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丙子胡亂 前後 滿洲人이 본 朝鮮人丙子胡亂 前後 滿洲人이 본 朝鮮人*
- ≪昭顯瀋陽日記≫ 및 宣若海의 ≪瀋陽使行日記≫를 중심으로 -
1)金 敏 鎬**
<목 차>
1. 들어가며
2. 조선 국왕 仁祖 이미지
2.1 유약하고 성의 없는 조선 국왕 仁祖
2.2 신뢰할 수 없고 배은망덕한 조선 국왕 仁祖
3. 소현세자 이미지
3.1 나약하고 무시당하는 소현세자
3.2 신뢰할 수 있고 친밀한 소현세자
4. 조선 신료 이미지
4.1 신뢰할 수 없는 조선 신료들
4.2 기개를 인정받는 조선 신료들
5. 나가며
* 이 논문은 2013년 5월 3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에서 개최한
“근세 동아시아와 만주족 문화”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 翰林大學校 中國學科 敎授.
1. 들어가며
필자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중국의 지역 이미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를 읽어왔다.
그 과정에서 他者의 눈으로 본 중국은 어떤 이미지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燕行錄과 漂海錄 등 明과 淸을 방문한 朝鮮의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기록들을 통해 조선 사람들이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海行摠載≫ 등을 포함하는 동아시아간 교류의 기록들을 통해
과거 조선인들이 미지의 영역을 어떻게 알아가는 지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에서 개최하는
“근세 동아시아와 만주족 문화”라는 주제의 국제학회에서 발표를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만주, 만주족의 이미지를 생각하다보니 丙子胡亂이 떠오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병자호란과 관련 있는 기록을 찾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昭顯瀋陽日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소현심양일기≫에는 당시 만주족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어
조선인이 본 만주족 이미지를 살펴보기에 적당한 자료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 자료를 읽다보니 조선인이 본 만주족 이미지보다는
그 자료에 간접적으로 보이는 만주족이 본 조선이미지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청의 자료를 통해 조선의 이미지를 살펴 본 연구는 이미 진행된 바 있지만1)
조선의 자료를 통해 만주족이 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살펴 본 연구는 아직 없기에
연구 주제를 만주족이 본 조선이미지로 잡게 되었다.
≪昭顯瀋陽日記≫는 1637년 1월 30일부터 1644년 8월 18일까지 인질로 瀋陽에 간
昭顯世子(1612-1645)의 동정에 대하여 世子侍講院에서 기록한 관청일기이다.
1636년 말 청은 조선을 재차 침략하고, 조선은 청에 군신의 의를 맺고, 명과 관계를 끊으며
왕자를 비롯한 인질을 보내고 세폐를 바칠 것 등 10여 개조를 약속하고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淸 太宗에게 항복 의식을 치른다.
소현세자는 2월 8일 철군하는 청의 군대와 함께 출발하여 4월 10일 심양성에 도착해
東館에 머물다가 5월 7일 새로 지은 심양관소로 옮긴다.
瀋陽館에서 8년을 머물다가 1644년 명이 무너지고 청이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자
세자도 북경으로 갔다가 황제의 사면령에 따라 1644년 말 조선으로 귀국한다.2)
≪소현심양일기≫의 범위는 소현세자가 심양에 머물러 있을 때의 기록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외에 ≪鳳凰城日記≫, ≪昭顯東宮日記≫, ≪北行日記≫와
≪昭顯乙酉東宮日記≫도 ≪소현심양일기≫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 김선민의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재인식:
“외국”과 “속국”의 사이 -正史를 통해 본
청의 조선 인식>(≪사림≫ 41호, 수선사학회, 2012.) 등이 이에 해당한다.
2) 김남윤, <소현심양일기해제>, ≪역주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9), 9쪽.
≪봉황성일기≫는 명나라 배가 출몰한 일과 조선이 몰래 명과 내통한 사건에 대하여
청 태종의 명으로 소현세자가 직접 봉황성에 가서
영의정 최명길 이하 사건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한 기록이다.
≪소현동궁일기≫는 1644년 세자가 빈궁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날인
1월 20일부터 2월 19일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하는 날까지의 기록이다.
≪북행일기≫는 1644년 4월 9일부터 6월 18일까지 세자가 청 군대를 따라 종군하여
遼河를 건너 錦州城과 山海關을 거쳐 5월 2일 北京에 입성한 뒤
명의 멸망을 보고 6월 18일 심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이다.3)
≪소현을유동궁일기≫는 소현세자의 시강원일기 가운데 마지막 책으로
1645년 2월 17일부터 윤6월 12일까지 약 5개월간의 일기이다.
여기에는 소현세자가 청에서 귀국하여 벽제관에 도착한 날부터 4월 26일
창경궁 환경당에서 급서하여 장례를 치르고 시강원을 혁파한 날까지의 기록이다.
≪소현을유동궁일기≫는 ≪소현심양일기≫에 이어지는 기록이지만
양자 사이의 1644년 8월 19일부터 1645년 2월 16일까지의 일기는 남아있지 않다.
소현세자는 청의 북경 천도에 따라 1644년 8월 19일 심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서
紫禁城의 文淵閣에 거처하며 아담 샬 등과 교류하며 천주학과 서양 과학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를 조선에 도입하고자 하였는데 이 시기 기록이 소실된 것이다.4)
이처럼 당시는 청이 건국되고 명이 멸망하는 등 동북아 지역의 정세가 요동치던 시기였고,
≪소현심양일기≫ 속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가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소현심양일기≫를 읽으면서 병자호란 전후의 기록물이 더 없나 살펴보다
최근 출판된 宣若海(1579-1643)가 기록한 ≪瀋陽使行日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전남대학교의 신해진 교수가 2013년 편역한 이 기록은
고려사이버대학교의 남은경 교수가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하였고,
또 그 상황을 논문으로 책 말미에 수록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병자호란 이후 기록된 ≪소현심양일기≫와 달리
병자호란 이전인 1630년의 後金 방문 기록이기에 ≪소현심양일기≫를 보충하는
의미가 있다고 여겨 본고의 고찰 대상에 넣었다.
≪소현심양일기≫가 관방의 공식 기록물이었던 데 반해
≪瀋陽使行日記≫는 1630년 慰問使 자격으로 瀋陽을 다녀온 宣若海의 개인 기록이다.
선약해의 본관은 寶城으로 자는 伯宗이며,
대구부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으로 추증된 宣義問의 아들이다.
그는 27세인 1605년 무과에 합격하여 宣傳官 겸 備局郞으로 있은 지 3년이 되던 해인
1610년 부친의 상을 당하여 집상하였고, 얼마 뒤 다시 조부의 상을 잇게 되어
10여 년간 상중에 있느라 벼슬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다.
1630년 봄 後金의 사신이 평안도 지방에 와서 靑布를 사서 龍灣을 거쳐 돌아가려다
명나라 군사의 추격으로 도망간 일이 있었고,
그 뒤 또 다른 후금의 사신이 의주에 도착하였다가 명나라 병사가 가로막아
가지고 온 국서를 전달하지도 못하고 되돌아간 상황이 발생하였다.
