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시 조선 勤王軍의 남한산성 집결 시도와 활동병자호란시 조선 勤王軍의 남한산성 집결 시도와 활동
장 정 수*
Ⅰ. 머리말
Ⅱ. 淸軍편제와 진격로의 검토
Ⅲ. 조선의 방어전략과 남한산성
1. 서북 지역 방어전략의 실상
2.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 경위
Ⅳ. 勤王軍의 활동과 그 의미
1. 諸道勤王軍의 전투 현황
2. 營將制에 따른 勤王軍편제와 실효성
Ⅴ. 맺음말
Ⅰ. 머리말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8일 淸軍이 침입한 이후, 이듬해 1월 30일
仁祖가 南漢山城에서 나와 항복하기까지 불과 50여 일 동안 전개된 전쟁이다.
전쟁의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전쟁은 壬辰倭亂(1592∼1598) 이후 정치 외교 사회 경제 등
제 분야에 걸쳐 드러난 문제점들을 악화시켰다.
무엇보다도 장기간 지속되어온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오랑캐로 치부해온 淸에 복속했다는 정신적 충격은 쉽사리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었다.1)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수료.
대표논저 : 2013, 선조대 對女眞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朝鮮時代史學報 67;
2016, 16세기말∼17세기초 朝鮮과 建州女眞의 배후 교섭과 申忠一의 역할 韓國人物史硏究 25
1) 병자호란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柳在城, 1986, 丙子胡亂史, 國防部戰史 編纂委員會;
김종원, 1999, 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 혜안;
김용흠, 2006, 朝鮮後期政治史硏究 1, 혜안;
한명기, 2008,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許泰玖, 2009, 丙子胡亂의 정치 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한명기, 2013,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권), 푸른역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최근의 연구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 된다
(吳宗祿, 1999, 壬辰倭亂∼丙子胡亂時期軍事史硏究의 現況과 課題 軍史 38, 國防軍史硏究所;
강석화, 2014, 정묘 병자호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 역대 대외항쟁사 연구, 전쟁기념관;
허태구, 2015, 丙子胡亂이해의 새로운 시각과 전망
-胡亂期斥和論의 성격과 그에 대한 맥락적 이해- 奎章閣 47,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국면이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투의 양상에 대한 분석은
병자호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 국왕 仁祖가 강화도 입보에 실패하면서 이곳에 고립되었고,
이에 따라 각 지방의 군대가 ‘勤王’을 위해 남한산성으로 전진했기 때문이다.2)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지방군의 구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했고,
청은 고립무원의 상황을 조성하여 국왕의 항복을 이끌어내야 했으므로
勤王軍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남한산성 인근 지역에서는 조선 근왕군과 청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3)
2) 이 글에서 勤王軍은 조선의 지방군이 ‘勤王’을 목표로
관할 지역에서 벗어나 ‘行在所’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한 것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3) 병자호란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때, 청군의 강화도 함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강화도의 함락은 남한산성 농성 의지를 약화시키고,
국왕 인조가 ‘출성항복’을 결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許泰玖, 2011, 丙子胡亂江華島함락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
-金慶徵패전책임론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震檀學報 113, 震檀學會, 100쪽).
이 글은 조선 근왕군의 활동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만큼,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강화도 함락을 분석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밝힌다.
그동안 병자호란 당시 조선 근왕군의 활동과 역할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의 초점이 주로 조선과 명 청의 외교적 관계에 맞추어져왔기 때문이다.
명 청 교체기 조선의 향배는 당시의 국제적 역학 관계나
정치 사상적 측면에 걸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는 점에서
선행 연구는 병자호란의 실상을 밝히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정치 외교적 역학 관계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또 참담한 패전과
국왕의 출성 항복이라는 치욕적인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조선 지방군의 근왕 활동은 제한적으로만 다루어왔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조선이 사대주의적 斥和論에 매몰되어 국제 정세를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이를 뒷받침할 군비는 갖추지 않았다는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진 결과였다고 생각된다.4)
조선의 대청 방어책과 관련해서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요새화,
평안 황해도 일대의 산성 중심 방어전략 등은 세세히 밝혀졌으나,
수동적인 정책이었다는 평가를 면치 못하고 있다.5)
또 군사력의 근간이 되는 군사조직에 대해서는 중앙군에 연구가 집중된 반면,
국방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된 지방군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6)
이는 병자호란의 군사적 추이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첫 연구인
韓國軍制史(1977)가 중앙군인 五軍營의 변천을 중심으로 서술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7)
병자호란의 전황을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군과 이를 포위하고 있던 청군의 대결로
묘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4) 인조정권이 “승패를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防守할 계책을 강구하지 않은 채
전쟁을 유발하여 수만 명의 인명을 살상케 하고,
또 수만 명의 백성을 포로로 끌려가게 했다.” 는 언급은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 준다
(柳承宙, 2002, 丙子胡亂의 戰況과 金化戰鬪一考 史叢 55, 歷史學硏究會, 391쪽).
5) 병자호란을 전후한 조선의 군사 전략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들이 참고 된다
(권내현, 2002, 17세기 전반 對淸긴장 고조와 平安道방비 韓國史學報 13, 高麗史學會;
이철성, 2002, 17세기 平安道“江邊7邑”의 방어체제 韓國史學報 13, 高麗史學會;
노영구, 2004,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內地거점방어체계 한국문화 34,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盧永九, 2010, 인조초∼丙子胡亂시기 조선의 전술 전개 韓國史學報 41, 高麗史學會;
노영구, 2012, 조선-청 전쟁(정묘 병자호란)과 군사제도의 정비 한국군사사 12, 육군본부;
허태구, 2012, 仁祖代對後金(對淸) 방어책의 추진과 한계-守城전술을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61,
노영구, 2012, 16∼17세기 鳥銃의도입과 조선의軍事的변화 한국문화 58,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소;
노영구, 2013, 17세기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방체제군사연구135, 육군본부군사연구소;
노영구, 2016, 17세기 조선의 전술변화와 전개양상 조선후기의 전술-<兵學通>을 중심으로-, 그물).6)
許善道, 1992, 朝鮮時代營將制 韓國學論叢 14,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9쪽
7) 이태진은 서인의 집권과 군영의 창설, 정묘 및 병자호란 친청세력의 집권 北伐등과 관련한
군영체제의 변천 과정으로 병자호란을 서술했고, 근왕군의 활동은 간략히 현황을 정리한 뒤
“각각 敗北 또는 戰死하자, 城中은 점차 孤立無援이 되어
戰意를 상실하여갔다.” 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李泰鎭, 1977,中央五軍營制의 成立過程 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07쪽).
근왕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몇 차례 일목요연한 정리가 시도된 바 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왕군의 패전 및 도주를 강조하는 등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서술하는 데에 그치고 있고,
또 근왕 활동 자체가 지연되거나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지방군의 근간이었던 鎭營들이 병자호란 당시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는 언급도 있었지만,
이 경우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고 근왕군과의 관련성이 무엇인지 제시되지 않았다.9)
이상을 통해 기존의 연구들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군사적 대책을
평안 황해도 중심의 산성 방어전략, 강화도와 남한산성 등의 요새화 등으로 파악하는 반면,
근왕군의 역할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근왕군이 청의 주력인 右翼軍과 비슷한 시점에 남한산성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일부는 오히려 우익군 보다 앞서 남한산성 부근에 도착하여 서로 호응하기도 했다.
병력과 물자를 마련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임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양상은 사전에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는 한 나타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조선이 지방의 군사조직을 미리 정비해두었음을 반증하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방어책을 논할 때 적극적으로 분석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8) 柳在城, 1986, 앞 책; 柳承宙, 2002, 앞 글; 허태구, 2009, 앞 논문;
노영구, 2012, 앞 책; 한명기, 2013, 앞 책(2권);
이종호, 2014,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軍史 9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노영구, 2016, 앞 책 등
9) 車文燮, 1970, 朝鮮後期의 營將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大出版部;
許善道, 1992, 앞 글;
徐台源, 1999, 朝鮮後期地方軍制硏究, 혜안;
金友哲, 2001, 朝鮮後期地方軍制史, 경인문화사;
서태원, 2006,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역사와 실학 29, 역사실학회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선 청군의 편제와 진격로를 구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서 청군이 침공 이후 직면했던 국면들을 정리하여,
조선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방어책을 마련했는지 상대방의 시각에서 유추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조선의 방어전략을 재검토하고,
이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게 된 경위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각 근왕군 부대의 이동 경로와 활동을 분석한 뒤,
營將制와의 상관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근왕군은 남한산성을 둘러싼 전황을 타개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조선이 수동적인 군사 전략으로 일관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병자호란 실상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淸軍편제와 진격로의 검토
1636년 11월 19일, 淸太宗홍타이지(hongtaiji, 皇太極)는 盛京의 篤恭殿에서
조선 공벌을 공표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29일까지 집결하라고 지시하였다.
병력 선발부터 휴대할 무기와 군량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도 함께 내려졌다.
출정할 청군에는 만주와 몽고 八旗는 물론
外藩蒙古의 군사들과 투항한 漢人을 중심으로 구성된
天佑軍 天助軍 重軍(ujen cooha)이 포함되어 있었다.10)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右翼과 左翼으로 나뉘어 각각 義州와 昌城을 통해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우익과 좌익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前鋒軍을 파견하고,
또 화기와 군량 등 군수 물품을 지참한 後續軍을 후방에 잔류시켜 두기도 했다.
주력에 해당하는 우익과 좌익군의 南漢山城 도달 시점은 일치하지 않았고,
특히 좌익의 도착은 상당히 지체되었다.
이는 좌익이 보다 복잡한 경로를 거쳐 진군했기 때문이다.
먼저 청군의 편제와 진격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청의 우익군은 正黃旗, 鑲黃旗, 正紅旗, 鑲紅旗, 鑲藍旗등
만주 몽고의 5旗와 외번몽고의 우익으로,
좌익군은 만주 몽고의 正白旗, 鑲白旗, 正藍旗, 외번몽고 좌익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1)
우익군은 홍타이지와 禮親王 다이샨(daišan, 代善)이 이끌었고,
좌익군은 睿親王 도르곤(dorgon, 多爾袞)과
홍타이지의 큰 아들 肅親王호오거(hooge, 豪格)가 함께 지휘했다.12)
전체 병력은 정규군 3만 4천여 명을 포함하여 대략 4∼5만 명 정도였다.
청군 편제와 규모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13)
[표 1] 청군의 구성과 편제
10) 구범진 이재경, 2015, 丙子胡亂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 한국문화 7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참조
11) 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2日29日.
12) 柳在城은 우익과 좌익을 거꾸로 서술하고,
‘本軍’이라는 별도의 부대를 두어 청군의 편제를 정리했다(柳在城, 1986, 앞 책, 134∼135쪽).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는 본군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홍타이지는 우익군을 직접 거느리고 있었다.
또 우익군과 좌익군은 서로 뒤바꾸어 제시되어 있는데, 承政院日記에
“우리에게는 左衛와 右衛가 있는데 좌위는 먼저 왔으나 우위는 미처 나오지 못했고,
여러 왕자 및 몽고병이 모두 함께 나와 막 昌城에 도착하였으니,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결정할 것이다.” 라는
청측의 주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를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承政院日記 55冊, 仁祖15年(1637) 1月癸卯(3日),
“自中有左衛右衛左衛先來而右衛未及來且諸王子及蒙古皆議同出來方到昌城當待其來定奪”).
