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덕유산(德裕山)의 구천 굽이를 돌고 돌아오다.(05/08/17 그대 그리운 저녁Evening yearning for you)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3. 13:30

 

 

 

 


덕유산(德裕山)의 구천 굽이를 돌고 돌아오다.

(1)
05/8/17 하계휴가 기간에 아내와 9시간 덕유산행을 하다. 언젠가는 가보고 싶었던 산! 그러나 삶에 얽매어 지천명(至天命)에 이를 즈음에야 너를 찾았구나. 남덕유, 북덕유, 그리고 적상산! 그 얼마나 정겨운 이름이던가? 얼마 전 뚫린 대진 고속국도를 이용하니 예전엔 심산유곡이라던 무주에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네가 있었구나! 그래 게으른 내가 너무 무지하여 너를 이제야 찾아보게 되었구나. 미안하다. 그러고도 산하(山河)를 사랑한다 할 수 있을까? 덕유야! 그렇지만 너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련? 이렇게 자문자답하면서 웅장한 덕유의 산세(山勢) 앞에 마주섰다.

(2)
덕유산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구천동’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암행어사 박문수의 설화에 의하면 구(具)씨와 천(千)씨가 많이 살았는데 그들 두 성씨를 따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한글학회 지명총람) 둘째, 계곡을 따라 기이한 바위가 9000개나 있어 그리 불렀다고 한다.(한글학회 지명총람) 셋째, 예전에 절이 많이 있어서 수도승이 9000명이나 머물러서 그리 불렀다고 한다.(한글학회 지명총람) 조선 명종 때 광주 목사를 지낸 갈천 임훈의 <등덕유산 향적봉기>에 성불공자 9천명이 머문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했다고 하며 그들의 아침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은 뜨물이 개울물을 부옇게 흐렸다고 한다.

(3)
이때부터 구천둔이라는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천동’에서의 ‘구’는 아홉과는 별 관련이 있지 않아 보인다. 우리말에서 ‘구(九)’는 단순히 ‘아홉’의 뜻만 아니라 구우일모(九牛一毛), 구서(九暑), 구척장신(九尺長身) 등과 같이 ‘크다’나 ‘길다’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주구천동은 엄청나게 긴 골짜기다. 이 길고 아기자기한 골짜기를 우리 조상들은 단순히 ‘심곡(深谷)’이니 ‘장동(長洞)’이니 하는 표현만으로 부족했던가 보다. 그래서 여기서 생각해낸 것이 ‘길고 굽음’의 뜻으로 많이 씌어 온 ‘구(九)’자를 취했을 것이고, 이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천(千)’이라는 숫자까지 보태어 ‘구천(九千)’이란 말을 생각했을 것이다. 숙종임금 때 소론의 거두 윤명제 같은 이는 구천동이 들어있는 덕유산을 불교의 소국이라 일컬을 만큼 이곳 덕유산 속에는 1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이웃고을 금산에 살던 한 여인이 수도를 하기위해 구천둔에 입산한 남편과 약속한 3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남편을 찾아 나서서 2년 동안을 해매다 결국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고 할 정도로 산과 계곡이 깊다.

(4)
산행길은 [구천동 입구 - 금포탄 계곡 - 백련사 - 향적봉 - 중봉 - 오수자굴 - 백련사 - 입구]의 일반적인 코스로 정했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고 더구나 아내와 동행하는 관계로 인터넷으로 조회하여 하루 일정으로 무난하겠다싶어 그리 정했던 것이다. 초입의 야영장을 지나니 집채만한 바위들이 계곡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계곡을 따라 백련사로 향하는 오솔길이 울창한 숲 그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렇게 깊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구천동 15경 월하탄이며, 16경 인월담이 연이어 나타났다. 무주군 설천면(雪川面) 소천리(小川里)에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 즉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었던 석굴문(石掘門)에서 덕유산 상봉에 이르는 25 km의 계곡에 펼쳐지는 33경(景)은 계곡미가 뛰어나 덕유산국립공원의 중심부를 이룬다. 구절양장(九折羊腸) 9,000굽이를 헤아린다는 계곡에 나제통문을 제1경으로 하여 덕유산 상봉을 제33경이 연이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단다.

