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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천진 여행 ④자금성 오문(24/04/21)

이름없는풀뿌리 2024. 5. 4. 04:15
요즈음 – 북경 천진 여행 ④자금성 오문 – 끝없이 몰려오는 관광객 넘쳐나는 오문 앞 광장에는 그 때도 지금처럼 세계의 온갖 物産들 밀려들고 있었겠지.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북경 천진 여행 ④자금성 오문 (1) 천안문과 단문을 지나 수백년된 회화나무 가로수를 지나 다다른 자금성 오문. 2008년 찾았던 그 앞에 다시 서니 감회가 새롭다. 그 때 같이 갔던 김사장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그 때 보았던 자금성 경내는 오늘 비록 보진 않더라도 그 기억이 새롭다. 좀 쉬운 점은 금번 투어에 자금성 탐방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08년 보긴 봤지만 미리 예약해야하는 점 때문에 미포함 된 것 같은데 아직 자금성을 보지 못한 아내를 위하여 북경 여행을 다시 해야하는 이유가 생긴 것 같다, 자금성에 관한 소개, 소감등은 2008년 여행기에 잘 요약되어 있으므로 여기선 생략. (2) 박지원, 김석주를 비롯한 조선의 사절단들도 이 문을 통하여 자금성에 들어갔으리라. 그들은 이 어마어마한 궁궐을 보고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 넘볼 수 없는 대국의 위엄에 움츠러들었을까? 淸 전성기에 세계 GDP의 3/4이 이 북경에 집약되었다는데 뭐든 할 수 있는 그들의 財力에 大中華에 대한 모화사상에 함몰되어갔겠지. 그러나 그 거대한 富와 權力도 일장춘몽이었단 역사적 부침을 현명한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을까?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자금성 개요도 2) 오문 접근하기 3) 자금성 주변도 * 자금성 오문(午門) 오문은 자금성의 정문이자 남문이고, 자금성의 다른 문들과는 다르게 양쪽에 날개가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상징적인 것으로, 고대부터 왕궁과 사원, 무덤등의 입구를 웅장하게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양식이다. 오문에는 총 5개의 문이 있다. 이 중 3개의 문은 정면에 붙어있고, 나머지 2개의 문은 정면과 날개 사이에 뚫려있다. 3개의 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운데 문은 오직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다만 결혼식날의 황후와,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3명의 학자만이 그날만 특별히 이 가운 데 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모든 대소신료들과 관리, 내시들은 나머지 4개의 문을 사용하여 자금성을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제국의 칙령들이 반포되었으며, 황제가 출전하기 전 군대를 사열하였다. 또한 군대가 잡아온 포로들이 이 곳에서 대거 처형되기도 하였다. 오문을 통과하면 금천교와 태화문이 나다. * 자금성(紫禁城) 현존하는 궁궐 중 가장 큰 규모인 자금성 72만 제곱킬로미터의 넓이에 1000채에 달하며 약 8000개의 방이 있다. 1420년 완공되어 500년 동안 24명의 황제가 머물렀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자금성[紫禁城, 쯔진청] 이라는 뜻을 한자로 살펴보면 자줏빛 자에 금할 금자를 써서 자주색의 금지 된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자금성은 과거에는 황제나 황후 그 리고 내시 등, 왕족들과 관련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한다. 현재는 자금성을 고궁박 물원이라고 불리며 중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관광명소로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을 방문하는 전 세 계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 중 한곳이다. 자금성은 명나라 제 3대 황제였던 영락제가 황제가 된지 4년째가 되던 해인 1406년, 명나라의 수도였 던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건축이 되기 시작하였는데, 영락제는 명나라 건국자였 던 태조 홍무제 즉,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써 주원장이 생전에 영락제를 연왕(燕王)으로 봉하고 베이 징 일대를 관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주원장이 죽은 뒤, 주원장의 장손이었던 건문제가 명나라 제2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데, 주원장의 아들들이자 건문제에게는 삼촌들이 중국 각지에 왕으로 책봉되어 각 지역을 다스리고 있어, 황제의 권위에 언제든지 위협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삼촌들을 견제 하기 위해 건문제는 삼촌들의 작위를 박탈하는 삭봉책(削封策)을 시행하게 되는데요. 당시 연왕이였 던 영락제는 이에 반발하여 거병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란(靖難)의 변이었다. 건문제의 정부군과 연왕의 군대는 3년간 격전을 벌이게 되었고, 연왕이 명나라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 면서 일단락이 되었다. 이때 건문제는 수도 난징에 있던 황궁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황제에 오 른 영락제는 불타버린 황궁을 복원하는 대신, 당시 자신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던 베이징으로 수 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천도가 결정된 후 1407년부터 자금성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동원된 인력만 20만 명에 달한다고 하며, 터를 닦은 지 13년 만인 1420년에야 마침내 자금성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전체 면적이 72만 제곱미터 에 이르며 자금성 내에 있는 방의 개수만 해도 약 9천여 개나 된다고 한다. 만약 태자가 태어나서 날 마다 방을 옮겨 다니면서 잠을 잔다고 가정할 때, 본인이 태어난 방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무려 24 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크기가 아닐 수 없다. 천안문이 완공된 1421년, 그 성루를 지켜보던 모든 문부백관들이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 다고 한다. 