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년경 겸재 정선作 박연폭포(개인소장)
박연행(朴淵行)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동광> 제18호, 1931. 02. 01 -
其一
山허리 드믄 丹楓 聖居關이 저기로다
畵幅에 몸이 드니 꿈이란들 안좋으냐
運轉手 車몰지마소 내 興겨워 하노라
其二
한구비 도라들제 晴天風雨 急히 돌려
半空에 걸린 瀑布 눈에 벌써 어리인다
맘아니 바쁘리마는 곧 보일가 저어라
其三
四山*이 물러서니 성낸 물결 壯할시고
百五尺* 검은 石壁 한낮에도 陰森하다
쪽(藍)빛못 깊이 모르니 龍계신가* 하노라
* 金滄江 朴淵詩에 「四山都却立 一水忽飛來」
* 박연폭포의 길이가 105척이다
*「山간데 그늘이요 龍계신데 沼이로다」(崔都統 祠堂巫歌의 一節)
其四
狂風을 불어내고 되불리어 이리저리
어느덧 수정발(水晶簾)이 덩이덩이 눈(雪)이로다
골안에 때없는 안개 비나리듯 하여라
其五
槍들고 나리닷다 流蘇汗衫 어인 춤고
雷聲에 섞인 생황(笙簧) 드문드문이 옥경(玉磬)이라
만물초(萬物肖)* 어대라더뇨 나는옌가 하노라
* 外金剛의 奇峯. 한 폭포에 별별 氣象이 다 있고 별별 소리가 다 나니 이것이야말로 폭포로서 萬物
肖이다.
其六
亭子옆 좁은 산길 이진* 층대 몇 번돈고
어둑헌 홍예(虹蜺)*궁게(구멍) 드나들손 風葉이라
興亡이 數잇다 한들 情도 數를 알리까
* 이진 : 이지러진
* 홍예(虹蜺) : 城門門空의 彎圍를 이르는 말
*「興亡이 有數하니 滿月臺도 秋草로다」한 古時調를 인용한 것이다.
其七
絶景에 절로 취(醉)코 술집(酒家)에 거저앉아
성길사 나무그림 온 하늘이 물같고나
어즈버 달 아니신가 夜瀑구경 가리라
其八
달(月)이야 제높것만 瀑布어이 더 急한고
범사정(泛槎亭)* 올라서니 天上天下 물소리뿐
人間累 重하다한들 남을 무엇 잇으리
* 범사정(泛槎亭) : 박연폭포 앞에 있는 亭子
여수 옥천사(麗水玉泉祠)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지나는 나그네들 노래소리 문득 그쳐
거룩한 충무대감 사당여기 계시다네
그 당시 배 한 척 위에 나라 실렸더니라
십이애(十二哀)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1
불살러 날렸단들 님의 안을 가실것가
못 감은 눈이 남어 오늘 우리 보시려니
구름이 북(北)에서 오니 새로 느껴합내다
ᅳ 고(故)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先生을 생각하고
* 선생이 露領에서 돌아간 뒤 유언(遺言)대로 살라 날렸다
* 이상설[李相卨,1870.12.7.~1917.3.2.] :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고종
의 밀지(密旨)를 받아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골목도 눈에 선타 동막(東幕)길이 어느젠고
감추신 님의 한(恨)이 풀이 되여 우굿탄 말
사신이* 돌아오시니 가슴 막혀합내다
ᅳ 고(故) 완당(緩堂) 민영달(閔泳達)先生을 생각하고
* 사신이 : 생존하신 분
* 민영달[閔泳達,1859~?] : 한말의 문신. 갑오개혁 후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에 기용되었고, 을미사
변 후 사직했다. 일본정부가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절했다. 민족지 《동아일보》 창간을 위해, 5
천 원을 출자하였다.
