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한강변 따라가는 자전거 출퇴근길 20km (3)삼거리-동호대교(옥수역)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7. 13:44
(3)삼거리-동호대교(옥수역) 3-1) 아늑한 쉼터와 병꽃과 지칭개, 뽀리뱅이의 향연 3-2) 옥수역쪽 노변의 갈밭 3-3) 동호대교, 옥수역 강변북로(江邊北路, 서울특별시도 제70호선) 경기도 구리시의 강북삼거리에서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가양대교 북단 시계를 연결하는 서울특별시의 도시고속화도로이다.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80km/h 이다. 가양대교 북단 시계에서 자유로 (77번 국도)와 상호직통된다. 서울특별시도이지만, 시점이 서울이 아닌 경기도에 있다는 것이 주요 특징이다. 일부 지도에서 마포대교 북단과 천호대교 북단 구간은 46번 국도와 중첩되어 있는 구간으로 표시되어 있다. 2010년에 강변북로의 원효대교에서 양화대교 구간까지 강변북로 하저 터널 공사가 시작하여 2016년에 완료된다고 한다.[1] 1969년 12월 25일 : 양화대교 북단 ~ 한강대교 북단 8km 구간 개통 [2] 1970년 12월 23일 : 한강대교 북단 ~ 용비교 ~ 성동교 (현 용비교 ~ 성동교 구간은 광나룻길 구간의 일부) 9.4km 구간 개통 [3] 1972년 7월 : 용비교 ~ 잠실대교 북단 5km 구간 개통 [4] 1980년 1월 : 행주대교 북단 ~ 성산대교 북단 7.2km 구간 착공 [5] 1981년 6월 26일 : 잠실대교 북단 ~ 천호대교 북단 개통 [6] 1982년 7월 : 성산대교 북단 ~ 행주산성 (행주대교 북단) 구간(현 자유로 구간의 일부) 개통 [7] 1984년 3월 21일 : 양화대교 북단 ~ 한강대교 북단 4km 구간을 "대건로"로 개칭 [8] 1988년 9월 8일 : 강변1로, 강변2로, 강변3로, 강변5로, 대건로를 "강변대로"로 개칭 1988년 12월 : 반포대교 북단 ~ 천호대교 북단 구간 확장공사 착공 [9] 1996년 3월 1일 : 용비교 (현 두무개길 구간의 교량) 재시공에 따른 폐쇄 [10] 1996년 5월 : 잠실대교 ~ 천호대교 북단 3.6km 구간 왕복 8차로 확장공사 착공 [11] 1997년 6월 24일 : 성산대교 ~ 용비교 (두모교) 구간 확장 개통 [12] 1997년 10월 14일 : 강변대로를 "강변북로"로 개칭[13] 2003년 : 천호대교 북단 ~ 구리시 구간 개통 2009년 : 도로명주소 시행에 의해 남양주시 종합운동장로 구간을 강변북로에 편입 동호대교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한 다리. 길이 1,160m, 너비 31.4m, 도로 20.4m, 전철교 11.0m이다. 1980년에 착공하여 1984년에 준공했으며, 4차선도로와 전철교가 함께 있는 병용교량이다. 본래는 금호대교로 불렸으나 한강상에 있는 교량 명칭을 전체적으로 정비하면서 동호대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다리구조는 상부쪽은 하로판형교(下路板桁橋)가 단순보로 되어 있으며, 하부쪽은 독립된 T자형으로 미적인 면과 경제성을 함께 고려했다. 전체적으로는 직선형의 워런(warren)식 트러스(truss)에 완만하게 휘어진 주구(主構) 트러스가 복합된 3경간 연속 트러스교이다. 특히 전철이 주행하는 부분은 트러스교이며 그 양쪽은 도로교이다. 이 대교가 완성되면서 강남지역 개발에 따라 늘어난 교통량과 경부고속도로 및 영동 등지에서 생기는 교통량이 도심으로 직통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성수대교·영동대교·한남대교 등과 강변로, 올림픽 대로 등이 서로 연결되어 도심지로 통하는 교통량을 더욱 원활히 해준다. 또한 교외선의 벽제역과 강남구 양재동을 연결하는 금호대로의 일부분을 차지하며, 서초·강북의 전철과도 연결되어 있다. 옥수동 유래 일제 때 옥정수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고 불리었던 마을을 옥수정이라고 하다가 광복 후에 옥수동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옥수동으로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두뭇개ㆍ무멧개ㆍ두물개 또는 두모주ㆍ두모포라 불렀으며 영조 27년(1751)의 기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두모포계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남서(南署) 두모방(성외) 두모포계의 두모동이 되었다. 