(5)
더구나 이 금포탄 계곡은 자연 휴식년제 구간으로 너무나 맑고 깨끗하다. 계룡산이나 모악산, 속리산등 전국의 어느 경승지에 가더라도 아쉬운 점은 입구에서부터 계곡 깊숙이까지 잡상인, 음식점등이 파고들어 경관을 버려놓는데 이렇게 길고 긴 계곡에 문명의 쓰레기 하나 없이 자연 그대로의 비경(秘境)을 간직하고 있으매 경탄스럽다. 그래서 그런지 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저 모롱이를 돌면 어떠한 경치가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렌다. 무주구천동 33경은 “1) 나제통문(羅濟通門) 2) 은구암 3) 청금대 4) 와룡담 5) 학소대(鶴巢臺) 6) 일사대 7) 함벽소 8) 가의암 9) 추월담(秋月潭) 10) 마조탄 11) 파회 12) 수심대(水心臺) 13) 세심대 14) 수경대(水鏡臺) 15) 월하탄 16) 인월담(印月潭) 17) 사자담 18) 청류동(淸流洞) 19) 비파담 20) 다연대 21) 구월담(九月潭) 22) 금포탄(琴浦灘) 23) 호탄암 24) 청류계(淸流溪) 25) 안심대 26) 신양담 27) 명경담 28) 연화폭 29) 이속대 30) 백련사 31) 구천폭(九千瀑) 32) 백련담 33) 향적봉”을 말하는데...

 

 

 

 

 

 [나제통문]


(6)
제 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은 가 보진 않았지만 중요하므로 그 유래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무주군 설천면(雪川面)과 무풍면(茂豊面) 사이의 암벽을 뚫은 인공동문(洞門)인 나제통문은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높이 3m, 길이 10m로 본래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곳인데, 그것이 뚫리게 된 경위와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래 나 ·제(羅濟)의 국경이었던 동문은 그 후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도 계속 행정구획의 경계가 되어 오다가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에 이르러서 동문 밖의 무풍현(茂豊縣)이 동문 안의 주계군에 합쳐졌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재의 무주군으로 개칭되었다.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오늘날에도 동문 안쪽 사람과 바깥쪽 사람, 즉 무주 사람과 무풍 사람 사이에는 언어 ·풍습 등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7)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계곡, 그러나 맑은 물, 층암(層巖)이 가득한 계곡은 고단함과 지루함보다는 감탄을 토해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문득 지금쯤 잠자고 있을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아내가 손전화를 달랜다. 학원 갈 시간이 임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배낭을 아무리 뒤져도 손전화는 없다. 차에 두고 온 듯하다. 백련사에서 내려오는 어떤 다정한 부부에게서 빌려 전화해도 무감청(無感廳)이다. 그제야 우리가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음을 절감했다. 계곡의 깨끗한 물이 스쳐 흐르는 송어양식장을 지나니 오솔길 한켠에서 산악자전거를 타시는 분이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 분에게서 다시 빌려 눌러봐도 무감청. 백련사에 가면 공중전화가 있을 것이란 내 말을 듣자마자 아내가 뛰기 시작했다.

 

[일주문] 


(8)
평소 항상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오던 아내의 모습이 아니었다. 산악 마라토너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도 아주 좋았다. 아내는 백련사 일주문 앞까지 2km정도를 그렇게 뛰었다. 일주문 앞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백련사로 오르는 가파른 층계를 단숨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나도 평상시 같으면 단아한 일주문을 감상하며 갔으련만 힐끗 훔쳐보기만 하고 좇아가야했다. 오른 쪽에 백련사가 보였는데 높다란 계단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 계단도 뛰다시피 오르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니 내가 오히려 다리 힘이 푹 빠지는 느낌이었다. 간신히 다다른 천왕문 옆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그런데 웬걸? 카드식이다. 다시 대웅전에 오르는 층계를 올랐다. 살펴보니 고즈넉한 아침의 산사(山寺) 뜰을 거니는 보살님이 보였다. 합장을 하고 사연을 말씀드리니 순순히 손전화를 건네신다. 그제야 통화할 수 있었는데 짐작대로 그때까지도 아이들은 자고 있었다. 철딱서니 없는 녀석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덜 영글었다. 다른 아이들은 일찍 철도 들더라만... 우리가 너무 귀엽게만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나타난 대웅전]


