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丙子胡亂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 / 구범진, 이재경

이름없는풀뿌리 2022. 6. 7. 10:34
□ 丙子胡亂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 丙子胡亂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 구 범 진**․이 재 경*** 1. 머리말 2. 병자호란 전야 ‘다이칭 구룬’의 軍勢 1) 팔기만주․팔기몽고 2) 우전 초하와 天佑兵․天助兵 3.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병력 4. 외번몽고의 병자호란 참전 규모 5. 맺음말 1. 머리말 仁祖14년(淸崇德원년) 丙子年12월 8일(1637년 1월 3일)1) 청군의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丙子胡亂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이듬해 丁丑年 정월 30일(1637년2월24일) 이른바 ‘三田渡의 恥辱’ 속에 막을 내렸다.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은 단기전이었지만 전쟁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어찌 보면 17세기 중엽 이후의 조선 역사가 곧 병자호란으로 입은 상처의 치유와 극복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이 논문은 2008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8-361-A00007).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1) 양력(그레고리력) 연도와 날짜로 표시할 경우 병자호란의 발발 연도는 1636년이 아니라 1637년으로 적어야 한다. 丘凡眞, 2005 「역법 문제와 한국사 서술: 날짜 표기의 혼란과 오류」 歷史敎育 94, 272-273면 참조. 따라서 병자호란이 임진왜란과 더불어 ‘兩亂’으로 병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에 관한 한국사 분야의 연구는 임진왜란과 비교할 때 아직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나마 이루어진 연구도 대부분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의 배경이나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전쟁 자체에 대한 관심의 저조는, 어쩌면 피해는 엄청났을지언정 그래도 장기간에 걸친 거국적인 항쟁 끝에 승리를 거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불과 수십 일 만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욕적인 패배를 인정해야 했던 전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수에 그치고 있는 전쟁 자체에 대한 연구마저도 청 쪽의 사료를 거의 이용하지 않거나 당시 청의 상황이나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적잖은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2) 한편 중국사 분야에서도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다고 할 수 없다. 병자호란이 단기전이면서도 청의 일방적인 승전으로 싱겁게 끝나 버린 탓에 연구자의 흥미가 반감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지금까지 ‘入關’ 이전의 淸史연구에서 조선과의 관계가 기껏해야 주변적인 주제로 취급되어 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입관’ 이전의 청사 연구에서 명과의 관계가 ‘主’, 몽골과의 관계가 ‘副’였다면, 조선과의 관계는 간혹 등장하는 ‘에피소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이런저런 이유로 관심이 저조하다 보니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자체의 전개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 결과 전쟁의 실상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규모에 대해서조차 본격적인 고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침략의 당사자였던 청 쪽의 기록에는 뜻밖에도 滿文․漢文을 막론하고 청군의 총수에 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당시 조선이나 명의 기록에 “십 수만”,3) “12만”,4) “14만”,5) “15만”,6) “30만”7)등 다양한 숫자가 등장할 뿐이다. 2) 柳承宙, 2002 「丙子胡亂의 戰況과 金化戰鬪一考」 史叢 55, 391-392면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였으나, 그의 논문 역시 乾隆연간에 改修된 한문본 淸太宗實錄을, 그 중에서도 병자호란과 직접 관련된 부분만을 참고한 탓에 오류가 적지 않다. 3) 崔鳴吉, 遲川集 卷17, 雜著, 「移陳都督咨(丁丑)」; 李植, 澤堂集 卷7, 咨文, 「陳都督前咨文(丁丑)」(이상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4) 南礏, 南漢日記(申海鎭역주, 2012 남한일기, 보고사), 丁丑2月3日, 72-73면 “淸兵自號二十萬詳問于丁卯被虜諸人則實七萬蒙兵三萬孔耿兵二萬合十二萬矣”; 李肯翊, 練藜室記述(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卷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의 기록도 같다. 5) 羅萬甲, 丙子錄(尹在瑛譯, 1985 丙子錄, 삼경당), 「急報以後日錄」, 丁丑2月8日, 305면 “軍號二十萬而其實十四萬也.” 6) 談遷, 國榷(張宗祥校點, 1958 國榷 六, 北京: 中華書局) 卷95, 崇禎崇德9년 12월丁酉, 5772면 “時建虜十五萬騎侵朝鮮皆西虜及遼將孔有德耿仲明爲先鋒大殺掠.” 7) 仁祖實錄(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http://sillok.history.go.kr) 卷34, 인조 15년 정월1일 “虜汗合諸軍結陣于炭川號三十萬.” 그러나 이들 숫자는 기록간 편차도 크거니와, 被擄人의 목격담 혹은 傳聞에 의존하거나(南漢日記․國榷), 명을 상대로 조선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작성되거나(遲川集․ 澤堂集), 조선 국내에서 청의 군세를 과장할 정치적 동기가 있었던(仁祖實錄) 기록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8) 한편 18세기 이후 청에서 편찬된 官撰․私撰사료에 등장하는 “10만”이라는 숫자는,9) 그 기원을 따져보면 三田渡碑文, 즉 ‘大淸皇帝功德碑’ 비문의 “皇帝東征, 十萬其師”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10) 삼전도 비문의 성격상 “10만” 역시 수사적 과장의 결과가 분명하기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병자호란 관련 연구에서는 대체로 漢文사료의 기록 중 하나를 골라서 청군의 규모로 제시하는 수준에 그쳤다. 다만 병자호란에 대한 종합적인 軍事史연구서인 柳在城의 丙子胡亂史에서는 청군의 병력으로 “128,000명”이라는 숫자를 제시하고 여러 부대의 편제와 각각의 규모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바 있다.11) 병자호란사가 제시한 청군의 규모와 편제는 적잖은 연구자가 인용하였지만, 저자 본인이 밝혔듯이 사료적 근거가 없이 임의로 작성한 것이었다.12) 8) 참고로 전쟁이 끝난 뒤 조선 조정에서는 청군의 전사자를 7천여 명으로 파악한 바 있는데(仁祖實錄 卷35, 인조 15년 7월 4일), 이 역시 명확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9) 皇淸開國方略(文淵閣四庫全書本) 卷27, 崇德 4年 12月 庚戌 “皇帝東征十萬其師”; 魏源, 聖武記(韓錫鐸· 孫文良點校, 1984 聖武記, 北京: 中華書局) 卷6, 外藩, 「國初征撫朝鮮記」, 258면 “共十萬.” 후자는 전자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10) 宋康鎬, 2011 「三田渡大淸皇帝功德碑의 硏究」만주연구 11, 334-335면 및 356면. 11) 柳在城, 1986 丙子胡亂史,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34-135면. 12) 위의 책, 308면의 주24). 관견에 한해 실증적 증거에 기초하여 실상에 접근하려고 한 연구자는 臺灣의 黃一農이 유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黃一農은 八旗漢軍문제를 다룬 논문에서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과 관련하여 종래 인용되어 온 병력 숫자의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사료상의 증거에 기초하여 청의 원정군이 “披甲軍士”, 즉 정규 병력 약 2만 명과 약간의 “閑散無甲之人”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13) 黃一農이 제시한 약 2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의 滿文․漢文기록에 근거하여 산출된, 현재 시점에서 가장 실증적인 수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黃一農스스로 인정하였듯이, 八旗蒙古의 참전 병력이 누락되었으며,14) 漢軍병력에 대한 추정은 근거가 박약하다. 또한 黃一農은 병자호란 참전 外藩蒙古15) 병력이 거의 전부 崇德2년 초의 와르카(Warka) 원정에 나섰다고 간주하였는데, 후술하는 바와 같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黃一農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하였다. 13) 黃一農, 2004 「紅夷大炮與皇太極創立的八旗漢軍」 歷史研究 2004-4, 93면. 黃一農의 병력 추산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병자호란 당시 八旗滿洲에서 니루마다 32명의 甲士(uksin)를 참전시켰다는 기록과 崇德4년(1639) 팔기만주의 니루 숫자가 약 240개였다는 사실을 결합하여 팔기만주의 참전 병력을 약 7,000명으로 보았다. 다음으로 漢軍을 전원 동원했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1636년 당시 漢軍이 약 38개 니루로 이루어졌으며 니루마다 200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보아, 漢軍역시 약 7,000명이 참전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여기에 외번몽고의 병력이 4,000~5,000명 있었다고 추정하였는데, 이는 崇德2년(1637) 정월 조선에서 출발했던 와르카(Warka) 원정군 3,600명과 4월의 椵島(=皮島) 공격에 투입된 병력을 합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三順王”으로 통칭되며 팔기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부대(天佑兵과 天助兵)를 거느렸던 孔有德․耿仲明과 尙可喜의 병력이 약 1,900명이었다고 파악하였다. 14) 위의 논문, 95면. 15) 이 글에서는 蒙古와 몽골(Mongol)을 ‘몽골’로 통일하되, ‘팔기몽고(jakūn gūsa i monggo)’와 ‘외번몽고(tulergi golo i monggo)’는 청의 제도 용어이며 만주어 표기도 ‘monggo’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몽고’로 쓰기로 한다. 한편 ‘외번몽고’라는 개념의 성립에 대해서는 이선애, 2014 淸初期外藩(tulergi golo) 형성과정과 理藩院,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04-110면 참조. 이 글에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연구 상황을 참조하는 동시에 당시 청의 상황과 기록에 근거하여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청군의 구성과 정규 병력의 규모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16) 먼저 제 2장에서는 병자호란 전야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 大淸國)’ 자체의 전시 병력 동원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병자호란 무렵 八旗滿洲, 八旗蒙古, 우전 초하[ujen cooha, 烏眞超哈(훗날의 八旗漢軍)], 天佑兵․天助兵등 ‘다이칭 구룬’ 자체에서 동원이 가능했던 최대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드러날 것이다. 다음으로 제 3장에서는 滿文․漢文기록에 근거한 계산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팔기와 우전 초하 및 天佑兵․天助兵의 병력을 추산할 것이다. 이어서 제 4장에서는 ‘다이칭 구룬’과 군사적 동맹 관계에 있던 외번몽고 각 집단의 병자호란 참전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따져볼 것이다.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병자호란 당시 외번몽고를 포함한 청군 진영의 정규병력은 대략 34,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물론 병자호란의 실상을 재구성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을 터이지만, 당시 ‘다이칭 구룬’의 군사적 역량, 조선이 직면해야 했던 군사적 도전의 규모,17) 그리고 전쟁을 도발한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병자호란의 의미 등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도 적잖이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 병자호란 전야 ‘다이칭 구룬’의 軍勢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청군의 구성과 병력 규모를 고찰하기에 앞서, 그 전제 조건, 즉 조선 침공 직전 ‘다이칭 구룬’의 軍勢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이칭 구룬’의 군사 역량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 그 군사 역량을 구성하는 각 요소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병력을 낼 수 있었는가? 병자호란 직전의 시점에서 ‘다이칭 구룬’ 자체의 군사 역량은 상시 조직으로서의 편성 여부를 기준으로 크게 팔기 내부와 외부의 조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다시 팔기만주와 팔기몽고로, 후자는 다시 ‘우전 초하(ujen cooha, 重軍)’와18) 天佑兵(abkai aisilaha cooha)․天助兵(abkai nonggiha cooha)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아래에서는 먼저 팔기만주․팔기몽고의 병력을, 이어서 우전 초하와 天佑兵․天助兵의 병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팔기만주․팔기몽고 널리 알려진 대로, 八旗(jakūn gūsa)란 여덟 개의 구사(gūsa)를 의미하며, 각 구사는 기층 조직 단위인 니루(niru)가 여럿 모여 이루어진 행정․군사 조직이었다. 니루와 구사는 원래 필요에 따라 임시로 조직되는 것이었으나,19) 누르하치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점차 상시 조직으로 탈바꿈하였다. 누르하치는 세력 확장 과정에서 무력으로 복속시켰거나 자발적으로 복속해 온 사람들을 니루-구사로 조직해 나갔다. 1601년경에는 300명마다 니루 어전(nirui ejen)을 1명씩 두는 니루의 ‘개조’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1607년경에는 4개의 구사가 확립되었고, 1615년에 다시 8개 구사로 확대되어 팔기 체제가 성립되었다.20) 1615년에 일단 완성을 본 팔기 체제는 홍타이지 시기에 들어서서 양적․질적 팽창을 경험하였다. 天聰9년(1635) ‘팔기몽고’가 새로 편성되었고, 누르하치 이래의 팔기는 ‘팔기만주’로 불리게 되었다. 16) 이 글의 본문에서 다루는 청군의 병력 규모는 정규병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노복으로서 주인을 따라 종군하는 쿠툴러(kutule, 從僕) 같은 존재는 일단 논외로 삼는다. 다만 맺음말에서 그들의 수가 대략 얼마나 되었는지 간단히 추정해 볼 예정이다. 17) 병자호란이 전쟁사적으로 조선에 끼친 영향과 이로 인한 군대 편성의 변화에 대해서는 노영구, 2012 「16~17세기 鳥銃의 도입과 조선의 軍事的변화」 韓國文化 58, 130-134면 참조. 18) 후술하듯이 崇德2년의 구사 편성 전까지 우전 초하 소속 인원은 평시에는 팔기 각 구사의 니루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전시에는 팔기와는 별개의 조직으로 편성되어 활동하였다. 따라서 팔기만주․팔기몽고와 같은 상시적인 니루․구사 조직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19) 여진어로 ‘화살’을 뜻하는 ‘니루’는 원래 10명 정도로 구성되는 임시 수렵 조직이었다. 