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변 따라가는 자전거 출퇴근길 20km
(1)
영등포에 事業場이
생겼을 때
성수에서 어떻게 관리할까 고민.
전철 2번 갈아타고 무려 1시간여 소요.
차량은 막히지 않는다면 30분이지만
한번 막히면 1-2시간소요.
성수를 떠나 공덕쯤에 이사?
계속 지속될지 모르는 사업장을 위하여
비싼 부동산중개비, 이사비 소요되는 이사는 포기.
(2)
오르내리는 승강장에서,
시루떡 같은 전철 속에서 떠오른 妙案.
그래! 자전거로 한번 출퇴근?
지도를 살펴보니
國家에서 정성들여 조성한
한강변의 막힘없는 산책로,
그리고 자전거 전용도로.
(3)
뿐이랴! 주변에 알뜰살뜰 가꾼
둔치의 야생화군락은 끝없이 물결치고...
그것도 계절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서울의 진주알 - 한강 시민 공원.
[살곶이다리(서울숲)-동호-한남-반포-동작-한강-여의도샛강]
살펴보니 20여km , 왕복 40km
그 정도면 충분한 운동도 될 터.
산에 못가는 心事도 달래고,
부대끼는 전철에서도 탈출하고,
인공적인 강변의 자연이긴 하지만
산에서 못 느끼는 野生의 세계도 接해보고
그래! 바로 그거였다.
그래서 시작한 한강변 자전거 출퇴근.
지금까지 약 2달 한강변을 달려본 所感은
한마디로 Good이다.
교통지옥인 서울에서
이렇게 잘 다듬어지고 가꾸어지는
인공적이긴 하지만 自然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驚異.
(4)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국가에서 가꾸어주는 庭園.
그 정원을 오늘도 자전거로
만끽하며 달려 나간다.
그리고 그 한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한다.
또한 돌아오는 한 시간 동안 시름을 잊는다.
미래를 구상하고
아이들을 생각하고
집에 오면 고단하여 드르렁 코를 골며 눕는다.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06/16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성수동-살곶이다리
1-1)성수에서 올라서는 중랑천변
1-2)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청계천과 중랑천 합수지점
1-3) 살곶이 다리로 내려가는 통로
1-4) 다리 앞 이정목, 뒤는 한양대학교
1-5) 국가가 아닌 구청에서 관리하는 “살곶이 다리”
성수동 [聖水洞, Seongsu-dong] 유래
면적 5.08㎢, 인구 7만 2489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은 화양동·자양동, 서쪽은 응봉동, 북쪽은 송정동·행당동, 남쪽은 한강과 접한다.
동 이름은 조선시대에 임금이 직접 나와 말 기르는 것과
군대의 연무(練武)를 사열하던 정자인 성덕정(聖德亭)의 '성' 자와
뚝도 수원지(水源地)의 '수' 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남부 두모방(豆毛坊) 전관계(箭串契)의 전관동(箭串洞)이었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 독도계(纛島契)로 되었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 서독도리(西纛島里)·동독도리(東纛島里)가 되었다.
1949년 성동구에 속하였으며,
1950년 성수동1가, 성수동2가로 바뀌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성수1가 1·2동, 성수2가 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뚝섬, 살곶이벌, 동교, 전교로 불렸고
한강과 중랑천의 합수로 평야가 형성되어 목장이 있었으며, 군대의 검열장이었다.
'경도십경'의 하나로 꼽혀 '전교심방'으로 불렸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과 강변대로, 동이로, 광나룻길, 구의로가 지나며,
동이로와 이어지는 남쪽에는 영동대교가 있다.
채소밭이던 성수동2가 지역은
1960년 이후 중소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준공업지대를 형성하였다.
강변대로 남쪽의 고수부지는 뚝섬유원지로서 각종 시설과 한강 유람선 선착장이 있고,
88서울올림픽 이전까지 경마장이었던 곳에는 뚝섬골프장이 들어섰다.
뚝섬 일대는 조선 태조(太祖) 때부터 임금의 사냥터였고,
무예를 검열하던 곳으로 임금이 거둥할 때마다 행차를 알리는 독기(纛旗)를 세웠다.
이곳 지형이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 모양과 같다 해서
독기를 세운 섬이라는 뜻으로 뚝섬·둑섬 또는 한자음으로 뚝도·둑도라고 하였다.
624번지에는 뚝도수원지(서울유형문화재 72)가 있는데,
1907년 우리 나라 최초로 서울에 수도를 놓기 위해 건설되었다.
살곶이다리(전곶교)
살곶이는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비로소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고,
또한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開川) · 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성종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세종이 주춧돌을 놓고 중단한 55년 후인
성종6년(1475)에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많은 백성들의 필요에 따라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14년(1483)에 완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10척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꾸었으며 돌난간은 없다.
고종 때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였으며,
1925년에 서울 지방의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1967년 12월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고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2009년 12월 서울시 성동구가 발굴조사를 거쳐 살곶이다리 복원에 나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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