조선 땅에서 후금 사신이 명나라 군인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었기에
후금의 분노를 우려한 조선은 慰問使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의논 끝에
당시 52세인 선약해를 사신으로 파견하게 된다.5)
≪심양사행일기≫는 1630년 4월 3일부터 5월 23일까지
선약해가 후금을 다녀 온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이에 ≪심양사행일기≫에는 병자호란 이전
조선과 후금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생생한 자료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는 ≪昭顯瀋陽日記≫ 및 宣若海의 ≪瀋陽使行日記≫의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大淸의 황제였던 太宗 홍타이지[皇太極]와 龍骨大 등 滿洲族 장군 등이
조선의 국왕 仁祖, 심양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昭顯世子,
그리고 조선의 신료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 고찰하려 한다.
3) 김남윤, <소현심양일기해제>, ≪역주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9), 12쪽.
4) 김남윤, <소현을유동궁일기해제>, ≪역주소현심양일기4≫ (서울: 민속원, 2008), 187쪽.
5) 남은경, <선약해의 ≪심양일기≫>, ≪심양사행일기≫(서울: 보고사, 2013), 107-108쪽.
2. 조선 국왕 仁祖 이미지
당시 청에서는 조선 국왕인 仁祖(1595-1649)를 배은망덕하고, 신뢰가 없으며,
유약한 데다 예의를 갖추지 못한 왕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청과 조선의 주요한 외교적 갈등은 명나라 정벌을 위한 군사 징발,
向化人, 走回人들의 송환, 採蔘人들의 처벌 문제 및 조선 여성 징발 등이 있었다.
이러한 현안들과 관련하여 청은 인조가 해결 능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청의 은혜를 입고도 이를 갚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2.1 유약하고 성의 없는 조선 국왕 仁祖
2.1.1 유약한 조선 국왕 仁祖
청 황제는 조선 국왕 인조가 유약하여 신하들을 제압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1643년 2월 7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예로부터 제왕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지나치게 유약하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국왕이 지나치게 어질고 유순하여 신하들을 제압하지 못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참으로
부당하다. 혹 나라 안에 불안한 일이 있더라도 내가 있는데 무슨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몰래 서로 왕래하여 약조를 어기고
일을 저지른 것이 불령한 신하의 짓일지라도 왕이 어찌 모르겠는가?”6)
1641년 조정에서는 명나라 배가 서해에 출몰하자
평안감사 鄭太和에게 몰래 식량을 갖다 주도록 한다.
평안감사는 李之龍으로 하여금 평안감사의 명을 받고 명나라 배를 정탐한다는 핑계로
선천과 철산사이를 왕래하게 하고, 선천부사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
명나라 사람에게 쌀과 음식을 구해주도록 하였다.
청 황제는 용골대 등을 세자에게 보내 이 일로 잡혀왔던 이지룡을 사면하면서
조선 국왕 인조의 유약함을 탓하였던 것이다.
2.1.2 성의 없는 조선 국왕 仁祖
더불어 청은 조선의 국왕 인조가 성의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1637년 10월 2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골대가 말하였다.
“무릇 사람은 단지 길러주는 은혜를 입기만 해도 부자지간이라고 일컫습니다.
황제께서 국왕에게 죽을 것을 살려주고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준 은덕이 있는데도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 않고 있으니 되겠습니까? ...
홍시는 곧 음식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니 어찌 이런 종류를 바치는 것을 금하겠습니까?
국왕은 황제에 대하여 마땅히 음식을 대하면 문득 먼저 생각하고
물건이 생기면 먼저 바쳐야 할 터인데 이번에 그렇게 하지 않고 먼저 세자에게 보냈으니,
어찌 그렇게도 성의가 없단 말입니까?”7)
용골대는 홍시를 청 황제에게 먼저 보내지 않고 세자에게 보냈다며
“황제께서 국왕에게 죽을 것을 살려주고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준 은덕이 있는데도”
“성의가 없다”며 비난을 하고 있다. 세자는 인조가
“홍시를 인편에 실어 보낸 것은 본디 皇上께 바치는 정성이었을” 뿐이었는데
“다만 종신들이 전달할 때 잘 밝히지 못하여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오해를 풀려 노력하였다.
≪昭顯乙酉東宮日記≫ 1645년 2월 18일조에도
인조의 성의 없음을 탓하는 상황이 나온다.
이엇석이 칙사의 뜻을 세자에게 말하였다.
“정축년(1637) 이후 칙사가 오면 국왕이 교외에서 맞이하는 거둥이 있었는데,
그 뒤 주상의 기후가 미령하신 까닭에 비로소 편전에서 접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이 전과 다릅니다.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대위에 오르셨으니,
우리가 올 때 ‘주상께서 반드시 영은문 밖에서 맞이할 것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전에 왔을 때에는 강을 건넌 뒤 주상의 기후가 미령하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강을 건넌 뒤 어디에서도 미령하시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와서 맞이할 수 없다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니 무슨 까닭입니까?
만일 참으로 병환이 나셨다면 나와 맞이하지 않아도 이번에는 괜찮지만,
다른 날 칙사들이 올 때 이것으로 관례를 삼아 매번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8)
청은 명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자리를 잡은 후 1645년 세자를 조선으로 귀국시킨다.
≪昭顯乙酉東宮日記≫는 소현세자가 1645년 2월 17일 벽제관에 도착한 날부터
4월 26일 창경궁 환경당에서 급서하여 장례를 치르고 시강원을 혁파한 날까지의 일기이다.
위 인용문 상황은 세자를 수행하여 온 청의 사신들이 弘濟院에 도착한 후
인조가 청 황제의 사신 행차를 직접 맞이하지 않자 이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통역관인 이엇석을 통해 청의 사신은 인조가 아프다는 소식도 듣지 못하였는데
직접 황제가 사신을 맞이하지 않은 무성의함에 대해
“만일 참으로 병환이 나셨다면 나와 맞이하지 않아도 이번에는 괜찮지만,
다른 날 칙사들이 올 때 이것으로 관례를 삼아
매번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6) 自古帝王過强過柔, 皆不可爲國. 國王過於仁柔, 不能制抑羣臣, 致有如此之擧, 甚爲不當.
設或國內有不安之事, 惟我在, 有何畏懼乎. 潛相往來違約生事, 雖不逞之臣所爲, 而王豈不知.
≪역주 소현심양일기3≫(서울: 민속원, 2008.) <1643년 2월 7일>조, 173쪽.
7) 龍骨大曰, 凡人只被鞠養之恩, 猶謂之父子. 皇帝於國王有生死存亡之德, 而猶不殫誠敬可乎...
至於柿子, 乃是不關食物, 豈禁此類之來獻乎. 國王之於皇帝, 宜其對食輒懷,
見物先獻, 而今乃不然, 先送於世子, 何其誠意之闕如也.
≪역주 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8.) <1637년 10월 2일>조, 99쪽.
8) 李旕石以勅使意, 告于世子前曰, 自丁丑以後, 勅使之來, 國王有郊迎之擧, 而厥後,
以上候未寧之故, 始於便殿接見. 而今番勅使與前異. 皇帝一天下登大位, 俺等來時意謂,
自上必出迎迎恩門外矣. 且前日出來時, 則越江之後, 得聞上候之未寧, 而今番越江之後, 則所到處,
不得聞未寧之奇, 而今乃始發不得出迎之言, 是何故也. 若病患誠然, 則不爲出迎, 今番則可矣,
而他日勅使之來, 不可以此爲例, 而每每如是也. ≪역주 소현심양일기4, 소현을유동궁일기≫
(서울: 민속원, 2008.) <1645년 2월 18일>조, 200쪽.
