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병자호란 講和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 許 泰 玖

이름없는풀뿌리 2022. 6. 10. 05:37
□ 병자호란 講和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병자호란 講和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許 泰 玖* [目 次] Ⅰ. 머리말 Ⅱ. 농성 초반기(병자년 12월 14일~병자년 12월 30일) 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Ⅲ. 농성 중반기(정축년 1월 1일~정축년 1월 15일) 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Ⅳ. 농성 종반기(정축년 1월 16일~정축년 1월 30일) 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Ⅴ. 맺음말 【국문요약】 이 논문은 병자호란 당시의 講和 협상 과정을 淸軍 전력의 증강과 연관하여 살펴보고, 협상 당사국인 조선의 대응을 ‘禮의 실천’이란 관점에 주목하여 재검토한 연구이다. 병자호란과 관련된 선행 연구는 남한산성의 농성**을 주로 청의 침략에 대항하는 조선의 항전에만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였다. 따라서 강화 협상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國書의 형식 등에 대해 당대인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이러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분석이 시도되지 않았다. 청은 남한산성을 포위한 이래, 자국의 전력이 속속 강화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점차 높여 갔다. 인조 15년(1637) 1월 중순에 이르면 병자호란의 승부는 양국 전력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해 이미 결판난 상태였다. 主和派의 주장대로 청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 한, 조선이란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한산성 농성시 강화 협상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영토의 할양이나 전쟁 배상금 등의 문제가 아니라 국서의 형식과 항복의 절차였다. 대청제국의 수립을 의례적 절차에 의해 확인받으려고 한 청은 稱臣을 표기한 國書, 인조의 出城 항복, 斥和派의 압송을 집요하게 조선에 요구하였다. 당시 강화 협상에 임한 조선의 君臣이 끝까지 고민하였던 문제는 항복의 여부라기보다, 禮를 통해 구현되는 항복의 형식이었다. 대다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 明義理라는 大義와 稱臣을 표기한 국서의 형식 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斥和派는 戰況이 이미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대명의리의 고수를 외치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였다. 이들이 우려하였던 것은 明의 問罪나 보복이 아니라, 대명의리의 포기를 통한 윤리와 문명의 붕괴였으며, 天下와 後世의 평가였다.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강사 ** 농성(籠城) : 옛날 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국가에서는 성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성과 외성인 성곽을 쌓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성문 앞에 항아리와 같은 모양의 옹성을 쌓아 지키기도 했다. 최고로 용감한 병사들이 지키던 옹성이 무너지면 성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철저하게 성을 지켰는데, 그러한 일을 농성이라 일렀다. 투고일 : 2010. 1. 20 심사일 : 2010. 1. 23~30 심사완료일 : 2010. 2. 1 핵심어:丙子胡亂, 南漢山城, 講和, 禮, 對明義理, 主和派, 斥和派, 國書 Ⅰ. 머리말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의 韓․中 관계는 明․淸 교체라는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 아래 전개되었기 때문에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조명이 이루어졌다. 조공 관계의 변동이란 틀 속에서 정묘호란의 和平 교섭과 후금군의 撤兵 경위가 고찰된 이래1) 양국 간의 정치․경제․외교적 갈등과 현안에 대해 많은 연구가 수행되었다.2) 최근에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시기에 이르는 한․중 관계의 추이가 再造之恩의 형성․변형․복구라는 시각에서 정리된 연구3)가 제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을 통해 병자호란 전후 한․중 간의 교섭 과정과 갈등,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피해의 실상 등에 대해서는 정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병자호란과 관련되어 수행된 연구 가운데 남한산성의 농성 중에 진행되었던 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정면으로 다룬 것은 거의 없다. 남한산성의 농성은 주로 농성 중인 조선의 저항과 이를 외부에서 지원하려는 각도 勤王軍의 동향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었다. 이것은 이 주제가 주로 민족 항쟁을 부각하려는 시각에서 접근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4) 남한산성의 강화 협상은 항복으로 종결되는 전쟁의 일부분으로서만 소략하게 다루어짐으로써,5) 협상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사안인 國書의 형식 등이 당대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분석이 시도되지 않았다.6) 1) 全海宗, 丁卯胡亂의 和平交涉에 대하여, 亞細亞學報 3, 1967; 丁卯胡亂時 後金軍의 撤兵經緯, 白山學報 2, 1967; 韓中關係史硏究, 一潮閣, 1970. 2) 대표적인 연구로는 朴容玉, 丙子亂 被擄人 贖還考, 史叢 9, 1964; 丁卯亂 朝鮮被擄人 刷․贖還考, 史學硏究 18, 1964; 金鍾圓, 丁卯胡亂時의 後金의 出兵動機, 東洋史學硏究 12․13, 1978; 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 혜안, 999; 최소자, 명청시대 중․한관계사연구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7. 3)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4)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사 29-조선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1995, 276~293쪽. 5) 柳在城, 丙子胡亂史,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6, 218~240쪽; 이상배, 丙子胡亂과 三田渡碑文 撰述, 江原史學, 19․20, 2004, 92~104쪽. 6) 조선과 청 양측에게 조선의 稱臣을 표기한 國書의 작성은 인조의 출성 못지않게 중대한 사안이었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 같은 사안을 청이 단순히 ‘트집’을 잡은 것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柳在城, 1986, 앞의 책, 228쪽; 이상배, 2004, 앞의 논문, 102쪽). 기존 연구에서 이미 지적된 것처럼 정묘호란의 강화 협상 당시에 撤兵․刷還․開市․歲幣․越境․遼民 등의 사안도 논의되었지만, 정묘화약 전후의 行禮를 둘러싼 양국 간의 줄다리기는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7) 이때의 교섭 과정을 기록한 仁祖實錄에 후자와 관련된 내용이 전자의 사안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실려 있는 점은, 교섭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자 기록을 남긴 당대인의 시선이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남한산성 농성 당시 강화 협상 과정의 쟁점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당시 전쟁을 수행하였던 조선 君臣의 내면세계를 당대의 맥락에서 접근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 하여 본고는 기존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사실, 즉 淸軍의 攻勢가 강화됨에 따라 講和 협상의 조건과 쟁점도 이에 연동되었던 과정을 세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8) 이러한 현상은 淸의 開戰 목적9)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청군이 공세를 강화함에 따라 조선측의 대응도 급변하였으며, 이는 ‘禮의 실천’이란 사안을 놓고 벌어진 양국간의 강화 협상 과정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의 군신들이 끝까지 회피하려고 하였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검토해 본다면, 병자호란을 수행하였던 당대인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더불어 이 전쟁의 강화 협상이 갖는 역사적 성격과 의미도 재조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 全海宗, 1970, 앞의 책, 123쪽 참조. 8) 본고는 강화 협상의 추이를 세 시기(병자년 12월 14일~병자년 12월 30일, 정축년 1월 1일~정축년 1월 15일, 정축년 1월 16일~정축년 1월 30일)로 구분하였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시간에 따른 구분이라기보다 이에 따라 강화 협상의 국면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9) 병자호란의 발발 계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청제국의 수립에 따른 청의 稱臣 요구를 조선이 정면으로 거부한 데에 있었다. 이를 둘러싼 양국 간의 갈등은 다름 아닌 典禮와 관련된 지점에서 분출되었다. 조선은 인조 14년(1636) 2월 후금 신하들의 尊號 진상 동참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는 청 태종의 즉위식에 참석한 回答使 李廓과 春信使 羅德憲이 구타를 당하면서도 홍타이지에게 拜禮를 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 親征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의 臣屬을 여러 典禮를 통해 확인받는 것이었으며, 그 정점은 인조의 출성 항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의 관철은 당연히 조선(군)의 대응 정도에 따라 제약받는 것이었다. Ⅱ. 농성 초반기(병자년 12월 14일~병자년 12월 30일) 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인조 14년 12월 청군 선발대의 기습으로 都城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당한 인조는 14일 初更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10) 15일 새벽에 인조는 다시 한 번 강화도로 출발하였지만, 얼어붙은 산길과 청군의 매복 가능성 때문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11) 이로부터 인조 15년(1637) 1월 30일에 종결된 남한산성의 농성이 시작되었다. 12월 14일 청군 선발대의 진군을 지연하기 위해 적진에 파견되었던 崔鳴吉은 다음날 돌아와 청의 강화 조건이 王弟 및 大臣을 인질로 삼는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12) 조정은 綾峯守 偁을 왕의 아우라고 가장하고 刑曹判書 沈諿에게 大臣의 職銜을 가칭하여 적진에 파견하여 강화를 성사시키려고 하였다.13) 이와 같은 시도는 정묘호란의 前例14)에 비추어 綾峯君 칭과 심집의 진위를 의심한 청에 의해 무산되었고, 이를 부인한 조선 측 譯官인 朴蘭英은 후일 살해되고 말았다.15) 협상은 결렬되었고 청이 이때 새로이 제시한 강화 조건은 世子가 직접 청군 진영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10)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甲申(14일). 