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해외여행산행

북경 천진 여행 ①산동반도 상공을 지나며(24/04/21)

이름없는풀뿌리 2024. 5. 3. 01:21
요즈음 – 북경 천진 여행 ①산동반도 상공을 지나며 – 발해가 정벌했던 산동반도 내려다보니 이정기 평로지청국이 아래로 펼쳐있고 대륙의 백제의 혼(百濟魂)은 구름되어 떠다니고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성남(자가용, 04:30)->인천공항(장기주차장, 05:40)->하나팀MT(06:25)-> 아시아나 인천出(09:15)->천진빈하이着(1시간 시차, 09:55)->천진공항出(10:50)-> 북경着(12:50)->점심(12:50-13:50)->전문대가(13:50-14:50)->천안문 광장(15:00-15:30)-> 오문->왕부정거리(15:50-16:30)->북경써커스(17:00-18;00)->저녘(19:10-20:10)->랑팡호텔(22:10)1泊 쉐라톤 랑팡 차오바이 리버 호텔(SHERATON LANGFANG CHAOBAI RIVER HOTEL) 북경 천진 여행 ①산동반도 상공을 지나며 (1) 두번 가봤던 北京. 아내가 만리장성을 보고싶다 하여 만리장성이 포함된 북경천진 여행 패키지를 선택하여 2024/4/21(일)-4/24(수) 3박4일 다녀 옴. (2) 2024/04/21 04:30출발. 올림픽 남로를 경유 공항 민자도로 통과, 공항 도착, P2-53구역 주차. 3층 출국장에서 일행 만나 여행사 설명 듣고 출국대 통과하니 07:25 한 시간여 남아 면세점 기웃거리다가 08:25 탑승. 08:55이륙.(이륙시간 빨라진 느낌) 외기 –30도인 8,200m上空을 820km/hr로 880km의 거리를 날아 09:55 천진 빈하이공항 도착(서울과 한 시간 시차) (3) 가며 보니 발해 무왕의 명을 받은 장문휴가 등주(산동)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고구려 유민 이정기와 그 후손이 평로지청국을 건설하여 다스리던 산동반도가 발 아래 누워있는데 그 상공을 백가제해(百家齊海)했던 대륙백제의 魂이 구름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백제의 최대영토(중국 25사 삼국사기 최치원조 등 종합)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병 백만으 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등지를 흔들어 중 국의 큰 좀이 되었으며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의 정벌에 의한 것이다] <삼국사기>'최치원'조) 1) 사료로 본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강역 2) 장기주차장 P2-53구역에 주차 3) 인천공항 출국장 4)영종도 인천공항 4) 이륙 5) 1시간만에 도달한 산동반도 상공에 따다니는 대륙백제의 魂같은 구름바다 6) 산동밤도를 지나 다시 발해를 지나 도달한 천진 상공 7) 텐진 빈하이 국제공항 9) 직선거리 880km, 1시간 30분 날아 천진빈하이 공항 착륙 * 발해의 산동 등주 정벌 732년 장문휴의 등주 공격, 대문예를 돌려보내라는 발해의 요구를 당나라가 거부하자, 발해 무왕은 장문휴 장군에게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공격하도록 했다(732년 9월). 장문휴는 수군을 이끌고 산동반 도에 상륙하여 등주를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장문휴는 등주 자사(지방 장관) 위준을 죽이는 성과를 올렸다. 발해의 강경한 공세에 당황한 당 현종은 당나라에 머물면서 태복원외경이라는 벼슬을 지내고 있던 신라인 김사란을 신라에 보냈다. 김사란은 신라의 성덕왕에게 당 현종이 하사하는‘개부의동삼 사영해군사’라는 벼슬을 내리고, 신라군을 동원해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듬해 신라는 군사를 출동시켜 발해로 진군하지만,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싸우지도 못하고 절반의 군사를 잃은 뒤 철수하게 된다. 발해와 신라가 군사적인 충돌 위기로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이후 두 나라는 충돌한 적이 없다. 당나라는 더 이상 발해를 공격하지 않았고, 발해도 산동반도를 지배하지 않고 물 러났다. 이 사건으로 발해는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우뚝 섰으며, 삼국 통일 과정에서 나빠졌던 당나라 와 신라의 관계는 다시 돈독해졌다. * 대륙 백제의 영역 백제는 242년 이후 고구려가 위, 연 등을 공격하며 요동경략에 나서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해(발 해만)를 건너 중국의 남부 및 요서지방으로 진출한다. 246년 고이왕(古爾王) 13년 서한(西漢)의 낙랑 (당시 낙랑군은 북경 부근의 서한의 낙랑, 평양의 최리의 낙랑국이 있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분서 왕(汾西王) 7년(298) 낙랑군의 서현을 취한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조 및 분서왕 7년조) 이어 346년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여현과 북경 사이를 정복, 요서(遼 西), 진평(晋平) 두 직할군을 설치하여 660년 백제 멸망때까지 250여년 간 통치하였음이 당시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주요 전거(典據)는 다음과 같다.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있다. 후에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도 요서를 취했다. 백제가 다스리던 지역을 진평군과 진평현으로 불렀다." 『송서』 「백제전」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에 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 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두었다. 백제의 자치군이었다." 『양서』 「백제전」 "백제는 처음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통전』 이외에도 백제의 요서경략 기록은 『남제서』, 『남사』 등 동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사서들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백제의 요서경략사에 대하여 일본 및 중국의 일부 학계에서는 관련 전거가 남조계 사서들에만 있고, 북조계 사서인 『수서』, 『북사』 등에는 없는 점과 우리 정사인 『삼국사기』 등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 점을 들어 이를 회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이들은 이 당시 송, 제, 양, 진 등 남조계 왕조들이 중국내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백제의 관할지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굳이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 만, 그러한 의문은 다음의 다른 자료들을 함께 고찰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먼저 618~628년 당의 영고 등이 주(周)의 효문제~정제(557~581)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 「백 제전」에는 당시 백제와 송, 제, 양, 진 등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설명ㅎ는 가운데 양자강을 사이에 두었다는 대목(自晋, 宋, 齊, 梁 居江左)이 나온다. 