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五里霧中)의 오서산(烏棲山)
(1)
04/10/17(일)
충남 보령의 오서산에 오르다.
올 년 초부터 우리 부서는 무척이나 바빴는데
며칠 전 우리 회사 대천 연수원(대천 해수욕장 소재)에서
단합대회 한번 하자는 부서 직원들의 건의가 있었다.
11월, 부서의 큰 업무인 청주 산남 분양을 앞두고
직원들의 사기진작에도 좋겠다 싶어 선뜻 응낙했다.
여기에 우리 회사 사업 파트너인
제네로 개발 사장님 이하 직원들도 합류하였으니 더욱 뜻이 깊었다.
전날 저녁 오천항(30분 거리)에 가서 먹은
자연산이라는 깊은 맛의 횟요리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날은 오서산 등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들 중 일부가 엄살을 피우길래
"서해안의 산들은 뒷동산처럼 민둥산이다."
안심시키고 열외없이 출발하였다.
억새로 유명하다하여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산인데
나의 고향(서천) 인근에 있으면서도
아직 오르지 못한 산이라서 더욱 설레었다.
(2)
이동하는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황금들녘은
지금이 바로 가을 계절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단풍든 넓은 잎사귀가 떨어지는 사이사이
다글다글 붙어 있는 빨간 감들은 유년의 추억을 반추하게 한다.
길가의 코스모스조차 여기에 가세하여
한층 센치한 소년으로 만든다.
청라면 청천저수지의 투명한 수면에
특유의 가을빛이 담백하게 스며있다.
드디어 명대계곡입구에 도착했다.
40여명의 직원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가 없어
서너 명씩 무리지어 오르기로 했다.
거기에는 "서해안에 있는 산이 험하면 얼마나 험할까?"라는
안이한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장엄한 대자연을 얕잡아 본
불행의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3)
명대계곡 입구에서 매표소까지 이르기까지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으며
내가 미리 조사한 오서산에 관하여 일행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보령시 광천읍과 홍성군 청소면의 경계에 있으며
홍성 용봉산, 청양 칠갑산과 더불어
충남 서부의 3대 산인 오서산(791m)!
오서산은 우리나라의 1대간 1정간 13정맥 중 어디에 속할까?
오서산은 금강이북의 금북정맥에 속한다.
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에서 갈라져 나와 남서진하다가
천안 광덕산 부근에서 서진하고
청양 칠갑산을 지나 남서진하다가
보령 성주산을 깃점으로 북진하여
오서산을 일구고 계속하여 북진한 뒤
예산 가야산을 솟구치게 하고
다시 서진하여 서산의 안흥진에서 서해에 가라앉는다고 한다.
오서산은 금북정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서쪽은 보령시의 해안으로 육지로 깊숙이 파고든
만과 하천이 해안선의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산의 서쪽은 충청남도의 큰 저수지인 예당저수지의
가장 큰 유역하천인 무한천의 상류에 해당하고
계곡의 남동쪽으로는 칠갑산이 솟아 있다.
(4)
일행은 나의 유식함에 놀란다.
이어서 한 사람도 낙오하지 말라고
정상의 풍경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다.
계룡산(845m) 서쪽에 이보다 더 높은 산은 없는데
오서산에 오르면 그 고도감은
서해안 일대의 낮은 준평원지대와
해안 저지대로 인해서 더욱 높아 보인다.
산은 대체로 육산이나 곳곳에 돌출한 바위가 있어
전망대가 되어 주고
긴 주능선에는 교목이 전혀 없어
시야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주능선은 대체로 황소잔등처럼 펑퍼짐한데
그곳에 억새가 왕성하게 자라
억새꽃이 필 무렵에는 장관을 이룬다.
다시 말하자면 오서산(烏棲山)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산줄기가
서해로 향하다가 대천 앞 바닷가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솟구쳐 올라간 산으로,
천수만 바닷물이 산 아래 깔리고
정상에 오르면 서해바다가 막힘없이 보여
일명 「서해의 등대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천수만을 지니는 고깃배들이
오서산을 바라보면 방향을 잡았다고 하며
붉은 일몰(日沒)이 장관이라 한다.
정상을 중심으로 약 2㎞의 주능선은
온통 억새밭으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은 수천 평 넓이로 펼쳐진 억새풀밭 한가운데
펑퍼짐하게 솟아있어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서해바다와 천수만 일대가 막힘없이 보이고
멀리 가야산과 칠갑산, 성주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5)
매표소를 통과하자
숲이 울창한 명대계곡이 나타난다.
왼편에 명대계곡을 끼고 숲 그늘을 오르니
중턱에 암자가 나타나는데 월정사라 한다.
월정사 마당의 단풍이 아름다워
일행과 사진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해 본다.
이어서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데
벌써 선두와 후미 그룹으로 나뉜다.
최부장의 걷는 모습을 관찰하니 많이 단련된 노련한 걸음새이다.
정사장님은 사업에 바쁘셔서 운동에 소홀했는지 헉헉거린다.
휴일이라서 등산객이 꽤 많다.
8부 능선까지 오르니 완만한 산마루가 나타난다.