11)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乙酉(15일). 12)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乙酉(15일) “崔鳴吉自賊陣還 啓陳和事以爲賊要以王弟及大臣爲質”; 이 때 청이 왕자와 대신, 척화신의 출송을 요구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趙慶男, 續雜錄 四 병자년 12월 14일 “崔鳴吉又啓曰 彼謂我等之行 專主和議 而爾國人民 閭閻一空 至於主上播越 心甚不安 如欲修好 須遣王子大臣及斥和人 當自此還去矣”). 13)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乙酉(15일). 14) 정묘호란 때에는 宗室인 原昌副令 李玖를 原昌君이라 칭하여 王弟라 속이고 청군의 진영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仁祖實錄 권15, 인조 5년 2월 庚戌(13일)). 15)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丙戌(16일) “虜遂問於朴蘭英 蘭英以偁爲眞王弟 諿爲眞大臣 虜大怒 遂殺蘭英 因言曰 出送世子然後 方可議和云” 청 태종의 친정을 염두에 놓고 볼 때, 세자의 出送은 강화의 성립을 위해 청이 설정한 최소한도의 요구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16) 따라서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왕제 및 대신을 인질로 요구한 청의 첫 번째 강화 조건은 협상에 임하는 조선의 태도를 떠 보기 위한 기만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인조는 가짜 왕제와 대신을 청군의 진영에 보내면서도 청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하였다.17) 12월 17일에는 청군의 후속부대가 국경을 넘고 있다는 留都大將 沈器遠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하였다.18) 사태가 급박해지자 최명길뿐만 아니라 영의정 金瑬, 좌의정 洪瑞鳳, 備邊司 堂上 張維 등도 和親만이 해결책이라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하였고, 정묘호란보다 훨씬 불리한 전황으로 인하여 강화 협상의 조건은 이전보다 더 가혹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19) 쟁점은 강화의 조건, 즉 조선이 청의 요구를 어느 정도 선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인조는 강화도에 있는 大君을 차후에 청에 보내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지만, 이미 세자의 출송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20) 그러나 그는 이 조건의 수용으로도 협상의 타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16) 후일 청 태종은 인조에게 보낸 국서에서 만약 인조가 일찍이 세자와 신하들을 보내 죄를 청하였다면 인조의 출성까지는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年 1월 甲子(24일) “朕進兵時 曾命大臣馬福塔等 至爾國諭王 王若引罪自責 可居城中 第令世子群臣 來迎請罪而已 大軍亦不深入 爾不聽命 遁入南漢山城 此大失也”). 17)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乙酉(15일) “胡差到城下 崔鳴吉亦自虜營來言 察其辭色 則三件事講定之外 似無他心矣 上曰 卿必見欺矣 豈爲三件事 而至此乎” 18) 承政院日記 54책,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19)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20)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因謂瑞鳳曰 領相方主兵 卿可與李景稷 偕出見之 對曰 若伊賊必欲見親王子 何以答之 上曰 當先謝前日之失 又諭以大君 往在江都 從當追送之意 事已至此 雖請東宮 亦何敢辭 但予意則和事之成 亦不可必也” 결국 이때 청군의 진영에 파견된 좌의정 홍서봉과 호조판서 金藎國은 아무런 성과 없이 되돌아 왔다.21) 다만 이 시점부터는 청과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조선이 고수하였던 義理 또는 名分上의 후퇴를 상징하는 움직임이 정묘호란 때의 협상 과정과 마찬가지로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교섭 과정에서 청을 상대하는 禮의 등급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데, 조선의 군신들은 이러한 명분상의 후퇴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다.22) 좌의정 홍서봉이 교섭 상대방인 청군 장수를 만났을 때 再拜를 행한 것은 청에게 명과 동등한 禮를 시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홍서봉 등이 적진에 다녀 온 뒤 열린 회의에서는 협상의 타결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청의 협상 조건이 제시되자, 남한산성의 방어를 자신할 수 없었던 조정의 중신들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고, 인조도 이를 재가하였다.2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간원, 사헌부, 세자시강원을 중심으로 한 신료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조선의 君臣이 볼 때 대군이 아닌 세자가 청 황제를 배알하는 것은 세자의 安危도 관련된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名分에 관련된 사안이었다.24) 對蒙 강화 교섭의 실마리가 고려 高宗의 태자인 王倎(후일의 元宗)이 元에 들어감으로써 풀린 전례를 감안해 볼 때, 세자의 入朝 또는 親見도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행위의 하나로 조선의 군신들에게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협상 타결의 기사가 보이지 않고, 12월 18일에는 오히려 인조가 농성중인 百官들에게 협상을 결렬을 알리며 결전을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25) 조선이 이 시점에서는 세자의 출송이란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21)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於是 遂遣洪瑞鳳金藎國往虜營 瑞鳳見虜將再拜” 22)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僉曰 到此地頭 何暇爭名分乎 臣等往見之時 亦宜行再拜禮 待之以待中國之禮 上泣曰 三百年血誠事大 受恩深重 而一朝將爲臣妾於讐虜 豈不痛哉 當倫紀斁滅之時 幸與當時立節之諸賢 爲此撥亂之事業 居人君之位 行人君之事者 今十四年矣 豈料終歸於犬羊禽獸哉 然諸卿有何所失 緣予薄劣無狀 致有今日 諸卿諸卿 奈何奈何 諸臣皆泣曰 此皆臣等 無狀之致也 殿下有何所失乎” 23)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24) 石之珩, 南漢日記 병자년 12월 18일 “藎國曰 名分上 則渠不計之矣 其言曰 以國王之子 見皇帝之弟 有何不可乎” 12월 20일과 21일에는 연이어 청의 사신이 남한산성 아래로 와서 청 태종이 開城에 도착한 것을 알리며 화친의 성사를 압박하였으나,26) 조선의 거부로 더 이상 협상의 진전은 없었다.27) 조선은 이미 12월 17일 협상이 결렬된 이후 蠟書를 보내어 외부 勤王軍과의 연결을 도모하고,28) 선제공격을 시도함으로써 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쪽으로 대응의 기조를 정하였다.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아가 여러 차례의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표에 보이는 것처럼 청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 채 병력만 소모하였다. 한편 청군은 교전을 최대한 회피하고 역습을 노리는 전술을 취하였는데, 후속 부대와 攻城 장비가 미처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태여 조선과의 전면 대결을 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한산성 주변에 木柵을 둘러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고,29) 수시로 소규모의 공격을 시도하거나 공격해 오는 조선군을 요격하는 것 외에는 달리 적극적 공세를 펼치지는 않았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한 군사의 수를 과장하기 위해서 자기 진영에 허수아비를 세워 놓거나,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附逆한 조선인을 군사로 편입하기도 하였다.30) 25)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戊子(18일). 26)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庚寅(20일) “金藎國李景稷入來啓曰 胡差以爲 頃者大臣還入之後 了無消息 汗今已到松京矣 此後則俺等爲兩國生靈之計 無所施矣 云 上命却其差人”;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辛卯(21일). 27) 나만갑의 병자록 에는 병자년 12월 22일에 청이 세자 대신 왕자와 대신을 보내라는 제안을 했는데 인조가 거절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지만, 같은 날짜의 인조실록 이나 승정원일기 , 청태종실록 에서는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협상의 전후 과정을 살펴 볼 때 청 측이 이러한 제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청이 만약 이러한 제안을 실제로 했다면 조선은 이를 수락하였을 것이다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병자년 12월 22일 “馬胡又送胡譯言 自今以後 不請東宮 若送王子大臣 定當媾和 上猶不許”). 28)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庚寅(20일). 29)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병자년 12월 25일 “極寒 賊積松枝及雜木於城外 六七日環圍 成一外城 周百餘里高數丈” 30) 承政院日記 54책, 인조 14년 12월 辛卯(21일) “瑬曰 渠言見獲於伏兵 則所謂伏兵皆是我國人 問其所以 則答以避難隱伏 不勝飢餓 出爲賊役, 渠喩令速爲逃去云矣 大槪伊賊 自城內出去者則不禁 自外入來者則阻之 而還路見之 則賊兵皆宿 我國人獨坐 烹肉而食之且賊多造芻人佩筒箇 騎之於牛 而本兵則甚少” [표] 농성 초반기의 交戰 상황과 戰果 1) 北門大將 元斗杓 휘하의 군사가 출전하여, 적 6명을 죽임.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병자년 12월 18일 2) 南城에 육박한 적군을 아군이 화포로 격퇴함.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己丑(19일) 3) 御營別將 李起築이 군사를 거느리고 西城 밖으로 나아가 적 10여 명을 죽임. 東城을 지키는 申景禛 휘하의 군사가 적 약간 명을 죽임.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병자년 12월 21일 4) 北門을 지키는 御營軍이 적 10여 명을 죽임. 東城을 지키는 申景禛 휘하의 군사가 적 30여 명을 죽임.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병자년 12월 22일 5) 自募軍 등이 출전하여 적 50여 명을 죽임.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癸巳(23일) 6) 아군 4백여 명이 출전하여 적 100여 명을 죽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어영청에서는 이 숫자를 다 믿을 수는 없다고 인조에게 보고함. 胡箭과 胡弓 등의 전리품을 획득.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甲午(24일) 7) 北門 밖으로 나아간 아군이 적의 기습을 받아 別將 申誠立을 포함한 상당수가 죽거나 다침.