(9)
보살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대웅전 옆에 자리한 옹달샘에서 시원한 약수 한 사발을 마시고서야 댓돌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바라보니 대단한 모성애(母性愛)라고 백련사는 말하고 있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보는 요사채가 그야말로 연꽃이다. 주위를 둘러싼 덕유산의 완만한 능선은 연잎인양 넌출대고 있고 치솟은 전각들의 추녀 끝 귀솟음 사이로 보이는 배흘림기둥은 연줄기 같고 그 위에 얹혀진 평방을 장식한 소로며 첨차, 그리고 갈모산방등 포작의 짜임새를 화려하게 장식한 단청(丹靑)은 마치 살짝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듯이 보여 굳이 백련사(白蓮寺)라 말하지 않아도 백련사임을 알겠다. 그래도 백련사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보지 않을 수는 없다.

(10)
백련사(白蓮寺)는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덕유산에 있는 구천동계곡이 끝나는 고도 940m 지점에 있는 절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신문왕 때 풀로 지붕을 이어 암자를 짓고 수도를 하던 백련(白蓮)이란 사람이 수련하던 장소에서 흰 연꽃이 솟아나와 이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새로 지어진 사실 외에 자세한 역사는 전하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중수(重修) 과정을 보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900년(광무 4)에 현감 이하섭이 새로 지었고, 그 후 6·25 전쟁으로 불타 버린 것을 1961년에 대웅전을 새로 짓고, 1968년 요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1975년 단청 공사를 하고, 1977년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만들어 좌우에 세운 사천왕문과, 지장보살을 주로 하여 염라대왕과 10대왕을 모셔 놓은 명부전을 보수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수선당·명부전·사천왕문·일주문 등이 있는데,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백련사 안의 문화재로는 1723년(경종 3)에 주조된 범종을 소장하고 있고,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매월당 부도가 있는데, 전체 높이 2m, 지름 1m의 돌로 만든 종 모양의 부도로서,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를 새겨 넣은 받침돌과 몸체로 이루어진 단순한 모양의 부도이다. 그 외 지방 기념물로 백련사 계단이 전라북도 지방 기념물 제42호, 백련사지가 전라북도 지방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11)
기타 덕유산의 유명한 건축물로는 안국사와 적산산성이 있는데 안국사는 적상산의 적상산성 안, 해발고도 1,000m 지점에 있는 절로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1613년(광해군 5)과 1864년(고종 1)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극락전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적상산 사고(史庫) 현판을 소장하고 있다. 적상산에 있는 적상산성은 1628년(인조 6)에 축조한 산성으로, 사적 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4면이 절벽으로 둘러진 산정부의 분지가 성 안에 해당되며, 본래 성 안에는 4대 사고의 하나였던 적상산사고(史庫) ·선원각(璿源閣) 및 현존하는 안국사 외에 호국사 등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약 3km의 성지(城址)와 군데군데의 석축 및 높이 1∼3m의 북문지 ·서문지 ·사고지가 남아 있을 뿐이란다. 한편, 산성 일대의 산지는 가을의 단풍이 아름답고, 설천면 남대천 일대는 반딧불의 유충인 다스레기 서식지로 천연기념물 제32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리고 무주구천동 환경단체들의 자연파괴고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키장 등 레저시설을 갖춘 무주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천왕문]