3
글월은 몇 째랏다 속*공부로 절개 높아
계오셔 이제러면 온 의지가 되실 것을
웃음 띤 님의 신색이 눈물될 줄 알리오
ᅳ 고(故)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先生을 생각하고
* 선생은 양명학(陽明學)의 조예(造詣)가 깊었다
* 박은식[朴殷植,1859.9.30.~1925.11.1.] : 한말의 유학자·독립운동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
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
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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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히고 박힌 설움 금강석(金剛石)도 뚫을낫다
황포강(黃浦江)* 여윌 적이 어제런대 삼십삼년(三十三年)
넋 응당 오셨으련만 바라 아득 하고녀
ᅳ 고(故)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先生을 생각하고
* 내가 上海를 떠날 때 黃浦江 埠頭에서 나를 보냈다
* 신규식[申圭植,1879.1.13.~1922.9.25.] : 항일 독립운동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협회 등
에서 활동하였다.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도 가담하였다. 조국의 장래를 근심하여 단식하다 스
스로 목숨을 끊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
풍상(風霜)을 맞이라고 날 모르고 이 땅이네
설멍킨 학이러니 성이 나면 범이러니
이 소식 님 못드리고 어이 살가 합내다
ᅳ 고(故) 백은(白隱) 유진태(兪鎭泰)先生을 생각하고
* 고(故) 유진태(兪鎭泰) 선생을 생각하고
* 유진태[兪鎭泰,1872.1.5.~1942.4.27.] :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운동 단체인 조선교육회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교육제도 개선, 지방 순회강연 등 교육 계몽활동을 계획하는 한편,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일보 사장,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 고문 등을 지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
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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뼐망정* 일을 하자 유언(遺言) 아직 새로워라
온몸이 정성되어 머리 센 줄 모르서를
심으고 꽃 못 보시니 아니 울고 어이리
ᅳ 고(故)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先生을 생각하고
* 돌아간 뒤에 解剖하여 뼈를 生理標本으로 써달라고 한 것이 先生의 遺言이다.
* 이승훈[李昇薰,1864.3.25.~1930.5.9.] : 한국의 교육자·독립운동가. 신민회 발기에 참여했고, 오
산학교를 세웠다. 105인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동아
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7
두타산(頭陀山)* 한 구비에 굶고 말러 그냥 묻혀
지키신 그 일생(一生)이 적막(寂寞)할 손 광휘(光輝)로다
아우놈 외오 우는 줄 굽어 예뻐 하소서
ᅳ 고(故) 족형(族兄) 학산선생(學山先生)[寅杓]을 생각하고
* 두타산 : 진천(鎭川)의 산이름(선생의 선친 가족은 한일 합방후 한때 충청도 일대에 웅거하였다.)
8
다존듯 하신 속에 숨어 깊은 한쪽 마음
술이니 글 글씨니 바둑 두어 수 높으니
내게만 비취던 얼굴 두굿그려 합내다
ᅳ 고(故) 치제(恥齊) 이범세(李範世)先生을 생각하고
* 이범세[李範世,1874~?] : 대교(待敎), 홍문관부교리를 지낸 한말의 문인. 《국조보감》찬집·선
사·감인을 맡아 완수한 공으로 서훈4등 태극장을 받았다.
9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ᅳ 고(故) 용운당대사(龍雲堂大師)를 생각하고
* 한용운(韓龍雲, 1879.8.29.~1944.6.29.)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
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
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성북동 심우장에서 중풍병
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
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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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신 오늘 일을 오늘 되니 못 보서라
땅속이 깊다한들 님의 한과 어떠 하리
내 아니 목석(木石)이온가 남아 혼자 보고녀
ᅳ 고(故) 송거(松居) 이희종(李喜鐘)先生을 생각하고
* 이희종(李喜鐘) : 정인보의 맏딸 정정완의 시아버지. 즉 담원의 사돈. 정정완이 17세인 1917년 광
평대군 후손 이희종의 외아들 이규일(李揆一)과 혼인했다. 정정완은 1988.8.1. 침선장(針線匠)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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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도 예*것이면 버리고야 마시던 님
강산(江山)이 돌아오니 님은 벌써 추초(秋草)로다
고유할 아들 있은들 이 느낌을 어이료
ᅳ 고(故) 우당(愚堂) 유창환(兪昌煥)先生을 생각하고
* 예 : 왜(倭)
* 유창환[兪昌煥,1870~1935] : 조선 후기의 서예가. 문장에 뛰어났으며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
다. 글씨는 각체를 두루 썼으나 특히 초서에 능하여 이름을 날리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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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를 어찌간고 만리(萬里)뿐가 도산검수(刀山劒水)
옥(玉)도곤 귀한 선비 게서고만 흙이라니
안 헤져 다시 온단들 뉘라 긘줄 알리요
ᅳ 고(故) 김찬기(金燦基)君의 서보(逝報)를 듣고
* 김찬기(金燦基, 1915.05.05.~1945.10.10.) : 독립유공자, 진주고보 맹휴주도, 김창숙의 둘째 아들.
* 김창숙(金昌淑, 1879~1962] : 한국의 독립운동가, 민주운동가, 유학자, 정치인. 오늘날 성균관대학
교의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을 지낸 교육인. 광복 전에는 독립운동에, 미군정기에는 유림의 후예인 성
균관의 재건과 독립된 모국의 안정적인 수립에 힘썼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진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1952년 6월 이승만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체포되는 심산 김창숙.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머
리에 피가 심하게 났다.(국제구락부 사건)
1919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된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문호암 애사(文湖巖哀詞)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1
산같이 믿던 님을 바람같이 여의다니
이 말이 어인 말고 생시아냐 꿈이런가
인생을 거품이라자 꺼진 새는 언제니
2
엊그제 같습덴다 고하(古下)하고 같습덴다
잠잠깐 드셨다기 안 깨오고 왔습덴다
그 잠이 존 잠 아닐 줄 생각이나 했겠소
3
나보다 다섯 해 우 점잖기 일찍부터
상해서 처음 보긴 대신여관* 우일러니
진영사(陳英士)* 마중하던 날 같이 거나* 했것다
* 上海 大新旅館에서 처음 湖巖을 만났다.
