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치지 못한 두 편지, 세상을 둘로 가르다
인천in 황효진 승인 2021.03.22 10:51
[황효진의 역사기행 - 길을 걷고 뜻을 묻는다]
(2) 노론과 소론의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돌아보며
- 황효진 / 공인회계사,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
윤증의 신유의서 초고본
강화도 함락 당시 강화부성 민가 마당이다.
사대부 여인이 노비를 보내 남편을 모셔오게 했다. 남편이 도착하자 부인이 말했다.
“적의 칼날에 죽기보다는 먼저 자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남편은 부인이 자결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남편이 문을 나서자 부인은 노비들을 불러서 어린 자식들을 부탁했다.
“어린아이들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을 게다. 그들을 잘 보살펴다오.”
부인은 집에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을 가져다가 직접 봉한 다음 노비들에게 말했다.
“이것을 내 몸 위에 묻어 주게. 아이들이 운 좋게 살아난다면
후일 나를 다시 장례를 치를 터이니 그때 이것을 꺼내서 보여 주게”
당부의 말을 마치자 부인은 노비들에게 아이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게 했다.
부인은 마루에 미리 걸어둔 끈에 목을 걸고 두 계집종에게 끈을 당기도록 하였다.
여기저기서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아내의 비극적 죽음, 윤선거의 참회의 삶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의 어머니 이야기다.
남편은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과 더불어 척화파의 대명사로 알려진
윤황(尹煌)의 아들 윤선거(尹宣擧)다.
윤선거의 아내는 공주 이씨 이장백(李長白)의 외동딸이었다.
그녀가 8살 때 성균관 생원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홀어머니 손에 이끌려
안산 외가로 가서 외할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고 자랐다. 외할아버지에게
소학(小學)과 열녀전(烈女傳) 같은 책을 배우고 익히면서 예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말을 조용히 하고 조심하는 것이
마치 어른 같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서를 좋아해서
항우본기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영리하였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외할아버지가
‘남자 열 명보다 낫다’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녀는 19살 때 세 살 연하인 파평 윤씨 명문가의 자제인 윤선거에게 시집을 왔다.
시집온 지 7년 만에 남편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 사이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명실공히 그녀는 사대부 집안의 안방마님으로 자리 잡을 참이었다.
그녀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 셋을 데리고 강화도로 급히 피난했다. 피난생활을 한 지
40일 만에 강화도 해안선 방어진지가 오랑캐 청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강화 부성은 순식간에 ‘무방비 도성’이 되고 말았다. 강화 부성 안에는
공포와 절망이 엄습했다. 이때 아무런 죄 없는 여인들의 목숨이
싸움터에 나간 남자들보다 먼저 스러져갔다. 오로지 적군 오랑캐에게 더럽혀질지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윤선거의 아내가 그 죽음의 행진 맨 앞에 섰다. 그녀가 자결을 결심하고 목을 맬 때까지
그녀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 남편을 불러
사세가(辭世歌)를 부르고, 목에 감긴 줄을 당겨주는 계집종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공개적으로 죽어갔다.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행동은 살려달라는
강렬한 구명 요청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의 죽음은
죽을 이유가 없는 안타까운 죽음임에 틀림없다.
남은 사람들은 이를 순절(殉節)이라 이름 하였다.
1681년 반청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었을 때
그녀를 기리는 정려문이 현재의 명재고택(윤증의 집) 앞에 세워졌다.
윤증 고택 입구에 있는 열녀(烈女) 공주 이씨 정경부인 정려문(사진= 황효진)
남편 윤선거는 ‘도망’(悼亡)이라는 시를 지어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심정을 드러냈다.
嗚咽當時事 오열하던 당시의 일에
相看語未明 서로 쳐다보며 말조차 못하네
但令君不死 단지 그대가 죽지 않았다면
何異我還生 내가 사는 것과 어찌 다르리
默念言猶在 조용히 생각하면 말은 오히려 남아 있고
疑顔夢或驚 행여 그대 모습 보이면 꿈속에서도 놀라네
百年長已矣 백년 길이 이별하니
垂淚對諸嬰 눈물을 흘리며 어린 아이 바라보네
윤선거는 부인 이씨가 자결한 다음 날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의 제안으로 그들 일행과 함께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당시 청군은 이세완 일행을 남한산성으로 가게 해서 강화도 함락 사실을 증언하게 했는데,
윤선거가 여기에 합류했던 것이다.
