경징의 살인죄를
나만갑의 장인 鄭曄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박정과 함께 논박하여
이에 대해 김류가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21)
역시 이귀의 발언이라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지만
나만갑에 대한 김류의 처우 역시 매우 박하였다는 지적도 있다.22)
병자호란 당시의 김류와 나만갑의 대조적인 입장과 행보도 주목해야 한다.
김류는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이자 都體察使로서
淸과의 和議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나만갑은 斥和派로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남한산성의 농성기간 중에 主和를 주장한 쪽은 崔鳴吉과 비변사에 포진한 大臣․功臣들이었고,
척화를 주장한 쪽은 김상헌, 鄭蘊, 尹煌, 洪翼漢과 三司의 연소한 관원 및 在野 士類였다.
농성 기간 중 척화론자들은 和親을 주도한 김류, 최명길 등을
격렬한 어조로 비판하곤 하였는데,23)
나만갑도 丙子錄에서 주화론자들의 행적은 다소 편파적이고 근거없이 비난한 반면에
척화론자들의 言行은 높이 찬양하였다.24)
19) 仁祖實錄권21, 仁祖 7년 7월 甲午(11일);
仁祖實錄 권21, 仁祖 7년 7월 乙未(12일); 仁祖實錄 권21, 仁祖 7년 7월 壬子(29일).
20) 李建昌, 黨議通略 「仁祖朝」.
21) 仁祖實錄 권9, 仁祖 3년 7월 戊午(12일).
22) 仁祖實錄 권21, 仁祖 7년 7월 己亥(16일)
“上謂兵判李貴曰 卿以元勳重臣 國中士習及朝著間事 卿必知之 今者羅萬甲皆以爲無罪 此何如也
貴曰 萬甲不無病痛 而氣節可尙 故小臣欲擬薦於元帥矣 頃日左相所陳 辭意過重
臣聞金慶徴問於萬甲曰 汝何頻往李二相家 而不到吾家耶 萬甲曰 李二相待
我如子弟 凡有是非 無不從之 汝家則待我如胥徒 吾所以不去也”.
23)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2월 戊子(18일)
“上御行宮南門 敎諭百官 前參奉沈光洙伏地 請斬一人 以絶和議 以謝人心 上問一人爲誰 對曰崔鳴吉也”;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2월 壬辰(24일)
“三司齊會 將請斬主和之人 校理尹集主其論 大司諫金槃執義蔡裕後以爲太過 力沮而止”.
24)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12월 28일 “今日之死 不下三百餘人 而體相惡其實報 柳瑚僅以 四十人啓之 人心尤不服”;
1월 27일 “如金尙憲鄭蘊 可謂之烈丈夫 能與白日爭光矣”;
1월 29일 “崔鳴吉還來嗟歎曰 吳尹若一如我所指 終必無害 故出去之時 多般敎諭 而及至汗前
所答相反 是必畏인 而然也云 鳴吉之奸謀百出 愈往愈甚”;
이러한 나만갑의 시선은 김류의 가족에 대한 서술에도 극단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나만갑은 김류와 김경징의 처가 강화도가 함락될 때 자결하였다는 사실을 기재하면서도,25)
이 殉節이 김류의 손자이자 김경징의 아들 金震標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다소 믿기 어려운 蛇足을 달아 놓았다.26)
즉, 김진표가 자신의 부인에게 자결을 강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이 광경을 본 김류의 부인과 김경징의 처도 자결하였다는 내용이다.
燃藜室記述에도 이와 유사하면서도 더욱 상세한 기록이 실려 있지만,
김진표 협박설이 김경징에 대한 인심의 분노로 인하여 김류 집안 부녀자들의 절개를
깍아 버리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 또한 같이 기재되어 있다.27)
아울러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로 강화도에 뒤늦게 들어갔던 趙翼의 기록이
김경징의 인품과 행태를 상당히 다르게 묘사하였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정축년 1월) 19일에서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을 계속 分備局(=分備邊司)에 가서 보니,
金慶徵과 李敏求가 담당하며 일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별로 하는 일은 없고 단지 문서를 酬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때 남한산성이 포위된 뒤로 시일이 많이 경과하면서,
각처의 人民들이 적병을 만나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무수히 발생하였는데,
날마다 접하는 소문마다 모두 차마 들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항상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에 홀로 살아 남았다는 것이 편치 못해서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일찍이 분비국에 가서 김경징과 이민구에게 말하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京城에까지 육박해 왔을 때에 李廷馣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家人이 구해서 살린 적도 있고,
옛날에 叔孫昭子가 季孫이 임금을 쫓아낸 것을 통분하게 여겨
祝宗에게 죽게 해 달라고 빌게 한 고사도 있는데, 지금 나도 참으로 죽고만 싶다.
만약 내가 수백 명의 병력을 얻어서 한 방면을 담당하며 육박전을 벌일 수 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자로는 내가 응당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하자,
김경징이 나를 보고 슬피 울면서 손을 잡고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때 官軍 이외에 男丁과 피난 온 사람들은 모두 義兵으로 차출되어
더 이상 남아 있는 자들이 없다 보니 병력을 얻기가 참으로 몹시 어려웠다. 그리고 이민구가
병력을 얻을 계책을 강구해 보았지만 그것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28)
조익의 증언에 의하면, 김경징과 이민구가 강화도 방어
또는 남한산성 구원을 위해 별다른 군사적인 조취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조익은 그 원인으로 그들의 비겁과 안일한 자세를 지목한 것이 아니라
병력 자원의 부족이라는 여건의 제약을 언급하였다.
25)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婦女之自決者 金瑬李聖求金慶徵…之妻”.
26)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金震標 迫其妻 使之自盡 金瑬夫人 及金慶徵妻 見其婦死 繼以自決”;
仁祖實錄의 史論은 祖母와 母親의 죽음도 김진표의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명기하였다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9월 丙戌(21일)
“始賜金慶徵死, 斬姜晋昕、邊以惕…慶徵之子震標 脅迫其祖母及其母 使之自殺”).
27)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殉節婦人」
“或稱震標迫之使死 盖人心積怒於慶徵 並與其母妻之節烈欲刪沒之耳”.
28) 趙翼, 浦渚集 권25, 雜著 「丙丁記事」.
위의 사료에 묘사된 김경징, 이민구의 모습도 앞서 살펴 본
병자록이나 연려실기술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29)
위 사료의 기록자인 조익은 종전 이후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를 버리고
강화도에 피신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30)
조익은 인조를 호종하지 못한 불가피한 이유를 설명하고 義兵 등을 모집하려고 한 사실
등을 드러내어 자신의 행적을 변호하려는 의도로 「丙丁記事」를 작성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조익의 기록 역시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인의 행적과 무관한 「丙丁記事」의 내용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주변의 상황과 민심, 강화도 전투의 戰況 등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아울러 「丙丁記事」의 저술 의도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행적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익이 굳이 사실과 다르게 김경징을 호의적으로 기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조익과 김류와의 특별한 親疎 관계가
파악되지 않는 한 김경징에 대한 「丙丁記事」의 묘사는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조익은 김류와는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최명길, 李時白(李貴의 아들), 장유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31)
이상에서 고찰한 사실 외에, 종전 후에도 전쟁의 책임을 둘러싸고 主和派와 斥和派가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는 점(본고 Ⅳ장 참조)과
나만갑이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병자록과 연려실기술에 묘사된 김경징 등의 인품과 행적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힘들다.32)
29) 조익이 김경징을 과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군이
강화도 상륙을 시도할 때 김경징이 성 안의 모든 군사를 데리고 나가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검찰사 김경징의 독촉에도 불구하도 경기도의 舟師를 움직이지 않아
청군의 渡江을 방기한 주사대장 장신의 잘못도 서술하였다
(趙翼, 浦渚集 권25, 雜著 「丙丁記事」“自巳時許 見板屋大船自南上來者其數甚多
人皆謂此必南方戰船來矣 皆大喜 其船未及津渡數百步許 皆留不進 乃張紳所領京圻戰船也
聞變之初 或謂宜吹角聚軍 金慶徵謂如是則人心驚 只聚城中武士而往 其數僅可七八十
令被甲下至津邊 余亦令車仲轍往與諸軍共射之 檢察等諸人皆坐於倉屋廡下 至午時許
敵船相㳄渡來 檢察等令於岸上 揮旗促舟師 而終不動”).
30) 仁祖實錄 권37, 仁祖 16년 7월 癸未(22일); 仁祖實錄 권37, 仁祖 16년 12월 乙巳(17일).
31) 宋子大全 권162, 「浦渚趙公神道碑銘」
“少與張公維,崔公鳴吉 李公時白最相善 時人謂之四友 情分甚厚”.
32) 물론 병자록과 연려실기술 외에도 김경징의 행태를
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한 여타의 많은 公私 문헌이 존재한다.