2.2 신뢰할 수 없고 배은망덕한 조선 국왕 仁祖
2.2.1 신뢰할 수 없는 조선 국왕 인조
기본적으로 청은 조선 국왕 인조를 불신하였다.
특히 전쟁에 패한 조선이 청의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전쟁 준비를 하거나
명나라와 내통하는 등의 상황에 있어서는 그 불신이 극에 달하였다.
1640년 1월 11일조에서 용골대 등은 청 황제의 명을 세자에게 전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일은 한 결 같이 당초 조약대로 하였다면
세자와 대군은 당연히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었을 것이며,
반드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까닭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가지 못하는 것은 귀국이 신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9)
위의 인용문은 남한산성을 증축한 일과
向化人과 逃還人을 즉시 刷還하지 않은 일에 대해 언급하며
조선이 신뢰가 없기에 세자의 귀국이 힘들어진다고 용골대가 세자에게 이야기 하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다음 날인 1월 12일에는 비록 草本이긴 하지만
황제의 칙서에서도 이 상황을 언급하면서
“짐은 원래 그대 나라가 이랬다저랬다 하기에 두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라며
청의 조선 국왕에 대한 불신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청황제가 조선 국왕 인조를 극도로 불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2 배은망덕한 조선 국왕 仁祖
청나라는 조선이 병자호란 후 작성한 군사 징발에 대한 약속을 피하는
조선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을 치는데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天倫을 어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갖은 핑계를 대며 청의 군사 징발을 피하려 하였다.
1638년 7월 10일 ≪소현심양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골대와 마부대 등이 말하였다.
“남한산성의 약조는 문서로만 논의하여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왕래하면서 언약할 때에 모든 일에 순종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수만 명의 군사라도 마땅히 동원해야 할 것인데 5천명의 징발을 거역하려 하다니,
어찌하여 이렇게 쉽게 전에 한 약속을 잊는단 말입니까?”10)
청은 조선이 명에 입은 은혜를 갚으려는 것은 이해하나
지금은 청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할 때라며 은혜를 저버린 것에 대해
1643년 2월 2일 조에서도 비난하고 있다.
“남조가 너희 나라에 대하여 임진년에 구제한 은혜가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병자년에 군신과 온 나라 백성을 다시 살린 덕은 청나라에 있다.
남조의 은혜는 선왕 때에 있었고 청나라의 은혜는 지금 왕에게 있으니,
한 사람의 집으로 비유하자면 남조는 조부모와 같고 나는 친부모와 같은데,
어찌 내 은혜를 잊고 남조를 돕는가?
부마 또한 다시 살려 준 은혜가 나에게 있음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뜻을 부마는 깊이 헤아릴 뿐 아니라 돌아가서 국왕에게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11)
이처럼 청의 황제는 병자년(1636)에 자신이
조선의 군신과 온 나라 백성을 살리는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이러한 은혜를 잊고 명나라를 돕는 조선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였다.
9) 此等事, 一如當初條約, 則世子大君自當任意往來,
必無久留之理. 而至今不得出去者, 無非本國不信之致也.
≪역주 소현심양일기2≫(서울: 민속원, 2008.) <1640년 1월 11일>조, 12쪽.
10) 龍馬等曰, 南漢之約, 非但文書講定, 俺等往來言約時, 凡事無不順從云爾,
則數萬之兵亦當調發, 而乃欲違拒五千之徵, 何忘其前約若是乎.
≪역주 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8.) <1638년 7월 10일>조, 16쪽.
11) 南朝於本國, 有壬辰拯濟之恩, 我亦知之. 而丙子君臣上下, 擧國生民, 再生之德, 在於淸國.
南朝之恩在先王, 淸國之恩在今王, 比之人家, 則南朝如大父母, 我則如親父母. 何可忘我恩,
而扶植南朝乎. 駙馬亦於我有再生之恩, 亦不可不知. 此意不但駙馬體之, 歸告國王宜矣.
≪역주 소현심양일기3≫(서울: 민속원, 2008.) <1643년 2월 2일>조, 171쪽.
3. 소현세자 이미지
소현세자는 1637년 4월 10일 심양에 들어온 후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客館인 東館에 머물다가
5월 7일 황제가 세자를 위하여 새로 지은 관소인 新館으로 옮긴다.
명이 멸망한 후에는 청 황제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紫禁城 안 文淵閣에 머무는 등
8년여를 중국에서 지내다 1645년 2월 17일 벽제에 도착한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인질로 있는 동안 청 황제는 물론
용골대, 정명수 등 청의 신료들에게 시달린다.
그렇지만 동시에 8년이란 시간으로 인해
서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소현세자를 보는 청의 시선은 복합적이었다.
3.1 나약하고 무시당하는 소현세자
3.1.1 나약한 소현세자
당시 청 황제 홍타이지는 만주족의 尙武精神을 고취시키고,
군대 훈련도 겸하여 친히 신하들을 이끌고 자주 대규모 사냥을 나갔다.
청 황제의 사냥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 신료들도 참가하여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소현심양일기≫에는 <獵行日記>라 하여 소현세자가 따라간 사냥 상황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냥을 따라 나간 세자 일행은 무척 고생을 한다.
청황제 역시 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추운 날에는 사냥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1642년 1월 29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아문에서 역관 정명수를 보내 그 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내달 3일 사냥을 나가는데 세자와 대군도 동행해야 한다.
지난 한 겨울에 두 번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날씨가 매우 추워 왕자가 평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말을 타다가 다칠 염려도 있고 하여 가자고 청하지 않았다.
이제 봄기운이 제법 따뜻해 황제가 날이 따뜻해졌으니
사냥에 참가하라고 한 것인데 겨울 사냥은
“날씨가 매우 추워 왕자가 평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말을 타다가 다칠 염려도 있고 하여 가자고 청하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아
일견 왕자를 배려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세자가 추위에 약하고,
말도 못타는 그런 약골 이미지로 황제가 인식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사냥을 따라 나섰던 세자는 낙마를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게 된다.
진시에 청인이 이리저리 마음껏 사냥을 하느라
언덕을 오르고 벼랑을 따라 종일 달리며 쫓았다.
우리나라 사람과 말은 지치고 피곤하였다. 세자가 탄 말이 넘어져
세자가 굴러 떨어졌으나 중상은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13)
조선인들이 보는 만주족은 황제까지도 거칠고
험한 사냥을 즐기고 생활화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역으로 만주족들은 말에서 떨어지고 하는 세자의 모습을 보면서
유약한 조선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세자는 이후에도 계속 낙마를 하다 결국은 낙오를 하게 된다.
험한 길에 힘들어하고, 낙마하고, 결국은 낙오하고 마는 세자의 모습을 보면
청 황제가 이야기하였듯이 “왕자가 평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말을 타다가
다칠 염려도 있는” 나약한 이미지였음을 알수 있다.
3.1.2 무시당하는 소현세자
청은 소현세자에 대해 표면적으로 신뢰하는 태도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기에 무시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1639년 11월 1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에 곧 용골대와 마부대가 벌컥 화를 내
큰 소리로 정명수를 시켜 말을 전하게 하였다.