그러나 윤선거는 청군에 포위된 남한산성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아버지 윤황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올리고
죽겠다고 했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척화파를 처벌하라는 청의 요구로 영동으로 유배간 아버지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성혼의 사위이자 대사간까지 지냈던 아버지 윤황이 1639년 6월에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산(尼山: 지금의 논산)과 금산을 오가며 학문에만 전념했다.
논산의 지미촌(芝美村)에 있는 집의 이름을 삼회(三悔)라 부르고,
재(齋)의 현판을 회와(悔窩)라 할 정도로 평생 참회의 삶을 살았다.
정실 부인을 새로 맞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벼슬길도 포기했다.
윤황 고택(사진 = 황효진)
그는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유계(俞棨), 이유태(李惟泰) 등과 벗하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예학에 몰두하며 호서지방의 산림오현(山林五賢)으로서의 실력과 명성을 쌓아갔다.
효종 즉위(1649년) 후 산림을 조정에 불러들여 관직을 주는 정책,
즉 징소(徵召)를 실시했는데, 송시열과 송준길과는 달리 수차례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윤선거는 죽는 날까지 벼슬을 사양하고 징사(徵士)로 남았다. 그래서일까?
윤선거가 살아 있는 동안 강화도 함락 당시의 ‘강도(江都)의 일’로
윤선거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윤선거 묘갈명(墓碣銘)에서 송시열이 박세채(朴世采)의 행장을 인용하여 표현한 대로,
그는 끝까지 벼슬자리를 탐하지 않은
‘산림(山林)’ 한가운데 우뚝 선 큰 산, ‘교악’(喬嶽)이었다.
1669년 현종 10년 윤선거는 육순의 나이에 병사했다.
그의 시신은 32년 동안 칩거한 세거지 이산을 떠나 파주로 향했다.
그곳에 그의 뜻대로 부부 합장묘가 조성되었다. 두 영혼이 32년 만에 ‘말없이’ 재회한 것이다.
파주에 있는 징사 윤선거와 이씨 부인 합장묘.
윤선거의 묘비명은 종형인 윤원거가 찬술하고 친형인 윤문거가 글씨를 썼다.
문제가 된 송시열의 묘갈명은 사용되지 않았다.(사진=황효진)
공주 향지리에 있는 징사 윤증의 묘(사진=황효진)
윤선거의 행장을 일별해 보면
그는 아내의 비극적 죽음을 참회로 이겨내며 ‘수기’(修己)에만 전념했을 법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벼슬을 멀리한 징사(徵士)였다지만 ‘치인’(治人)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윤황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그는 성균관 생원 시절 병자호란 직전
청나라 사신을 목 베어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밝힐 것을 주장한 과격한 척화론자였다.
그는 재야의 산림으로 있으면서도 오랑캐에 대한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잊은 적이 없었고
죽을 때까지 척화의 연장선상으로서 북벌 문제를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했다.
또한 그는 이념적 사고보다 실사구시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사문난적 문제나 예송 문제보다는
실질적으로 북벌을 가능케 하는 제도 개선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왔기 때문에
일당독재론인 군자(君子) 일붕당론(一朋黨論)에 반대하여 붕당해체론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윤선거의 치인 노선은 송시열과는 결이 달랐다.
그 결과 김집의 문하에서 동문 수학하고 수십 년을 친구로 지내며
척화파로 의기투합했던 윤선거와 송시열의 우정도 서서히 균열이 가게 되었고,
그 갈등은 윤휴(尹鑴)의 사문난적론(斯文亂賊論)으로 현재화되기 시작했다.
송시열 상
- 척화파 윤선거와 송시열의 파열음
1653년 윤 7월 송시열과 윤선거를 비롯하여
윤원거(尹元擧), 유계(俞棨), 권성원(權聖源) 등 10여 명의 호서 유림들이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강경의 황산서원(현재의 죽림서원)에 모였다.
밤 세워 토론을 하면서 윤휴의 사문난적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송시열은 말한다.
“하늘은 공자를 이어서 주자를 내셨으니 참으로 만세의 도통이라 하겠다.