그러나 官撰의 仁祖實錄이나 承政院日記의 경우 대개 김경징 등을 공격하는
상대방의 발언을 통해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사찬의 實記類기록 등은 대부분 나만갑의 병자록이 완성된 이후 편집되거나 작성된 것이며,
나만갑과 동일하게 강화도에 체류하지 않은 작자의 傳聞을 통해 저술된 것이다.
金昌協(1651~1708)이 병자호란 당시 京畿左道水軍判官으로 재직한
漁漢明(1592~1648)이 작성한 江都日記(奎 12400)를 보고 남긴 題跋에는
이러한 맥락이 잘 드러나 있다(農巖集 권25, 題跋 「書魚判官 丙子江都津頭日記後」
“右 故運判魚公所記丙子時事 公曾孫有鳳舜瑞以示余…然而事定之日 反以不赴行在獲罪 而忠勞之實
沒世不白 公雖不自怨悔 亦何以勸世之爲忠者哉…金慶徵事 見於野史所記多矣 然或得於傳聞
不無溢惡之疑 獨公記其所目覩 最端的可信 未論其他 只爭舟一事 亦見其不忠無狀 罪通於天矣”).
척화파의 거두 金尙憲의 증손인 김창협은 어한명의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러나 어한명 역시 조익처럼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하지 않은 이유로 비난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이 기록의 성격이 어한명의 변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도
江都日記를 접근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어한명은 후일 左贊成으로 贈職되는데,
여기에는 그가 경종의 繼妃인 宣懿王后의 高祖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英祖實錄 권27, 英祖 6년 8월 癸亥(27일)).
나아가 이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해도,
강화도 함락의 원인을 김경징 등 지휘관의 과실에만 국한하여 이해하거나
또 이것이 패전의 主因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Ⅲ장에서는 선행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강화도 함락의 주요 원인으로 무엇을 고려해 볼 수 있는지 차례로 살펴보겠다.
Ⅲ. 江華島 함락의 원인 재검토
전쟁의 勝敗를 가르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 중의 하나는 병력이다.
개별 전투력이 淸軍에 압도당하는 당시 상황에서, 병력의 우위를 점하지 않고서
강화도에 상륙한 청군을 조선군이 격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앞서 인용된
「丙丁記事」의 말미에는 병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강화도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강화도에는 과연 몇 명이나 되는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을까?
병자호란보다는 비교적 많은 시간을 갖고 방어를 준비할 수 있었던 정묘호란의 경우
약 1만 천여 명 이상의 水陸 軍兵이 강화도에 주둔한 바 있었다.33)
반면, 병자호란에는 촉박한 시간 속에서
대다수의 京軍이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김경징의 통솔 하에 강화도를 수비하는 陸軍 병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술하겠지만, 강화도 방어 작전의 중심이 陸戰이 아닌 水戰에 있었다는 점도
육군 병력이 부족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淸軍이 갑곶에 상륙하여 江華城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강화도를 방어하던 軍民의 상당수는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34)
33) 仁祖實錄 권15, 仁祖 5년 3월 乙未(28일)
“備局啓曰 諸道軍兵在江都者 水軍五千五百餘名 陸軍
五千六百餘名 合一萬有餘 留連數月 飢困已極 農節將迫 極可矜悶”.
34)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金慶徵出陣鎭海樓下 自守甲串 軍卒不滿數百…鳳林大君 初與慶徵 出見陣處
其見兵數零星 還入城中 更欲收拾軍兵 以爲防守之計 人皆迯散 不得已始爲守城”;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江都敗沒」 “鳳林大君 與慶徵出見陣處 見其兵數零丁 還入城中
更欲收拾 軍兵 以爲防守之計 人皆逃散 不得已始爲守成”.
강화도 함락의 소식을 들은 직후
인조가 具宏과 나눈 대화는 이러한 심증을 더욱 굳게 한다.
상이 이르기를,
“들어간 사람이 잘 대처하지 못한 탓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니,
구굉이 아뢰기를, “비록 잘 대처했다 하더라도 江都의 군사는 겨우 1,600명뿐이었으니,
이 숫자를 가지고 적을 당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군사 중에서도 600명을 덜어 내어 내보냈다.
그 짧은 計慮가 이와 같았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니,
구굉이 아뢰기를, “그들의 火砲를 살펴보니, 참으로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全軍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水師로 하여금 와서 모이게 했더라도
진실로 대적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35)
공교롭게도 淸太宗實錄은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물리친
조선군의 수를 약 1,10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36)
이때 강화도를 공격한 청군의 병력이 3만이라 칭했다는 仁祖實錄의 기록을 염두에 두고37)
청군과 조선군과의 전투력 차이까지 고려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강화도에 상륙한 청군을 방어할 확률은
지휘관의 역량 여부를 떠나 상당히 희박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38)
수군을 제외한 5천 6백여 명 이상의 육군 병력이 장기간 주둔한 정묘호란 당시에도
강화도의 방비 태세는 그다지 믿음직스러운 것으로 당대인에게 인식되지 않았다.39)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청군의 상륙 전후
소수의 육군 병력을 지휘한 김경징의 여러 과실이 없었더라도,
강화도는 성공적으로 방어되기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김경징의 과실과 관련하여 강화도 방어 작전의 중심이
陸戰이 아닌 水戰에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함락 전후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보면,
조선은 강화도 방어의 중점을 水戰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음에서 서술하듯이 병자호란에 즈음하여 강화도로의 피난과 공격은
朝․淸 양국의 수뇌부가 충분히 예상하고 대비하였던 상황임에 틀림없다.
35) 承政院日記 55책, 仁祖 15년 1월 己巳(29일).
36)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壬戌(22일)
“往取江華島…來奏云 黎明我軍乘船進攻入江華島 殺鳥槍手百人 又擊殺伏兵千餘”.
37)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1월 壬戌(22일)
“虜將九王 抄諸營兵號三萬 車載三板船數十 進屯甲串津
連放紅夷砲 水陸軍劻勷不敢近 賊乘虛急渡 紳晋昕慶徵敏求 皆望風而走”
38) 조선은 강화도 방어를 위해 필요한 육군의 병력수를 최소 1만 이상으로 상정한 것 같다
(仁祖實錄 권16, 仁祖 5년 4월 丙辰(20일)
“上曰 軍兵之入江都者 三萬有餘 而尙患不足 若不滿三萬 則何以成形乎
以江都地勢言之 賊兵卸下處極多 不可以些少之軍備禦 必得四五萬然後
乃可守也 若以四五萬守江都 則所餘之軍無幾 不得不更抄新軍也”;
仁祖實錄 권25, 仁祖 9년 9월 丁丑(6일)
“原府使張紳上疏 陳江都便宜 備局啓曰…陸軍信地派定事, 則宜擇三四處要害之地, 各屯數千之兵”).
39) 張維, 谿谷漫筆 권1 「崔鳴吉首發講和之議」 “子謙主其說 竟接其人於鎭海樓中
繼而劉海又至 和事遂成 時虜兵屯平山 去江都百餘里 而行朝守備寡弱 人情危懼”.
강화도에는 광해군대부터 유사시를 대비하여 군량이 비치되고 있었는데,40)
1621년(광해군13) 9월에는 누르하치가 자신을 방문한
滿浦僉使 鄭忠信에게 강화도의 축성 여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41)
이로 미루어 볼 때 후금은 保障處로서 강화도의 존재를
이미 이 시점부터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淸은 정묘호란의 前例만 상기하더라도, 전력상 열세에 처해 있는 조선이
유사시 강화도로의 播遷을 시도하리라는 것을 어렵지않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태종은 인조 9년(1631) 1월 조선에 보낸 國書에서 자신의 뜻대로 협조하지 않는 조선을
협박하면서 海島로 도피한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고 반문한 바 있었다.42)
조선 역시 明의 叛將 孔有德, 耿仲明이
병선을 가지고 後金에 투항한 사실을 이미 인지한 상태였으므로,43)
청군의 강화도 상륙 시도를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으리라고 보인다.
조선은 강화도 공략을 시도하는 청군을 海上에서 저지한다는 작전 개념44)
을 갖고 상당한 水軍 戰力을 집중시켰다.45)
이를 방증하듯이 인조는 남한산성 농성 중에 下三道의 舟師를 속히 소집하여
강화도의 방비를 강화할 것을 김경징에게 명한 바 있다.46)
40) 光海君日記 권166, 光海君 13년 6월 戊寅(8일).
41) 光海君日記 권169, 光海君 13년 9월 戊申(10일)
“忠信卽上疏曰…老酋招通事朴景龍問之曰…大島中 又爲築城造闕云 然乎
答曰 去京城三日程 有江華府 四面環海 其地甚廣 壬辰之變 京城避亂之士 多歸焉 修築城池云者 是矣”.
42) 淸太宗實錄 권8 天聰 5년 1월 壬寅(28일) “書曰…爾若欲助明而輕我 我不必遣發精兵
止遣蒙古 無賴者十萬人 往襲爾地 爾惟有遁逃海島而耳 平原沃土 能餘幾何”.
43) 仁祖實錄 권28, 仁祖 11년 8월 乙亥(16일)
“金差雲他時 齎汗書以來…敝邦得孔元帥耿揔兵舟隻繼又得旅順口船隻”.
