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모악산을 찾아서(2002/03/30)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3. 11:06

 

 

모악산을 찾아서

 

- 라 강 하 -

 

 

1. 엄니! 저 왔슈

얼마 전 휴일(3/10)에 가까운 친구들과

부부 동반하여 모악산(엄뫼, 큼뫼)을 찾았다.
잘 달리지도 못하는 달리기에 심취하여

최근에 친구들과 너무 소원하지 않았나 하여 내가 바람잡았다.
언젠가 한번은 꼭 찾아보고 싶었던 산!

어머니의 품과 같이 푸근한 산!

그리운 산!
모악산을 생각하면 항상 객지에 나온 자식이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러한 그리움! 나의 고향도 아닌데 왜 그럴까?
모악의 앞에 서니 저절로 탄성이 일어 온다.

엄니! 저 왔슈.

긍께 야드라.

이노미 이 니끼한 몸매로 마라통은 무신 마라통!
야 그진말 마라통 허는거 아녀?

니까이께 기어 가는거 아녀?

그 눔 참!
동아 중계방성 봉께 마라깽이덜만 달리더만.

오로동통해각꾸. 쩟! 쩟!
그랴도 사니만 오믄 날르는 걸 보믄 알다가도 몰르것써.

마라통 허기는 허나벼.
그랴 쳐 달려라.

그랴야 그나마 깐닥깐닥 유지항께.
오느른 니 혼자 후닥딱 가지 말구 가치 가야 혀.

니 혼자 가뿌리문 알제? 후랴들넘여.
우린 마누라드리랑 짝짜꿍 혀서

니눔 몰래 기밀쌩이 하부지 묫마당이나 둘러보고 갈텅게 아럿찌?

친구들은 벌써 엄살이다.
금산사만 둘러보기로 한 것을 반대편 구이입구에서

정상을 넘어 금산사까지 종주하자고 내가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은 친구들과 오랜만에 정담을 나누며,

슬슬 봄볕을 즐기며 모악의 품에 안겨나 볼까?
모악산 입구에 이르니 고은(高銀) 시비(詩碑)가 반겨준다


모악산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저 혼자 떨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 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외다.

여기 고스락 정상에
거룩한 숨 내쉬어
저 아래 바람진 골마다
온갖 풀과 나무 어진 짐승들 한 핏줄이외다.
세세 생생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도 한 핏줄이외다.

이다지도 이다지도
내 고장 모악산은 천년의 사랑이외다.
오! 내 마음 여기 두어


고은 시인의 시를 읊조리며 성황당다리를 지나니
기막살나무와 덜꿩나무 사이로 청미레 넝쿨이 어울렁 더울렁 어우러지며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전해오는 선녀폭포와 사랑다리가 나타난다.
남녀가 열렬히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듯한 모습의 바위를 보니
예나 이제나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아름다운 가치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인즉

먼 옛날 이곳 선녀폭포에 보름달이 높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겼는데
하루는 이 폭포 곁을 지나던 나무꾼 한 명이

너무도 아리따운 선녀들의 자태에 넋을 잃어
집에 돌아와서도 그 광경을 잊을 수 없어 병이 나고 말았다.
나무꾼은 병석에서도 아름다운 선녀들의 모습이 아른거려

한번만 더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무꾼은 다음 보름달이 뜨자

숲 속에 숨어 폭포수 아래 맑은 물에서 인어같이 뛰노는 선녀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중, 뜻밖에도 한 선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선녀는 다른 선녀들의 눈을 피해 나무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남녀는 대원사 백자골까지 와서

사랑을 속삭이며 입을 맞추는 순간
뇌성벽력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이들은 점점 굳어져 화석이 되고 말았다.
석상이 된 두 남녀는 지금도 떨어질 줄 모르고

열렬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단다.
그래서 이 바위를 사랑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여기에 지성을 드리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진다.
선녀폭포와 사랑바위라고 하지만 안내간판이 없다면

누구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듯 싶다.

