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 6. 15 부산에서 열린 삼의사 유골 봉환 기념식, 백범(앉은이) 뒤로 정인보 모습
殉國先烈追念文 (순국선열추념문)
대한민국 27년(1945) 12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순국선열 영령 앞에 아뢰나이다.
정인보 書 / 1945년 12월 23일 -
1945. 12. 23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순국선열 추념행사가 열렸다. 국기게양, 애국가제창, 묵념
에 이어 장중한 아악이 연주되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위당이 백범의 추념문을 대독하고 난 뒤 백범
이 추념문을 제단에 바치고 배례하니 광복군, 소년군, 각 단체, 군중도 차례로 경건하게 배례를 올렸
다. 다음 식익희 위원장의 추념사, 이화여전 합창단의 추념가 제창, 각 단체 대표의 추념사가 이어졌
고 충정공 민영환의 3자 민광식이 유족대표로 답사했다. 이날의 위당의 추념문은 비분강개하고 폐부
를 찌르는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 장문의 글이다.
우리 國祖[국조] 荊棘[형극]을 開除[개진]하시고 政敎[정교]를 베푸신 뒤로 綿延[면연]함이
거의 五千年[오천년]에 미치는 그 동안 興廢[흥폐]의 故[고]가 어찌 한두 번 이리요마는 실
상은 한 族類[족류]로서의 代承[대승]이요 혹 外寇[외구]의 侵奪[침탈]함이 있었다 할지라
도 그 地域[지역]이 一區[일구]에 그쳐 桓解古胤[환해고윤]의 내려오는 統緖[통서]는 언제
나 儼然[엄연]하였나니 우리 몸소 당한바 變亂[변란]이야말로 史上[사상]에서 보지 못하던
初有[초유]의 慘[참]이라. 光武[광무] 乙巳[을사]로 비롯하여 丁未[정미]를 지나 隆熙[융
희] 庚戌[경술]에 와서 드디어 言語[언어] 끊기니 그 慘[참]됨은 오히려 둘째라 奇恥[기치]
와 大辱[대욕]이 이에 極[극]함을 무엇으로 견준다 하리요. 이러한 가운데 一道燦燃[일도찬
란]한 國光[국광]을 일으켜 民衆[민중]으로 하여금 恥辱[치욕]의 日[일]에 矜負[긍부]와 悲
慘[비참]의 期[기]에 奮發[분발]을 끊임없이 가지게 함이 果然[과연] 누구의 주심이뇨? 우
리는 이에 乙巳[을사] 이후 殉國[순국]하신 先烈諸位[선열제위]를 寤寐間[오매간] 잊지 못
하나이다. 그동안 日寇[일구], 此土[차토]에서 陸梁[육량]함이 오래라. 監[감]이라 督[독]
이라 하여 敗退[패퇴]하던 날까지 江山民人[강산민인]을 彼[피]는 彼[피]의 占制下[점제하]
에 두었던 듯이 알았을 줄 아나 우리 先烈[선열]의 피로써 敵[적]과 싸워온 거룩한 陣勢[진
세] 四十一年[사십일년]의 日月[일월]을 貫徹[관철]하여 몸은 쓰러져도 魂[혼]은 나라를 놓
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그 壯[장]하고 매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의 最
後[최후]가 天泣地哀[천읍지애]할 巨迹[거적]이 아니시리요?
* 桓解古胤: 환웅과 해모수의 후손
* 奇恥: 당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수치.
* 陸梁: 제멋대로 날뛰는 것. 또는, 그 모양.
刃[인]에 絶[절]하였거나 藥[약]에 殞[운]하였거나 다 같은 國家獨立[국가독립]의 勃勃[발
발]한 撐柱[탱주]요, 隻手[척수]의 擊[격]이나 一旅[일려]의 戰[전]이나 모두가 光復達成
[광복달성]의 熱烈[열렬]한 邁進[매진]이요, 域中[역중]에서 崎嶇[기구]하다가 猛志[맹지]
를 牢獄[뇌옥]에 묻었거나 海外[해외]에 飄轉[표전]하면서 苦心[고심]을 虜鋒[노봉]에 끝마
치었거나 다 抗敵必死[항적필사]의 剛果[강과]한 決定[결정]이니 個人[개인]과 團體[단체],
刺殺[자살]과 被害[피해]가 不一[불일]한 대로 내어뿜는 民族的[민족적] 芒稜[망릉]은 일찍
이 間歇[간헐]됨을 보지 못한 즉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敵[적]과 싸움이 쉰 적 없고 이
싸움이 쉬지 아니하매 此土[차토] 마침내 敵의 全據[전거]로 돌아갔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
라.
* 勃勃: 왕성하다. 강렬하다
* 隻手: 한쪽 손
* 虜鋒: 적군의 칼날.
* 芒稜: ≒威光(범하기 어려운 위엄) 芒: 까르라기망.빛살 망, 稜은 서슬 릉.
* 間歇: 일정한 시간을 두고 되풀이하여 쉬었다 일어났다 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 過去[과거] 四十一年[사십일년]을 통틀어 日寇[일구]의 役[역]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彼[피]의 時代[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殉國先烈[순국선열]들의 끼치신 피
香[향]내가 恒常[항상] 이곳에 主氣[주기]되어 온 緣故[연고]니 이 여러분 先烈[선열]이 아
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圓球上[원구상]에 서리요. 三千里[삼천리] 土壤[토양] 알알 그대
로가 이 여러분 熱血[열혈]의 凝體[응체]임을 생각하매, 舊恨新感[구한신감]이 가슴에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르겠나이다. 狡寇[교구], 對露戰勝[대로전승]의 餘威[여위]를 가지고 五條
[오조]의 協約[협약]을 떠들던 것이 어젠 듯하오이다. 國步[국보]는 기울고 大勢[대세]는
가, 앞길의 暗黑[암흑]이 그 즈음을 알 수 없는 그 때, 저 周勤[주근] 紐由[뉴유]의 久遠
[구원]한 精氣[정기] 몇몇 분의 鮮血[선혈]로 좇아 다시 솟아나 안으로 肺腑[폐부]의 重望
[중망]과 元老[원로]와 守義枯槁[수의고고]하던 舊臣[구신]과 激昻[격앙]한 衛士[위사]와
慷慨[강개]한 微官[미관]과 林下儒門[임하유문]의 耆德[기덕]들의 殉烈[순열]이 서로 이었
고, 밖으로 駐箚使臣[주차사신]의 死絶[사절]이 國聞[국문]을 聳動[용동]하였으며 각 地方
[지방]으로 義旗[의기] 곳곳에 날려 裹革[과혁]의 尸[시]와 冷山[냉산]의 魂[혼]과 被執不
屈[피집불굴]의 壯士[장사]가 다 敵膽[적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海牙[해아]의 義聲[의성]
이 內外[내외]를 흔듦에 미쳐 國民[국민]마다 腔血[강혈]이 끓는 中[중] 讓位[양위]의 逼
[핍]을 뒤이어 軍隊[군대]의 解散[해산]을 보게 되던 날 轟烈[굉렬]한 隊長[대장]의 自砲
[자포]가 그 卽時[즉시] 祖國光復[조국광복]의 活訓[활훈]이 되어 죽어도 겨누라는 明命[명
령]이 되어 마침내 市街一戰[시가일전]의 血腥[혈성]이 永久[영구]히 民志[민지]의 보람으
로 빛나매 무릇 軍裝[군장]을 身上[신상]에 건 이, 거의 義旅[의려]로서 結合[결합]되지 아
니함이 없고, 學士[학사] 名官[명관]이 함께 旗鼓[기고]를 잡아 비록 形勢[형세] 單弱[단
약]하나마 자못 雲興[운흥]함을 보았나니 이에 創[창]이 부러질수록 義[의] 더욱 굳고 몸이
敵[적]에게 잡힐수록 精神[정신]은 갑절이나 活潑[활발]하였나니 獄中[옥중]에, 荒野[황야]
에, 어느 뉘 어귀찬 戰亡[전망]이 아니오리까? 亂賊[난적]을 치려다가 誤中[오중]하여 義軀
[의구]만을 傷[상]함을 애달파함도 그 어름이어니와 하얼빈에서 仇敵[구적]의 元惡[원악]을
射殺[사살]하던 壯擧[장거]는 지금껏 남은 凜然[늠연]이 있나이다.