주자 이후로부터는 일리(一理)도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一書)도 명백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의 의견만 내세우고 있으니 그는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사문난적이다.”
윤선거가 대꾸한다.
“우리는 심오한 데를 알 수 없다. 의리는 천하의 공물(公物)인데,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은 어찌된 일인가.
주자 이후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다면 북계(北溪)와 신안(新安)은 어찌하여 말을 하였고
그들의 말이 경전에 나와 있겠는가.”
이에 송시열이 성을 내며 말했다.
“윤휴는 주자의 장구(章句)를 없애고 신주(新註)를 만들어
주자를 이기려한 사문난적이므로 춘추의 법에 따라 난적의 죄를 물어야 하고,
윤휴를 옹호하는 당여(黨與: 당인)가 된 윤선거를 왕법으로 먼저 주살해야 한다.”
독선의 경지에 이른 송시열 진면목이 드러난 황산서원 ‘세미나’였다.
1665년 현종 6년 계룡산 동학사에서 호서 유림들이 다시 모였다.
율곡 이이의 연보를 수정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으나 윤휴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1659년 효종의 사후 자의대비 상복 문제로 예송을 치룬 뒤라
남인 윤휴는 학문적 사문난적 수준을 넘어 정적의 괴수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선거는 남인 윤휴를 버리지 않고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은 단도직입적으로 윤선거를 다그쳤다.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를 당장 결정하라는 것이다.
윤선거는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흑백(黑白)으로 논한다면 윤휴가 흑이겠으며 음양(陰陽)으로 논한다면 윤휴가 음이겠다.”
이에 송시열이 안도하며 말했다.
“공이 지금 비로소 크게 깨달았다. 이것은 사문의 다행이며 붕우로서도 다행이다.”
그 말을 들은 윤선거는 무슨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윤선거는 나중에 송시열에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지난 날 음양흑백론은 다만 논의를 하던 사이에 사소한 것을 가리켜서 한 말이지
그 사람의 전체를 가리켜서 한 말은 아니었다.”
강경에 있는 황산서원.
김장생이 황산에 세운 서원으로 호서유림의 산실이다.
숙종 때 죽림서원으로 사액을 받는다.(사진 = 황효진)
(위)황산서원 옆에 있는 임리정. 김집이 호서 산림오현을 양성한 곳이다.
(하)임리정 맞은편에 있는 팔괘정. 송시열이 김장생과 김집을 그리워하며 공부한 곳이다.
윤휴는 광해군 시절 정국을 주도했던 아버지 윤효전(尹孝全)을 두 살 때 여의고
한양 도성에서 여주를 거쳐 어머니의 연고가 있는 보은 지방에서 살았다.
윤휴는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하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뿐만 아니라
효경, 시경, 서경, 예기, 주례 등 원시 유교 경전을 공부하여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학문적 명성을 쌓았다. 이런 사정으로 10년 정도 연배 차이가 나고
당색도 다른 윤휴가 호서유림들과 교우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송시열로부터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를 수 없으며
선배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을 파헤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낸다’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휴는 송시열의 사고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당시의 일반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주자학의 경전주석이나
이황과 이이의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원시 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전 주해를 제시하였다.
주자 절대주의 성리학을 고수하며 주자의 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송시열이
그를 이단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한편 북벌론과 관련해서도 윤휴는 송시열의 입장과 크게 달랐다.
송시열이 북벌과 관련하여 군주 수신(修身)을 강조하는데 머물렀지만,
윤휴는 오가작통법과 호포법 등 각종 제도 개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이뤄 북벌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는 데는 이러한 정치적 이유도 작용한 것이다.
윤선거도 송시열이 북벌의 명분만 강조하고 실질에 힘쓰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그는 송시열이 주자 상대주의자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북벌과 같은 국가적 정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윤선거는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송시열에게 간절한 붕우책선의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이었다.
- 친구 송시열에게 쓴 윤선거의 편지
"공(公)은 상소에서
‘세상에 드문 큰 공은 세우기 쉽지만 지극히 미세한 본심은 지키기 어렵고
중원의 오랑캐는 쫓아버리기 쉽지만 한 몸의 사사로운 뜻은 없애기 어렵다’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군주에게만 해당되겠는가?