선녀다리를 건너니 김씨 시조묘1km, 정상2.6km의 표지판이 나타난다.
친구들이 모두 정상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나를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김씨 시조묘(始祖墓)! 한 때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곳이다.
최근에 모악산이 유명해진 것은 김일성의 조상이라는 김태서묘 때문이다.
이 묘의 지기(地氣)가 발복(發福)하여 그 후손인 김일성이 장기 집권을 하였는데
그 운(運)이 끝나는 것이 49년만인 1994년 9월이라고 날짜까지 지적한
육관도사 손석우의 "터"의 풍수지리책이 나와

화제에 올랐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예언한 날짜에 근소한 차이로 김일성이 사망하자
모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김태서의 묘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누구나 처음에는 믿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를 이어 김정일이 집권하고 있으니 김씨의 운이 다했다는 것은 틀린 것 같다.
육관도사 자신도 예산 가야산의 천하명당에 불법(不法)으로 들어가 있다니

죽으면 저승에 가서나 물어 볼까?
그 전에는 아무도 이 곳에 김일성의 조상 묘가 있음을 몰랐는데

육관도사의 책이 나온 뒤,
북에서도 그러한 사연을 알고

대남 간첩들의 필수 순례코스로 되었다나?(믿거나 말거나)


2. 이눔들아! 요로코롬 조은 걸

이어서 수박재 다리, 사랑바우 다리, 시암골 다리를 건너니

대원사 앞 대나무 숲이 보이는 약수터이다.
시원한 약수 한 사발이 오장육부의 더러움을 밀어낸다.

사강사강 사울대는 대나무 숲을 지나니
강증산과 진묵(震默)대사의 전설이 얽혀있는 대원사가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석계를 올라서니 오염되지 않은 단아한 고찰임을 알겠다.
조선조 도승으로 이름을 떨친 진묵대사(震默大師)는 모악산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는 김제시 만경면 화포리 불거촌 출생으로

조선시대 설화불교, 민중불교의 대표적 기승(奇僧)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어혼환생설화(漁魂還生說話)는 널리 회자된 바이다.
지금도 만경면 화포리에는 그의 어머님 무덤과 이를 관리하는 성축암,
그리고 진묵대사를 신앙하는 주행조앙사(舟行組仰寺)등이

조앙산을 중심으로 남아있단다.
대원사에는 진묵대사가 거쳐했던 주공간이 있고,
그때 진묵대사의 호방한 기개를 보여주는 시구가 지금도 남아 전한다.
진묵대사의 조사전에 걸려 있는 칠언절구의 주련(柱聯)을 읊어본다.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니
산은 베개가 되는구나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니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 도다.

거나하게 취하여서 일어나 춤추고자 하나
곤륜산에 소맷자락이 걸려 아니꼽구나


진묵대사의 시구를 읊어보니 대사의 행동거지가 그려진다.
누더기 옷에 술을 동이로 마시고 고성방가하며
넉살스런 허풍을 드날리며 마음이 내이는 대로,
표표히 구름 따라, 바람 따라, 세월따라
동으로 서으로 거칠 것 없이 살다간 땡중은 아니었을까?
고승을 땡중으로 상상함은 너무나 고매한 고승이었기 때문일께다.
마당 한 귀퉁이의 삿갓솔(반송) 한 그루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

일행은 배낭을 내리고 땀을 훔친다.
친구들이 앉아서 휴식하는 동안 절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뭔지 모르게 포근한 기운이 나를 감싸주는 것 같다.

산딸나무, 층층나무, 자귀나무 숲을 헤집고 나아가니

경사가 점점 가파른데 조수표지판이 나타난다.
조수 표지판을 넘어가는 언덕이 더더욱 가팔라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이 근처에 사시는 듯한 길동무 아주머니가 고실고실하다고 말한다.
고실고실? 참 정겨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똥끝이 정말 고시랑거리는 것 같다.

신라 보덕화상의 전설이 깃든 수왕사에 다다른다.
정상 부근의 이 약수터는 무슨 효험이 있기에

사람들이 길다랗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가?
한 번 기다려서 마셔볼까 하다가 산등성이로 내쳐 오른다.

이제 산마루다.
중인리, 상학리, 구이리, 정상방향의 네 갈래 오솔길이
수북한 때죽(산죽) 속에 숨어서 짐승들이 다니는 길처럼 보일듯 말듯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오면서 보니 나무에 패찰이 붙어 있어

나무이름 외우기 좋아하는 나에게는 반갑기 그지없다.
참나무도 참 종류도 많다. 잎사귀의 크기 순으로 불러볼까?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

굴참나무, 물참나무, 돌참나무, 졸참나무...