“만월개 장군이 돌아온 뒤에 국왕의 병환이 더 위중해졌다면
귀국에 있는 왕자와 대군이 의당 내관이나 선전관을 급히 보내 알려야지
어찌 느릿느릿 짐을 싣고 들어오는 편에 부쳤겠습니까?
이는 세자가 스스로 귀국하고자 하는 계책에 지나지 않으니 필시 속이는 것입니다.”
그가 욕하는 말은 차마 말할 수가 없다.14)
인조가 아픈 상황에 ≪藥房問安日記≫를 보내왔는데
용골대는 이 핑계로 세자가 귀국하여 보려는 속셈이라며
“벌컥 화를 내”었고, “그가 욕하는 말은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고 있다.
객관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는 세자시강원이 기록한 ≪소현심양일기≫에 이처럼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세자가 당한 수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용골대는 1642년 이후에는 세자관에 私益을 취하려
피로인들을 비싼 값에 파는 경우도 몇 차례에 걸쳐 있었다.
1642년 7월 17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골대 장군이 통사 이엇석을 보내
‘동생 집에 긴요하게 돈 쓸 데가 있으니 피로인 여자 2명을 속환시키고 싶다’고 하였다.
그 값이 은 230냥이나 되므로 일이 매우 어려웠지만,
날마다 간청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15)
12) 衙門使鄭譯來, 傳其帝之言曰, 來初三日當出獵, 要與世子, 大君同行矣. 去仲冬再度獵行,
適會日寒甚酷, 王子素不閑冒寒, 驅馴恐有致傷之患, 玆不請行, 今則春氣向和,
不妨偕往以覩快事, 須預知而治任云云.
≪역주 소현심양일기3≫(서울: 민속원, 2008.) <1642년 1월 29일>조, 16쪽.
13) 辰時, 淸人縱獵, 陟岡緣崖, 終日馴逐. 我國人馬疲困, 世子坐馬蹔蹶, 至於顚墜, 而不至重傷,
天幸也. ≪역주 소현심양일기3≫(서울: 민속원, 2008.) <獵行日記> <1642년 2월 7일>조, 26쪽.
14) 則龍馬盛氣高聲, 使命守傳言曰, 滿將回還後, 國王病候, 若有加重, 則王子大君在本國者,
宜走送內官或宣傳官來報, 豈順付於緩緩載卜入來之便. 此不過世子欲自東還之計, 必是詐也.
其恥辱之言, 不忍言. ≪역주 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8.) <1639년 11월 1일>조, 273쪽.
15) 龍將使通事李旕石來言, 厥同生家要有所用之處, 被擄女二名, 願贖云, 價銀至於二白三十兩之多,
事甚不易, 而逐日懇請, 故不得已從之.
≪역주 소현심양일기3≫(서울: 민속원, 2008.) <1642년 7월 17일>조, 71쪽.
이후에도 용골대, 그리고 정명수는 피로인, 말, 심지어는 노잣돈까지 요구하며
몇 차례에 걸쳐 세자관에 돈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1642년 이후 심양관소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해야 했던 것과 관계가 깊다.
1641년 12월 황제의 명으로 전지를 떼어주고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도록 하였고,
1642년 2월에 沙河堡, 老家塞, 王富村 등지에 600일갈이 땅을 주었으며, 그 이듬해 다시
鐵嶺衛와 柳千湖의 땅 400일갈이를 주어 도합 1천일갈이 땅을 떼어주었다.16)
처음에 세자측은 농사를 지어 심양관의 경비를 마련함의 어려움을 청 황제에게 사정하였으나
청 황제는 오히려 세자가 어리석다며 땅을 갈아 심양관의 경비를 충당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세자 측에서는 농사를 잘 지었고,
여기서 남는 이익으로 피로인들을 속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용골대 등은 자신의 이익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심양관의 경제적 여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 일국의 세자에게 피로인들을 비싼 값에 강매하고, 또 노잣돈까지 요구하는 것은
인질로 잡혀 있는 세자를 만만히 봐서이기도 한 것이다.
3.2 신뢰할 수 있고 친밀한 소현세자
3.2.1 신뢰할 수 있는 소현세자
당시 조선과 청 사이에는 여러 현안들이 있었고,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을 중재하는 입장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중간에서 난처한 상황을 많이 겪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청은 세자를 신뢰하는 편이었다.
특히 1641년 10월 30일 상황을 보면 청 황제의 세자에 대한 신뢰를 확인할 수 있다.
아침에 어제 왔던 두 사람이 다시 와서 그 황제의 말로 回報하였다.
“나도 본래 첩자의 소행이라 여겼으나,
이제 세자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의심이 사라졌다.
거짓을 아뢴 漢人 2명은 모두 사형으로 논죄하였다.”17)
1641년 10월 29일 청 황제가 호부의 阿里巖排와 甫大平古 등을 시켜
조선이 명나라에 몰래 배 2척에 쌀을 실어 보냈다는 상황을 들었다며 세자에게 알린다.
세자는 “이는 중간에 첩자가 있어 우리 두 나라를 이간질하려 벌인 일임에 틀림없다”며
“지난번 歲幣米를 가져올 때 배 2척이 풍랑을 만나
떠내려가서 그 생사를 알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평안감사가 치보하였기에
즉시 이런 뜻을 아문에 알린 바 있고, 이에 근거하여 이런 말이 나온 것”일 것이라 설명하고,
이 설명을 들은 황제가 세자의 말을 믿어 준 것이었다.
이 외에도 청 황제와 신료들은 기본적으로 세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신뢰를 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들은 ≪소현심양일기≫ 곳곳에 보인다.
3.2.2 친밀한 소현세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청은 세자에게 일정 정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에 세자와 친밀한 상황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특히 소현세자가 처음 조선에 귀국하였을 때 호행을 하였던
호행관 梧木道는 아주 우호적이고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세자가 대청 가운데 이르러 배례를 행하기를 청하니, 오목도 장군이
“서로 친숙한 사이에 어찌 예가 필요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오목도 장군이 말하였다.
“함께 심양에 있을 때 情意가 이미 친해졌고
한 달 동안 동행하면서 마음에 간격이 없어졌는데, 세자께서 예의로
저를 대하려 하시니 장차 저와 함께 심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입니까?”,,,
오목도 장군이 말하였다.
“정으로 배불리 먹이는 덕이 지극하십니다”라고 하고,
또 “젓가락 사용할 틈이 없어 손으로 집어 먹으니, 비웃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세자가 말하였다.
“서로 친한 사이에 무엇을 염려하십니까?”18)
16) 김남윤, <소현심양일기해제>, ≪역주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9) 17쪽
17) 早, 昨來兩人, 復以其帝言, 回報曰, 吾故以爲細作, 今聞世子之言, 果然無疑.
已將陳告兩漢人, 論死矣. ≪역주 소현심양일기2≫(서울: 민속원, 2008.) <1641년 10월 30일>조,
18) 王世子至廳中, 請行拜禮, 梧將曰, 相熟之間, 何必禮爲... 梧將曰, 同在瀋中, 情意旣親,
偕行一朔, 心事無間, 而世子欲以禮容待我, 將不欲與我同還瀋中耶... 梧將曰, 以情而饋飽德極矣.