* 主氣: 주되는 정기(精氣).
* 五條: 乙巳五條約
* 國步: 나라의 운명.
* 周勤: 마한(馬韓)의 장군(?∼16). 온조왕 26년(8)에 마한을 일으키려고 우곡성(牛谷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백제에 대항했으나, 온조왕의 5천 군사에 패하여 자결함.
* 紐由: 고구려의 충신(?∼246). 동천왕(東川王) 20년(246)에 중국 위(魏)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침입하자 단신으로 적진에 나가 위장(魏將) 왕기(王頎)를 죽이고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써 왕의 위기
를 구함.
* 守義枯槁: 굳게 절의를 지켜 한 몸의 안일을 돌보지 않다
* 耆德: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
* 駐箚: 외교 대표로서 외국에 주재하는 것. 주찰(駐札). 찰주.
* 國聞: 나라 사이의 소문이나 소식.
* 裹革의 尸: 가죽에 싸인 주검
* 冷山의 魂: 차가운 산에 떠도는 혼
* 海牙: 헤이그. 거기서 순절한 이준열사를 얘기함.
* 腔血: 목구멍의 피
* 隊長의 自砲: 대한제국기 육군 참령,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군대해산령을 받
을 수 없다고 하며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 明命: 신령이나 임금의 명령
* 血腥: 피비린내
* 創: 槍
* 어귀차다: 뜻이 굳세어 하는 일이 여무지다.
* 戰亡: 전사(戰死).
* 어름: 어떤 시기나 때가 되는 시점의 경계나 그 가까이. "새벽 1시 ∼에 잠을 깨다"
* 仇敵의 元惡을 射殺: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일.
* 凜然: 늠름함. 씩씩함
國變[국변] 當時[당시] 朝野[조야]를 通[통]하여 烈節[열절]이 繼起[계기]한지라. 守土[수
토]의 長吏[장리]를 비롯하여 丘園[구원]에서 艱貞[간정]을 지키던 이, 國敎[국교]로 民志
[민지]를 뭉치려던 이, 碩學[석학], 文豪[문호], 高士[고사], 端人[단인], 畿近[기근]으로
散班[산반] 重卿[중경]에 미쳐 先後[선후]하여 軀命[구명]을 버리어 死敵[사적]의 烈[열]을
밝히셨나이다. 乙巳年[을사년]부터 庚戌[경술]에 미쳐 國步[국보] 이미 기우는 것을, 大勢
[대세] 이미 가는 것을, 저렇듯 죽음으로 붙드시려 하였으나 기우는 것은 기울고 가는 것은
가, 最後[최후]에 이르게 된 一面[일면], 붙드신 힘은 그 속에 점점 强固[강고]하여 한번
喪亂[상란]의 最後[최후]를 넘자, 下傾[하경]하던 波濤[파도]를 휘어돌려 다시 洶湧[흉용]
하기 始作[시작]하매 光復[광복]의 一路[일로] 바로 全[전] 民衆[민중]의 奔趨[분추]하는
바 되었나이다.
* 長吏: 옛날, 현(縣)의 관리들 가운데 우두머리 또는 상급 관리.
* 丘園: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곳. 조금 높은 곳에 있는 화원(花園)이나 과수원.
* 艱貞: 어려움을 참고 굳게 절개를 지키는 것.
* 端人: 단정한 사람. 조선 시대, 정8품·종8품 문무관 아내의 품계(品階).
* 畿近: 서울 부근.
* 散班: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 산리(散吏). 산관(散官). 산직(散職).
* 重卿: 중한 직책(職責)을 띤 벼슬아치.
* 喪亂: 전쟁·전염병·천재지변 따위로 사람이 죽는 재앙.
* 奔趨: 급히 뛰어 달려가는 것.
이에, 앞서부터 滿洲[만주], 南華[남화], 遠[원]으로 美[미], 近[근]으로 露領[노령]에 志
士[지사]의 踪跡[종적]이 分布[분포]하더니 다시 그 規模[규모]를 宏闊[굉활]히 하매 혹 團
結[단결]하여 軍旅[군려]를 倍振[배진]하고, 혹 糾合[규합]하여 黨倫[당륜]을 增長[증장]하
여 혹 單身[단신]으로 苦行[고행]하여 左援右應[좌원우응]하는 그 行事[행사] 또한 百難[백
난]을 衝冒[충모]한 바라. 內外互流[내외호류]하는 幾多[기다]의 熱血[열혈] 속에 전 民衆
[민중]의 志意[지의] 불타듯이 뜨거워가다가 己未[기미] 三月[삼월]에 와서 總一[총일]의
表露[표로]가 獨立萬歲[독립만세]로 터지자, 여기서들 大韓民國[대한민국]을 내세우고 臨時
政府[임시정부]를 만들어 오늘에 이름이 하나로부터 萬億[만억]에 이르기 다 先烈[선열]이
물려주신 바임은 千秋下[천추하]에도 오히려 濡袂[유몌]의 淚[누]를 자아낼 줄 아나이다.
* 南華: 대만
* 露領: 러시아의 영토, 시베리아 일대를 이른다
* 倍振: 힘을 갑절이나 떨쳐 일으키는 것.
* 衝冒: 어려운 고비를 무릅쓰고 달려드는 것.
* 幾多: 꽤 많은 수량. 여럿.
* 總一: 모두 뭉쳐서 하나가 됨.
* 表露: 표면에 나타나는 것. 또는, 표면에 나타내는 것.
* 濡袂: 눈물에 젖은 옷소매.
己未[기미]이후는 우리의 運動[운동]이 가장 强[강]하여지니만큼 萬歲[만세]소리에 應集[응
집]하던 그때부터 農村[농촌], 市場[시장], 敎會[교회], 婦人[부인], 老年[노년]을 나눌 것
없이 앞에서 넘어진 채 뒤에서 밀고 나와, 血風血雨[혈풍혈우]가 全土[전토]를 휩쓸었으니
古[고] 先民[선민] 臨戰無退[임전무퇴]의 戒[계], 이에 再興[재흥]함을 이를지라. 피 헛되
이 쌓이지 않고, 하늘이 民衷[민충]을 돌아보아 今日[금일] 光復[광복]의 曙色[서색]을 國
土[국토]에서 맞이하게 되었나이다.
* 民衷: 국민이 바라는 진심. 백성의 고충(苦衷).
* 曙色: 새벽 빛. 서광을 받은 산천의 빛. 곧, 새벽녘의 경치.