44) 仁祖實錄 권25, 仁祖 9년 9월 丁丑(6일)
“水原府使張紳上疏 陳江都便宜 備局啓曰…江都築城事 當待體臣出仕
至於花梁永宗草芝濟物四堡移定事 則自祖宗朝 沿海設鎭 專爲倭寇海賊 意非偶然 而江都禦敵
專在於舟楫 若有移蹕之擧 則諸鎭戰船兵船 當聚於江都”;
承政院日記 60책, 仁祖 15년 9월 壬辰(27일)
“上御文政殿, 朝講…弘胄曰 江都天塹 不可爲終棄之地 苟欲缺則知其功之易也
時白曰 此乃大計 何敢容易陳達 小臣前日 忝守江都 本府形勢 無不周知 每與張紳 語及把守之事,
則張紳之意 以爲水戰爲上 而不爲陸備 臣常以此爲慮 果以此見敗矣”.
45) 인조는 즉위한 다음해(1624) 강화도에 대한 修築을 단행하는 한편
南陽에 있던 京畿水營을 강화도로 옮기고, 1629년(인조 7년)에 다시 喬桐으로 이설하였다.
이어서 1631년(인조 9)에는 花梁․永宗․草芝․濟物 등 네 곳에 堡를 만들어
강화도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633년(인조11) 경에는 京畿水使를 승격시켜 충청․경기․황해
三道의 舟師를 통괄하는 三道水軍統禦使로 삼아 도성 및 강화도 주변의 海防을 강화하였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인조 5) 3월에는 강화를 留守府로 승격시켰다(李敏雄,
「18세기 江華島 守備體制의 强化」,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5, pp.4~8 참조).
46) 承政院日記 54책, 仁祖 14년 12월 庚寅(20일)
“下諭于江都檢察使金慶徵曰 賊兵屯圍十日 城中累發精砲 四面勦滅 所獲雖多
而尙無退兵之期 本島防備 不容少忽 下三道舟師 急徵集 一邊藏治戰船以待 且三江氷解
則事多可慮 凡事卿其與留守 相議善處 且諸道監兵使處 募死
「士」 事通諭 急急赴援事 已爲下諭 其能得達耶 在此孤城 日望援兵之至 星火傳諭 以救君父之急”.
한 가지 변수는 겨울 바다와 강의 結氷 여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벌어진 丙子年과 丁丑年의 겨울 추위는 매섭고 변화무쌍하여,47)
한강 이북 조선의 바다와 하천은 상당수가 얼어붙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면서
부분적으로만 뱃길이 열렸던 것 같다.48)
강화도 인근의 바다가 완전히 결빙되었거나 부분적으로 결빙되어 流氷이
청군 함선의 이동을 저지할 정도였다면,49)
청군이 水軍을 보유하였더라도 강화도 공격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최명길은 남한산성 농성 당시 강화도를 공략하겠다는 청측의 협박을 듣고도,
그들이 얼음 위로 배를 띄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인조에게 보고한 바 있다.50)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인 장신의 함대가 甲串津이 아닌
廣城津에 주둔하였던 이유도 결빙 여부와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51)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아마 적의 도하가 예상되는 강화도 인근 연안의
大小船은 강화도 피란이 완료된 직후 조선군에 의해 소각되거나 破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강화도 인근의 바다가 解氷되어
청군의 상륙 작전이 가능하더라도 다른 내륙 하천이나 포구가 結氷된 상태라면,
이곳으로부터 청군이 조선에서 획득하거나 제조한 배를
강화 인근의 해역까지 갖고 오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이 청군의 주력이 결집된 남한산성에 비해
강화도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것 같다.52)
그러나 청군은 京江 부근에서 조선 선박들을 징발하거나 목재를 끌어 모아
선박을 건조하여 童車라는 수레에 싣고 갑곶진까지 운반함으로써 조선군의 의표를 찔렀다.53)
청군이 강화도 공략을 위해 수레에 실릴 정도의 작은 小船인 三板船54)
을 택한 이유를 遠征의 제약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결빙으로 인한 水路 수송의 장애를 극복하고
운반의 용이성이란 측면을 고심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7) 承政院日記 54책, 仁祖 14년 12월 庚寅(20일); ꠓ仁祖實錄ꠗ 권33, 仁祖 14년 12월 甲午(24일).
48) 淸太宗實錄 권8 崇德 1년 12월 丁酉(27일)
“先是 天氣晴暖 臨津江兩岸氷泮 徒步亦不可行 至二十四日天雨
驟寒 上至臨津江 氷結堅甚 是日大軍俱安驅而渡”.
49)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1월 壬戌(22일)
“虜人聲言 分兵犯江都 時氷澌塞江 人皆以爲虛張 而徵諸路舟師 命留守張紳統之”.
50) 承政院日記 55책, 仁祖 15년 1월 丁巳(17일)
“鳴吉曰, 渠言修飾水上船, 將向江都云, 渠何敢氷上行舟乎”.
51) 趙翼, 浦渚集 권25, 雜著 「丙丁記事」 “聞甲串氷塞唯廣城津可通 往者皆由此”
52)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壬戌(22일)
“虜人聲言 分兵犯江都 時氷澌塞江 人皆以爲虛張”;
趙翼, 浦渚集 권25, 雜著 「丙丁記事」
“初五日 藁葬尹棨于島之北面懸鍾里 諸人皆以爲此後無可往處 須往江都
而適是時訛言大行 謂山城東門開 人得出入 余獨以爲江華是安地 不必往
宜下陸於水原 水邊之地 從間路出至東路入山城 而人無應之者 勢不可獨往
不得已亦爲入江都之計 而船隻難得 遲留數日”
53)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p.417 참조.
54)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1월 壬戌(22일)
“虜將九王 抄諸營兵號三萬 車載三板船數十 進屯甲串津”;
淸太宗은 인조에게 보낸 國書에서 청군이 小船 80척을 수레에 싣고 왔다고 기록하였다
(淸太宗實錄권33 崇德 2년 1월 甲子(24일)
“勅諭朝鮮國王李倧曰…本月十九日 我軍用車輪駕所造小船八十 陸地曳行 二十一日 至江華渡口”)
; 조익은 자신이 목격한 청군의 배를 隅盤과 같이 작다고 표현하였다
(趙翼, 浦渚集 권25, 雜著 「丙丁記事」
“至甲串岸上望之 則津東邊敵衆屯聚不甚多 嶺上有屯兵似多 小船如隅盤狀 其大亦僅過於隅盤”).
게다가 강화도는 물살이 세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板屋船의 기동 자체가 쉽지 않은 곳이었으므로,55)
청군의 이러한 선택은 최적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김경징이 육지로 배를 끌고 온 청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江氷尙堅 何能運船”云云하며 선뜻 믿지 못하였다는
丙子錄등의 기록은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56)
결정적으로 청군은 상륙 지점인 갑곶진의 맞은편 對岸에서 최신병기인 紅夷砲를 동원
하여 선제 포격을 가함으로써 조선 水軍과 陸軍의 戰意를 완전히 상실케 하였다.57)
홍이포는 당시까지 사용되던 중국이나 조선 대포에 비해
사정거리, 위력 및 銃身의 수명 등 모든 면에서 훨씬 월등하였다.
홍이포는 한 몸체로 주조된 청동이나 철로 만들었으며
砲身의 입구로 탄환을 집어 넣어 발사하였다. 최대 사정거리는 9km에 달했는데,
실전에서 유효한 사정거리는 약 2.8km 이내였다.
홍이포 등장 이전 가장 큰 위력을 가졌던
佛狼機의 유효 사정거리는 1km정도에 불과하였다.58)
이것이 忠淸水使 姜晋昕의 力戰에도 불구하고 청군의 상륙이 쉽게 이루어진 이유였다.59)
55) 光海君日記 권142, 光海君 11년 7월 甲申(3일)
“右議政趙挺啓曰…頃承嚴命 往來江都 保障一事晝而思夜而度 未嘗寢食忘于懷也 夫保障之先務
莫切於舟師 舟師料理之策 已有頭緖 其在外方 則體臣自當奉行 以備緩急之用矣 第以臣問諸武臣
之熟諳舟師者 皆以爲板屋戰用於大洋 而如江華之急流決難運動 若體小兵舡, 則可用禦賊也”.
56)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丁丑 正月二十一日 通津假守金廸 牒報于檢察使曰 敵方以童車載小船 向江都云
慶徵曰 江尙堅氷 何能運船 謂之亂軍情 方欲斬之 甲串把守長所報 亦如金廸 慶徵始爲驚動”.