한편, 尊周彙編에는
“우리 우익병은 먼저 도착했지만, 좌익병은 창성로를 경유하느라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마푸타 등의 언급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尊周彙編 卷4, 皇朝紀年第四, 丁丑春正月癸卯).
문맥을 살펴보면 ‘좌위와 우위’라는 것은 ‘좌익과 우익’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서로 뒤바뀐 것은 기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보아야 할 것이다.
13) 그동안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규모는 대체로 10∼14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고,
이는 학계와 일반 대중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수용된 통설이기도 하다
[柳在城, 1986, 앞 책, 134∼135쪽; 김종원, 1999, 앞 책, 184쪽(각주 154)].
이에 대해 구범진 이재경은 청측 자료를 면밀히 비교, 분석하여 청군의 구성과 규모를 논증했으며,
청군의 규모가 3만 4천 명에서 최대 5만 명 정도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구범진 이재경, 2015, 앞 글).
최근 한명기, 허태구는 이 견해를 수용하여
청군의 병력을 ‘4만’ 혹은 ‘3만 4천’으로 언급하였다
[한명기, 2015, 병자호란을 보는 새로운 시각 -국제 패권들의 대결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
전란으로 읽는 조선(반란과 전쟁, 혁명이 바꾼 조선과 동아시아),
글항아리, 121쪽; 허태구, 2015, 앞 글, 174쪽].
필자도 구범진 이재경의 논지와 분석 방식에 동의하는 바, 이를 참고하여 <표 1>을 작성했음을 밝힌다.
청군은 1636년 12월 2일에 심양을 출발하여
우익군은 遼陽大路에, 좌익군은 撫順大路에 도열시켰다.
청태종은 이날 좌익군을 출발시키면서 寬奠을 경유하여 압록강을 건널 것을 지시했다.
우익군은 3일까지 沙河堡에 주둔하면서 먼저 마푸타(mafuta, 馬福塔),
豫親王도도(dodo, 多鐸)가 이끄는 두 갈래의 선봉군을 차례로 출동시켰고,
또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는 多羅貝勒요토(yoto, 岳託) 등으로 하여금
3천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후원하도록 했다.14)
우익군은 遼陽大路를 따라 진격했다.15) 우익군은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만큼
일자별 이동 경로가滿文老檔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일에는 심양 부근 머물면서 전봉군을 보냈고,
4일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甛水站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8일에는 連山關→通遠堡→鎭東堡→鳳凰城등을 차례대로 지났고,
9일에는 압록강과 마주하는 鎭江城에 도착했다.
우익군은 10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의 남쪽에 주둔한다.16)
진군로와 행군 일정을 고려하면 우익군은 서두르지 않고 당당하게 행군했다고 할 수 있다.
우익군은 조선에 들어온 뒤에 다소 행군 속도를 늦추는데
이는 적지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익군은 11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鐵山→郭山→定州→嘉山등의 경로로 이동했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우익군이 조선군의 저항을 맞았던 흔적은 없고,
곽산과 정주에서는 항복을 받아내는 등
지점마다 하루씩 숙영하면서 순조로운 행군을 계속했다.
13일에는 진강성에 머물던 安平貝勒두두(dudu, 杜度)로 하여금 정예병을 뽑아서 진격하여
鐵山과 皮島 雲從島 大花島등을 공격하게 했다.17)
또 가산에 도착한 14일에는 외번몽고 우익군을 분리하여
연해를 약탈한 뒤 안주로 집결하게 했다.18)
청 우익군은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이북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19)
청태종은 이 지역에서 皮島(가도) 일대의 명군을 공격할 거점을 구축하고,
기동력이 취약한 후방의 漢軍이 화기와 물자를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4)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壬申(2日) 癸酉(3日) 己卯(9日).
15) 遼陽大路는 원말의 遼陽路, 명대의 遼東八站을 의미한다. 경로는 遼陽을 시작점으로
甛水站→連山關→鎭夷堡(혹은 通遠堡)→鎭東堡(혹은 松站)→鳳凰城→柵門→湯站이며,
명 말에는 鎭江城을 경유하게 된다
(남의현, 2008, 명의 요동팔참(遼東八站) 점거와 국경중립지대 明代遼東支配政策硏究,
강원대학교출판부, 265∼269쪽).
16) 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2∼3日5∼10日.
17) 청태종은 9일 진강성 일대에 安平貝勒 두두(dudu, 杜度)로 하여금
孔有德 耿仲明 尚可喜 石廷柱 馬光遠등 한인 장수들과 함께 잔류하여
화기와 방패, 수레, 치중 등을 보호하게 하였다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己卯(9日),
“是日命多羅安平貝勒杜度恭順王孔有德懷順王耿仲明智順王尚可喜
昂邦章京石廷柱馬光遠等率每旗梅勒章京一員每牛彔甲士三人及石廷柱旗下
漢軍在後護送紅衣礮將軍礮法鳥鎗車牌輜重等物”].
18)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甲申(14日).
19)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癸未(13日).
우익군은 계속 남하하여 安州로 향했다.
14일에 侍衛 앙굴라이(anggūlai, 昂古賴)를 보내어 이 지역을 정탐하게 했던 것으로 보아
청태종은 안주의 공략에 힘을 기울였던 듯하다.
앞서 외번 몽고군을 연해 지역을 공략한 뒤에 안주로 집결하게 한 것이나,
안주를 공격하기에 앞서 두두로 하여금 피도 등을 공격하게 한 것은
명군의 지원을 차단하고 안주를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으리라 판단된다.
청태종은 15일 안주에 도착하여 평안 병사 유림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동시에 인근 지역을 약탈하여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20)
이 시점에 좌익군은 어떤 경로를 통해 진군하였을까.
좌익군은 우익군에 비해 기록이 소략하여 진격로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파편적으로 남겨진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윤곽은 잡을 수 있다.
좌익군은 심양의 동쪽 撫順에서 출발하여 寬奠을 따라 昌城으로 들어갔다.21)
좌익군은 창성을 통해 압록강을 건넌 뒤, 昌州城(當峨山城)을 점령하였고
영변 일대에서 출성한 조선군을 격파한 다음 우익군과 합류하게 된다.22)
20) 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15∼16日.
21) 淸太宗實錄에 따르면 좌익군은 ‘長山’으로 들어갔다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壬申(2日)].
尊周彙編에는 “도르곤은 長山口로 강을 건너, 昌城에 이르러 當峨山城을 공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尊周彙編 卷4, 皇朝紀年第四, 丁丑春正月庚戌).
이는 尊周彙編의 찬자가 청측 기록을 참고할 때, 장산과 창성을 별도의 지명으로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柳在城도 도르곤의 부대가 관전→장산구를 거쳐 평안도 벽동에 진출했다고 보고
경로를 ‘碧潼→昌城→朔州’로 정리했다
(柳在城, 1986, 앞 책, 138쪽 및 143쪽의 그림 참조).
그러나 창성 일대에는 장산구라는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滿文老檔에서는 이때의 ‘長山’을 ‘창샨(cang šan)’으로 표기하였는데,
東洋文庫에서 간행한 日譯本에서는 이를 ‘昌城’으로 번역한 바 있다
[1963, 日譯本 滿文老檔 Ⅶ(太宗4), p.1478].
또 柳承宙는 벽동이 아닌 창성을 통해 청의 좌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고 보았다
(柳承宙, 2002, 앞 글, 407쪽).
실제로 관전과 창성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형세였고, 거리도 70리 정도에 불과했다
[宣祖實錄 卷107, 宣祖31年(1598) 12月甲子(13日)].
따라서 장산은 곧 창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창샨’이라는 만주어를 한자로 고쳐 기록하는 과정에서
‘長山’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좌익군이 무순에서 출발하여 관전을 지나 장산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무순→관전→창성’의 경로를 따라 진격했음을 의미한다.
22) 淸太宗實錄 卷33, 崇德2年(1637) 1月庚戌(10日);
淸史稿 卷526, 列傳313, 屬國1, 朝鮮, 崇德2年(1637).
좌익군이 진입한 창성은 조선 초기부터 여진족의 주요 침입 경로로 여겨졌다.
창성의 속진인 昌洲鎭에 평안 병사의 行營을 설치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이를 통해 압록강 상 하류의 길목을 통제하고자했다.
1624년 도체찰사 張晩은 적이 창성을 통해 남하하면
緩項嶺 靑山을 거쳐 雲山 寧邊으로 방면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23)
창성은 後金이 요동을 장악한 뒤 적의 주요 침입로로 여겨지게 된
의주와 함께 집중적으로 방어해야 할 지점이 되었던 것이다.24)
이런 지리적 형세를 감안한다면, 청의 좌익군은 창성의 대안에서 압록강을 건너
당아산성을 점령하고 완항령을 지나 운산 영변 일대에 이르고,
안주에서 우익군과 회합한 것으로 보인다.
우익군과 좌익군이 안주에 주둔하던 15일,
영변성의 군사들이 정탐을 하러 왔다가 청군에게 발각되어 패주하는 일이 발생했다.25)
이날 홍타이지는 다시 좌익군을 나누어 동쪽으로 진출시켰는데,
이는 생포한 조선인을 통해 영변에 군대가 주둔한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26)
그는 안주에 대한 성원을 끊기 위해 서쪽으로는 피도 일대를,
동쪽으로는 영변 일대를 공격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안주에는 평안 병사 유림이, 영변에는 부원수 신경원이 주둔하고 있었다.
청군은 이 두 성에 주둔한 조선군을 압박하였지만,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좌익군은 영변성을 6일이나 공격한 끝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전략을 바꾸어 물러난 뒤,
근왕을 위해 출성한 신경원의 군사를 戰坪에서 격파하였다.
반면, 우익군은 2일 동안 안주에 머물면서 주변을 약탈한 뒤 그대로 출발하였다.27)
안주성의 조선군은 후방의 두두와 전방의 우익군 사이에 위치했으므로 성을 나올 수 없었고,
따라서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우익군은 안주를 그대로 두고 남하하여
18일과 19일에는 각각 肅川과 巡安을 지났고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우익군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가 이미 慈母山城에 들어간 뒤였으므로
쉽게 평양을 점령한 뒤 곧장 中和까지 진출했다.28)
이어 21일∼24일까지 鳳山→瑞興→平山→靑郊驛(開城인근)을 차례로 지나
이튿날 개성부로 들어갔다. 이상의 기록만 볼 경우,
홍타이지가 황해도에서도 특기할 만한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 측 기록에 따르면 황주 正方山城에 주둔하던
도원수 金自點이 황해 감사 李培元, 병사 李碩達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洞仙嶺에서 청군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29)
청측 자료에는 동선령에서 벌어진 전투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 타격을 입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
이달 26일 청태종이 우다리(udari, 吳達禮)를 보내어
후방의 두두에게 화기를 가지고 진군하라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黃州를 지날 때 먼저 2백 명을 보내어
黃州嶺 양쪽의 복병을 수색, 초멸하고 이어 가장 후미에 군사를 잔류시켜
아군이 모두 고개를 지날 때까지 기다린 연후에 전진하라.30)
이 서신에서 청태종은 황주령의 군사를 주의할 것을 반복하여 지시했으며 말미에는
“황주령은 조선의 매복이 있는 곳이니 잘 지휘하고 짐의 명을 어기지 말라.”고 썼다.