무제봉에 이르니 모악산 무우제(舞雨祭, 祈雨祭)에 얽힌

전설을 소개한 안내간판이 있다.
예로부터 요즈음 같은 가뭄이 올 때

여기 모악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나?
조선조 중엽에는 전라감영에서 감사가 산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올렸단다.
옛 선인들은 체력이 좋았나 보다.

방백이 제수를 장만하여 고스락까지 와서 제를 지내다니...
그리고 천하명당인 장군봉 줄기에 묘를 쓰면 비가오지 않는다 하여
지금도 주민들이 암매장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1975년 큰 가뭄이 왔을 때 장군봉 줄기를 조사해 보니

누가 몰래 묘를 쓴 것을 발견하여
이장(移葬)을 하자

곧 마른하늘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는 이야기등

전설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있다.
글귀를 읽고 있노라니 배가 고프다.

각자 바리바리 준비해온 먹거리를 풀어놓고
무제봉 아래 비좁은 소봉(小峰)에서 먹는 점심 맛은 꿀맛이다.
그동안 지나온 이야기들을 서로 터 놓으며 박장대소하는 친구들이 좋다.

이눔들아! 요로코롬 조은 걸 중간이서 몰래 내빼려고 뺀들거려?
기밀쌩이 하부지가 밥미겨준대드나?

점심 후 바로 상봉인 장군봉(793.5m)를 지난다.
다른 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상봉에는 철탑이 자리하고 있어 접근할 수 없다.
흉물스런 콘크리트 구조물과 철탑은 이중 철조망을 두르고 있어
암매장 행위보다도 더욱 성산을 불경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럼 어찌하란 말인가?

꼭 상봉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모습이어야만 통신수단이 해결된단 말인가?
전국 명산의 망가진 상봉을 단군의 자손의 품으로 안겨 주소서.
이런 생각을 하며 철조망 아래 소로를 따라 금산사로 향하며 사방을 조망한다

멀리 서쪽으로는 금만평야의 빈 들녘에

아지랑이가 춤추는지 구겨진 비닐처럼 쭈글거린다.
여기서 보는 모악산은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뭄에도 계곡에는 끊임없이 물이 흘러 내리고

그 물은 다시 모여 주위에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안덕저수지등에

넉넉히 물을 가두게하니 과연 어머니 산임을 알겠다.
끊임없이, 조건없이, 무한한 사랑으로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어머니의 심성

- 바로 모악이다.
서쪽으로 금만평야가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땅과 하늘이 닿아 이룬 지평선은 '징게 맹게'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가없는 너른 평야와 어울린 모악산의 모습은
첩첩이 우뚝 솟은 산들 사이에 들판이 조성된 여타의 산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정상을 기준으로 서쪽은 김제시가, 북쪽은 전주시,

그리고 동쪽에는 완주군이 자리잡고 있다.
김제에는 김제(金堤)라는 이름부터 시작하여

금구, 금평, 금산, 금천 등 쇠 금(金)자가 들어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옛날 백제 때부터 김제 땅에서는 사금이 많이 생산되어 이러한 지명이 많단다.
길옆으로 갈매나무, 대팻집나무, 노린재나무, 팥배나무가 이어진다.

조금 내려오니

높다란 단애(斷崖)의 절벽을 발아래 거느린 마당 바위가 나타난다.
<꿈 이야기> 쓰면서 꿈속에서 본 바로 그런 마당 바위다.
친구들과 마당바위에 앉아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고실고실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란다. 속리산 신선대 생각이 난다.
동쪽 대원사 밑에 위치한 선녀폭포에서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긴 후
수왕사 약수를 마시고

이곳 신선대에서 신선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란다.
정상을 바라보니 장근재 쪽으로 부드러운 능선이 평화롭게 끝없이 이어진다.
비목나무, 꾸지뽕나무, 생강나무, 고로쇠나무, 물푸레나무, 정금나무가 이어진다.