57)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壬戌(22일)
“往取江華島…我軍至島 朝鮮有兵船四十餘 於渡口迎戰 我軍用紅衣砲攻擊 敵不能當 東西逃散”;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1월 壬戌(22일)
“虜將九王 抄諸營兵號三萬 車載三板船數十 進屯甲串津 連放紅夷砲 水陸軍劻勷不敢近”;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江都敗沒」
“賊兵屯聚津頭 方紅夷大砲 砲丸越江渡陸數理 聲震天地 莫不催爛
慶徵敏求恇怯失措 內避于倉舍之底 一軍擾亂 不成行列”;
趙翼, 浦渚集 권25, 雜著 「丙丁記事」
“出城一二里 聞炮聲震動 比至甲串 砲丸大如拳者相續飛來人皆喪氣”.
58) 시노다고이치著․신동기譯, 무기와 방어구-중국편, 들녘, 2001
(篠田慶一, ꠓ武器と防禦具 中國編, 1992), pp.289~293 참조.
59)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江都敗沒」“時張紳以舟師大將…姜晋昕率七船住甲串 與賊力戰 陷賊船
數隻 晋昕船亦被大砲所中 軍卒死者數十 晋昕身被賊矢 而所奪賊矢及他戰具亦多
晋昕所領船甚少 紳所領舟師甚多 見賊勢急 無意前進 晋昕擊鼓麾旗催督紳 紳終不進”.
물론 交戰조차 하지 않고 도망간 장신의 행위는 비난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장신이 도해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交戰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청군의 상륙을 저지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만갑의 丙子錄에는 청군의 홍이포 동원 사실이 明記되지 않았고,
강진흔의 분전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만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다.60)
반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경징, 장신의 도주 사실은 丙子錄에 매우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Ⅳ. 終戰 이후 江華島 함락 책임자의 처벌 논의
병자호란을 출성항복의 치욕으로 마무리한 조정은 무엇보다도 민심의 수습과 안정을 위해
敗戰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패전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바라보는 조정 내부의 시각은 일치하지 않았다.61)
司諫院, 司憲府를 중심으로한 言官들은 備邊司를 주도하며
전쟁을 지휘한 大臣․功臣들과 戰場에서 군대를 이끈 將帥들의 엄벌을 주장한데 비해,62)
인조와 비변사를 주도한 大臣․功臣 세력들은 무모한 斥和論으로 인하여
청의 도발이 야기되었으므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63)
따라서 처벌자의 선정과 처벌의 수위는
결국 패전의 책임을 해석하는 양쪽의 입장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구도 하에서는 어느 한쪽의 패전 책임을 강조하는 순간
다른 쪽의 책임은 경감될 수 있었기 때문에, 패전의 책임을 규명하는 데에는
전쟁 발발 이전의 主和․斥和 논쟁만큼이나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뒤따랐다.
병자호란이 조선의 일방적인 참패로 끝났기 때문에,
전후 처리의 우선 과제가 된 것은 패전한 장수와 군사들을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이었다.
60) 羅萬甲, 丙子錄, 「記江都事」
“姜晋昕率七船往甲串 與賊力戰 陷敵船數隻 晋昕船亦被大砲所中 軍卒死者數十 晋昕身被賊矢”.
61) 종전 이후 인조대 정국의 동향에 대해서는 吳洙彰,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 개정판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태학사, 2003, pp.142~145;
金容欽, 朝鮮後期 政治史 硏究Ⅰ-仁祖代 政治論의 分化와 變通論-, 혜안, 2006, pp.343~349;
許泰玖, 丙子胡亂의 정치․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pp.137~152 참조.
62)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辛巳(11일);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乙丑(26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6월 甲寅(17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癸酉(7일) 등.
63)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己丑(19일);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5월 壬午(15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10월 癸卯(9일) 등.
도망한 군사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일,64)
南漢山城에 군사를 이끌고 온 守令과 오지 않은 수령 등을 분간하여 색출하는 일,65)
남한산성 將士들의 戰功을 조사하여 資級을 올려주는 일,66) 남한산성 戰死者들의 포상과
그 가족들에 대한 賦役 등을 면제해 주는 일 등이 논의되었지만,67)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대두한 것은
병자호란의 패전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장수들에 대한 처벌과 그 수위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인조는 三田渡 降禮를 마치고 都城으로 돌아온 직후
남한산성의 농성 기간 동안 외부에서 머뭇거리면서 勤王兵을 보내지 않았거나,
각도에서 근왕병을 이끌고 도착했지만 구원에 실패한 장수들의 책임을 먼저 물었다.68)
西路都元帥 金自點, 諸道都元帥 沈器遠, 副元帥 尹璛, 江原監司 趙廷虎 등과
三南의 監司와 兵使를 잡아오도록 지시하였으며, 청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힌
副元帥 申景瑗도 決死 抗戰하지 않은 죄로 잡아와 심문하도록 하였다.69)
인조는 김자점, 심기원, 윤숙은 中道에 유배하고 신경원의 官爵을 削奪하도록 지시하였다.70)
그러나 兩司가 세 차례나 合啓하여 이들의 엄벌을 주장하자,
김자점은 絶島에 안치하고 신경원 등은 먼 곳으로 유배보냈다.71)
결국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내륙에서 벌어진 陸戰의 경우만 놓고 보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한 將帥는 없었다.
병자호란의 참담한 결과만 놓고 보면 다소 가벼운 처벌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전 청과의 전쟁자체가 근본적으로 무리였다는 인식이
조선 내에 적지 않았던 상황임을 고려해 보면,72)
김자점, 심기원 등의 유배가 전혀 터무니없는 조치라고 보기도 어렵다.
64)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庚戌(11일).
65)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庚寅(20일).
66)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丙戌(16일).
67)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10월 丁酉(3일).
68) 남한산성 농성 기간 중 諸道 勤王兵의 交戰 및 이동 상황에 대해서는
柳在城, 丙子胡亂史,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6, pp.188~218 참조.
69)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庚辰(10일).
70)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乙酉(15일).
71)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乙酉(15일).
72) 仁祖實錄 권28, 仁祖 11년 2월 癸酉(11일)
“初 回答使金大乾 將渡江 都元帥金時讓 副元帥鄭忠信等 私遣人留大乾於灣上 卽聯名上疏曰…
謀國之道 豈宜行此危計 目今西糧 不支二萬兵半年之食使虜聲言渝盟 欲來不來 待其師老 糧匱
而虜乃長驅 則未知何以應之 一國繹騷 農夫抛鋤 無食自潰之患 在所必至 雖使虜來就殲
國勢將不支矣 前日之箚 乃是有備無患之意 今日國書之言 只是挑怒速禍之擧 臣竊危之”;
仁祖實錄권28, 仁祖 11년 3월 癸巳(2일)
“執義朴潢啓曰 八路興兵 朝夕待變此誠存亡之秋 而廟堂之上 未聞有定算 臣竊憫焉
在我無自强之勢 而輕與賊絶和 臣實未知其計之爲得”;
仁祖實錄 권32, 仁祖 14년 3월 乙丑(20일)
“敎書曰…噫 丁卯之變 羈縻之計 蓋出於不得已也 十年之間 恐喝日甚
今乃以不忍聞之說 託以通議而嘗我 我不計强弱 據義斥絶 兵革之禍 迫在朝夕”;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0월 丁丑(6일)
“玉堂以兩司不能力爭 感動天聽 而循例引避 墜落體面 盡皆駁遞 仍上箚曰…壬辰之役
微天朝則不能復國 至今君臣上下 相保而不爲魚者 其誰之力也
今雖不幸而大禍迫至 猶當有殞而無二也 不然 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 등.
한편, 병자호란의 참패가 청과의 和親을 거부한 척화론 때문에
초래되었다는 인식을 가진 大臣들은 척화론자들에 대한 처벌을 주도하였다.
이미 洪翼漢, 尹集, 吳達濟의 三學士는 청으로 압송된 후였으므로,
나머지 척화론자인 尹煌 등의 처벌이 논의되었다.
이들의 처벌은 영의정 金鎏, 좌의정 洪瑞鳳, 우의정 李聖求, 병조판서 申景禛,
공조판서 具宏, 이조판서 崔鳴吉, 호조판서 李景稷 등의
건의를 받아 인조가 최종 결정한 것이었다.73)
이에 따라 尹煌, 兪榥, 洪瑑, 兪棨는 유배당하였고,
李一相은 絶島에 定配되었으며, 趙絅, 金壽翼, 申恦은 門外黜送되었다.
이들에게는 나라를 그르친 자[誤國人]와
계차의 언어가 부적절한 자[啓箚中言語不中者]라는 두루뭉실한 罪名이 부과되었지만,
이 조치는 사실상 척화론을 주장한 자들을 처벌한 것이었다.
兩司를 중심으로 한 조정의 여론은 이러한 조치에 격렬히 반발하였다.
言官들은 패전의 책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조나 대신들과는 크게 달랐다.
이들은 패전의 책임이 척화론자들에게 있다기보다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 않은
將帥와 이를 軍律에 따라 처단하지 않은 조정에 있다고 주장하였다.74)
兩司의 논의는 전쟁의 敗因이 궁극적으로 전쟁을 총지휘한
비변사의 大臣들에게 있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병자호란 이전 정치적 實勢로서 軍權을 장악하고 있었던
김류는 패전한 장수들과 함께 더욱 집중적 공격을 받았다.75)
김류를 포함한 비변사 대신들에 대한 비난은
다음 사료에서 보이는 것처럼 윤황을 필두로 한
척화론자들에 대한 赦免의 논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었다.