滿洲實錄(1985 淸實錄 1, 北京: 中華書局영인본) 卷3, 辛丑年(1601), 117上-118下면 및 유소맹(이훈․이선애․김선민 옮김), 2013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푸른역사, 112-118면 참조. ‘구사’는 여진어로 ‘軍團’을 뜻하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원래 50騎를 단위로 하였다고 한다 (三田村泰助, 1962 「初期滿洲八旗の成立過程について: 明代建州女眞の軍制」 淸水博士追悼記念明代史論叢, 東京: 大安, 327-332면). 20) 팔기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있다. 간략한 설명으로는 유소맹, 앞의 책, 219-255면 참조. 漢人의 니루-구사 조직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崇德2년(1637) 7월 처음으로 ‘팔기한군’21) 2개 구사가 만들어졌고, 崇德4년(1639) 6월 4개 구사를 거쳐, 崇德7년(1642) 6월 8개 구사의 편성이 완료되었다. 이로써 팔기 안에 팔기만주․팔기몽고․팔기한군이 병립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병자호란 전야의 팔기에 팔기만주와 팔기몽고만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전야 팔기만주․팔기몽고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정규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滿洲實錄은 팔기의 형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태조 쿤둘런 한(taidzu kundulen han)은 곳곳을 평정하고 3백 壯丁에 1 니루 어전(nirui ejen), 5 니루에 1 잘란 어전(jalan i ejen), 5 잘란에 1 구사 어전(gūsai ejen), 구사 어전의 左․右두 翼에 하나씩 머이런 어전(meiren i ejen)을 두었다.22) 이 기록에 따르면 300丁이 1개 니루를, 5개 니루가 1개 잘란을, 5개 잘란이 1개 구사를 각각 구성한다. 따라서 각 구사에는 25개 니루, 7,500丁이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한 正黃․鑲黃․正紅․鑲紅․正藍․鑲藍․正白․鑲白의 8개 구사가 있었으므로, 팔기의 니루는 모두 합해서 200개, 壯丁은 총 60,000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1615년경의 ‘표준’을 밝힌 것이며, 그나마도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실제 각 구사의 니루 수, 각 니루의 壯丁수는 해당 구사․니루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달랐다.23) 예컨대, 天命6년(1621) 윤 2월의 시점에서 팔기의 니루는 모두 합해서 232개였다.24) 21) 우전 초하의 漢名을 ‘漢軍’으로 정한 것은 順治17년(1660)의 일이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팔기한군’이라는 말을 썼다. 22) 滿洲實錄 卷4, 乙卯年(1615), 183上면. 23) 楠木賢道, 2009 淸初対モンゴル政策史の硏究, 東京: 汲古書院, 18면의 주7). 24) 단 ‘半個니루(hontoho)’를 0.5개로 계산하면 231개 니루가 된다. 이밖에 니루로 편성되지 않은 995甲이 있었다. 張晉藩․郭成康, 1988 淸入關前國家法律制度史, 瀋陽: 遼寧人民出版社, 200면 참조. 그 가운데 니루가 가장 많았던 鑲藍旗에는 61개 니루가 있었지만 가장 적었던 鑲白旗에는 15개 니루밖에 없을 정도로 구사 간 격차가 컸다.25) ‘각 구사 25개 니루, 팔기 전체 총 200개 니루’는 어디까지나 ‘이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니루 자체가 기존 집단을 해체해 버리고 완전히 새로 편성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혈연․지연 집단을 그 존재 양태를 감안하여 재편한 것이었기 때문에 장정의 숫자도 니루마다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다.26) 이에 天聰 연간 들어서서 홍타이지는 ‘각 구사 30개 니루, 8개 구사 240개 니루’로의 표준화를 추구하는 한편,27) 각 니루의 장정수를 감축하여 200정을 표준으로 삼았다.28) 그런데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니루당 甲數, 즉 甲士(uksin)의 수이다.29) 25) 滿文老檔(滿文老檔硏究會譯註, 1955~1963 滿文老檔 I~VII, 東京: 東洋文庫) I, 太祖18, 天命6年閏2월 26일, 274-275면. 1607년경 4개 구사의 성립 당시 누르하치(黃旗)․슈르가치(Šurgaci, 藍旗)․추영(Cuyeng, 白旗)․다이샨(Daišan, 紅旗)이 각각 하나씩의 구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黃旗․紅旗는 각각 正․鑲으로 갈라졌고, 藍旗는 그대로 鑲藍旗가 되어 슈르가치의 아들 아민(Amin)에게 계승되었으며, 白旗는 추영의 死後正藍․正白․鑲白의 세 구사로 쪼개졌다. 니루 수에서 구사 간 편차가 컸던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增井寛也, 2009 「マンジュ國<四旗制>初建年代考」立命館東洋史學 32, 20-23면 참조. 26) 유소맹, 앞의 책, 225면 참조. 단,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211-212면에서는 天命연간에 편성된 니루들의 경우는 장정이 300명에 “접근”했다고 보았다. 27) 內國史院檔: 天聰八年(東洋文庫淸朝滿州語檔案史料の総合的研究チーム譯註, 2009 內國史院檔: 天聰八年本文, 東京: 東洋文庫東北アジア硏究班), 天聰8년 9월 21일, 302-305면. 28) 전투 손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天命 연간의 니루당 300정이라는 ‘표준’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谷井陽子, 2015 八旗制度の硏究, 京都: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31면).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212-213면에서는 天聰․崇德연간에 새로 편성된 니루는 300丁의 定制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니루의 규모가 점차 축소되고 있던 추세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다만 니루당 300명에서 200명으로 감소한 시점은 八旗通志初集의 기술이 애매하여 확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承志가 소개한 正藍旗滿洲소속 니루의 내력을 기록한 문서를 보면 (承志, 2009 ダイチン․グルンとその時代, 名古屋: 名古屋大學出版會, 428면), 니루 규모의 축소가 공식화된 것은 天聰8년(1634)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天聰5년(1631)의 大凌河원정 때 니루마다 200명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60甲을 동원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楠木賢道, 앞의 책, 149면), 실질적으로는 天聰초부터 니루의 규모가 300명에서 200명으로 변화해 간 것으로 보인다. 29) 만주어의 “uksin”은 ‘甲’ 또는 ‘甲을 갖춘 정규 병사’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 “uksin”은 모두 후자, 즉 甲士의 의미이다. 楠木賢道, 앞의 책, 149면 참조. 이론적으로는 니루의 모든 장정이 출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무장과 출전에 따르는 각종 부담을 甲士가 지는 당시의 현실에서 300정이든 200정이든 니루 소속 장정 전원에게 甲士로서의 군역을 부과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누르하치 시기에는 요동 정복 이후 니루당 최대 150명(300丁의 2분의 1)의 甲士를 동원한 사례도 보이지만,30) 명과의 군사적 대립이 장기화한 상황에서 장정의 절반을 甲士로 삼는 것은 지속가능한 일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늦어도 天聰5년(1631) 이후에는 니루마다 60甲, 즉 전체 200정의 대략 3분의 1 정도를 甲士로 동원하는 방식이 정착되었다.31) 홍타이지가 “滿洲出兵, 三丁抽一”이라고 밝혔듯이,32) 天聰후기 팔기 각 니루의 병력 동원 기준은 60갑이었던 것이다. 한편 누르하치 이래의 팔기 조직과 별도로 팔기몽고가 창설된 것은 天聰9년(1635)의 일이었지만,33) 몽골인의 내속은 天命초년부터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天命9년(1624)에 이르러 이들 몽골인을 팔기 조직에 편입시켜 구사마다 5개 니루씩 총 40개 니루로 편성하였다. 평시에 이들은 각 구사에 分屬되어 있었지만, 전시가 되면 각 구사에서 추출되어 별개의 ‘구사’, 즉 작전단위가 되어 ‘蒙古兵(monggo cooha)’이라고 불렸다.34) 그 뒤로 차하르(Cahar)35) 릭단(Ligdan) 칸의 압박을 받아 복속해 오는 몽골인이 증가하자, 홍타이지는 天聰2년(1628) 기존의 ‘몽고병’과 합쳐 ‘몽고의 2개 구사’를 만들었다. 사료에서 ‘舊蒙古(fe monggo)’라고 불린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30)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215-216면; 谷井陽子, 앞의 책, 255면의 주4). 31) 楠木賢道, 앞의 책, 149면; 天聰五年八旗值月檔(中國第一歷史檔案館, 2001 「天聰五年八旗值月檔(二)」歷史檔案 2001-1) 天聰5년 7월 20일, 17면. 대릉하 원정 당시 니루당 60명의 갑사 가운데 3분의 2는 출정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본국 수비를 맡았다. 32) 淸太宗實錄(1985 淸實錄 2, 北京: 中華書局영인본) 卷17, 天聰8년 정월 癸卯. 33) 이하 팔기몽고의 창설 과정에 관한 서술은 별도의 주기가 없는 한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263-291면 및 楠木賢道, 앞의 책, 31-44면에 근거한 것이다. 34) 사료에 등장하는 “구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평시의 행정․사회 조직으로서 니루의 집합체를, 다른 하나는 전시의 작전단위, 즉 ‘軍團’을 뜻한다. 이 글에서는 후자를 뜻하는 경우 작은따옴표(‘ ’)를 붙여 양자를 구별하기로 한다. 楠木賢道, 앞의 책, 4면 및 146면 참조. 아울러 몽골의 군사조직 호쇼(qosiɣu) 역시 만주어 사료에서는 ‘구사’로 표기되는데, 이 글에서는 八旗(jakūn gūsa)와 구별하기 위해 이 역시 따옴표를 붙이기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글에서 작은따옴표가 붙지 않은 구사는 팔기 체제의 구사만을 가리킨다. 35) 본고에서는 필자들이 몽골어에 익숙하지 못한 점, 필자들이 이용한 사료가 만주어 자료로 한정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여 전사와 표기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몽골어 고유명사는 滿文老檔의 만주어 전사 및 발음에 따라 표기하였음을 밝힌다. 단, 주15)에서 밝힌 바와 같이 ‘몽골(Mongol)’은 몽골로 표기한다. 天聰9년(1635)에 이르러 홍타이지는 팔기 內․外의 카라친(Karacin)․투메트(Tumet) 장정에 대한 編審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로 파악한 카라친․투메트의 17,000丁을 모두 11개 구사로 나누었는데, 이 가운데 약 9,000丁을 外藩카라친․투메트의 3개 ‘구사’로 삼고, 나머지 8,000丁을 ‘舊蒙古’와 합쳐서 8개의 구사, 즉 ‘팔기몽고’로 재편하였다. 다시 말해서 天聰9년에 창설된 팔기몽고는 기존의 전시 조직 ‘舊蒙古’와 새로 편심한 카라친․투메트 장정을 합쳐서 구성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전시 조직이었던 ‘舊蒙古’와 달리 팔기몽고는 전시 조직이자 평시조직으로서 팔기만주와 병립하는 위상을 점하게 되었지만, 그 규모에서는 팔기만주보다 작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종래의 ‘舊蒙古’ 40개 니루에 天聰후기까지 최소 10개 니루가 추가되었고, 天聰9년 팔기몽고 창설 시에 구사마다 2개씩 합계 16개 니루가 추가되었다. 여기에 새로 편심을 거쳐 파악한 카라친․투메트 壯丁은 16~20개 니루 및 軍役을 지지 않는 “閑散蒙古(sula monggo)”로 편성되었다. 이들을 모두 합한 팔기몽고의 니루 수는 80개 남짓이 되며, 장정 수는 약 18,000丁정도로 추산된다.36) 그렇다면 홍타이지는 병자호란 전야에 팔기만주와 팔기몽고로부터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甲士를 내는 부담은 구사가 아닌 니루의 몫이었으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니루의 총수이다. 36) 단, 後金에 복속한 모든 몽골인이 팔기몽고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天命7년(1622)에 來附한 우루트(Urut)와 天命9년(1624)에 歸附해 온 바요트(Bayot)는 기존의 사회 조직을 유지하면서 평시․전시를 막론하고 팔기로부터 독립된 ‘구사’로 존재하였다. 天聰6년(1632) 홍타이지는 이들의 독립 ‘구사’를 폐지하고 ‘舊蒙古’와 함께 행동하도록 하였지만, 天聰9년 팔기몽고 편성 시에는 이들을 팔기만주에 잔류시켰다. 이들을 포함하여 팔기만주에 잔류한 몽골인 니루는 모두 18개였다.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263-269면 및 284-291면; 楠木賢道, 앞의 책, 31-44면 및 48-56면 참조. 입관 전 팔기의 니루 총수에 대한 추정으로는 먼저 房兆楹(Fang Chaoying)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八旗通志初集의 기록에 근거하여 1601~1735년간 니루 총수의 변동 내역을 추적한 바 있다.37) 이에 따르면 1636년에는 팔기만주 269개, 팔기몽고 113개, 팔기한군 38개, 합계 420개 니루가 존재하였다.38) 그러나 房兆楹의 추산은 후대의 편찬자료인 八旗通志初集에 근거한 것이고, 성립 연대가 불확실한 니루의 편성 시기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특정 시점의 니루 숫자를 너무 크게 잡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39) 房兆楹과 달리 郭成康은 八旗通志初集 외에도 후대가 아닌 당대의 사료 기록까지 폭넓게 활용하여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입관 전 니루 총수를 제시하였다.40) 郭成康의 추산에 따르면, 팔기 체제 성립 초기의 니루 총수는 약 200개였으나, 天命6년(1621) 약 230개, 天聰6년(1632) 288개를 거쳐 天聰말기 약 330개로 증가하였으며, 입관 직전에는 팔기만주가 약 250개, 팔기몽고가 약 100개, 팔기한군이 약 150개 등으로 합계 약 500개의 니루가 있었다.41) 37) Chaoying Fang, 1950 “A Technique for Estimating The Numerical Strength of The Early Manchu Military Forces,”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13, no. 1/2, pp. 208-209, Table 2. 38) 그러나 후술하듯이 1636년 시점에서 팔기한군은 엄밀히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우전 초하라는 이름의 전시 조직이 있었을 뿐이고, 팔기만주에서와 같은 성격과 내용의 정규 니루로 조직되어 있지는 않았다. 39) 房兆楹이 추정에 사용한 방법은 Chaoying Fang, op.cit., pp. 195-196 참조. 40)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199-210면. 이 내용은 원래 郭成康, 1987 「淸初牛彔的數目」淸史研究通訊 1987-1을 통해 발표된 것이다. 41) 한편 阿南惟敬은 사르후(Sarhū) 전투가 있었던 天命4년(1619)에 약 200니루, 天聰8년(1634) 250개 이하의 니루가 존재했다고 보았다. 阿南惟敬, 1961 「淸初の甲士に関する考察」歷史敎育 8-11, 184면 및 阿南惟敬, 1966 「滿洲八旗國初ニルの硏究」防衛大學校紀要人文․社會科學編 13, 241면 (楠木賢道, 앞의 책, 150면에서 재인용) 참조. 그러나 天聰5년(1631) 대릉하 원정 당시 최소 250니루가 존재했던 것이 확인되므로 (楠木賢道, 앞의 책, 149-150면), 阿南惟敬의 추정치는 과소평가로 판단된다. 참고로, 谷井陽子는 각 구사 30니루, 각 니루 壯丁200명을 전제로 팔기만주의 壯丁수를 약 48,000丁으로 추정하고 여기에 팔기몽고 약 18,000丁을 더하여, 天聰말 팔기만주․팔기몽고의 壯丁총수가 7만을 넘지 못했다고 추산하였다(谷井陽子, 앞의 책, 231-232면). 이 밖에도 청황제 및 종실 王公들이 소유한 니루, 즉 ‘보오이 니루(booi niru, 包衣니루)’가 입관 직전 약 64개에 달하였다고 한다.42) 지금까지 소개한 두 가지 추정치 가운데 신뢰도가 더 높은 郭成康의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병자호란 전야 팔기만주․팔기몽고의 니루 총수를 추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팔기만주의 경우는 입관 직전 약 250개 니루가 있었지만 崇德연간의 증가분을 감안하면 병자호란 전야에는 약 240개 니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팔기몽고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80개 남짓의 니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병자호란 전야 팔기만주․팔기몽고의 니루 총수는 320~330개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이는 天聰말기의 니루 총수가 약 330개였다는 郭成康의 추산과도 부합한다. 