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아내와 만추(晩秋)에 만설(滿雪)을 보다.(2002/11/03)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3. 11:02

<아내와 만추(晩秋)에 만설(滿雪)을 보다.>

아내여!
오늘 모처럼 우리 둘이서만
만산홍엽(滿山紅葉)이 절정이라는 계룡(鷄龍)의 품에 안겨 볼까?
그래! 그동안 잘 달리지도 못하는 달리기며 회사 일에 치어서
우리 같이 산에 간 일이 언제 인지 모르겠구려.

아내여!
자! 나는 다 되었소.
어서 아이들 밥 먹이고 배낭을 메시구려.
아스팔트 도로 위에도 봄부터 볼 것, 못 볼 것 차례로 다 본 낙엽들은
바퀴에 짓밟히면서도 내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마지막 몸부림인양 흩날리고 있구려.
우리를 싣고 가는 달구지 뒤꽁무니를 춤추며 손을 흔들며 따라오는구려.

아내여!
삽재를 지나니
박정자를 굽어보는 장군봉(將軍峰)이 어서 오라 유혹하지만
오늘은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하며 오를 수 있는 상신리 계곡길을 택하여 볼까?
그래 인적미답(人跡未踏)의 그 오솔길에는 낙엽이 푸욱 쌓여 있겠지.
낙엽을 헤집고 상큼한 내음을 맡아가며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내여!
장군봉, 갓바위,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계룡의 저 닭벼슬은 왜 저리 붉을까?
그래! 안 봐도 숨막힐 정도로 모두가 아름답구나.
한줄기 찬바람이 살며시 귓불 밑으로 다가오니 부끄러워 빨개진 모습이구나.


<단풍>

볼 것 못 볼 것 차례로 보고 나니
안 봐도 숨이 막혀 모두가 아름다워
찬바람 다가서는 기척 부끄러워 빨개져


아내여!
어우러진 넝쿨에 뒤덮여 보일듯말듯한 상신리 계곡은
기나긴 겨울잠을 자려는지 아랫도리를 낙엽 속에 파묻고 있구나.
흡사 시간이 정지하여 액자 속에 가을산이 정지하여 있는 듯 하구나.
다만 빨간 열매를 송알송알 달고 있는 명감넝쿨만이 아직 한가을임을 부르짖고 있구나.
겨울 준비에 분주한 새들의 지저귐도 계곡 가득히 쩌렁쩌렁 울려오는 구나.
다만 철없는 으름 넝쿨들만이 아직도 푸른 잎을 노목의 쭈그러진 몸에
안타깝게 비비적거리며 아양을 떠는데 그 사이사이 굴피나무,
신갈나무, 단풍나무, 졸참나무들은 아무런 대꾸도 않고
자기들 몸에 노랑, 빨강, 갈색... 듬뿍 칠하고도 남아돌아
남은 물감을 그들이 서 있는 산비탈 위에 개발새발 떡칠을 하고 있구나.

아내여!
저 보아! 울긋불긋한 산자락을 누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했더냐?
그래! 그게 아니고 만산색엽(滿山色葉)이로구나.
이 원시의 골짜기에
한때는 위풍 당당했을 비틀어져 넘어진 저 고목들은
벌레들의 침략에 할퀴우고 비바람에 썩어 살점은 도망하여
황혜(荒兮)한 형상의 몰골로만 남아 지금은 다람쥐들의 놀이터로 변하였구나.

아내여!
우리가 죽어서도 저렇게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아! 아! 드디어 천장골이 내려다보이는 신선봉 아래 큰배재구료.
여기서 남매탑으로 갈까? 아니면 신선봉과 삼불봉을 잇는 능선으로 갈까?
그래. 오늘은 우리 한번 능선을 타고 가보자.
능선에서 수정봉 아래 완만한 금잔디 고개와
병풍처럼 두른 자연성릉(自然城陵)의 위용을 바라보고
삼불봉에 올라 관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님께 경배하고 갈까?
남매탑을 못 가는 대신 지난 여름 우리 아이들하고 왔다가
남매탑 오누이에게 헌정(獻呈)한 시조나 읊어주고 가자.
자! 큰소리로 읊어보아. 아내여!