황주령은 황주에서 봉산으로 이어지는 동선령을 의미하며,
이곳은 평안 황해도에서 서울로 향하는 大路였다.31)
물론 청군을 제압할 역량까지는 없었던 탓에 김자점등은 兔山방면으로 이동하였고32)
청군은 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황주 일대에서 조선군의 저항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또한 청 우익군이 황해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진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23) 仁祖實錄 卷7, 仁祖2年(1624) 10月乙巳(24日).
24) 이에 대해서는 노영구, 2004 및 2012, 앞 글 참고.
25) 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15日.
26)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乙酉(15日).
27) 청태종은 서해 연안을 따라 약탈하라고 보낸 외번몽고군을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16日].
28) 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 18日 19日 20日.
29) 江都書吏 韓汝宗이 가져온 장계에 따르면
도원수(김자점)는 황해도 관찰사(이배원)와 함께 동선령에서 청군과 싸워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庚子(30日),
“賊兵相繼而來都元帥與黃海監司遣兵邀擊敗之于洞仙”].
이때 황해도 군병들의 전투에 대해서는 秋峯實紀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학원 B12 A977) 卷上, 海西同苦錄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30)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丙申(26日).
31) 輿地圖書 黃海道, 鳳山郡, 山川, 洞仙嶺, “自西關抵京都大路”
32) 李肯翊, 燃藜室記述 卷26, 仁祖朝故事本末, 諸將事蹟.
한편, 홍타이지가 이런 지시를 내린 이유는 남한산성을 포위한
도도 등이 연달아 북상하는 조선 勤王軍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이달 19일,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를 포위하고 있다는 도도의 보고를 받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잉굴다이(inggūldai, 英俄爾岱)를 파견하였다.33)
잉굴다이는 25일에 돌아와 도도의 보고를 전했는데,
來歸한 와르카(warka, 瓦爾喀)인들로부터
“4도 장수가 군사를 합하여 내원하려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또 “성 안의 조선군이 산등성이를 따라 나와
소소한 공격을 해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홍타이지는 보고를 받은 즉시 우익군의 다섯 기에서 일부 병력을 선발하여 보내고,
다시 護軍의 일부를 추출하여 궁가다이(gūnggadai, 鞏阿岱), 바불라이(babulai, 巴布賴),
바두리(baduri, 巴都禮)등으로 하여금 이끌고 가게 하여 선봉군을 지원하도록 했다.34)
당시 선봉군의 규모는 5천 명에도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조선군의 근왕 활동은 위기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남한산성에서 수차례 조선군이 출성하여 청군을 공격하여
소정의 성과를 거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35)
우익군은 행군 속도를 높여야 했고,
황주 일대에서 조선군을 제압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후속군으로 하여금 서둘러 남하하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좌익군은 영변을 지나 陽德 孟山 豆毛 谷山 永興 高原 文川 德原 安邊의 길을 따라
진격하여 鐵嶺을 통해 강원도로 진입하고 淮陽 金化의 길을 경유하여 개성으로 들어왔다.36)
홍타이지는 개성에서 다시 좌익군을 나누어 보냈는데,
평안도와 황해 함경도의 근왕군을 차단할 목적이었던 듯하다.
이때 좌익군은 兎山일대에서 도원수 김자점 이하의 근왕군을 따라잡고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37)
25일 홍타이지가 우익군의 일부를 앞서 보내고, 후속군으로 하여금 전진하게 하며,
좌익군을 나누어 보내는 세 가지의 지시를 내린 것은 전봉군의 지원을 위해
행군 속도를 높이면서 후방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우익군은 26일 임진강에 도착한 뒤, 이튿날 도강하여 파주에 이르렀으며
28일에는 마침내 한성 부근까지 들어갔다.
29일 홍타이지는 일부 병력을 나누어 漢城을 함락하게 한 뒤에
자신은 곧장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행군을 시작한 이래로 27일, 전봉군이 한성에 도착한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한편, 좌익군은 이듬해 1월 10일이 되어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무순을 통해 출전한 이래로 38일 만이었다.
홍타이지는 16일 심양을 留守하던 지르갈랑(jirgalang, 濟爾哈朗)에게 보낸 서신에서
좌익군이 조선군을 연파했으나
‘도로가 좁고 험하여 지체된 것’이라고 도착이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38)
조선군의 저항을 배제하고 좌익군이 승리한 사실만 압축적으로 담은 것이었다.39)
같은 날 두두와 공유덕 등이 거느린 후속군도 화기를 가지고 남한산성에 도착했다.40)
이상 청군의 진격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그림 1]과 같다.
[그림 1] 청 주력부대의 진격로
이상을 통해서 병자호란 당시 선봉군을 제외한
청군의 진격이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의 우익군과 좌익군은 각각 27일, 38일에 걸쳐 진군한 끝에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압록강을 건넌 뒤부터 계산해도 3∼4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 평안도와 황해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것도
산성을 피해 直功을 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안주나 황주의 방어가 예상보다 견고했고
근왕군의 도착이 예상보다 빨라 행군 속도를 높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인조 일행이 서둘러 남한산성에 들어가
고립을 자초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방어전략을 재검토하고
이를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과 연관하여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33)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己丑(19日).
34) 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25日.
35) 허태구, 2010, 병자호란 講和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 52, 조선시대사학회, 59쪽의 표 참조.
36) 좌익군은 15일 안주에서 출발하여 영변으로 가서 도원수 김자점이 보낸 지원군과
영변의 철옹산성에서 나온 부원수 신경원의 근왕군을 격파하고, 신경원을 포로로 잡았다.
續雜錄에 따르면 좌익군은 안주로부터 출발하여
陽德 孟山 豆毛 谷山 永興 高原 文川 德原 安邊의 길을 따라 진격하여
함경도 근왕군의 지원을 단절시킨 뒤, 다시 鐵嶺을 통해 강원도로 진입하여
淮陽 金城 原州 春川등을 공략했다고 한다
[趙慶南, 續雜錄 卷4, 丁丑年(1月17日); 羅萬甲, 丙子錄, 仁祖15年(1637) 1月6日].
조경남은 淸太宗實錄에서 확인되는 1차 출격(안주)과 2차 출격(개성)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도르곤 등은 2차 출격후, 광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원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춘천을 거쳐 남한산성에 당도하게 된 듯하다.
37) 淸太宗實錄 卷33, 崇德2年(1637) 1月丙辰(16日).
38) 內國史院滿文檔案 崇德2年(1637) 1月16日.
39) 당시 청 좌익군에는 조선인 향도가 있었다. 寧邊邑誌와 輿地圖書에 따르
면 이들은 의도적으로 험한 지역으로 청군을 인도했고, 또 시간을 벌기 위해
길을 우회해서 다녔다고 한다
寧邊邑誌 府事例古事; 輿地圖書 平安道昌城府, 丙子退保山城).
<그림 1>에서 확인되듯이 좌익군의 기동로가 복잡한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0) 淸太宗實錄 卷33, 崇德2年(1637) 1月庚戌(10日).
Ⅲ. 조선의 방어전략과 남한산성
1. 서북 지역 방어전략의 실상
청군이 침입하자 강원도와 충청 전라 경상도의 근왕군이 즉각 남한산성으로 출정했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각 도에 근왕을 지시하였고,
대부분의 전투가 남한산성 인근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근왕군의 북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압록강에서부터 한성에 이르는
방어전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유사시 청군이 의주와 창성 일대로 압록강을 건널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본래 의주와 창성은 모두 압록강에서 평안도 내지로 향하는 6개 길목 가운데에 해당된다.41)
창성의 경우, 그 屬鎭인 昌洲鎭에
평안 병사의 行營을 설치했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賊路로 인식되었다.
의주의 경우, 전통적으로 명의 변경과 인접했던 만큼
여진족의 침입 예상로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선조대 초반에는 명의 요동 아문에서 寬奠堡등 6개의 보를 창성의 대안에 설치하였고,
1596년에는 鎭江城을 의주 대안에 설치하였다.42)
따라서 명의 요동 아문이 세력을 유지하는 이상
의주와 창성은 여진의 침입로가 되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 여진족과의
교섭이 주로 江界의 滿浦鎭에서 행해졌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622년을 전후하여 후금이 요동을 장악하자 상황은 일변한다.
의주 방어가 현안으로 떠올랐던 반면, 江界를 통한 침입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지면서
의주와 창성을 적의 침입로로 예상하게 되었던 것이다.43)
그런데 청군이 의주와 창성을 통해 압록강을 건널 당시
조선군의 저항을 만났던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44) 앞서 살펴보았듯이
청군 우익이 조선의 저항에 직면한 것은 청천강 건너 안주에 이르러서였다.
좌익군도 승승장구를 거듭하다가 안주와 영변 일대에서 한 차례 진군을 늦추었다.
이때 안주와 영변에는 각각 평안 병사 유림과 부원수 신경원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의 주 방어선이 압록강이 아닌 청천강 일대에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의주에 淸北防禦使를 설치하여 청천강 이북을 통제하되
유사시에는 안주의 ‘後援’으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45)
만약 조선이 압록강으로부터 청의 군대를 막을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안주가 의주 등 강변 여러 진의 후원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때는 오히려 의주의 청북방어사가 안주를 ‘후원’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41) 압록강변으로부터 내지까지 통하는 길은 6개 정도가 있었다
(권내현, 2002, 앞글; 이철성, 2002, 앞 글; 노영구, 2004, 앞 글; 고승희, 2004,
조선후기 평안도 지역 도로 방어체계의 정비 한국문화 34,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참고).
42) 明神宗實錄 卷302, 萬曆24年(1596) 9月庚申(27日)
43) 1625년 도원수 李弘胄는 “적이 창성을 도모할지 의주를 도모할지 헤아리기 어렵다.”고 언급하고
있어 적이 둘 가운데 하나 혹은 양쪽으로 들어올 것을 정묘호란 이전부터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仁祖實錄 卷8, 仁祖3年(1625) 2月 甲申(5日)].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청군은 의주에 대군을 투입하고 창성에도 一枝軍을 보내어 공략했다
(柳在城, 1986, 앞 책, 50∼56쪽).
44) 의주와 창성의 軍民들은 각각 白馬山城과 當峨山城으로 입보하였다.
이 가운데 당아산성은 성 안의 내분으로 함락되었다
(輿地圖書 平安道昌城府, 丙子退保山城).
45) 仁祖實錄 卷28, 仁祖11年(1633) 1月壬戌(30日),
“"兵使入守安州則淸北列城無號令之人林慶業久在淸北聲績表著若差防禦使
常時檢飭山城臨亂領率江邊精銳以爲安州聲援合於機宜”
안주와 영변은 각각 新舊의 평안 병영이라는 점에서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46)
조선은 압록강 일대에 의주부터 강계에 이르기까지
7개의 읍을 설치하여 여진족의 침입과 약탈을 방어해왔다.
병마절도사는 영변에 본영을 두고,
結氷期에는 창성의 창주진 行營에 들어가 여러 진을 지휘했다.