이 당시 백제의 강역이 양자강 유역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 『구당서』 「백제국전」에는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는 가 운데 東北室新羅, 西渡海室越州, 南渡海室倭라 하여 서쪽 경계가 옛날 오(吳), 월(越)이 있던 양자강 유역(월주)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남제서』 「백제국전」에는 "이 때(490) 흉노와 돌궐이 또 다시 수 십만명의 기병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파견한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에게 대패하였다."는 대목이 있어 이 당시 백제가 중원 땅에서 저 북쪽의 흉 노 돌궐족과 대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같은 책 권 58 <열전>39에 보면 백제 동성왕이 제 나라에 대해 이 때 큰 공을 세운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등을 각기 왕 또는 제후로 임명해 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490~495년)간 중국내 백제 7군인 광양(光陽), 조선(朝鮮), 낙랑(樂浪), 성양(城陽)을 다스리는 장군을 태수(太守)로 봉해 줄 것을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미송위사(未松偉私) 등 일본 학자와 이병도 등 국내 일부 학자들은 이 때의 백제 7군이 광주, 나주, 신안, 고흥, 옥구 등 전라도 일대에 있었으며, 이 때 책봉된 왕 또는 제후, 태수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4~6세기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어불성설의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당시 거대한 제국이나 패권국이 아니고서야 어찌 왕 또는 제후를 임명할 수 있으며, 직할지를 통 치하는 태수를 둘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국내외 많은 학자들이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백제의 대륙진출과 일본지배 기록이 분명치 않은 점 때문에 소극적 해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분명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백제 전성시대에는 강병이 100만이었다. 남으로 월을 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경계로 하였 다. 커다란 중원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렇듯 백제는 통전과 북사, 수서에 기록된 이름 그대로 100개 부족이 연합하여 널리 바다를 다스리 는 나라(百家濟海)였으며, 이를 꽃피운 동성왕 이후에는 중국 요서 지역과 양자강 유역, 일본의 대마 도 구주 일대에 22명의 담로(憺魯: 백제의 행정구역 또는 봉건영지로 해석되고 있으며 왕족들이 파견 되어 통치했다함.'담을 두르다'→'다무르다'→'담로'→'다물'로 어휘가 변화하였다는 설도 있다)를 파견하여 250년 이상 동북아시아 남서부를 지배하는 거대한 해상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의 평로지청국(平盧淄靑國) 이정기 장군은 요동의 영주에서 고구려 유민으로 탄생하였다(732-781). 원래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었 는데 33세때 당나라 대종 황제로부터 이정기로 사성을 받았다. 고구려가 멸망 당한 668년에 20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이 집단적으로 끌려간 곳이 영주였는데, 그는 고구려 패망후 64년 뒤에 태어난 것이다. 이정기 본인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일절 없는데 이는 모든 고구려 유민들은 자신의 인생을 노예 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노예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 다. 영주에는 2만여명의 군인이 있었는데 1/3은 고구려 사람들이었고 이정기도 성인이 되어서는 군인 의 길을 선택하였다. 고구려 사람으로는 많이 알려진 장군들이 많은데 왕모중은 당현종때 국방 장관 같은 위치에 있었고 왕사례, 고선지, 이정기는 모두 같은 시대의 군인으로 안록산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왕사례는 고향도 영주사람이었다.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는 당군이 되어 뛰어난 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안녹산의 난을 진압 하고 위구르 군대를 두려움에 떨게한 이정기는 그를 시기한 당 절도사 후희일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된 다. 그런데, 이정기를 존경한 평로군 병사들이 그를 구출하고 ‘치청번진’의 절도사로 추대한다. 당 대 가장 강력한 절도사, 이정기 8세기 중반, 중국대륙은 연이은 반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이정기가 다스린 지역은 달랐다. 이정기의 강력한 통치력과 군사력은 당나라 내 절도사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 심지어 이정기를 황제라고 부르며 사신을 보낼 정도로 두려워했다. 당나라는 이정기에게 여러 관직을 내리며 충돌을 피하고자 노력하지만, 이미 발해와 신라와의 교역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 정기는 부의 축적과 강력한 군대로 당나라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정기, 그만의 왕국을 만들다 당시 이정기가 차지한 산둥반도 일대 15개 주는 통일신라보다 넓고 인 구수도 더 많았다. 이정기는 치정지역 중심지인 청주에 높이 20m, 길이 13km에 달하는 성을 세워 막 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사실상 독립왕국의 탄생이다.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안정적인 통치로 태평성대 를 이룬 이정기는 당나라의 황실을 넘볼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 드디어 10만 군대를 이끌고 당의 수도로 향하는데 … 이정기의 죽음과 당(唐)의 잔인한 보복 그러나 당과 일대결전을 앞둔 이정 기는 뜻밖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이정기의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은 한 달 가까이 아버지의 죽음을 속인 다. 이납은 왕국을 제(齊)라 칭하고 대외적으로 독립왕국임을 선포한다. 그러나 55년 후인 819년, 결 국 제(齊)는 당나라의 집요한 공격으로 패망한다. 제나라가 패한 후, 당은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인 운주병사 1,200명을 학살한다. 대륙의 고구려왕국 이정기李正己의 평로치청平盧淄靑 / KBS 1997.10.02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