이 숫자에 天聰말 니루당 동원 가능 갑사 60명을 곱하면, 팔기만주․팔기몽고의 정규 병력 총수는 약 2만 명 수준으로 계산된다.43) 2) 우전 초하와 天佑兵․天助兵 이번에는 우전 초하, 天佑兵․天助兵등 팔기 조직 외곽의 병력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팔기한군은 만주어로 ‘우전 초하(ujen cooha, 重軍)’라고 불렸으며, 병자호란 전야에는 아직 정식의 니루-구사로 편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전 초하는 火器를 다루는 병종으로 출발하였고, 병자호란 전야에는 天聰9년 팔기몽고 편성 이전의 ‘舊蒙古’와 마찬가지로 평시에 팔기 각 구사의 니루에 분속되어 있다가 전시에 각 니루로부터 추출되어 별도의 ‘구사’로 조직되어 출전하였다.44) 42) ‘보오이 니루’는 ‘보오이 니얄마(booi niyalma, 家人)’ 또는 ‘보오이 아하(booi aha, 家奴)’ 라고 불렸던 청 황제 및 종실 왕공 소유의 노복들을 니루로 편성한 것이었다. ‘booi niyalma’, ‘booi aha’, ‘booi niru’ 등 관련 명칭이나 그 운영에 대해서는 增井寛也, 2008 「淸初ニル類別考」 立命館文學 608, 111-124면 및 谷井陽子, 앞의 책, 149-168면 참조. 43) 단 이 숫자에는 ‘보오이 니루’의 병력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보오이 니루’에 속한 사람들은 전쟁 참가, 전리품의 분배, 전공에 대한 포상 등에서 팔기의 일반 니루에 속한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谷井陽子, 앞의 책, 265면). 또한 병자호란 이후의 기록에 언급된 것이긴 하지만, ‘보오이 니루’에도 ‘니루당 60명의 갑사’라는 ‘표준’이 적용되었다. 淸太宗實錄 卷55, 崇德6년 4월 甲子 “上召衆於篤恭殿諭曰八家所屬每牛彔(중략) 每牛彔滿洲 三人中許一人披甲以六十名 爲常數其中或多或少務於三人中選一人他牛彔甲雖有餘亦 不許補不足者.” 참고로 楠木賢道, 앞의 책, 149면에서는 이 사료를 팔기만주의 일반 니루에 관한 것으로 보았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八家(jakūn boo) 소속’ 니루, 즉 ‘보오이 니루’에 대한 것이었다. 44) 細谷良夫, 1994 「烏眞超哈(八旗漢軍)の固山(旗)」 松村潤先生古稀記念淸代史論叢, 東京: 汲古書院, 174-182면; 楠木賢道, 앞의 책, 154면. 이에 따라 우전 초하의 전시 동원에는 팔기의 각 니루와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고 있었다. 우전 초하는 天聰5년(1631) 정월 來投한 漢人軍民을 佟養性[si uli efu]에게 관할하도록 맡긴 데에서 출발하였다.45) 이에 따라 그들은 “시 울리 어푸(si uli efu)의 구사”, 혹은 “니칸 초하(nikan cooha, 漢兵)”라고 불렸다. 天聰5년 3월 홍타이지가 新編니칸 초하에 대한 열병을 실시할 때 그 병력은 行營․駐守병력을 합쳐 총 3천여 명이었다.46) 니칸 초하는 같은 해 벌어진 大凌河전투에 참가, 홍이포 등의 火器를 다루어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인 天聰6년(1632) 정월에도 니칸 초하의 총수는 여전히 3천 명 수준을 넘지 못하였지만,47) 天聰7년(1633) 5월 홍타이지가 만주인 가정에 속한 漢人10명당 1명에게 綿甲을 입히도록 함으로써 1,580명의 신규 병력을 확보하였고, 이에 따라 니칸 초하는 약 5천명 규모로 불어났다.48) 天聰8년 5월에 이르러 홍타이지는 니칸 초하를 우전 초하로 개칭하였다.49) 한편 우전 초하에 대한 니루 편성은 崇德2년의 구사 성립 전부터 그 단서가보여, 崇德원년까지 적어도 31개 니루가 만들어졌다.50) 그러나 우전 초하 전체가 니루로 편성된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니루마다 규모의 편차도 컸다. 45) 淸太宗實錄 卷8, 天聰5년 正月乙未. 46) 天聰五年八旗值月檔 天總5년 3월 13일, 5면; 黃一農, 앞의 논문, 84-85면. 47) 天聰朝臣工奏議(潘喆․孫方明․李鴻彬編, 1989 淸入關前史料選輯(二),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點校本), 「佟養性謹陳末議奏」天聰6年正月22日, 9면 “目今新編漢兵馬步兵僅三千兵力似少火器不能多拿”;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308면. 48) 淸太宗實錄 卷14, 天聰7년 7월 辛卯; 內國史院檔: 天聰七年 (東洋文庫淸代史硏究室譯註, 2003 內國史院檔: 天聰七年, 東京: 東洋文庫) 天聰7년 7월 1일, 96면; 張晉藩․ 郭成康, 앞의 책, 308면. 49)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天聰8년 5월 5일, 135-136면. 細谷良夫는 入關이후에도 八旗漢軍의 만주어 명칭이 우전 초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우전 초하=漢軍은 군사적 목적으로 편성되었으므로 팔기만주․몽고와 동일한 방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細谷良夫, 앞의 논문, 165-166면). 50)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313면. 게다가 당시 우전 초하의 니루는 팔기만주․팔기몽고의 니루와 제도적․실질적으로 달랐고, 이로 인해 전장에서 군기가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崇德2년 7월 우전 초하를 팔기만주의 예에 따라 니루로 편성, 2개 구사로 조직하였다.51) 이로써 니루-구사의 정규 편제를 갖추게 된 우전 초하는 崇德4년(1639) 6월 4개 구사로 증편되었는데, 이 시점에 각 구사에는 18개씩의 니루가 있었다. 崇德7년(1642) 우전 초하는 팔기만주․팔기몽고와 마찬가지로 8개 구사로 증편되었으며, 이 해에만 99개 니루가 새로 편성되는 등 명실상부하게 팔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52) 팔기한군의 성립 경위가 이상과 같다면, 병자호란 전야 우전 초하의 병력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우전 초하는 아직 팔기만주․팔기몽고와 같은 완전한 의미의 니루-구사 조직이 아니었으므로 니루당 몇 명의 갑사를 내는 방식으로 병력이 동원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전시 조직이었던 우전 초하의 경우는 사료상의 병력 총수가 중요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天聰7년 니칸 초하는 약 5천 명 규모였다. 그리고 사료에 따르면 崇德2년(1637) 7월 우전 초하의 병력 총수는 1만 명에 가까웠다.53) 병자호란 이후 崇德2년 7월까지 우전 초하의 병력에 큰 변동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병자호란 전야의 우전 초하 병력은 약 1만 명으로 추산해도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음으로 天佑兵․天助兵을 보기로 하자. 평시에는 팔기 조직에 편입되어 있던 우전 초하와 달리, 天佑兵․天助兵은 평시와 전시 모두 팔기 조직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明을 등지고 홍타이지에게 복속해 온 孔有德․耿仲明과 尙可喜의 부대였다. 원래 毛文龍의 부하로 椵島(=皮島)에 주둔하고 있던 孔有德․耿仲明․尙可喜는 毛文龍이 袁崇煥에 의해 주살된 뒤 각지를 떠돌았다. 51) 淸太宗實錄 卷37, 崇德2년 7월 乙未;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311-313면. 52)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314-318면. 53) 明淸史料 丙編第一本(國立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編, 1936 明淸史料丙編 第一本, 上海: 商務印書館), 「鮑承先奏本」崇德2년 7월 16일, 51면 “今我國漸大人衆砲多然馬步兵丁近萬.” 孔有德․耿仲明은 登萊巡撫孫元化휘하에 들어갔다가 반란을 일으켜 쫓기던 끝에 天聰7년(1633) 後金에 투항하였고, 尙可喜는 廣鹿島에 주둔하고 있다가 天聰8년(1634) 투항하였다.54) 홍타이지는 이들의 투항을 크게 환영하면서 그 휘하 병력을 팔기에 편입시키지 않고 별도의 부대로 유지시키는 등의 우대 조치를 베풀었다. 天聰8년(1634) 5월 홍타이지는 孔有德․耿仲明의 부대에 天佑兵(abkai aisilaha cooha), 尙可喜의 부대에 天助兵(abkai nonggiha cooha)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55) 사료에 의거하면, 天佑兵은 崇德3년(1638) 孔有德휘하에 약 3,000명, 耿仲明휘하에 약 2,300명이 있었다.56) 병자호란 전야에도 이와 거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天助兵의 병력 총수를 전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天聰8년의 귀순 당시 尙可喜가 거느린 男丁이 1,405명이었으므로,57) 그 휘하의 병력은 이보다 많았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병자호란 전야의 天佑兵․天助兵은 대략 6,700명, 아무리 많아야 7,000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天佑兵․天助兵은 팔기 소속 각 니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시에 전원을 출정시킬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54) Frederic Wakeman Jr., 1985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Vol. 1,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196-200. 55)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天聰8년 5월 5일, 135-136면; 淸太宗實錄 卷18, 天聰8년 5월 庚寅. 56)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 上 (中國第一歷史檔案館編, 1989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 上, 北京: 光明日報社), 崇德3년 6월 18일, 320면. 단 이 사료의 天佑兵관련 기록에 대해서는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지 않다. 崇德3년 內國史院檔의 출판 텍스트는 모두 3종 (季永海․劉景憲譯編, 1988 崇德三年滿文檔案譯編, 瀋陽: 遼瀋書社; 中國第一歷史檔案館編, 1989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 上, 北京: 光明日報社; 河內良弘譯註․編著, 2010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中國第一歷史檔案館藏崇徳二․三年分, 京都: 松香堂書店)이 있는데, 崇德3년 6월 18일의 해당 기사는 中國第一歷史檔案館編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北京第一歷史檔案館에는 崇德3년 6월 11일 孔有德이 秘書院에 보낸 手本이 남아 있고 [「恭順王孔有德爲照例派兵事致秘書院手本」 (中國第一歷史檔案館, 1982 「淸崇德三年漢文檔案選編」歷史檔案 1982-2), 25면], 그 내용은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 崇德3년 6월 18일 기사의 孔有德관련 부분과 거의 같다. 따라서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에 실린 崇德3년 6월 18일의 해당 기사는 그대로 신뢰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57)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天聰8년 2월 16일, 79면; 淸太宗實錄 卷17, 天聰8년 2월 癸酉. 병자호란 이전의 기록에서는 天佑兵․天助兵의 전시 동원 비율을 알 수 없다. 만약 팔기 소속 니루처럼 대략 3분의 1을 동원하였다면 실질적인 동원 가능 병력은 2,200~2,300명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崇德3년의 기록에 天佑兵은 10명마다 “一馬一步”, 즉 마병 1명, 보병 1명, 합계 2명 동원이 종전의 常例였음을 밝혀 주는 내용이 보인다.58) 아마도 홍타이지는 天佑兵등이 귀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정을 감안하여 팔기의 각 니루보다 낮은 동원 비율을 적용하는 우대 조치를 베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따른다면, 일반적인 경우 天佑兵․天助兵으로부터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1,300~1,400명 수준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3.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병력 지금까지 병자호란 전야 ‘다이칭 구룬’이 팔기 안팎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 규모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에 따르면, ‘다이칭 구룬’은 팔기만주․팔기몽고에 320~330개 니루, 니루마다 60명의 甲士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팔기 조직에서 동원 가능한 정규 병력은 약 2만 명 수준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전시 조직으로서의 우전 초하 병력이 약 1만 명 존재하였으므로, 팔기만주․팔기몽고․우전 초하의 동원 가능 병력 합계는 약 3만 명으로 계산된다. 여기에 전시에 동원할 수 있었던 天佑兵․天助兵의 1,300~1,400명까지 합하면 ‘다이칭 구룬’이 팔기 안팎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정규 병력 총수는 31,000~32,000명으로 계산된다. 이와 같은 수치는 후술하는 외번몽고의 병력까지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종래 최소 10만 명에 달하는 사료상의 병자호란 당시 청군 병력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잘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58)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 上, 崇德3년 6월 18일, 320면 “懷順王奏稱(중략) 亦照舊例十人之中遣步騎各一以爲規矩爲時久矣”; 「恭順王孔有德爲照例派兵事致秘書院手本」, 25면 “切查上年蒙皇上差貴院來諭本爵下官兵每十人派三名本爵卽欽遵派馬步官兵八百員 名後不爲例今後隨征除恩准優免外實在官兵三千員名照例十人一馬一步共該馬步官兵 六百員名永爲後例永爲遵守.” 단,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의 문장은 만주어 원문의 漢譯이다. 게다가 31,000~32,000명이라는 숫자도 어디 까지나 최대 동원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규모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머리말에서 언급했듯이 청 쪽의 당시 기록에는 滿文이든 漢文이든 청군의 병력 총수가 등장하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서술과 병자호란 관련 사료의 기록을 결합하면 ‘다이칭 구룬’이 팔기 안팎에서 동원한 병력의 규모를 추산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구체적인 병력 추산에 앞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 즉 원정군 전체의 편제를 滿文老檔의 기록에 기초하여 재구성해 보면 <표 1>과 같다.59) [표 1]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편제 59) 김종원, 1999 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 朝淸交涉과 東亞三國交易을 중심으로, 혜안, 197-198면의 주178)에서는 淸太宗實錄의 기록에 근거해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편제를 首隊․前軍․中軍․後軍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표 1>과 거의 다름이 없다. 그러나 김종원은 병력 규모에 대하여 滿洲7旗52,500명 미만, 蒙古3旗22,500명 미만, 蒙古左翼軍및 蒙古諸王의 親率軍도합 30,000명 미만, 孔有德등의 ‘漢軍’을 합해서 총 10만 명에서 14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여[위의 책, 184면의 주154)], 종래의 다른 연구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柳承宙, 앞의 논문, 397-398면 역시 淸太宗實錄을 인용하여 청군의 선발대 총 4,300명이 세 차례에 걸쳐 南漢山城에 도착하였다고 언급하였으나, 청군의 총 병력에 대해서는 柳在城, 앞의 책, 134-135면의 약 13만 명을 답습하였다. 