영변은 압록강에서 들어오는 6개의 길목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고,
창성은 압록강의 하류와 상류를 방어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평안도의 방어전략은 전통적으로 압록강 방어에 중점을 두어왔으므로
적이 어느 지점에서 압록강을 통과하든
이를 요격할 수 있도록 영변에 병영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대 말∼인조대 초반 의주가 주요 적 진격로로 예상되면서
비교적 내지에 위치해 있는 영변 보다 의주에서
구성(혹은 정주)→안주→평양→황주→평산→개성→한성에 이르는
길목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안주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안주를 방어할 경우, 의주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면서
창성 일대의 길목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7)
평안 병영의 移設은 강변 전체를 방어했던 이전과는 달리
의주→안주의 길목을 중점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며
이를 통해 한성에 이르는 축차적 방어선의 형성도 가능했다.
청천강 이북으로 병력을 분산시킬 경우, 평양 개성 한성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
현실도 안주를 重鎭으로 삼아 병력을 집중시켜야 할 이유였다.
그러나 안주 또한 영변과 연결하지 않으면 홀로 지탱할 수 없는 형세였다.48)
의주와 창성으로 적이 동시에 침공할 경우, 안주는 고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9)
이는 안주와 영변의 형세를 비교하던 인조대 초반에
도원수를 역임한 張晩과 李弘冑가 공통적으로 언급한 바이기도 했다.50)
안주와 영변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 상호구원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인조대 초반에 이미 강변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인식 하에
청천강을 중심으로 내지에 거점을 구축하여 방어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평안도 방어전략은
안주와 영변을 잇는 것을 골자로 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어선을 보완하기 위해 황주의 正方山城과 평산의 平山城에
重兵을 주둔시키자는 김자점의 의견이 채택되어,
안주-영변에서 황주로 이어지는 긴 역삼각형의 방어선이 형성되었다.51)
1636년 3월, 金尙憲은 평안 병사가 안주, 부원수가 영변으로 들어가되,
도원수는 황주 정방산성이 아닌 평양 자모산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52)
안주-영변을 후원하는 지역을 평양으로 앞당겨 종심을 좁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46) 1625년 평안 병영은 영변에서 안주로 옮겨졌다.
방어의 중점이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안주 일대로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노영구, 2012, 앞 글, 348쪽).
47) 仁祖實錄 卷2, 仁祖1年(1623) 7月辛卯(3日).
48) 1595년 10월 上四道都體察使로 임명된 유성룡은
평안도 순찰사와 병마절도사에게 보내는 공문에서
안주의 형세는 매우 좋으므로 거점으로 만들어 영변과 더불어 ‘脣齒’와 같은 형세로 만든다면
평안도의 방어가 견고해질 것이라고 지시한 바 있다(柳成龍, 軍門謄錄 移平安道巡察使節度使文).
49) 병자호란 직전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는 부원수를 창성에 두어 방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체찰사 김류는 의주성과 백마산성의 방어를 위한 필요성은 인정한 반면,
800여 리에 달하는 강을 모두 지킬 수 없으며,
창성 일대는 지대가 낮아 현실적으로 방어가 어렵다고 반박했다.
적이 창성으로 들어올 경우에는 그 길목을 차단할 수 있는 영변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7月乙丑(23日)].
50) 仁祖實錄 卷2, 仁祖1年(1623) 8月丁亥(29日); 仁祖實錄 卷10, 仁祖3年(1625) 9月戊申(3日).
51) 1634년 12월 9일, 김자점은 경연에서
“안주는 방어할 수 있지만 淸川江이북은 믿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주와 황주를 지키지 못한다면 한성이 붕괴될 것이라고 보아
황주의 正方山城을 지키고 평산의 평산성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仁祖實錄 卷30, 仁祖12年(1634) 9月戊辰(15日);
仁祖實錄 卷31, 仁祖13年(1635) 9月乙丑(18日); 仁祖實錄 卷31, 仁祖13年(1635) 10月丙戌(9日)].
52) 仁祖實錄 卷32, 仁祖14年(1636) 3月壬子(7日).
김상헌이 제시한 방안을 따를 경우,
청천강 이남에서 평양에 걸친 지역에 모든 군사가 집결하게 된다.
이 경우 병력의 분산을 막고 상호 협조가 긴밀해진다는 장점은 있었으나,
청천강 이남에서 평양에 이르는 지역을 적이 장악할 경우
2차 방어선을 형성할 병력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조선은 안주에 평안 병사, 영변에 부원수,
황주의 정방산성에 도원수와 황해 병사를 두어
종심 깊은 역삼각형 형태의 방어전략을 세우고, 평안도 관찰사는 자모산성으로,
황해도 관찰사는 장수산성으로 입보하게 된다.
이상을 보면 조선이 청천강 이북 지역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어계획을 수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위의 5곳을 제외하고도
평안도와 황해도에는 산성이 수축되었고, 청천강 이북도 다르지 않았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청천강 이북으로 병력을 분산시킬 경우,
청천강 일대의 방어력이 약화될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淸北의 백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모색된 대안은 바로 入保處(피난처)로 삼을 산성을 각지에 구축하는 것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산성은 백성들의 희망에 따라 수축과 정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53)
자발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에 수축 작업이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는 양상을 보인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애초에 평양 慈母山城의 수축도 인근 順安 殷山 成川 孟山 順川등지의 백성들이
희망한 것을 관찰사 金起宗이 건의하여 실현된 것이었다.54)
황해도에서도 인근 백성들이 입보를 희망하는 곳에 산성을 수축하여
‘병화를 피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長壽 首陽 瑞興山城등이 증축되었다.55)
그밖에 정묘호란 때 정봉수가 활동한 龍骨山城이 개축되었고,
김여기 지득남 등이 활동했던 靈巖山과 劍山에도 산성이 수축되었다.56)
1631년 8월, 박동선은 경연에 입시하여 “淸北의 관방이 비단 龍骨劍山뿐만은 아니니,
여러 성을 수축하여 인민이 들어가 보전할 곳이 되도록 하자.”고 건의하였다.57)
같은 시기에 부원수 정충신은 장계를 올려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鐵山의 雲巖山城의 수축을 건의하였고,
또 雲山에서는 백성들이 龍角山城의 수축을 요청하여 모두 허락을 받았다.58)
이상을 통해 서북 지역의 산성은 방어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서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묘호란의 경험에 비추어 마련된 것이었으며, 특히 용골산성의 사례는
산성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줄 피난처라고 인식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자모산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성은
방어를 위한 거점이라기보다는 피난처로서의 기능이 보다 중시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이 인근의 산성에 입보하는 방어전략으로 인해 평안도와 황해도의 대로를
방기했고 이는 청군이 신속하게 한성에 다다를 수 있었던 원인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충분한 근거에 입각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평안도 방어에서 가장 중요했던 안주성은 산성이 아니었고,
심지어 정묘호란 때 함락되었던 곳이다.5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주는 적의 주요 침입로로 예상된
의주∼한성의 대로를 방어하는 핵심거점이 되었다.
조선군은 각자의 안전을 위해 산성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어 지역을 설정해두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키며 방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3) 산성이나 험한 지형에서의 방어가 가진 장점은 이미 정묘호란 때 용골산성에서 항전한
정봉수나 靈巖山에서 항전한 金勵器, 또 劍山에서 항전한 智得男등의 사례에서 입증된 바 있었다
[仁祖實錄 卷19, 仁祖6年(1628) 10月 己酉 (2日)].
1628년, 인조는 황해도 관찰사 장신으로부터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들이 산성 수축을
희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야말로 정봉수가 용골 산성을 사수했던 본보기’라고 답했다
[仁祖實錄 卷19, 仁祖6年(1628) 9月壬申(15日)].
평안도와 황해도 곳곳에 설치된 산성들은 정묘호란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인근의 백성들을 입보시킴으로써 보전한다는 생존 전략 차원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54) 仁祖實錄 卷17, 仁祖5年(1627) 10月己亥(6日).
55) 仁祖實錄 卷16, 仁祖5年(1627) 5月戊寅(13日) 및 7月丙戌(22日).
56) 仁祖實錄 卷21, 仁祖7年(1629) 12月癸酉(23日); 仁祖實錄 卷25, 仁祖9年(1631) 7月丁酉(25日)).
57) 仁祖實錄 卷25, 仁祖9年(1631) 8月己未(18日).
58) 仁祖實錄 卷25, 仁祖9年(1631) 8月壬戌(21日) 및 9月戊寅(7日).
59) 조선이 청의 침입을 예상하여 평안 황해도의 여러 지역에 산성을 축조했던 점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입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또 전략적인 측면에서 패전의 근본 요인으로 보는 설명이 통설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에 대해 권내현은 평안도 방어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안주성이 평지성임을 지적하였으나,
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삼은 것이 조선의 외교 군사적 대책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권내현, 2002, 앞 글, 290∼293쪽).
조선이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오히려 도성으로 향하는
직로를 내어주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기존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선조대 이래 장기간 평안도 방어책을 논의한 결과, 후금(청)이 의주∼안주로 이르는
직로를 활용할 것이라 예측하였고 이에 따라 안주성을 ‘重鎭’으로 구축한 점,
안주성이 정묘호란 당시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핵심거점으로 기능했다는 점 등을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요컨대 조선은 청군이 침공할 경우 압록강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청천강 이북 지역을 방기하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백성들의 보호를 위한 일종의 자구책으로서 산성 축조를 진행했던 것이다.
자국의 국경을 강력히 방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를 최선책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정묘호란을 통해 확인한 전략적 이점을 활용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차선책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조선이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도 했다.
2.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 경위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방어전략 가운데 핵심은 강화도 입보였다.
조선은 청군이 침입할 경우, 서북의 백성들을 인근의 산성으로 들여보낸 뒤
안주-영변-황주에서 적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이 종심 깊은 역삼각형의 방어 지대는 적을 제압하기보다는 저지함으로써
진격을 늦추기 위해 설정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주요 전략은 이 시간을 활용하여
국왕 일행이 강화도로 들어가서 전쟁의 국면을 장기화하고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각 도의 근왕병을 집결시켜 반격하려는 것이었다.60)
강화도 입보는 정묘호란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 방어책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이 주효했다면 청군은 한성과 강화도, 남한산성 사이에 주둔하다가
남하하는 평안 황해 함경도 군사와
북상하는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군사 사이에서 포위되는 상황까지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이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활용한 최선의 시나리오였으나,
어디까지나 국왕의 강화도 입보를 중심으로
장기전 국면이 조성되어야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강화도로 향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여러 장수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포위를 풀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조의 남한산성 고립은 근본적으로 청군의 뛰어난 전략과 군사적 역량에 기인하지만,
강화와 전쟁 사이에서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청에 대한 공포심도 이 사태에 일조했다.
청의 선봉군 규모가 작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강화도 입보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고립을 자초한 것이다.
이러한 ‘촌극’이 연출되었던 원인은
선봉장 마푸타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하게 한성에 도달하고
또 도도와 요토의 부대가 순차적으로 도착하여 압박을 가하였기 때문이다.