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己亥(29일) 외부의 지원군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소모전은 오히려 농성 중인 군사들의 사기를 점점 떨어뜨렸다.31) 더구나 조선군이 장기 농성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농성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는 군량이었다. 남한산성에 농성 중이던 군사는 13,800여 명에 달했는데, 초기 남한산성에 저장된 식량은 米와 太豆가 10,800石, 피곡이 5,800여 石, 甘醬이 200石, 소금이 90여 石 정도였다.32) 이 정도 비축량은 守城軍과 농성 중인 신료들이 50~6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양에 불과하였으므로, 12월 29일부터는 百官의 식료를 7홉으로 감량하였다.33) 농성 막바지인 인조 15년 1월 14일에는 管餉使 나만갑이 1일 지급 양을 군사는 3홉, 백관은 5홉으로 줄여야 다음달 24일까지 버틸 수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성 안의 식량 사정은 좋지 않았다.34) 식량의 부족과 더불어 농성 중의 군사를 괴롭힌 것은 매서운 겨울 추위였다. 밤새 城堞에서 적을 감시하는 군사들의 몸과 손발은 추위와 습기에 젖는 일이 흔하였고 이것은 고스란히 수성군의 전투력 손실을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이 입을 변변한 防寒服이 없어서 성안에 피난 온 사대부들에게 여벌의 옷을 걷거나 임시로 가마니를 모아 지급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하였다.35) 겨울에 내린 진눈개비[雨雪]는 수성군의 고통을 가중시켰기 때문에 인조는 後苑에서 날이 개이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36) 밥을 짓는 땔감이 부족해 開元寺의 행랑채와 廣州府의 獄을 허물 정도였으므로, 일반 백성들의 방한 사정도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37) 31)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병자년 12월 18일 “雖未知賊兵多少 而纔有大雪 日寒未消 大軍漫山蔽野 地上無一點白處 其多可知也 賊來日衆 援兵不至我勢日蹙 士無鬪志” 32) 承政院日記 54책,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承政院日記 54책, 인조 14년 12월 庚寅(20일). 33)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병자년 12월 25일 “百官料 始以七合減給” 34)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정축년 1월 14일. 35) 承政院日記 54책, 인조 14년 12월 庚寅(20일) “敬輿曰 最悶者軍兵凍餒事也 藎國曰 伊賊或十五爲群 或二十爲群 頻到城下 必欲使城內人 疲於防備 不得休息敬輿曰 朝士中或有身外所着缺送于軍士處 如何 基廣曰 此則昨日已爲擧行矣”; 承政院日記 54책, 인조 14년 12월 乙未(25일). 36)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甲午(24일). 37)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1월 2일. 말먹이로 쓰이는 馬草의 부족도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성 밖의 청군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병뿐만 아니라 기병의 지원도 필수적이었는데, 굶주린 말들은 전투상의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식량으로 도살되어 군사들에게 지급되었다.38) 火藥도 넉넉하지 않았으며, 성안에 비치된 火筒, 火箭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39)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연려실기술의 다음 기사는 眞僞 여부를 떠나 당시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 받았던 농성의 실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성 안의 모든 물건이 결핍되고 말과 소가 모두 죽었으며 살아 있는 것들은 굶주림이 심하여 서로 그 꼬리를 뜯어 먹었다. 이때 임금이 寢具가 없어 옷을 벗지 못하고 자며, 밥상에도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다. 傳敎하여 이르기를 “처음 入城하였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絶無하고 어쩌다 겨우 있으니 반드시 이것은 나에게만 바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닭고기를 올리지 말도록 하라”하였다.40) 농성 초반기에 和碩豫親王 多鐸이 청 태종에게 올린 다음 보고를 살펴보면, 청군은 남한산성 내의 식량, 식수, 땔감, 군사, 軍器 등의 비축 상황에 대해 놀랄 만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안에는 현재 식량과, 땔감, 식수가 매우 부족하여 兵士 2인에게 1인 지급 양을 주고 있습니다. 다만 4곳에 식수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지키게 하고 물을 길어 옵니다. 수성군의 숫자는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만 垜口가 평평한 곳은 3인이, 조금 험한 곳은 2인이, 아주 험한 곳은 다만 1인이 지킬 뿐입니다. 軍器 역시 완전히 갖추지 못한 채 入城한 상태입니다.41) 38)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乙未(25일) “宰城中瘦馬 以饋將士 從體府之請也” 39) 承政院日記 54책, 인조 14년 12월 辛卯(21일) “瑬曰 火藥亦有一萬八千斤 而八千斤 則無石硫黃 方使士夫奴子搗之 而似不精矣 上曰 弓子亦別爲點火 破弓亦令弓匠修 可也 瑬曰 有火箭 而年久蠹傷 火筒亦有之 而陳久不可用 稜鐵最好 而無鐵不可造 可悶” 40)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병자년 12월 30일. 41) 淸太宗實錄 권32 崇德 元年 12월 乙未(25일). 청은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장기적 攻城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교착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決戰을 독려하는 인조의 지시가 수차례 있었지만 정작 軍權을 맡은 都體察史 金瑬와 四營大將인 申景禛(東門 수비군 대장), 具宏(南門 수비군 대장), 元斗杓(北門 수비군 대장), 李時白(西門 수비군 대장) 등의 武將들은 대부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42) 그들은 선제공격을 하기에는 조선군의 전투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판단하였다. 식량을 비롯한 성 내부의 사정이 좋지 못하였고, 고립된 상태에서 외부 지원이 전무 하였으므로 기약 없는 농성을 지속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2월 25과 26일에 歲時가 임박했다는 핑계로 소와 술을 적진에 보내어 막혔던 협상의 물꼬를 트자는 李曙, 홍서봉, 김류, 장유, 최명길의 건의가 잇달았다.43) 결국 12월 27일 李恒福의 庶子 李箕男이 宰臣 대신 예조판서라 가칭하고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병을 가지고 적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청군 장수는 청 태종의 친정과 조선의 근왕군을 격퇴하였음을 통보하며 예물을 받지 않은 채 돌려보냈다.44) 12월 28일에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다시 사자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45) 출성한 조선군이 大敗한 다음 날인 12월 30일에는 김신국과 李景稷을 정축년 1월 1일에 청군의 진영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46) 한편 청 태종은 자신이 통솔하는 병력을 이끌고 12월 27일 임진강을 도하하여 12월 29일에는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 서쪽에 도착한 상태였고, 12월 30일에는 남한산성 주변에 증원된 청군의 병력이 재배치되기 시작하였다.47) 42)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乙未(25일) “時白曰 此賊善用兵 神出鬼沒 平野交鋒 未易得利 但當休養士卒 待賊仰攻而勦擊 不然 待外援 挾攻爲當矣 上曰 持久至此 將若之何 擇形便之地 而出兵一戰可也” 43)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乙未(25일);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丙申(26일). 44)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丁酉(27일). 45)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戊戌(28일). 46)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庚子(30일). 47) 柳在城, 1986, 앞의 책, 161쪽 참조. Ⅲ. 농성 중반기(정축년 1월 1일~정축년 1월 15일) 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청군 본대가 진영을 재정비한 후 丁丑年 새해가 밝자 조선 측에서도 확연히 늘어난 청군의 軍勢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48) 더욱 불리해진 전황 속에서 조선은 다시 강화를 추진해야만 하였고, 협상의 주도권은 여전히 청에게 있었다. 1월 1일 청군의 진영을 방문한 김신국과 이경직은 남한상성을 순찰하느라 진영을 비운 황제의 不在를 통보받고 되돌아 와야만 하였다.49) 1월 2일에 다시 청군의 진영에 파견된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은 청 태종이 開戰 이후 최초로 인조에게 보내 온 국서를 받아 가지고 왔다.50) 國書의 대략적인 내용은 明과의 협력, 丙子年 2월 尊號 요청 사신의 홀대, 丙子年 3월 斥和 敎書의 작성 등을 비난하면서 丁卯和約의 위반 및 전쟁 도발의 주체가 청이 아닌 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51) 청 태종은 이 국서에서 인조의 귀순을 권유하였을 뿐, 귀순의 형식을 출성 항복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48)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辛丑(1일) “虜汗合諸軍 結陣于炭川 號三十萬 張黃傘登城 東望月峯 俯瞰城中” 49)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辛丑(1일) “上竟從鳴吉之言 遂遣金藎國李景稷 往虜陣請和 虜將馬夫達曰 皇帝方巡城 徐當稟定 明早不可不遣人 藎國等還”;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辛丑(1일) “上出營 環視朝鮮國王李倧所居南漢山城形勢 申刻環營” 50)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1월 壬寅(2일). 51)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壬寅(2일) “遣洪瑞鳳金藎國李景稷等于虜陣 瑞鳳等受汗書而還 其書曰 大淸國寬溫仁聖皇帝 誥諭朝鮮官民人等 朕此番來征 原不爲嗜殺貪得 本欲常相和好 爾國君臣 先惹釁端故耳…若拒者必戮 順者必懷 逃者必俘 其在城在野有傾心歸順者 秋毫無犯 必重養之 諭爾有衆 咸使聞知云”;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壬寅(2일);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정축년 1월 2일; 강화 협상 기간 중에 청과 조선이 작성한 국서는 인조실록을 비롯한 조선 측 사료와 청태종실록을 비롯한 청 측 사료에 각각 실려 있는데, 일일이 대조해 보면 내용과 용어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활용에 주의를 요한다. 특히 인조실록에 실린 것은 요약․발췌되는 과정에서 국서 원본의 많은 내용이 누락된 상태이다. 청태종실록에 실린 국서의 내용을 가장 온전하게 게재한 조선 측 사료는 나만갑의 병자록 이라고 생각된다. 문제가 된 것은 그 내용보다 “大淸國寬溫仁聖皇帝誥諭朝鮮官民人等…”으로 시작하는 청이 보내 온 국서의 형식이었다. 조선 군신의 입장에서 보면, ‘皇帝誥諭(皇帝詔諭)’는 大明의 황제만이 藩國의 조선국왕에게 쓸 수 있는 표현이었는데, 청이 조선에 보낸 국서에 이것을 똑같이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당대인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주었다.52) 명의 황제를 대신하려는 청 태종의 의지와 대청 질서의 수립이란 현실은 다름 아닌 청이 작성한 국서의 형식에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었다. 