일제 점령 초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두모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가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제식 명칭인 옥수정이 되었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실시에 따라 성동구역소 관할 아래 있었다. 1946년 군정법령 제 108호에 의해 경성부가 서울시로 고쳐지고, 서울시헌장 제 1조에 의해 옥수정을 옥수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옥수동 일부가 한남동으로 편입된 바 있다. 저자도 옛날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라서 섬 이름이 유래되었다. 일명 "옥수동 섬"으로 불리운 금호동과 옥수동 남쪽 한강에 있었던 모래섬으로 1970년 초에 이 섬의 흙을 파다 압구정 아파트 건설, 개발에 사용한 관계로 지금은 물속에 잠겼으며 경치가 좋아 선경을 이루던 이 섬은 일찍부터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저자도는 해마다 홍수에 씻겨 겨우 옥수정쪽에 모래섬이 되었고 강 건너 압구정도 빈터만이 남아 전일의 풍경과는 크게 달라져 갔다. 이 모래섬은 여름 장마철이면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주로 여름철에 금호동(무쇠막)에서 나룻배로 건너 다녔고 섬과 압구정 사이에 물길을 샛강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5년 전까지는 강변에서도 수영과 물놀이를 하였으며 60년경에는 주민 아낙네들이 강변에서 빨래터로도 이용하였다. 청계천에서 생활하수등 드러운 물이 흘러내려와 한강물의 반인 강변쪽은 시커멓케 흐르고 있었고 이후 강물 전체가 오염되어 이용할수 없게 되었다. 배밭이 많았던 압구정과 섬사이에는 물이 얕게흘러 샛강이 있었고, 샛강은 물론 강변 및 섬에서 주민들이 여름철이면 수영을 즐겼으며 많은 시민이 무수막에서 나룻배로 옥수동섬으로 건너가 텐트를 치며 여름을 나기도 하고 겨울에는 강물이 얼어 썰매와 스케이트 등을 즐겼다. 서해안이 밀물, 썰물의 영향이 저자도까지 영향이 있었으며 6.25후 한남동 외인주택의 외국인들도 5, 60년대에는 강변쪽을 이용 한강을 오갔으며 이 옥수동 모래섬에서 스상스키와 주로 모터보트를 즐기기도 했다. 1968년 현대건설이 저자도 건너 압구정지구의 매립면허 신청면적은 52,940평이었고 매립목적은 당초건설공사용 각종 콘크리트제품공장설치대지조성 및 강변도로설치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후 실시계획인가 과정에서 택지조성으로 변경되었다. 당초 면허면적보다 7,500평정도가 제외지 쪽으로 더 많이 매립되어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이후 한강하류부의 수리모형 실험결과에 비추어 지장없다는 결론이 나와 1971년 10월 23일 건설부는 원상회복의무 면제조치를 서울시에 지시했고 이후 1973년 3월 29일 준공인가가 나왔는데 총매립면적은 48,072평이고 그중 제방 1,412평과 도로 6,657평은 국가에 귀속하고 잡종지 40,003평은 현대건설에 귀속하게 됨에 따라 오늘의 압구정동지구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였다. 현대건설이 압구정동공유수면 매립과정에서 압구정동과 대안인 성동구 옥수동 사이에는 물위에 떠 있는듯 있어 왔던 저자도(楮子島)의 흙을 파서 매립용 토사로 사용함으로써 하중도(河中島)의 하나가 없어졌는데 이 섬이 사유지였던 관계로 이후 지주와 현대건설과의 사이에 10년에 걸친 송사(訟事)가 있었으며 원래 이 섬은 한강 본류와 중랑천의 물줄기가 만나는 관계로 생겨난 삼각주로서 토사가 퇴적하여 조성된 것인데 1930년경만 해도 동서의 길이 2,000m, 남북 885m나 되는 35,697평에 이르는 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고려 · 조선시대에는 등성이도 있었고 넓은 밭과 집들도 들어선 특유한 섬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섬풍경이 이러한지라 고려말의 한종유 (韓宗愈)는 여기에 별장을 짓고 그 노후를 보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이 섬을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전해져 내려 왔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었으나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한때 몰수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받기도 했다. 