鄭致和가 아뢰기를, “윤황 등이 망녕된 말을 한 잘못이 없지는 않으나 그 마음은
다른 단서가 없었는데, 이 때문에 竄黜시키기까지 하니 人情이 慨歎을 금치 못합니다.
臣이 갑작스레 停啓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어떤 臺諫을 보고 말하였으나
끝내 따라주지 않고 마침내 정계하였으니, 신은 삼가 한스럽게 여깁니다”라고 하고,
尹絳이 아뢰기를, “치화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어찌 유독 이들의 소행 때문이라고만 하겠습니까.
모두가 廟堂의 책임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76)
73)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己丑(19일).
74)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6월 甲寅(17일)
“諫院啓曰…今日國家之一敗塗地 皆由於將帥之逗遛 軍法之不行而然也 孤城被圍之日
諸受脤者 無一赴難 而尙保首領 晏然在職 日後警急 誰能爲國家忘身奮義 以赴君父之急乎”;
패전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물론 승리하지 못하거나 전투를 회피한
武將들에게 책임을 묻는 조치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전쟁 발발 이전에 현격한 戰力差로 인하여 승리의 가능성을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정황을 조선의 君臣이 대부분 정확하게 인지하였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들의 주장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許泰玖,
丙子胡亂의 정치․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pp.67~83 참조).
75) 吳洙彰,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 개정판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태학사, 2003, pp.144~146.
76)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乙丑(26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강화도 함락의 책임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논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인조는 강화도의 함락 원인에 지휘관의 과실뿐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측면도 있었다는 점을 반복하여 말하였지만,77)
朝野의 公憤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강화도 失陷으로 인하여
元孫과 世子嬪, 鳳林大君과 麟坪大君을 비롯한 많은 王族과 士大夫,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淸軍에게 생포되거나 죽임을 당하였고 또는 自盡의 길을 선택해야만 하였다.78)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財物 역시 청군에 의해 노획당하였다.79)
人命의 死傷이나 재산상의 손실뿐만 아니라,
상징적 또는 정신적 차원의 피해 역시 막대하였다.
청군이 開城을 통과했다는 急報가 전해지자마자 조선의 조정이 강화도 播遷을 결정하면서
가장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세자빈과 세손을 비롯한 왕실 가족의 호위와
宗廟와 社稷의 신주를 운반하는 것이었다.80) 조선시대에 종묘와 사직의 有無는
왕실과 국가의 存亡에 비유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데,81)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宗廟와 社稷의 神主가 청군에 의해 훼손된 사실은
조선의 君臣들에게 왕실 및 사대부 가족의 생포 못지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82)
太祖의 影幀이 분실되고, 世祖의 영정이 훼손된 것도 인조에게는 가슴 아픈 일인 한편,83)
궁극적으로 자신의 막중한 정치적 책임으로 귀결되는 사안이었다.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實錄과 時政記도 일부만 남고 흩어져 버렸다.84)
따라서 이러한 충격적인 결과를 초래한 강화도 함락의 책임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일은
병자호란 전후 처리 과정의 핵심적인 사안 중 하나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檢察使가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이라는 점에서,
책임자 처벌의 논의는 김류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도 밀접하게 연동되어 진행되었다.
77) 承政院日記 55책, 仁祖 15년 1월 己巳(29일);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辛卯(21일).
78)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江都敗沒」,「江都殉節人」, 「殉節婦人」 참조.
79)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己丑(25일) “和碩睿親王多爾袞
遣羅碩胡球來奏云 所獲江華島城內 緞疋小珠東珠金銀玉珊瑚貂皮猞狸猻皮等物 甚多”.
80)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2월 甲申(4일).
81) 中宗實錄 권76, 中宗 28년 9월 壬子(13일)
“琦曰 罪大惡極 萬世不可赦 且所謂功臣 終始一節 與國同休戚也 子光則雖有一時之功
終亂朝廷 斲喪國脈 使宗社幾於傾覆 當置重典 而不加顯戮 已酬其功矣”.
82)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庚申(21일)
“上又曰 曾在山城 予以爲宗廟子孫盡在江都 若江都保存
則山城雖陷 廟社有托 豈意人謀不臧 天塹失險 自此益無可奈何 忍爲不忍之事 尙何言哉”.
83)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乙酉(15일)
“江都之陷也 失太祖影幀 而世祖影幀 則得於城外 微有裂破處 上聞之泣曰
因予失德 不能保安 祖先影幀見失 廟主猶可更造 而影幀則又何從模寫 予甚痛之”.
84)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丁酉(27일).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사안은 척화론자의 사면과도 연관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兩司를 중심으로 한 言官들은 강화도 함락과 관련된 책임자의 엄벌을
종전 이후부터 줄기차게 인조에게 요구하였다.
1637년(인조 15) 2월 10일 서로도원수 김자점, 제도도원수 심기원 등을 잡아다
推問하라는 왕의 下敎가 있자, 兩司는 다음날부터 강화도 수비에 실패한
檢察使 金慶徵, 檢察副使 李敏求, 江都留守 張紳, 京畿水使 申景珍,
忠淸水使 姜晋昕에 대한 처벌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85)
인조는 김경징과 장신을 서쪽 변방에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지만,86)
兩司를 중심으로 한 조정의 여론은 쉽게 진정되지 않아 이들의 伏誅를 거듭 주장하였다.87)
아울러 동시에 윤황 등의 사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88)
弘文館 校理 尹絳과 修撰 李尙馨 등은
다시 한 번 강화도 함락 책임자의 엄벌을 주장하면서
대사헌 韓汝稷과 대사헌 金壽賢이 겉으로는 김경징 등의 처벌을 주장하지만,
안으로는 禍福을 두려워하여 權勢에 빌붙고 있다고 비난하였다.89)
발언의 요지는 함락 책임자의 배경 때문에 엄벌이 지연되고 있음을 비난한 것이었는데,
종전 이후에도 김경징의 아버지 김류는 영의정으로,
이민구의 형 李聖求는 우의정으로 건재한 상태였다.90)
남한산성에서 비변사 堂上으로 인조를 호종한 장신의 형 장유만이,
어머니의 喪中이라 出仕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논란의 와중에
1637년(인조 15) 3월 21일 張紳의 自盡을 명하는 인조의 下敎가 내려 왔다.91)
그러나 장신이 斬刑이 아닌 自盡이라는 형식으로 처벌되었고,92)
죽음에 임한 순간 선고문에 해당하는 結案에 不服하였으며,93)
刑場이 아닌 亡兄의 집에서 自盡한 사실94)
때문에 그의 死後에도 많은 논란을 빚었다. 심지어 그의 형 장유는
장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헛소문에 대하여 인조에게 해명을 해야만 하였다.95)
장신의 자결에도 불구하고 兩司를 중심으로 한 조정의 여론은 진정되지 않았고,
言官들은 김경징, 이민구, 尹昉, 김류 등
강화도 함락 관련자의 엄벌을 줄기차게 인조에게 건의하였다.96)
85)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辛巳(11일).
86)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庚寅(20일).
87)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辛卯(21일).
88)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壬辰(22일).
89)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癸卯(4일).
90)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己未(20일).
91)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庚申(21일)
“以張紳行刑單子下敎曰 言念前功 不忍斬殺 使之自盡”;
承政院日記에는 장신의 自盡을 명하는 내용의 기사가 3월 19일자로 기록되어 있다.
92)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윤4월 丁卯(29일).
93)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4월 己未(12일).
94)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5월 戊寅(11일).
95)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5월 辛巳(14일).
96)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4월 壬申(3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6월 辛丑(4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6월 壬寅(5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庚午(4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癸酉(7일) 등;
이때 언관들은 서로도원수를 맡았던 김자점의 처벌도 강력히 요구하였다.
윤방은 강화도 피난 당시 廟社提調의 직임을 맡았던 原任大臣으로서,
종묘의 神主를 훼손당하고 인조의 出城 이전에 敵陣을 출입했다는 이유로
言官의 탄핵을 받았다.97)
검찰사인 김경징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는 것도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98)
영의정 김류는 부적격자인 아들 김경징을
강화도 검찰사라는 중임에 부임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는데,99)
이것은 다음 兪伯曾의 상소에서 보이는 것처럼 병자호란 敗戰의 궁극적 책임이
척화론이 아닌 비변사를 주도한 김류에게 있다는 주장과 연관된 것이었다.
杞平君 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지난해 가을·겨울 이전에는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논의가 매우 준열하여
‘淸國이라 쓰지 말아야 하고 信使를 보내서는 안 된다’라고까지 말하다가, 전하께서 특별히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분부를 내리신 이후로 和親하는
의논에 붙어 尹集 등을 묶어 보내고 尹煌 등의 죄를 논하도록 김류가 실로 주장하였습니다.