위의 상황은 소현세자가 1640년 일시 귀국하였을 당시 호행관이었던
오목도와 세자간의 대화로 이들 간에 상당 정도 友誼가 쌓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소현세자는 오목도뿐 아니라 용골대 등과도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용골대 장군 등 4인이 세자에게 왔다.
세자가 술과 고기를 차려 대접하고, 데리고 온 가정들까지도 대접하였다.
용골대 장군 등은 자못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세자가 재신과 강관을 불러 술을 내렸다.
저물녘에 용골대 장군 등이 세자에게 잠시 아문으로 올 것을 청하였다.
빈객 한형길과 보덕 박서가 모시고 갔다.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차려 놓고 용골대 장군과 천타마가
직접 술을 따라 배종 관원들에게 권하면서 정성을 다하였다.19)
위의 인용문은 세자가 청 황제의 명으로
鳳凰城 行館에 나가 있을 때의 상황으로 용골대 등
청의 장군들과 우호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청의 장군들과 친밀하게 접촉하는 상황은 ≪소현심양일기≫ 곳곳에 보이고 있다.
이처럼 소현세자에 대한 청의 시선은 복합적이었다.
청은 조선 국왕, 혹은 조선 신료들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소현세자를 기본적으로
신뢰하면서도 조선을 대변하는 세자를 무시하는 등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인질로 잡혀 있는 세자를 일정 정도 동정하는 분위기도 내보였다.
1639년 9월 6일조를 보면 청황제가 소현세자를 배려하여 소풍을 나가게하는 상황이 보인다.
이른 아침에 예부의 관원이 와서 말하였다.
“황제께서 세자가 오래도록 깊은 관소에 거처하면서 하늘 높아진 것만 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지 못함을 생각하여 우리로 하여금
바로 오늘 세자를 모시고 강변에 유람하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20)
梧將曰, 下著不閑, 以手摧喫, 幸勿爲笑. 王世子曰, 相親之間, 庸何傷乎.
≪역주 소현심양일기2≫(서울: 민속원, 2008.) <1640년 3월 8일>조, 68-70쪽.
이처럼 청 황제는 이따금 세자에게 소풍을 권유하고
소와 양 등을 보내며 타국에서의 인질 생활을 달래주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런 소풍은 황제뿐 아니라 용골대 장군 등
청의 신료들도 권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청의 소현세자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에 기록된 ≪昭顯乙酉東宮日記≫ 1645년 3월 4일조를 보면
청의 세자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볼 수 있다.
제3사가 말하였다.
“저희는 세자께서 안녕하시기를 축원할 뿐입니다. 강을 건너기 전부터
오직 이 한 생각만으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할 뿐 다른 바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자께서 저희를 황제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라고 하여
지성껏 대접하려 하시니 감격스럽습니다. ”...
칙사가 말하였다.
“저희는 다만 황제께서 세자를 극진히 대하시는 뜻을 받들어
세자께서 미령하신 것이 늘 염려스러울 따름입니다.”21)
청의 칙사는 강을 건너기 전부터 오직 세자의 안녕을 축원하였다고 하며
청 황제 역시 세자를 극진히 대하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소현을유동궁일기≫의 1645년 2월 18일조에서 국왕인 인조가
청 황제를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과 비교해보면
청의 세자에 대한 친밀감을 알 수 있다.
19) 龍將等四人來到世子前, 世子設酒肉以待之, 遍及帶來家丁, 龍將等頗有喜色. 世子召宰臣,
講官饋酒. 差晩, 龍將等請世子暫臨衙門, 賓客韓亨吉, 輔德朴遾陪往. 大設酒肉, 龍將, 淺他馬,
手自酌酒, 以勸從官, 盡其款曲. ≪역주 소현심양일기3≫(서울: 민속원, 2008.)
<鳳凰城日記><1642년 10월 18일>조, 144쪽.
20) 早朝, 禮部官來言, 皇帝念世子長居深館, 只見天高, 不知節序之更, 故令俺等,
乃於今日奉世子遊覽於江上云. ≪역주 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8.) <1639년 9월 6일>조,
21) 第三使曰, 俺等只祝世子氣候之安寧. 未渡江前, 唯此一念, 耿耿于中, 無他所望,
而今者世子以俺等爲皇帝所送之人, 而欲至誠以待, 感激則有之矣..... 勅使曰,
俺等只體皇帝待世子之意, 每以世子氣候之不寧爲憂悶耳.
≪역주 소현심양일기4≫(서울: 민속원, 2008.) <1645년 3월 4일>조, 208-210쪽.
4. 조선 신료들에 대한 이미지
청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신료들을 불신하였다.
이들이 명과 내통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청에 소홀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었다.
더불어 국왕인 인조를 책망함에 있어서도
신하들이 청과 조선 국왕과의 관계를 이간질 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金尙憲과 宣若海 등 기개 있는 신하들에 대해서는 청 황제 역시 이들을 인정하였다.
4.1 신뢰할 수 없는 조선 신료들
당시 조선과 청은 명 정벌을 위한 병사 차출,
조선 여인 징발, 향화인 등의 송환 등 몇 가지 현안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안에 있어 조선은 어떻게든 피해 보려 하였고,
청은 이를 어떻게든 관철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실무를 담당하는, 혹은 이 부분을 결정해야 하는 조선 신료들에 대해
청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4.1.1 명과의 내통을 의심받는 조선 신료들
무엇보다 청이 신경 쓰는 것은 명과의 내통이었다.
≪소현심양일기≫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상황들이 등장하게 된다.
1641년 10월 29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듣자니 조선에서 南朝에다 몰래 배 2척에 쌀을 실어 보냈다고 한다.
남조에 부족한 것은 쌀이 아니다.
만약 금주의 포위된 곳으로 보냈다면 조금이나마 이로운 바가 있겠지만,
남조에 보냈다면 이익은 없고 해로움만 사게 될 것이니,
국왕은 의당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국왕이 어찌 차마 우리를 이처럼 빨리 잊을 수 있겠는가?
이는 필시 한두 명의 변방 신하 중에 좋지 못한 자들이 사단을 만들어
우리 두 나라 사이를 이간질하고자 한 일일 것이다.
국왕에 대해서 나는 의심하지 않으며, 친애하고 신뢰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자에게 은밀히 말을 전하니, 꼭 혼자만 알고 삼가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하라.”22)
위의 상황은 戶部의 阿里巖排와 甫大平古 등이
청 황제의 명으로 세자를 방문하여 전한 말이다. 청은 조선의 신료들이
명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처럼 의심하는 상황들은 이후에도 많이 나온다.
이런 불신은 병자호란(1636) 이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묘호란(1627)이후 1630년 심양에 사신으로 갔던
宣若海의 ≪심양사행일기≫에도 조선 관원들이
명과 내통한다고 의심하는 청의 생각을 볼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1630년 4월 26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호가 이어서 말하였다.