언제나 殉烈[순열]의 先民[선민]은 有國[유국]의 楨幹[정간]이시라. 그 가운데도 우리의 過
去[과거]를 생각하건대 先烈[선열]은 곧 國命[국명]이시니, 往往[왕왕]이 一人[일인]의 피
로 因[인]하여 民族[민족]의 昭蘇[소소]함을 보게 됨이 어찌 徒言[도언]이리까? 저 江戶[강
호]의 推擊[추격]의 繼續的[계속적] 壯圖[장도], 故國[고국]의 사람 있음을 나타냄도 그러
려니와 往者[왕자] 上海[상해]의 亂[난]에 倭寇[왜구]의 放姿[방자]하는 攻勢[공세], 友邦
[우방]으로 하여금 至恨[지한]을 머금게 하던 때, 우리 義士[의사]의 一發[일발]이 群酋[군
추]를 殄殲[진섬]하여 擧國[거국]의 援師[원사]보다 오히려 지남이 있어 우리 獨立[독립]의
大計[대계] 激浪[격랑]같이 怒瀉[노사]함을 얻게 되었나이다. 예로부터 지사는 一死[일사]
를 가볍게 여기나니, 구태여 生[생]을 捨[사]하고 義[의]를 取[취]하신데 향하여 悲哀[비
애]의 細情[세정]을 붙이고자 아니하며 더욱이 모든 光復[광복]의 元功[원공]이신 바에 무
슨 遺恨[유한]이 있으리까마는 같은 先烈[선열]이시면서도 혹 顯著[현저]하여 天壤[천양]에
赫赫[혁혁]하기도 하고, 혹 湮滅[인멸]하여 名字[명자]조차 물을 길이 없기도 하니 前[전]
을 幸[행]이라 하면, 後[후] 어찌 不幸[불행]이 아니리까?
* 先民: 선대의 사람. 곧, 조상.
* 有國: 나라. 有는 뜻이 없다.( ‘어떤’으로 새길 수도 있다)
* 楨幹: 사물의 근본.
* 昭蘇: 어둡던 것이 밝아지고 죽었던 것이 되살아나는 것.
* 徒言: 헛된 말. 순화어는 `군소리'.
* 江戶: 도쿄의 옛이름
* 江戶의 推擊의 繼續的 壯圖: 도쿄에서 의거를 계속한 큰 포부.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의열단원 김
지섭 등이 일본에서 실행한 의거를 가리킨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사건들을 윤봉길 의거와 함께 독
립운동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대역사건으로 규정한다. 다음은 이봉창 의
거의 내용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그러나 이봉창은 마차 여러 대 중에서 어느 것
이 진짜 천황이 탄 마차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2번째 마차에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명중했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그가 지나보낸 1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고 폭탄은 마차를 끌던 말과 말에 탄 근위병
에게 부상을 입혔다.
* 壯圖:크게 도모하는 계획이나 포부.
* 義士의 一發: 상해 홍구공원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말한다
* 援師: 지원해 주는 군대
* 怒瀉: 거세게 쏟아붓다 怒:기세가 강성하다. 위세가 왕성하다.
하물며 無人窮途[무인궁도]에서 枯卉[고훼]위에 燭髏[촉루]를 굴리어 鬼火[귀화] 번득이고
烏鵲[오작]이 亂飛[난비]할 뿐으로 生前[생전]은 且置[차치]하고 死後[사후]까지 蕭條[소
조]한 이가 많음을 어찌하리요? 설사 이렇기까지는 아니 할지라도 軍行旅進[군행여진]하다
가 陷沒[함몰]한 이들은 누구며, 幽蟄歷久[유칩역구]하다가 瘐死[유사]한 이들은 누구뇨?
多數[다수]로 因[인]하여 特著[특저]가 없는 거기에, 日星[일성]과 竝垂[병수]할 烈蹟[열
적]이 많으시려니 逝者[서자] 아무리 浩然[호연]하다한들 살아있는 우리야 어찌 돌아보아
슬프지 아니하리요?
* 蕭條: 적막하다. 스산하다. 쓸쓸하다. 생기가 없다.
* 幽蟄: 冬眠土中的蟲類. 喻草野或隱退之士
* 瘐死: 죄인이 옥중에서 기한(飢寒)으로 죽다. 죄인이 옥중에서 병사(病死)하다.
다시 생각하면, 殉國先烈[순국선열]은 殉國[순국]으로 一體[일체]시니 名字[명자]를 가리켜
人我[인아]를 나누려 함은 오히려 私見[사견]인 양 하여 自慰[자위]하고자 하나 또 설워하
는 바 있으니 乙巳[을사]이후 先烈[선열]의 보고자 하심이 光復[광복]이라. 此身[차신]의
輾轉[전전]하는 동안 同志[동지]로서 艱苦[간고]에 提携[제휴]하던 이 가운데도 이미 先烈
[선열]을 따라가신 이 많거늘 이 날을 어찌 우리만이 보며 더욱이 만드시던 이는 멀리 아득
하고 그 跡[적]을 襲[습]한 우리, 이 曙光[서광]을 바라니 이 느낌을 또 어이하리요?
* 輾轉: 누워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것.
우리 國外[국외]에서 星霜[성상]을 지낸지 오래라. 그 때는 生者[생자]들 또한 死路[사로]
를 밟아 依倚[의의]하는 바 오직 先烈[선열]의 魂魄[혼백]이매 거의 人鬼[인귀]의 隔[격]을
잊었더니, 이제 故土[고토]에 돌아와 同胞民衆[동포민중]의 품에 안기니 와락, 此身[차신]
의 存留[존류]함이 어째 그리 廓然[확연]함을 느끼나이다. 들어오면서 곧 微忱[미침]을 드
리려 한 것이 오늘에야 겨우 追念[추념]하는 大會[대회]를 擧行[거행]하게 되니 늦으나 오
히려 우리의 情[정]을 寄託[기탁]함직 하되 우리 先烈[선열]께 바칠 馨香[형향]이 光復[광
복]의 完成[완성], 즉 獨立[독립]의 告功[고공]에 있을 뿐이어늘, 이제 여기까지 達[달]함
에는 아직 거리 없지 아니할 새, 靈前[영전]에 向[향]하는 恧泥[육니], 자못 무거우나 몇
十年前[십년전] 暗黑[암흑]뿐이요 縷望[누망]이 없던 그 때에도 先烈[선열]은 꺾이지 아니
하셨으니, 우리 이제 垂成[수성]의 業[업]에 獻身[헌신]함을 盟歲[맹세]할 것은 물론이요,
時[시] 今昔[금석]이 있다 할지라도 民是[민시]는 先烈[선열]의 遺緖[유서]로부터 내려와
依然[의연]할 바니, 우선 現下[현하]를 들어 先烈[선열]께 告[고]하려 하며, 여러분 在天
[재천]하신 英靈[영령]들은 우리를 위하여 耿耿[경경]하실지니 그 百折不屈[백절부굴]하신
義氣[의기], 至純至潔[지순지결]하신 高操[고조], 民我無間[민아무간]하신 聖心[성심], 雄
猛卓特[웅맹탁특]하신 勇槪[용개]를 全[전] 國民[국민]으로 하여금 效則[효칙]하게 하사 이
로써 泰運[태운]을 맞이하여 위로 國祖弘益[국조홍익]의 聖謨[성모]를 重新[중신]하게 하시
여 아래로 三千萬[삼천만]의 祈願[기원]을 맞추어 이루게 하소서.
* 星霜: 성상. 1년의 세월.
* 依倚: 의지하다. 의뢰하다.
* 人鬼의 隔: 사람과 귀신의 간격.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
* 廓然: 확 트이다. 텅 비다.
* 微忱: 변변찮은 작은 뜻[성의]. (→寸心)
* 恧泥: 부끄러움에 젖음. 恧:부끄러움. 泥: 젖다
* 縷望: 작은 희망
* 垂成: 어떤 일이 거의 이루어지는 것.
* 民是: 국민이 지켜야 할 바른 길. ▷국시(國是).
* 依然: 전과 다름없다. "사고방식이 구태(舊態) ∼“
* 現下: 현재의 형편 아래. 순화어는 `지금', `오늘날'. "∼의 국내외 정세“
* 耿耿: 깜박깜박하는 것. 또는, 밝게 빛나는 것. 마음에 잊히지 않는 것. "∼ 불매(不寐)"
* 勇槪: 용감한 기개(氣槪).
