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전 능했던 왜군…이순신 군함엔 기어오르지 못했다, 왜
윤동한의 ‘충무공 경영학’ ②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조선 수군이 왜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승리 요인은 조선의 무기체계와 전투선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기체계를 정비한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한 마디로 조선 수군의 성공은 충무공 경영의 승리였다.
충무공은 개별 전투만 잘하는 무장을 넘어 종합 전략전술 능력을 가진 수군 CEO(최고경영자)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수군을 기업에 비유하자면 전라좌수사 혹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고경영자가 총괄 수군 경영의 책임을 진다. 여기에 재무관리와 전략적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CFO, 최고 정보책임자인 CIO, 인사총괄 책임인 CHO, 최고기술책임자인 CTO가 뒤를 받쳐주는 법이다. 충무공은 CEO인 동시에 병참과 보급 및 전략적 의사결정을 담당했으니 CFO의 역량까지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또 탐후선과 측후병을 동원한 갖은 정보들 속에서 전술정보를 분석해 내는 CIO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모든 가용한 인적 자원을 발굴하고 선발하는 CHO의 역할마저도 훌륭히 해냈다. 여기에 나대용과 정걸 같은 CTO(거북선 판옥선 조선 및 리모델링 기술진)를 배치해 전투선을 리빌딩했으니 최고 경영책임자 다운 면모를 제대로 갖춘 리더였다.
유성룡의 징비록엔 “순신이 거북선 창조”
충무공 경영의 비기 거북선.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처음 선보였다. 사진은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사진 윤동한]
충무공 경영 능력의 결정판은 판옥선과 거북선이었다. 전투용 선박에서 강점을 갖도록 준비한 거다. 조선의 전선(戰船)은 을묘왜변 이후 판옥선으로 대체됐는데, 1571년 11월 22일 『미암일기』에는 판옥선 1척을 만드는 것이 50칸 집을 짓는 것과 맞먹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소나무 100여 그루를 잘라내야 건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선 한 척 만드는 데 많은 인력과 목재와 조선기술자가 투입됐다. 1555년 이후부터 점차 개량되며 만들어진 판옥선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전선에 비해 전투 능력이 뛰어났다. 기존 맹선 위에 네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담장 치듯 판자로 한 층 올렸다. 노를 젓는 인원을 밑으로, 전투 인원을 갑판으로 올려 전투의 효율을 꾀했다. 배의 바닥이 평평해 물살이 빠르고 거친 한반도 수역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주력함선인 세키부네와 안택선(대장선박)은 속도는 빠르지만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인 데다 화포가 적어 대함 전투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판옥선의 높이와 크기가 일본의 전선에 비해 높고 크다 보니 백병전을 앞세운 왜군이 침투하기 어려웠다. 이순신은 이런 판옥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천지현황포 등 화포 사격으로 근접전이 벌어지지 않게 막았다. 또 이순신은 일본 함대의 백병전 중심의 특성을 감안, 우리나라의 복잡하고 조류가 강한 남서해 해류 속에 끌어들여 적들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충무공의 수군 경영이 승리한 요체다.