국왕의 스승의 직책을 맡은 사람은 더욱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임금이 사사로운 뜻이 없기를 바란다면 내 사사로운 뜻을 먼저 없애야 하고
우리 임금이 언로를 열기 바란다면 내 언로를 먼저 열어야 하니
먼저 이 두 가지에 관련된 내 생각을 모두 말해 보겠다.
예전에 시남(市南: 유계의 호)은
‘공은 친구에게는 성실하고 인정이 두텁기 때문에 정이 넘치는 폐단이 있고
굳셈(剛)은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기 때문에 국량이 좁은 병통이 있다’고 늘 말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그의 나쁜 점을 알지 못하고 이끌려 따라가며,
미워하는 대상에게는 그의 좋은 점을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살펴 의심한다는 뜻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무릎에 앉혀놓고 귀여워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연못에 빠뜨리는 것처럼 언행이 법도에서 벗어나며,
주고 빼앗고 낮추는 것을 모두 자기 뜻대로만 해서 총명이 가려지고
호오(好惡)가 뒤바뀌어도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평가가 좋지 않은 까닭은
모두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땅히 없애야 하는 사사로운 뜻이다.”
“당론이 나라를 멸망시키는 재앙을 낳는다는 것은 선현의 말씀이다.
나라를 맡은 사람은 반드시 당론을 먼저 없앤 뒤에야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당론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 선비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대학』에서 말한 정심(正心) 공부가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지나침과 미흡함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당론에 휘둘리게 된다.
지금 이 예송의 논의는 다시 당론 중의 당론이 돼 처음에는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이었지만
사론(邪論)과 정론(正論)을 판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저쪽에서는
자신들이 딴 마음이 없다고 하지만 이쪽에서는 틀림없이 사악한 뜻이 있다고 하고, 공격받는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지만 공격하는 사람은 통쾌하게 보복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공격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과격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모두 연좌율로 다스려야 한다고 해
겹겹이 더해지고 이리저리 퍼져나가 선비들의 주장이 된 것이 이제 10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참으로 다른 마음이 없던 사람이 어찌 없고,
참으로 억울한 사람이 어찌 없고, 참으로 너무 심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하물며 윤휴, 허적 두 사람은 본디 선비의 무리였으니
잘못된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어찌 참람된 도적과 독 있는 벌레 같은 인물로
끝내 단정해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참으로 예송을 둘러싼 갈등의 흔적을 씻어버리고
이 두 사람을 비롯하여 우리가 사사로움도 없고 인색하지도 않다는 마음을 보여 준다면
안으로는 우리의 아량을 넓힐 수 있고 밖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으리니,
저 두 사람도 어찌 감동해 기뻐하지 않겠는가?”
“거듭해서 말하지만 사사로운 뜻을 없애고 언로를 여는 것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근본이고, 붕당을 깨뜨리는 것이 조정을 바르게 하는 근본이며,
군포(軍布)를 각박하게 걷지 않는 것이 민생을 보호하는 근본이다.”
“한때 내 생각이 공의 높은 뜻과 맞지 않아 융성한 덕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사사로운 정에 해만 끼쳐 손가락을 깨물고 싶도록 후회한 적이 있다.
다시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지 오래다.
이제 위로는 높은 은혜를 느끼고 아래로는 알아주심에 부끄러워 말을 삼키려 했지만
도로 토해 내어 끝내 다시 망발을 하고 말았다. 편지로는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하니 특별히 더욱 마음 써 헤아려 주기 바랄 뿐이다.
괜찮다고 생각하면 그 가운데서 선택해주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보고 내버려
이전처럼 바깥의 어지러운 구설에 오르지 않게 해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윤선거가 기유년(1669년)에 쓴 편지, 이른바 기유의서(己酉擬書)다.
윤선거의 편지가 수신인에게 전달된 것은 그의 사후 4년 뒤였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할 때
이 편지가 비로소 박세채(朴世采)가 쓴 행장과 함께 전달된 것이다.
송시열은 ‘지각 배달’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남인을 대표하는 윤휴와 허적을 품으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는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서인들이 기해예송 이후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해오다
북벌 문제로 남인들에게 수세에 몰려가고 있는 국면이었다.