<남매탑(男妹塔)>

호생원 등에 업혀 큰배재 넘은 뜻은
칡넝쿨 얽혀지듯 지어미로 살렸더니
오라비 지극한 마음 비구니로 살어리

등 돌려 벽을 보고 생노병사 궁량하니
자연성능 두른 듯이 막혀서 알 수 없어
누이야 등 다시 돌려 부처님전 비노라

눈사람 녹아버리듯 허깨비라 이 한 육신
도솔천 갈 것인데 이뭤고? 남은 흔적
오뉘의 공덕 쌓여서 돌탑으로 남아라


아내여!
우리도 저 오뉘처럼 사이 좋게 생노병사(生老病死) 궁량하다
살아생전 공덕 기리는 돌탑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하늘에서 뭐가 내리는 구료.
아니? 저 보아. 흰눈이 아니야.
우리들의 산행을 하늘도 축복하는구려.
상봉(上峰)에 오르니 눈보라에 사방이 안 보이는구나.
안 보여도 좋아. 뿌우연 대자연의 백설 잔치는 여기까지 오느라고
무뎌진 발걸음의 피곤함을 저절로 잊게 하는구려.
벼랑을 붙잡은 시려운 손조차 장엄한 풍광에 곱은 줄을 모르겠구나..
서설(瑞雪)을 뒤집어 쓴 단풍은 흡사 생채기에서 배어나는 핏방울 같구나.
저 핏방울이 하얀 백옥의 살결에 흥건히 솟아날 것 같구나.

아내여!
이제는 아예 발목이 푹! 푹! 파묻히는구나.
만추(晩秋)에 만설(滿雪)을 밟으니
이는 정녕 계룡산 산신(山神)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심이로다.
좋구나. 여기까지 온 수많은 단풍 행락객들도 좋기만 한가 보구나.
저렇게 산에서 두런두런하며 세속의 먼지를 잠시라도 털어 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좋은 일이지.
이제 내리는 눈에 가려 앞도 안보이고 비탈은 미끄럽구나.
조심하시게나. 아내여! 한 순간 저 발아래 천애(天涯)의 낭떠러지로 낙하하면
어찌 나의 빠른 손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럴 때면 이런 생각을 해보네. 아내여!
아무리 부부라도, 사랑하는 사이라도 어느 한 순간 일심동체일 수 없음이여!
삼라만상을 주관하는 절대자는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별을 단행하는 비정함이여!
그 심술궂은 프로그램으로 숱한 이별과 슬픔이 있어왔지.
그렇게 도적같이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닥쳐올 때 오더라도 조심해야지.
아암! 우리의 소중한 애정을 찰떡궁합처럼 간직하고 가야지.
매사는 진퇴를 분명히 해야하는 법!
겨울등반 장비라도 갖추었으면 오를 수 있으련만.
그래! 삼불봉은 다음에 알현하기로 하고 이제 하산하자꾸나.
오늘은 만추(晩秋)의 계룡의 품에서 설경(雪景)을 만끽한 것으로 만족하자꾸나.

아내여!
천천히 내려가세.
하산길은 오를 때보다도 더 천천히 하자꾸나.
산을 다 보았다는 듯이 팽개치듯 허위허위 내려가기는 싫어.
수목과 고스라져가는 들풀 하나하나에 눈맞춤하며 초근초근 내려가자.
수목들이 벗겨내는 껍질 하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하나, 벌레들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
스치는 바람소리, 흐르는 물소리, 천태만상으로 변하는 구름의 모양 하나하나에
귀기울이고 들여다보며 사뿐사뿐, 가만가만 내려가자꾸나.

아내여!
누가 계룡을 자그마한 산이라고 했던가?
서울에서 오신 초로(初老)의 등산객 한 분이 길을 잃으셨구나.
어이하여 일행을 놓치시고 인적미답(人跡未踏)인 이 오솔길로 접어드셨소?
따라오시오. 그대 앞에 횃불이 되어 일행이 기다린다는 천장골 주차장으로 인도하리다.

아내여!
산발치로 내려오니 눈은 거짓말같이 그쳐있고
엽총산탄을 맞은 듯이 비에 젖은 낙엽들만이 지난 여름을 그리워하듯 울고 있구나.
3인의 등산객이 밟는 낙엽은 뱀처럼 꾸물거리며 눈물을 쥐어 짜내는구나.
그러나 아직도 황홀한 몸매를 자랑하는 단풍들은 죽어 나자빠진 동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가을 속에 고즈넉이 서서 그대와 나, 그리고 길 잃은 서울 손님을 웃음으로 배웅하고 있구나.

아내여!
산아래 내려오니 계곡에 불은 물이
겨울을 향하여 하류로, 하류로 흘러가는구나.
너와 나, 우리의 인생길도 저 물처럼 하류로, 하류로 흘러가는구나.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은 후줄근한 몸일지라도
계룡산 산신에게서 받은 정기가 충만하여 상쾌하구나.

아내여!
우리 자주 산에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이 우리를 성냥곽 같은 도시의 공간에 잡아매 두는가?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다시 도시로 들어가야만 하는 발걸음이여!
내일의 탈출을 위하여 우리는 새장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새장 속으로... 새장 속에서 꿈꾸며 살아간다.


2002/11/3 일요일에 계룡산을 아내와 등산하고서...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