다음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규모를 추산해 보자. [표 1]에서 보듯이 원정군의 좌익과 우익에는 외번몽고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병력 규모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제 4장으로 미루고, ‘다이칭 구룬’ 자체에서 동원한 병력이 얼마였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팔기만주․팔기몽고와 우전 초하의 참전병력은 당시 兵部사무를 맡고 있던 버일러(beile, 貝勒) 요토가 내린 동원령을 수록한 滿文老檔의 崇德원년 11월 19일 조 기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계산할 수 있다. 1 니루의 騎兵(aliha cooha) 15명, 步兵(beki cooha) 10명, 護軍(bayara) 7명, 합계 32명, 암반 장긴(amban janggin) 石廷柱의 우전 초하 전부[amban janggin ši ting ju i ujen cooha yooni] (후략)60) 이 무렵 니루 단위로 출정 병력을 할당한 것은 팔기만주와 팔기몽고였다. 따라서 이 기록에 보이는 騎兵(aliha cooha), 步兵(beki cooha), 護軍(bayara)을 합한 “32명”은61) 60)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6, 崇德元年11월 19일, 1450면. 단, “amban janggin ši ting ju”를 舊滿洲檔에서는 “amba janggin ši ting ju”로 적었다 [舊滿洲檔(國立古宮博物院編, 1969 舊滿洲檔 一~十, 臺北: 國立古宮博物院) 十, 宇字檔, 崇德元年11월 19일, 5308면]. 한편 “ujen cooha yooni” 부분과 관련하여, 현재 통용되고 있는 乾隆三修漢文本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1월 己未조에서는 “昂邦章京石廷柱所統漢軍每甲士一人箭五十枝甲士二人備長槍一杆(후략)”이라고만 적어 우전 초하의 병력 총수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실록 改修과정에서 만주어 원문의 “전부(yooni)”를 누락하고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원정군이 소지할 무기와 장비에 관한 명령을 서술한 것이다. 滿文老檔이나 舊滿洲檔에는 명백히 “石廷柱의 우전 초하 전부”로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淸三朝實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현존하고 있는 康熙重修漢文本 淸太宗實錄의 鈔本을 보면, 역시 “昂拜章京石廷柱所統烏眞超哈全軍”(卷32, 崇德元年11월 己未)이라 하여 우전 초하 전군의 동원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일본에 현존하는 淸三朝實錄에대해서는 神田信夫, 1993 「日本に傳存する 淸三朝實錄の来歷について」 日本所在淸代 檔案史料の諸相, 東京: 東洋文庫淸代史研究室 (神田信夫, 2005 淸朝史論考, 東京: 山川出版社에 재수록) 참조. 여기에서 이용한 康熙重修漢文本은 京都大學人文科學研究所附屬漢字情報硏究センター의 東方學デジタル圖書館(http://kanji.zinbun.kyoto-u.ac.jp/db-machine/toho/html/top.html)에서 제공하는 內藤文庫本이다. 日本國立國會圖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dl.ndl.go.jp/info:ndljp/pid/2606128)에서 제공하는 國立國會圖書館本도 내용은 같으나 자구에 일부 異同이 있다. 참고로, 이 글에서 인용하는 淸太宗實錄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乾隆三修漢文本을 가리킨다. 61) 騎兵(aliha cooha), 步兵(beki cooha), 護軍(bayara) 등 병종에 대해서는 谷井陽子, 앞의 책, 255-265면 참조. 당시 팔기만주․팔기몽고의 320~330개 니루를 대상으로 한 것이 된다. 이로부터 팔기만주․팔기몽고의 참전 병력은 대략 1만 명 남짓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62) 한편 우전 초하에 대해서는 “전부”를 동원하였다. 당시 우전초하 병력은 약 1만 명이었으므로, 병자호란 참전 병력 역시 약 1만 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위의 기록만으로는 天佑兵․天助兵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앞에서 天佑兵․天助兵은 보통 10명당 2명을 동원하는 것이 종전의 常例였다고 언급한 바 있으나, 崇德3년 6월의 기록에 따르면 “東征” 즉 병자호란 당시 이번만은 특별히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해야 한다는 특명에 따라 孔有德은 800명, 耿仲明은 650명을 출전시켰다고 한다.63) 天佑兵은 常例에 따른 1,060명(←5,300명×0.2)보다 390명 많은 1,450명의 병력을 출전시켰던 것이다. 62) 팔기만주․팔기몽고의 일반 니루 외에 ‘보오이 니루’에 속하는 자가 병자호란이나 그 직후의 가도 원정에 참전한 사례가 확인된다 (淸太宗實錄 卷36, 崇德2年6月甲子; 劉建新․劉景憲․郭成康, 1982 「一六三七年明淸皮島之戰」 歷史檔案 1982-3, 88면). 특히 18세기 조선에도 널리 알려졌던 金常明의 조부 新達理(Sindari)는 正黃旗소속 보오이(包衣)로 병자호란에 참전, 강화도 점령 과정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조선인으로 구성된 ‘보오이 니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우경섭, 2009 「17세기 전반 滿洲로 歸附한 조선인들: 『八旗滿洲氏族通譜』를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48, 192-194면). 제 2장에서 언급했듯이 입관 직전에는 64개의 ‘보오이 니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보오이 니루’ 수의 최댓값으로 잡고 팔기의 일반 니루에서와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 니루당 32명의 갑사가 조선 침공에 동원되었다고 가정하면, 그 총수는 약 2,000명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이 무렵 ‘보오이 니루’의 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팔기의 병자호란 참전 병력에는 산입하지 않기로 한다. 63) 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 上, 崇德3년 6월 18일, 320면; 「恭順王孔有德爲照例派兵事致秘書院手本」, 25면; 黃一農, 앞의 논문, 93면. 한편 天助兵에 대해서는 참전 병력을 명시해 주는 사료가 없지만, 만약 天佑兵과 마찬가지로 대략 30퍼센트의 동원 비율이 적용되었다면 약 420명(←1,405명×0.3) 정도가 참전했으리라는 계산이 나온다.64) 여기에 역시 비슷한 동원 비율(3명당 1명)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65) 崇德4년(1639) 松山등지에 출정했던 天助兵의 수가 530명이었던 사실도 참고할 만하다.66) 그렇다면 天佑兵․天助兵의 출전 병력 합계는 대략 1,900명 정도이고, 아무리 많아야 2,000명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요컨대, 병자호란 당시 ‘다이칭 구룬’이 팔기 안팎에서 동원했던 정규 병력은 팔기만주․팔기몽고에서 약 1만 명 남짓, 우전 초하에서 약 1만 명, 天佑兵․天助兵에서 1,900~2,000명 등을 합한 약 22,000명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치는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잡았던 종래의 통설에 비해 현저히 적어 보이지만, 병자호란 직전 전시 동원 능력의 실질적인 최대치 31,000~32,000명의 무려 70퍼센트에 해당한다. 여기에 崇德元年(1636) 6~10월에 아지거를 사령관으로 카라친․투메트와 함께 화북에 출정시켰던 병력을67) 재차 출정시키기 어려웠던 사정과 對明전선 및 수도 盛京을 비롯한 여러 요충지에 적잖은 수의 수비 병력을 유지해야 했던 현실 등을 감안하면,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는 ‘다이칭 구룬’이 보유한 군사 역량의 거의 전부를 조선에 출병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표 1>에서 보듯이 청군의 좌익과 우익에는 외번몽고의 병력이 가담해 있었다. 이에 관한 고찰은 장을 바꾸어 진행하기로 한다. 64) 黃一農, 앞의 논문, 93면. 65) 崇德3년 6월 공유덕과 상가희는 20퍼센트 동원이라는 종전의 常例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으나, 홍타이지는 “三丁中一人披甲”을 명령하였다(淸初內國史院滿文檔案譯編 上, 崇德3년 6월 18일, 320면). 따라서 崇德3년 6월 이후의 출병에는 이 비율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6) 明淸史料 丙編第一本, 「智順王尙咨秘書院文」崇德4년 2월 3일, 60면;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400면. 67) 滿文老檔 Ⅵ, 太宗崇德22, 崇德元年7월 19일, 1194-1195면; 太宗崇德26~27, 崇德 元年9월 8일, 1255-1256면, 1260-1261면, 1273-1274면; 太宗崇德29, 崇德元年10월 12일, 1315-1317면. 4. 외번몽고의 병자호란 참전 규모 외번몽고의 참전 규모와 관련하여,68) 머리말에서도 언급했듯이 黃一農은 崇德2년 초의 와르카 원정에 나섰던 3,600명에 崇德2년 4월 椵島공격에 참여한 병력을 더하여 4,000~5,000명의 외번몽고가 조선에 출병했다고 보았다.69) 그러나 그의 추정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椵島공격에 참가한 외번몽고는 병자호란 종결 이후 아지거의 부대와 함께 증원 병력으로 추가 투입된 카라친․투메트의 병력이었다.70) 따라서 이들은 병자호란 참전 병력에 산입할 수 없다. 다음으로, 병자호란 참전 외번몽고 병력 전부가 와르카 원정에 참여했다고 볼 수 없다. 崇德2년 정월 23일 홍타이지는 蒙古衙門 承政 니칸(Nikan)에게 외번몽고의 병력과 함께 서울 인근의 청군 진영을 출발하여 강원도와 함경도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는 와르카 원정에 나설 것을 명하였다.71) 5월에 이르러 니칸이 홍타이지에게 올린 보고에 따르면, 와르카 원정에 참가한 외번몽고 각 ‘구사’의 병력은 합계 3,600명이었다. 이는 병자호란 당시 외번몽고의 참전 병력으로 사료에 등장하는 유일한 숫자이긴 하지만 이를 곧바로 조선에 출병한 외번몽고 전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병자호란에 분명히 참전했으나 와르카 원정에는 합류하지 않은 외번몽고의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두르벤 커오커트(Durben Keoket, 四子)의 수장 다르한 조릭투(Darhan Joriktu)는 병자호란 참전 사실이 확인되지만72) 와르카 원정에는 참가하지 않았다.73) 68) 이하 병자호란 당시 외번몽고의 참전 규모와 조선 침공에 앞서 崇德원년 10월에 열린 외번몽고 회맹 등에 관한 좀 더 자세한 고찰은 拙稿, 「숭덕 원년의 외번몽고 회맹과 병자호란」(미간)을 참조. 69) 黃一農, 앞의 논문, 93면의 주5). 70) 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 (文淵閣四庫全書本) 卷23, 傳7, 「扎薩克多羅杜稜貝勒固嚕思竒布列傳」; 淸太宗實錄 卷34, 崇德2년 3월 丁未. 71)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中國第一歷史檔案館蔵崇徳二․三年分, 崇德2년 정월 23일, 61면; 淸太宗實錄 卷33, 崇德2년 정월 癸亥. 72)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8, 崇德元年12월 3일, 1480-1482면. 이 기사는 병자호란 참전을 위해 모인 몽골 노얀들이 홍타이지에게 진상한 예물의 내역을 밝힌 것이다. 이를 통해 병자호란에 참전한 몽골 노얀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단 전쟁에 참가하는 몽골 노얀들이 모두 예물을 진상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에서도 모밍간(Moominggan)과 우라트(Urat)의 노얀이 조선에는 출정했으나 와르카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사례가 발견된다.74)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관련 사료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와르카 원정군과 별개로 도르곤의 좌익군과 함께 조선에서 철군한 외번몽고 부대의 존재가 드러난다. 즉 崇德2년 2월 홍타이지는 니칸과 함께 蒙古衙門의 承政을 맡고 있던 다야치(Dayaci)에게 철군 시의 주의사항을 담은 칙유를 외번몽고의 왕공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75) 따라서 와르카 원정 관련 사료에 보이는 3,600명이라는 숫자는 병자호란 참전 외번몽고 병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칭 구룬’의 동맹군으로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외번몽고의 병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崇德원년 10월 두 군데에서 개최된 외번몽고 회맹의 경과와 결과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崇德원년 10월 16일 홍타이지는 “차하르․칼카”에76) 都察院承政아시다르한(Asidarhan)과 蒙古衙門承政다야치를, “코르친”에77) 弘文院大學士히퍼(Hife)와 蒙古衙門承政니칸을 파견하여 회맹을 개최하도록 했다.78) 73) 淸太宗實錄 卷35, 崇德2년 5월 丁酉. 74) 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 卷40, 傳24, 「扎薩克一等台吉僧格列傳」; 卷41, 傳25, 「扎薩克鎭國公諤班列傳」. 75)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中國第一歷史檔案館蔵崇徳二․三年分, 崇德2년 2월 15일, 119-120면. 76) 여기서의 “차하르”는 릭단 칸 직할의 차하르(Cahar) 本部가 아니라, 원래 차하르의 別部였던 아오한(Aohan)․나이만(Naiman)을 가리킨다. 이들의 계보는 岡洋樹, 2007 淸代モンゴル盟旗制度の硏究, 東京: 東方書店, 47면 참조. 또한 “칼카”는 고비 이남의 소위 內칼카(Kalka)를 가리키며, 고비 이북의 外칼카와는 구별해야 한다. 內칼카는 원래 자루트(Jarut)․바린(Barin)․바요트(Bayot) 등 5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楠木賢道, 앞의 책, 21면), 이 무렵에는 자루트와 바린만이 외번몽고로서 독자적 유목집단을 유지하고 있었다(위의 책, 45-48면). 아울러 이 기사에서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아시다르한과 다야치가 주재한 회맹에는 “아루(Aru) 몽골”로 총칭되는 여러 집단도 참가하였다. 아루몽골과 관련해서는 이 글의 주)83도 참조. 77) 여기서의 “코르친”은 코르친(Korcin)뿐만 아니라 잘라이트(Jalait), 두르베트(Durbet), 고를로스(Gorlos) 등 코르친 계의 여러 집단을 총칭한 것이다. 코르친은 칭기스칸의 동생 하사르의 후손이 이끄는 유목집단으로, 16세기 중엽 흥안령 동쪽으로 이동하여 嫩江과 綽爾川유역에서 유목하고 있었다 (楠木賢道, 앞의 책, 71-72면). 잘라이트․두르베트․고를로스 등은 모두 코르친의 支派이다. 이들과 코르친의 계보 관계는 岡洋樹, 앞의 책, 55면 참조. 78)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1, 崇德元年10월 16일, 1335면. 이 회맹은 외번몽고에 대한 니루 편성을 통해 몽골에 대한 청의 지배체제, 즉 盟旗제도의 기초를 확립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79) 아시다르한과 히퍼는 11월 6일에 귀환하여 회맹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아시다르한은 “차하르․칼카”에서 19,581家(boo)․384니루80)․5,456甲(uksin)을 편성한 내역을, 히퍼는 “코르친”에서 22,380家․447니루․6,639甲을 편성한 내역을 각각 보고하였다.81) 이 회맹을 통해서 홍타이지는 “차하르․칼카”와 “코르친”을 통틀어 41,961家․831니루․12,095甲을 파악했던 셈인데, 외번몽고의 병자호란 참전 규모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甲士의 숫자이다. 회맹 결과 보고에 등장하는 약 12,000명의 갑사는 외번몽고 각 ‘구사’가 보유한 정규 병력의 총수를 가리키는 것일까?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비록 암묵적이긴 하지만 약 12,000명의 갑사를 곧 외번몽고 각 ‘구사’가 보유한 군사력과 등치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회맹 전후의 상황과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약 12,000명의 갑사란 조선으로의 출병을 위해 외번몽고 각 집단에 할당한 병력이 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10월 16일 회맹을 개최하러 떠나는 아시다르한과 히퍼 등에게 홍타이지가 내린 명령의 전반부를 보자. 회맹에 모인 외번의 여러 和碩親王, 多羅郡王, 多羅貝勒, 모든 貝子(beise)들에게, “이제 얼음이 얼면 곧 출병한다[te jehe jafame uthai coohalambi]. 