청의 선봉군은 마푸타와 로오사(loosa, 勞薩)가 거느린 기병 300명,
예친왕 도도와 구사 버이서 쇼토(šoto, 碩託), 니칸(nikan, 尼堪)의 기병 1천 명,
요토와 양구리(yangguri, 楊古利)가 이끄는 기병 3천명 등으로
3개 부대를 모두 합쳐도 4,300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마푸타는 12월 3일, “먼저 가서 조선의 王京城을 포위하라.” 는
지시를 받아 출발하였고, 이어서 도도의 군대가 뒤따라갔다.61)
그리고 우익군이 압록강에 도착한 9일에는 요토의 군사가 파견되었다.62)
출발 시기로 보면 마푸타와 도도의 군사가 차례로 출동하고,
요토 등의 3천 군사는 그 뒤를 후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마푸타가 8일에 의주를 지나고,
도도의 군사는 요토의 군사와 함께 9일에서야 출발했다.63)
인조는 마푸타의 기병 300여 명이 도착한 뒤, 청군의 일부가 강화도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300명에 불과한 기병이 어떻게 의주에서 한성까지
6일 만에 저항 없이 도착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미 12월 6일 이후 적의 도강을 알리는 용골산의 봉화가
두 차례 올랐는데 ‘秋信使朴魯의 파견에 대한 회답’으로 간주한
도원수 김자점이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64)
그러나 이것은 김자점이 도원수로서의 임무를 방기했다기보다는
마푸타의 부대를 침략군이 아닌, 춘신사에 대한 회답 사절
혹은 開市를 목적으로 방문한 상인의 무리로 파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일 듯하다.
朴魯는 조선과 후금(청) 사이의 전운이 짙어져 가는 상황에서 結氷期가 다가오자
강화 의사를 타진하고 청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秋信使로 파견된 인물이다.65)
60) 노영구, 2014, 17세기 전기 동아시아 패권 교체와 병자호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전쟁,
세종대학교 세종연구원, 133쪽
61)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癸酉(3日).
병자호란시 조선 勤王軍의 남한산성 집결 시도와 활동 183
62)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己卯(9日).
63) 淸太宗實錄 卷33, 崇德2年(1637) 1月丙辰(16日).
64) 李肯翊,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及南漢出城.
65) 한명기, 2013, 앞 책(2권), 72∼73쪽.
그런데 이보다 앞서 비변사는 胡人의 수가 ‘數百千’을 넘으면 입국을 금지하고
강제로 들어올 경우 무력을 사용하라는 강경한 지시를 邊將들에게 알리자고 건의했다.
이때 최명길은 비변사의 건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청이) 전쟁을 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꺼려 鐵騎를 휘몰아 달려오지 않고
이처럼 몰래 기습할 계획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정말로 비국의 계사처럼 수백천 명이 일시에 나온다면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니 막고서 들이지 않더라도 가합니다.
그러나 古文에 이른바 ‘數百千’이라는 것은 곧 數千을 이른 것입니다.
변신이 고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뜻을 잘못 알아 수백 명의 差胡를 만나
갑자기 서로 무기를 겨눈다면 어찌 일을 그르치지 않겠습니까.66)
인용문의 밑줄로 강조한 부분을 살피면 수백과 수천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명길은 수천의 군사가 나오면 군사적 대응을 불사해야 한다는
비변사의 입장에 동의하겠지만, 변방 장수가 문맥을 잘못 이해하여
수백 명의 胡差일행마저 공격하는 사태를 일으킬까 우려한 것이다.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추신사 박로로 하여금
‘수백천’이라는 말을 풀어서 변장들에게 통지하도록 했다.67)
박로의 출발은 조선이 전쟁과 강화를 상황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이 박로를 추신사로 파견하여 강화 의사를 타진했을 무렵,
청태종은 이미 전쟁 준비를 마치고 조선 정벌의 이유를 하늘에 고한 뒤였다.
박로 일행은 遼陽大路(遼東八站)를 따라 심양으로 가다가
그 반대편에서 같은 경로를 통해 조선으로 진군하던 청 우익군을 鎭東堡에서 조우했다.
박로는 통사를 보내어 교섭 의사를 밝혔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었다.68)
상인으로 위장한 마푸타의 기병 300명이 조선에 도착한 것과 비슷한 시점이었다.
어쨌든 이상과 같은 지침을 받은 변방 장수가
상인으로 가장한 300명의 군사를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하기는 곤란했다.
마푸타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낯익은 인물’이기도 했고,
이전에도 후금 상인이 수백 명씩 혹은 천 명 이상 교역하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마푸타의 부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먼저 의주 경내로 들어왔고,
8일에는 의주를 지나 6일 만에 한성에 도착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마푸타의 군사 3백 명이 상인으로 위장한 사실은 청측의 연대기에 빠짐없이 등장한다.69)
이는 홍타이지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내린 지시였음을 반증한다.
그는 조선이 여전히 강화 의사를 가지고 있음을 역이용,
자신의 일부 군사를 저항 없이 조선의 내지 깊숙이 들여보내는 데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습’의 효과를 배가시킨 것은 연달아 진격한 선봉군 부대들이었다.
조선 지휘관들의 입장에서 순차적으로 들어오는 부대의 현황을 장계로 올려야 했고,
이는 조선 조정을 혼란에 빠트렸다. 적의 침입에 대한 보고가 연달아서
어지럽게 이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 일대에 모습을 드러낸 청군은 실제보다도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다.70)
조선도 마푸타의 병력이 ‘수백 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71)
그러나 청 후속부대의 도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방어가 취약한 도성에 머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이런 전술을 사용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조선은 정묘호란을 통해 파악된 장점을 활용하여 강화도와 山城을 활용한 지구전을 구상했다.
서북의 백성들을 인근 산성에 입보시킨 뒤,
안주-영변-황주의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강화도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후금의 경험이기도 했다.
청도 조선의 군대가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하고
왕이 강화도로 입보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최소한의 전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강화도 입보를 우선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72)
반면, 우익군과 좌익군이 한성에 신속히 접근하기 위해
서북의 산성을 의도적으로 지나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굳이 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할 이유가 없었음은 분명하다.
조선군의 출성을 유도하여 격파하거나, 출성하지 않을 경우 지나치면 그만이었다.73)
두두가 이끄는 군사와 공유덕 경중명 등의 漢軍이 후방에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게다가 좌익군은 진격 도중에 여러 차례 공성전을 벌였다.
서북의 산성을 무시하고 내지로 直攻을 가하여
순식간에 남한산성으로 도달한 것은 선봉 부대에만 해당된다.
요컨대, 청태종은 전봉군의 축차적 파견으로 조선 국왕을 심리적 으로 압박,
강화도 입보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16일에 나머지 선봉 부대들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밖에 진지를 구축하고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제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 일행은
근왕군이 올라와 구원해주기만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였다.
66)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1月乙卯(15日).
67)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1月丙辰(16日).
68) 滿文老檔 太宗卷 38, 崇德元年(1636) 12月7日.
69)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636) 12月癸酉(3日); 滿文老檔 太宗卷38,
崇德元年(1636) 12月3日; 淸史稿 卷3, 本紀3, 太宗本紀2, 崇德元年(1636)
12月癸酉(3日); 淸史稿 卷526, 列傳313, 屬國1, 朝鮮, 天聰10年(1636).
70) 예를 들어 13일에 “적이 안주에 이르렀다.” 는 김자점의 장계는 전봉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癸未(13日)].
이 보고가 이른 직후 홍제원 일대에 청군이 출현했다. 청의 침입에 대한 ‘공포심’은
냉정한 사태 파악과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71) 承政院日記 54冊, 仁祖14年(1636) 12月甲申(14日).
72) 홍타이지가 조선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대가 믿는 것은 배와 섬이다.… 그대가 섬에 이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은 갈 수 없겠는가?
그대의 8도 백성이 모두 海中의 섬에서 밭을 갈기 충분한가?” 라고 협박한 점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淸太宗實錄 卷28, 天聰10年(1636) 4月乙酉(11日)].
73) 조선과 후금의 관계가 험악해지던 1634년 淸太宗實錄에는
“조선이 의주의 白馬山城, 용천의 龍骨山城, 철산의 雲巖山城, 선천의 劍山城, 곽산의 凌漢山城,
영변의 藥山城(鐵甕山城), 자산의 慈母山城, 평양의 保山山城, 황주의 正方山城, 서흥의 瑞興山城,
재령의 長壽山城, 문화의 九月山城, 해주의 首陽山城, 廣州 南漢山城을 모두 견고하게 쌓았다.”
라는 기록이 나타난다[淸太宗實錄卷17, 崇德天聰8年(1634) 2月乙亥(25日)].
이는 후금(청)이 조선의 산성을 의식하였음을 뜻한다.
Ⅳ. 勤王軍의 활동과 그 의미
1. 諸道勤王軍의 전투 현황
청군의 침입은 비록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평안 황해도에서의 방어가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국왕 인조가남한산성에 고립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로부터 외방 근왕군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근왕군의 출동은 알려져 있는 것보다 신속했고 규모도 상당했다.
이 가운데 충청 강원 경상 전라도 등 4도의 근왕군이 먼저 북상하여
남한산성 부근에서 청군과 전투를 치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전라도 근왕군의 광교산 전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청군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심리적인 압박은 가할 수 있었다.74)
4도 근왕군의 활동에 대한 분석에서는 淸太宗實錄의 내용을 우선적으로 검토하였다.
조선 측의 자료는 전투 현황이나 장수에 대한 평가 등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며,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중심으로 파악된 정보를 담고 있어
체계적인 분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청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 접근하는
근왕군과 연이어 전투를 벌이는 입장이었으므로 시간 순서에 따른 파악이 가능하다.75)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16일 선봉군 전체를 귀환시키면서 심양 등을 지키고 있던
지르갈랑 등에게 서신을 보내어 당시의 전황을 전한다.76)
이 서신에는 선봉군 및 우익군은 물론 좌익군의 전투 현황이 시간 순으로 정리되어 있고,
또 청군 지휘관의 이름은 물론 일부 – 비록 오류가 많지만-
조선 지휘관의 직함이나 성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 주목된다.
이 서신에 따르면 청군은 1637년 1월 16일 이전까지
대략 12번의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 정리된다. 관련 정보를 추출하여
정리한 것이 다음의 [표 2]이다.
[표 2] 청태종의 유시문에 나타난 전투 현황
이상에서 1∼8차는 우익군, 9∼12차는 좌익군의 전투 현황이다.
이 기록은 숫자 면에서 비교적 정확한 기록을 담고 있는데,
자신들이 격파한 적의 규모를 과장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근왕군을 이끈 조선 장수들의 성명은 실제와 다른 점이 발견된다.
1차 전투는 12월 14일 마푸타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李興業의 군사를 격파한 것이다.
2∼3차 전투는 전봉군의 쇼토와 니칸등이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와 병마절도사 이의배의 군대를 격파한 것을 의미한다.
4차 전투는 설러(sele, 色勒)와 아르진(arjin, 阿爾津)이 근왕군을 차단한 전투다.
전투의 시점과 규모로 보아 춘천 영장 권정길의 군대였을 것이다.
5차 전투는 로오사와 우바이(ubai, 吳拜) 등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는 군사를 격파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남한산성에 미처 입방하지 못한 안동, 대구, 원주77)
가운데 한 지역의 병력일 것이다.
원주 목사 李重吉이 12월 27일 도착했던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가 남한산성 입성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6차 전투는 남한산성에서 출성한
별장 신성립 등이 거느린 400명의 군사를 격파한 사실을 지칭한다.
7∼8차 전투는 청 우익군이 남한산성에 도착한 이후에 전개되었다.
7차 전투에서 청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쌍령에서 좌 우병사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과
충청 병사 이의배가 이끄는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사실을 가리킨다.
또 8차 전투는 광교산에서 전라 병사 김준룡과 싸운 것을 의미한다.