(12)
백련사 뒤편에 위치한 계단(戒壇)을 돌아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가자니 마치 시골 앞동산을 오르는 느낌처럼 편안하다. 그야말로 유덕(有德)하고 풍만한 산이란 생각이 든다. 별다른 암벽이나 급경사가 없고 완만하기만 지루할 것 같은데, 연이어 나타나는 절경(絶景)은 또 다른 절경에 대한 그리움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해발 1,200m를 넘자 고산지대 특유의 서늘한 기운과 함께 난쟁이 수목들과 주목(朱木)군락이 나타났다. 그래서 위를 쳐다보니 하늘이 보여 거기가 정상인가 했는데 뒷동산 같은 산마루가 연이어 나타났다. “그래! 그래도 덕유산이 남한 5대 명산이라는데 그렇게 쉽게 정수리를 보여줄 리는 없겠지!“ 이런 생각으로 오르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는데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여서 물어보니 무주리조트에서 케이블카로 올랐단다. 아하! 문명이 이기(利器)가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었구나. 그들은 백련사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우리가 삼공 매표소부터 걸어 왔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한다. 길옆에는 동자꽃, 물봉선등 야생화가 즐비하다.

(13)
어느덧 정상인가 했는데 나무계단이 또 나타났다. 잘 놓인 나무계단을 오르니 그제야 1,614m의 정상에 너럭바위가 보였다. 잠시 너럭바위에 앉아 주위를 조망하니 북측에는 스키장 곤돌라 터미널 너머로 적상산이 보일 듯 말듯 하다. 덕유는 무지한 인간에 의하여 산 한쪽이 뭉개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이 정산의 평전(平田)만큼은 대자연의 신비를 오늘도 잃지 않고 있었다. 산 밑에서는 구름이 밀려 올라오고 향적봉은 이를 없애느라 부지런히 팔을 휘젓는다. 산은 늘 그대로인데 산을 접하는 우리의 자세는 늘 변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뒤돌아서 이번에는 남측을 바라보니 산의 넓기가 한량없는데 덕유산장 너머 중봉까지 느릿한 산세를 따라 난쟁이 초목들이 기어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가 보았던 스위스의 알프스 산자락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다는 남덕유는 커녕 무룡산도 보이지 않는다. 금새 흰구름이 우르르 몰려와 발아래 산장마저 감춘다. 향적봉에 쉽게 올라 남덕유마저 탐하려는 이들에게 모습을 보여주기를 꺼리는 것일까. 아니었다. 이내 구름이 벗겨지면서 햇빛을 허용하곤 한다. 동엽령과 무룡이 다시 한 번 춤판을 벌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삿갓봉이, 남덕유가 서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 팔을 훠이훠이 휘젓기 시작했다. 덕유, 역시 넉넉하고, 기운이, 흥이 넘치는 산이었다.


(14)
그렇게 정상에서 30여분 머물다 정상아래 덕유산장으로 내려왔다. 덕유산을 종주하는 이들의 쉼터이다. 올 가을 다시 올 나의 안식처라고 생각하여 안을 둘러보니 식당, 매점, 간이침대등 평범한 구조이다. 산장 옆에 옹달샘이 있었다. 이른바 산상옥수(山上玉水)이다. 태조 이성계가 수도할 때 이 옥수를 떠다가 공을 들였다고 해서 태조가 왕으로 등극한 후 사람들이 이 옥수를 왕생수(王生水)라 불렀다고 전한다. 덕유산 상봉이 향적봉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향적목(香積木), 곧 주목(朱木)이 숲을 이루었던 데서 유래했단다. 왕생수가 솟아난 곳에 향적암(香積庵)이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옛날 마패로 사용했던 나무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주목은 현재 천연기념물로 덕유산 내 99ha에 300년생 7,488본이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15)
덕유산(1975.2월 국립공원지정)은 백두대간이 소백산으로 분기하면서 영남과 중원을 갈라놓기 시작한 뒤 속리산을 지나고 추풍령을 거쳐 민주지산 일대의 고산을 빚어놓고 지리산에 합류하기 전 1,600미터에 이를 정도로 지리산에서 뽐낼 산등걸을 미리 어깨춤추어 보는 듯한 산이다. 백두대간은 덕유산을 지나면 다시 1200미터대로 낮아졌다가 운봉면 일대에서 야산의 높이에 다름없는 낮은 봉우리들로 이어지며 간신히 지리산에 바톤을 넘긴다. 남한 쪽 백두대간에서 설악산을 빼고 덕유산만큼 높은 산은 없다. 그래서 덕유산에 올라가면 가장 장대한 경관을 이루며 다가오는 산이 지리산이 된다. 덕유산은 덕유산 향적봉에서 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16km나 되는 긴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소백산 주릉에 비해 더 길고 높이는 더 높다. 국립공원 덕유산 산행의 특징은 소백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높은 능선의 종주를 위주로 한 산행의 묘미에 있다. 처음 계곡산행을 할 때에도 덕유산의 진면목은 충분히 드러난다. 무주구천동 계곡은 폭류와 소가 잇달아 나오고 거창 쪽 월성계곡도 이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계곡미를 보이고 있다.