이 사이에 누구라도 성스러운 한(Enduringge Han)에게 叩頭하러 가거나, 叩頭하러 <사신을> 보내거나, 혹은 친척을 만나러 오는 것을 모두 그만두어라.”라고 말하여 그만두도록 하라.82) 여기서 홍타이지는 외번몽고의 여러 수장들에게 “얼음이 얼면 곧 출병”할 예정임을 알리고 출병 때까지는 그들이 入朝나 探親등의 사유로 盛京에 오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아시다르한과 히퍼 등에게 지시하고 있다. 이는 崇德원년 10월의 회맹이 동계 출병을 앞두고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아시다르한과 히퍼 등의 귀환과 회맹 결과 보고가 있은 지 닷새 뒤인 11월 11일, 홍타이지는 외번몽고에 다음과 같은 동원령을 내렸다. 출병하도록 할당한 버일러들, 너희는 각각 ‘구사’의 할당한 병사들이 탈 말, 낙타에 낙인을 찍고, 牌를 달아라. 甲冑및 여러 가지 道具에 이름을 써라. 20일 먹을 군량을 휴대하라. 출병의 기일인 이번 달 30일에 大城(amba hecen, 瀋陽城) 밖에 모여라. 코르친은 조소이(josoi)를 지나 口子(keo dz angga)로 들어와라. 칼카, 차하르, 아바가는83) 十方寺(sifangse)로 들어와라.84) 이 기사와 관련해서는 특히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10월 16일 홍타이지의 명령에 언급된 동계 출병이란 곧 병자호란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79) 達力扎布, 1998 「淸初內扎薩克旗的建立問題」歷史硏究 1998-1, 21-26면;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366-367면. 80) 외번몽고의 경우에는 50家가 1니루로 편성되었다. 81) 차하르․칼카의 회맹은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4, 崇德元年11월 6일, 1389-1405면, 코르친의 회맹은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5, 崇德元年11월 6일, 1405-1412면. 舊滿洲檔의 해당 부분은, 차하르․칼카가 舊滿洲檔 十, 宇字檔, 崇德元年11월 6일, 5227-5244면, 코르친이 5245-5252면이다. 그리고 여기에 제시한 숫자는 사료 원문의 계산 착오를 바로잡은 것이다. 82)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1, 崇德元年10월 16일, 1335-1336면. 83) 여기서의 “코르친”, “차하르”, “칼카”가 가리키는 대상은 위의 주76)과 주77) 참조. 여기서 “아바가”는 “아루 몽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루 몽골”은 아루 코르친, 두르벤 커우커트, 우라트, 모밍간, 옹니요트(Ongniyot) 등을 총칭한다 (楠木賢道, 앞의 책, 126면 참조). 따라서 이 기록의 “코르친”과 “칼카, 차하르, 아바가”는 곧 崇德원년 10월의 회맹에 참가한 집단을 가리킨다. 84) 舊滿洲檔 十, 宇字檔, 崇德元年11월 11일, 5291면. 한편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6, 崇德元年11월 11일, 1438면에서는 舊滿洲檔의 “sifangse(十方寺)”를 “hi fung keo”로 잘못 적었고, 일본의 역자들은 이를 “喜峰口”로 옮겼다. 乾隆三修漢文本 淸太宗實錄 卷32, 崇德元年11월 辛亥조에서는 “十方寺”는 옳게 적었으나 “分道征明”이라는 구절을 추가함으로써 이 동원령을 明에 대한 출병을 위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康熙重修漢文本 淸太宗實錄의 鈔本에는 “十方寺”도 옳게 적었고 “分道征明”이라는 구절도 없다. 十方寺는 瀋陽부근의 지명이므로[欽定盛京通志 卷24(文淵閣四庫全書本), 疆域形勝“承徳縣(附郭) 疆域東至撫順八十里撫順城守界(중략) 西北至十方寺九十里鐵嶺縣界”], 이 동원령은 분명히 十方寺를 거쳐 瀋陽으로 집결하라는 내용이었으며, “征明”이 아니라 조선 원정, 즉 병자호란을 위한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아시다르한과 히퍼 등의 귀환으로부터 불과 닷새 뒤 외번몽고에 동원령을 내렸고, 비록 동원령에 명시된 11월 30일보다 하루 늦기는 했지만 12월 1일에 외번몽고의 왕공들이 각자의 병력을 이끌고 盛京에 집결하였다.85) 이어서 그들이 청군의 좌익․우익에 편제되어 조선으로 출정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11월 11일 동원령을 하달하는 시점에 외번몽고 각 ‘구사’의 출병 규모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출병하도록 할당한 버일러들, 너희는 각각 ‘구사’의 할당한 병사들 [cooha de yabu seme tomilaha beise suwe meni meni gūsai tomilaha coohai niyalmai: 강조는 인용자]”이라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각 ‘구사’의 출정 병력은 언제 결정되었던 것일까? 만약 黃一農의 추정처럼 병자호란 참전 외번몽고 병력 전부가 와르카 원정에 참가했다고 본다면, 회맹의 결과가 보고된 11월 11일과 동원령이 하달된 11월 16일 사이에 합계 3,600명 규모의 병력 할당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일단 상정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과 닷새 만에 盛京과 외번몽고 각 ‘구사’의 유목지를 오가며 병력을 할당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렇다면 회맹 당시에 병력 할당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외번몽고의 병력에 관한 숫자로 아시다르한과 히퍼 등의 회맹 결과 보고에 등장하는 것은 합계 약 12,000명에 달하는 갑사가 유일하다. 그리고 위에서 지적했듯이 와르카 원정군은 병자호란에 참가한 외번몽고 병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로부터 회맹 결과 보고에 등장하는 갑사 약 12,000명이란, 회맹 개최 당시 예정되어 있던 동계 출병, 즉 병자호란에 참가하도록 할당한 병력을 가리킨다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약 12,000명의 갑사를 곧 외번몽고 각 ‘구사’가 보유한 군사력과 등치시켰던 종래의 암묵적 이해와 배치된다. 그러나 유목민은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전장에 나설 수 있다는 상식에 비추어 보건대, 41,961家에 달하는 몽골 유목민 집단의 군사력이 총 12,095甲에 불과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약 200명의 성인 남성으로 이루어진 팔기의 각 니루에 약 60명의 갑사를 내놓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의 회맹을 통해서 외번몽고 각 ‘구사’에 유사한 군사적 부담 —‘구사’마다 편차가 작지 않지만, 전체 평균 대략 3.5가에 1갑— 을 할당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崇德 원년 10월의 회맹 대상에서 카라친․투메트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카라친․투메트는 崇德원년 6~10월에 있었던 아지거의 화북 원정에 참가하였고, 그 대신 병자호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카라친․투메트에 대해서는 天聰9년(1635) 2월 장정 편심이 있었지만, 관련 기록에 니루의 편성이나 병력 규모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86) 그럼에도 불구하고 崇德원년 10월의 회맹 대상에서 카라친․투메트가 누락되었다면, 그것은 이들이 병자호란을 위한 동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회맹 결과 보고에 등장하는 약 12,000명의 갑사가 곧 병자호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다른 하나는 코르친에서의 회맹 결과에 관한 滿文老檔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이 회맹에서 家를 헤아려 50家를 하나의 니루로 삼았다. 니루 장긴(janggin)의 이름을 문서에 적었고, 甲의 수(uksin i ton)와 여러 사안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투시예투 친왕 구사의 936甲, 2,900家, 58니루. 니루 장긴의 이름은 (후략: 강조는 인용자)87) 위에 인용한 대로 滿文老檔은 니루의 편성과 “甲의 수(uksin i ton)” 등이 회맹의 의제였다는 사실을 밝힌 데 이어 각 ‘구사’의 甲, 家, 니루 등의 수와 니루 장긴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그런데 舊滿洲檔을 자세히 보면 “甲의 수” 앞에 원래 “gajire”가 있었으나 지워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88) “gajire”는 “데리고 올” 또는 “이끌고 올”이라는 뜻이다. 회맹 당시 동계 출병, 즉 조선 침공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舊滿洲檔의 “gajire uksin i ton”이란 곧 조선 침공을 위해 각 ‘구사’의 수장들이 “이끌고 올 갑사의 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85)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8, 崇德원년 12월 1일, 1477면. 86) 舊滿洲檔: 天聰九年(東洋文庫淸代史硏究室譯註, 1972 舊滿洲檔: 天聰九年 1․2, 東京: 東洋文庫) 1, 天聰9년 2월 6일, 56-61면. 87)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5, 崇德元年11월 16일, 1405면. 88) 舊滿洲檔 十, 宇字檔, 崇德元年11월 16일, 5245면. 이상의 고찰로부터 崇德원년 10월 차하르․칼카와 코르친을 상대로 개최된 두 회맹은 12월 초로 예정된 병자호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회맹의 결과에 대한 아시다르한과 히퍼 등의 보고에 보이는 “甲의 수”는 병자호란을 위해 외번몽고 각 ‘구사’에 부과한 동원 병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외번몽고의 병자호란 참전 규모는 와르카 원정에 참가한 3,600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崇德원년 10월 두 곳에서 열린 회맹의 결과 보고에 등장하는 약 12,000명의 갑사 전체였다고 보아야 한다. 5. 맺음말 지금까지 병자호란 전야 ‘다이칭 구룬’의 전시 동원 능력에 이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병력 규모를 고찰하였다. 그 결과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 전야 ‘다이칭 구룬’은 팔기만주․팔기몽고에 약 2만 명, 우전 초하에 약 1만 명의 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10명에 2명꼴로 총 1,300~1,400명 동원이 상례였던 三順王휘하의 천우병․천조병까지 더하면, ‘다이칭 구룬’ 자체의 군세는 31,000~32,000명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병자년 12월 홍타이지는 팔기만주․팔기몽고에서 약 1만 명의 갑사를 조선 침공에 투입하였고, 우전 초하는 약 1만 명의 전 병력을 동원하였다. 천우병․천조병에 대해서는 상례보다 약 50퍼센트 많은 1,900~2,000명의 참전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다이칭 구룬’ 자체의 정규 병력은 약 22,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계산된다.89) 여기에 더하여 홍타이지는 병자호란 직전인 崇德원년 10월에 개최된 회맹을 통해 외번몽고 각 ‘구사’에 참전 병력을 할당하였고, 이에 따라 합계 약 12,000명에 달하는 외번몽고의 갑사들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결론적으로, 외번몽고를 포함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은 약 34,000명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약 34,000명이라는 숫자는 앞에서 밝혔듯이90) 어디까지나 갑사, 즉 정규 병력만을 추산한 것으로,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침공한 청군 진영에 있던 모든 인원을 합산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청군에는 정규 갑사가 아닌 존재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甲士가 불법적으로 “閑散無甲之人”을 대동한 경우가 있었다.91) 또한 외번몽고의 경우에는 崇德원년 10월의 회맹에서 할당한 甲數보다 많은 병력을 출전시킨 노얀도 보인다.92) 단 이들의 경우는 전체 인원 추산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수가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시에 군량이나 무기의 운반 등을 맡았던 쿠툴러(kutule, 從僕․厮卒)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93) 팔기의 갑사들이 家奴(aha)를 쿠툴러, 즉 비정규 종군 인원으로 전쟁터에 데려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만큼,94)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 진영에도 적지 않은 수의 쿠툴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89) 앞에서 언급한 ‘보오이 니루’의 갑사까지 산입한다면(주62) 참조), ‘다이칭 구룬’ 자체의 참전 병력은 최대 24,000명에 달하게 된다. 90) 이 글의 주16) 참조. 91) 淸太宗實錄 卷36, 崇德2년 6월 甲子. 이 기사에는 “閑散無甲之人”의 참전 문제 외에 병자호란 당시 유력 王公이나 將領들의 불법 내지 탈법 및 갖가지 일탈 행위에 대한 처벌 내역이 수록되어 있다. 92) 예컨대, 나이만은 崇德원년 10월의 회맹에서 245甲을 할당받았으나 (滿文老檔 Ⅶ, 太宗崇德34, 崇德元年11월 6일, 1403면), 와르카 원정에만 300명의 병력을 보냈다(淸太宗實錄 卷35, 崇德2年5月丁酉). 또한 조선 측 사료에 甲士가 아닌 몽골인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崔鳴吉, 遲川集 卷17, 雜著, 「移陳都督咨(丁丑)」 “大抵㺚兵東出者號稱二十萬而約不下十數萬西㺚蒙古就食而來者又不在此數” ;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丁丑2월 2일 “蒙古由江原道因入北道而去當初皆率其老弱妻子而來可謂無我國矣”). 참고로, 한명기, 200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409-410면 에서는 羅萬甲의 丙子錄을 인용하여 “청에 귀부한 몽골병”들이 恒産이 없는 상태에서 생계를 꾸리고자 처자까지 대동해 약탈 및 포로 사냥에 골몰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여기서 한명기는 “청에 귀부한 몽골병”을 팔기몽고로 본 것 같은데, 사료의 “蒙古”는 외번몽고를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93) 쿠툴러에 대해서는 羽田亨編, 1937 滿和辭典, 京都: 京都帝國大學滿蒙調査會, 282면 “kutule”; 張晉藩․郭成康, 앞의 책, 299면; 蘇燦永, 2010 「入關前淸朝의 經濟的狀況: 崇德 年間의 掠奪戰과 奴僕(aha) 계층을 中心으로」서울大東洋史學科論集 34, 169-170면 참조. 94) 祁美琴, 2009 淸代內務府, 遼陽: 遼寧民族出版社, 20-22면; 李民寏, 紫巖集(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卷6, 雜著, 「建州聞見錄」 “至於出戰時則將卒家有奴者不限多少自以其意甲騎偕行如此之類尤莫測其數云(중략) 凡有戰鬪之行絶無糧餉軍器之運轉軍卒皆能自備而行出兵之時無不歡躍其妻子亦皆喜樂惟 以多得財物爲願如軍卒家有奴四五人皆爭偕赴專爲搶掠財物故也.”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 쿠툴러 관련 사료를 검토해 보면 쿠툴러의 수에도 일정한 규제가 존재하여 팔기와 외번몽고 갑사 1인당 대략 0.5명의 쿠툴러가 따라갔다는 것을 알수 있다.95) 우전 초하나 天佑兵․天助兵은 고위 장령이 아니라면 家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므로,96)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팔기만주․팔기몽고․외번몽고 부대에 한하여 갑사 1인당 0.5명의 쿠툴러가 있었다고 한다면97) 그 총수는 약 11,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95) 예컨대 天聰8년(1634) 2~3월에 걸쳐 錦州지역을 약탈한 부대의 경우 甲士2명당 1명의 쿠툴러가 할당되었다(淸太宗實錄 卷17, 天聰8年2月戊辰; 卷18, 天聰8年3月辛卯;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天聰8년 2월 12일, 73면 및 3월 5일, 92면). 외번몽고의 경우, 天聰10년(1636) 3월 모밍간의 도망자를 추격하는 부대에 甲士1명당 평균 약 0.52명의 쿠툴러가 있었다 (滿文老檔 Ⅵ, 太宗崇德6, 天聰10년 3월 20일, 972-979면). 96) 順治5년(1648) 팔기의 人丁통계를 보면, 팔기만주가 55,330丁, 차하르 출신 人丁을 포함한 팔기몽고가 28,785丁, 팔기만주․팔기몽고의 奴僕이 216,967丁이었는데, 45,849丁이었던 팔기한군에는 奴僕이 없었다 [「總理戶部事務允祥等爲報順康年間編審八旗男丁事奏本(雍正元年五月初四日)」 (中國第一歷史檔案館, 1988 「淸初編審八旗男丁滿文檔案選譯」歷史檔案 1988-4), 11면].