9차는 좌익군이 압록강을 건너 당아산성을 함락시킨 것을 가리키며,
10차는 영변 부사 이준과 부원수 신경원의 군사를 요격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 패전한 신경원 등이 영변으로 돌아갔다가 근왕군을 거느리고 나와
남한산성으로 출정한 것을 철옹성 동남쪽 40리 부근의
戰坪에서 패퇴하여 포로로 잡힌 것이 11차 전투이다.
12차 전투는 황주 정방산성에 주둔하던
도원수 김자점이 이끌고 나온 군대를 兎山에서 기습, 격파한 것을 가리킨다.
이상을 통해 각 전투의 대략적인 현황은 파악되었다.
그런데 [표2]는 청군의 전공을 중심으로 기록된
청태종의 유시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60명에 불과한 조선군을 격파한 전투(1차)는 기록한 반면,
광교산에서 전사한 양구리(8차) 등 피해 상황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수차례 출격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는데,
이 유시문에는 자신들이 승전한 사례(6차)만을 포함시켰다.
또 개별 전투를 시간 순이 아닌 전봉군의 전투와 좌익군의 전투를 구분하여
앞뒤로 설명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다음 표는 이 점들을 염두에 두고,
[표 2]에서 남한산성 입성 이전에 벌어진 전투(1 9차)나
조선군이 성을 나와 벌인 전투(6차)는 제외하여 근왕군의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표 3] 병자호란 당시 근왕군의 활동
이 [표 3]는 조선과 청측 자료의 비교 분석을 통해 도출된 것이다.
각 전투에 투입된 양측의 병력 규모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조선군 근왕 활동을 어느 정도 보여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79)
74) 柳在城, 1986, 앞 책, 216쪽.
75) 앞서 유승주는 청태종실록의 내용을 면민히 분석하여 조선의 기록과 대조
한 바 있었다(柳承宙, 2002, 앞 글). 여기서는 유승주의 논지를 적극적으로 활
용하되 일부 보완하여 재정리하였다.
76) 淸太宗實錄 卷33, 崇德2年(1637) 1月丙辰(16日).
77)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7月丁巳(15日).
78)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丁酉(27日).
79) 전투의 시점이나 병력은 기록마다 다르게 나타나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여러 기록을 대조, 근사치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2차 전투에서 신경원의 병력은 5천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어 큰 차이를 보이지만, 청측이 굳이 축소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마 5천이라는 수는 전쟁 발발 당시 영변성의 총 병력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영변성은 요해처로서 守城 또한 중요했으므로
신경원은 정예병만을 추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또한 [표 2] 1차 전투는 조선의 기록보다도 적게 나타나고 있어
청측이 전공의 과장을 위해 숫자를 불렸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표 3]는 이 점들을 고려하여 작성되었다.
이상에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활동을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4도 근왕군의 진격로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 것이다.
[그림 2] 4도 근왕군의 진격 현황
가장 먼저 도달한 충청도 근왕군은 관찰사 鄭世規와 병마절도사 李義培가 인솔했으며,
공주에서 집결하여 천안→안성을 거쳐 죽산에 이르렀다.
정세규는 21일에 獻陵까지 진출하여 산성과 호응할 수 있었다.80)
그러나 곧 용인의 險川으로 물러나 주둔했다가 청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했고,
충청 병사 李義培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죽산산성에서 험천으로 향하는 도중에 청군과 조우하여 패전했다.81)
강원도의 근왕군도 비슷한 시기에 남한산성에 접근했다.
춘천 영장 권정길은 1636년 12월 26일, 儉丹山에 도착하여 산성과 호응하였다.82)
또 비슷한 시기에 원주 목사 李重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자 시도하였으나
29일에 청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했다.
관찰사 趙廷虎는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못한 채, 도원수가 머물던
楊根의 미원으로 물러나 주둔하면서 함경도의 근왕군을 기다리기로 하였다.83)
다음으로 올라온 것은
관찰사 심연,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 등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이었다.
이들은 조령에서 회합하여 충주→여주→이천으로 진군하여
충청 병사 이의배의 군사와 합세한 뒤 雙嶺에 이르러 좌우측에 결진하였다.
이들은 곧 청군의 공격을 받아 차례로 패전하고, 관찰사 심연은 이천에서 조령으로 물러났다.
이어 병마절도사 金俊龍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군이 올라왔다.
관찰사 李時昉은 光州에서 全州를 거쳐 礪山으로 이동하여 김준룡과 회합했다.
김준룡은 먼저 출발하여 천안과 안성을 거쳐 죽산에 도착했고,
곧 光敎山까지 진출하여 결진했으며 이시방은 안성에 머물면서 후원하였다.84)
이를 확인한 청군은 1637년 1월 5일에 공격을 시작하였고,
7일까지 전투가 계속해서 벌어졌다.85)
전라도 근왕군의 선전으로 청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양구리가 전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피해도 컸으므로 김준룡은 한 차례 기습을 받은 뒤,
광교산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시방은 김준룡의 패보를 접한 뒤 공주로 회군하여 금강을 방어하게 된다.
이렇게 충청 강원 경상 전라 등 4도의 근왕군은 모두 신속히 진격하였으나,
상당한 손실을 입은 채 물러나 남한산성에 도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청측에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군의 근왕 활동은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개되어 청 선봉군을 위기에 빠트렸다.
규모가 크지 않았던 선봉군은 청의 주력 부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전한 흔적이 엿보이며, 앞서 언급했듯이 홍타이지는 두 차례에 걸쳐 지원군을 보냈으며,
서둘러 남하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80)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辛卯(21日).
81)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丁酉(27日); 趙慶南, 續雜錄 卷4, 丙子年(12月27日).
82)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丙申(26日).
83)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1月丙午(6日); 羅萬甲, 丙子錄, 仁祖15年(1637) 1月6日.
84) 趙慶南, 續雜錄 卷4, 丁丑年(1月5日).
85)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1月乙巳(5日).
조선 지방군의 근왕 활동은 4도 근왕군의 패전 이후에도 이어졌다.
다만, 청의 주력인 우익군과 좌익군, 후속군이 차례로 합류함으로써
포위망이 두터워져 있어 쉽사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청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남한산성을 에워싸는 한편, 근왕군의 진출을 차단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총 3곳으로 집결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兩西 都元帥김자점과 四道都元帥심기원,86)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 등이 주둔한 薇原이었고,
다른 두 곳은 각각 礪山과 忠州(鳥嶺)에 마련된 전라도, 경상도의 의병진이었다.
이 가운데 두 의병진은 모두 청군의 남하를 방어하면서 근왕군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이고,
조선의 실제 주력이 집결한 곳은 미원이었다.
미원에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은 김자점이었다.
앞서 도원수 김자점과 부원수 신경원의 군사는 인조의 지시를 받고 출성하여
근왕에 나섰다가 각각 兎山과 戰坪에서 참패한 바 있었다.
이들은 4도 근왕군과 비슷한 시점에 남한산성으로 향했지만
그들의 기동로는 청 좌익군의 활동 지역이었다.
부원수 신경원은 포로가 되었고, 김자점은 미원에 들어갔다.
12월 29일과 30일에는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와 도원수 심기원 등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했다.
한편, 전통적으로 정예군이라고 인식된 함경도 군대는
그 규모도 1만 7천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으므로 조정에서 기대를 걸고 있었다.87)
함경도 관찰사 민성휘와 남병사 서우신, 북병사 이항 등은
좌익군이 남한산성으로 이동한 뒤에야 철령을 지나 진격했고,
1637년 1월 6일 김화를 거쳐 9일에 미원에 도착했다.
평안 감사 홍명구가 보낸 별장 張曛의 기병 800명도 합류하여
미원에 집결한 근왕군은 2만 4천여 명을 헤아렸다.88)
그러나 미원에 주둔한 근왕군은 즉각 남한산성의 구원에 나서지 못했다.
남한산성을 에워싼 청군을 공격하기 위해
평안도의 병력의 합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89)
평안 감사 홍명구는 근왕을 위해 포수 3천 명을 거느리고 자모산성에서 나와
강동에서 병사 유림의 5천 군사와 합류하였다.90)
이들은 新溪를 거쳐 26일에는 金化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원에 이르기 전
두만강 일대의 와르카를 조사, 토벌할 목적으로 출발한 청군과 조우했다.
청군과 대치한 상태에서 홍명구와 유림은 좌우로 진을 연결했다.
청군이 돌입하자 홍명구의 군대는 난전 끝에 섬멸되었으나,
유림의 군사들은 조총을 활용하여 응전한 끝에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승리할 수 있었다.91)
평안도 근왕군은 김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狼川을 거쳐 加平으로 진격했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면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미원에 주둔한 근왕군 역시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92)
조선 근왕군의 활동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원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이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각 지역의 근왕군은 국왕의 지시를 받은 직후에 매우 신속하게 출동했고,
청군을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전투를 회피하지 않았다.
또한 병력의 규모도 상당히 컸는데, 정확히 추산할 수는 없지만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병력과 남한산성, 강화도, 미원, 여산, 충주 등에 집결한
조선군의 수를 모두 합친다면 규모 면에서는 청군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 3] 함경 평안 황해 강원도 근왕군의 미원 집결 현황
그런데 仁祖實錄이나 承政院日記와 같은 관찬 연대기뿐만 아니라,
개인 문집류에 이르기까지 근왕군의 활동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사는 도원수와 부원수, 각 도 관찰사 병마절도사를 비난하는 내용이며,
심지어 광교산에서 큰 전과를 올린 김준룡도 “죄가 용서할 만하다.”고 인정받는데 그쳤다.93)
김화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평안 병사 유림도
“비록 공로가 있었다고 하나 형세가 좋은 곳을 먼저 점거한 채 감사와 합세하지 않아
감사의 진지가 먼저 충돌을 당하였는데도 그의 죽음을 좌시하고
나아가 구원하지 않았다.” 면서 국문하라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까지 했다.94)
관련 사료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늦게 올라왔다.”,
“효과를 보지 못했다.”, “모두 패전하거나 도주하였다.” 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져 온 것도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병자호란 당시의 실상을 전하는 대부분의 자료가
‘남한산성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군사와 물자를 징발하고 적정을 파악하는 한편,
타도의 군대와 서로 힘을 합쳐야 했던 외방의 사정은 많은 부분 무시되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근왕군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공정했다고는 할 수 없다.95)
86) 청의 침공 당시 김자점은 都元帥, 심기원은 留都大將이었다. 1636년 12월 30일
심기원이 군공 장계를 올린 것을 계기로 강원도 및 하삼도의 도원수로 임명되었고,
김자점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만을 거느리게 된다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己亥(29日) 庚子(30日);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 (1637) 1月甲辰(4日)].
87) 羅萬甲, 丙子錄, 仁祖15年(1637) 1月5日.
88)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1月丙午(6日) 乙卯(15日); 趙慶南, 續雜錄 卷4, 丁丑年(1月15日).
89) 柳承宙, 2002, 앞 글, 425, 428쪽
90) 평안도 근왕병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큰 편차를 보이고 있는데,
이 글에서 제시한 8천이라는 숫자는 이 가운데 최대치에 해당한다.
평안도 근왕군의 목적이 도원수 김자점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를 제시하였음을 밝혀둔다.
91) 柳承宙, 2002, 앞 글, 426∼433쪽
92)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2月壬申(2日).