당시 청과의 협상 과정에서 오고 가는 국서의 字句와 형식은 對明義理의 名分과 관련된 사안으로 중대하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였다.53) 명분에 어긋난 형식의 국서 왕래 자체가 선조의 사위인 東陽尉 申翊聖의 상소에서 보이듯이 朝野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삼가 듣건대 홍서봉 등이 書契를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詔諭라고 일컬었는데도 조정에서 장차 회답을 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和親하는 일을 끝내 이룰 수 없을뿐더러 교활한 오랑캐의 계략에 말려들어 天下 後世에 비난만 받게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저 오랑캐가 이미 방자하여 황제로 자처하고 또 친히 대군을 통솔하였다는 등의 말로 멋대로 공갈을 치니, 그 뜻은 丁卯年의 경우처럼 使臣과 約條으로 종결되는 데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 皮幣와 金帛을 더 줄 수도 있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삼을 수도 있지만, 한 등급이라도 더 올리는 일은 따를 수 없습니다. 큰 명분이 있는 곳은 天經地緯와 같은 것이니,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저들이 진실로 따를 수 없는 일과 어지럽힐 수 없는 명분을 요구하고 있는데, 조정에서는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지금 공손한 말로 동정을 구한다 하더라도 이 한 조목을 잘못 처리하면 끝내 成敗의 數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글이 아무리 도리에 어긋나고 방자했어도 아직 ‘詔諭’라는 두 글자는 없었고, 使命을 받든 신하가 중도에서 내버렸는데도 오히려 처벌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거짓 조서[僞詔]가 어찌하여 君父 앞에 이르렀단 말입니까.54) 52)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정축년 1월 2일 “洪瑞鳳金藎國李景稷 往胡中 胡以黃紙所書 詔諭爲名 凶慘至此 不忍聞 不忍見 寧欲溘然而無知也” 53)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癸卯(3일) “引見大臣備局諸臣 洪瑞鳳曰 自今日 始用他式【他式謂稱臣也】事極重大 請二品以上會議 但恐事幾延緩也” 54)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癸卯(3일). 위의 사료를 보면 신익성에게 국서의 형식을 고치는 것은 歲幣나 人質보다 훨씬 더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였다. 청 태종이 보낸 국서에 대한 답서를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앙등했지만, 1월 3일 다시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이 인조의 답서를 가지고 청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들이 갖고 간 “朝鮮國王姓某謹上書于大淸寬溫仁聖皇帝 小邦獲戾大國”로 시작되는 답서의 형식55)은 이미 병자호란 이전 홍타이지를 ‘金汗’이라 지칭하며 보냈던 조선 측 國書의 형식을 파격적으로 높인 것이었다.56) 다만 이때까지는 국서에 청나라의 年號를 표기하지 않았고, ‘臣’이나 ‘陛下’ 등의 稱臣을 의미하는 표현도 덧붙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 국서의 내용은 정중하게 청 태종이 1월 2일에 보낸 국서에서 열거한 조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었지만 은연 중에 양국의 형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57) 답서를 받은 청은 아직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않은 諸王子 및 몽고병이 온 뒤에 상의하여 결정하겠다고 말하며 즉답을 회피하였다.58) 한편 명분상의 후퇴가 불가피한 현실로 인정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척화론자들은 명분상의 후퇴가 實利의 문제, 곧 국왕의 安危와도 직결된다는 논리로 인조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화친 논의 때문에 守城軍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주장을 반복하였다. 다음 協守使 兪伯曾의 상소는 이를 잘 보여준다. 55)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癸卯(3일) “復遣洪瑞鳳金藎國李景稷等 奉國書如虜營 其書曰 朝鮮國王姓某 謹上書于大淸寬溫仁聖皇帝 小邦獲戾大國…” 56) 仁祖實錄 권32, 인조 14년 6월 庚寅(17일). 57)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癸卯(3일) “書曰 小邦獲戾於大國 自速兵禍… 明國與我誠如父子 大國之常入關征彼也 未常以一鏃加小邦 無非以兄弟和好爲重” 58)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1월 癸卯(3일) “洪瑞鳳金藎國李景稷出往虜陣 傳國書而回 有引見 瑞鳳啓曰 臣傳給國書 渠問書中大旨 臣暫言之 則卽爲捧去 而出來後別不言書式等事 只言自中有左衛右衛 左衛先來而右衛未及來 且諸王子 及蒙古皆議同出來 方到昌城 當待其來定奪云” 지금 추악한 오랑캐가 持久戰에 뜻을 두고 있어 아직 和親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구원병의 진로를 차단하여 전진할 수 없게 하고 오래도록 포위하고 풀지 않아 안고 밖을 막아 단절시켰으니, 존망의 기틀이 숨 한번 쉬는 사이에 결판나게 생겼습니다. 지금 만약 臣이라고 일컫기만 하고 포위가 풀린다면 그래도 오히려 후일의 여지가 있으니, 신이 반드시 힘껏 다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靑城의 행차(宋 徽宗과 欽宗 父子의 北行)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사전을 벌여야 한다는 뜻을 구원병에게 알리어 당부하고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을 경우 즉시 목을 벤다면 士氣는 저절로 倍가 될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형세이고 결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는 이치가 있으니 지금 해야 할 계책은 오직 큰 위엄을 세우고 大義를 밝히며 軍律을 시행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59)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척화론자들에게도 현 상황을 타개할 대안은 없었다. 청의 회답이 없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인조는 조정 신료들을 모아 놓고 시행 여부를 물었다. 이 때 大司諫 金槃은 사신을 보내는 대신 성 밖에서 전투를 태만히 한 장수를 처벌하여 군율을 밝히자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인조의 지적대로 이것은 당장 실행이 불가능하거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탁상공론에 불과하였다.60) 따라서 1월 11일에 최명길이 이미 작성된 국서를 인조 앞에서 수정하였으며,61) 1월 12일에는 홍서봉, 최명길, 尹暉 등이 수정된 국서를 가지고 청군의 진영에 들어갔으나 청은 자국의 사정을 들어 접수를 거부하고 다음날 다시 오라고 통보하였다.62) 1월 13일에야 홍서봉, 최명길, 윤휘 등이 개전 이후 인조가 청 태종에게 보내는 두 번째 국서를 전달하였다.63) 59)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甲辰(4일). 60)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己酉(9일). 61)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辛亥(11일). 62)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정축년 1월 12일 “遣左相洪瑞鳳崔鳴吉 及尹暉許 虜營 則不受國書 以明日更來西門爲言 且言 新將又到云 而頗有 怱怱之色” 63)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癸丑(13일). 이 국서에서도 조선은 이전의 잘못을 사과하고 ‘寬溫仁聖’이란 청 태종의 존호를 찬미하기도 하였지만, 稱臣을 의미하는 표현을 명기하지 않았고 여전히 양국의 형제관계를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64) 사실상 조선은 국서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청이 요구하는 군신관계를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완곡하게 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청이 답서를 보내지 않자 최명길과 윤휘 등은 1월 16일 아침에 다시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인조의 재가를 얻어 내었다.65) 한편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하기 위하여 도원수, 부원수, 각 도의 감사와 병사 등이 이끄는 근왕군은 뒤늦게나마 남한산성 주변으로 집결하였으나, 전라병사 金俊龍과 평안병사 柳琳의 부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청군에 의해 각개 격파당한 뒤 후퇴하거나 아예 교전을 회피하여 안전지대에서 청군의 동태를 관망만 하는 형편이었다.66) 근왕군의 작전 실패는 지휘관의 무능과 비겁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청군과의 교전을 회피한 배경에는 양국 간 전력의 심각한 불균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근왕군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접전을 벌였다고 평가받는 유림 부대의 사례를 대표적으로 살펴보자.67) 평양성 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慈母山城을 방어하던 평안감사 洪命耉는 청군의 대부대가 평양성을 통과하여 南進하자 安州城을 지키던 평양병사 유림의 부대와 합세하였다. 이들은 총 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조 15년(1637) 1월 26일 강원도 金化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강원도와 수도권 일대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있던 청군 6,000여 명과 조우한 조선군은 홍명구와 유림의 의견 대립으로 인하여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뉜 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홍명구는 평지에 진을 친 뒤 제1선에 총포병, 제2선에 궁병, 제3선에 창검병을 배치하여 싸우자고 주장한 반면에, 유림은 기병 전력이 중심인 청군과 평지에서 교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다. 64)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癸丑(13일) “書曰 曩者小邦宰臣 奉書軍門 有所陳請…但念兄之於弟 見有過則怒而責之 理也 然責之太嚴 反乖兄弟之義…務窮兵力 傷兄弟之義 閉自新之路 以絶諸國之望… 而新建大號 首揭寬溫仁聖四字 將以體天地之道…以請命於下執事” 65)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乙卯(15일) “崔鳴吉尹暉請對曰 彼將回報云 而迄無消息 明朝欲送人問之 大臣之意亦然矣 上然則遣之” 66) 柳在城, 1986, 앞의 책, 188~218쪽. 67) 金化戰鬪의 戰況에 대해서는 柳在城, 1986, 앞의 책, 188~218쪽 및 柳承宙, 丙子胡亂의 戰況과 金化戰鬪 一考, 史叢 55, 2002 참조. 