殉國先烈追念文(순국선열추념문) 원문 / 현대어
https://blog.naver.com/gunchoi1/223163026887* 순국선열추념대회, 서울운동장에서 거행.
<자유신문> 1945년 12월 24일자. 행사 날짜: 1945년 12월 23일
을사년 이후 왜국의 침략이 우리의 국권을 범하자 충정공 閔泳煥선생을 비롯하여 李儁, 朴勝煥, 安重
根, 孫秉熙, 姜宇奎, 尹奉吉등 선열의 순국선열의 반반점점이 청사를 물들여 왔으니 오늘 해방된 기
쁨이 크면 클수록 그들 선열의 추모경앙하는 마음이 한층 더 깊다. 이때에 方應謨, 鄭寅普, 洪命熹등
위원의 준비로 23일 오후 2시를 기하여 殉國先烈追念大會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하였다.
단상 높이 흰 장막을 친 제단에서는 선열의 신위가 모시어졌고 제단 좌편으로 이날 대회의 총재인 임
시정부주석 金九, 위원장 임시정부 申翼熙 내무부장을 위시하여 洪震, 趙素昻, 金若山, 趙琬九 등 요
인과 위원들이 착석하고 우편에는 군정청 기타 각계의 내빈과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咸台永의 개
회선언으로 의식은 진행되었다. 국기게양, 애국가 제창, 묵상에 뒤어어 은은장중한 아악이 연주되어
장내는 일층 경건한 가운데 金九총재의 비분강개하고 폐부를 찌르는 듯한 추념문을 鄭寅普가 대독하
니 장내는 숙연하였다.
낭독후 추념문을 金九가 손수 제단에 바치고 배례하니 광복군, 소년군, 각학교등의 단체와 일반 개인
참열자등 수천군중도 이에 따라 경건배례를 올렸다. 다음에 申翼熙 위원장의 추념사가 있었고 이화여
자대학 합창단의 추념가 제창이 있은후 각 단체 대표의 추념문 낭독과 내빈 례사가 있었는데 이날 충
정공 閔泳煥의 셋째아들되는 閔光植이 유족을 대표해서 답사를 하고 다시 아악의 주악으로 대회를 마
치었다.
이날 鄭寅普가 대독한 金九 임시정부주석의 추념문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27년 12월 23일 임시정부주석 金九는 순국선열 영령의 앞에 고하나이다. 우리 國祖 荊棘
을 開除하시고 政敎를 베푸신 뒤로 綿延함이 거의 5천년에 미치는 그동안 興廢의 故가 어찌 한두번이
리요마는 실상은 한 族類로서의 代承이요 혹 外寇의 침탈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이 一區에 그
쳐 桓解古胤의 내려 온 統緖 는 언제나 엄연하였었나니 우리 몸소 당한 바 변란이야말로 史上에서 보
지 못하던 초유의 慘이라. 光武乙巳로 비롯하여 丁未를 지나 隆熙庚戌에 와서 드디어 언어 그치니 그
慘됨은 오히려 둘째라 奇耻와 大辱이 이에 極함을 무엇으로 견딘다 하리오 이러한 가운데 一道燦爛한
國光을 일으켜 이 민중으로 하여금 치욕의 日이 燦負와 비참의 期에 분발을 끊임없이 가지게 함이 과
연 누구의 주심이뇨 우리는 이어서 乙巳이후 순국하신 선열제위를 오매간에 잊지 못하나이다.
그동안 日寇-此土에서 跳梁함이 오래라 監이라 督이라하여 패퇴하던 날까지 江山民人을 彼는 彼의 占
制하에 두었던듯이 알았을줄 아니 우리 선열의 피로서 적과 싸워온 거룩한 陣勢 41년의 日月을 관철
하여 몸은 쓰러져도 혼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억매여 그 장하고 매움을 말
한진대 어느분의 최후 天泣地哀할 巨迹이 아니시리오 刃에 絶하였거나 藥에 殞하였거나 다같은 국가
독립에 勃發한 撑柱요 雙手의 擊이나 一族의 戰이나 모두가 광복달성의 열렬한 매진이오 城中에서 崎
嶇하다가 猛志를 牢獄에 묻었거나 해외에 漂轉하면서 苦心을 虜鋒에 끝마치었거나 다 抗敵必死의 剛
果한 결정이니 개인과 단체 自殺과 피해가 不一한대로 내어 뿜은 민족적 芒稜은 일찍이 間歇됨을 보
지 못한 즉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적과 싸움이 쉬신적 없고 싸움이 쉬시지 아니하매 此土 마침내
敵의 全據로 돌아갔다 이르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과거 41년을 통털어 日寇의 役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彼의 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선열들의 끼치신 피향내가 항상 이곳의 主氣되어 온 연고이니 이 여러분 선열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서리오. 3천리토양 알알 그대로 가히 여러분 열혈의 凝體임을 생각하면서 이 땅을
디딜때 舊恨新感이 가슴에 막혀서 어찌할 줄을 몰랐었나이다.(略)”
1919.3.1 종로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군중들
光復先烈의英靈앞에三千萬다함께머리숙이자
정인보 書 / 《동아일보》 1946년 3월 1일자 기사 -
일
우리 선열은 아시나니까. 일구가 일소된 우리 국토에서 처음으로 국경일의 전례를 행하나이
다. 황포탄(黃浦灘) 물소리에 오열함을 섞으며 파자고국(巴子古國)의 산장(山瘴) 속에서 태
극기 한 가득히 날리던 이 절일마다 일도영광(一道靈光)이 언제나 그곳을 위요(圍繞)하얐으
려니. 선열의 쓰러지신을 그대로가 낱낱이 우리나라를 되일으키는 어귀찬 등주(燈炷)라 지
금에 있어 더욱이 그 성향(聲響)을 듣는 듯하니 우리 어찌 스사로 자사념(自私念)을 둔다
하오리까.
이
우리 선열은 아시나니까. 우리 국토는 적이 물러가자 뒤이어 남북이 동강난 지 달수로 여덟
달이오 이 정당 저 정당 분운(紛紜)하던 북새가 저윽이 지났으나 아즉도 오른쪽이니 왼편이
니 합니다. 종각(鐘閣)의 인경소리 뎅뎅하며 이십팔년전 이날에 전국민의 독립정신을 부루
짖이던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어 광파(廣播)시킴을 비롯하야 모듬과 행렬 곳곳마다 성대함을
보는 우리는 촉처(觸處)에 감격되는 바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나이다. 선열의 끼치신 핏줄
기가 우리 자체(自體)에 순환되지 아니한다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순환이 정식(停息)되
지 아니할진대 우리 어찌 그 지사(志事)의 계승에 자력(自力)치 아니하리까.
삼
생각하건대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은 을사이래(乙巳以來) 쌓여나려온 선열의 피의 격
발됨이오 오늘날 이 성전(盛典)은 사미이래 쌓여나려온 선열의 피로 장식됨이니 우리 민족
의 방래(方來)의 광명과 행복과 훈업의 어노 무엇이 선열의 열이 아닌 바 있으리까. 순국이
라는 말을 지난 세월에 흔히 써왔으나 순은 도사(徒死)의 의(義)라 을사, 경술 대변란과 생
을 한가지 아니하신 열적(烈蹟)으로부터 사미운동의 제선열최근(諸先烈最近)에 미치기까지
「위국사신(爲國捨身)」하신 여러분의 일을 종합하건대 모다 광복일로(光復一路)로 분류하
는 상속적대파(相續的大波)이니 어찌 순으로써 일컬음에 그칠 바이레까. 하물며 오늘에 있
어서레까. 그러나 우리 선열을 추념함에 있어 향을 피어 분욱(芬郁)을 상승(上升)케 하는
것으로 한다 하오리까. 노래를 불러 음향이 사철(四徹)케 하는 것으로 하오리까. 종종(種
種)의 의식 종종의 행사 이만하면 이날의 유감이 없다 하오리까.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야
는 일절을 바리는 이 일단구정신(一段俱精神)이 각개의 뇌리에 과연 어떻게 되어 가지고 있
는가를 각개 스사로 돌아보아 여기에 대하야 무됨이 없도록 여□이 없도록 거듭나아가 이를
더 진발(振發)하도록 하는 노력이 꽃향이오 노래오 의식이오 행사인을 아나이다. 우리 아모
리 연생(緣生)하는 사념이 있다한들 선열유혈(先烈流血)의 과거를 생각할 때 국가민족이외
어느 집착이 노화(爐火) 속 일모(一毛)가 되지 아니하레까. 뜻 앞에 어려움이 없음을 선열
은 자신으로 보이셨나이다. 의로 나가는 길에 가로막을 무엇이 없음을 선열은 두렷하게 나
타내셨나이다. 우리 선열의 과거를 추념함과 아울러 그 지사를 이어받어 나갈 것을 다 함께
맹서하고자 하나이다.