그후 1925년 을축년대홍수 때 사리퇴적으로 경작이 불가능해졌고 1937년경에는 사리채취허가신청이 있었는데 지목은 전과 잡종지로 표시되기도 했다. 그 후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섬이 공유수면매립공사에 의해 수몰될 당시의 소유자는 김종호였고, 1973년 9월 30일 김종호가 사망함에 따라 김종호의 어머니인 전경순이 단독상속인이 되었으며, 전경순은 1976년 1월 12일 이 건 매립공사로 인한 손해배상채권 및 부당이득 반환채권을 이순화(李順花)와 진태인(陳泰仁)에게 양도함에 따라 이 건 소송의 원고는 이순화이고 진태인은 당사자 참가인으로 참가했다. 쟁점은 이 섬이 구하천법 제2조의 규정에 의한 국유하천이냐 아니냐였다. 즉 구하천법 제2조에 의해 고시된「하수(河水)가 계속하여 흐르고 있는 토지 및 지형, 초목의 생성의 상황 기타의 상황이 하수가 미치는 부분으로서 매년 1∼2회 이상 상당한 유속으로 흐른 형적을 나타낸 토지 (홍수 기타 이상의 천연현상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그 상황을 나타낸 토지를 제외한다)에 해당되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소송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74년이었다. 원고 이순화는 11억 3천여만원, 당사자 참가인 진태인은 1억 9천만원의 배상을 요구했고, 1976년에는 1920년 9월 16일에 이 건 토지의 소유권등기자인 김기영과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김기형과 김복조가 별도의 당사자로 소송이 제기되는 등 혼선을 빚기도 했다. 재판은 두번씩이나 대법원까지 올라갔다가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되는 등 진통 끝에 원고패소로 끝났는데 제1심인 서울지방법원에서는 각 연도 최고홍수위를 제척하고 볼 때 이 섬의 동서등고선 6.20 내지 7m 이상 지역에 대하여는 매년 1 · 2회 상당한 유속으로 흐른 형적을 나타낸 구역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 원고에게는 9억 3,503만 9천원 및 동금원에 대하여 1973년 3월 29일부터 완제에 이르기까지 연 5푼의 지연손해금을, 당사자 참가인에게는 금 1억 9,728만 3,800원 및 동금원에 대하여 1973년 3월 29일부터 완제에 이르기까지 연 5푼의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가집행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 재판결과에 대하여 원 · 피고 쌍방은 불복하고 항소, 고등법원의 심리를 받게 되었는데 1978년 8월, 서울고법은「국가소유의 한강하천구역으로 봐야 한다」고 원고패소판결을 내렸고 원고는 이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 후 2년만인 1980년 8월 26일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는데, 대법원은 고법이「홍수위 기타 이상의 천연현상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나타난 수위까지도 포함한 수위를 기초로 하여 수위발생빈도를 분석함은 적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 고법으로 파기 환송하였고, 이에 따라 또 2년후인 1982년 6월, 서울고법은 4억원을 배상하라고 원고측에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청구금 모두를 인정받은 당사자 참가자 진태인(陳泰仁)을 제외한 원피고측이 대법원에 상고허가신청을 낸 결과 피고측의 신청만 받아들이고 서울고법에 파기 환송했는데, 파기환송 이유는 저자도 바로 상류에 있는 뚝도수위표의 기록을 증거로 채택, 저자도 전역이 하천구역에 해당함에도 고법이 하천구역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였거나 이유불비의 위법이 있다고 판시하고 원고의 청구는 기각하고 피고의 상고만 받아들인 것이다. 최종심인 서울고법의 판결은 1984년 3월 22일 있었는데 역시 저자도 전구역을 하천구역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 원판결이 실효됨에 따라 가집행한 금원을 환수하게 되었다. (일부 서울시자료인용)