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북경 천진 여행 ③천안문 광장 –
一黨의 하늘 아래 숨죽여 살아오다
일시에 터져버린 自由의 함성 물결
짓뭉갠 14억의 꿈 피어날 날 있을까?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북경 천진 여행 ③천안문 광장(1)
정양문과 전문대가를 지나
수백년된 회화나무 가로수를 지나 다다른 천안문.
정면의 마오쩌뚱 사진은 1년에 한번 바꿔단다하며
혁명의 나라같이 오성홍기가 펄럭인다.
右로는 중국국가박물관,
左로는 인민영웅기념비 뒤로 인민대회당,
뒤로는 방부처리된 중국인민만 방문 가능한 모주석기념당등으로
둘러쌓인 광장의 한복판에 서다.
(2)
총 면적이 44만㎡로,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 광장의 3배, 우리나라 여의도 공원 면적의 2배.
100만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중국 근현대사의 기원을 여는 핵심적인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1919년 신문화 운동인 5.4운동을 시작으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1966년 중국을 10년간 집단적 광기로 몰아 넣었던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집결,
그리고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1) 현재의 천안문광장
2) 1989년의 추억
3) 광장 우측 중국국가박물관
4) 광장 좌측 인민영웅기념비 뒤로 인민대회당
5) 뒤로 중국인민만 관람가능한 방부처리된 모택동 시신이 안치된 모주석기념당
6) 경산공원, 자금성, 정양문, 전문대가, 왕푸징의 위치도
* 천안문(天安門, Tiananmen Square)
중국 민주화의 상징, 천안문광장,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한 천안문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넓이
와 함께 최대 수용 인원을 자랑한다.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며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와 펄럭이는 오성홍기로, 북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로 손꼽히는
장소이다. 광장 중앙은 인민 영웅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 인민 영웅 기념비가 있으며 주위에는
인민대회당, 모주석 기념당, 중국 국가 박물관 등이 있다.
* 天安門事態
천안문 광장 앞에서 있었던 일련의 민주화 운동들을 말한다. 흔히 1차 천안문 사태라 불리는 1976년
천안문 사태와 2차 천안문 사태 혹은 천안문 항쟁으로 불리는 1989년의 천안문 6.4 항쟁이 유명하고
이중에서도 천안문 6.4 항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중국 공산당이 보병은 당연하고 전차, 인민해방
군 수송을 위한 트럭을 동원해 무고한 시민들을 깔아죽인 사건이 유명하다.
* 천안문(天安門, Tiananmen) 革命遗址及革命纪念建筑物, 北京市东城区前门大街天安门
1. 개요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东城区)에 있는 명/청대의 건축물로, 자금성을 감싸고 있는 황성의 남문이다.
자금성은 천안문 - 단문(端門) - 오문(午門)을 거쳐야 비로소 내부에 진입하게 되는 구조이며, 천안
문 바깥은 내성이, 또 그 주변을 외성이 두르고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
화국 건국 현장이었으며, 이후에 건설된 천안문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모주석기념당 등 여러 정치적
인 건축물이 주변에 건립되었다. 또한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표어, 중국 국장이 내걸려 있고 열병식이
바로 앞에서 거행되는 등 중국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2. 역사
2.1. 명나라
영락 15년 이었던 1417년 베이징 성을 건설하면서 만든 황성의 정문이었으며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
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앞 현재의 천안문 광장 자리는 어도(御道가 설치되었던 공간으로 내성
의 정남문인 정양문이 건너편에 있었으며 주변을 담장으로 둘러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
2.2. 청나라
승천문은 1644년 베이징에 쳐들어온 이자성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한
청나라의 순치제가 1645년 파괴된 승천문의 재건을 명령해 1651년 완공, 현재의 천안문이라는 이름으
로 바뀌었다.