“귀국은 和約을 맺을 때 거듭 말하기를 ‘島中에 양식 쌀을 원조하지 말자’고 했는데,
지금 명나라 군사로부터 세세히 들은 것에 의하면 ‘귀국의 관원들이
양식 쌀을 가지고 섬에 들어가 무역하고 돌아왔다’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인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우리나라 백성들을 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겨를이 없는데, 타국의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귀국의 사람들은 매사에 으레 교묘하게 꾸며대는 빈말을 많이 하고,
발각된 후에도 태연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도중에 양식 쌀을 싣고 들어갔다가 돌아온 귀국 관원의 성명까지
명나라 사람이 똑똑히 알고 찾아와서 알려주었으니,
그 사람을 잡아와 대면하고 추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23)
이처럼 청은 병자호란 이전에도 조선 신료들이 명과 내통하면서도
“매사에 으레 교묘하게 꾸며대는 빈말을 많이 하고,
발각된 후에도 태연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며 불신하고 있었다.
4.1.2 현안 해결에 미온적인 조선 신료들
당시 조선과 청 사이에는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인 向化人과
조선으로 도망간 走回人의 송환, 조선 여성 징발, 煙草의 금지 등 다양한 현안이 있었다.
청은 조선에 속히 향화인과 주회인을 송환하라고 압박을 하였으나
그 실적은 미미하였고 이에 실무를 맡은 용골대와 마부대는 성을 낸다.
1638년 5월 26일 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군이 재신 박로를 아문으로 불러 시녀의 혼인,
향화인과 도망자 등에 관한 일을 속히 이행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데 거의 협박조였다.
이어서 煙草에 관한 금법을 어긴 데 대해 성을 내었다.24)
향화인의 송환 등과 관련하여 용골대 등은
1638년 7월 11일조에서는 조선 국왕과 신하들의 안위에 대해서도 위협하였다.
1638년 7월 11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였다.
“정묘년(1627) 이래 국왕이 우리의 말을 믿지 않고
매양 조정 신하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전날의 일은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
이제 국왕은 필시 전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을 터이지만
또 조신의 말을 들어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앞으로 이 때문에 죄를 얻게 생겼습니다.
우리가 죄를 얻으면 국왕과 조정 신하들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향화인과 도망자를 쇄송하는 일은 모두 약조 가운데 언급된 것인데,
아직까지 이행할 뜻이 없고, 세자께서 매양 여기에서 막고 있으니,
이는 세자와 대군이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고,
국왕도 세자와 대군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25)
이처럼 청은 조선의 신료들을 기본적으로 불신하였다.
명과 내통하고 있고, 향화인 등의 송환, 병사 징발, 조선 여인의 징발 등
현안에 있어서도 미온적으로 대처하였기에 “거의 협박조”로
질책을 하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22) 聞朝鮮潛送二船米於南朝云. 南朝所乏者, 非米也. 若送於錦州圍中, 則猶有所小益, 送於南朝,
則無益而賈害, 國王不宜爲此. 且國王, 豈忍忘余, 如是速也. 此必一二邊臣, 有不淑者, 欲生事,
以間染我兩國也. 國王, 則吾不疑之, 吾有親信之意, 故密告於世子, 須獨知而愼勿出口也.
≪역주 소현심양일기2≫(서울: 민속원, 2008.) <1641년 10월 29일>조, 261쪽.
23) 龍胡因言曰: “貴國約誓時, 重言: ‘島中, 勿爲助粮事.’ 而今因漢人細聞, ‘貴國官員, 領米入島,
貿易以來.’云, 是何道理乎?” 答曰: “我國連年凶荒, 自活吾民之不暇, 遑恤他人乎?” 龍胡曰:
“貴國之人, 每事例多巧飾, 而見發之後, 恬不爲羞愧耳。 島中, 載粮入歸, 官員姓名, 漢人明知來告,
拿彼面詰, 則可知矣.” 宣若海,
≪瀋陽使行日記≫(서울: 보고사, 2013.) <1630년 4월 26일>조, 40-41쪽.
24) 龍馬兩將招致宰臣朴(竹+魯)于衙門, 問侍女婚媾及向化逃回人等事, 責以不速擧行, 多般恐嚇.
仍發怒於煙草之犯禁.
≪역주 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8.) <1638년 5월 26일>조, 149쪽.
25) 龍馬曰, 自丁卯以來, 國王不信俺等之言, 每爲朝臣所誤, 全日之事, 足以鑑矣. 今國王則必不
4.2 기개를 인정받는 조선 신료들
4.2.1 宣若海(1579-1643)
선약해는 1630년 4월 3일부터 5월 23일까지 위문사의 신분으로 청을 다녀온다.
그리고 다녀온 상황을 그의 ≪심양사행일기≫에 기록한다.
이 기록은 세자시강원이란 공식 기구에서 작성한 ≪소현심양일기≫와는 다른
개인의 기록이기에 일정 정도 과장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감정적인 부분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병자호란 이전 청과 조선의 상황 등을 엿볼 수 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있은 후 청과 조선은 형제지국의 약조를 맺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약해는 여러 어려움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개를 떨치고 또 자신의 뜻을 관철해낸다.
1630년 4월 26일조를 보면 선약해의 기개가 드러나는 상황이 나온다.
“그것은 그렇겠다. 다만 관원이 양식 쌀을 가지고 섬으로 들어간 것은,
하늘에 맹세하여 약속해 놓고 하늘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사신이 말을 살피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말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은 너무나 생각이 없는 짓이다.
다른 나라의 귀신이 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며,
다른 나라의 땅에 잡혀 있으면 또한 누가 아름답다고 칭찬하는가?
어찌 이같이 말한단 말인가?”
望前約, 而又聽朝臣之言, 致有如此之擧, 俺等亦將因此而得罪. 俺等得罪, 則國王與朝臣,
安得無事乎. 向化, 走回人刷送事, 皆是約條中所言, 而迄無擧行之意, 世子每每自此搪塞,
是世子, 大君不欲東還, 而國王亦不念世子, 大君也.
≪역주 소현심양일기1≫(서울: 민속원, 2008.) <1638년 7월 11일>조, 163쪽.
“무릇 사람이 태어나 백세를 산다지만 7,80세를 살기가 어렵고,
설령 백세를 산다고 해도 하늘과 땅에 견주면 한낱 하루살이일 뿐이라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남자로 세상에 태어나서는 이름을 귀하게 여기나니,
내가 만약 사신으로서 어명을 받들고 이곳에 왔다가
이런 일 때문에 그대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이웃 나라의 사신을 죽였다는 오점과
나의 명성이 나란히 백년 천백 장구한 세월을 전해질 것이다.
또한 소무는 19년 동안이나 그 절개를 잃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니,
나도 기필코 19년이란 오랜 세월을 기약할 것이다.
내가 어찌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겠는가?”
“사신은 내 말을 잘못 듣고서 잘못 말하고 있다.
사신이 죽고 싶어 할지라도 우리나라가 어디에 쓰려고 죽일 것이며,
머물고 싶어 할지라도 우리나라가 어디에 쓰려고 굳이 붙들어둘 것이랴?
다만 사신의 말이 그릇되고 망령됨이 이와 같으니,
하늘이 반드시 죽음을 내려서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늘이 크게 살피시고 죄를 벌주려 하신다면 응당 묻는 그대에게 죽음을 내리실 것이지,
응답하는 나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시지 않을 것이다.”
용호의 성난 눈빛이 마치 번갯불 같았다... 26)
선약해의 태도에 화가 난 용골대는 죽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다른 나라의 귀신이 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며,
다른 나라의 땅에 잡혀 있으면 또한 누가 아름답다고 칭찬하는가?”라고 위협을 한다.