조선수군의 화포. [사진 윤동한]
거북선의 화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좌수영 거북선의 경우, 거북 잔등에 좌우 6문, 그 아래 방패판에 좌우 10문, 거북머리 아래 좌우 2문 등 총 34문을 배치했다. 이보다 더 개량한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지만 총 74개 총포 구멍이 있어 훨씬 많은 화포를 활용할 수 있었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1604년경 집필 초본)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냈다고 기술하고 있다. “순신이 거북선을 창조했다. 그 위에는 판자를 펼쳐 놓아 그 모습이 활등처럼 휘어져 거북이 같았다. 싸우는 군사와 노를 젓는 사람이 무릇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전후좌우에 화포를 많이 실었다. 종횡으로 드나드는 것이 북같았다. 적선을 만나면 잇달아 대포로 부수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저술한 『이충무공행록』에는 거북선에 관한 더 상세한 기술이 나온다. “(이순신이) 전선을 건조했는데 크기는 판옥선만하고 위에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열십자 형태의 좁은 길을 내고 사람이 올라가 다닐 수 있게 했다. 그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꽂아 어디에도 발을 붙일 곳 없게 했다. 앞에는 용머리를 두었는데, 입에는 총을 쏘는 구멍이 있다. 뒤는 거북의 꼬리처럼 생겼는데, 그 꼬리 아래에도 총을 쏘는 구멍이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6개의 총을 쏘는 구멍이 있다. 대개 그 모습이 거북이처럼 생겼기에 거북선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문제는 조정에서 수군의 전투선 건조부터 무기와 화약, 심지어 병참 군수의 모든 것을 지원해 주지 않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조선용 목재와 돛, 화약과 군복 등을 자체 조달해야 하는 처지였음에도 이를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이순신의 함대 경영술을 보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상시 대응태세였다. 전선 한 척이 전투에 임하려면 포수와 살수, 사수 등 전투요원과 지원요원(격군, 신호수, 고수, 관측수) 전원이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몸에 익을 때까지 훈련하는 것이 최선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기강 확립도 대단히 중요한 법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고 110일간의 난중일기 기록을 살펴보면 수군 CEO로서 그가 얼마나 수군 훈련에 열심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사료를 보면 “점검과 순시 15회(전체 일정 중 백분율, 18.5%), 활쏘기 29회(35.8%), 대포 쏘기와 거북선 준비 등이 15회(6.2%), 부정 비리 등을 조사한 일이 5회로 나타난다. 전체 70% 가까이가 전비 태세를 갖추는 일이었다.”
난중일기에선 탐후라는 말 24번 나와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이순신의 수군 경영 수준은 난중일기 임진년 3월 5일자의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군관 등은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해 질 무렵 서울로 올라갔던 진무가 들어왔다. 좌의정(류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읽었더니, 바다 싸움과 육지 싸움, 불로 공격하는 것 등의 일을 하나하나 논의했다. 진실로 세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이론이구나.” 이순신이 읽고 감탄했던 『증손전수방략』은 류성룡이 편집해 이순신에게 전해준 책이다. 이를 읽고 감탄했다는 것은 그가 전술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에 필요한 병법과 지리를 충분하게 터득했고, 이를 현지에 적용해 가기 위해 다채로운 정보전을 펼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동정을 살피고 미리 예측하는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를 후망(候望)이라고 기록했다. 정찰을 뜻하는 척후(斥候)와 높은 곳에서 적을 감시하는 요망(瞭望)을 합친 말이다.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 11월 2일에는 류성룡이 “행군할 때 먼저 선봉을 보내어 험한 곳이 있으면 달려와 알리는 자는 척후이고, 높은 곳에 올라 망보아 성식(聲息)이 있으면 달려와 알리는 자는 요망(瞭望)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에선 탐후라는 말이 24번 나온다. 특히 탐후선의 활용을 자주 언급했다. 탐후선은 연락 담당 배로 각 전선과 해당 지역의 적정, 아군 상황 등을 보고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후망은 5회, 척후는 21회, 체탐은 8회 사용됐다. 모두 적정 탐지와 보고를 위한 것이었으니 이순신은 적의 정세를 모르고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출동으로 시간과 인력, 물자를 낭비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은 지리(地利) 경영과 인적 경영(전투인원의 효율적 배치), 물적 경영(화포, 전선의 성능 개량)을 투입해 전투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줄 아는 경영자였다.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 총포와 화약을 앞세워 임전태세에서 이미 확실한 우위에 서 있었기에 왜군과의 전투를 하기 전에 이미 승기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치열한 글로벌 기업 경쟁의 승패가 제품 출시 이전의 개발 단계에서 이미 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서울여해재단 이사장. 1990년 단 3명의 직원과 함께 화장품 제조업체 한국콜마를 창업해 연간 3조원 매출의 K뷰티 중추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난중일기’‘장계’ 등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의 한글 번역 사업을 총괄했다.