병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청군은 우선 平地에 진을 친 홍명구의 진영을 1월 28일 오전에 공략하고 이어 오후에는 高地에 진을 친 유림의 진영을 4차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유림의 승리는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대부분의 근왕군 부대는 화살과 탄약의 부족으로 하루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러한 패배는 보급량의 부족에서 기인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잘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 교전 중에 미리 겁을 먹고 조총과 화살을 남발하는 데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접전을 벌인 유림 부대의 경우, 지휘관 유림이 겁을 먹은 휘하 병사들에게 士氣를 진작시킨 후, 적병이 前方 十步 이내에 접근할 때까지 放砲하지 말도록 철저하게 부대의 사격을 통제하였다.68) 유림의 부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근왕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병력의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청군과 교전하는 경우가 많았다.69) 게다가 경상감사 沈演의 부대처럼 군량 조달의 문제가 신속한 기동에 제약을 가하기도 하였다.70) 따라서 근왕병 부대의 이동 속도 역시 기병 전력이 중심이었던 청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느렸을 것이다. 이를 감안해 볼 때 당시 각도의 근왕군은 병사 개인의 전투력을 포함한 종합적 전력에서 청군에게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金化 전투에서 승리한 유림의 부대마저도 화살과 탄약 소진 때문에 청군의 재공격을 피해 서둘러 후퇴해야 했던 것은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71) 68)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仁祖朝故事本末 諸將事蹟 “琳令軍中曰 矢丸無多 不可浪費 賊到陣前數十步之近 我當颭旗 觀我旗齊發 違者斬” 69) 柳在城, 1986, 앞의 책, 188~218쪽 참조. 70)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仁祖朝故事本末 諸將事蹟 “初沈演 以前庶尹都慶兪 爲從事官 軍中之事 一委慶兪 慶兪斬右兵使軍官朴忠謙示威 督進太急 遠邑之軍 太半未到 糧餉在後 而不得已進兵 軍卒盡棄衣裝 所着短衣 剪以爲短 並日而行 無不凍餒” 71)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26, 仁祖朝故事本末 諸將事蹟 “琳曰 今日之戰 幸而得勝 矢丸已盡 不可復戰 不若乘勝移陣” 더구나 개별 전력이 떨어지는 각도 근왕군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통제한 뒤에 연합 작전을 펼치려는 움직임도 부족하였다. 남한산성이 청군에게 포 위된 상황에서 전황을 종합적으로 수합하여 판단한 후 지휘하는 기능이 不 在하였던 것은 조선의 효과적 대응을 가로막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72) Ⅳ. 농성 종반기(정축년 1월 16일~정축년 1월 30일) 講和 협상의 추이와 쟁점 조선의 각도 근왕군을 거의 다 격파한 상태에서, 1월 10일에는 和碩睿親王 多爾袞과 多羅貝勒 豪格 등이 이끄는 左翼軍이 청 태종의 본영에 도착하였고,73) 1월 4일에는 火礮와 軍糧을 수송한 耿仲明의 부대가 1월 10일에는 紅夷砲․將軍砲․火藥을 수송한 貝勒 杜度의 부대가 속속 합류하자 청의 군사적 자신감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배가되었다.74) 청 태종은 인조 15년(1637) 1월 16일 부하들에게 내린 諭示를 통해 강화도 공략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75) 강화도에 있는 왕실 가족들을 인조의 출성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의 새로운 강화 조건이 제시되었다. 청은 1월 16일에 ‘招降’이라는 두 글자를 깃발에 크게 써서 남한산성의 城中에 보였다.76) 이 ‘초항’의 의미는 다음의 사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72) 김종원, 1999, 앞의 책, 176쪽 참조. 73)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庚戌(10일). 74)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甲辰(4일) “是日 恭順王孔有德 懷順王耿仲明 智順王尙可喜 及漢軍甲喇章京金玉和 携火礮至”;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庚戌(10일) “是日 多羅安平貝勒杜度等 護送紅衣礮將軍礮火藥重器等車至” 75)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甲辰(16일) “又得人問之 有云國王與長子及羣臣 俱在南漢 其餘妻子 在江華島 又有云王與妻子 俱在一處 朕意欲造船 先攻此島 若得其妻子 則城內之人 自然歸順 若猶不順 然後攻城 計亦未晩 觀此島亦似易取” 76)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丙辰(16일). 홍서봉․윤휘․최명길을 오랑캐 진영에 보냈는데, 용골대가 말하기를, “새로운 말이 없으면 다시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최명길이 請對하여 아뢰기를, “신이 李信儉에게 물었더니 이신검이 汝亮과 鄭命守의 뜻을 전해주었는데, 이른바 새로운 말이란 ‘第一層之說’이었습니다. 人君과 匹夫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보존될 수만 있다면 최후의 방법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말을 云云한 것은 우리가 먼저 꺼내도록 한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적당한 때에 이르러 우리가 먼저 그 말을 꺼내어 화친하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영의정을 불러 상의하여 결정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갑작스레 의논하여 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명길이 “이런 이야기를 史冊에 쓰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라고 아뢰니, 상이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77) 청은 1월 16일을 기점으로 ‘第一層之說’이란 새로운 강화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 조건을 조선이 수락하지 않는 한 다시 사신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통보하였다. 이 조건은 위의 사료에서 보이듯이 인조의 거취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일층지설’이란 최종 제안 또는 최후의 양보안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데, 지금까지의 강화 조건을 떠올려보면 문맥상 인조의 出城을 의미하는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는 논의 자체가 史冊에 기록되기에 부적당한 사실로 인조와 최명길에게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일층지설’의 의미는 1월 17일 홍서봉, 최명길, 윤휘 등이 청의 진영에 가서 받아 온 청 태종의 국서에 더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78) 이 국서 역시 조선 사신이 정축년 1월 2일에 청에서 받아 온 국서와 거의 동일하게 “大淸國寬溫仁聖皇帝詔諭朝鮮國王”이란 구절로 시작하였다. 이 국서는 대략 조선이 1월 13일에 발송한 국서의 내용을 한 조목씩 반박하면서 인조의 출성 항복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77)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丙辰(16일). 78)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丁巳(17일) “虜人來到西門外招使臣 於是遣洪瑞鳳崔鳴吉尹暉等如虜營 瑞鳳等跪受汗書而還 其書曰 大淸國寬溫仁聖皇帝詔諭朝鮮國王 略曰…今爾與朕爲敵 我故興兵至此 若爾國盡入版圖 朕豈有不生養全安 字之若赤子者乎 今爾欲生耶 亟宜出城歸命 欲戰耶 亦宜亟出一戰 兩兵相接 上天自有處分矣” 그리고 청은 개전 이후 최초로 이 국서를 통해 인조의 출성이란 강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79) 개전 이후 강화 협상의 추이를 고려해 볼 때, 이 국서에는 인조의 출성 항복을 통해 청과 조선의 군신 관계를 확인받고자 하는 청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월 18일에 수정되어 다음 날 청 태종에게 전달된 조선 측의 국서 역시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을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80) 이 국서는 앞으로 조선이 藩國으로서 文書와 禮節을 이에 맞게 행하겠다는 다짐과 아울러 인조의 출성 조건을 완화하여 성 위에서 望拜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81) 조선은 이 국서를 통해 청이 요구한 군신 관계를 국서의 형식을 통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최초로 밝혔지만, ‘폐하’라는 표현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삭제되었다. 국서에 稱臣을 표기하는 문제의 중대성은 이조참판 鄭蘊이 올린 箚子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다. 79)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정축년 1월 17일 “龍馬兩胡 要我使 洪瑞鳳崔鳴吉尹暉 出去受荅書而來 書辭不測 盖出城一款也” 80) 1월 18일에 발송된 국서는 龍骨大와 馬夫大가 자리를 비워 반송되었으며, 1월 19일에야 청이 접수하였다(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1월 戊午(18일) “洪瑞鳳等 爲虜所却 不得傳國書 而自上招見 鳴吉啓曰 今又不捧國書矣 上曰 何以爲之耶 曰 臣等先通則龍胡出來 蓋先爲來待 而托稱將帥招之而去矣 俄而金乭屎出來言 馬夫大不來日且已暮 還爲入去云云矣”;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年 1월 己未(19일) “朝鮮國王李倧 遣其閣臣洪某尙書崔某侍郞尤某 齎書至營請成 書曰 伏奉明旨…”). 81)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戊午(18일) “其書曰 朝鮮國王謹上書于大淸國寬溫仁聖皇帝【此下有陛下二字 爲諸臣所爭 而抹去】伏奉明旨… 今之所願 只在改心易慮 一洗舊習 擧國承命 得比諸藩而已 誠蒙曲察危悃 許以自新 則文書禮節 自有應行儀式 講而行之 其在今日 至於出城之命 實出仁覆之意 然念重圍未解 帝怒方盛 在此亦死 出城亦死 是以瞻望龍旌 分死自決 情亦戚矣 古人有城上拜天子者 蓋以禮有不可廢 而兵威亦可怕也” 前後의 국서는 모두 최명길의 손에서 나왔는데, 말이 매우 비루하고 아첨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곧 하나의 降書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臣이라는 한 글자를 쓰지 않아 명분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臣이라고 일컫는다면 君臣의 명분[君臣之分]이 이미 정하여진 것입니다. 군신의 명분이 이미 정해졌으면 앞으로 그 명령만을 따라야 할 것인데 저들이 만약 나와서 항복하라고 명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나가서 항복하시겠습니까. 북쪽으로 가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북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옷을 갈아입고 술을 따르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술을 따르겠습니까. 따르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君臣의 義理를 가지고 그 죄를 따지며 토벌할 것이고, 따른다면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니[從之則國已亡矣],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실 것입니까.82)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온이 청의 요구를 따를 경우 나라[國]가 망했다고 판단하는 기준이다. 