한참을 내려오니 모악정(母岳亭)이다.

모악산을 거의 내려온 것 같다.
여기서 케이블카로 정상의 철탑 시설에 근무하는 요원들을 수발하는 모양이다.
그나마 모악정의 단아한 고건축의 양태를 닮은 처마곡선이

안쓰러운 마음을 조금 달래어준다.
친구들과 마누라들은 다리를 절뚝절뚝 절고 있다.

이눔들아! 느림보라고 흉보지 말구 그라니께 평상시 운동을 해야지.
아적도 정신 몬 차리는 니눔들이 한신스럽다.


3. 얌마! 괜챠녀.

늘연 계곡입구에 다다르니 초로의 등산객 두서넛이 정상 쪽에서 내려온다.
늘연 계곡은 여름에 특히 좋다는데

까치박달나무와 말채나무와 아그배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길이가 4km에 달하는 이 계곡은 너무도 굴곡이 심하여
물의 흐름이 더디어서 말을 더듬거리는 모양같다하여 늘연계곡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15년이나 늙은 닭이 주인의 은혜를 원수로 갚기 위해서

건너편에 사는 구렁이와 모의를 하다가
주인의 지혜로 닭과 구렁이를 동시에 퇴치했다는 전설이 스며있는 계곡이다.
심원암으로 가는 삼거리를 지나 부도전을 지난다.
스님들은 인생무상이라면서, 한줌 흙으로 돌아간다면서

왜 부도전이란 흔적을 남기는가?
석물(石物)과 몇 평의 묘지로 조그마한 동방의 나라를 세세년년 차지하고 앉은
저 세속의 사자(死者)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마누라! 나 죽거들랑 화장하여 상봉에 올라 훌훌,

그저 표표히 허공에 뿌려주시구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고 깨끗이 불태워 즐거운 마음으로 허공에 뿌려주시구려.
그리하여 지비(地肥)가 되어 대지에 머무르다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리도록 허공에 뿌려주시구려.

부도전 아래 채전을 돌아가니 금산사 돌담이 나타난다.
천왕문을 지나 우리 일행은 금산사로 들어선다.
예수쟁이인 한 놈이 안 들어가려고 쭈뼛거린다.

얌마! 괜챠녀. 우상이 아니고 무놔재라 생가켜.
그러고 절간 아피서는 두 손 모아 고개 수겨. 빠빠시 서 있지 말구.
땡중들 지나가도 마찬가지여. 그게 절간에 온 예절 아니건남?
난 말여!

종교는 음써두 교회 아피 가문 아부지 한울님 믿슴니다 아멘허구 고개 수기고
절간 오면 법당이는 안들어가두 댓돌 아피서 합장허구 고개 수기고 헌다.

아런냐?

짜샤. 소시먼 놈!

시방 먼 소리여?
니네들이나 갔다왐마! 하고 횅하니 절 입구 일주문 쪽으로 절룩거리며 내닫는다.

그래! 가거라.

날랑은 금산사 구석구석 알현하고 가마.
천왕문을 지나 선제루를 지나니 진표율사(眞表律師) 사적기가 반겨 준다.
<꿈 이야기>에 곧 등장하게 될 진표율사와 강증산이 동경한 미륵전 앞에 선다.
36척 높이의 미륵입상은 물론이고

좌우의 보살상까지 모두 금빛으로 화려하게 도금하여
고난받는 중생의 부처인 서민적이어야 할

미륵불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감을 주고 있다.
천불산 계곡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 세상을 이루려고 했던 화순 운주사의 석불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륵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 미래에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시금 그 곳 구석구석,

범종각, 대자보전, 대적광전, 명부전, 석련대, 나한전,

조사당, 삼성각을 차례로 둘러보다
절 입구에 있는 삿갓솔 아래로 돌아가 그 아래 앉아 눈을 감고

상고시대로 돌아가 본다.
청의(靑衣)의 옷을 입은 동자가 된 내가 구름을 타고 간다.
구름을 타고 할머니가 부르는 곳으로 날아가는데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어보니
마누라와 친구들이 어서 가자고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일주문으로 가는 길에는 늙은 벚나무와

수백 년 묵은 물참나무, 팽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중생들로 하여금 조용히 걸으면서 이 말세인 세상을 구제할

미륵불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갖도록 하는데
그러한 길을 성큼성큼 달리기로 달려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견훤이 쌓았다는 홍예문 형태의 석성문에 다다르고 곧바로 매표소가 나타난다.