전라좌수영 5관5포, 임란 1년 전부터 리빌딩 나섰다
이순신을 무인으로만 평가하는 건 그의 진면목 가운데 일부만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순신은 문무 겸전의 전략가였을 뿐 아니라, 트렌드를 읽고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위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승리를 거머쥘 줄 아는 진정한 경영자였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사 전략가였으며,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을 던져 넣는 희생과 섬김의 리더십도 갖추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진정한 지도자가 바로 이순신이다. ‘장군’ 이순신을 넘어 ‘경영자’ 이순신의 모습을 짚어보고 교훈을 얻기 위해 이순신 전문가인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순신 장군 동상. [뉴스1]
이순신은 36세인 1580년에 발포(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화면) 만호(萬戶)에 임명되어 1582년 1월까지 봉직했다. 만호는 조선시대 각 도의 진에 딸린 종4품 무관직이다. 이순신은 발포에 이어 훗날 함경도 조산보 만호 직을 수행하며 초급 장교로서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특히 발포 시절의 수군 경력은 육군 출신인 이순신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다. 필자는 발포 만호 이순신이 31살 많은 역전의 용사 정걸 장군을 만나 수군 경영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조선 시대 지방관들이 임지로 부임하면 그 지역의 이름난 학자나 낙향해 있던 전직 관료, 무장을 찾는 것이 관례였다. 정걸은 경상우수사를 끝으로 은퇴한 뒤 고흥에 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의 생가와 묘가 모두 고흥에 있다. 이순신은 훗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 정걸 장군을 조방장으로 초빙했다. 발포 만호 시절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인사다. 이순신의 인맥 경영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1580년 발포 만호 부임, 수군 경영 경험익혀
이순신이 수군 경험을 제대로 발휘한 곳이 5관(官)5포(浦) 지역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남서해안 일대에 5개 수영을 운영하고 있었다. 보령의 충청수영이 13관 5포, 해남의 전라우수영이 12관 15포,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5관5포, 거제의 경상우수영이 8관 16포, 동래의 경상좌수영이 18관 16포를 거느리고 방어선을 펼쳤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관할지는 전체 수군 편제에서 가장 작지만 전략적 가치는 대단히 컸다. 경상도 지역의 육상이나 해상에서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호남 곡창으로 나갈 방법이 없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거느린 5관은 순천·보성·광양·낙안·흥양, 5포는 방답(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사도(고흥군 영남면 금사리)·발포(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녹도(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였다. 5관5포를 거느리는 전라좌수영이 중요한 것은 특히 흥양(고흥의 옛이름)은 전라좌수영 5관5포 중 1관4포가 포진했던 군사요충지였다. 1관(흥양현)은 바다와 잇닿는 육지 행정구역이고, 4포는 전라좌수영 본영을 바다 쪽에서 지키는 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이다. 4포를 막지 못하면 적의 수군이 육군 병력을 싣고 들어오거나 병참을 공급하게 돼 전쟁이 기울게 된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경영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결합한 조직 또는 그 활동을 말한다. 경영의 핵심은 의사결정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경영이란, 만약에 닥쳐올지도 모를 위기 상황을 가정해 법과 원칙에 따라 현장을 점검하고 유비무환의 자세를 갖추도록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경영활동을 부지런하게 그리고 꼼꼼하고 치밀하게 했다. 현장의 장수들은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별난 상사가 하나 부임해 오더니 편안하게 지낼 틈을 주지 않고 수시로 군비를 점검하고, 뇌물과는 담을 쌓은 채 일벌백계로 사정없이 처벌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덕분에 호남 곡창과 서남해를 지킬 수 있었고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꿔놓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것은 1591년 2월 13일이었다. 좌수영 산하 전체 병선은 판옥선과 작은 배인 사후선(伺候船)까지 85척이었고, 병력은 우후·첨사·만호 등의 지휘관을 포함 1만8403명이었다. 문제는 기록대로 다 존재하느냐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2월 3일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새벽에 우후(虞候)가 각 포구의 부정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갔다.” 우후는 지방 군영의 군사훈련과 무기 등을 점검하는 참모로 수군의 경우는 대개 정4품이었다. 이순신은 우후를 파견해 각 포구에 만연하던 부정, 횡령, 유용 등을 점검토록 했다. 실제 조선의 수군들 가운데 무기와 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다음 날엔 여수시 종고산의 봉수대에 올라가 유사시 연락망을 점검하고 해자 구덩이를 살펴보았다. 그는 매일 동헌에서 활을 쏘며 수련을 계속했고 부하들에게도 쉼 없이 활쏘기를 시켰다.