영락제는 또한 크게 기뻐하여 그를 '괴노반(蒯魯班)'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노반(魯 班)은 중국 역사에서 ‘장인들의 수호신’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니 건축가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은 셈이었다. ‘승천문’을 시공한 이후 괴상은 자금성의 주요 건물 건축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그의 직 책이 지금의 부총리 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에 봉해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자금성을 건축할 때 네 가지의 원칙들이 반영되도록 해서 건물들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바 로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이 원칙은 주나라 이래 지속되어온 원칙으로써 황제 가 업무를 보는 곳은 궁전 건축의 전면에, 그리고 여가생활을 즐기는 곳은 뒷 부분에 배치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두 번째로 '삼조오문(三朝五門)'의 원칙이라고 하는데요. 예학적 재념에서 볼 때 천자와 제후 등 각 계층은 의식의 규모에 차등을 두어야 하는데, 이 개념에 근거하여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의 경우 5개 의 문으로 영역을 나누어 고대의 사회 등급과 질서 정신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세 번째로 '좌조우사(左朝右社)'의 원칙인데요. 좌측에는 종묘를 배치하고 우측에는 사직단을 배치한 다는 내용이다. 종묘는 유교의 조상 숭배를 위한 장소이며, 사직단은 농업 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 는 고대 중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농사가 풍년이 될 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중축대칭(中軸對稱)'의 원칙이라고 한다. 궁전 건축을 설계할 때 주요 핵심 건축물을 남 북으로 일직선을 긋고 그 중축선상에 차례대로 배치하면서 동서로 대칭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자금성의 주요 건축물들은 모두 중축선 상에 배치하고 있으며, 부속 건물들은 대칭으로 양측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배치는 고대 사회 왕권의 지고무상하고 유아독존의 의미를 나타낸 다고 한다. 자금성은 그 크기만큼이나 정교한 설계와 다양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황제의 공식 업무 공간이 었던 태화전, 황제가 황후와 시간을 보냈던 내정, 그리고 자연과 이상적인 어울림을 재현한 어화원 등, 볼거리도 많고 흥미로운 곳도 참 많은 자금성은 이른 아침이나 오후 늦게 둘러보는 게 좋다고 한 다. 그 시간에는 자금성과 붉은 햇살이 만나 자주색과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의 진정한 분위기 1. 자금성을 설게 한 사람 남방에서 수천 명의 건축 장인들 중 최고로 실력이 좋았던 사람인 괴상(蒯祥)은 1398년에 태어나 1481년 사망하여 84살까지 장수했던 자금성의 축조시기와 맞는 생몰년을 가지고 있다. 건축적 지능이 뛰어나며, 눈으로 보고 짐작하여 설계도를 그린 후 실제로 시공해도 오차범위가 전혀 없을 정도였다 고 한다. 그의 부친이었던 괴부(蒯富) 또한 명나라 때 유명한 건축가로써, 난징에 있던 황궁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뛰어난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괴상은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건축기술을 갈고 닦아 2대에 걸쳐 황궁건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 괴상은 '향산방(香山幇)' 이라는 건축가 그룹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 향산방이란 괴상의 고향이었 던 향산은 강남 목공 모두가 향산 출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목공과 건축에 있어서는 뛰어난 인재 들이 많았던 동네였다고 한다. 이러한 건축 전문가들을 향산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괴상은 최초로 천안문 성루를 설계한 인물도로 유명하다. 22세였던 괴상은 자금성을 건축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때, 첫 번째로 그의 주도 하에 승천문(承天門, 지금의 천안문)의 시공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괴상이 자금성 건축을 위해 북경에 왔을 때는 이미 작업 중이었어서 괴상이 건축을 지휘한 것 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인데, 기록에도 최초 설계자가 남아있지 않아 아직까지 도 누가 자금성을 최초로 설계하고 지휘했는지는 의문이라 한다. 2. 삼무(三無) 자금성에는 총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첫 번째는 굴뚝으로 황제가 쓰는 궁궐이기에 좋은 연료만 사 용해 연기가 거의 나지 않으며 굴뚝은 궁궐의 전체적인 미관을 해치기 때문에 굴뚝이 존재하지 않았 다고 한다. 두 번째는 화장실로 자금성에는 9000개에 달하는 방이 있지만 수많은 방들 중 화장실은 단 한 곳도 없다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화장실을 불결하다고 생각해 궁궐에 변소를 따로 마련해두 지 않았고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악취를 불길한 징조라 여겼다고 한다. 그렇기에 궁궐 안의 사람들은 '단' (요강)이라는 이동식 변기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세 번째는 나무이다. 궁궐 안에 나무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황제가 지내는 궁궐 중심부에는 나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은 자금성 안에 침 입한 자객들이 숨지 못하게 위함이라고 한다. 3. 비밀의 방 중국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 사는 옥황상제의 방은 총 1만 칸이라고 한다. 때문에 지상에서 만드는 궁 궐은 크기가 아무리 커도 방의 개수가 1만 칸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금성은 9999칸으 로 지어졌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9999칸이 아닌 반 칸이 더 존재한다고 하는데, 옥황상제에게 감추고서 만든 방이라 그곳에 하늘의 비밀을 담아 놓았거나 고대 중국의 비밀 스러운 금서들을 모아놓았다는 소문이 돌자 학자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 직접 조사하였는데 자금성의 방은 총 8708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사 중 반 칸짜리 방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자금성의 동남쪽 에 위치한 누각으로 문연각 끝에 있는 작은방이라 한다. 이 방은 중국의 역사 기록을 모아다가 만든 방대한 총서 '사고전서' 일부를 보관한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전설 같은 방은 아니었는데 , 기록에 따르면 자금성은 배치와 경관을 위해 관례를 따르지 않은 6칸의 방을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신비론자들은 자금성 어딘가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면 1000개가 넘는 방이 추가로 있으며 이것을 다 합치면 9999개의 방이 채워진다고 믿고 있다. 자금성 탐방기 / 야자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