얼마 전 사극에도 소개되었지만

금산사는 상주 가은현 출신 견훤과 관계가 깊은 절이다.
야사에 의하면 견훤은 왕건보다 인물이 좋았고
당당한 체격과 외모를 지니고 있어 한번 보는 사람은 반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용맹, 지략 또한 출중하여

후삼국의 패자 가운데 견줄 자가 없어 싸움에 임하매 연전연승이요
왕건이 나주를 경영했다면

그는 해로로 개경을 공략한 백전불퇴의 기백이 강건하여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유력한 패자였었단다.
견훤은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욱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겨우 지렁이의 자손이라는 설화와

왕건에 패한 패주정도로만 알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견훤이 아니고 진훤이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도학저<궁예진훤왕건과 열정시대> 86쪽을 참조함으로 가름코자한다.
진휜은 시간만 나면 금산사 미륵전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미륵의 힘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였음은 물론이다.
진휜의 어린 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니

특별히 귀엽게 여겨 전위(轉位)할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신검 세력에 의해 불행하게도 금산사에 유폐 당하고 만다.
청태(淸泰)2년 3월에 맏아들 신검(神劍)이 진훤을 금산사에 가두어
장사 30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드디어 왕위를 찬탈하여 금강을 죽였다.
진훤이 금산사에 갇힌 지 석달이 되었는데

6월에 술을 가지고 지키는 자들을 먹여 모두 취하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나주로 도망쳐서 해로를 이용하여
일찍이 사이가 안 좋았던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망명한 왕건의 고려에 귀부했다 한다.
후삼국 통일의 가장 유력한 후보자가 적국에 귀부(歸附)하게 될 줄이야.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진휜과 신검의 부자관계는

그 뒤 이성계와 방원의 관계로 재현된다.
그러나 방원은 나라를 유지했지만 신검은 망해 먹었다.
결과적으로 진훤은 아들농사를 잘못 지어 망한 셈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진훤은 왜 이것을 몰랐을까?


4. 엄니! 저 가유.

매표소 아래에는 모악랜드를 조성하다만 흉물스런 잔해가
호남민중의 마음의 고향, 금산사를 더욱 초라하게 하는 것 같다.
금산사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면 금평저수지가 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강증산이 득도한 곳이 바로 금평저수지에서 가까운 구릿골(銅谷)이다.
예로부터 금산사, 귀신사 등 여러 절을 품고 있는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민간신앙의 본거지로 꼽히고 있다.
민족사상인 증산 사상은 동학혁명이 실패한 이후 암울한 구한말 그리고 일제시대에
어디에도 마음을 둘 데가 없었던 민중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

왼쪽 동곡마을 가는 길로 돌아 700m 가량 들어가면
강증산이 도통한 후 9년 동안 머물며 민중을 교화했던 동곡약방이 있단다.

강증산은 갑오년 동학혁명 실패이후 풀벌레만도 못하게 죽임을 당하고 강탈당했던
우리 민중의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염원하며 먼저 스스로 크게 깨우치기 위하여
우리가 지나온 진묵대사의 전설이 있는 대원사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내가 곧 미륵이라.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자 하면 금산사 미륵을 보아라"라고 말한
강증산(1871-1909)의 유언에 따라

오늘날 많은 증산교도들이 금산사를 찾는다.
풍수도참설에 의하면 후천개벽의 모산(母山)이 곧 모악산이고,
모악산은 어미산이어서 음산(陰山)인데

순창 회문산은 아비산으로 양산(陽山)이라 한다.
회문산은 양산임에도 불구하고 태극형국이어서

음산으로 무극형국인 모악산으로 수렴되어 들어감으로써

고요한 무극천지(無極天地)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미륵신앙의 본산이 모악산 금산사에 자리잡고

강증산이 이곳 대원사에서 수도 정진한 이유를

풍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석가의 사상, 공자의 사상, 예수의 사상도 마찬가지이지만
강증산의 사상도 독자적으로 자생되어 생성된 것이 아니고,
삼신사상, 국선사상등 유구한 민족 고유의 사상을 근간으로
유불선과 기독사상등 외래종교의 영향을 받아 증산이라는
걸출한 인물로부터 새로운 민족사상으로 승화되어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이후 증산사상은 증산도, 대순진리회, 천진교, 수운교, 동학, 천도교 뿐 아니라
통일교등 신흥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언젠가 한번은 꼭 찾아보고 싶었던 산!