(16)
그래도 덕유산에 오면 산행의 대부분을 능선위에서 하게 되는데 조망이 좋다. 그만큼 덕유산능선은 매력 있는 산행을 보장한다. 지리산 능선에서는 아래쪽 계곡을 내려다보기도 힘이 든다. 그 만큼 덩치가 크기 때문이다. 설악산에서도 대청봉에서 천불동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화채릉이나 공룡능선에서 천불동을 바라볼 때 더 아름다운 것은 거리 때문이다. 덕유산에서는 이 거리가 적당한 고도에서 유지되기 때문에 능선을 넘고 봉우리를 지날 때 느끼는 기분이 유달리 좋다. 덕유산은 장수군 계북면에서 적상면과 무주읍에 도착할 때까지 19번 도로와 나란히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가는 산이다. 산의 남쪽엔 1507미터의 남덕유산과 그 보다 조금 더 높다는 장수덕유산(1510)이 솟아있고 북쪽에는 백두대간에서 조금 비켜서서 향적봉과 중봉(1594)이 솟았다. 중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은 고도가 갑자기 낮아지면서 백암봉으로 이어지고 이 백암봉에서 백두대간 길로 들어서게 된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무룡산(1492)고 삿갓봉(1410)등 덕유산맥 중간의 거봉들이 나타난다. 향적봉과 중봉일대에서는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도 기름진 산간평야로 주목한 무주군 안성면일대와 장수군 계북면, 장계면일대의 평야지대와 거창군 위천면의 평야지대가 눈에 들어오지만 무룡산과 삿갓봉으로 오면 남덕유산에서 동남으로 뻗은 월봉, 금원, 기백산이 조망되면서 전망은 더욱 호방해지고 능선의 경관은 더욱 수려해진다.
(17)
덕유산은 반도 남부의 한복판을 남북으로 꿰고 있어서 자연장벽이 되어 역사적으로 신라와 백제가 각축하던 국경선이었고 영호남을 가르는 장벽 가운데서도 가장 험한 경계선 중의 하나였다. 주위의 행정구역을 보면 이곳의 첩첩산중 위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영남 쪽은 경상도의 삼수갑산이라는 거창군이고 호남 쪽은 첩첩산골의 대명사인 무주구천동의 고장 무주군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장수현편에 나오는 덕유산에 대한 언급은 부근의 영취산, 성수산, 백화산에 대한 짤막한 언급과 똑같은 길이로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는 한 구절뿐이다. 조선조 때에는 덕유산처럼 궁벽한 시골변방에 위치한 산일수록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다. 치악산이나 금강산에 대한 시가(詩歌)가 장문으로 소개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덕유산은 지리, 설악에 이어 등산인들의 사랑을 받는 내륙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우선 산의 북쪽 계곡인 무주구천동은 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계곡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고 장수 쪽의 칠연계곡과 토옥동계곡은 무주구천동에 못지않고, 거창 쪽의 월성계곡도 덕유산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명성이 높다.