* 중국 혁명위원 진기미(陳其美)의 字
* 상해에서 同濟社를 결성하고 진씨를 고문으로 추천하여 환영하는 연회에서 거나하게 취했다.
4
남 보매 겁 있는듯 불덩이를 품으셔라
인경전* 모퉁이서 그 글* 어이 읽었던고
별고생 다하셨건만 끝내 뻣뻣하시니
* 종각(鐘閣)
* 삼일선언 뒤 호암(湖巖)이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잡혀가서 징역까지 살았다.
5
붓대에 어린 구름 오천년이 뭉울뭉울
날 두고 님 가시니 향하려니 데가 없다
벗이란 어떠한 줄을 님 잃고야 알과라
6
막다른 깊은 골목 날 보려고 아침 저녁
비오는 어느 밤에 옷이 흠뻑 젖었겄다
고깃근 청어마리를 손조 들고 오시니*
* 牛肉 몇 斤 靑魚 몇 마리를 가끔 사들고 왔었다.
7
먼소식* 업박잡박* 같이 속을 끓이면서
언제나 헤질 적은 바랄 무엇 들췄더니
그날이 까마득한데 눈을 어찌 감은고
* 중일전쟁이 벌어진 뒤 전황(戰況)에 관한 기별이 퍽 궁금하였다
* 업박잡박 : “업치락뒤치락”의 평북 사투리
8
넋 잃고 뛰어가니 문 앞 벌써 뵐르구나
안팎에 울음소리 날 보더니 더 터진다
삼십년 알뜰한 정이 눈물될 줄 알리오
* 문일평(文一平, 1888-1936)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역사학자, 언론인.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일평(一平), 호는 호암(湖巖). 193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로 정치·외교·문화·사적·자
연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사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민족혼을 고취시켰으며, 역사의
대중화와 민중계몽에 기여했다.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아오야마 학원, 세이소쿠 학교, 메이지
학원 등에서 공부했다. 1908년 평양 대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1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정
치학·역사학·문학을 공부했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대공화보라는 신문사에 입사했고, 병으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박은식,신규식,신채호와 박달학원을세워 교육사업에 힘썼다. 귀국후 <조선일보>,
<중외일보>에서 활동했고, 1933년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이 되면서 신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
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문일평은 3월 8일 오후 안동교회의 김백원(金百源) 목사를 만나 독
립 문제에 관해 논의한 뒤 기미독립선언서의 후속으로서 또 하나의 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3월 11
일 오전 작성된 문서를 김백원에게 보낸 문일평은 3월 12일 오전 서린동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김백
원 목사, 승동교회의 차상진(車相晋) 목사, 조형균(趙衡均), 문성호, 김극선, 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논의했다. 3월 23일 오후 문일평은 '김백원과 차상진 등 12인'의 애원서(哀願書)를 발표했다.
이후 문일평은 조선총독부에 애원서를 제출한 뒤 보신각에서 2~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애원서를 낭
독하고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8월 30일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
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동 혐의로 징역 8개월
형(미결 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이튿날인 7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복역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독립선언서' 대신 '애원서'라는 제목을 달아 체포된 뒤에 처벌 수위를 예상해 보신
의 방편으로 그 같은 용어를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1939년 4월 3일 문일평은 경기도 경성부 내수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에서 지병이던 급성단독(急性丹毒)이 재발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글은 1939년 유고집 형태로 암사화집(湖岩史話集)과 호암전집 3권, 1940년에 소년역사독본(少年
歷史讀本)으로 발간됐다.
