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노래
- 정인보 -
기미년 삼월 일 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광복절 노래
- 정인보 -
1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개천절(開天節) 노래
- 작사 정인보 / 작곡 김성태 -
1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2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 날이 시월상달에 초사흘이니
이 날이 시월상달에 초사흘이니
3절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 개천절(開天節) :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국경일. 대종교의 절기에서 비롯되었으
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민족의 기념일로 채택되어 음력 10월 3일을 기념했다. 1948년 정부 수
립 후에는 연호로 단기를 채택했으며, 이듬해 제정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서 국경일로 공식 제정하
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이나, 여러 단군 숭봉 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의식을 행하고 있다.
제헌국회 개원식
제헌절 노래
- 정인보 -
1절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샘백예순 남은 날이 하늘빛 그대로였다
삼천민 한결같이 지킬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걸음으로 발 맞추리라
이날은 대한민구 억막 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 년의 터
2절
손 씻고 고이 받들어서 대계의 별들같이 궤도로만
사사 없는 빛난 그위 앞날을 본 뿐이로다
바닷물 높다더냐 이제부터 쉬거라
여기서 저 소리 나니 평화 오리라
이날은 대한민국 역만 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 년의 터
새해의 노래
- 정인보 /《연합신문》1950. 5.5 〈새해의 노래 制定〉에서. -
1절
온겨레 정성덩이 해돼오르니
올설날 이아침야 더찬란하다
뉘라서 겨울더러 추웁다더냐
오는봄만 마지려말고 내손으로 만들자
2절
깃발에 바람세니 하늘뜻이다
따르자 옳은길로 물에나불에
뉘라서 세월더러 흐른다더냐
한이없는 우리할일을 맘껏펴처보리라
공무원의 노래
- 정인보 -
삼천만 하나로도 책임크거든
우린다 삼천만의 일을맡았다
오늘은 어제보담 강산푸르니
내일은 달빛마저 둥그리리라
선열들 허위허위 바다에 들에
살아서 고되다기 황송하구나
내몸이 내몸이냐 겨레있고서
이나라 안고업고 메고받치자
반공에 뜬구름도 산골의물도
우리를 바라는줄 아나모르다
정성아 모이거라 어서바뿌다
북쿵쿵 울리면서 국태민안에
運輸學校歌
- 정인보 -
느질라 어서뫼자 운수학교로
「동적이」 모래톱에 달이 지샌다
三千里 새血管을 돌리는 바퀴
江山도 쉴새업시 우릴 른다
두루미 날개펄펄 봄하눌 넓다
슬긔야 열려니와 「얼」이 서거라
뭇헤나 空中에나 山에나 바다
편한건 겨레에게 「수구」 맛거라
ᄯᅳ거운 젊은마음 火筒을 달고
내닷는 한참긔운 먼데업구나
들올제 「구름」이건 나가 「해」거라
檀君이 물리신ᄯᅡᆼ 다시 빗내자
誠信女子中學校歌
- 정인보 -
등뒤에 水晶이요 발아레 구름
門들어 설제발서 바람이 놉다
정성ᄯᅬ고 미덤즉한 朝鮮의 딸아
歷史를 빗낼책임 우리게 크니
「안」살림 「속」범절은 民族의「터」다
繡틀에 메인 강산 나날이 곱게
五大洋 물「여」다가 무궁화 키자
성동고등학교가
- 정인보 -
성동의 새종소리 우리얼소리
학교도 높거니와 뜻도높여라
앞뒷산 푸른빛이 예와둥그니
삼천리 사이없을 그상서로다
뛰어도 겨레거라 앉아도나라
한참때 내키는맘 번개앞선다
하나로 백가지를 왼통뭉쳐서
이나라 이겨레에 다바치거라
무학봉 머리위에 공부터되고
대도성 먼지비켜 바람맑구나
길멀고 짐무거운 대한학도야
온세계 장래복이 이손에큰다
東國大學校歌
- 정인보 -
아느냐 오늘날을 봐라 三千里
젊은피 ᄯᅱ는소리 하눌 울린다
동해물 백두산을 예서 빗내여
이나라 이계레에 福려 되거라
눈부신 샛별아레 대대 내린얼
뉘게나 안기대고 내가 세웠다
열손틉 다달커든 살로 대들어
宇宙안 무친샘들 그예 파내자
외관혁 향하는살 너나 잇스랴
가람야 즈믄이건 달은 하나다
아느냐 오늘날을 봐라 三千里
이억개 거룩한줄 서로 알거라
國學大學歌
- 정인보 -
물이건 맛을보고 흙이건 맛자
잘바더 키워「물릴」 오늘우리다
五千年 三千里가 「함ᄲᅡᆨ」안기니
짐크고 길이멀다 國學大學아
海東靑 매서운눈 ᄶᅵ저지도록
세계를 살피랼제 나「버텀」봐라
江西에 무친그림 龍다시 살고
吐含山 사긴羅漢 거러나온다
「호믜」도 갈려니와 살손조니라
바다밋 珊瑚빗은 깁허야곱다
무악재 저긔노코 독립문 예라
ᄯᅳᆫ구름 나려서라 「얼」이솟는다
이화여자대학교가
- 정인보 -
1절
한가람 봄바람에 피어난 우리
성인이 이를 불러 이화라셨다
거룩한 노래 곱게도 나니
황화방 안에 천국이 예라
2절
지조의 높은 의기 길고긴 내력
아령비 머다할가 지은이 우리
육부에 삼베 짜던 것 배워
덕행의 수로 온대한 싸세
3절
서거라 단닪거라 절조와 지개
한사람 외오서도 내일로 알자
하나님 느리 임하심 같이
두리는 속에 광명이 쐬네
후렴
이화이화 우리이와 진선미의 우리이화
네 향기 널리 퍼져라 아 우리이화
延禧大學校歌