蛇陵傳說辨正
- 정인보 書 -
新羅 始祖 五陵을 蛇陵이라 부르고 또 五陵이라 부른다. 여기 對한 瀆慢하고 또 悖妄한 傳
承하여 오는 한 傳說이 있다. 우선 「三國遺事」卷一 新羅始祖赫居世王條에“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軆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라 한 것을 비롯하여 「輿地勝覽」 二十一卷과 「東京雜記」 一
陵墓條에 모두 “赫居世陵, 在曇嚴寺傍, 官禁田柴, 世傳王升天, 七日後, 五體散落于地, 國
人欲合而葬, 因蛇妖, 名葬之, 遂號五陵, 亦云蛇陵”이라 하였다. 慶州 무당에게 들으니 始
祖王은 낮이면 人間 공사를 하시고, 밤이면 天上 공사를 하시던 어른인데 나중은 하늘의 罰
을 받아 머리와 四肢가 따로 떨어져 내렸다 한다. 記籍의 傳錄됨이 저러한 것을 보면, 村閭
巫婆의 무식한 傳會야 새삼스럽게 議論할 것도 없지 아니한가. 始祖는 聖王이시라 “光明理
世”의 大德으로 新羅 를 처음 열어 이제껏 衆庶의 欽崇이 衰하지 아니하였다. 이같은 聖王
으로서 貴體는 分裂의 慘을 免치 못하고, 國家의 大葬이 蛇妖로써 苟且하였다 할진대 이 어
찌 우호로 聖王을 汚鱴하고 아래로 大邦을 厚誣함이 아니랴. 考徵으로써 辨正됨을 기다릴
것 없이 좀 識見 있는 사람은 누구나 傳錄 傳說의 종작 없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妄說 謬錄이 서로 表裏되어 傳沿한 지 오래니, 民疑를 洞劈하기 爲하여 도리어 區區한 줄을
알면서도 考徵으로써 이를 깨치고자 한다.
記錄의 謬悖함은 「遺事」, 「勝覽」, 「雜記」의 三書가 다 一轍이라 할 것이나, 그 중에
도 「遺事」ㅣ 먼저이매 「遺事」의 謬ㅣ 가장임을 標出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遺事」는
二書에 比하여 初本인 만큼 얼마쯤 謬說 속에도 正體가 섞이어 그의 謬됨을 容易하게 辨別
할 수 있나니, 謬로서 먼저이매 그 謬說의 責咎ㅣ 크니만큼 謬로도 먼저인지라 오히려 後說
보다는 正體를 考按할 만한 것이 있음은 幸이다. 그러나 이만큼 正體聞見하는 近古한 때에
있어 가지고 謬說을 推助하는데 그침이 더한층 책망할 만한 것이 아니랴. 「遺事」부터 檢
討해 보면 우선 “王升于天”이라는 것은, 그대로 새기면 王이 하늘에 올라갔다 할 것이나
이는 文章의 溢辭로 帝王의 崩殂를 崇嚴하게 記錄하려 한 것이니「尙書」 舜典에“五十載,
陟方乃死”의 陟이 무엇이냐. 升과 같이 오름을 이름이요, 오르면 어디로 갈 것인가, 곧 하
늘로 올랐다는 말이다. 「竹書」紀年을 보면 帝王의 돌아감을 다 “陟”이라 하여 舜典과
交徵되며, 「莊子」에 華封人이 堯를 頌祝함을 記錄한 것이 있는데, “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于帝鄕”이라 한 것은 “陟”에 對한 彩色 넣은 鋪張이라 할 것이라. 이 뒤에
帝王의 崩御를 升遐라, 登遐라, 禮陟이라 하여 이제 와 新奇할 것도 없는 典語가 된 것이니
升天은 곧 “陟”이라, 곧 升遐의 義며 곧 登遐의 義며 곧 禮陟의 義이다. 과연 저 蕩蕩한
蒼穹으로 冉冉히 올라간 것으로 볼진대, 떨어지지 아니한 歷代帝王은 陵墓ㅣ 모두 虛封일지
라, 이 어찌 우습지 아니하냐. “七日後, 遺體散落于地”라 한 것을 다시 考案하여 보자.
“七日後”라는 것이 怪常하다. 그러나 이것은 따로 按說이 있을 터이므로 아직 머물러 두
고, “遺體散落于地”라 함은 聖王은 가시고 遺體만 人間에 남아 계시다 함이니, 「尙書」
舜典에 堯의 崩御를 쓰되 “二十有八載, 帝乃殂落”이라 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殂는 徂往
의 義로 갔다는 말이니 곧 陟과 같은 것이요, 落은 遺下의 義로 처졌다는 말이니 곧 陟에
對한 相反語이라, 集傳 에 이를 解하되 “殂落, O也, 死者, 魂氣歸于天, 故曰升, 體魄歸于
地, 故曰落”이라 한 것이 여기 對한 正義로 볼 것이다.
그런즉 “王升于天”은 곧 殂요 “遺體散落于地”는 곧 落이다. 그런데 落만이 아니라 散은
疑端이 있는 글자이니 “七日後”에 對한 解釋뿐 아니라 “散”에 對한 辨誤가 다시 있어야
할 것이다. “七日後 遺體散落于地”라 한 것을 이레 뒤에 大葬을 지나 彩眉 龍顔이 드디어
沈埋되었다 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陟”과 “落”이 서로 參差될 것이 아니라, 陟하
매 곧 落함이 있을지니 陟으로부터 落까지에 七日의 時間을 끼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다
음으로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 爲五陵”이라 한 것을 究覈하
여 보면, “后亦云亡”이라 한 것이 “七日後”에 붙는 말이됨과 “遺體散落于地”라 한 것
이 “王升于天”의 밑에 바싹 닿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安順庵 「東史綱目」 第一에 赫
居世 殂落을 쓴 것이 있는데 “三月, 斯盧居斯于赫居世卒, 越七日, 妃閼英卒”이라 한 것이
大意를 얻었다 할 것이다. 國人이 合하여 葬코자 하였다 함은 “后亦云亡”의 句와 相關되
는 것이라 異說을 붙일 배 아니거늘 오직 散落의 “散”字ㅣ 종작 없이 끼인 까닭으로
“合”이 이 “散”에 對한 對辭로 錯誤된 것 이니, 이제 이를 校正하여 “王升于天, 遺體
落于地, 七日後, 妃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라 써 놓고 보면, 浮說이 스스로 없어질 것이
다. “有大蛇逐禁, 各葬五體”라는 悖說이 저 “散”字의 感徑으로 좇아 芽生한 것이다. 閼
英聖妃의 陵所, 傳錄되지 아니하였으나 同園에 各葬하였음을 이 傳錄 속에서 髣髴히 推想할
수 있나니 “合”이 始祖 玉體의 散裂을 對하여 말함이 아닐진대 后와의 “合”을 이름이
요, 또 各葬이 玉體의 散裂로서 各葬함이 아닌 바에는 各葬은 后와의 各葬일 것이다. 이제
蛇陵의 陵墓를 보매 封壟이 다섯임은 分明하고, 五封이 두렷한 것을 보면 五數의 封만으로
도 저 散落과 各葬을 證할 수 있다 할 듯도 하나 이 도리어 辨正에 對한 確證이 되나니
「三國史記」를 보면 “南解次次雄 二十一年에 王이 薨하여 葬蛇陵園內”라 하였고, 또
“儒理尼師今 三十四年 冬十月에 王이 薨하여 葬蛇陵園內”라 하였고, 또 “婆娑尼師今 三
十三年 冬十月에 王이 薨하여 葬蛇陵園內”라 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園內 三陵에 한 분은 南解, 한 분은 儒理, 한 분은 婆娑이신 것이 두렷하지
아니하냐. 이만으로도 始祖王 五體가 裂散되어 合葬치 못하고 各葬하여 五陵이 되었다는 瞽
說이 깨어지지 아니하는가. 그러면 또 記錄 없는 한 陵은 누구실까. 閼英聖妃 처음 이 園內
에 各葬하신 것이니 「遺事」의 合字, 各字가 糢糊한 대로 얼마쯤 留證으로 傳하는 것이다.