서인 ‘일당독재’의 기반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책 논쟁보다 이단 논쟁을 통해 당동벌이(黨同伐異) 정책을 세차게 밀고 갈 판이어서
윤선거의 당파를 초월한 동인협공(同寅協恭) 권면이 송시열에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반면에 형식적인 북벌만 내세우는 송시열에게 실망한 윤선거는 실질적인 북벌을 위해서는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조제(調劑), 등용함은 물론 남인들의 주장을 과감히 수용하고
수포(收布)제도를 개선하는 등의 제도 개혁을 권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붕우책선(朋友責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의 진정성을 외면했다.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사실에만 주목하고 분노했다.
송시열은 윤증이 건네준 윤선거의 마지막 편지를 통해
그가 남인보다 ‘먼저 죽어야 할’ 남인의 당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1687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완전하게 갈라설 무렵
송시열은 윤선거가 난신적자 윤휴를 도와서 당을 이루어 주자를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윤휴에게 중독되어 세도(世道)에 해를 끼쳤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편지를 읽은 송시열이 윤선거의 묘갈명을 제대로 써줄 리 만무했다.
그는 박세채가 쓴 행장을 크게 고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윤선거는 신선이 타는 고니요
자기는 땅을 기는 벌레라고 비아냥거렸다가 수정을 요구받기도 했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운문 형태의 명(銘)에서는 공자의 말씀을 엉뚱하게 인용하며
묘갈명을 마무리했다. 즉 묘갈명의 끝부분 명장(銘章)에서
‘진실하신 현석(玄石: 박세채의 호)이 잘 선양했기에 나는 이 명장을 썼을 뿐
짓지 않았네(我述不作)’라고 ‘야유’한 것이다.
윤선거의 장례 때 제문에서 송시열이 그를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
(兩儀昏懜 一星孤明)이라 찬양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윤증은 몇 년에 걸쳐 스승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고쳐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세채가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다. 송시열은 그의 요청에 끝내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사제지간의 정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676년 봄, 윤증은 아버지 묘갈명 때문에 장기(현재 포항시에 속한 장기면)에 유배중인
송시열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는 한양을 떠난 지 3일 만에 추풍령에 도착해서
그곳에 하루밤을 머물며 그의 착잡한 마음을 담은 시 한 수를 남겼다.
細雨行人濕 가랑비가 길손의 옷을 적시고
秋風驛路窮 추풍의 역로는 궁벽하여라
谷平川似倒 골이 평평해도 내는 거꾸러질 듯하고
山斷嶺還通 산은 끊겼다가도 잿마루길 이어지네
但使誠能感 정성을 다하면 감동 있는 법인데
何憂理未公 이치가 공정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랴
悠悠扶病骨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는 몸
無與話心中 마음 속의 말 함께 나눌 이 없네
명재 윤증 선생의 상반신상으로, 보물 제1495호로 지정돼 있다.
작자와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작자는 1744년과 1788년에 각각 윤증의 초상을 그린
장경주 또는 이명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윤증가(家)는 보고 있다.
2009.7.7 < < 전국부기사 참조ㆍ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 >
사방관(四方冠)에 도포 차림을 한 윤증의 전신 좌상(장경주, 1744년 영조20년)
숙종이 윤증에게 우의정으로 제수하는 교지.
명재 윤증 친필 절명시(1714년)
윤증은 오랜 기간 아버지 윤선거에게 부사(父師)하고
유계, 송준길, 송시열 등 당대 명유들로부터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정통 유학을 익혔다.
그 또한 강화도에서 자결한 어머니에 대한 자책으로
아버지 윤선거처럼 징사(徵士)의 길을 갔다. 그는 벼슬길을 생각하지 않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학행이 널리 알려지자
37세 때에 공조좌랑에서 81세 때에 우의정까지 40년 이상 수십 번 징소(徵召)되었으나
실제로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은자(隱者)는 아니었다.
중요한 정치 현안이 있을 때마다 상소나 선비들과의 왕래 서한을 통해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할아버지 윤황과 아버지 윤선거로부터 척화변통론(斥和變通論)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주자학적 대의명분에 매몰되지 않고 국력을 향상시킬 제도 개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박세채가 주장한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남인을 내치고 이른바 군자당인 서인만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던
송시열의 일당독재 정치에 반대하는 윤선거의 정치 노선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1680년 경신환국 직후 김석주(金錫胄), 김익훈(金益勳) 등이
정탐, 사찰, 유인 등 공작을 벌여 ‘죄 없는’ 남인들을 제거하려다 발각된 일이 있었다.