- 정인보 -
정본
오거라 모이거라 이솔밧으로
푸르러 한빗이니 天池갓구나
「여호와」 지튼사랑 언제나 입고
된「서리」 보라눈과 싸와 왓섯다
연희궁 올라오는 태양을 봐라
「정」한 「금」 「도」는 「길」에 어김 잇더냐
지킬데 「엄」한 그걸 「활발」이란다
「선비」하 우리일도 저러하니와
공부가 커갈수록 맘더욱 밧버
三千里 오늘날에 젊문 우리다
슬긔를 풀무삼아 녹여라 東西
눈부신 새文化로 福을 퍼치자
유족보관원고
오거라 모이거라 이솔밧 으로
푸르러 한빗이니 겨레 얼이다
여호와 지튼사랑 이즐가 보냐
된서리 구진비를 지나 왓섯다
연희궁 올라오는 햇발을 봐라
「정」한금 「도」는길에 어긤 잇더냐
지키어 엄한거긔 언제나 내다
「선비」하 우리일도 저러 하니라
宇宙안 모든슬긔 당긔어 손에
팔다리 단련해서 적이 업거라
내정녕 되오리라 英雄 큰英雄
명예야 둘재라오 공을 세우소
세종왕 타신말이 여긔서 ᄯᅱ어
압바로 뵈는강은 「최영」 건넛다
우주안 ᄭᅩᆺ송이들 두루당긔어
대나린 천지물에 거듭 씻거라
어젯밤 새엿느냐 오늘도 새라
갈길이 만리라면 문턱 겨오다
오천년 크나큰일 지금고븨니
이짐을 눌주랴고 쉬일ᄭᅡ보냐
이ᄯᅡᆼ의 오늘날을 금으로사랴
갈길이 만리라면 문턱 겨오다
파거라 심우거라 밤낫이 업시
온세계 복이되야 길고 멀거라
高麗大學校歌
- 정인보 -
「먼」동을 처서 틔는 일은 종소리
훼영청 넓은 마당 발서 「찻」구나
「산」「바다」 「영」이 도는 깃분 이 날에
마초아 불러보자 고려대학아
선비들 과가튼 단단한 「이룩」
백두산 본을바더 「눈」보다 희다
대지의 새론바람 두루 마시며
거운 정성이 「해」돼 올라라
다기운 그당시에 「굄」(支柱木)로 생겨
연해킨 새기둥이 오늘을 보니
압흐로 백천만년 길고길거라
대고려 만리을 여긔서부터
德成女子中學校歌
- 정인보 -
이나라 위해나서 공부도 나라
오늘날 「대한」 딸들 책임무겁다
슬기는 수라더라 덕으로 바탕
꽃가치 펴나는때 어서 이뤄라
길넘어 천문대는 「이순지」자최
「박난계」 옥경소리 제서 들린다
「옌」 더욱 우리에게 자랑을 주니
흥선왕 한을 풀어 널리 배우자
「미영베」 긁은험소 압서자 우리
허영을 발로차고 강산 안어라
하로도 스물네번 내맘을 보아
언제나 나라위해 순전하거라
* 친일 행위가 노골적인 새해에 되새겨보는 조선의 '혼' 올 곧게 지킨 위당 정인보 선생
위당 정인보 선생은, "국학 정신은 세계화 물결을 넘을 수 있는 지표요. 진정한 독립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 이라고 했다. 국혼정신은, 곧 얼이다. 민족의 얼이며 , 나라의 얼이다 . 위당 정인보 선
생은 이러한 얼을 찾고자 평생을 노력하신 분이다. 위당정인보 선생ㅡ정인보(鄭寅普, 음력 1893년 5
월 6일/양력 1893년 6월 19일 ~ 1950년 9월 7일)는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역사학자·작가이며, 대한
민국의 언론인·작가이다. 일제의 암흑기에도 국학의 횃불을 드높이 들고 민족의 얼을 찾고자 한시도
쉴틈이 없었다. 육당 최남선이 변절을 했을 때, '육당은 죽었다,'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는 위당
정인보 선생. 위당 정인보 선생은 국학운동에 전념한 사람이 더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사상의 흔들림
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위당 정인보 선생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 어려서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고 13세 되던해 강화도의 이건방에게 유학을 사사 받았다. 정통 성리학보다는 양명학을
깊이 공부한다. 시대의 변화가 없었다면 위당 정인보 선생은 양명학의 대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
나 위당은 나라의 주권이 상실되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양명학이 시련을 타개할 수 있는 학문인지 깊
게 고민한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간다. 만주에서 위당은 그가 평생 주창한 '국학정신' 에 대해 접하
고 배운다. 당시 항일투쟁의 본산이라고도 할 수 있던 만주에서 윤세복등과 교류하면서 위당은 민족
사학자로서의 길에 발을 디딘다. 이때가 1911년 그의 나이 18세때이다. 1913년 초 만주에 있던 위당
은 상해로 향한다. 백암 박은식 선생도 이때 만주에서 상해로 들어가는데 위당 정인보 선생도 같이
움직였다. 상해에서 위당은 단재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설립하여 교포의 정치적 문
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독립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부인 성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슬픔
을 위로하고자 귀국한다. 귀국후 위당은 독립투쟁을 활발하게 펼치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가혹한 고
문과 옥고를 치른다. 위당이 31세 되던해 연희전문학교의 전임강사가 되어 본격적인 '국학자'로서의
학문활동을 펼친다. 신학문을 접하지 않은 위당이 전임강사가 될수 있었던 이유는 해박한 국학지식