여기서 잠시쉬어 간다.
(6)
위를 올려다보니 급경사의 바윗길이다.
옛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아 오서산이라 불려졌다는데
오르는 내내 까마귀 소리는 물론 흔적도 보지 못했다.
바윗길을 한참 오르니 드디어 정상의 철탑이 보인다.
핸드폰 중계탑 같다.
우리나라 산 꼭대기마다 철탑을 박아 놓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꼭 이렇게 철추를 박아야 통신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정사장님과 보조를 맞추며 정상 부근을 지나니
허연 억새꽃이 햇빛에 은빛으로 설렌다.
내 가슴마저 덩달아 쿵쾅거린다.
(7)
출발 한 시간 만에 정상에 오르니
주변의 파노라마가 일대 장관이다.
오른쪽 멀리로 광덕산에서 흘러오는 금북정맥이 한눈에 파악되고,
동으로는 청양 칠갑산이 피라미드처럼 솟구쳐 있다.
남으로는 백월산과 성주산이 마주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대천해수욕장부터 서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원산도와 안면도가 뚜렷하고,
그 안쪽 천수만과 독배만이 호수처럼 잔잔하다.
완만한 길고 긴 능선에는 뒤덮인 억새풀들 속에 묻힌
사람들의 얼굴에 또 하나의 꽃, 웃음꽃이 피었다.
긴 능선은 사람들의 행렬로 멀리 청소면 아차산 정자까지 이어졌다.
그러한 풍경과 함께
서해안의 너른 들판과 개펄이 발아래 깔려 있어
시원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하여 정상에서 떠나기가 싫다.
그런데 등산객중 아는 얼굴 하나가 보였다.
10년 전 주택공사에 근무할 때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김동인씨였다.
서울 사는 그와 나는 어떠한 인연이 있기에
서해안의 조그마한 산정에서 만난단 말인가?
그와 함께 세미나 참석차 일본에도 갔었으니
아무래도 대단한 인연이 있나 보다.
일행들은 산에서는 아는 사람도 쉽게 알아보지는 못하는 법이라며
좋은 날이라 축하해 준다.
그와 후일을 기약하며 헤어지고
일행과 정상 조금 아래 아늑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해본다.
(8)
배낭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꺼내어
일행에 고루 나누어 준다.
다들 물병 하나만 차고 올라와서인지 맛있게 먹으며 고맙다고 한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귤, 건어물, 과일 등에 배낭에 넣어 왔는데
고맙게 먹어주니 다행이다.
내리막길은 완만하고 낙엽이 적당히 쌓여 산악 달리기를 충동한다.
정사장도, 최부장도 뒤로 하고 내리달렸다.
한참달리다보니 십자로가 나타났는데
오른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일부러 그대로 직진했다.
내친 김에 산마루 몇 개를 넘고 싶었고
그래도 주차장에서 일행과 합류하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엽이 발목까지 차이게 쌓인 길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작은 산마루 다섯 개는 넘었는데
도대체 빽빽한 밀림 속에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할 오른쪽 길이 안 보인다.
일행에게 핸드폰을 하려고 여기저기 뒤져보았는데 핸드폰이 없다.
생각해보니 연수원에 두고 온 것 같다.
한 시간을 뛰었을까?
이번에는 임도(林道)가 나타났다.
(9)
임도는 대개 산 아래와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어서
그대로 오른쪽 방향으로 임도를 돌기로 했다.
사람키 만한 일년초로 뒤덮인 임도는 통행이 없는지
군데군데 움푹움푹 패었다.
그러한 길을 아무리 뛰어도 산 아래 마을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저 산중턱을 환상형으로 도는 것 같다.
가도가도 산등성이에 시야가 막혀있어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할 수 없이 길도 아닌 길을 뚫고,
밀림을 헤집으며 산 아래로 내려왔다.
외딴 농가가 보였다.
농가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에게서 여기가 수정리란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빌려 나형근과장에게 전화하니
지도를 보고 곧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그 집 마당에 있는
빨갛게 익은 장두감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산 아래 마을로 향했다.
(10)
외딴집으로 연결된
길고 긴 시골길을 내려오니
마을이 보였고 가을걷이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과장이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하며
볍씨를 도로변에 말리고 있는 주민에게 다가가 수인사를 나누고
명대계곡까지 거리를 물으니 4km란다.
4km 다른 방향으로 내려왔으니
산을 탈만큼 탔다고 자부하는데 나의 오만을 반성한다.
산에서는 겸손하자.
서해안 야산이라고 오서산을 깔본 것에 대한
까마귀 귀신의 벌(罰)이었던가 보다.
까마귀 귀신은 다섯 시간을 헤매게 만들었다.
마을 주민이 딱한 사정을 듣고
일손을 잠시 접고 명대계곡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나서는데
멀리 나과장 차가 나타났다.
나과장의 전언에 의하면 일행들이
"이사님이 오서산에서 오리무중이 되었다."고 수군 거렸다나?
오서산은 뒷동산이 아니었다.
큰 산이었다.
덕분에 모처럼 운동한번 잘했다. 오
서산에서 오리무중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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