자신이 將相을 도맡아 마침내 임금이 城을 나가게 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논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화친을 배척한 사람이 權經을 모르고
事勢를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멀리 헤아리는 생각이 없었다 하겠으나, 洪翼漢·吳達濟 등이
굽히지 않고 죽어서 큰 절개가 澟然하니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여러 사람들에 있어서는 비록 그들의 말을
따르지는 못하였지만 어찌 그 氣를 꺾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기를 꺾어서도 안 되는데 어찌 그 몸을 귀양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中朝에서 들으면 어찌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겠으며,
淸人이 들으면 어찌 우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그들을 석방하여 돌려보내소서.
지금 節義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名分이 다 무너지고, 是非가 顚倒되고, 公論이 막히고,
萬事가 와해되어 나라를 세울 희망이 아주 없습니다.
말할 만한 것은 많습니다마는, 오늘날 급히 힘쓸 일은 信賞必罰입니다.100)
인조는 이러한 議論들에 대하여 元勳인 김류의 하나뿐인 아들인
김경징을 사형시켜 後嗣를 끊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101)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전도 김류 과실 때문이 아니며,
강화도 함락 전후 윤방의 행위도 대간이 탄핵한 것과는 실상이 다르다고 언급하였다.102)
그러나 유백증의 상소 이후, 김류와 김경징을 옹호하던 인조는
태도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1637년(인조 15) 7월 兩司가 다시 김자점, 김경징 등의 엄벌을 주장하는 合啓를 올리자,
인조는 김경징만 다시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줄 것을 명하였다.103)
97)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4월 壬申(3일).
98)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癸酉(7일).
99)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9월 丙戌(21일).
100)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6월 戊午(21일).
101)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6월 壬寅(5일).
102)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壬寅(8일).
103)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庚午(4일).
반면, 김자점은 김경징에 비해 靖社의 큰 공이 있으니, 사형을 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서 김류를 영의정에서 파직하고, 官爵을 삭탈하였다.104)
우의정 이성구와 領敦寧府事 윤방도 파직시켰다.105)
김경징의 賜死는 김류가 조정에서 물러난 직후인
1637년(인조 15) 9월 21일에 시행되었는데,106)
동시에 忠淸水使 姜晋昕과 公淸虞候 邊以惕도 水戰 회피의 책임을 물어 斬刑에 처했다.
Ⅴ. 金慶徵 賜死의 맥락
Ⅳ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강화도 함락 책임자의 처벌은 최종적으로
장유, 김경징, 강진흔, 변이척 등이 사형당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강화도 패전의 책임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만 김자점, 심기원 등의 다른 敗將들에 비하면
이들이 매우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두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강화도 함락의 불가항력적 측면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反正功臣인 장신과 김경징에 대해 인간적 동정을 표했던 인조가
끝내 이들의 사형을 裁可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두 번째, 江都留守 兼舟師大將 장신과 江都檢察使 김경징의 사형이
여섯 달의 시차를 두고 시행된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의 逆順으로 해답을 고찰해 보겠다.
김류와 김경징이 각각 1등, 2등 功臣으로서 인조반정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과
종전 후에도 영의정으로 건재하였던 김류의 영향력은 김경징의 사형이
장신보다 늦게 결정되는데, 일정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107)
그러나 김경징이 장신보다 6개월이나 늦게 사형이 집행된 것은,
그가 맡았던 檢察使라는 직책 자체가 관할지역의 軍政과 行政을 총괄하지만 직접적인
군사 작전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부여받지 않았던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04)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8월 己亥(4일).
105)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癸酉(7일); 仁祖實錄 권35, 인조 15년 9월 戊辰(3일).
106)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9월 丙戌(21일).
107) 仁祖實錄 권3, 仁祖 1년 윤10월 甲辰(18일);
그러나 김경징에 앞서 자진을 명 받은 장신 역시 반정 2등 功臣인 장유의 동생이자
그 자신도 반정 3등 공신이었다. 장유와 장신은 훈련대장 李興立을 회유하여
반정에 내응하게 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흥립은 장신의 장인이었다.
(仁祖實錄 권1, 仁祖 1년 3월 癸卯(13일); 仁祖實錄 권1, 仁祖 1년 3월 乙卯(25일)).
장유는 김상용의 사위였다. 후일 효종비가 되는 仁宣王后는 장유의 딸이다.
검찰사는 經國大典에 기재되지 않은 임시 관직으로 구체적으로 어떠한 임무를
담당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주로 관할 지역의 軍政과 民政의 총괄과 軍備 마련,108)
민심 수습,109) 군량 수송110)등의 임무가 부여되었던 것 같다.
검찰사에는 文臣이 임명되었는데,111)
그 임무로 미루어 보건대 관리 능력이 뛰어나거나
인망이 두터운 자들로 선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선에서 병력을 지휘하여
전투를 치룰 수 있을 정도로 將材가 뛰어난 자가 검
찰사에 임명된 경우는 김자점, 심기원의 사례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刑曹佐郞, 弘文館 正言, 工曹參判, 禮曹參判, 京畿監司,
大司諫, 都承旨, 漢城判尹을 역임한 김경징의 前職도 검찰사의 임무가 실질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것과는 관계가 멀었음을 방증한다.112)
병자호란 당시 강도검찰사 김경징과 검찰부사 이민구에게 부여된 주요 임무는
다름 아닌 世子賓(元孫 포함)의 행차를 호위하는 것이었다.113)
김경징의 검찰사 부임 일자가 병자호란 발발 직후인
1636년(인조 14) 12월 14일이라는 사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김경징이 강화도
방어를 위한 군사 작전의 專權을 부여받아 행사하기에는 너무나 촉박한 준비 기간이었다.
장신이 舟師大將에 임명된 시기도 전쟁 직후였지만,114)
그는 이미 전쟁 발발 9개월 이전에 江華留守로 부임한 상태였다.115)
더욱이 장신은 반정 이후부터 武才가 있는 인물로 평가받아116)
楊州牧使, 黃海監司, 水原府使, 平安監司 등의 邊守를 역임하면서
黃州城 修築, 병력 양성, 군량 확보 등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 업무에도 수년 간 종사하였다.117)
108) 備邊司謄錄 2冊 光海君 10년 6월 1일
“啓曰 備忘記 虜勢日熾 徵兵亦急 今日國事 比壬辰尤爲危急…其前備局諸卿逐日齊會
多般料理邊事 至於保障之所 以江都議定 則檢察使巡檢使中一員差出下送 移粟修繕等事
速爲議處之意 言于備邊司事傳敎矣…江都料理之事 豈非今日之重且大者乎 依聖敎檢察使一員
以秩高宰臣差出 而群議以爲必稱兩湖黃延京畿等四道都檢察使 凡係水路應行事宜 通行節制然後
體面重而事可易集云 依此議急急差出 數日內發送宜當 敢啓”.
109) 仁祖實錄 권4, 仁祖 2년 2월 壬辰(8일) “備邊司請 以宰臣爲檢察使 往三南 措置行幸供頓之事
仍令曉諭士民 毋使驚擾 鄭經世往嶺南 沈器遠往湖南 金尙容往湖西 李顯英亦檢察京畿”.
110) 宣祖實錄 권48, 宣祖 27년 2월 乙亥(26일) “司諫院啓曰 當初
急於糧餉輸轉 關西設分戶曹 堂上郞廳及檢察使 專掌軍糧之事 一路各邑 又置督運官”.
111) 선조대~인조대까지 검찰사에 임명된 李陽元, 朴忠侃, 李山甫, 柳根, 沈惇, 金尙容, 鄭經世,
李顯英, 李時發, 심기원, 김자점 등은 모두 문신이었다. 임명 기록은 朝鮮王朝實錄과 備邊司謄錄에서
확인하였다. 이들 중 박충간(蔭補), 김자점(蔭補), 심기원(特旨)을 제외한 자들은 모두 文科 출신이었다.
112) 김경징의 이력은 仁祖實錄을 통해 확인하였다.
113)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2월 甲申(14일)
“開城留守馳啓 賊兵已過松都 於是 遂定去邠之議命禮房承旨韓興一
奉廟社主及嬪宮 先向江都 以金慶徵爲檢察使 李敏求爲副 令陪護嬪宮之行”.
114)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江都敗沒」 “十二月十四日…以留守張紳 兼舟師大將 令整船以待”.
115) 仁祖實錄 권32, 仁祖 14년 3월 甲寅(9일).
116)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2월 乙未(25일)
“李曙入侍…上曰 善 且卿每稱張紳 其才如何 對曰 雖無寬洪器度 亦是的當底人也”.
117) 장신의 이력은 仁祖實錄을 통해 확인하였다.
정묘호란에는 직접 병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三田渡에서 주둔하면서 淸軍의 진격에 대비한 경험도 있었다.118)
Ⅲ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강화도 방어의 중심이 陸戰이 아닌 水戰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아울러 김경징과 장신의 이력을 비교해 보면,
조정이 강화도 방어를 위한 군사작전의 궁극적인 권한과 책임을 누구에게 부여했는지
더욱 자명해질 것이다. 다음 기사는 이러한 심증을 더욱 굳게 한다.