정온이 제시한 기준은 출성 항복하는 것, 인질로 北行하는 것, 옷을 갈아입고 술을 따르는 것인데 두 번째를 제외하면 모두 의례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온에게는 황제가 아닌 자를 황제의 禮로써 대접을 하는 행위, 바로 이것이 名分을 문란케 하는 것이요 國亡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국망의 기준은 정온뿐만 아니라 김상헌과 인조도 共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감대를 이해해야만 병자호란 전후의 척화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은 인조가 출성을 한다면 당장의 생존은 도모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출성의 행위는 實利的인 측면에서 인조의 통치권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임을 경고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인조도 충분히 공감하는 바였다. 그들에게 人質과 歲幣, 割地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는 군신간의 의리[君臣之義]였고, 이때의 군신지의는 對明義理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는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明의 國力을 계산하거나 명의 사후 비난을 염두에 두고 고수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김상헌이 “비록 無益할 줄 알면서도 할 만한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으니, 이 일(稱臣하여 국서를 보내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니, 왕이 “무익하지만 할 만한 일은 어떤 일인가”라고 물었다. 김상헌이 “저들이 만약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청하면 이는 할 만하고, 歲幣를 올리고 땅을 떼어 달라고 하면 그 또한 할 만합니다. 지금 그들이 출성을 요구하는데, 한 번 굴복한 뒤에 만약 君臣의 의리를 고집하며 멋대로 명령을 내리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왕이 “혹 그러하더라도 天心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한다면 그래도 벗어날 수 있다. 會稽의 災厄(越王 句踐의 고사)도 이 방법으로 벗어났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김상헌이 “…온 성의 臣民들이 和親을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講和를 이르는 것이니, 만약 강화보다 굴욕적인 항복이라면 민심이 모두 분개할 것입니다. 비록 이 일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온 성의 신민들은 혹 살 수 있을지 몰라도 至尊께서는 결코 보전하실 수 없습니다[至尊決不可保也]”라고 아뢰었다. 왕이 “경은 출성을 염려하는 것인가? 결단코 출성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혹시라도 이렇게 해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니, 출성한다면 그 날이 나라가 亡하는 날일 것인데 어찌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83)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청 양국 전력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하여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판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강화 협상의 쟁점은 항복과 연관된 국서의 형식과 典禮의 절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의 君臣이 이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였기 때문이고, 청도 이 점에서는 조선과 마찬가지였다. 청의 입장에서는 인조의 출성만 면제해 준다면 협상 과정에서 얼마든지 더 큰 實利를 얻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홍이포를 보유한 청군의 공성 전력을 감안해 볼 때 남한산성의 함락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판단된다.84) 82)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己未(19일). 83)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1월 戊午(18일). 84) 홍이포는 당시까지 사용되던 중국 대포에 비해 사정거리, 위력 및 총신의 수명 등 모든 면에서 훨씬 월등하였다. 그러나 발사한 후 다음 탄환을 발사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野戰보다는 攻城戰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홍이포는 한 몸체로 주조된 청동이나 철로 만들었으며 포신의 입구로 탄환을 집어넣어 발사하였다. 최대 사정거리는 9km에 달했는데, 실전에서 유효한 사정거리는 약 2.8km 이내였다. 홍이포 등장 이전 가장 큰 위력을 가졌던 불랑기의 유효 사정거리는 1km정도에 불과하였다 (시노다 고이치, 무기와 방어구-중국편 , 들녘, 2001, 289~293쪽 참조). 오히려 청은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였음에도 전면적인 攻城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자제가 단지 불필요한 병력의 소 모를 최소화기 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만은 어렵다. 청이 인조의 自進 出城을 유도해야 했던 중요한 이유는 1월 20일에 보내온 국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국서도 우의정 李弘冑, 최명길, 윤휘가 청군의 진영에 가서 받아 온 것이었다.85) 청은 이 국서를 통해 인조가 출성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2~3명의 척화신을 색출하여 압송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래 사료는 국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城을 나와 짐과 대면하기를 너에게 명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네가 진심으로 기꺼이 복종하는지를 보려 함이며, 두 번째는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全國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천하에 인자함과 신의를 보이려 함이다. 만약 계책으로 너를 유인하고자 한다면, 짐은 바야흐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사방을 平定하고 있으니, 너의 지난날 잘못을 용서하여 줌으로써 南朝에 본보기로 삼고자 할 것이다. 만약 속이는 계책으로 너를 취하자고 한다면 천하는 큰데 어떻게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이니, 진실로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다 아는 바이다.86)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大淸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한 청은 이에 걸맞은 유덕하고 관대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전쟁 이후의 상황을 놓고 보면 최종 목표가 명이었던 청은 조선의 직접 지배를 고려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조선의 지도부를 존속시킬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청 태종은 몽고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킬 때에도 최대한 관용의 모습을 보였는데,87) 이와 같은 포용력은 일개 부족에서 기원한 청이 대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기도 하였다. 85) 羅萬甲, 丙子錄 急報以後日錄 정축년 1월 20일 “右相及崔尹 平明出虜陣受汗書以來 其書曰…” 86)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庚申(20일). 87) Nicola Di Cosmo, "Military Aspects of the Manchu Wars against the Čaqars" in the Warfare in inner Asian History(Leiden․Boston․Kőln: BRILL, 2002), pp.356~361 청의 궁극적 개전 목표는 기존의 조․명 관계에서 명의 위치를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인조의 출성 항복이었으며, 이 항복은 청 태종의 ‘寬溫仁聖’이란 칭호에 어울리게 자발적으로 연출될 필요가 있었다.88) 청은 병자호란이 정묘호란 때처럼 어정쩡한 상태로 마무리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丁卯和約의 경우 조선은 화친, 후금은 항복으로 각각 간주하였는데,89) 이는 會盟이라는 화약의 형식이 확실한 군신 관계를 표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禮에 대한 해석의 자의성은 평화 시에는 긴장을 해소하는 반면, 긴장이 고조될 때에는 이를 해석을 놓고 사단이 생길 수도 있었다.90) 인조의 요구대로 출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望拜를 하는 형식으로 전쟁이 종결된다면, 이것은 조선에게는 자의적 해석의 빌미를 주는 것이지만 청에게는 미진함을 남기게 되는 것이었다. 조선이 청 태종의 功德을 찬양하는 내용의 三田渡碑(정식 명칭: 淸太宗功德碑)가 종전 후 남한산성 앞에 세워진 것은, 이 비의 건립을 통해 남한산성에서 확인된 君臣 관계와 황제국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기념하려는 청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91)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머물렀다는 東關王廟와 삼전도비는 이후 청의 사신이 조선에 오면 반드시 찾아보는 곳이 되었다.92) 삼전도비를 관람하는 것은 청이 남한산성의 수축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93) 88) 출성 항복의 연출이 생산하는 제국 통합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한명기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228~234쪽 참조). 89) 한명기는 이를 ‘형제관계’ 해석을 둘러싼 동상이몽이라고 요약하였다 (한명기, 2009, 앞의 책, 90~96쪽 참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현상이 고려와 몽고의 형제 맹약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김인호, 元의 高麗認識과 高麗人의 對應 , 韓國思想史學 21, 2003, 119~122쪽). 90) 예제가 가진 형식적인 성격은 國權的인 행위와 관계의 실질을 쌍방이 스스로의 척도와 가치에 의거해서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의례는 지위의 상하와 권력관계의 표징으로서 행해진 것이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례의 장에 있어서의 형식상의 행위이다. 따라서 그 행위에 대한 쌍방의 주관적인 이해가 다른 것도 허용되었다. 항상 행위를 규정하는 실질적인 지배와는 위상을 달리한 것이다. 또 그 場을 달리하면 행위에 대해 전혀 역전된 해석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 (岩井茂樹, 明代中國の禮制覇權主義と東アジア秩序, 東洋文化 85, 2005, 147~148쪽). 91) 청은 자신들이 勝戰한 지역에 立碑를 비롯한 다양한 기념물을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는 의례를 시행하였다. 특히 乾隆帝(재위: 1735~1796)의 통치 년간에 이러한 양상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Joanna Waley-Cohen, The Culture of War in China; Empire and the Military under the Qing Dynasty[London․ New-York: I.B TAURIS, 2006]). 