그런즉 五陵은 始祖王·閼英妃·南解·儒理·婆娑의 四世五位의 珠襦 玉匣의 永奠하온 곳이
라, 이에다 다시 淬厲를 加하여 重論하여 보자. 五陵이 四世五位이시니 始祖王의 遺體 散落
하여 各葬하였다 함이 무엇을 依據함이냐. 여기에 依據ㅣ 없을진대 容易히 正體를 考見할
수 있나니, “王升于天”은 神魂의 升登하심이요, “遺體散落于地”는 體魄만을 遺留하심이
니 合하여 殂落의 義요, 七日後에 后도 薨逝하시매 合葬할 것인데 各葬하였으므로 怪說이
이에 釀出된 것이다. 그러나 “大蛇逐禁”의 解와 陵名蛇陵의 所以 마땅히 出處ㅣ 있을 것
이니 이까지에 窮覈함이 있어야 비로소 蛇陵傳說의 辨正이 完了될 것이다. 다시 檢覈을 이
에 돌리고자 한다.“大蛇逐禁, 各葬五體, 爲五陵”이라는 것은 五陵에 對한 考據ㅣ 저러한
뒤 저절로 辨破될 것이나, 陵名을 蛇陵이라 함은 「三國史記」에도 記載되었고 오늘까지 傳
承하여 왔으니, 대개 蛇와 五陵에 關한 무슨 因綠이 있음을 爬梳하여 보지 아니할 수 없다.
地稱人名이 古今의 轉變이 無數하니, 俗談의 傳하는 것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것이다. 古代
우리의 稱謂로 轉變함은 約三層으로 나눌 수 있나니 最初本邦의 口稱, 다음으로 漢字의 移
寫, 그 다음으로 다시 漢字의 音이나 或 그 義에 붙이어 생기는 謬辭인데 이 三中에 가장
迷亂한 때를 가리키자면 第三層이 곧 그 時期라 할 것이니 “峯”이 “수리”로, “西鳶”
이 “西수리”라 함은 前에도 말하였거니와 “西鳶”의 “鳶”을 鳥類의 鳶으로만 보아 가
지고 「三國遺事」 第五 “感通” 第十七 仙桃聖母隨喜佛事條에“神母, 本中國帝室之女, 名
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 飛
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이라 한 것이 곧 第三期의 誤謬에 該當한 것이다.
“수리”를 “述爾” 或 “述”로 쓰는 것이 一期로 二期에 온 것인데 “述爾” 或 “述”
의 音으로부터 “鳶”에 이르러 가지고, “鳶”이 된 本根은 내어 버리고 빙빙 도는 “소리
개”로만 잡아서 이에서 傳會가 생기니, 이는 漢字로 좇아 생기는 流誤이다. 支那로 말하더
라도 下馬陵이 蝦蟇陵(國史補)이 됨과 杜拾遺가 杜十姊(黃氏日鈔) 됨이 모두 流傳에서 그릇
된 것이나, 本邦語로 漢字로 또 漢字로 좇아 생기는 變轉으로 이같이 眩幻多端한 우리 古昔
과는 비길 수 없다. 대개 五陵의 稱號가 먼점이요, 蛇陵은 後出한 更讀寫音인가 하니, 五陵
을 音讀하면 “오능”인데 五의 音이 古音으로는 “오”이니 “고”와 混雜하기 가장 쉬운
것이며 “능”이 “릉”으로 變하기 또 쉬우니 “五陵年少”를 “오릉연소”로 읽는 것이
恒例이다. 그런즉 이 陵園에 五陵이 계시매 本朝의 東九陵, 西五陵이라 부르는 셈으로 五陵
이라 불러 오다가 “오”가 “고”로 變하고 “능”이 “릉”으로 바뀌어 村閭의 訛傳으로
“구렁” 곧 “”蛇“로 부른지도 年代 久遠하였을 줄 안다. 鵄述의 述에다가 附贅로 嶺을
붙이고 西述의 述에다가 懸瘻으로 山을 붙이듯이 ”구렁 “에다가 다시 ”陵“을 붙여 한번
또 漢字만을 바꾸어 쓰니 蛇陵이 곧 이에 생긴 稱號인 줄 안다. 陵名이 이같이 구르매 各葬
에 妖怪說이 생기고, 또 다시 散裂 分墜의 怪度妖測이 붙어 墟巫, 野覡, 井娘, 田婆의 무식
한 이야기가 釋子의 好奇心과 護怪念을 만나 古都의 古寔같이 傳하매, 儒士ㅣ 이를 辨正치
아니하고 文家ㅣ이를 材料로만 여기어 三傳하매 드디어 市虎를 만들고 말았다. 蛇를 구렁이
라 함은 지금도 하는 말이어니와, 古語로 微跡이 있으니 稷山古號가 蛇山인데 蛇山은 本 百
濟 慰禮城이니 慰禮城이 구레재 의 更讀寫音으로 곧 蛇山이며, 다시 뱀재 로 굴러 稷의 訓
이 피 임을 빌어 피 , 비 의 互轉으로 稷山이 된 것이니, 이로써 보아도 五陵의 音이 구렁
으로 變하여 蛇陵되는 徑塗를 짐작할 수 있다. 安康縣은 지금 安康里附近이다. 여기 興德王
陵이 있는데, 「東京雜記」 陵墓條에 俗號獐陵이라 하였다. 璋은 “노리 ”이니 安康의 鎭
山인 “於乙於”가 “느리”의 音을 가진 것으로, 璋陵이 이 山麓에 있으매 어느 時節에든
지 山名이 陵稱에 混同된 것이다. 이것도 始祖王의 蛇陵과 한 照映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大蛇逐禁, 各葬五體라 한 것은 蛇陵으로 記寫하게 된 뒤니 이에 傳會로 傳說의 煙雲
이 저렇듯이 일어난 것이나, 史籍과 封墓ㅣ 五陵에 對한 分體各葬의 謬說을 證키에 足할 뿐
아니라 語音으로부터 생기는 地名의 轉誤ㅣ 당치 아니한 物名을 猥附케 됨이 이 한 군데만
이 아니니, 智者를 기다릴 것 없이 辨正할 수 있는 바이다.