이 공작정치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사람이 김익훈이었는데
그는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요 김집의 조카였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김익훈의 처벌이 당연하다고 연소한 언관들의 편을 들었다가
나중에 의견을 달리하였는데, 그 이유가 김익훈은 광산 김씨 서인의
핵심 세력 중 한 사람이니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당파적 논리였다.
옳고 그름은 없고 내편 네편만 가려내는 70대 ‘노인’의 변덕에
소장파 언관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이때 윤증도 김석주 등 척신의 힘을 빌려
권토중래한 송시열의 정치 지도자로서의 행태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평소에도 송시열이 북벌 이슈를 주도하며 대의를 내세우지만
그것을 가능케 할 제도 개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모습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존명벌청(尊明伐淸)의 대의를 이용해 자기의 정치적 이익만 도모하는
스승의 의리쌍행(義利雙行) 행태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스승에게 죄를 얻는 것이 두려워 마음에 의심을 품은 것을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스승을 영원히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는 스승 송시열에게 편지를 썼다.
윤증 고택(사진=황효진)
- 스승 송시열에 쓴 윤증의 편지
“선생님이 요즘 보내시는 편지에서는 늘 세상의 도리를 근심하셨지만
그 끝은 말로 억누르거나 치켜세우거나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생각하니 의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주자가 경계한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함께 쓰고 의리(義理)와 이익(利益)을
아울러 행사한다(王霸倂用 義利雙行)’는 평가를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님의 도학은 한결같이 회옹(晦翁 : 주자의 호)을 종주로 삼고 있으며,
선생님의 사업은 오직 대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해 한결같이 하늘의 이치를 따르려고 했으니,
어찌 패도와 이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선생님은 회옹의 도학을 스스로 떠맡고 대의의 명분을 스스로 삼으셨기 때문에
주장이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고 자부하는 바가 높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장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이로운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자부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해 논박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선생님께 동조하는 사람들은 가까워졌지만,
선생님을 비판하는 사람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환란을 만났지만,
선생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재앙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은 세상을 압도했지만 실제의 덕은 안으로 병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의 행동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을 이기는 것에 용감한 것이 굳셈(剛)이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데 사나운 것이 굳셈이 됐으며,
이치가 욕망을 이기는 것이 굳셈이지만
지금은 힘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이 굳셈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다운 굳셈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선생님이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이기고 몸소 실천하는 것(克己躬行)처럼
실제로 힘써야 할 부분은 어쩌다 실천하는 것이 드물지만,
비웃고 꾸짖고 풍자하고 억누르고 배척하는 뜻은 입만 열면 나오고 붓을 들면 써집니다.
통렬하고 심각하게 다른 사람을 공격해 이기려는 말은 이야기에서 끊이지 않아
자신의 뜻을 따르는지 어기는지를 자로 재듯 그어
한마디 말이라도 다르거나 한 가지 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나누고 또 나누며 쪼개고 또 쪼개 평생 쌓은 정과 의리를 버렸으니
박정한 신불해(申不害: 춘추 전국 시대의 법가)나 한비(韓非: 춘추 전국 시대의 법가)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선생님께서 조정에 계실 때는 같고 다름에 따라 가까이하거나 멀리했으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이 돼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이 서로 다투고 가는 곳마다 패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의 위세는 두려워하지만 선생님의 덕은 흠모하지 않으니,
선생님의 가문은 완연히 부귀한 집안이 돼 선비 가문의 기상은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평생의 친구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우정을 유지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60~70년 동안 함께 학문을 닦던 곳이 하루아침에 서로 다투고 싸우는 장소로 변해
후세의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형제끼리 싸우는 변고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림자가 이와 같으니 그 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렷이 증명된 일입니다.”
“선생님이 처음 조정에 나왔을 때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고
생각을 움직이는 효과는 참으로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런 효과를 따르는 실천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를 다스려 외적을 물리치고 안정과 부강을 이뤄
복수할 것이라는 계획은 볼만한 뚜렷한 실제적인 일이 없었습니다.