92) 심승구, 조선후기 武廟의 창건과 享祀의 정치적 의미-關王廟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 , 집문당, 2003, 431쪽. 93) 仁祖實錄 권39 인조 17년 12월 戊子(6일) “淸使往觀三田渡碑 托以遊獵 入南漢 遍觀城堞 至暮乃還” 1월 21일 인조는 개전 이후 네 번째로 청 태종에게 국서를 보내 출성 항복과 斥和臣 압송의 조건을 면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첫 번째 조건은 조선국왕의 명 황제에 대한 義理, 두 번째 조건은 조선국왕의 조선 신하에 대한 義理와 관련이 있는 사안이었다. 두 가지 조건 모두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戰時 상황이라 해도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94) 아래 인용된 국서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조건의 수용은 향후 인조의 통치권에도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조선국왕 臣 姓 諱는 삼가 大淸國 寬溫仁聖皇帝陛下에게 글을 올립니다. … 오늘날에 이르러 온 성의 百官과 士庶가 위태롭고 급박한 사세를 목격하고 귀순하자는 의논에 대해서는 똑같은 말로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성에서 나가는 한 조목에 대해서만은 모두 高麗朝 이래로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죽는 것을 자신의 분수로 여기고 나가려 하지 아니 합니다. 따라서 만약 大國이 독촉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뒷날 얻는 것은 쌓인 시체와 텅 빈 성에 불과할 것입니다. 지금 이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조만간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말들 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습니까. …崇德 某年月日”95) 94) 대명의리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지지받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서는 허태구, 丙子胡亂의 정치․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161~165쪽 참조. 95)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辛酉(21일) “遣李弘冑等 奉國書如虜營 其書曰 朝鮮國王臣姓諱 謹上書于大淸國寬溫仁聖皇帝陛下 臣獲罪于天 坐困孤城 自分朝夕就亡…” 여기에 더하여 인조는 자신이 인질로 청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조는 대명의리라는 명분과 함께 자신의 安危도 중요하게 고려하였을 것이다. 北宋의 고사를 인용한 斥和論자들의 끊임없는 간언도 인조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인조는 자신의 출성이 협상 타결의 조건이라면 더 이상 협상을 진행시키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96) 한편 1월 21일에 발송된 국서는 이전과 달리 “朝鮮國王臣姓諱, 謹上書于大淸國寬溫仁聖皇帝陛下”로 시작되었으며, 청의 崇德 연호도 기입되어 있었다. 淸太宗實錄은 이 국서의 全文을 기록하면서 서두에 “是日 朝鮮國王李倧稱臣 以奏書至 書曰…”이라 特記하였다.97) 이것은 당대인에게 稱臣의 의미가 어떠하였는지, 또 칭신이 어떤 형식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된다. 1월 22일부터는 인조의 출성을 제외한 모든 조건이 강화 협상의 진척을 위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自首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는가 하면 昭顯世子도 출성의 뜻을 비변사에 알렸다.98) 1월 23일에는 다시 청 태종에게 국서를 보내어 출성 항복의 면제를 재차 청원하고, 平壤庶尹 洪翼漢을 척화신으로 지목함으로써 척화신 압송의 조건을 대체하고자 하였으나 청은 이 국서를 반송하였다.99) 반송된 국서는 다음 날에야 접수되었다.100) 청은 1월 24일 인조의 출성을 촉구하며 강화도 함락을 통보하는 내용의 국서를 작성하였는데,101) 이 국서가 조선 측에 전달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 국서가 청태종실록 에만 실려 있고, 인조실록 에는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조실록 을 비롯한 조선 측 사료를 검토해 보면 이 시점에서 강화도 함락을 통보받은 정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96)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辛酉(21일) “夕時 龍胡來到西門外 急請使臣 上命大臣以下引見 敎曰 出城一款 不復酬答可也” 97) 이 국서는 청태종실록 에는 1월 20일 기사에 실려 있지만, 이것은 실록 편찬과정에서 발생한 착오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庚申(20일) “是日 朝鮮國王李倧 稱臣以奏書至 書曰 朝鮮國王臣李倧 謹上書于大淸國寬溫仁聖皇帝陛下 臣獲罪于天 坐困孤城 自分朝夕就亡…”). 98)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壬戌(22일). 99)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癸亥(23일). 100)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甲子(24일). 101)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甲子(24일). 청은 1월 25일에 청 태종이 내일 돌아가니 인조가 출성하지 않는다면 사신이 절대 다시 와서는 안 된다고 통보하며, 그 동안 조선이 보낸 모든 국서를 돌려주었다.102) 이것은 청의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었다. 청은 이미 1월 19일부터 홍이포를 발사하여 출성 항복을 압박하는 무력시위를 하였다.103) 1월 24일에는 南格臺 望月峯 아래에서 行宮을 겨냥하여 대포를 발사하였고 南城에도 군사를 투입하였다.104) 1월 25일에는 城堞을 향해 포격이 집중되어 막대한 피해를 발생하였고,105) 급기야 1월 26일에는 척화신 압송을 요구하는 訓鍊都監과 御營廳의 군사들이 行宮 밖에까지 몰려드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농성을 지속하기에는 軍心의 이반이 이미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다.106) 소현세자의 출성을 조건으로 다시 한 번 講和 조건의 조율이 시도되었으나 청측에 의해 거부되었고, 오히려 江華島가 함락되었다는 소식만이 조선 측에 새로이 통보되었다.107) 都體察使 김류도 적과의 싸움에 전혀 승산이 없으며, 軍心도 이미 청군의 포격으로 인하여 완전히 저항 의지를 상실하였다고 인조에게 보고하는 형편이었다.108) 강화도 함락의 비보가 전해지자 조정의 분위기는 인조의 출성을 압박하는 것으로 급변하였다. 강화도에서 생포된 왕실 및 재상의 가솔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소식은 출성항복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켰는데, 이것을 빌미로 최명길을 비롯한 신료들은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인조에게 출성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102)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乙丑(25일). 103)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己未(19일) “虜放大砲於城中 砲丸大如鵝卵 或有中死者 人皆駭懼” 104)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甲子(24일) “賊放大砲於南格臺 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辟易 賊兵進逼南城 我軍擊却之” 105)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乙丑(25일) “砲聲終日不止 城堞遇丸盡頹 軍情益洶懼” 106)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丙寅(26일). 107)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丙寅(26일) “洪瑞鳳崔鳴吉金藎國出往虜營 諭以世子出來之意 龍將曰 今則非國王親出 決不可聽 仍傳尹昉韓興一狀啓 大君手書 始聞江都失守之報 城中莫不痛哭” 108)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1월 丙午(26일) “瑬曰 此奴兵力 萬無可當之理 小臣則方爲主兵之官 不可爲此言 而因其大砲 城堞無完 軍情已變矣 上曰 勿言也不言可想” 나갈 수도 안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갈 경우 조금이라도 생존할 희망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109) 1월 27일 인조의 출성 항복을 수락하는 조선 측의 국서가 발송되었고,110) 1월 28일에는 출성할 경우 인조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긴 청 태종의 국서가 도착하였다.111) 이 국서에는 또한 종전 이후 조선의 의무 사항이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었다. 1월 29일에 척화신으로 지목된 尹集과 吳達濟가 최명길의 인솔 아래 청군의 진영으로 압송됨112)으로써 講和의 전제 조건이 모두 타결되었다. 이때 척화신 압송의 전말을 보고하는 내용의 국서도 함께 청에 전달되었다. 1월 30일 藍染衣 차림의 인조가 삼전도에서 降禮를 수행하기 위해 남한산성의 西門을 나감으로써 길고도 고통스러운 농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113) Ⅴ. 맺음말 이상에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농성 과정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강화 협상의 추이와 쟁점을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해 당시의 강화 협상의 과정이 남한산성 농성의 戰況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은 개전 초기 王弟와 大臣 또는 世子와 大臣을 인질로 요구하였지만, 청은 자국의 군사적 우위가 확실해질수록 병자호란 개전의 궁극적 목표였던 인조의 출성 항복을 집요하게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이와 함께 청은 稱臣을 표기한 國書의 형식, 斥和臣의 압송도 요구하였다. 농성 종반기(정축년 1월 16일~정축년 1월 30일) 강화 협상의 주된 쟁점은 칭신을 표기한 국서, 인조의 출성, 척화신의 압송으로 압축되었다. 109)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丙寅(26일) “僉曰 渠之文書言語 皆非虛誣 出城則半存半危 不出則十分十亡 上意若定則安知由此 而爲恢復之基耶” 110)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丁卯(27일). 111)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戊辰(28일). 112)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己巳(29일). 113)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庚午(30일). 국왕 인조와 김류․최명길을 비롯한 主和派 신료들은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위하여 이러한 조건을 부득이 받아들이자는 입장인데 비하여, 김상헌과 정온을 비롯한 대다수의 斥和派 신료들은 이러한 주장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한편 청은 농성 종반기에 접어들면서 남한산성을 함락시킬 충분한 전력을 완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전면적인 공략은 자제하고 있었다. 청은 인조의 출성만 면제해 준다면 더 큰 實利를 챙길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자진 출성을 집요하게 요구하였고 끝내 이 조건을 관철시켰다. 청은 이로써 조선과의 君臣 관계를 확인하고, ‘寬溫仁聖’이란 청 태종의 황제 칭호에 걸맞은 관대함과 인자함을 연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 협상 과정의 검토를 통해 새로이 조명된 사실은 稱臣을 표기하는 國書의 형식에 대한 조선 君臣의 태도이다. 