(김)상헌이 아뢰기를, “江都留守 張紳이 그의 兄에게 글을 보내기를
‘本府의 防備를 倍加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새로이 들어간 검찰사가 節制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게 무슨 말인가! 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傳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119)
위의 기사에서 보이듯이 新入 검찰사 김경징과 久任 강화유수 장신 사이에는
강화도 방어책을 놓고 모종의 알력이 있었던 듯한데, 인조는 下敎를 내려
강화도 방어를 위한 군사작전의 최종 권한이 장신에게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포위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농성초기에는
강화도에서 발송된 狀啓의 수령이 가능하였으므로,120)
인조의 전령도 강화도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전 이후 김경징을 공격한
言官들의 발언에서 검찰사의 주요 임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大司憲 韓汝溭, 大司諫金壽, 執義蔡裕後가 箚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김경징 등에게 사형을 감하여 조율하라는 분부를 들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무슨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다고 그들의 사형을 용서하십니까.
혹시 이 사람들의 죄상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죽일 만한 죄가 있는데도 죽이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김경징은 비록 그의 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禦敵]과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종묘사직의 神主와 嬪宮·元孫이 모두 兵禍 중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털끝만큼도 돌보며 염려하는 뜻이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니,
원손이 다행스럽게 모면한 것은 하늘이 실로 도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경징의 죄는
여러 장수들이 軍律에 저촉된 것과 비교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그리고 李敏求가 도망한 것 역시 김경징과 원래 차이가 없습니다.
張紳의 경우는 江都留守로서 자신이 舟師를 총괄하고 있으면서도
천연의 요새를 잘 수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보병 수십 명이 두 개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도
방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면서 남보다 뒤떨어질까만 염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국가로 하여금 부득이한 조처를 취하게 하였는가 하면,
사대부와 백성과 부녀자들이 베임을 당해 죽고 넘어져 죽고
줄지어 포로로 잡혀가게 하였으며, 10년 동안 국가가 저축한 것을 하루아침에 다
없어지게 하여 장차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죄입니까!…”121)
118) 仁祖實錄 권15, 仁祖 5년 2월 戊午(21일) “上曰 姑宜率來, 觀其辭色 上謂承旨李明漢曰
爾旣擲奸江灘 其形勢如何 明漢曰 制此賊 莫如火砲 而柳琳手下火手甚少 李言惕所管
則比柳琳之軍頗勝張紳所屯三田渡 最爲要衝之地 近緣雨水 淺灘頗深”.
119)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2월 庚子(30일).
120)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2월 庚子(30일) “江都書吏韓汝宗 持狀啓入來”;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1월 甲辰(4일) “黃海道觀察使李培元 江都檢察使金慶徵等狀啓入來”.
121)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2월 辛卯(21일).
위의 기사에서 보이듯이, 言官들은 강화도 방어의 군사적 책임이
김경징이 아닌 장신에게 있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경징의 罪目이 세자빈과 원손의 방기와 도주에 있으며,
이러한 過誤가 강도유수로서 강화도 방어에 실패한 장신의 죄목에 못지않다고 주장하였다.
후일 顯宗實錄에 기록된 이민구의 卒記를 보아도
검찰사는 전쟁하는 장수[戰將]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목하고 있다.122)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김경징이 아버지 김류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賜死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강화도 방어의 실패라는
군사적인 측면의 과실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여러 가지 주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화도 방어의 직접적인 책임은 장신쪽이 훨씬 더 컸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따라서 장신의 사형이 김경징보다 먼저 집행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
그러나 장신의 사형 역시, 다른 敗將들과 비교해 보면 형평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123)
Ⅲ장에서 고찰하였듯이, 강화도의 함락이 將帥 개인의 능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兩國 간의 현격한 戰力差에서 초래된 것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장신의 사형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장신의 사형 이유에 대하여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김경징의 사형과 관련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즉, 김경징의 검찰사 임무가 강화도 방어와 직접적 연관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끝내 사형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의문이다.
122) 顯宗實錄 권18, 顯宗 11년 2월 丁丑(19일)
“前副提學李敏求卒…及江都淪陷 朝廷討其前後之罪 與紳竝賜死
檢察初非戰將 則敏求無慶徵之罪 論罪豈可同科 而臺啓積累月不已 其亦太刻矣”.
123) 仁祖實錄 권36, 仁祖 16년 5월 丁卯(5일)
“憲府上箚曰…上年諸帥臣之罪 國人皆言其可殺 而上下循私 經歲依違 終使忘君負國之輩 得保首領
或移內地 或加敍復 江都之罪死者四人 而元帥諸臣 無一人服法者 無論輿憤之共, 而金慶徵張紳之鬼
亦且竊議於泉下矣 刑者天刑 不可以私 殿下新經大亂 不與國人同其誅罰 此又人心不服之一事也”
; 병자호란 이후 流配되었던 김자점, 심기원 등은 수년 후에
모두 赦免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조정에 출사하여 요직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仁祖實錄 권39, 仁祖 17년 9월 己未(5일);
仁祖實錄 권40, 인조 18년 2월 癸丑(2일)
“以金自點沈器遠爲扈衛大將 舊帶軍官 使之復屬”);
병자호란 이후 실추된 인조의 정치적 권위와 불안한 정정, 점증되는 일본의 군사적 위협,
여전히 상존한 청의 압박 등은 패전한 장수들의 빠른 解配와 복직을 초래하였던 것 같다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pp. 185~193 및 許泰玖,
丙子胡亂의 정치․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pp.149~152 참조).
우선, 강화도 함락으로 인해
많은 士大夫와 그 가족들이 실질적 피해를 입은 정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자점, 심기원을 비롯한 各道 兵使, 監司의 패전은 물론 참담한 것이었지만
士論의 배경이 되는 士族 일반에게 강화도의 함락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화도 함락으로 많은 사대부와 가족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생포된 사실은
士族 일반의 公憤을 사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김경징의 처벌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병자호란의 패전 책임을 둘러싼
아버지 김류의 입지와도 연관이 깊었으므로, 첨예한 정치적 현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김류의 실각은
아들 김경징에 대한 공격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은데,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요인은 무엇이었나 생각해보자. 필자는 앞서 김경징 賜死의
결정적 이유가 강화도 방어 작전의 실패로만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논증하였는데,
과연 그렇다면 그가 처형될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도 역시 김경징의 검찰사 임무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김경징이 言官들로부터 집요하게 공격받았고
끝내 인조가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강화도 방어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검찰사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인 世子嬪, 元孫, 大君 등의 보호를 방기하고
홀로 도망쳐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치명적인 사실은 그가 자신의 老母(김류의 부인)를 비롯하여
아내, 외아들, 며느리까지 버려 둔 채 홀로 도주했다는 점이다.
남겨진 김경징의 老母와 아내, 며느리가 敵陣에서 자살하였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당시의 士論에 더욱 용납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성리학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義理라고 할 수 있는
忠과 孝를 동시에 정면으로 위반하였던 것이다.
종전 후 그의 처벌을 주장한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격렬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校理 尹絳, 修撰 李尙馨 등이 箚子를 올리기를,
“형벌과 포상이 걸맞지 않으면 비록 평상시라도 국가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어수선한 시기를 만나 어찌 사사로운 情을 따르고 법도를 폐지하겠습니까.
김경징은 김류의 아들이며, 장신은 장유의 아우이며, 이민구는 이성구의 아우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비록 용서해 주고 싶지만 종묘 사직의 진노와
臣民의 憤怨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적병 수십 명이 작은 배로 강을 건너오자 화살 하나 쏘아보지 않고
먼저 도망하여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 사직을 하루 아침에 몰락되게 하고
세자빈과 대군을 모두 싸움터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남녀 노소를 죄다 도륙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김경징과 장신은 그들의 老母를 적진에 버리고 달아나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이민구는 가장 먼저 도망하여 처자식을 구해내려고 하였으니,
차마 이런 짓을 하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비록 그들의 父兄이라도 당연히 大義에 의거하여 인연을 끊을 것입니다.124)
세자빈, 원손, 대군, 老母를 방기한 것은 장신도 마찬가지였다.
장유는 동생 장신이 버린 어머니를 三田渡 降禮 도중 수소문하기도 하였는데,125)
이후 屍身만 가까스로 수습하였던 것 같다.126)
섬 밖에 생존해 있는 아버지 尹煌을 위해, 순절한 부인과 어린 자식 尹拯을 두고
강화도를 탈출한 尹宣擧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이후 出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일 그의 행적이 큰 논란이 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127)
강화도 방어 실패 이후 김경징과 장신의 保身的 태도는
당시의 정서상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행위였음에 틀림없다.