과 함께 뛰어난 문필력 때문이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외에도 협성학교, 불교중앙학림
등에서 한학과 국사를 가르쳤다. 또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서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글을 쓰면서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국민들에게 국학을 정립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방책의 하나로 위당은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또 1935년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며 그 행사를 주도하고 실학연구를 확산시켰다. 요즘
우리가 쓰고있는 실학이란 용어와 그 사상은 위당선생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1936년엔 연희전문학교
의 정교수가 된다. 여기에서 위당은 국학을 중점으로 국문학과 고전이해를 위한 한문등을 가르쳤다.
이로인해 연희전문학교는 국학의 본산으로 인식 되었다.
이무렵 위당과 절친하던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변절하여 적극적인 친일파가 되어 '민족 개조
론' 등의 글을 쓰며 친일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육당 최남선은 사학자로서, 문인으로서, 출판인으로서
당대의 걸출한 인문학도였다. 그가 3ᆞ1 만세의거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
의 회유에 넘어가 결국 친일파로 변절했다. 잘 알려진것만해도 조선사 편수회 위원, 중추원 참의, 만
주건국대학 교수 등등 ... 심지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권유 연설도 했다.
그에겐 절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위당 정인보 선생이었다. 위당은 어느날 육당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간다는 얘길 들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위당은 이제 자기가 알았
던 과거의 육당 최남선은 죽었다고 판단했다. 어느날 위당 정인보선생은 육당의 집 대문앞에 거적데
기를 깔고 꿇어 앉았다. 그리고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아이고! 아이고! 육당이 죽
었습니다! 내 친구 육당이 죽었습니다 !..."
해방이 되고 6개월 뒤, 1946 년 봄에 위당은 서울로 돌아온다. 다른 사람들이 정치다 뭐다해서 정신
을 쏟고 있을때 위당은 오로지 국학의 부흥과 민족교육에만 힘을 쏟는다. 위당이 가장 신경을 쓴 것
은 식민사관에 젖어있는 역사의식이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민족주의 사학을 토대로 '조
선사 연구'를 쓴다. 사료의 철저한 분석 속에 '신민족주의'를 기준으로 저술한 한국의 역사서였다.
위당선생은 학문적으로 여러방면에 걸쳐 뛰어난 성과를 일궈냈다. 그러나 어느 학문에서나 기본이 되
는것은 '민족의식'을 함축한 국학정신이었다. 위당선생은 매우 많은 시조를 남겼는데 시조마다 우리
역사와 우리정신이 아닌게 없어 가히 우리 역사의 '대서사시'라고 말할 수 있다.
새해의 노래 / 위당 정인보
온 겨레 정성덩이 해돼 오르니
올 설날 이 아침야 더 찬란하다.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깃발에 바람 세니 하늘 뜻이다.
따르자 옳은 길로 물에나 불에
뉘라서 겨울더러 흐른다더냐
한이 없는 우리 할 일은 맘껏 펼쳐 보리라.
강단에서, 언론에서 줄기차게 민족정신과 역사를 강조해 온 위당이 있기에 35 년간의 일제라는 암흑
기에서도 끊이지 않고 독립운동이 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위당선생이 국학대학에서 계속
남아 강의를 했더라면 오늘 우리의 현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우리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
학대학은 이제는 그 흔적이나 모습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각 대학의 강단은 이병도 같은 친일 식민
사학자들의 독무대가 되어 우리의 주체가 무엇인지 알수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친일 식민사학자
이병도 같은 사람은 위당 정인보 선생앞에서는 오금도 못 폈다고한다.
벌써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8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선각자들은 후세를 위하여 많은 것을 남겨왔다.
우리는 그것을 잇고 보다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국학정신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을 넘어야 하는 커다란 지표가 될 것이다.
삼일절 노래(정인보) / 작곡(박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