이들은 고립무원의 절대적 열세 속에서 농성을 치루면서도 대명의리를 상징하는 典禮 가운데 하나인 國書의 형식을 쉽사리 변경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 중에 칭신을 표기한 국서를 매우 신속하게 수차례나 발송한 사례와는 매우 대조적이다.114) 이것이 바로 몽고를 상대했던 13세기의 고려와 청을 상대했던 17세기 조선의 선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양자가 가진 가치관과 신념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며, 따라서 이들이 대처했던 대외관계의 양상이 달랐던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의 연구자들이 고려․조선전기․조선후기 국제 관계의 성격을 뚜 렷하게 구분하듯이,115) 당대인들도 그들의 對明事大가 통일신라나 고려의 사 대와는 다른 성격이라고 흔히 생각하곤 하였다.116)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척화론자들을 대명의리에 집착하여 나라를 망친 事大主義者라고 비난하거나 청에 대한 항쟁만을 강조하여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섣불리 평가하기에 앞서 그들의 내면과 행위를 당대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척화론의 동기를 성리학적 명분 또는 경직된 華夷觀이라는 추상적이고 포괄적 용어보다 좀 더 분석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필자의 시각과 전망은 다음과 같다. 114) 李美智, 1231․1232년 對蒙 表文을 통해 본 고려의 몽고에 대한 외교적 대응, 韓國史學報 36, 2009, 250쪽 참조. 115) 윤용혁, 대외관계, 새로운 한국사길잡이, 지식산업사, 2008; 한명기, 교류와 전쟁, 새로운 한국사길잡이, 지식산업사, 2008. 116)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0월 丁丑(6일) “玉堂…仍上箚曰 噫 我國之於天朝 名分素定 非若羅麗之事唐宋也”;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己未(19일) “吏曹參判鄭蘊上箚曰…嗚呼 我國之於中朝 非如麗季之於金元 父子之恩 其可忘乎 君臣之義 其可背乎” 농성 종반기에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신료들은 인조의 출성 항복과 척화신의 압송을 면제해 달라고 청에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전자는 明 황제에 대한 조선 국왕의 義理, 후자는 자신의 臣下에 대한 국왕 인조의 義理와 관련되었다. 斥和의 동기가 對明義理를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후자 역시 명에 대한 의리로 환원되는 것이며, 결국 양자 모두 대명의리와 관련되는 사안임을 알 수 있다. 김상헌과 정온을 비롯한 척화파 신료들은 국가의 存亡보다는 대명의리의 준수가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곤 하였다.117) 그렇다고 이들이 후금이나 청을 물리칠 뚜렷한 군사적 대안은 갖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맥락의 주장들은 병자호란을 전후로 한 시기 내내 ‘正論’으로 인식되었으며,118) 이들의 계승자가 조선후기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들이 대명의리의 고수를 주장한 동기가 明에 대한 기대 심리나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양차에 걸친 호란 당시 명의 파병 또는 지원은 고려해야 할 중대한 변수가 되기 어려웠다. 117)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己未(19일) “吏曹參判鄭蘊上箚曰…自古及今 天下國家 安有長存而不亡者乎 與其屈膝而亡 曷若守正而死社稷乎”; 仁祖實錄 권39, 인조 17년 12월 戊申(26일) “前判書金尙憲上疏曰…人皆曰 彼勢方强 不從必有禍 臣以爲, 名義至重 犯之必有殃 與其負義而終不免危亡 曷若守正而竢命於天乎 然其竢命者 非坐而待亡之謂也“ 118) 仁祖實錄 권15, 인조 5년 1월 丁酉(29일) “尹昉曰 國家危亡 在此一擧 雖欲親呈 何可不從 李楘曰 何忍親受乎 上曰 雖是正論 彼若怒去 則更無可爲矣 李貴曰 不和則已 和則不可不從”; 仁祖實錄 권33, 인조 14년 12월 丁亥(17일) “上泣曰 年少之人 思慮短淺 論議太激 終致此禍 當時若不斥絶彼使 則設有此禍 而其勢必不至此矣 僉曰 年少淺慮之人 誤事至此 上泣曰 此論實是正論 予亦不能拒絶 以至於此 實關時運 何可咎人”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毛文龍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보다 오히려 그가 후금과 내통하지 않았는지 걱정하면서,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명의 직접 지원도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119) 인조 14년(1636) 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북경에 파견되어 11월 5일부터 玉河館에 체류하고 있던 金堉 일행이 병자호란의 전말을 明의 兵部로부터 공식 통보받은 시점은 병자호란이 종결된 지 한참 지난 정축년 4월 20일이었다.120) 斥和論의 논의 구조에서 明이라는 특정 국가의 압력이나 시선을 고려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斥和論者들이 진정 우려하였던 것은 명의 問罪나 보복이라기보다는 대명의리의 포기를 통한 윤리와 문명의 붕괴였으며, 天下와 後世의 평가였다.121)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송시열이 北伐論의 첫 번째 의리[第一義]가 明을 위한 복수보다는 春秋大義의 고수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제자 權尙夏의 회고는 매우 시사적이다.122) 따라서 당대인들이 지키고자 했던 대명의리에서 명이 가리키는 실체는 明이라는 특정 국가라기보다는 明으로 상징되는 중화 문명 전체의 가치를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전망해 본다.123) 119) 仁祖實錄 권15, 인조 5년 1월 辛卯(23일) “李植曰…毛將存沒 雖未聞知 其不與奴通明矣 上曰 將此事情 奏聞天朝 請南軍及火器 如壬辰則何如 植曰 勢似不及 而告急一節 不可不爲也 上曰 然” 120) 金堉, 潛谷遺稿 권14 朝京日錄 丁丑 四月 二十日. 121) 仁祖實錄 권33, 仁祖 14년 10월 丁丑(6일) “玉堂…仍上箚曰…噫 我國之於天朝 名分素定 非若羅麗之事唐宋也 壬辰之役 微天朝則不能復國 至今君臣上下 相保而不爲魚者 其誰之力也 今雖不幸而大禍迫至, 猶當有殞而無二也 不然 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 122) 宋時烈, 宋子大全 부록 권19 記述雜錄-尹鳳九 “鳳九曰 聞淸愼春諸先生 皆以大明復讎爲大義 而尤翁則加一節 以爲春秋大義 夷狄而不得入於中國 禽獸而不得倫於人類 爲第一義 爲明復讎 爲第二義 然否 曰 老先生之意 正如是矣” 123) 필자는 병자호란의 전후 과정을 고찰하면서, 전력의 열세와 임진왜란 때와 달리 명이 조선을 구원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조선의 朝野가 정확히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斥和論이 제기되고 지지받았던 현상을 ‘두 개의 對明 인식’이라는 차원에서 試論的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중 하나는 특정국가로서 明에 대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중화 보편 문명을 상징하는 明에 대한 인식이다. 필자는 척화론이 전자가 아닌 후자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허태구, 2009, 앞의 논문).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대명의리의 고수를 위해 국가가 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척화론자들의 발언도 이해의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다. 명말청초의 대표적인 反淸 지식인중의 하나였던 청의 顧炎武(1613~1682)는 日知錄에서 亡國과 亡天下를 구분하고 망천하에는 벼슬하지 않은 匹夫의 책임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124) 척화론자들의 발언과 고염무의 발언을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척화론자들에게 國이란 그것이 중화문명의 가치를 담지하고 실천하고 있었을 때에만 유의미한 것이 아니었는가라고 추론해 본다.125) 결론적으로 말해 조선후기를 지배했던 대명의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조선인들 에 의해 지켜져야 했던 것이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기왕의 연구를 바탕으 로 좀 더 세심한 천착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126) 마지막으로 본고의 한계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 당시 조․청간 강화 협상의 특징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다른 사례와의 비교가 필요하다. 이것은 고려-몽고 관계, 청-몽고 관계라는 거시적 틀 속에서 양자 간에 이루어진 강화 협상의 과정과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강화 협상 기간에 오간 국서의 양식과 용어 등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 필요하나, 이 역시 본 연구에서는 수행되지 못하였다. 척화론과 대비되는 김류, 최명길 등을 비롯한 주화파들의 權道論에 대한 분석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좀 더 세심한 고찰이 요구된다. 이러한 여러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가 17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君臣이 취하였던 대응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나마 되기를 기대한다. 124) 顧炎武, 日知錄 권13 風俗 正始 “有亡國 有亡天下 亡國與亡天下奚辨 易姓改號 爲之亡國 仁義充塞 而至於率獸食人 人將相食爲之亡天下… 是故知保天下 然後知保其國 保國者 其君其臣 肉食者謀之 保天下者 匹夫之賤 與有責焉耳矣” 125) 필자와 비슷한 맥락의 지적은 이미 권선홍 등이 제기한 바 있다(권선홍, 조 선과 중국의 책봉․조공 관계 , 전통시대 중국의 대외관계 , 부산외국어대학 출판부, 1999, 87쪽). 126) 이에 대한 최근의 대표적인 두 연구는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 푸른역사, 2009;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 푸른역사, 2009. 참고문헌 仁祖實錄 承政院日記 大淸太宗文皇帝實錄 (臺灣 華文書局 發行本, 1964)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1619~1643 (張存武․葉泉宏 編, 臺北 國史館, 2000) 金堉(1580~1658), 潛谷遺稿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 1998) 羅萬甲(1592~1642), 丙子錄 (尹在瑛 譯, 韓國自由敎養推進會, 1985) 石之珩(1610~?), 南漢日記 (奎 4352) 宋時烈(1607~1689), 宋子大全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 1980) 李肯翊(1736~1806), 燃藜室記述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 1982) 趙慶男(1570~1641), 續雜錄 (大東野乘 7, 민족문화추진회, 1989) 顧炎武(1613~1682), 日知錄 (윤대식 譯,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朴容玉, 丙子亂 被擄人 贖還考, 史叢 9, 1964. , 丁卯亂 朝鮮被擄人 刷․贖還考, 史學硏究 18, 1964. 全海宗, 丁卯胡亂의 和平交涉에 대하여, 亞細亞學報 3, 1967. , 丁卯胡亂時 後金軍의 撤兵經緯, 白山學報 2, 1967. , 韓中關係史硏究 一潮閣, 1970. 金鍾圓, 丁卯胡亂時의 後金의 出兵動機, 東洋史學硏究 12․13, 1978. 柳在城, 丙子胡亂史,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6.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사 29-조선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1995. 최소자, 명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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