*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일제강점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교육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아명은 정경업(鄭經業), 호는 경시(京施), 위당(爲堂), 담원(薝園)이다.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이며, 1893년 5월 6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종현계 종현
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에서 정3품 이조참의를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와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나, 후손이 없던 큰아버지 정묵조(鄭默朝)에 입양되었다. 이후 경기도 경
성부 수창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청도 일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
념하였으며, 이때 정인보의 스승이 된 사람이 이건방인데, 그의 집안은 양명학을 대대로 연구한 가문
으로 정인보는 한학뿐 아니라 양명학적 사상까지 함께 받아들인다.[이는 1933년 <양명학연론>이라는
저서를 저술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하이와 한반도를 오
가다가 상하이에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교포에 대
한 계몽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귀국하여 국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
개하는 한편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한학, 역사학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 안재홍[6.25 전쟁 중 정인보와 함께 납북된다.] 등과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는데 식민사학
에 맞서 조선 내에도 근대적인 흐름이 있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민족사학운동 중에 일
본의 광개토대왕릉비 왜곡에 대해 반박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실학사상에서 근대적인 사고를 발견하려
했는데, 1935년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맞아 펴낸 <여유당전서>는 그 성과였다. 1935~1936년 동안 동
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 국사학, 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쳐 강의를 하였으며, 이때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숙신이 고
조선의 일부라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국학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족들과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국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946년 국학대학이 설립되자
학장에 취임한다.[국학대학은 1966년 우석대학교와 합병되며, 우석대학교는 1971년 고려대학교에 인
수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감찰위원장(오늘날 감사원장)에 임명되었으나, 이승
만의 측근인 임영신이 선거 중 저지른 비리를 적발해 파면을 요구하였다가 도리어 경질되었다. 1950
년 6.25 전쟁 때 서울에 고립되었다. 당시엔 등창으로 투병중이었는데 인민군 3명이 자택으로 찾아와
현재의 롯데백화점 본점 주차장 부지인 국립중앙도서관 지하실로 연행했다고 한다. 연행 직후인 그
해 7월 경 납북되었다.[그의 납북에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구였던 사학자 백남운이 관계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정인보는 순종이 죽자 그의 묘지문을 쓸 정도로 알아주는 한학자였던 덕분에 백남운이 고
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정인보의 덕을 많이 보았다. 전쟁이 터지자 친구의 신변 보호 겸 번역 노예로
쓰기 위해 납북에 관여했다는 얘기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 당시 지식인 계층들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추었다. 그러나 고서를 읽고 해독하는 것은 별개였고(현재 학생들이
정철의 사미인곡을 따로 주석과 사전을 동원해 해석해야하듯이) 그 시대에 통용되는 표현과 시대배
경, 문법 순서 등을 두루 꿰차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환단고기나 화랑세기, 격암유록 등 위서들 역
시 한자로 써있지만 근대에 쓰던 표현이 있고 우리 말을 한자로 옮긴 수준 밖에 안되었기에 금새 위
서임을 알 수 있었다.]
납북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한동안 밝혀지지 않다가, 1991년 10월 1일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
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이 공개되었
는데 이때 밝혀진 바에 의하면, 1950년 8월 중순 서울을 출발한 그는 당초 평양에 수용되었다가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 직전 적유령산맥을 넘다 대열에서 낙오되었고, 아사 직전에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그 뒤 뒤늦게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그 해 11월 말경에 병으로 별세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991.10.02. 납북인사 사망경위 처음 밝혀져) 북한 내에 조성된 재북인사릉의 묘비에는 그가 1950년
9월 7일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폭사했다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의 죽음을 미국 탓으로 돌리
려 북한측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므로 앞선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리고 1991년 11월 21일 국립서울현충
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100200239101002&editNo=1&printC
ount=1&publishDate=1991-10-02&officeId=00023&pageNo=1&printNo=21769&publishType=00010
▲ 평양 재북인사릉에 있는 위당의 무덤.
저서로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으며 주로 조선의 얼을 강조했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
었는데 장남 정연모(鄭淵謨), 차남 정상모(鄭尙謨), 3남 정흥모(鄭興謨), 4남 정양모(鄭良謨)[정양모
는 국립경주박물관 및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다. 호는 소불. 유홍준 교수의 스승이기도 했다.], 장
녀 정정완(鄭貞婉)[정정완은 침선장(전통 바느질 기법) 무형문화재였으며, 1986년 2월 6일자 KBS2
<11시에 만납시다>에서 자세한 생애를 확인할 수 있다.], 차녀 정경완(鄭庚婉)[정경완은 홍명희의 아
들인 홍기무와 결혼했으며 남북협상 때 시아버지인 홍명희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가 북한에 정착했
다.], 3녀 정양완(鄭良婉)[정양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했다. 정양완의 남편은 국어학자인 강신항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성추행으로 문제를
일으킨 강석진 전 서울대학교 교수가 큰아들이다.], 4녀 정평완(鄭平婉) 등이다.
5대 국경일 중 한글날을 제외한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노래의 노랫말을 작사하기도 했다.
한글날 노래는 예외적으로 외솔 최현배가 작사했다.[한편 국경일은 아니지만 국조일인 현충일을 기리
는 현충일 노래는 조지훈 시인이 지었다.] 그가 강의를 했었던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는 최현배의 호
를 딴 '외솔관'과 함께 정인보의 호를 딴 '위당관'이라는 건물이 있다.[최현배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연세대학교로 승격된 후 교수, 문과대학장을 거쳐 부총장까지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