閑山島制勝堂碑文
정인보 書 -
전면
이충무공 계시던 제승당의터다
후면
이충무공이 「세도」「수군」을 「통제」하실ᄯᅢ 뭍에 오르면 여긔계섯다 헐어지고 다시세고
몃번이라 바로 그집은 아니나 누구나 눈속 마음가운데 「제승당」이 희미하여진적이 업음으
로 삼백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계실제 그곳을 그대로 그리어나려왓다 「비」에삭여 전한바도
잇거니와 「비」아니라도 두렷하다 거의부서지던 나라를 혼자 붓드시니 이충무공은 한민족
의목숨이섯다 해상작전을 지휘하시던데가 여긔요 적을 지치어 큰공을 세운이들을 상주시던
데가 여긔요 밤이 새도록 걱정으로 못주무시던데가 여긔다 저 퍼런바다나 멀고 갓가운 섬과
산이나 다 그ᄯᅢ의그것이요 오고 가는 「해오리」까지라도 그ᄯᅢ에 보시던것과 달르지아니하
려니 여긔서 이충무공을 생각하라 친히 뵈압는듯도 하니라
그동안 이ᄯᅡᆼ이 욕속에 잇은지 사십년이 넘엇다 그ᄯᅢ 적을 물리치시던 매운긔운이 은연한속
에 우리나라를 버틔신지라 옛강토가 차례로 우리손에 도라오게 되였다 ᄭᅵ치신바 이러하시니
잠시 「배」그림자가 시치였던 물가의나무가 잇다할지라도 맛당히 밧들어 직히려든 이「제
승당」은 중하기 저러하니 「비」하나만에 부족하야 다시 이돌을 사기는것도 그러할바요 ᄯᅩ
「중소학학도」들이 힘을 모아 이 일을 하니 알음이 계시면 긔특다하실만하다
알라 터도 터이려니와 이충무공의마음을 직히라 차저노흐신 삼천리를 하로밧비 한덩어리를
만들어야할것을 우리도 산 바다에 「맹서」하자
민족적수치/ 채무에 시달린 충무공묘소
- 정인보 書 / <동아일보> 1931. 5. 14 -
일
우리들의 역사의 기록면에서 그 인격으로나 그 사적으로나 충무공 이순신의 위를 갈 사람이
얼마 없으리라. 그의 위토와 묘소가 경매를 당하게 된다니 이런 변이 또 있으랴. 이런 민족
적 치욕이 더 있으랴.
세상에서는 민족적 선열위인을 위하여는 비각(碑閣)을 지으며 동상을 세우며 혹은 기념박물
관이 있고 혹은 기념도서실을 두며 그의 출생한 모옥 그의 손이 닿은 일수일석(一樹一石)이
라도 표 지르고 보호하여 후세의 자손으로 하여금 백대천대까지라도 그들을 흠모하여 민족
적 자부심을 기르며 그들을 추앙하여 민족적 향상심을 분발케 한다. 불란서의 판테온이 있
고 영국의 웨스터민스터가 있음이 가히 소이래(所以來)를 알 것이다. 민족적 자부심이 없는
민족이 어찌 퇴패(退敗)를 면할 것이며 민족적 향상의 목표가 없이 어찌 단결진취의 민족적
노력이 있을 것이냐.
이
이충무공의 인물과 사적은 노노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아는 바다. 국난에 임하여 척수고진
(隻手孤陣)으로 민토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출했으니 민족적 은인이오, 포폄에 초월하고 진
하나 퇴하나 오직 대의를 위해 했으니 민족의 의범이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발
명했으니 민족문화의 선구라 할 것이다. 만일 조선인이 조선의 정신을 제대로 가지고 왔다
고 하면 그의 비각도 있어야 했을 것이오 그의 동상도 곳곳이 섰을 것이며 그의 기념관, 그
의 도서실, 그의 박물관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없다 할망정 그의 위토와 묘소가 채귀의
손으로 전전한다 하니 수치람도 한 걸음 넘어서 민족적 범죄라고 할 것이 아니냐.
나옹이니 화옹(華翁)이니 하고 이국의 위인을 숭양할 줄 알되 자가(自家)의 위인을 모르든
그 시대는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선을 찾자"는 부르짖음이 벌써부터 잦은 이때에도
을지문덕의 묘소가 평토화해서 그 자취를 찾기 어렵되 우리 손이 한줌 흙도 옮기지 못하더
니 이제 또 이순신의 사당에 표지가 붙게 맨들었다.
삼
우리는 과연 누구를 책하랴. 굶고 헐벗는 한이 있더라도 묘소를 수호하는 그 위토를 사수하
지 못한 그의 자손일족의 무엄함을 엄책할 것은 무론이어니와 일방으로 채권자인 금융업자
에게 대하여서도 그도 또한 조선민족의 일기관(一機關)이며 일분자(一分子)인 이상 과연 채
권채무의 법적관계로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또는 민족적 체면과 양심을 고려하여 써
선처할 방법이 없을 것인가 우리는 먼저 그보다도 민족적 이상이 결여하고 민족적 정열이
냉각되고 민족적 자부심이 마비된 조선의 사회를 스스로 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설워한
다.
수치를 수치로 아는 자에게는 이러한 붓대를 들기조차 손이 떨리고 얼굴에 모닥불을 붓는
듯하다. 그러하나 이를 널리 사회에 알리어 그 책임감에 호소함이 이때의 의무로 생각하매
붓을 아니 들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충무공의 분묘를 위함 뿐이랴. 이것을 계대기(契大機)
로 하여 우리는 일층 민족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길질할 필요가 있다.
* 아산 현충사 아래 서쪽편에 위치한 구본전.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사당 건물로 현충사를 성역화하면
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구본전은 1704년 이충무공의 공덕을 길이 받들고저 아산 지방 선비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32년(1707)에 서원 형식의 사당을 세웠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최초의 현충사 사당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종손(13대
종손 李種玉)의 가산이 쇠진하여 채무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일은행 호서은행의 경매에 따
라 충무공 묘소 임야와 위토(位土)마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지경에 이르러 이 소식이 1931년
5월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뜻 있는 인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 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화백이 그린 영정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하
였으며 아울러 현충사 사적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66년 4월 현충사 성역화사업으로 새
로이 본전이 신축되자 한동안 배전(拜殿)으로 사용하다가 1968년 9월 9일에 유물관 옆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여기에 걸린 현충사 현판은 숙종이 내려준 것이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구본전의 주련은 위당 정인보가 현충사를 중건할 때 쓴 글이다.
一誓海山綱常於百代(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
천지를 구해냈으니 내세워 자랑함이 없었네
成人取義精忠光於檀聖(성인취의정충광어단성)
인을 이루고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이래 빛나고
補天欲日功德蓋於槿邦(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아산 현충사 구본전 주련(정인보)
https://cafe.daum.net/jangdalsoo/kOJO/177*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성격 :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
출신지 : 서울
저서(작품) :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담원시조집, 담원문록, 담원국학산고
대표관직(경력) : 동아일보 논설위원, 국학대학 학장, 대한민국 감찰위원장, 전 조선문필가협회 회장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 본관은 동래
(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 아
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정원
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
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
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
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
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
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
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
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
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가르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교수 생활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
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음 해 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
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
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왼쪽부터 이건방, 정인보, 이희종, 성완혁. 앞줄 오른쪽은 석전스님(1934년 금강산)
1933년 8월 초부터 두 달 동안 금강산일대를 여행하고 이것을「관동해산록」이란 제목으로『조선일
보』에 1933. 8. 3 〜 9. 7일치에 연재하였다. 옛적부터 금강산 기행문이 수천편이지만 위당의 작품
이 가히 일품이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
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
때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
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
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
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
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1936년 연희전
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
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변영로, 정인보, 김영랑
강진 시문학파 기념관의 시문학 제1호 표제비(중앙이 위당 정인보)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
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
究)』를 간행하였다. 정인보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는 하나 독
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
책으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
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
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한때나마 학문과 교육을 떠났던 심정을
달래고자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
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시문·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
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 정양모(위당의 막내아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동아일보](2000. 7. 18) -남몰래 나라사랑 실천한 분
나는 아버님에 대해 말씀드릴 주제가 되지 못한다. 그 어른은 누구나 우러러 존경하는 선비이시고 학
문이 드높고 깊고 넓으니 다만 아버님과 함께 했던 17년, 너무나 아쉽고 서럽고 애틋한 어릴 적 마음
의 한 자락을 적어 볼까 한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초까지 살았던 서울 내수동 집은 18칸쯤 되는 집이고, 열세 식구가 함께 살았지
만 사랑채 안채가 있고 귀에 사당채가 있었다. 아버님은 늘 사랑에서 책을 읽으시거나 혹 손님과 담
소를 나누시고 안에 드나드시는 일이 드물었다. 사랑방에는 천장까지 책으로 그득하였고 아랫목에는
자그마한 서안(書案)과 연상(硯床)이 있고 한쪽으로 문갑이 보였다.
