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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의 고백 “1922년 레닌 만난 건 自由市 참변 보고 위해서였다”

이름없는풀뿌리 2023. 9. 15. 07:22

홍범도의 고백 “1922년 레닌 만난 건 自由市 참변 보고 위해서였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홍범도에 대한 추가 팩트 세 가지  조선일보  입력 2023.09.15. 00:00업데이트 2023.09.15.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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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선물한 권총 찬 홍범도 -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홍범도. 차고 있는 권총은 레닌이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943)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옮기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조차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국방부 대변인의 모습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지난 8월 31일자 조선일보 A5면 기사에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자유시 참변때 가해자 볼셰비키 편에 서… 홍범도, 육사 롤모델 될 수 있나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3/08/31/6DWKVOZZAVEAPGFSLAXFSSJYOI/)

기사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1)홍범도가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2)그러나 1922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진영의 주도로 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된 직후 재판위원을 맡아 볼셰비키 편에 섰다.

(3)이후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독립운동과는 관련 없는 삶을 살았다.

(4)그가 과연 육사 생도들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인가?

그런데 홍범도에 대해 추가로 언급해야 할 몇 가지 팩트가 있습니다. 이번 기사는 그것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레닌.

①1922년 모스크바에서 왜 레닌을 만났는가?

1922년 1월, 홍범도는 매우 먼 여행을 떠납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혁명단체회의의 개막식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소련의 국가원수인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을 만납니다. 홍범도가 레닌을 만났다는 사실은 국내에도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알려졌습니다. 예전에 백기완씨는 강연에서 구성진 목소리로 “우리 홍범도 장군이요, 레닌을 만났습니다. 레닌을 만나서 우리 독립운동을 도와달라고 했고 말이죠”라며 매우 자랑스러운 에피소드인 것처럼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 영상에 나온 참석자들. 가운데 코트를 입고 콧수염을 기른 이가 홍범도 장군(키 190㎝)이다. /독립기념관

자,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홍범도는 왜 그때 레닌을 만났던 것일까?

그동안 많이 알려진 것처럼,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서?

홍범도가 1938년 무렵 직접 쓴 1차 사료가 있습니다. 자서전인 ‘홍범도 일지’죠. 이 내용은 2014년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가 펴낸 단행본 연구서 ‘홍범도 장군’(한울아카데미)에 수록돼 있습니다.

이 자서전에는 홍범도 자신이 쓴 ‘이력서’가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1921년 동지달에 모쓰크와로 레닌동무게로 1921년 자유시에서 조선빨찌산을 어간에 뉴혈적 사변이 난데 대한 보고을 하려고 조선빨찌산대표로 갇다.”

홍범도의 자서전이 실린 연구서 '홍범도 장군'에 수록된 홍범도의 이력서 중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난 이유를 기록한 부분.

레닌을 만난 이유가 ‘자유시 참변 보고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자서전의 본문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레닌께서 저를 불러오라고 사단이 내려옴으로 제 레닌께 들어가서 뵈온 일도 있고 말씀에 대답한 일도 있다. 자유시 사변을 묻는데 몇 마디 대답한 일이 있었다.”

연구서 '홍범도 장군'에 실린 홍범도의 자서전 '홍범도 일지'에서 1922년 레닌을 만난 상황이 기록된 부분.

이 자리에서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금화와 권총을 선물받았습니다. 홍범도는 이 권총을 줄곧 차고 다녔고, 1923년 그를 배신자로 몰아 암살을 시도하려는 감창수·김오남에게 이 총을 쏴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위 사진의 자서전 내용에도 나옵니다. 전후 정황상 레닌의 ‘하사품’은 항일 투쟁의 공로가 아니라 자유시 참변 때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보입니다.

광복군 시절의 이범석.

②독립운동 동지 이범석의 회고 “홍범도는 죽었다”

1920년 청산리 전투 당시 홍범도와 같이 싸운 인물이 철기 이범석(1900~1972)입니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죠. 그의 자서전이 1971년에 출간된 ‘우둥불’입니다. 1982년 KBS에서 같은 제목의 드라마로 제작해 훗날 궁예와 김두한 역으로 유명해진 배우 김영철이 이범석 역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홍범도에 대해 좀 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후일 홍범도씨는 러시아 이만(伊滿)시로 군대가 넘어가자, 러시아에서 일크스크파의 공산당원이 된 사람들의 권유를 들어, 공산당원이 되었다. 허나 그는, 그 속에서 할 일도 없었고 이름만 빌려 준셈이 되었다. 그후 그는 自由市 부근에서 방황하다가, 병 들어, 불쌍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범석의 자서전 '우둥불'(1971) 중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고 기록된 부분.

‘자유시 부근에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922년 모스크바로 가 레닌을 만난 뒤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며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 때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별세했던 홍범도의 이후 행적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922년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독립운동 동지들의 눈에는 ‘죽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독립운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방증이 되는 것이죠. 1980년대 중반까지도 1922년 이후의 홍범도의 행적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62년 한국 혁명정부가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것은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의 행적을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군이 육군사관학교 뿐만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8월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뉴스1

③1940년대, 홍범도의 ‘조국’은 어디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6월 홍범도는 소련 내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크즐오르다시(市) 당 위원회를 찾아가 정규군에 들어가 복무하겠다고 지원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전투력을 보여주기 위해 100보 떨어진 병마개를 총으로 쏴 명중시켰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73세 노인의 현역 입대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홍범도는 누구와 싸우려고 했던 것일까요?

소련 서부전선의 나치 독일군이었습니다.

독·소 개전 직후 그는 ‘침략군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월의 일이니 그가 소련에서 더 이상 일본과 싸울 일은 없었습니다. 독일이 일본과 동맹국이니 간접적으로 일본과 싸우려는 게 아니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분명 그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일본과 싸우겠다는 의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입대를 거부 당한 홍범도는 현지 신문 ‘레닌의 긔치’ 1941년 11월 7일자에 ‘원쑤를 갚다’는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랬습니다.

“나는 지금 늙엇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쓰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으니들! 모도 무긔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

여기서 ‘조국’이란 어느 나라를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최근 국방부 브리핑에서 어느 기자는 ‘홍범도가 협력한 것은 스탈린의 소련이 아니라 레닌의 소련이었는데 그것도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질타했습니다. ‘레닌의 소련’은 괜찮다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홍범도는 사실 레닌 때뿐 아니라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도 지속적으로 협조하며 순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페이스북에서 ‘그 시기 불가피했던 소련과의 협력을 이유로 독립전쟁의 위업을 폄훼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남루하고 편협한 나라로 떨어지는 일’이라 했지만, 홍범도는 처음엔 불가피하게 소련에 협력했을지 몰라도 이후 20여 년을 충직한 소련의 인민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는 일이 ‘독립전쟁의 위업’을 폄훼하는 것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해석의 영역이 아니라 팩트의 영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