어머니의 품과 같이 푸근한 산!

그리운 산!
모악산을 생각하면 항상 객지에 나온 자식이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러한 그리움으로 찾아온 모악산의 구석구석에 아직도 살아 숨쉬는
대원사와 진묵대사, 강증산, 수왕사, 무제봉, 장군봉, 신선대, 모악정, 늘연계곡,
금산사와 진표율사, 견훤의 미륵사상, 금평지와 증산교등의 관계를 생각하며,
천년의 세월로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도탄에 빠진 어긋난 세상을 구제하고자 했던 정신을 생각하며,
내가 좋아하는 나무이름과 풀이름들을 살펴보며

친구들과 하루를 보낸 뜻깊은 산행이었다.
엄니! 저 가유.

2002/3/30 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


<덧붙이는 글>
① 이 글을 같이 산행한 친구들인 나도복부부, 백문호부부, 이요희부부,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아내 지미옥에 바친다.
② 또한 고재봉님, 김현우님, 김형성님, 박복진님, 허창수님을 비롯한 산을 좋아하는 달림이들에도 드린다.
③ 이 글의 대부분은 모악산에 대하여 답사전 조사한 내용에 산행내용을 가필한 글이다.
④ 산경도로 본 모악산은 어떠한 산인가?
일찍이 소개한 본인의 졸필 <만추에 계룡의 품에서...>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는 1대간 1정간 13정맥이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동.서.남.북의 분기점이 되는 백두대간이 우리나라 산들의 뿌리를 이루고 모든 강의 물줄기를 생성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리산에서 다시 북향한 백두대간은 장수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기되어 장안산, 신무산, 팔공산, 진안 성수산, 마이산, 부귀산을 지나, 주화산에서 다시 남북으로 갈리는데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나뉜다. 북쪽으로 가는 산줄기는 금남정맥이요. 남쪽으로 가는 산줄기는 호남정맥이다. 이 호남정맥이 영취산, 장안산을 시작으로 섬진강과 금강을 나누고 전라 우도와 좌도를 가르며 남으로 뻗어가며 전라도의 땅들과 물줄기들을 구분한다. 호남정맥의 마루금은 진안 곰티재, 만덕산, 임실의 슬치, 경각산, 오봉산, 초당골(막은댐), 옥정호를 지나 모악산 분기점에 이른다. 이어 내장산, 추월산을 거쳐 전남 광양의 백운산까지 장장 462km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때 오봉산을 지난 미루금이 국사봉에 이르러 커다란 줄기 하나를 오른쪽으로 슬그머니 내려놓고 지나가는데, 그 산줄기 안에 모악산이 있다. 모악산의 줄기는 세 개의 행정구역(전주시, 김제시, 완주군)을 나누며 배재, 장근재, 밤티재의 부드러운 능선이 있고, 금산사 방면의 내모악과 동쪽의 구이 방향의 외모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세는 기운찬 호남정맥의 힘을 그대로 이어 우뚝 솟구쳐서 서해에 닿을 것처럼 길게 뻗어 내리다가 산자락 아래 사방 백리가 넘는 호남평야를 펼쳐놓았고 북쪽으로는 천년고도 전주를 품에 안고 있다. 호남평야는 모악산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금남정맥, 남쪽에는 호남정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남평야 한가운데서 보면 마치 어머니가 양팔을 벌려 사방 몇 백 리의 너른 들녘을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다. 또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안덕저수지를 채우고,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흘러들어 호남평야를 넉넉하게 해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모악산의 주능선은 호남정맥 초당골(막은댐)에서 서쪽으로 1.3km를 뻗어 가는 모악산 분기점에서 호남정맥과 나뉜 뒤, 북쪽으로 뻗어가며, 엄재, 국사봉, 밤티재, 화율봉, 배재, 장근재를 지나 모악산 정상까지 도상거리로 15.8km가 이어진다. 그리고 가지능선을 구이리, 상학리, 중인리, 추동, 금산사 방향 등으로 흘러내린다. 정상에서 주능선은 서북능을 따라 매봉과 연불암 뒷산의 암벽지대를 지나 2.5km쯤에 이르면 두 갈래를 친다. 북쪽으로 가는 줄기는 송전탑을 지나 독배 뒷산과 중인리와 황소리 방향으로 달리다가 여맥을 가라앉힌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1.5km의 주능선이 고도를 내리면서 유각(전주-금산사/712번도로)에 이르고, 다시 1km쯤 고도를 올리면 모고산 어깨의 고스락에서 두 갈래를 치게 된다. 북쪽으로 뻗어 가는 산줄기는 매봉, 쑥고개의 1번국도, 전주대학교 뒤 천잠산을 지나서 이서 방향의 평야지로 숨어든다. 서쪽으로 가는 줄기는 0.5km지점의 모고산으로 뻗어간다. 모고산(헬기장)으로 뻗어간 주능선은 또 다시 두갈래를 치게 된다. 북쪽의 산줄기는 박바위, 벼락바위, 봉두산을 거쳐서 1번국도로 (4km)방향으로 뻗어간다. 서쪽의 산줄기는 귀신사 뒷산, 싸리재, 삿갓봉, 구성산, 선암제, 남산(금구)을 지나서 평야지로 뻗어 가다가 호남고속도로 앞에서 수명을 다한다.

