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녘에서
- 양 현 근 -
숨가쁜 관능이 비켜간 거리에
쉬이 살붙이지 못하는 기다림의 뿌리들이
너울도 없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비울수록
맑고 단단한 생각들이
생의 갓길을 하염없이 오르내렸을
저, 촘촘한 추억들이
꺾인 시간의 관절들이 내지르는 비명속으로
가슴길을 내고 있습니다
비워낸다는 것은
분명 자유로와지기 위함이겠지요
습관처럼 되풀이되는 해묵은 안부 사이로
연민의 상처 몇 마디
슬쩍 묻어둡니다
날마다 한 뼘씩 자라나는 마음의 경계를
들풀들의 낯선 외로움을
이제 가슴에 묻어도 괘념치 않을 듯 싶습니다
늘 외로운 이여
거친 들판을 품어도 좋을
세상은
지금 불혹입니다.
눈(雪)
- 양 현 근 -
차라리
하얗게 유혹할까
젖은 몸피 뒤척이더니
그 마음 풀어놓지도 못하고
동지섣달 빈 하늘에서
묵은 그리움만 키우고 있나요
참 게으른 당신
하얀 마음
속 시원히 고백하지도 못하고
흐린풍경으로
얼마를 더 질척거려야 하는지요
아무래도
세상이 더 낮아져야 할 일인가요.
나무들, 강변에 서다
- 양 현 근 -
해마다 이맘때면
무작정 하혈하는 물살들이 두려워
강변의 은사시나무들
혼신의 힘을 다해 기립해 있다
불온한 잎새들 몇몇은 남아서
시린 새벽을 밤새도록 흔들어대고
그러나 어쩌랴
밤새도록 전문을 보내도
싸락눈조차 허락하지 않는 저 완고함을 어쩌랴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오늘
생의 잔가지들만
파아란 날숨을 참고 있다
그립다고 그립다 하지마라
시간 지나면
그리운 것이 어찌 한 둘이랴
세상으로 가는 모든 길 위에서
아직 소인되지 않은 이파리들
강 안개에 젖어들고
나무들,
하얀 풍경을 강변에 부리고 있다
마음 안의 초록빛 잎대
꺼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