(18)
덕유산은 어떻게 해서 유려하고도 장대한 산세를 이루게 된 것일까? 덕유산의 고산부를 이루는 지질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인 편마암이기 때문이란다. 덕유산의 편마암은 지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마암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원생대 중기 약 20억~18억 년 전의 것들이라고 한다. 이 편마암은 화강암과 달리 수평적으로 단단한 암석의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절리의 발달이 저조하다고 한다. 따라서 암석의 침식과 풍화를 이끄는 주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분 침투가 어렵기 때문에 특이하고도 다양한 암석 지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에 반해 무주 구천동계곡은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암석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는 구천동계곡의 지질이 덕유산 능선부를 이루는 지질인 편마암과는 판이한 암질로 이루어져 있어서란다. 제2경 은구암에서 제12경 수심대에 이르는 와룡담, 일사대, 학소대 등의 지질은 석영 안산암으로서 침식과 풍화에 강하여 주로 절벽 형태의 노출된 암상을 이룬다. 한편, 구천동 제13경 세심대에서 제30경 연화폭에 이르는 지역은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일대는 불규칙적인 절리의 발달로 인하여 담(潭)이나 소(沼) 등 다양한 하상 경관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독특한 석영 암맥이 곳에 따라 습곡을 이루고 있어 특이하고도 기괴한 하상 경관이 탄생했다. 수경대, 월하탄, 사자담, 호탄암, 구천폭포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죽어 천년을 만지며]


(19)
중봉으로 가는 길은 야생화 천국이다. 여름 덕유산의 중봉, 무룡산, 서봉 일원은 야생화의 최대 군락지라는데 유명하다는 원추리 군락은 철이 지나 볼 수 없었지만 청포도 같은 열매를 단 원추리는 내년(來年)을 준비하며 다른 야생화들에 자리를 내주고 고개 숙이고 있었다. 코스모스 같이 어여쁜 동자꽃, 막 시집온 새악시같이 웃고 있는 물봉선, 큰 키를 뽐내며 금부채를 펼쳐 든 듯 한 금마타리꽃, 술에 취하여 불그레해진 술패랭이꽃 등등이 덕유 종주의 백미(白眉)라는 덕유평전에 위의(威儀)로운 주목군락과 어우러져 있어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중봉 못 미쳐서 주목(朱木) 그늘아래 배낭을 풀고, 등산화를 벗고, 양말까지 벗어던지고 아내와 마주 앉아 먹는 점심은 꿀맛 그 자체이다.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도 야생화만큼이나 화사하다. 식사 후 다시 중봉으로 가는 산릉에도 역시 야생화가 무수히 피어있어 천상화원이란 수식어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안개가 연출하는 풍광은 대자연의 신비 그 자체다. 거기에 향적봉에서 남덕유로 이어지는 장쾌한 주능선과, 동쪽으로 산릉이 겹을 이루고 그 끝에 곧추선 합천 가야산 일원의 조망은 산사진 작가들이 국내 최고의 균형미로 꼽는단다.

(20)
서봉 일원은 향적봉~중봉 코스에 비해 찾는 이가 적어 더욱 호젓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단다. 올가을에 종주하고 싶은 길이다. 영각사 매표소을 출발해 남덕유와 서봉을 거쳐 육십령 방향(남쪽)으로 향하다 첫 번째 갈림목에서 왼쪽 길을 따라 덕유교육원로 내려서면 5시간 걸린단다. 육십령까지 걸으면 1시간30분쯤 더 걸린다고 한다. 종주산행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행할 경우, 영각사 기점이든 육십령 기점으로 삼든 삿갓재대피소에서 하룻밤 묵는 일정으로 짜는데 준족이라면 하루에도 간단다. 북쪽에서 출발한다면 곤돌라를 타고 향적봉대피소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이튿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영각사까지 하루에 갈 수 있다는데 역시 준족들은 육십령까지도 하루에 가능하다고 한다. 백두대간의 중추인 덕유산의 종주 여정은 [육십령(734m)-할미봉-서봉(1500m, 6.8km=3.5h)-남덕유산(1507.4m, +1.2=8.0km=4.0h)-월성재(+1.4=9.4km=4.5h)-삿갓재(+2.9=12.3km=5.5h)-무룡산(1492m, +2.1=14.4km=6.5h)-동엽령(+4.1=18.5km=8.5h)-송계삼거리(+2.2=20.7km=9.0h)-중봉(+1.0=21.7km=9.5h)-향적봉(1,614m, +1.1=22.8km=10.0h)-설천봉(+0.6=23.4km=10.5h)]로 넉넉잡아 하룻길로 12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다. 그만한 체력을 기르고 가을에 도전해보리라 다짐해 본다.