볼 수 있었던 것은 녹봉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며 명성이 넘치게 된 것뿐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이른바 의리쌍행(義利雙行), 즉 의리와 이익을 아울러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신유의서 초고본 - 윤증 종가 소장(사진 = 예술의전당 제공)
윤증이 신유년(1681년)에 쓴 편지, 이른바 신유의서(辛酉擬書)다.
송시열의 정치적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편협한 성격과 학문적 태도까지 문제 삼고 있는 편지다.
윤증은 이 편지를 박세채에게 보여주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자칫 ‘필화’를 우려해
편지를 부치지 말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이 편지도 아버지 윤선거의 편지처럼
수신자에게 한동안 배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1684년 편지가 쓰인 지 3년 뒤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장인의 집에 있던
그 편지 내용을 몰래 베껴 할아버지 송시열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송시열은 이를 보고 대로했다.
이번에는 윤선거의 편지가 송시열에 전달된 때와 달리
당사자간의 감정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윤증의 편지 내용이 송시열 측의 상소 공세로 공론화되면서
서인들 간에 송시열을 옹호하는 ‘노론’과 윤증을 옹호하는 ‘소론’으로 완벽하게 갈라지면서
격렬한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일어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니시비는 송시열의 고향 회덕과 윤증의 고향 이산 두 지역이
각각 노론과 소론을 대표하여 논쟁하였다는 뜻으로 사용되나,
소론 출신 이건창(李建昌)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소론과 노론이 분열했다는 뜻으로 니회지흔(尼懷之釁)이라 기록하고 있다.
옛 지도로 본 회덕과 이산
- 회니시비(懷尼是非), 개혁 논쟁은 실종되고 의리 논쟁만
회니시비는 ‘프레임 전쟁’부터 시작되었다.
윤증은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북벌 이슈를 둘러싼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정책 논쟁을 하려고 했지만, 송시열은 그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 채
배사론(背師論)과 붕우론(朋友論) 등 주자학 의리론으로 논쟁의 방향을 몰아갔다.
결국 논쟁은 정책 이슈가 아니라 의리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뼈아픈 정쟁이 되고 말았다.
노론측은 윤증이 아버지의 묘갈명 문제로 섭섭한 감정이 남아
스승을 배반한 죄를 범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나중에는 <가례원류> 저자 문제로 그의 또 다른 스승 유계도 배반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윤증을 두 번이나 스승을 배반한 자라고 비난했다.
47년 전 윤선거의 ‘강도의 일(江都事)’도 다시 소환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선거의 강도의 일이 문제로 제기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노론측에서 느닷없이 윤선거를 죽을 죄인으로 몰기 시작했다.
윤선거가 아내를 죽게 만들어 놓고는 자기 혼자만 살아남아 친구까지 배반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윤선거가 자기 아내를 협박해 죽였고 노비로 위장하여 도망치다가
청군에게 잡혀 무릎을 꿇은 일이 있었다는 비방까지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사직상소에서 강도의 일을 잊지말라(毋忘江都)고 했던 윤선거의 말은
효종을 비난할 의도가 담긴 불충한 발언이었다고 비난했다.
끝내는 북벌을 위한 제도개혁을 주장한 윤휴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윤선거와 윤증도 사문난적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실제로 송시열은 1689년 기사환국 때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연산(連山)에 있는 김장생의 묘소를 참배하며
‘소자의 이 귀양길은 윤증이 날뛰기 때문입니다’ 라는 제문을 올리기도 했다.
같은 해 유배지 제주도에서는 ‘듣건대 윤선거와 윤증이 참된 도학이라고 한다고 하니,
정자와 주자는 멍청이가 되겠군’이라고 말했고,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임종할 때에는
‘ 이 재앙이 윤증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윤선거와 윤증 부자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것이다.
연산에 있는 김장생의 묘.
송시열이 제주도 유배길에 참배한 곳이다. (사진= 황효진)
송시열이 제주 적거지 마당 앞 검은 바위에 '증주벽립' 네글자를 새겼다.
증자와 주자가 우뚝 서 있다는 의미다.
증자벽립 네 글자는 송시열이 살았던 서울 명륜동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사진=황효진)
윤증은 억울하고 난처했다.
스승의 잘못이 있다면 비판하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도리라고 생각한 윤증은
비판의 내용과 진정성은 무시되고 스승을 비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받는 게 억울했다.