93)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2月庚辰(10日).
94)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閏4月己酉(11日).
95) 대표적으로 충청 병사 이의배와 경상좌도 병사 허완의 예를 들 수 있다.
병자호란 직후 이의배는 관찰사 정세규를 지원하지 않은 채
그의 패전을 관망하고 도주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허완 역시 쌍령에서 도주했다고 알려졌다.
이의배에 대해서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주필할 당시부터 군율로 처단하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1月己酉(9日);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1月丁巳(17日)].
또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의배와 허완 모두 ‘拿鞠하라’는 요구가 계속되었다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2月辛巳(11日);
承政院日記 56冊, 仁祖15年(1637) 2月癸未(13日)].
이의배는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추궁 받던 張紳과 동일한 죄로 논해지기도 했으며
[承政院日記 57冊, 仁祖15年(1637) 4月甲戌(5日)],
허완은 아들 許嶈이 부친의 행적을 전했음에도 인조의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承政院日記 60冊, 仁祖15年(1637) 9月甲戌(9日)].
그러나 곧 허완의 행적이 밝혀졌고, 이의배 또한 죽산에서의 패전 이후
경상도 근왕군과 합류하여 쌍령에서 전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허완에게는 경상우도 병사 민영의 예에 따른 추증이 이루어졌다
[仁祖實錄 卷36, 仁祖16年(1638) 3月辛卯(28日)]. 이의배는 당대에 추증되지는 못했는데,
1701년(숙종 27)에 민영과 허완의 예에 따라 領議政에 추증되었고
[肅宗實錄 卷35, 肅宗27年(1701) 5月丁未(21日) 및 6月辛酉(5日)]
1708년에는 ‘忠壯’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肅宗實錄 卷46, 肅宗34年(1708) 12月乙卯(13日)].
이 두 사람은 민영과 함께 皇壇配享諸臣目錄(奎1325)에 올라 있으며,
尊周彙編에도 다른 근왕군 활동과 함께 그 행적이 정리되었다
(尊周彙編 卷4, 皇朝紀年第四, 丁丑春正月癸卯).
이의배와 허완의 사례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 일행이
근왕군의 활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들 외에도 행적이 밝혀져 신원된 인물이 적지 않았다.
2. 營將制에 따른 勤王軍편제와 실효성
4도의 근왕군은 모두 국왕의 지시를 전후하여 이미 출발하였고,
1636년 12월 29일에서 이듬해 1월 7일에 이르기까지
청군과 격전을 치렀던 것을 보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히려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근왕군은 국왕의 지시를 받기 이전에 이미 소집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근왕군의 출발이 지연된 것은 근본적으로 강화의 희망을 놓지 않은
국왕 인조의 징병 지시가 늦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인조는 1636년 12월 14일 남한산성에 들어왔으나, 약 3일 간 징병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인조는 최명길 등을 마푸타에게 보내어 교섭하게 하고,
그가 王弟를 인질로 요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綾峯守李偁을 綾峯君으로 삼아 보내기까지 했다.96)
인조 일행은 청군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강화 의사를 지속적으로 타진하였는데,
이 때문에 근왕군을 불러올릴 최적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후술하겠지만, 사료에서 확인되는 조선 근왕군의 규모를 볼 때
며칠만 출동이 앞당겨졌어도 5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청의 선봉부대를 제압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조는 16일에서야 도원수 부원수, 각 도의 관찰사 및 병마절도사들에게
蠟書를 내려 근왕을 지시한다.97)
이튿날 李厚源은 “여러 도의 징병 납서를 이미 거두도록 하였다고 방금 들었습니다.
적정은 헤아릴 수 없고 화친을 확신할 수 없으니
징병 납서를 급히 내리소서.”라고 말하였다.98)
이 발언은 강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
징병 납서의 발송 여부를 곧바로 결정하지 못했던 사정을 보여준다.
징병 납서는 17일이 되어서야 내려졌고99)
불과 이틀 뒤인 19일에는 강화도의 張紳, 金慶徵, 李敏求등에게
외부의 원병이 이르지 않는다면서 제도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를 부르라고 지시했으며,
그 다음날에도 재차 납서를 내려 병력 동원을 재촉했다.100)
즉, 근왕군의 출동이 늦다는 표현들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의 심경을 반영하는 것이었다.101)
96)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乙酉(15日).
97)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丙戌(16日).
98) 承政院日記 54冊, 仁祖14年(1636) 12月丁亥(17日).
99) 羅萬甲, 丙子錄, 仁祖14年(1636) 12月17日.
100) 仁祖實錄卷33, 仁祖14年(1636) 12月己丑(19日) 庚寅(20日).
101) 김준룡에 대한 처벌 논의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라병사 김준룡은 광교산에서 청군과 싸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늦게 출동하고 결국 潰軍한 혐의를 피할 수 없어
流3천 리의 처벌이 결정되었다. 이조 판서 최명길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대첩을 거두었고, 병영이 멀리 강진에 있으니출발한 날짜를
계산해 보면 변란에 달려간 것이 더뎠는지 혹은 빨랐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김준룡은 전령을 받은 즉시 9일의 거리를 13일 만에 행군하여
광교산에 도착했음이 밝혀졌고, 처벌은 취소되었다
[承政院日記 56冊 仁祖 15年(1637) 3月乙丑(26日)].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근왕군의 출병 시기를 다시 정리해보겠다.
충청도 근왕군은 21일에 헌릉까지 진출해 있었고,
강원도 근왕군도 26일 이전에 검단산에 도착했다.
17일에야 처음 내린 근왕 지시를 들은 즉시,
혹은 그 이전에 출동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상도 근왕군도 23일에 출발하여 30일에 충주를 넘었고,
전라도의 근왕군도 대부분 21일에 집결지인 여산을 출발했다.
4도 근왕군의 출발은 상당히 신속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근왕군의 신속한 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전임 營將에 의해 미리 단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영장은 束伍法에 입각해 편성된 鎭營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束伍軍은 임진왜란 당시 새로운 戰法 체제의 필요성에 따라
戚繼光의 紀效新書를 바탕으로 군대를 재편하면서 마련되었다.
속오군은 영장 이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대오가 분명히 정해져 있어
훈련과 동원이 용이했고, 신속한 출병도 가능했다.102)
창설 당시 영장은 진관 수령이 겸하였으나,
인조대에는 군사지휘를 전담하는 전임 영장이 파견되었다.
인조대 전임 영장 설치는 정묘호란 이후 적을 막을 방도로서 이루어진 조치였다.103)
정묘호란 당시 지방에서 모여든 군사의 수는 약 4만 명을 헤아렸다.104)
단순히 병력으로만 계산하면 후금군에 뒤지지 않는 규모였다.
그러나 지방군을 이끌고 온 수령들은 文官 蔭官이 많아 제대로 지휘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수령과는 별도로 각 지역의 군사를 이끌 ‘전문적인 지휘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인조는 환도한 뒤 병조 판서 이정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임의 營將을 두어
평시에는 군사 훈련을 전담시키고 유사시에는 군사를 이끌고 오게 함으로써 상존하는
후금과의 전쟁 위협에 대비하는 무력 장치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병자호란 발생 한 달 전인 1636년 11월, 李聖求는 경연석상에서
외방의 군사를 道界에 모아두고 몇 달 동안 대기시켜야 한다는 주장했다.105)
다음날, 비변사에서는 경상도 좌 우병사, 충청 병사, 전라 병사, 춘천 영장 등으로 하여금
삼남과 강원도의 정예군 18,300명을 뽑아 두고
12월 10일까지 境上에 대기시켜 둘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106) 유사시 4도의 병력을
병마절도사와 영장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할 계획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07)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1637년 2월 16일에는 營將을 혁파했던 사실도 이를 반증한다.108)
정묘호란 이후 설치된 영장제는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한 장치였고,
패전으로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혁파되었던 것이다.109)
102) 일례로 임진왜란기인 1598년 7월에는 군사 동원과 관련하여
“작년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 징집되어 올라온 군사가 거의 1만 명에 달하는데
모두 10여 일 사이에 도착했으니, 이는 속오법으로 단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는 언급이 확인된다
[宣祖實錄 卷102, 宣祖31年(1598) 7月甲午(11日)].
이 시기는 속오법에 입각한 군사 편제가 처음 활용되던 시점이었음에도
조직화된 수천 명의 군사를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었던 요인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103) 兪致範, 一哂錄 卷19, 外道營鎭, “仁祖朝丁卯設諸道鎭營將者爲其防遏敵鋒以衛國家之計”
104) 仁祖實錄 卷16, 仁祖5年(1627) 4月丙辰(20日).
105)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1月壬子(12日).
106)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1月癸丑(13日).
107) 전쟁이 끝난 후 각도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는 근왕에 태만했던 일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된다.
그 가운데 현재 확인되는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의 공초를 통해 전라도에 五營즉,
다섯 개의 진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각 영장의 이름부터 행적까지 구체적으로 나타나 참고가 된다
[趙慶南, 續雜錄 卷4, 丁丑年(4月供招)].
108) 仁祖實錄 卷34, 仁祖15年(1637) 2月丙戌(16日).
109) 기존 연구는 병자호란 당시 영장이 유명무실했다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車文燮, 1970, 앞 책, 236쪽; 徐台源, 1999, 앞 책, 62쪽; 金友哲, 2001, 앞책, 98쪽).
서태원을 제외하고는 병자호란 때의 영장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徐台源, 1999, 앞 책, 61쪽),
서태원도 영장의 혁파를 주로 경제적인 요인과 사회적 폐단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영장의 혁파는 군사 조련할 필요성이 줄어든 것과,
축적된 폐단으로 인해 ‘剩官’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루어진 조처였다
[承政院日記 56冊, 仁祖15年(1637) 2月丙戌(16日)].
그러나 설치 직후부터 폐단이 발생한 영장제를 유지하다가 이 시점에 폐지하게 된 것은
전란 당시 영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장제를 통해서 조선 근왕군의 병력도 대략적인 추산도 가능하다.
우선 1604년 전라도의 사례를 살펴보자.
당시 전라도에는 前營 前別營 左營 右營 中營 後營등 총 6개의 鎭營이 있었고
이 가운데 前營 前別營은 舟師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中營과 後營의 병력이 7천여 명이었음이 확인된다.110)
시기나 지역에 따라 병력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때 전라도의 한 진영은 대체로 3,500명 정도를 기준으로 삼아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李民寏의 柵中日錄에 따르면 1619년 2월 출동하여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 가운데 도원수와 부원수의 표하군을 제외한
3개 진영의 병력도 각각 3,350명, 3,480명, 3,370명이었다.111)
전임 영장이 파견을 결정한 직후인 1627년 5월 파악된 장부에 따르면
황해도의 속오군은 12,000여 명, 충청도는 8,984명,
경상도는 24,400명, 전라도는 13,425명 정도였다.112) 이 가운데 경상도 속오군은
이듬해 관찰사 洪霶에 의해 총 숫자가 24,000여 명으로 언급되었고,113)
1631년에 확인되는 충청도 속오군의 규모는 1만여 명이었다.114)
또 황해도의 속오군은 병자호란 당시 出身 武學 3,104명을 합쳐
총 11,783명이었음이 확인되기도 한다.115)
이는 1627년의 병력과 대동소이한 규모이며,
경상도에는 6개, 충청도와 황해도에는 5개의 진영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하나의 진영은 적게는 2천 명에서 많게는 4천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이 가능하다.