2차 대전이 차츰 격화되자 창동으로 이사했고 사랑에는 언제나처럼 아랫목에 요가 깔려있고 머리맡에
는 약 봉지와 약병이 있었다. 밖에 누가 오는 인기척이 있어 낯선 사람이면 이불을 덥고 누우셨다.
방안에 매화 두세 분을 키우셨는데, 이른 봄 매화 몇 송이가 피면 “얘야 매화 향기 나느냐?” 가만
가만 물으시던 모습이 선하다.
밤에는 고하 송진우 선생댁에 자주 가시고 벽초 홍명희와 가인 김병로 선생도 만나셨다. 전쟁은 더
격화되고 왜인들이 애국자사를 암살하려 한다는 급한 전갈이 있자 윤석오 선생이 일제의 핍박을 각오
하고 아버님을 은밀히 익산으로 모셔 우리는 산중에서 살았다.
1945년 일제가 항복하고 서울로 돌아가야 했지만 서울에 집 한칸이 없어 익산에 그대로 머물다가 아
버님은 먼저 서울로 떠나셨다. 흑석동에 적산 가옥 하나를 임대해서 광복 후 1년이 다 되어 이사를
했고, 다시 남산동 적산가옥으로 이사했다.
남산동에 오셔선 “참 좋다. 감개무량하다”하셨다. 남산동은 정씨네 대소가가 함께 살았으며 아버님
도 이곳에서 자라셨다고 한다. 혼자 사랑에 계실 때 마루를 지나면 글 읽으시는 맑고 낭랑한 음성과
운율의 흐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지금도 내 가슴에 그득하다.
밖에서는 아버님이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그분의 말씀 한 마디가 추상같다고 하였다. 집안에서도 부
모에 효도하고 형제 우애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며 거짓 없이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셨
다. 나이가 들수록 그 어른이 사람의 도리를 지킴에는 엄격하셨지만, 다정다감하고 애정이 넘치는 분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산동 집에서는 중학생인데도 내 뺨에 당신 턱을 비비시며 “따가우냐?”하시기도 하고, “업어보
자, 걸음마, 씩씩하다”하시던 아버님이셨다.
아버님은 국문학, 국어학, 국사, 동양사, 한국사상, 동양사상, 한문학, 불경 등 국학 전반에 걸쳐 누
구도 따를 수 없는 나라의 큰 스승이라고 들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
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분명한 목표와 주관을 갖고 평생을 아무도 모르게 나라사랑을 실천하신 점일
것이다.
평생 나라와 겨레 사랑을 실천하시고 국학 진흥에 바치셨건만 1950년 북한군에 비참하게 끌려가시다
함경도 어디에선가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30만∼40만 명의 모든 강제 납북자 가족과 함께 바람 편에라도 안부 한 자 들을 수 없는 이 기막힌
서러움을 어찌하리오. 혹이 다음에 내 생명이 붙어 있는 날, 북쪽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는 아버님
묘소에 엎드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다.
* 아들 '정양모'의 인터뷰에서>
"남산동에서 6.25를 만난거에요. 거기에서 6.25를 맞았는데 우리는 모르고 비행기가 왔다갔다 하니까
국군 비행기인줄 알고 봤더니 인민군 비행기더라고요. 28일 오후 3시에 수상한 놈이 셋이 왔어요. 여
자 하나에 남자 둘. 자기는 북한 정치보위부 특수공작대인데 선생 댁이 넓어서 좀 써야되겠다고. 우
리는 군대 따라 내려온 것이 아니고 포항으로 왔대요. 그러니까 납북자로 잡아갈 사람 다 체크해서
그렇게 내려온 거에요.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고 며칠 후에 매부가 찾아왔어요. 인천 형무소를 탈출해
서 왔는데 사람 눈에 살기가 돌더라고요. 그러더니 아버님께 큰절을 드리고 하는 얘기가 "장인은 우
리 인민 정부에 협력하셔야 됩니다.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것은 존경합니다." 그러더니 "그렇지만 우
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는 것은 반동입니다." 그러셨어요.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인민군들이 총
을 들고 1개 소대가 집으로 왔어요. 그래서 (우리보고) 나가라고. 그런데 나갈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 가방, 책, 중요한 것 몇 가지하고 아버지 옷가지만 챙겨서 나오셨어요. 그리고 어머
니는 (근처에서) 동생과 내내 아버지 간호하고 그런데 피고름이 너무 낭자하니까 아버지 옷을 챙겨드
리려고(나가신 사이에) 그새에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어디로 모셔갔냐하면 옛날 국립도서관, 그 지
하로 잡아갔어요. 그러더니 잠깐 내무서까지 가자고 하더래요. 그리고 그리고 가더니 고만이에요.“
* 정인보 사망 소식
‘횡설수설’: [동아일보](1974.10.15)
위당 정인보 선생의 별세가 이번에 밝혀졌다. 6ㆍ25전란 중 평북에 있는 희천(熙川) 땅에서 폭격을
맞아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얼을 심은 희대의 국학자였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론을 제기치 못할 것이다. 그는 조년
(早年)에 가정 학문으로 한학의 깊은 조예를 터득했고, 또 민족의 실의기(失意期)에는 민족의 나아갈
바와 선열들의 지나간 자취를 들추어내는 데도 안간힘을 다했다. 그의 학문적인 유래는 강화학파(江
華學派)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왕양명(王陽明)의 ‘양지양능(良知良能)’이란 실천철
학에 경도(傾倒)한 것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중국의 풍조가 그랬고 또 종래의 정주학(程朱學)에 대한 염증이 있는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위당 역시 육왕학(陸王學)에 정력을 기울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학문적
인 소양을 배경삼아 붓을 한 번 휘두르면 명문장을 만들어냈고 또 한 번 붓을 들면 화조풍월(花鳥風
月)을 읊은 시편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이 중에서도 이 충무공을 받들고 정다산을 연구한 데는 남달
리 갖은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 왜정시인 1931년 이충무공의 종가 재산이 경매에 붙여지니까 그는 이
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단장의 글월을「동아 일보」에 실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돼 3천만의 거족적인 호응을 얻게 되고 허물어져 가는 현충사의 중수를 보게 됐다.
또 1935년 [동아일보]가 개최한 다산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그가 얼마만큼 그의 박학강
기(博學强記)와 그 열변을 털어놓았던가는 지금도 잊지 못할 화제로 남아 있다. 요컨대 위당은 신구
사조의 과도기에 있어 교량의 역할을 다하는 데 그 사명이 있었는지도 모른다.(하략)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절의(節義)·실학·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
였고, 국혼(國魂)·경세(警世)·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
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薝園時調集)』·『담원문
록(薝園文錄)』·『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담원정인보전집(薝園鄭寅普全集)』
순국선열추념문 / 위당 정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