 

 

 

풀뿌리 6大 악산 [조용헌살롱]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6.12.15 19:02 조용헌 큰 산을 보통 악산(岳山)이라고 부른다. 특히 바위가 높게 솟은 산들에 대개 악(岳)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붙었다. 여행이 쉽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전국 이 산 저 산을 여행할 수 있었던 특별 그룹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머리 깎은 승려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풍수를 공부하던 지관(地官)들이었다. 이 두 그룹은 산에 대해서 특별한 감식안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전국의 산들 가운데 ‘6대 악산’으로 꼽은 산은 이렇다. 서울의 관악산(冠岳山)이다. 경복궁에 세운 해태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만큼 강북의 사대부들에게 주목받은 산이 관악산이다. 관악산은 뾰쪽 뾰쪽한 바위 모양이 불꽃과 같다. 화체(火體)에 속한다. 닭 벼슬과 같은 모양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악산은 벼슬을 상징하는 악산으로 꼽혔다. 현재는 서울대가 그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서 벼슬과 무관하지 않다. 또 충주의 월악산(月岳山)이다. 월악산은 우리나라 산신(山神) 가운데 여산신(女山神)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월악산의 여산신이 여 산신으로서는 가장 유명하다. 여자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질’(膣)자는 달 ‘월’(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월악산의 돌이 희어지기 시작하면 통일이 된다는 민간의 속설이 전해진다. 설악산(雪岳山)은 저승과 관련이 있다. 설악산은 11월부터 눈이 쌓이기 시작해서 이듬해 4월까지는 흰 눈이 있다. 적어도 6개월이다. 남한에서 눈이 가장 오랫동안 쌓여 있는 산이다. 흰 눈이 쌓인 설악산은 저승에 가서 볼 수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초상났을 때 상복으로 흰색 옷을 입는 풍습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주의 모악산(母岳山)은 밑에서 보면 별것 아니다. 그러나 점점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볼 만한 산이다. 어머니의 모성(母性)을 상징하는 산이다. 전주시내의 완산칠봉(完山七峰) 쪽에서 모악산을 바라보면 평지에 우뚝 솟은 거대한 문필봉(文筆峰)으로 보인다. 원주의 치악산(雉岳山)에는 꿩의 보은 전설이 전해진다. 근래에는 한마음 선원의 대행스님 수도처로 유명하다. 개성의 송악산(松岳山)은 고려 500년 도읍지인 개성을 수호하는 지킴이 산이다. 한 번 올라가볼 만한 산들이다.  2006/12/16 09:4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