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의 팔기한군, 즉 우전 초하의 일반 병사는 쿠툴러를 대동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家人의 병자호란 참가 사실이 확인되는 天助兵의 수장 智順王尙可喜의 사례는 예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淸太宗實錄 卷36, 崇德2년 6월 乙丑참조). 97) 확언할 수는 없지만, <표 1>에 보이는 선봉부대의 구성 내역을 분석해 보면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에도 갑사 1인당 쿠툴러 0.5명 안팎의 비율이 적용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청군 선봉부대를 구성하는 세 부대는 예외적으로 니루당 갑사의 수와 함께 인원 총수까지 사료에 명시되어 있다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中國第一歷史檔案館蔵崇徳二․ 三年分 崇德2년 正月16일, 26면, 30면; 滿文老檔 VII, 太宗崇德38, 崇德원년 12월 3일, 1479-1480면; 崇德원년 12월 9일, 1482-1483면). 제1대는 니루당 갑사 1명, 제2대는 니루당 3명, 제3대는 니루당 5명이었고, 인원 총수는 각각 300명, 1,000명, 3,000명이었다. 팔기의 니루 수(320~330개)를 고려하건대, 제1대와 제2대에는 쿠툴러가 전혀 없고 제 3대에는 1,300~1,400명의 쿠툴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1대는 前鋒(gabsihiyan), 제2대는 護軍(bayara)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울로의 신속한 침투가 임무였기 때문에 쿠툴러를 대동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제 3대는 앞서 출발한 두 부대에 대한 增援이 임무였던만큼 제 1대와 제2대의 쿠툴러까지 이 부대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봉 세 부대 전체를 놓고 갑사(2,900~3,000명)와 쿠툴러(1,300~1,400명)의 비율을 계산해 보면 후자는 전자의 약 43~48퍼센트가 된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쳐들어온 청군은 정규 병력 약 34,000명에 쿠툴러 약 11,000명을 합한 약 45,000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오이 니루’로부터 최대 2천 명의 갑사를 동원했다고 보더라도 참전 인원의 총수는 약 47,000명에 그친다. 또한 “閑散無甲之人”과 같은 불법적인 참전 인원이나 외번몽고의 할당 갑수를 초과한 인원 등을 고려하더라도 5만 명 수준을 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을 10만 명 이상으로 보았던 기존 연구의 수치와 비교하면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참전 병력 규모는 언뜻 보기에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자체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처럼 비친다. 즉, 당시 홍타이지는 조선의 군사적 역량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그리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으며, 그의 예상대로 전쟁은 단기간에 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제 3장의 말미에서 지적했듯이 당시 ‘다이칭 구룬’의 전시 동원 능력을 고려한다면 병자호란은 사실상의 ‘총력전’이었다고 간주해도 무방한 전쟁이었다. 사실 天聰연간에 이루어진 주요 군사 작전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병력이 참전했는지를 비교 차원에서 검토해 보면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종의 ‘총력전’으로 치렀다는 것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天聰연간 홍타이지의 군사원정 가운데 사료상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天聰6년(1632)의 차하르 원정이었다. 滿文老檔의 기록이 內․外의 병력을 합쳐 “10만명”에 달하는 많은 병력이 집결했다고 하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혹시라도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98)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숫자는 그대로 믿기 어려우며, 실제 작전에 참여한 병력은 大同․宣府邊外로 출동한 좌익군 1만과 歸化城일대로 향한 우익군 2만을 합친 3만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99) 이는 병자호란 당시의 정규 병력만 추산한 결과인 34,000명보다 많지 않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은 天命4년(1619)의 사르후 전투,100) 天聰5년(1631)의 대릉하 원정이나 天聰8년(1634)의 화북 원정과 비교하더라도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101) 98) 滿文老檔 Ⅴ, 太宗天聰51, 天聰6년 4월 13일, 744면. 99) 淸太宗實錄 卷11, 天聰6년 5월 庚申. 楠木賢道, 앞의 책, 132면에서는 좌익군 1만 명은 몽골 병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우익군 2만 명은 八旗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100) 사르후 전투 당시 후금의 병력 규모와 관련하여, 일본의 陸戰史硏究普及會에서는 니루당 甲士50명에 200니루가 있었다고 보아 약 1만 명으로 추정한 바 있으나 谷井陽子는 1만 명의 완전 무장한 甲士외에도 기동력이나 방어력이 떨어지는 보조 병력이 다수 출전하였다고 보았다 (谷井陽子, 앞의 책, 207면). 참고로 정묘호란 때 조선을 침공한 후금의 병력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는 청의 사료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瀋陽에 병력이 부족하여 일부러 허장성세를 위해 홍타이지 등이 군사를 이끌고 遼河근방까지 나갔다든지 (滿文老檔 Ⅳ, 太宗天聰4, 天聰元年2월, 53면), 원정에 참여한 요토가 瀋陽에는 홍타이지 등이 홀로 있다고 걱정하는 등 (滿文老檔 Ⅳ, 太宗天聰4, 天聰元年2월, 49면), 최대한의 병력 동원을 시사하는 기사가 보인다. 谷井陽子, 앞의 책, 216면 참조. 반면 조선 사료에서는 平安監司尹暄의 최초 보고에 적군의 규모가 3~4만이라고 되어 있고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 데이터베이스 http://sjw.history.go.kr/) 인조 5년정월 17일], 후금군을 따라 온 姜弘立이 인조에게 1旗에 2천 명씩 총 16,000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申達道, 晩悟集(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卷7, 雜著, 「江都日錄」, 丁卯2월 10일 “上問彼賊兵數幾何弘立曰凡八營營各二千”]. 강홍립이 언급한 수치가 실상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당시 팔기에 속하지 않았던 몽골병력이나 李永芳휘하 漢人부대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01) 天聰5년의 대릉하 원정과 天聰8년의 화북 원정 역시 홍타이지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친정에 나선 전쟁이었다. 楠木賢道는 홍타이지가 대릉하 원정에 4만 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그 가운데 八旗를 비롯한 후금의 자체 병력은 2만에 미치지 못하고 몽골의 병력이 2만 명 정도였다고 보았다(楠木賢道, 앞의 책, 147-151면). 그런데 楠木賢道자신이 인용한 사료에 따르면 몽골 병력 2만 명 가운데 코르친 및 아루 몽골의 병력은 겨우 900명이었고 그 나머지를 바린․자루트․아오한․나이만․카라친․투메트가 부담하였다고 한다 (위의 책, 150-151면). 실상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에는 몽골의 각 집단 간 편차가 너무 크다. 滿文老檔 V, 太宗天聰41, 天聰5년 9월 24~27일, 565-568면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명의 원군 4만 명을 막는 데 전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5천 명을 투입했다고 한다. 이 기록을 중시한다면 대릉하 원정의 실제 병력 규모는 天聰6년의 차하르 원정과 비슷한 3만 명 수준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한편 天聰8년 화북 원정의 병력 총수는 알 수 없으나, 이 전쟁에는 팔기에서 니루당 騎兵(aliha cooha) 20명, 護軍(bayara) 8명, 총 28명씩이 동원되었으며, 三順王및 우전 초하의 병력도 출정하였다 (淸太宗實錄 卷18, 天聰8년 5월 丙申;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天聰 8년 5월 19일, 142-160면). 또한 몽골 역시 코르친에서 5천, 카라친․투메트에서 5천의 병력을 참전시켰고, 그밖에도 여러 몽골 집단의 노얀들이 참전하였다 (楠木賢道, 앞의 책, 137면;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天聰8년 5월 24일, 160면, 天聰8년 5월 29일, 161면, 天聰8년 6월 1일, 162면, 天聰8년 6월 7일, 164-166면, 天聰8년 7월 2일, 192-193면). 이와 비교하자면, 병자호란 때에는 팔기만주와 팔기몽고를 합한 니루 수가 天聰8년보다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니루당 차출 병력도 4명이 더 많았다. 우전 초하 병력 총수나 삼순왕 휘하의 참전 병력도 확실히 더 많았다. 다만 외번몽고의 경우는 天聰8년 코르친과 카라친․투메트를 제외한 몽골의 참전 병력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실한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몽골 병력을 더하더라도 天聰8년의 병력 총수가 병자호란을 능가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병력의 규모만 놓고 보더라도 병자호란은 결코 입관 이전 청사의 일개 ‘에피소드’로 치부할 수 없는 대규모의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청의 홍타이지가 군사적 약체인 조선을 상대로 ‘총력전’ 수준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는 사실은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글에서 밝힌 참전 병력 규모 외에도 병자호란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여러 다양한 요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투고일(2015. 9. 16), 심사시작일(2015. 9. 17), 심사완료일(2015. 10. 11) A Numerical Estimation of the Qing Forces in the 1637 Qing Invasion of Joseon Korea102) Koo, Bumjin*․Lee, Jaekyung** In January 1637, Hongtaiji, the ruler of the Qing empire that was proclaimed in the previous year, personally led his imperial forces to invade Joseon Korea. As for the number of the soldiers Hong Taiji mobilized for this invasion, known as Byeongja Horan(丙子胡亂) in Korean history, previous studies have estimated the number at more than one hundred thousand, which is basically a direct quotation of exaggerated ball-park figures in Korean sources. In this paper, we attempted to arrive at a more accurate estimation of the number of regular soldiers Hong Taiji mobilized for the war, based upon close analysis of contemporary Qing archival sources as well as recent scholarly understanding of the Eight Banners system(八旗, jakūn gūsa). Our conclusion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the Qing invading forces included about ten thousand regular soldiers from the Eight Banners of the Manchus and Mongols, about ten thousand soldiers from ujen cooha, later reorganized as the Chinese Martial of the Eight Banners(八旗漢軍), and 1,900~2,000 soldiers led by Kong Youde(孔有德), Geng Zhongming(耿仲明) and Shang Kexi(尙可喜). And the invading forces were augmented by Mongol soldiers from the nomadic Mongol tribes which amounted to 12,000. Even if we take into account auxiliary elements in the Manchu-Mongol allied troops, the total number could not exceed fifty thousand men. Although the numbers we have estimated in this paper are less than half of those in the previous studies, it should be emphasized that the number of regular soldiers estimated at about 34,000 was the biggest one that Hong Taiji had ever mobilized until 1637. Key Words : Byeongja Horan, Hongtaiji, Qing Forces, Eight Banners, Mongols * Professor, Department of East Asian History, Seoul National University. ** Ph.D Course Student,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Seoul National University.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남한산성을 포위했던 청군의 선봉, '조선팔기군'을 아시나요 아시아경제 최종수정 2017.10.17 15:08 기사입력 2017.10.17 역적으로 몰려 팔기군이 된 비운의 병사들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 선봉에 서기도 일부는 청의 베트남 원정까지 끌려가 팔기군의 복장과 깃발(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를 포위, 공격하던 청나라 군사들 중에는 조선인 출신 병사들이 있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를 사령관으로 모시며 모국을 공격해야만 했던 이 조선인 병사들은 명나라 멸망 후, 베이징(北京)부터 난징(南京)까지 중국대륙을 누비며 청나라의 중원정복사업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남의 전쟁에 희생된 이 비운의 병사들은 '조선팔기'라고 불린다. 여기서 팔기란 청나라 고유의 군사제도인 '팔기군(八旗軍)'의 팔기를 뜻한다. 청나라는 종족에 따라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의 만주팔기, 몽골족의 몽골팔기, 투항한 명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한인팔기, 조선인 출신들로 구성된 조선팔기 등 팔기군 부대를 운영했다. 조선팔기는 매우 우수한 조총부대로 구성돼있었고 이들은 청나라의 중원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자원해서 청나라에 투항한 병사들이 결코 아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이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만든 최정예 조총수들로서 원래는 조선의 서북변방을 수호하던 조선의 병사들이었다. 복잡다단하게 얽힌 명·청 교체기의 대륙상황과 광해군과 인조정권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정예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변발을 하고 청군의 앞잡이가 돼서 조국을 공격해야만했다. 사르후 전투 묘사도(사진=위키피디아) 조선팔기군이 청나라에서 생겨나게 된 배경에는 광해군-인조정권 교체기에 연달아 벌어진 두가지 사건이 놓여있다. 