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창비 / 1999년 01월 -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그 샘
- 함민복 -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1999) -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드
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고깃국물이
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
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
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끔거리
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
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혔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을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
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그림자
-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 작품해설 : 함민복은 1962년 충청북도 중원에서 태어났다.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성선
설」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으며, 시집으로 『우울씨의 일일(一日)』(세계사, 1990), 『자본
주의의 약속』(세계사, 1993),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1996),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등을 펴냈다. 시 「그림자」는 그의 네 번째 시집인 『말랑말랑한 힘』에 실려
있다. 함민복 시인의 시들은 속악한 자본주의적 세계의 비인간적인 폭력과 부조리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도 소외된 현대인에 대해서 따스한 손을 내밀고 그것을 감싸 안으려는 포용력을 보여
준다고 평가된다. 시 「그림자」 또한 상처받고 소외된 지상의 존재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숙명적인
고통과 상처를 감싸 안아주고 치유하려는 모성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중심적인 제재는
‘그림자’이다. 그림자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이 지니기 마련인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햇빛이 비치는 반대쪽에 형성된다는 점에서 밝음과 대비되는 어둠을 내포하며, 모든 존재자들
이 지니고 있는 아픔과 상처 같은 그늘을 상징한다. 혹은 우리의 의식 아래에 존재하면서 의식과 감
정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처럼 상징적 의미가 풍부한 ‘그림자’를
통해서 모든 생명들이 지닌 그늘에 대한 시적 통찰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시는 한 행
을 하나의 연으로 구성하여 여백의 미를 강조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모두 4개의 연으로 구
성되어 있다.
내용상으로 3연까지는 시인이 마음의 눈으로 포착한 대상들이 지닌 그림자에 대한 바람을 표출하고
있으며, 마지막 4연에서는 궁극적으로 시인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모습을 상상력을 통해 구
상하고 있다. 첫째 연에서 시적 자아는 피자마자 져버리는 “꽃”이 지닌 그림자를 떠올리면서 그것
이 “색깔”을 지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여기서 “꽃”은 지상에 존재하는 유한한 생명을
대변해주는데, 생명이란 한정된 시간 동안만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도 매우 찰나와 같은 순간만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늘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그러한 “꽃”의 “그림자만이라고 색
깔”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면서 유한한 시간의 의미화를 지향하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허
리가 휜 어머니의 그림자가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면서 세월의 폭력에 의해 드리워
진 어머니의 육신의 그림자가 치유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 연에서는 차가운 육교에 엎드려 있는 걸인을 보면서 그의 육신이 드리운 그림자가 “따
뜻했으면 좋겠다”고 피력하면서 생존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소외된 현대인에 대한 배려를 촉구하
고 있다. 실존적 차원에서 폭력으로 작용하는 시간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폭력으로 작용하는 왜곡된
경제적 구조는 지상의 생명체들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시적 자아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포용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넷째 연에서 시적 자아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서 마음에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
으면 좋겠다”고 피력하면서 모든 생명체들의 영혼에 안식과 평안이 깃들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림자
란 높낮이가 있고 돌출된 부분이 있어야 생성된다. 따라서 이랑과 고랑을 만들면서 물결치는 파랑이
없다면 잔잔한 바다의 고요와 같은 평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지상의 모든 존재자들이
이처럼 평정을 통해서 마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고 있다. - 황치복, 한국현대문학
* 함민복(1962-)
출생 : 1962. 충청북도 충주
학력 :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데뷔 : 1988년 세계의 문학 '성선설' 등단
수상 : 2020년 제18회 유심작품상 시부문
2011년 제비꽃 서민시인상
2011년 제6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05년 제2회 애지 문학상
1962년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서 4년 간 근무했다. 이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2학년 때인 1988년에 〈성선설〉 등을 《세
계의 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6년에 우연히 놀러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 인근 폐가를 빌려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에 정착하게 된다. 강화도에 정착한 후 시집 《말랑말랑한 힘》과 에세이집
《미안한 마음》,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를 발표했으며, 김수영 문학상, 윤동주상 등의 상을 받
았다.
함민복 시인(길 위의 인문학) / 인천성모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