[중봉으로 가는 길]


(21)
중봉에 도착하여 오수자굴과 동엽령으로 내려가는 삼거리에서 휴식하기 좋은 너럭바위에 피곤한 몸을 누이니 멀리 남덕유가 보일락말락이다.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수해(樹海)를 이룬 관목들마저 그 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그러한 가운데 잠깐 잠이 들었는가 하였는데, 우리 부부의 몸뚱이가 하늘나라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문득 선잠을 깨니 발 아래로 거대한 용(龍)이 솟구치듯 계곡에서 흰 구름이 일어났다. 자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신비경이었다. 일순간 구름안개는 이리저리 휘날리며 조화를 부렸다. 산릉은 꿈틀거리고 거대한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구쳤다. 마치 우리가 무룡산(舞龍山·1491.9m)에 다가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산봉이 솟아오르고, 산릉(山陵)의 등장에 놀란 구름이 차츰 떠오르더니 결국 파란 하늘에 뒤섞여 버리고 만다. 그러자 먹장구름에 모습을 감추었던 남덕유(1507.4m)와 서봉이 우뚝 솟구치고, 삿갓봉은 푸른 숲과 반짝이는 바위를 얹고 맑은 기운을 뿜어낸다. 붉은 숱을 자랑하는 산오이풀 꽃길을 따라 산릉을 걷고, 잠자리 군무의 환영을 받으며 산길을 따라 걷는 사이 다시 구름이 밀려들더니 따가운 여름 햇살을 가려준다. 그러다 조망점이다 싶은 지점에 도착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구름이 걷히면서 파란 산야가 드러난다. 허벅지와 팔이 살짝살짝 긁히는 데도 흥겹기만 하다. 또 다시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빗줄기를 뿌린다. 온 몸이 후줄근하게 젖어도, 퉁퉁 당겨오는 장딴지에 발걸음이 무디어져도 좋기만 하다. 덕유산 능선길이 이렇게 좁고 숲이 우거져 있다는 것은 분명 자연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반가울 수밖에 없다. 흥겨운 마음이 흥겨운 풍광을 보여준다. 그렇게 산죽과 관목이 우거져 보이지 않는 하산 길을 헤집으며 야생화에 눈 맞춤하며 오수자굴로 내려왔다.

 

