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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전신첩, 청자…조선의 혼 지킨 간송

이름없는풀뿌리 2024. 5. 18. 08:08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전신첩, 청자…조선의 혼 지킨 간송

중앙선데이  입력 2024.05.18 00:04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

간송 전형필이 지켜낸 국보 문화재들.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단오날 여인네들의 시냇가 풍경이다. [사진 국가유산청]

‘간송미술관’의 간송(澗松)은 전형필(全鎣弼·1906~1962)의 호를 따 지은 이름이다.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유실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샅샅이 수집한 인물이다. 그는 경성 대부호 전명기(全命基)의 아들로 태어나 10만석 자산을 물려받은 상속권자였다. 그의 증조부 전계훈(全啓勳)은 정3품 무관직인 중군(中軍)을 지낸 관료였으나, 한양 배오개(현 종로4가 인의동)에 터를 잡은 뒤 조선 최고의 거리인 운종가, 즉 종로의 상권을 장악해 부를 일궜다. 현재 종로의 광장시장이 바로 전씨 집안이 활약했던 배오개시장의 역사를 이은 곳이다.

개츠비 “전형필 문화재 사랑에 감복”

전형필은 물려받은 전 재산을 일평생 문화재를 사 모으고 보호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이름난 골동과 질 높은 서화를 수집한 행적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난 뒤에도 그다지 대단한 일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문화재 수집과 보존 활동을 대부호의 호사 취미 정도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청자 ‘상감운학문매병’. [사진 국가유산청]

전형필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가문의 재산을 상속했다. 후사가 없던 작은아버지의 호적상 양자로 들어가 있어 작은댁의 재산도 모조리 물려받았고, 본댁에서는 형이 일찍 병사한 까닭에 아버지의 재산도 모두 상속받았다. 그 덕분에, 아버지보다도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전형필이 문화재 보호의 사명에 눈 뜬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당시 일본을 위시해 서양 열강은 조선의 문화재를 경쟁하듯 빼돌렸다.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 보존과 관리 실태에 분개한 전형필은 전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기로 마음먹는다. 일찍부터 골동과 서화에 대한 조선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던 위창 오세창(呉世昌)과 교유하며 문화재 관련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전형필은 오세창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전형필은 한국의 문화재 보호 역사에 있어 특히 주목을 요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골동을 수집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것을 보존하고 또 연구하는 일에까지 눈을 돌리고 길을 연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물건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열일을 마다않고 찾아갔다. 상대가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을 제시하고 골동을 사 모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의 서화를 되찾아 오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신윤복의 ‘혜원 전신첩’은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것을 끈질기게 설득해 엄청난 가격을 치르고 다시 사왔다. 영국의 유명 콜렉터 존 개츠비(John Gadsby)가 소유하고 있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수십 점을 기와집 수백 채 값을 주고 사온 적도 있다. 개츠비는 “전형필이 주체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진 부호이기만 했다면 그에게 유물을 팔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문화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에 감복했다”고 소감을 남겼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 국가유산청]

‘훈민정음 해례본’ 보존은 전형필 일생일대의 최고 업적으로 간주된다. 우리 민족의 최고 유산인 한글의 기원과 출발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해례본 원본은 당시까지 전해지지 않아, 많은 문화재 수장가와 학자들의 애를 태웠다. 훈민정음 본문에 해당하는 세종이 직접 지은 ‘예의(例義)’는 언해본으로나마 전해졌지만, 집현전 학자들이 집필했다는 ‘해례(解例)’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구나 낱장 일부가 아니라 온전한 책의 형태로 고스란히 수습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가치가 더 크다.

1940년 해례본이 경북 안동의 한 고가(古家)에서 출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장 그 소장자를 찾아 나섰다. 전형필이 해례본을 원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조선 최고의 갑부가 찾는다니 값은 천정부지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전형필의 배포와 품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해례본을 손에 넣을 때, 거간 노릇을 한 사람이 애초에 부른 값 천 원(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은 수고비로 따로 떼어주고, 원주인에게 그의 열 배에 해당하는 일만 원을 값으로 치렀다. 이후 전형필이 소장한 해례본은 ‘간송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고, 훗날 국보 제70호로 등재된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한국 최고의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전형필이 입수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직접 본 직후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나타남이여”라고 탄성을 질렀다. 더구나 전형필이 수집한 해례본은 낱장의 뒷면에 한글 창제 당시 학자들의 낙서와 메모가 남아있어 연구사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덕분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질 당시 상황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 해례본 본문을 통해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면, 뒷장의 메모들을 통해서는 훈민정음을 접한 지역의 사대부들이 한글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됐다.

‘간송본’ 국보·유네스코 세계유산 돼

전형필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 [연합뉴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한글 연구는 사법당국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꽃피운 결실이었다. 한글연구자들을 대거 구속해 처벌한 1942년의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가 저지른 우리 민족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진행된 한글 연구를 통해 말살돼 가던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문화적 긍지는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수집으로 한글 연구의 가장 큰 자산을 마련한 셈이니, 전형필이 당시 한글 연구에 기여한 바는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이 일평생에 걸쳐 아끼는 제일의 보물이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른 문화재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해례본만은 끝까지 몸 안에 지닌 채 피난에 나서 잠을 잘 때도 품고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신이 수집한 백자를 살펴보고 있는 생전의 간송. [중앙포토]

전형필은 어렵게 수집한 단원과 혜원의 서화는 물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그 가치와 의미를 알아보고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내줘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1938년에는 오세창의 자문을 얻어 성북동 북단장 내에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했다. 보화각은 ‘빛나는 보물을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으로 오세창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여기에 수장했던 석탑과 불상, 자기와 서화, 서책 등 상당수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로 등재돼 있다.

보화각 건립이 선구적으로 평가받는 까닭은 그 보존과 전시의 방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보화각은 예전 갑부들이 곳간에 재산을 모으듯 유물을 켜켜이 쌓아만 둔 것이 아니라, 서양의 근대 박물관처럼 체계적인 분류를 시도해 유물을 종류별 시대별로 구분해 열람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또한 전형필에게 보화각은 ‘죽은 유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 독립과 해방의 길로 나아갈 ‘조선인의 정신을 보존하고 갱신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역사적 유산을 귀하게 여기는 민족만이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전형필이 문화재 보호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던 일이 근대 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이었다. 1940년 동성재단을 만들어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를 겪던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한 보성고보를 인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어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보성중학까지 함께 인수하고 해방 직후에는 직접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조선어 교과목이 폐지된 식민지 시기 말, 간송이 운영한 보성중과 보성고는 우리 민족 교육의 마지막 보루였다.

1962년 전형필이 병마와 싸우다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손들과 후학들이 그의 뜻을 이어갔다. 간송이 사망한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1966년 이들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해 일평생 모았던 간송의 수집품을 정리하고 연구했다. 이때 보화각의 이름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했다. 그의 장남 전성우와 차남 전영우가 주도해 2013년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전형필의 업적과 유지를 기리는 사업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