윤방이 宗廟의 神主를 훼손하고 인조의 出城 전에 敵陣을 출입하였다는 臺論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던 데에 비해,128)
김경징이나 장신의 반박 또는 해명을
당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Ⅵ.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나만갑의 병자록 기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실상을 재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를 통해 종전 이후 강화도 함락 책임자의 처벌이
어떠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도 살펴보았다.
본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병자호란, 특히 강화도 함락과 관련하여 주요 사료로 활용되어 온
나만갑의 병자록은 김경징과 장신 등 당시 지휘관들의 무능과 비겁 등을 부각시켜
강화도 함락이 이들의 과실로 인해 어이없이 초래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종전 이후 시행된 장신과 김경징의 처형은
병자록의 관련 내용을 더욱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자록이나 연려실기술, 그리고 이에 기반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도
여전히 해명할 수 없었던 의문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24)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3월 癸卯(4일).
125)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1월 庚午(30일)
“洪瑞鳳張維入伏於庭 請得尋見老母【其母入江都故也】金石乙屎怒叱之”.
126)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7월 己卯(13일)
“右議政張維上疏 乞終喪制曰…臣積惡在身 得罪神理 使八十老母 不得終於正命
而生不得親啓手足 沒不得早收體骸 世之遭親喪者何限 然其至痛窮毒 孰有如臣者哉”.
127)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의 행적과 이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李銀順, 「尹拯의 江都受難의 해석」, 朝鮮後期黨爭史硏究 一潮閣, 1988, pp.39~47 참조.
128) 仁祖實錄 권34, 仁祖 15년 윤4월 辛亥(13일); 仁祖實錄 권35, 仁祖 15년 12월 丙申(2일) 등.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의 방어 태세는 정말 그렇게 허술하였나?
강화도의 함락은 김경징과 장신의 과실이 주 원인이었나?
과연, 이들 지휘관의 과실만 없었다면 강화도는 충분히 방어될 수 있었나?
인조의 비호와 아버지 김류와 형인 장신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에 패전한 다른 지휘관과는 달리 왜 이들은 끝내 極刑을 당하고 말았는가?
종전 이후 방어 실패의 책임을 진
김경징과 장신의 자결은 왜 6개월의 시차를 두고 시행되었나?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새로이 究明하였다.
강도검찰사 김경징의 아버지 김류와 정치적 갈등 관계에 있던 나만갑은
병자록의 강화도 함락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강도검찰사 김경징, 강도검찰부사 이민구, 강도유수겸주사대장 장신 등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김경징의 비겁하고 무능한 행태를 부각시켰으나,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상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일례로 강화도에 피난해 갔던 조익은
김경징 등의 인품과 행적을 상당히 다르게 묘사한 기록을 「丙丁記事」에 남겼다.
병자호란 이전부터 조선은 청군의 상륙 시도를 예상하고
강화도 방어 작전의 핵심 개념을 陸戰이 아닌 水戰에 두고서 많은 戰力을 水軍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조선측 육군 병력의 압도적 열세,
하천과 바다의 結氷이라는 장애를 돌파한 청군의 기발한 작전,
紅夷砲 확보를 통한 청군 火力의 우세 등은
강화도를 방어하던 조선 수군과 육군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이처럼 강화도의 함락은 지휘관의 역량 여부와 상관없이 초래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김자점, 심기원 등의 다른 敗將들과 비교해볼 때
김경징, 장신 등의 自決 처분은 매우 異例적이고 가혹했다고 판단된다.
강화도 함락의 책임자 처벌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얻은 성과 중의 하나는
당시 검찰사의 직책이 군사 작전의 직접적이고
중심적인 수행과는 거리가 먼 임무였다는 점이다.
청군의 상륙 당시 강도검찰사 김경징은 소수의 육군 병력을 지휘하면서
여러 가지 판단 착오와 실책을 저질렀지만, 軍務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은
당시의 다양한 사료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강화유수겸주사대장 장신의 몫이었다.
따라서 장신이 김경징보다 6개월 빨리 처벌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장신의 처형 후에도 臺諫을 중심으로 한 朝野의 여론은
김경징의 처벌을 집요하게 주장하였다.
그 배경에는 강화도 함락으로 인한 사대부 가족들의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피해와
이로 인한 엄청난 公憤의 축적이 있었으며, 아울러 종전 이후 敗戰의 책임을 둘러싼
김류등의 主和派 大臣과 이를 공격하는 斥和派 言官 등 간의 갈등이 내재하고 있었다.
아들 김경징에 대한 공격은 아버지 김류의 전쟁 책임 및 정치적 입지와도
긴밀하게 연동되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김경징이 강화도 방어 작전의
핵심적 수행이란 임무와는 거리가 다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함락 이후 그가 보인 保身的 태도와 행적 때문이었다.
世子嬪과 元孫, 大君, 老母 등을 남겨두고 홀로 도주한 행위는
검찰사의 임무와 책임뿐만 아니라 父母에 대한 義理마저 저버린 敗逆한 행위였다.
장신도 嬪宮과 元孫, 大君, 老母를 버리고 도주하여
홀로 살아 남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서상 용납되기 어려웠다.
요컨대 김경징과 장신의 처벌은 군사적인 측면의 책임보다
도덕적․의리적 측면의 책임을 물어 시행된 것이라 결론내릴 수 있다.
투고일 : 2011. 9. 30.
심사개시일 : 2011. 10. 7.
심사완료일 : 2011. 10. 24. 震檀學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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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泰玖, 「병자호란 講和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 52, 2010.
Reasons of the Fall of the Gang'hwa-do/江華島
Defense, during the Battle with the Qing Forces that
Broke out in the Byeongja-year(丙子胡亂), and
Punishments of the Officials Who were in Charge
- Reexamination of the Idea that Kim Gyeong-jing/金慶徵 was
Responsible for the Defeat -
Huh, Tae-koo
Critically examined in this article is Na Man-gab/羅萬甲's Byeongja-rok/丙子錄
(The Byeongja-year Journals), which have been consulted for many years as a crucial text
that recorded the real reasons for the fall of the Gang'hwa-do defense line. Although this
text has been consulted as an academic resource, it actually has some problems to be
considered as an impartial and objective source of information. Keeping that in mind, this
author tried to find out from various perspectives the reasons that forced the Joseon
government to suffer a catastrophic defeat, and results of such analysis suggests that the
Gang'hwa-do defense posture was breached and neutralized not because the leading
commanding officer was incompetent but because the Joseon military capabilities were far
behind those of the Qing/淸 forces. This discovery also suggests that the Joseon
government's discussions after the war that led to placing political blames on certain
commanders and also to punishing people who were deemed responsible, was not a
process that was solely based upon objective wartime performance evaluations.
When the Qing forces arrived at the island, the commanding officer(“Gangdo
Geomchal-sa, 江都檢察使," Inspector and patrol officer of the Gang'hwa-do island) Kim
Gyeong-jing/金慶徵, while only commanding a small infantry unit, displayed many errors
in judgment and other than that also committed a variety of mistakes. So he was found
guilty for not doing his job competently in a time of war. Yet the ultimate responsibility
for defending the island, and overseeing all military matters related to that task, was at
the time placed on the shoulders of an officer named Jang Shin/張紳, who was serving
as the Gang'hwa-do prefect and commanding officer of the Naval troops(“江華留守兼舟師
大將"), as indicated in many historical texts. It was in fact Jang Shin, and not Kim
Gyeong-jing, that had to receive the ultimate blame. Yet, even after Jang Shin was
executed, people demanded that Kim Gyeong-jing be executed as well. There was an
ongoing conflict between high ranking officials who supported the idea of calling a truce
(主和派, led by Kim Ryu/金瑬) and the Remonstrations officers who blamed them for
that idea(斥和派), inside the Joseon government at the time. The attacks upon Kim
Gyeong-jing was in fact a political attack upon his father Kim Ryu, as well as Kim
Ryu's position inside the government.
Kim Gyeong-jing was not directly involved with the task of defending the
Gang'hwa-do island, but he was summarily executed nonetheless. And the reason he was
executed even when he was not directly responsible for the fall of the defense line, was
because he acted like a person that was trying to save his own neck even after
Gang'hwa-do fell and Joseon was defeated. He ran away, leaving the crown-princess(世
子嬪), the son of the crown prince(元孫), other princes(大君) and even his own mother
behind. That was not only a failure to uphold his own duties as a commanding officer
defending a crucial post at the Gang'hwa-do island, but also a betrayal to his own
parents and his moral obligations as a person. Such betrayal was simply inexcusable, even
more than his military failures. In short, Kim Gyeong-jing was executed not because he
was punishable by death for his lack of military competence, but because he was
punishable by death for his lack of morality and just character.
Key Words : The War with the Qing forces that started in the Byeongja-year[丙子胡亂],
the Gang'hwa-do/江華島 Island, Kim Gyeong-jing/金慶徵, Jang Shin/張紳,
Kim Ryu/金瑬, Na Man-gab/羅萬甲, Byeongja-rok/ 丙子錄(The Byeongjayear
Journals, Officials who supported the idea of establishing a truce(主和派),
Officials who rejected the idea of making peace with the enemy (斥和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