바로 '사르후전투'와 '이괄의 난'이다. 1619년 벌어진 사르후전투와 5년 뒤 벌어진 이괄의 난은 모두 조선이 청나라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된 사건들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을 지키던 병사들이 거꾸로 조선으로 총구를 돌리게 됐기 때문이다. 먼저 사르후전투는 당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바꾼 희대의 전투로 평가되는 전투다. 명나라의 요동정벌 계획에 따라 명군 10만명, 조선군 1만3000명이 동원된 이 전투에서 명군이 참패하면서 청나라는 멸망 위기에서 벗어났고 이후 중원 정벌을 노릴 정도의 국력을 쌓게 된다. 당시 광해군이 이끌던 조정은 임진왜란 때 대병력을 파병해준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1619년 당시 시점까지 명나라는 매우 강력한 나라였으며 청나라는 명나라의 만리장성 요새를 공략하지 못하고 요동에서 활로를 찾고 있던 시기였다. 다만 명나라 장수들은 평지인 만주에서의 싸움에 익숙치 못했고 장수들끼리 협조도 제대로 되지 않아 각개격파당할 위험성이 높았다. 이런 상황을 간파했던 광해군은 파병부대의 사령관이었던 강홍립 장군에게 상황을 봐서 이기는 쪽에 투항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청나라 만주팔기군 모습. 사르후 전투 당시 명군 10만명은 4개 부대로 나뉘어 요동으로 진격 중이었고 이에 청 태조 누르하치는 8기군 중 2기로 주요 요새를 방어하고 빠른 기동성을 가진 6기로 명나라 각 부대를 각개격파해 대승을 거뒀다.(사진=위키피디아) 전투 결과 명군은 철저히 각개 격파됐고 최정예 조총부대로 구성된 조선군도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휘말려 조준사격을 제대로 못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8000명의 병력을 잃고 그 자리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훗날 투항한 5000여명의 조선군 중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2000여명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팔기군에 강제로 편입됐다. 임진왜란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키운 최정예부대를 순식간에 잃은 조선은 당장 방어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후 인조반정을 겪은 후, 인조정권 역시 서북지방 방어력 증강에 노력했으며 이괄 장군을 위시로 강력한 서북 방어병력을 키워내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이괄 장군이 2만의 서북 수비병력을 이끌고 1624년, 한양으로 진격해 변란을 일으키면서 서북방어는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이괄의 난은 가까스로 진압됐지만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조선 병사들은 역적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압록강을 건너 청군에 투항했다. 사르후전투 때 잔류된 조선군과 함께 조선팔기가 창설된 것은 그 이후였다. 이후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때 모두 이 조선팔기는 조국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군의 허실을 정확히 꿰뚫고 병자호란 당시 불과 일주일만에 한양을 주파할 수 있었던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명나라의 오랜 경제제재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사실상 도박과도 같은 전투를 펼친 터였기 때문에 조선군 방어의 허실을 정확히 몰랐다면 승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조총부대는 우수한 능력과 실전경험으로 동아시아 각국에서 유명했다. 사르후 전투 당시 명나라의 파병요청 이후에도 청나라 또한 명나라 잔당들을 공격할 때 조선에 조총부대의 파병을 요청한다.(사진=영화 '남한산성' 장면 캡쳐) 병자호란 이후 조선팔기군은 청나라 군대와 함께 중국 전역을 누비게 된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만리장성의 문을 열자 조선팔기군은 만주팔기와 함께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공격했다. 이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파병된 조선군도 함께 베이징을 공격했다. 이후 조선팔기군은 중원정벌에 동원됐고 일부는 베트남까지 파병된 정황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병욱 인하대 역사학과 교수의 '동남아시아사'에서는 베트남 하노이 부근의 '응옥 호이(玉回)' 마을에 사는 '낌(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왔던 조선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베트남 혁명 시기에 족보가 다 사라져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들의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고 한다. 18세기 말 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 썬 출신 삼형제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팔기군 20만명이 출동했는데, 이 원정군에 포함됐던 조선팔기군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혀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역적으로 휘말려 자신들이 지키던 조국에서 버림받고 역으로 조국을 침략하는 전쟁에 선봉으로 동원되고 만리타향까지 끌려가 전쟁을 치러야했던 조선팔기군의 이야기는 명·청 교체기 대혼란에 휘말린 한반도에서 벌어진 비극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역사 속 전사들 - 19. 청나라 팔기군 동우 ・ 2021. 5. 1. 22:12(https://blog.naver.com/hdw960926/222331376796) 팔기군(八旗軍) 또는 자쿤 구사(jakūn gūsa)는 청나라의 군사 편제로, 유목민이었던 만주족의 특성상 그 제도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에 팔기제(八旗制)라고도 합니다. 고려대에서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이훈 교수는 팔기제가 더욱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 팔기는 군사적 기능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정치 각 분야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팔기군이라는 용어는 팔기제의 군사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주어 '자쿤 구사'에서 '자쿤'은 숫자 '8'을, '구사'는 '깃발'을 뜻했습니다. 즉, '팔기'입니다. 숫자 8은 청나라의 중앙군이었던 8개의 집단을 지칭하였으며, 이들을 깃발의 색깔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정착되었습니다. 깃발은 남색, 황색, 백색, 홍색 4가지 색을 가지며, 깃발 전체가 단색인 정람기, 정황기, 정백기, 정홍기와 깃발에 홍색 테를 두른 양람기, 양황기, 양백기, 양홍기 총 8개 기가 있어 팔기라고 했습니다. 모든 구분은 깃발로 이루어졌고 깃발이 곧 부대가 되었습니다. 만주어로는 정은 구루(Gulu), 양은 쿠부허(Kubuhe)라고 했고 황백홍남의 4색은 각각 솨얀(Suwayan), 샹얀(Šanggiyan), 풀갼(Fulgiyan), 라문(Lamun)이라 했으며, 기(旗)는 구사(Gūsa)라고 불렀습니다. 즉 정황기는 구루 솨얀 구사(Gulu Suwayan Gūsa), 양백기는 쿠부허 샹얀 구사(Kubuhe Šanggiyan Gūsa)가 됩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의 지배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팔기 제도가 사회 계층 집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기를 반드시 군단으로만은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시에는 기 단위로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실제 각 기에 속하는 기인들은 훨씬 넓은 외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홍타이지 치세부터는 만주족으로 구성된 만주 팔기 외에도 몽골인들로 구성한 팔기몽고가 더해졌고, 홍타이지 말년에는 그간 '우전 초오하', 한역하자면 중화기를 다루는 '중군'으로 불리며 한족들이 주로 담당했던 포병대와 수군을 팔기한군으로 증편, 입관 이후 순치 연간에 팔기마다의 배속이 완료되었습니다. 다만 세간의 오개념과 달리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이 제각기 8기씩 편성되어 모두 24기로 이뤄졌던 것은 아니고, 8개의 깃발마다 보통 황족 내지는 만주인인 기주의 휘하에서 만, 몽, 한 서열로 모두 배속되어 군단별로 움직였습니다. 또한, 팔기 하에는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귀족, 특권층)인 기분 니루 외에도 보오이(포의)라는 노복 신분이 따로 있었습니다. 원래 만주족의 가노 신분에서 유래하였는데, 입관 후에는 이들이 최상위 귀족보다는 낮지만 기외의 민인보다는 훨씬 우월한 중산층 꼭대기 수준의 계층으로 굳어졌고, 기인 사회에서 주로 상공업, 제조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들 가문의 딸들은 나이가 차면 황궁이나 왕부의 수녀선발에 참가하는 것이 의무적이었고, 그 중 궁녀로 뽑히고 그 중에서도 황제, 왕족의 눈에 들어 적복진, 측복진이 되면 그야말로 일족이 인생역전. 이들 중에는 만주족이 대부분이었지만 입관 이후 한족도 일부 포함되었고, 심지어 양차 호란에서 조선인이 끌려가 정착하며 포의 신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자의 가장 유명한 예는 정백기 포의 출신인 조설근이나 가경제의 생모 효의순황후 워이기야씨, 후자의 유명한 예는 김신다리와 김산다리 형제의 후손으로서 정황기 포의 출신이었던 숙가황귀비 긴기야씨와 건륭 연간의 권신인 김간 남매가 있습니다. 조설근의 경우 포의 출신으로 몰락했지만 홍루몽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위씨나 김씨 집안은 황족의 외척이 된 덕에 일족 전체가 상삼기의 기분 니루로 편입되어 만주 귀족으로 인정받은 예입니다.​ 팔기군은 청나라(후금)의 시조인 건주부 여진족의 칸(또는 한 汗 )인 누르하치가 17세기 초에 설립하였다고 전하며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청나라 제도의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때 팔기군 중에서 상위 3개 깃발군 즉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는 황제의 직속부대이고 나머지 5개의 깃발군은 여러 제후들의 관할이었습니다. 각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누가 장악하느냐는 청나라 권력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한 이후인 옹정제 시기 팔기는 황제 아래에 모두 직속되었습니다. 팔기군은 1601년 누르하치가 여진족 각 부족의 부대를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후로 만주족이 내몽골 고원으로 진출하면서 바요트 등의 내몽골 거주 할하 부족들인 내할하 부족들, 투메드, 차하르, 오르도스부 등 내몽골 출신의 몽골인 부족들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이후로 요동을 함락하면서 한족도 이 제도로 편입하였습니다. 이 때 만주족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팔기만주, 그리고 몽골인은 팔기몽고, 한족은 팔기한군이라 칭했습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전까지 팔기군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습니다.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만주인이 아니라도 팔기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 포로들 또한 팔기의 일부로 편제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강희제 시절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코사크 병사들 중 일부가 양황기에 편입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나선정벌이 이때 일입니다. 입관 이후, 남명과의 싸움이나 삼번의 난 당시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투항병이나 베이징 인근 거주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팔기군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준가르를 갈아엎으며 외몽골, 칭하이성, 티베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 쓰촨성 서부 등 서부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튀르크계 부족들이나 티베트인, 오이라트인 등도 새 구성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만주족, 몽골인, 한족, 조선인(한국인), 퉁구스계의 다우르(다후르), 오로천(오로첸), 어웡키, 소론 등의 변방 민족, 시버족, 회족, 러시아인, 베트남인, 티베트인, 오이라트인 등등 여러 민족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시버족 : 몽골인과 만주족의 혼혈 종족 일파 ※회족 : 중국의 소수 민족이자 최대 무슬림 민족 집단 팔기군을 사열하는 건륭제 삼번의 난까지 종결되고 중원에 대한 청나라의 독점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자, 팔기군은 새로운 인원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데 지배 집단으로서 기능했다. 여기에는 팔기 안에 포함된 팔기몽고, 팔기한군 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한족이라도 팔기한군과 일반 한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었습니다. 팔기만주가 팔기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했고 팔기몽고가 그 다음, 그리고 팔기한군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전체 인원은 입관 당시 1644년을 기준으로 팔기만주가 40~45%가량을 차지하고 팔기몽고 22%, 나머지가 팔기한군이었습니다. 이후에 팔기군 인구가 늘어나면서 팔기한군은 건륭제 치세에 대거 출기 조치되었는데, 초기 입관 당시 화포나 수군을 담당하며 전투력에서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팔기한군이 몽골이나 만주 출신에 비해 한족 생활에 물들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원래 한족이었으니 저들은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한족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사실, 팔기한군 기인들도 기적에 들면 오로지 군바리고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서 대우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기적에 미련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팔기군 갑옷과 무기에 대해 말씀드리면 명나라대까지 찰갑이 주력으로 착용되었지만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부터 주력 갑옷을 두정갑으로 채택하면서 찰갑의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청나라 시기 두정갑은 팔기군의 표준 갑옷으로 사용되었고, 기마에 편리하게 상하가 분리된 두정갑을 입었습니다. 팔기군이 입은 두정갑은 각 깃발의 색깔과 똑같이 정황(正黄)、정백(正白)、정홍(正红)、정남(正蓝), 양황(镶黄)、양백(镶白)、양홍(镶红)、양람(镶蓝)으로 되어있습니다. 팔기군의 무기는 대도 (大刀)와 기창(기병용 창), 도리깨 무기인 편곤, 활과 석궁, 월도나 협도 등 여러 무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주방팔기(駐防八旗)의 분포도(•) 청은 기존의 만리장성장성을 기준으로 활용하여 주방팔기를 배치했습니다.