각 鎭營의 병력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1636년 7월 守禦使 李時白에 따르면
경기도 좌영의 병력은 총 2,099명, 강원도 원주 영장 소속 병력이 1,921명,
경상도 안동 영장 소속 병력은 5,263명, 대구 영장 소속 병력은 3,498명 등이었음을 통해
지역마다 병력 규모가 달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116)
그런데 1627년 10월에는 경기도 廣州의 진영의 병력이 3천여 명으로 나타나고,117)
또 1636년 12월 경기도 南陽영장의 병력도 3천여 명으로 나타나고 있다.118)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지역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한 진영의 병력은 평균적으로 3천여 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8도에 설치된 진영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32개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119)
1627년 4월 20일의 營將節目에는 각 도에 5개의 진영을 두도록 하되,
강원도나 함경도 등 인구가 적은 지역은 3∼4개의 진영을 설치하도록 했다.120)
연대기 사료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에 5개씩의 진영이 있었고,
함경남도와 강원도에는 3개의 진영이 있었으며,
경상좌도와 우도에는 각각 3개씩 총 6개의 진영이 있었다는 사실이 파편적으로 확인된다.
즉, 평안도를 제외하고도 진영의 수가 32개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들어간 병력까지 포함하여
동원 가능한 속오군의 총수는 최대 10만여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10) 宣祖實錄 卷172, 宣祖37年(1604) 3月己未(9日).
111) 李民寏, 紫巖集 卷5, 雜著, 柵中日錄(己未二月),
“中營將定州牧使文希聖中軍江西縣令黃德韺領兵三千三百五十名左營將宣川郡守金應河中軍
永柔縣令李有吉領兵三千四百八十名右營將順川郡守李一元中軍雲山郡守李繼宗領兵三千三百七十名”
112) 承政院日記 17冊, 仁祖5年(1627) 5月戊寅(13日),
“黃海道亂後時存至於一萬二千餘名而忠淸道則只以八千九百八十四名成籍多寡相懸
全羅道人民之衆倍於慶尙道而慶尙道則二萬四千四百名全羅道則只以一萬三千四百二十五名”
113) 仁祖實錄 卷19, 仁祖6年(1628) 12月癸巳(7日).
114) 仁祖實錄 卷25, 仁祖9年(1631) 9月庚寅(19日).
115) 仁祖實錄 卷35, 仁祖15年(1637) 12月甲子(30日).
116) 承政院日記 52冊, 仁祖14年(1636) 7月丁巳(15日).
117) 承政院日記 19冊, 仁祖5年(1627) 10月庚申(27日).
118) 承政院日記 54冊, 仁祖14年(1636) 12月丙申(26日).
119) 서태원, 1999, 앞 책, 78∼83쪽
120) 仁祖實錄 卷16, 仁祖5年(1627) 4月丙辰(20日).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꾸준히 10만 명 정도를 기준으로 속오군을 단속하고자 노력했다.
1627년 4월 전임 영장의 설치가 결정되었을 때, 인조는
“군병의 수가 10여 만은 되어야 늙고 약한 자를 구분하여 쓸 수 있다.” 고 말하였다.
이는 일종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1628년 2월에는 8도 속오군이 10만 명으로 나타나고 있고,121)
1633년에도 90,070여 명을 유지하고 있었다.122)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 7월 都體察使 金瑬의 보고에 따르면
8도의 軍案에 나타난 諸色軍과 束伍軍의 총수는 118,825명이었고,
이 가운데 속오군은 86,073명이었다.123)
또 1640년에 확인되는 병조의 都案에 따르면
전쟁(병자호란) 이전 8도의 編伍軍이 101,914명에 달하고 있었다.124)
물론 10만 병력 가운데 정예병의 비율이 어느 정도였을지 분명히 확인할 수 없고,
장부상의 수치도 정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10만 명의 속오군 확보를 목표로 삼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125)
실제로 어느 정도의 성과는 보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26)
정리하자면 병자호란 당시 상당한 규모의 지방 근왕군이
남한산성에 신속하게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영장제를 활용하여 鎭營을 사전에 정비해두었기에 가능했다.127)
이는 조선이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에 이르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안주-영변-황주의 1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요새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장기전에 대비한 군사조직의 정비에도 노력을 기울였음을 뜻한다.
1627년 5월에 확인되는 각 지방 속오군의 규모가
이후에도 대동소이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이 영장의 설치로 인해 발생한 행정적 재정적 사회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병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을 고려할 때,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방어책의 마련을 등한시했다는 통설적인 설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향후 보다 분석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글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한다.
121) 仁祖實錄 卷18, 仁祖6年(1628) 2月庚申(28日).
122) 仁祖實錄 卷28, 仁祖11年(1633) 2月丙寅(4日).
123)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7月丙午(4日).
124) 仁祖實錄 卷41, 仁祖18年(1640) 12月丁未(1日).
125) 영장제를 통한 속오군의 편성은
병자호란 당시 자발적인 義兵의 규합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
그동안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이 저조했던 이유로 짧은 전쟁 기간,
평안 황해 경기도에 집중되었던 전장의 범위 등을 들고 있다(李章熙, 1991, 앞 글).
이 시기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兵禍가 미치지 않았지만,
인조의 敎書를 받은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이 결성되었다
(湖南丙子倡義錄, 敎文; 虎溪先朝遺集 卷4, 倡義錄, 通諭道內文).
병자호란 당시 기병한 의병진의 대부분은 관군에 예속되어 공조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전라도는 體府從事官金光爀이 鄭弘溟을 호남의병장으로 삼아 관찰사 이시방과 함께 여산에 주둔했고,
경상도는 體府從事官趙錫胤이 全湜을 영남의병장으로 삼아 충주에 본영을 둔 관찰사 심연과 합류했다
(李肯翊, 燃藜室記述 卷26, 仁祖朝故事本末, 事蹟).
흥미로운 점은 여러 의병의 기록에서
속오군으로 인해 병력을 모집할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상도의 의병장 신적도는 병력을 모집하는 節目에서
“지금 장정들이 모두 관군에 편입되어 한 명도 남아 있지를 않아 의병을 불러 모으기가
정묘년 때보다 배나 어렵다.” 고 했고(虎溪先朝遺集 卷4, 倡義錄, 節目),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安邦俊도 막하의 李時遠에게
“編伍에서 빠진 군사를 모집하라.”고 지시했다(丙子倡義錄, 傳令李時遠).
이러한 언급들은 당시 조선의 정예군 대부분이
속오군으로 편제되어 관찰사, 절도사, 영장 등을 따라 출동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126) 병자호란 당시 영장제가 나름의 성과를 나타냈다는 점은 1641년 비변사에서
“당초 영장을 설치한 것은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였고, 병자년의 전쟁 때에도 도움이 없지 않았다
(當初營將之設實非偶然丙子之亂亦不無所益).”고 하거나,
또 “영장이 군대를 영솔하고 조련하면 적과 싸울 때 많은 도움을 얻는다.
이는 병자 정축년 때 그 실효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蓋營將領兵操鍊則極有裨於臨敵臣於丙丁時詳知實效).” 고 언급하는 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備邊司謄錄6冊, 仁祖19年(1641) 7月丙戌(12日) 辛卯(17日)].
이는 인조대 말부터 전임 영장의 復設논의가 나타나고,
효종대에 三南지역에 전임영장의 파견이 실현된 이유였다.
127) 1631년 사간원은 “우리 나라에서 소위 군사라는 것은 오직 각 진영에 소속된
병력이 있을 뿐”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仁祖實錄 卷25, 仁祖9年(1631)
閏11月壬寅(3日), “各營所屬軍兵不啻累千我國之所謂兵者只此”].
Ⅴ. 맺음말
이 글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국왕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각 지방의 근왕군이 어떤 경로로 집결하고
또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작성되었다.
그동안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등 대규모 전쟁을 경험했음에도
충분한 군사적 대비를 갖추지 못한 채,
의리론을 고수하여 자초한 전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통설은 전쟁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 접근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조선은 선조대부터 건주여진의 발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정세 파악에 주력하고 있었다.
광해군대를 거쳐 인조대까지 건주여진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後金으로,
다시 淸으로 거듭나고 명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분명히 인지하였고, 언제든 침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 아래 외교적 군사적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조선은 후금(청)과의 접경지인 평안도의 방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정비되어온 압록강의 방어는
후금이 일개 부족에서 강대한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점차 실효성이 낮아졌다.
특히 후금이 요동을 함락한 광해군 이후, 평안도 방어책의 정비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평안도 의주 일대에 毛文龍을 비롯한 명의 유민들이 결집하면서
언제든 후금과의 충돌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기도 했다.
광해군과 인조대에는 압록강보다는
내지의 방어에 충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방어책이 전환되어 갔다.
평안 병영의 이설(영변→안주)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또 정묘호란이라는 실전 경험은 압록강뿐만 아니라,
청천강 이북 전체의 방어가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안주와 영변을 잇는 방어선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전력을 집중하면서 청천강 이북에는
피난처 혹은 입보처로서 山城의 축조가 진행되었고
병자호란 직전에는 적의 수도권 진입을 막기 위한 황주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안주-영변-황주를 잇는 종심 깊은 역삼각형태의 방어지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적이 한성까지 진격할 경우를 대비하여
이전부터 保障處로서 활용된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보완에도 노력했다.
두 곳에 입방할 군사를 마련하는 것부터
성곽을 포함한 방어 시설의 건설, 군량과 무기의 저축 등이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각 지방에 영장을 설치하여 지방군을 단속시켜 둠으로써
적이 서북 지역을 통과하여 국왕이 강화도로 파천할 경우에 대비했다.
이러한 대비책은 모두 정묘호란이라는 경험을 토대로 마련된 것이었다.
이상의 방어전략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으나 충분한 방비책이 되지는 못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청군의 우월한 군사력에서 찾아야겠지만,
청의 침입을 두려워한 나머지 강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둠으로써
조선이 스스로 침공을 용이하게 만들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국왕 인조가 강화도에 대한 차선책으로 남한산성에 입보한 순간,
조선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포기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근왕군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 관군 및 의병이 보인
적극적인 군사 활동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청의 군사력에 대한 ‘공포심’은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지방의 근왕군을 불신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증폭되었다.
결국 인조는 청군의 압박에 출성항복 및 척화신의 압송이라는
극단적인 조건까지 수락하는 ‘무조건적 항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음으로써 명 청 교체의 큰 흐름에 동참한다.
병자호란 당시 근왕군의 활동은 이러한 정세를 변화시킬 만한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에 입각하여 근왕군의 활동상을 저평가하는 것 또한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병자호란의 연구에 대한 전망으로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향후 병자호란 연구는 그것이 ‘전쟁’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국제적 역학 관계나 정치 사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군사적 실상을 함께 고찰하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전모와 실상을 입체적으로 밝히기 위한
세밀하고 분석적인 연구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당시 국제적 역학관계에서 조선의 위치나 역할을 정확히 자리매김하고
오늘날의 현실적 교훈으로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丙子胡亂, 淸, 南漢山城, 勤王軍, 營將, 束伍軍, 防禦戰略
투고일 : 2016. 05. 01. 심사완료일: 2016. 05. 25. 게재확정일: 2016.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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