흥양전선소 추정지. 도로와 하천 정비로 선소 자리는 사라지고 없다. [사진 윤동한]
8일자 난중일기엔 그 유명한 거북선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 “8일 맑았으나 또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으로 나갔다. 공무를 처리했다. 이날 귀선(龜船·거북선)의 돛으로 쓸 베 29필을 받았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운용할 채비를 마쳐가는 참이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완성돼 전투에 배치된다. 15일에는 전선을 정박하는 포구(굴강)의 담을 보수하게 해 방비를 든든히 했다. 굴강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수리 건조하던 곳으로 발포나 여수 선소 등에서 아직도 발견되고 있다.
2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뤄진 전라좌수사 예하 지역 순시는 이순신이 경영자로서의 임무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 준다. 여도-흥양전선소(戰船所)-녹도-발포-사도-개이도-방답-좌수영으로 이어지는 144㎞이상의 장거리 순시였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말을 달려 7박8일만에 순시를 마쳤다.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이를 두고 꽃비(花雨)가 쏟아졌다고 시적으로 표현했다. ‘칼 찬 선비’라는 표현 그대로 이순신은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시적 감흥을 잊지 않았다. 이 순시 기록 중에 나타나는 흥양전선소의 위치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2019년 (사)서울여해재단 교수진 일행이 고흥지역 답사를 갔을 때 필자가 찾아내 세간에 알린 바 있다.
경상우수사 지낸 정걸 조방장 초빙 인맥경영
덕흥선소 표지판 만이 이곳 근처가 흥양전선소 자리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사진 윤동한]
이 무렵의 난중일기는 당시 전쟁 준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5일 흐렸다. 각 항목의 전쟁 준비에 탈이 난 곳이 많았다. 군관과 색리들의 죄를 처벌했다. 방어 준비가 5포 중에서 최하였으나, 순사(순찰사 이광)가 임금님께 상을 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표창을 상주하는 글을 올렸기에 죄를 조사할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를 출발시킬 수 없었다. 그대로 묵었다.” 좌수사 이순신은 문제를 찾아냈지만 순찰사가 덮어버렸다. “26일 이른 아침에 배를 출발했다. 개이도에 도착했더니, 여도 배와 방답의 마중 나온 배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방답에 도착했다. 군기물을 점검하고 검열했는데 장전과 편전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슴만 탔다. 전선은 두 번째로 우수했다. 기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쟁이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 조정이 양분되어 있을 때, 전장을 지키는 장수로서 홀로 방어요새를 점검하고 군비 상태를 확인했으며 화약을 주조하고 전선(판옥선)을 정비하며 군사를 치열하게 훈련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의 강점은 병참과 보급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한 것이다. 임진년 3월 6일 난중일기다. “6일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나가 좌기했다. 군기물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점검했다. 활과 갑옷, 두무(兜鍪·투구)와 용아(筩兒·화살통), 환도는 깨지고 훼손된 물건이 많이 있었다.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한 놈도 아주 많았다. 색리와 궁장(弓匠) 감고(監考) 등의 죄를 따졌다.” 군사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상필벌이다. 궁장과 시인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다. 이순신은 이들을 철저히 관리 감독하여 수군의 주 무기인 활과 화살을 충분히 비축토록 했고 가장 중요한 총통 화약도 대량 준비했다. 난중일기에는 무신 이봉수(1553~?)가 전라 좌수영과 돌산도 사이에 쇠사슬을 설치했고 북봉에 연대(봉화)를 구축했다고 적혀 있다. 특히 화약 제조를 위한 염초를 개발해 3개월 동안 1000근을 만들어냈다고 이순신이 장계로 보고했다. 이순신의 지시에 의한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이로써 이순신은 무기와 화약, 방어시설을 완비하고 본격적인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서울여해재단 이사장. 1990년 단 3명의 직원과 함께 화장품 제조업체 한국콜마를 창업해 연간 3조원 매출의 K뷰티 중추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난중일기’ ‘장계’ 등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의 한글 번역 사업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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