​ 이러한 지배집단으로서의 팔기군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력을 구석구석 침투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팔기군을 각지에 파견-주둔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반 한족 피지배층과는 완전히 분리시켜 생활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팔기군은 수도인 베이징 내성에 거주하는 금려팔기(禁旅八旗)와 각 지역 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로 구분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베이징 내성의 한족을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금려팔기만이 베이징 내성에 거주할 수 있게 했으며 한족과 섞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각지의 주방팔기들 역시 지방에 주둔하면서도 주둔지역에서 주방팔기의 거주지를 성벽을 이용해 철저히 격리하였습니다. 이는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팔기가 인구상으로 훨씬 많은 일반 한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각지에 파견되어있던 주방팔기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녹영과 함께 청나라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기능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팔기 자체가 만주족에 대한 일종의 군사-행정체계이자 예비군 동원 체제이자 만주족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모든 만주족을 팔기에 소속시킴은 물론 일부 몽골인들과 한족 또한 팔기에 소속시켜서 만주족으로써의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심지어 19세기에도 팔기한군, 팔기몽고 소속 기인들은 민인들은 잘 모르는 만주어를 구사하는등 의식주 전반에 걸쳐 한인, 몽골인보다는 만주인에 가까운 특징을 보였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각지의 대도시에 존재했던 특수 행정구역이자 전용 주거지역인 '팔기주방'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고 함부로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으며 만주인은 자유롭게 한인 여자를 취할 수 있었지만 한인은 만주인 여자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의 원래 본거지인 만주에서조차도 한인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만주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한족으로의 동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만주족만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피지배층인 한족과의 충돌과 한족에 대한 착취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주방팔기는 각 지방의 치안유지 역시 맡았으며 반청복명 운동 등 불순한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삼번의 난 진압도 푸젠성, 광동성의 주방팔기 몫이었으며 대만 원정 때도 푸젠과 저장 지방의 한군팔기들이 대거 참여해 결국 정씨 왕국을 3대만에 간판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광동 주방팔기는 팔기한군의 대거 방출로 전력이 약화된 가운데 1841년 영국과 치른 아편전쟁에서 참패, 결국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고 이후 태평천국의 난이나 의화단 등도 진압 못 하고 빌빌거려 결국 증국번, 이홍장 등이 모은 상승군으로 진압해야 했습니다. 사실 만주족의 주축이 된 건주여진은 수렵과 농경을 겸한 민족으로 순수 유목 기마민족과는 좀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다닐 때 각 깃발 별로 제대를 편성하던 습관이 팔기의 원조가 된 것입니다. 물론 여진족이라고 아주 유목민이 아니었던 건 아니며 북만주와 연해주의 야인여진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마민족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지역들은 건주부의 영역인 남만주가 농사가 가능하고 숲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척박하기 짝이 없어서입니다. 원래 퉁구스 자체가 돼지와 순록을 방목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남하하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건주부는 일찍이 한반도와 가까워 한반도를 통해 문명화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팔기군은 차츰 청나라 정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그 자체로 전락했습니다. 팔기군은 군사조직인 동시에 이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기반이 되는 지배집단이었기 때문에 결코 폐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팔기군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직업군인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팔기군에게는 국가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팔기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실질적으로 군사적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한족과의 동화를 막기 위해서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더욱 심각했습니다. 이처럼 청나라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팔기군은 청나라 말기에는 진짜로 유명무실한 오합지졸로 전락해 아편전쟁/태평천국 운동/청일전쟁/청불전쟁에서 팔기군은 도움은커녕 백성들을 약탈했다가 역으로 발리기 일쑤였습니다. 아편전쟁 때에도 호르친 출신의 친왕인 보르지기트 셍게르첸이 이끄는 팔기몽고군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패배했습니다. 청불전쟁 때 역시 베트남 북부에서 일어난 육상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으로 남았던 팔기몽고는 근대화된 프랑스군의 기관총 사격에 갈려나갔으며 청일전쟁 때는 평양성 근처에 주둔한 팔기몽고 부대도 약탈을 벌여 조선인의 원망을 샀으며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일본군에게 포격을 당해 썰려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이 모든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한족으로 구성된 의용군인 상승군이 맡아야했습니다. 이때, 후난 성의 선비인 증국번과 그 제자 이홍장은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을 토벌하였고, 이후로 이홍장이 실권을 잡자, 이 의용군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이 만들어집니다. 그래도 유명무실하게 팔기군은 존재했다고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의 청나라의 주력은 북양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북양군의 지휘관들이 나중에 중국 군벌의 시조가 되며, 쑨원과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소속 국부군에게 흡수당하거나 패배합니다. 결국 1912년에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으며,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자금성을 떠났던 1924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제2차 아편전쟁과 팔기와 관련된 일화를 말씀드리면 1860년 9월 21일, 2차 아편전쟁에서 편성된 영국 - 프랑스 연합군 1만은 청 제국의 수도인 북경 앞까지 진출했습니다. 당시 청나라 황제는 제 9대 황제 문종 함풍제(아이신기오르 이주)였는데, 문종은 몽골 출신의 49세 친왕,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을 불러 지휘권을 맡겼습니다. ☆친왕親王 (Prince) : 황제와 가까운 황족에게 주어지는 작위​ 그는 몽골과 만주에서 차출된 기마대를 거느리고 태평천국 군대를 격파하면서 군왕의 작위에 오르고,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셍게린첸의 기마부대는 청나라 최강이자 동북아 최강이었습니다. 그는 몽골 황금씨족의 후예이자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셍게르첸은 무너지고 기울어져가던 청나라의 마지막 희망이자 보루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핏줄 때문에 직위에 오른 낙하산 인사나 무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태평천국 반군을 몽골 팔기와 만주 팔기를 이끌고 토벌했고, 1859년에 천진 인근의 '대고 포대'에서 철저한 준비와 서양 군대를 경시하지 않은 요새화로 상륙하는 영국 군함 3척을 침몰시키고 400여 명의 사상자를 안겨준 인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혈연이 아닌 능력으로 직위에 오른 자수성가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경의 관문인 팔리교에서, 셍게린첸은 마지막 남은 청나라의 최정예인 만주 팔기, 몽골 팔기 1만 2천을 비롯한 3만 병력을 이끌고 영국 - 프랑스 연합군을 상대할 준비를 했습니다. 셍게린첸은 서양 군대를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몽골인인 그는 여느 동양의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병종은 기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화포를 100문이나 준비하고 화승총 부대를 곳곳에 편성시켜 놓는 등 주어진 상황에서 만전을 기했습니다. 영국 - 프랑스 연합군은 작년인 1859년에 자신들을 막아낸 지휘관이 북경 최후의 방어선에 버티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5천 여 명으로 북경 성벽을 두드려보려 했던 지휘관들은 생각을 바꾸어 1만 병력을 팔리교 앞으로 배치했습니다. 9월 21일 오전, 전열을 맞추어 무표정하게 행진하는 영국 - 프랑스 보병들 사이로 영국 군악대의 '척탄병 행진곡'이 울려퍼졌습니다. 전장에 영국 - 프랑스 연합군이 도착했습니다. 청군의 포진은 훌륭했습니다. 청군의 좌측은 운하와 팔리교 촌락이 위치하여 청군의 측면을 보호하고 있었으며, 청군의 중앙 정면에도 하나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어 엄폐해주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가 방열을 하고 사격을 실시했습니다. 청나라 군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날아오는 일사분란하고 정교한 포격이었습니다. 화포의 수가 상대적으로 더 많았던 청나라 군대도 대응 사격을 시작했으나, 오랜 평화에 젖어 관리소홀로 방치된 화포들은 불량을 일으키며 터져나갔고 청나라 포병들의 숙련도는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온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어설프고 굼떴습니다. 셍게린첸과 그 휘하 만주 팔기와 몽골 팔기들은 청나라 포병들의 미숙함에 당황했으며, 피해가 누적되기 전에 일제히 돌격할 준비를 합니다. 그들은 서양의 무기를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그 진형과 전술은 과소평가했습니다. 자신들이 진압한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역사상 모든 동양에서의 전투처럼 보병은 기병의 상대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청나라 군대에게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사용하는 선현진(흔히 전열 보병이라고 합니다.)은 지나치게 얇아 보였고, 냉병기를 든 군대와 마찬가지로 상대하면 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위력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청군과 셍게린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국의 최정예 팔기 1만 2천 기병은 차례로 영국 - 프랑스 연합군 1만의 보병대에게 돌격했습니다. 2차 아편전쟁은 1722년 개발되어 영국군에 채택된 브라운베스 머스킷(플린트락 머스킷)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전쟁입니다. 미국 독립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함께했던 브라운베스 머스킷은 마지막 전쟁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선보였습니다. 징기즈칸의 후예인 셍게르첸은 전장식 머스킷이 대열을 이루었을 때 만들어내는 가공할 화력을 간과했습니다. 어쩌면 셍게르첸은 자신이 이끄는 만주와 몽골의 팔기군이라면 적들의 방진을 깰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구릉을 지나 영국 - 프랑스 연합군 앞에 도달한 청나라 팔기군이 본 것은 연합군의 대기병 보병 방진이었습니다. 어느 영국군 장교는 '동양 최정예라는 기병대의 돌격 속도는 인상적이었으나 이러한 상황은 숱하게 겪어왔고, 우리 병사들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령과 함께 진형을 바꾸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청나라 기병의 과감하고 용맹한 돌격은 비참하고 처절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방진의 머스킷이 뿜어내는 화망에 걸린 기병대는 1열이 무너지고 연이어 그 스스로가 장애물이 되어 기병의 강점인 돌파력이 사라졌고 포병대의 정교한 포격과 머스킷 화망 속에서 쓰러져갔습니다. 단 하나의 방진도 깨지 못하고 청나라 기병대는 3,000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합니다. 청나라 보병대는 팔기군의 퇴각과 동시에 연합군을 향해 진격해나갔습니다. 순식간에 전열을 바꾼 연합군은 선형진으로 포진해 청나라 보병을 상대했습니다. 청나라 화승총 부대는 공포에 질려 지휘관 명령 없이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총을 발사하는가 하면, 전열도 형편없었습니다. 청나라 보병대는 놀라운 속도로 격파되었습니다. ​ 흑색화약의 흰 연기, 각종 소음 속의 전쟁터에서 기계적으로 대열을 맞추고 쇠꼬챙이를 쑤셔넣어 재장전을 마치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보며 청나라 한족 보병들은 저 군대가 서양의 귀신일지도 모른다며 공포에 떨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몇 시간에 이르는 전투 동안, 녹영군과 달리 용감히 분전했던 만주 팔기와 몽골 팔기는 1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합지졸로 도망치던 보병대들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착검 돌격에 백병전에서도 밀리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무너진 청나라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의 중앙군은 거의 소멸되어 자취를 감췄습니다.​ 팔기군의 주요 전투는 1619년 조명 연합군과 청나라군이 맞서 싸운 사르후 전투가 있었고, 1626년 1월 14일부터 1월 26일까지 명나라 장군 원숭환과 후금의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놓고 벌인 영원성 전투, 1627년과 1637년에 조선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청나라가 전쟁을 선포,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있으며, 1640년-1642년 송산, 금주 전투, 1644년 자금성 공략 및 함락과 1645년 양주 공방전, 1646년 이자성과 장헌충의 난, 1652년~ 658년(1689년)에 발생한 청나라와 루스 차르국의 국경 분쟁. 1663년 사천 무산 전투, 1673년부터 1681년까지 벌어진 삼번의 난, 1683년 대만 원정, 1755년부터 1758년까지 이어진 준가르 원정, 1796년–1805년 백련교도의 난, 1813년 천리교의 난, 1840년부터 1842년까지 벌어진 제1차 아편전쟁, 1853년-1868년 염군의 반란, 1856년부터 1860년까지 발생한 제2차 아편전쟁, 1850년 12월부터 1864년 8월까지 발생한 태평천국 운동, 1884년대부터 1885년대까지 발생한 청프전쟁, 1894년 8월 1일~1895년 4월 17일까지 일어난 청일전쟁,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까지 청나라가 반식민지 상태가 되는 의화단 운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