그러나 선약해는 오히려 “그대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이웃 나라의 사신을 죽였다는 오점과
나의 명성이 나란히 백년 천백 장구한 세월을 전해질 것이다”라며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용골대는 한풀 꺾여 “사신의 말이 그릇되고 망령됨이 이와 같으니,
하늘이 반드시 죽음을 내려서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선약해는 여기에도 지지 않고 오히려 벌이 내린다면
용골대에게 벌이 내릴 것이라며 끝까지 그 기개를 잃지 않고 있다.
26) “此則然矣。 但官員領米入島, 誓天約條, 天不畏懼者也.” 臣答曰: “不畏天, 在誰乎?”
龍胡曰: “使臣, 不察言語, 縱意快辯, 不思之甚也。 爲他邦之鬼, 有何好事?
而拘他域之身, 亦何稱美? 如是言之耶?” 答曰: “凡言人生百歲, 而難壽以七八十歲,
縱使百歲, 言之比於天地, 一蜉蝣也。 是以, 男兒生世, 以名爲貴, 俺若以奉使來此,
以事被死於爾, 殺隣國之使與吾名, 並流千百歲 之間。 且蘇武十九年, 未聞失其節,
吾必期十九年之久也。 吾何畏死, 以此含糊不答耶?” 龍胡 曰: “使臣誤聞吾言而誤答也。
使臣雖欲死, 我國何用殺之? 雖欲留, 我國何用强留? 但使臣之言語, 謬妄如此,
則天必賜死, 而不使歸也.” 又答曰: “天若孔昭而科罪, 則應有死於所問之地,
而不必降罰於應答也.” 龍胡怒目如電。 宣若海,
≪瀋陽使行日記≫(서울: 보고사, 2013.) <1630년 4월 26일>조, 41-42쪽.
뿐만 아니라 1630년 5월 13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온다.
대해가 말하였다.
“어떤 나라에는 군사를 빌려주면서 어떤 나라에는 빌려줄 수가 없단 말인가?
따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듣고 싶다.”
“우리나라와 상국은 예로부터 그 의리가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와 같으니,
아버지가 큰 일이 생겨 아들의 사내종들을 부른다면
자식 된 자는 그것을 즐거이 따르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그 당시 귀국은 저 진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지난 일을 거론하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하다.
또 상국과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간의 관계를 맺고 은혜로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 같아서
지극정성으로 섬겨온 것이 300년 가까운데, 오늘에 이르러서 귀국에게
군사를 빌려주어 침략하도록 한다면 천하의 후세에게 죄인이 될뿐 아니라
세상의 귀신들도 반드시 몰래 벌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여염집의 미천한 사람이나
삼척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버지와 아들간의 처지임을 아는데,
그 어린아이들을 거느리고 그 부모를 치자고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랴!
바로 귀국의 이러한 청을 따르려 해도 백성들 그 누구와 함께 가겠는가?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힘이 약하여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는데,
군인과 병장기를 빌려줄 수가 있겠는가?”
대해는 그 자리서 일어나 칸에게 돌아들어가 아뢰고,
다시 돌아와 하는 말에 ‘조선 사신의 말은 말인즉 옳다.
남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했다면서,
이윽고 칸을 위한 뜻으로 공갈하며 말하였다.
“단지 탄환처럼 조그마한 섬을 믿고서 국왕이 거둥했던 것은 옳은 것이더냐?”
대해는 그의 뜻이 지난날 사단이 생겼던 전말에 있었기 때문에
누누이 말하다가 옷소매를 떨치고 결연히 가버렸다.27)
군사 차출에 대해 예전에 명나라에는 군사를 빌려주었으면서
청나라에는 빌려주지 않는 이유를 대라고 하자 선약해는 주눅 들지 않고
명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결국 이러한 선약해의 기개를 청 황제도
“남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며 인정을 하게 된다.
27) 大海曰: “何如國則借兵, 而何如國則不可歟? 願聞難從也.”
臣答曰: “我國與上國, 自古義同父子, 爲父者有事, 招子之好僕, 則爲子者, 其肯不從乎?
况其時爾國, 則以秦越相視, 尤不可以擧前事也。 且與上國, 義結君臣, 恩猶父子, 至誠事大,
近三百年, 而及至今日, 借兵爲寇, 不但天下後世之罪人, 天地鬼神, 亦必陰誅。 而閭閻下賤,
三尺孩童, 皆知父子之邦, 卛其赤子, 攻其父母, 其可忍言? 雖欲從此請, 民誰與焉?
况我國力綿, 不能自守, 其可借人兵乎?” 大海卽起, 入告汗, 還言內, ‘朝鮮使臣之言, 言則是。
爲人臣者, 當如是.’云, 因爲汗意, 嚇言曰: “只恃彈丸一島, 國君遷動, 其可乎?” 大海,
以其意在昔釁生首末, 縷縷言之, 拂衣而去。 宣若海,
≪瀋陽使行日記≫(서울: 보고사, 2013.) <1630년 5월 13일>조, 61-62쪽.
4.2.2 金尙憲(1570-1652)
김상헌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심양에 끌려가서도 기개를 떨쳐 청의 왕들과 신료들까지 감탄하게 만든다.
1641년 1월 8일 김상헌이 심양에 끌려와 심문을 받는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늙고 병들어 벼슬을 할 수 없는데 어느 겨를에 상소를 올렸는가?”
김상헌이 답하였다.
“벼슬을 하는 것은 근력이 부쳐 못하지만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어찌 말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비록 말한 바가 있을지라도 국왕께서 채택하여 쓰지 않으셨다.
너희 나라의 일 중에서 내 말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 있는가?”
말의 기상이 늠름하여 조금도 굽힘이 없으니 듣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렸다.
역관 정명수 또한 공경하고 탄복하며, 형부 관원에게 말을 전할 때
‘너희 나라[爾國]’를 ‘이 곳[此處]’으로 고쳐 그들이 격노하지 않기를 바랐다...
형부의 관원들이 들어가 일일이 質可王에게 고하자 모두 內庭으로 끌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거기에서 문초한 일과 대답한 바의 말이 문 밖에서 문답한 말과 다름이 없자
곧 문 밖으로 내쳤다. 질가왕과 여러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김상헌은 과연 望哥에 망가로다”라고 하며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청나라 말로 ‘망가’란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대개 매우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두 번이나 ‘망가’라고 일컬은 것이다...
김상헌은 여러 사람을 돌아보면서
“곧 죽을 사람이 애걸한다고 살 수 있겠는가?”라고 냉소하며
안색이 변하지 않고 거동이 태연자약하였다.
청인들도 감탄하여 마지않으며 김판서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다.28)
28) 老病不能從仕, 則何暇上疏乎. 答曰, 從仕則筋力不逮, 而心有所懷, 何可不言乎. 但雖有所言,
國王不爲採用, 爾國之事, 以吾之言, 不得成者有耶, 辭氣凜然, 少無屈挫, 聽者縮頸, 鄭譯亦敬服,
傳語於刑部官時, 改爾國爲此處, 冀不激怒也.... 刑部官等, 一一入告於質可王, 則幷令押入內庭.