아버지 윤선거의 강도의 일이 역시 쟁의 핵심으로 부각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윤증으로서는 자칫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난처한 일이었다.
윤증은 일찍이 강도의 일로 아버지 윤선거가
‘애초부터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을’(初無可死之義) 뿐만 아니라,
김상용과 함께 강화부성 남문에서 화약고가 폭발하여 순절한 김익겸과 권순장의 경우에도
남문에 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어야할 의리는 없었다’(無必死之義)고 주장했다.
아버지 윤선거가 벼슬을 하지 않은 것도 아내나 친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생원 시절 오랑캐 사신을 죽이라고 상소했던 자로서
오랑캐의 치욕을 당한 이후에 벼슬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론측 주장대로 아버지 윤선거가 효종을 비난할 의도로
무망강도(毋忘江都)라 말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했다.
출사(出仕)하게 되면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스러운 강도의 일을 자칫 잊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북벌의 의지가 약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효종에게 ‘무망강도(毋忘江都)’할 것을 당부하였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윤선거는 아들 윤증의 장인으로 사돈 관계를 맺고 있는 권시(權諰)에게
이러한 취지로 편지를 보내면서 효종이 자기의 충성을 살펴서 오늘날의 두거
(杜擧: 임금의 허물을 깨닫게 하는 술잔이라는 뜻)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남겼다.
1684년 윤증의 편지가 ‘불법 복사(?)’된 직후 송시열의 측근
최신(崔愼)의 상소로 시작된 노론과 소론 사이의 논쟁은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견해의 옳고 그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은 내편이냐 네편이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세력의 크기에 있었다. 회니시비에는 ‘시비(是非)’가 없었던 것이다.
양반 지주 계급의 양보를 통한 제도 개혁 논쟁은 실종되고 주자학적 의리 논쟁만 있었다.
회니시비는 과거의 ‘새로운’ 기억이 현재의 문제를 도외시한 채
상대를 악마화하는 정쟁의 길로 치달아 간 것이다. 정쟁의 승패도 엎치락뒤치락 했다.
최종 승자는 조정의 현안 문제로 논란이 있을 때마다
정책 논쟁을 의리 논쟁의 프레임으로 전환한 송시열의 노론측이었다.
회니시비의 재판관은 군사(君師)를 자임한 숙종이었다.
1711년 숙종은 <가례원류> 발문에서 윤증을 배사자로 비난한 송시열의 제자 정호를 파면하고
1714년 1월 윤증이 86세의 나이로 병사하였을 때는
직접 추모시를 보낼 만큼 윤증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2년 뒤 1716년 병신년에
숙종은 윤선거의 묘갈명과 신유의서를 직접 읽고 나서 생각을 바꾸었다.
묘갈명을 쓴 송시열이 윤선거를 별반 비난한 게 없고
신유의서에는 윤증이 스승 송시열에 대해 지나치게 비난한 것으로 판단했다.
숙종이 윤증을 내친 이른바 병신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그 이후 노론은 일당 독재의 길을 갔다.
그들은 경종 연간에 잠시 주춤하기는 했으나 주자 절대주의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힘’으로 향후 수 백 년을 지배할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반면에 소론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경종 즉위 후 일시적으로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영조 즉위 이후에는 줄곧 소수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 정신은 양명학을 수용한 윤증의 제자 정제두의 강화학파로 이어져
조선의 맥을 살려간 한 축으로 역할했다.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은 ‘벼슬하지 않은’ 징사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수기치인(修己治人)였기에
권력의 한가운데 있는 자에게 ‘정치’(正治)를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유년(酉年)에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
친구로서 책선하고 제자로서 간언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인협공 왕도정치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책선은 분노를 낳고 간언은 대립을 심화했다.
당동벌이 일당독재가 성큼 다가선 것이다.
닭띠 해에 쓰인 두 편지,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이지 않았는가?
언제까지 닭울음만 들리고 새벽은 오지 않는 것일까?
논산에 있는 노강서원 강당.
노강서원은 윤황, 윤문거, 윤선거, 윤증 4인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 본문에서 인용한 기유의서와 신유의서는 테오리아 출판사에서 펴낸
김범의 <사료와 함께 읽는 평전, 사람과 그의 글>에 실린 번역문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