2.3. 민국시대
어도(御道)로 인해 천안문 앞이 통제되었지만 300여년이 지난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가 멸망하여 들어선 국민당 정부가 국경절 14주년(1925년 10월 10일)을 기념하여 자금성을 고궁박물
관으로 만들면서 일반 대중에게 개방하였다.
2.4. 신중국 설립
이후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여러 차레의 내전끝에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위에 마오쩌둥과
여러인사들이 올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을 선포하는 장소가 되어 이곳은 현재까지 혁명유적지로 지
정되어 있고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행사가 열릴때면 공산당 고위층 인사들이 올라가는 장소이기도 한
다. 여담으로 천안문 성루는 평상시에는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천안
문광장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예약을 해야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이 무료인 것과 달리
천안문 성루는 입장료가 있다는 것이 차이점.
2.4.1. 구 천안문 해체보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손상된 천안문은 1969년에 완전히 해체한 뒤 단 200일 만에 새로 지어졌다.(…)
그것도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개건 및 보수에 들어간 자재는 모조리 빼내고 자재까지 전부 새것을
썼다. 빨리 조달할 수만 있다면 자재의 출처는 따지지 않아서,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원목도
잔뜩 사용했다. 심지어 함수율이 80%나 되는 축축한 목재를 말리지도 않고 그냥 사용해서 지었다는데,
신기하게도 아무튼 멀짱히 잘 서있다고 한다.
덤으로, 복원을 위해 조사해 보니 기존의 천안문에 사용된 목재 중 정말 저질 목재도 있고 심지어는
미국산 목재도 있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이 추정한 자재의 출처는 불탄 원명원이다. 말기에 접어들어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청나라 정부가 보수작업을 위해 주변에서 되는대로 목재를 구하다 보니 의화
단의 난 때 폐허가 된 원명원의 건물들을 재활용하여 썼을 것이라고. 게다가 여기저기에 의화단의 난
당시 연합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포탄과 총탄이 박혀 있고 알파벳이 새겨진 포탄까지 박혀 있었다고
한다.
3. 시대별 천안문의 모습
3.1. 청나라 말기
청나라 멸망 직전의 천안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3.2. 중화민국
중국 국민당이 대륙을 통치하던 시기엔 마오쩌둥 대신 장제스의 초상화가 더 크게 걸려 있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현재의 천안문 양 옆에 써 있는 표어가 없었다. 대신 천하위공(天下爲公)(오른쪽부터)
4글자가 걸려있던 적이 있었다.
3.2.1. 국공내전
1949년 인민해방군이 베이핑(北平)을 점령했을 당시의 모습으로 천안문 현판 밑에 마오쩌둥의 초상화
가 작게 걸려있다. 참고로 천안문의 현판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한동안 달려 있다가 1950
년대 초에 철거되고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이 달렸다.
3.3. 신중국 설립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에는 번체자로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 '중앙인
민정부만세(中央人民政府萬歲)'라는 표어로 걸려 있었다.
다음 해인 1950년에 현재의 표어로,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또한
표어가 '중앙인민정부만세'에서 '세계인민대단결만세'로 바뀌었다. 1956년부터 왼쪽 표어의 '萬'과
오른쪽 표어의 '團'과 '萬'이 간화자로 바뀌는 과도기를 거치다가[9] 1964년부터는 간체자로 완전히
바뀌었다. 또 1970년에는 목제에서 금속제로 바뀌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장례식 때는 단 하루였지만
마오쩌둥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가 마오쩌둥 초상화를 대신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광장
서쪽에 레닌과 스탈린, 동쪽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형 초상화가 항상 있었으나 1989년부터 철거되
었다. 천안문 중앙에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양 옆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华人民共和国万
岁)', '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团结万岁)'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
로, 매년 5월 1일과 10월 1일에는 마오쩌둥 초상화 정반대편에 쑨원의 초상화가 설치된다. 중국무경
이 24시간 3교대로 천안문과 인근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1976년에 천안문 광장으로 모인 중국 인민들과 유명한 탱크맨
천안문 사태 /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