(22)
중봉에서 오수자굴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다. 어느덧 관목(灌木)들도 사라지고 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고로쇠나무등 키 큰 나무가 8월의 산자락을 내려가기 좋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데 무심한 안개는 제멋대로 우르르 몰려와서는 천지사위(天地四圍)를 암흑천지로 만들더니 후두둑 빗방울을 뿌리고는 금세 우르르 몰려가서는 대낮의 햇빛에 어두운 숲이 환하게 드러나곤 했다. 인적이 드문 이 길을 초로(初老)의 등산객 한 분이 올라오셔서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으니 우리가 온 반대방향인 [중봉-향적봉-백련사]쪽으로 가신단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 분의 인영(人影)을 뒤로하고 훠이훠이 내려오니 커다란 동굴 하나가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23)
오수자굴은 50여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자연동굴인데 넓이에 비해 천정이 낮아 그것이 오히려 여기가 모든 잡념을 끊어버리고 수행하기 좋은 기도처(祈禱處)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계조굴(繼祖窟)’로 불리던 산인(山人 : 산속에 사는 불승이나 도사)들의 좋은 수행처(修行處)였다고 한다. 계조굴은 1657년에 백곡도인(白谷道人)이 쓴 <임성대사행장(任性大師行狀)>과 《대동지지(大東地志)》무주조 등에는 ‘繼祖窟’로 표기한 것을 보면, 임성 충언이 1618년(광해10)에 이 굴속에 은거하며 수행하였듯이 조사(祖師)들이 대를 이어가며 수행하던 동굴이라는 의미로 ‘계조굴’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갈천의 <등덕유산향적봉기>에는 ‘戒祖窟’로, 윤증의 <유여산행>시에는 ‘계주굴(戒珠窟)’로 언급하고 있다. 이 중 <유여산행>에 의하면, 1652년경에 나이 80여세 되는 산인(山人) 계주(戒珠)가 문도들을 모아놓고 경전을 전수해 주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소요 태능(逍遙太能:1562~1649)과 같은 오씨성(吳氏姓)을 가진 수좌승(首座僧) 곧 선종의 승당에서 한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는 불승 또는 선원에서 참선하는 수행승이란 의미의 수도승이 머물며 수행하던 굴이라는 의미로 일컫던 ‘오수좌굴(吳首座窟)’이 전음(轉音)되어 ‘오수자굴(吳秀子窟)’로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4)
오수자 굴을 지나자 백련사까지 이어졌던 구천동 계곡이 예까지 올라와 있다. 계곡을 따라 드러난 오솔길은 우거진 산림에 파묻혀 있다. 지난여름 폭우에 쓰러진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등걸을 들어내고 벌렁 누워있다. 천연의 삼림은 뿌리에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조금씩 뱉어내고 있어서 이 깊은 계곡은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넉넉히 흐르고 있다. 삼림 자체가 저수지인 셈이다. 잠시 그 물에 땀에 흥건한 얼굴을 씻고 손을 담가 보았다. 시원한 느낌이 손끝을 통하여 심장까지 전류처럼 타고 흘렀다. 드디어 백련사 - 다시 보아도 백련사의 계단은 높기만 하다. 올라 올 때 맛보았던 대웅전 옆의 옹달샘 맛을 못 잊어 그 높은 계단을 올라 한바가지 마셔 보았다. 하산하는 길에 아까는 그냥 지나쳤던 송어양식장을 무단으로 들어가 팔뚝만한 건강한 송어들이 노니는 모습을 관찰했다. 우두머리를 따라 수십마리가 빙빙 원을 그리며 군무(群舞)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산길의 구천동 계곡은 올라갈 때보다도 한없이 길기만 했다. 다리도 휘청거리고 온몸은 땀에 절어 후줄근했다. 그래도 마음만은 무릉도원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배달9202/개천5903/단기4338/서기2005/9/24 이름 없는 풀뿌리 라 강하

 

 


덧붙임)

 


1) 덕유산 산행 여정을 정리해 본다.

06:00-07:30 무주구천동 삼공매표소
07:30-08:00 인월암(1.5km=30분)
08:00-09:00 백련사(H=940m, +4.5=6km=1.5시간)
09:00-11:30 향적봉(H=1614.6m, +2.5=8.5km=4.0시간)
11:30-12:30 중봉(H=1594.3m, +1.1=9.6km=5.0시간)
12:30-13:30 오수자굴(+1.4=11.0km=6.0시간)
13:30-14:40 백련사(+2.8=13.8km=7.1시간)
14:40-16:30 삼공매표소(+6=19.8km=9시간)
16:30-18:00 귀가(歸家)


2) 덕유산에서 보았던 야생화

[산 중턱의 물봉선]

[술패랭이꽃]

[1000고지 이상의 동자꽃]

[말나리]

[긴산꼬리풀]


[으름덩쿨]




그대 그리운 저녁 (Evening yearning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