其推問之事, 所答之言, 與門外問答之辭無異, 旋卽出置門外. 質可與諸人相謂曰, 金也果是望哥望哥,
因嘆嘖不已. 淸語望哥者, 猶云極難, 盖謂極難之人, 故再稱望哥也... 金顧謂諸人曰, 卽刻當死之人,
雖哀乞得生乎. 微哂之, 顔色不變, 擧止自若. 淸人亦嘖嘖稱嘆, 稱以金判書, 而不敢名言.
≪역주 소현심양일기2≫(서울: 민속원, 2008.) <1641년 1월 8일>조, 147-150쪽.
이처럼 김상헌의 대담함과 절개 있음에
청나라의 역관으로 있던 정명수 또한 공경하고 탄복하며 김상헌을 위해
“ ‘너희 나라[爾國]’를 ‘이 곳[此處]’으로 고쳐 그들이 격노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질가왕 역시 “망가”라며 감탄하고 있으며 죽게 되었는데도 태연자약하자
청인들도 감탄하여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김판서라고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꼿꼿함은 청 황제의 사면을 받은 뒤에도 변하지 않는다.
1643년 4월 1일 김상헌은 청 황제의 사면을 받게 된다.
이에 용골대는 같이 사면을 받은 최명길과 김상헌에게
황제의 명에 사은하게 하였지만 김상헌은 끝내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이어서 쇠사슬을 벗기게 하였다.
세자가 재삼 감사하다고 말하니 용골대 장군은 두 신하에게
서쪽을 향하여 황제의 명에 사은하게 하였다.
김상헌은 허리 병 때문에 예를 행하지 않았다.
용골대 장군 등이 강제로 시켰으나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최명길이 서향하여 사배의 예를 행한 뒤에 두 신하를 내보냈다.29)
29) 仍令解鎖. 世子再三稱謝, 則龍將令兩臣西向謝帝命. 金尙憲以腰病不爲行禮. 龍將等强之,
則終不運動. 崔鳴吉西向行四拜禮後, 出送兩臣.
≪역주 소현심양일기3≫(서울: 민속원, 2008.) <1643년 4월 1일>조, 189쪽.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용골대도 결국 김상헌으로 하여금 황제에게 예를 올리게 할 수 없었다.
“용골대 장군 등이 강제로 시켰으나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김상헌의 기개에 용골대가 눌렸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선약해와 김상헌처럼 기개 있는 신하들의 경우
청 황제나 신하들 역시 그들을 인정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5. 나가며
이 논문에서는 世子侍講院이 기록한 ≪昭顯瀋陽日記≫와
宣若海의 ≪瀋陽使行日記≫를 통해 丙子胡亂 前後 淸이 朝鮮의 국왕인 仁祖,
瀋陽에 인질로 잡혀간 昭顯世子, 그리고 조선의 신료들을 어떻게 보고 있나 살펴보았다.
기본적으로 淸은 朝鮮 國王인 仁祖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국왕과 관련된 대부분의 언급에서 그를 背恩忘德하고,
信賴가 없으며, 성의도 없고, 또 柔弱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昭顯世子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이미지가 드러나고 있다.
8년여 동안 심양에 人質로 머물렀던 소현세자, 그리고 조선과 청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세자였기에 그를 바라보는 청의 시선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었다.
청 황제와 龍骨大 등 장군들은 심양에 인질로 잡혀와 있는
소현세자에게 일정 정도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이는 그에게 몇 차례에 걸쳐 바깥바람을 쐬라고 권유하는 것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조선과 청과의 懸案 중재에 있어
세자에게 일정 정도 신뢰를 보내는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미운정 고운정이 든 용골대 장군 등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도 ≪소현심양일기≫에는 보인다.
물론 이런 긍정적인 모습 뿐 아니라 사냥에 따라가 낙마하고, 결국은 낙오하는
세자의 모습을 통해 유약함이란 부정적인 이미지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 기록에는 인질로 잡혀와 있던 세자이기에
그가 조선의 이익을 위해 淸을 속인다며 비판받는 부분도 적지 않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國王인 仁祖의 이미지와 비교했을 때
淸은 昭顯世子를 훨씬 더 신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은 조선의 신료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불신하고 있었다.
당시 현안이었던 向化人, 走回人의 送還件, 明 정벌을 위한 병사 差出件,
조선 여인 징발건등에 있어 조선의 신료들은 적극적이지 않았고,
이에 청은 이러한 신료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宣若海, 金尙憲과 같이 氣槪가 있는 신하들에 대해서는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를 인정해 주는 것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청은 조선 국왕 인조와 조선 신료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인질로 잡혀와 있으면서 청과 조선의 중재자 역할을 하였던 소현세자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의 복합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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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 김동준 등 역, ≪譯註 昭顯瀋陽日記4, 昭顯乙酉東宮日記≫, 서울: 민속원, 2008.
__________, 정하영 등 역, ≪심양장계 -심양에서 온 편지≫, 서울: 창비, 2008.
宣若海 원저, 신해진 편역, ≪瀋陽使行日記≫, 서울: 보고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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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연구재단 편,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 만주≫, 서울: 고구려연구재단, 2005.
김선민,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재인식:
“외국”과 “속국”의 사이 -正史를 통해 본 청의 조선 인식> ≪사림≫ 41호, 수선사학회, 2012.
<中文提要>
本論文通過世子侍講院記錄的≪昭顯瀋陽日記≫和宣若海的≪瀋陽使行日記≫來考察丙子胡亂
前後, 清朝是如何看待朝鮮的。 清朝對朝鮮國王仁祖從根本上懷有一種負面的印象。 提到國王時,
大部分內容都認爲他是個背恩忘德、 無法信賴, 不懂禮意的柔弱存在。 相比之下, 在清朝眼中
昭顯世子的形象則是雙面的。 昭顯世子作爲人質滯留瀋陽八年多, 曾在清朝和朝鮮之間發揮過
的仲裁人的作用, 清朝對他的看法也只能是雙面的。 淸皇帝和龍骨大等將軍幾次勸他出去透氣,
似乎對被當做人質抓來瀋陽的昭顯世子感到有些惋惜。 還可以看出, 在他負責朝鮮和清的懸案
仲裁時, 清基本上對昭顯世子還是持有一定信任的。 並且, 通過≪昭顯瀋陽日記≫還能看出,
他與龍骨大將軍等雖然有過過節, 但也結下深厚的情誼, 保持著親密的關系。 當然, 對昭顯
世子的描寫並不是只有正面的, 通過跟著去打獵的時候墜馬並最終掉隊這些描寫, 還能推
出他柔弱的負面形象。 在此記錄中, 還有不少地方的描寫認爲世子被當做人質抓去後, 爲了
朝鮮的利益而欺瞞清朝。 可是與國王仁祖的形象相比的話, 清朝似乎更加信任昭顯世子。
淸朝對朝鮮的臣僚從根本上是不信任的。 對於當時是懸案的向化人, 走回人的送還件, 爲了
征伐明的士兵差出件, 發配朝鮮女人件, 朝鮮的臣僚並不積極。 因此, 清朝對這些臣僚有著
否定的看法。 只是, 對於宣若海, 金尙憲等有氣槪的臣僚, 雖然和自己的想法不同, 但是大
體對他們還是持肯定態度的。
원고접수일 심사일정 1차수정 게재확정 출간
2013. 7. 15. 2013. 8. 4. 2013. 8. 15. 2013. 8. 22. 2013.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